역사전쟁소설 // 남해 // 1권 copyright (C) 2001 김경진 외 (전쟁소설 데프콘 1, 2, 3부, 동해, 남북, 판타지 하늘길잡이 공동저자) 안녕하세요? 김경진입니다. 남해(임시 제목)는 임진왜란 중의 명량해 전만을 다룬 역사전쟁소설로서, 현대 또는 근미래 해전을 소재로 한 '동 해' 후속편과는 전혀 다릅니다. 전에 말씀드린 데프콘 3부 다음 글, 역사 소설의 탈을 쓴 전쟁소설이 바로 이 남해입니다. 결과를 누구나 알고 있는 명량해전, 틈만 나면 만들어지고 예외 없이 흥행에 실패하는 충무공 영화, TV에서 지긋지긋하게 떠들어대는 이순신 장군의 충효사상. 참 어렵습니다. 재미있게 쓰기가 쉽지 않습니다. 연재는 디펜스 코리아와 하이텔 군사동호회 두 군데에서 하겠습니다. 절대로 다른 곳에 퍼가지 마십시오. (제발요...--;; 누구든 그냥 게시판에 서 읽고 말면 좋겠습니다. 절대 여러분께 책 사달라고 부탁 안합니다. 대 신 퍼가지 마십시오.) 디코에는 처음으로 연재합니다. 의견 있으시면 리플 많이 달아주시고, 재촉은 하지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처음에는 천천히 올리다가 나중에는 속도를 빨리 하겠습니다. 가끔 군가/영화음악 게시판에 적당한 테마음악 을 올리면서 스토리를 전개해보겠습니다. 저희 창작팀이 대삽, 소설란, 오발탄 게시판 담당자로 있지 않으므로 하이텔 군사동에도 안심하고 올 립니다. 의견 있으시면 오발탄 게시판을 활용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염려스러운 점은, 걸핏하면 제가 독자들과 싸운다는 겁니다...-_-;;; 저 는 독자들이 제 추종자가 되길 바라지 않는 대신에 제가 독자들의 종이 되는 것도 거절합니다. 그러니 이런 제 견해에 반대하는 분은 아예 처음 부터 읽지 않으시는 편이 피차 만수무강과 세계평화에 지장이 없을 줄로 사료됩니다. --;; 특히 이 점 유의해주시고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연 재가 무사히 마쳐질 수 있도록 협조해 주시지 않으면 큰일납니다.(제가 잘 삐치거든요....--;;;) 서술된 내용과 다른 반대의견은 열렬히 환영하며, 다수에 의해 소수의견이 억압받지 않아야 하며, 다만 언제든 게시판 예 의를 지켜주시기 바랍니다. 고증 부분에 대해 미리 말씀드리자면 원균이나 선조 등의 인물과 공과 에 대한 판단, 판옥선과 거북선에 대한 설정 등은 소설을 쓰는 사람이 어떤 사료를 선택했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 다(사실은 많은 자료를 섭렵하면 어느 정도 안개가 걷힌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남해를 쓰기 위해 비록 계룡산에서 10년 공부를 하지는 않았 지만 자그마치 2세기 동안(1999.~현재) 신재호(일명 김X륜)님이 맡긴 각 종 서적을 탐독했으며(--;;;), 일본쪽 등장인물이 나온 부분은 일본 전국 시대사, 특히 일본수군에 정통한 디코 아이디 영원님이 대부분 쓰실 것 입니다.(여러분의 딴지걸기에 대해 자신이 있다는 뜻입니다. ^^;)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제는 어디서건 터질 것입니다. 예. 압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역사적 사실에 대한 고증과 색다른 견해를 제시해주 시는 것도 좋지만 내용전개 자체에 대해서 더 많은 관심과 조언을 부탁 드리고자 합니다.(판타지 쓰는 동안은 영어와 한자어를 극도로 자제했는 데, 이번에는 역사소설이라 그런지 한자어가 꽤 많이 나오는군요. 골치 아픕니다..--;;) 예를 들어 특정 등장인물이 어떨 때는 어떻게 행동하라 든지, 역할이나 캐릭터, 설명을 강조 또는 축소하라든지 등의 의견을 부 탁합니다. 제가 독자여러분께 많은 것을 강요하는 편입니다. 무척 죄송하 게 생각합니다만, 전에 다른 것을 연재할 때도 그랬지만 여러분이 남해 라는 소설의 창작에 참가하시면 시간 때우기에는 그다지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재미있게 쓰려고 제가 열심히 노력하겠다는 뜻입니다. 2월말까지 끝낼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대략 2권 분량이며, 앞부분 일부만 완성된 상태입니다. 겁도 없이 연재 시작하겠습니다. 시놉시스(공저자와 합의 안됨) - 제목 : 남해(가제) - 남해를 쓰는 의도 : 임진왜란의 여러 전투 중, 그리고 세계해전사 중 전술적, 전략적으로 매우 특이한 위치를 차지하는 명량해전을 자세히 고증하고 소설로 묘사함으로써 그 사건이 얼마나 사실과 동떨어지게 축 소 및 왜곡되었는지, 그리고 일반인이 알고 있는 상식보다 얼마나 얼토 당토않게 불리한 상황이었는지를 밝히고, 왜군도 똑같은 사람으로서 심 장도 있고 머리도 있으며 또한 대마왕의 부하들이 아님을 밝히는데 초점 을 둠으로써 철천지원수로만 치부되어 온 가까운 외국 일본인에 대한 적 대감을 해소하는 동시에(역사왜곡은 별개 문제로 치고) 일본과 일본인, 일본문화를 알림으로써 학생들에게 21세기 국가간의 무한경쟁에 대비케 하고, 여러 등장인물들의 처절한 사투를 통해 인간 생명의 존엄성을 다 시 한번 강조하고, 부정부패자와 비겁자, 과대망상증 환자가 얼마나 많은 무고한 사람들의 생명을 부질없이 빼앗는지를 봄으로써 침략전쟁과 패배 주의를 경계토록 함. (무슨 계도지 같군요...-_-;; 그저 이런 주제로 남해 를 쓴다는 뜻입니다.) - 등장인물 : 해전에 참가한 조선 및 일본 수군 무장 및 수졸들. 각종 기록에서 명량해전에 참가한 것으로 확인된 실제 인물을 최대한 활용하 되 모자라는 인물은 그 기록에서 명량해전 앞뒤에 언급된 인물들을 부차 적으로 활용. 그래도 모자라거나 다른 용도로 필요하면 창작. 세 가지 공 히 최대한 캐릭터성을 살리되 비슷비슷해지는 일이 없도록 특별히 유의. - 줄거리 : 명량해전 당일 새벽부터 밤까지 처절한 전투. 에필로그로 명량해전 직후 주제와 관련되어 발생한 특이한 사건들을 간략히 서술 1. 새벽 (1) = 탐망선, 탐망군관 임중형 작은 배가 검은 물결을 따라 천천히 흘러갔다. 돛을 접은 이 작은 탐 망선에는 조선수군 여섯 명이 몸을 바짝 낮추고 있었다. 왜선 수백 척이 정박중인 어란포 앞바다에서 눈길을 떼지 못한 수군들은 몸이 뻣뻣이 굳 었다. "버글버글하요. 근디 게우 이백 척이라고라? 그 놈들 눈깔이 삐었는 갑다." 숨막히는 침묵을 깨고 고물에서 기가 차지도 않는다는 듯이 누군가 내 뱉었다. 탐망군관 임중형이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부 들부들 떨고 있는 늙은 키잡이 넘어, 그리고 거세게 흐르는 검은 바다 건너, 희끄므레한 진도 쪽으로 눈길을 보냈다. 덕신산에 대부분 가린 첨찰산과 죽제산 봉우리가 서해 바다로 지고 있 을 보름달빛을 배경으로 검게 우뚝 서 있었다. 일본 척후선들을 피해 빙 빙 돌아오느라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렸다. 멀리 동쪽 바다 수평선에 걸친 먹구름이 조금씩 불그스름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없어." 임중형은 다시 눈길을 어란포로 돌렸다. 어둠 속에 잠긴 어란포 앞바 다에는 일본수군의 척후선들인지 갑판에 횃불을 밝힌 작은 배들이 천천 히 움직이고 있었다. 다른 왜선에 비해 작다고는 해도 노가 한쪽에만 열 개나 달리고 갑판에는 창칼을 든 왜병들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주변을 살 피는 전투선이었다. 전투능력이 거의 없는 조선수군의 사후선, 탐망선과 는 근본이 전혀 달랐다. "야습을 경계하는 건가? 알 수 없군. 낮도깨비 같은 무식한 왜 수군 놈들이 저렇게 절도 있게 행동하다니. 이전하곤 영판 다른데, 도대체 어 떤 놈들인가?" 임중형이 갸웃거리자 격군들과 함께 엎드려 있던 준사가 딱딱 끊어서 대답했다. "배 크기가 작고 모양으로 볼 때, 포구 바로 앞에 있는 것들은, 무라카 미村上 해적의 고바야입니다. 아! 구루지마 해적입니다. 붉은 깃발 아래 에 카미라는 글자가 있지요?" "어디? 그, 그래. 상上 자 말인가?." "맞습니다. 산쥬, 산쥬이찌, 산쥬니. 예! 구루지마 해적은 다 합해서 32 척입니다. 저놈들은 대개 여덟 척씩 움직입니다." "해적이라니. 그럼 저놈들은 왜 땅에서도 원래부터 수군이었단 말이 지? 그래. 그럼 대장은 누군가?" 항복해온 왜병 준사가 조선말을 배우려는 노력 이상으로 임중형은 준 사를 통해 일본수군을 파악하려고 노력했다. 일본에서는 해적과 수군이 거의 같은 뜻이라는 것도 준사에게 들었다. 그러나 이번에 준사의 입에 서 쏟아져 나온 말은 이해할 수 없는 것들 투성이였다. "구루지마 노가미 이름은 그 고장 이름과 같은 구루지마 도노입니다. 분로쿠 1년에 미치유키가 조선수군에 패해 죽었으니 동생 미치후사가 성 주이며 대장이 됐을 겁니다." 임중형은 뭐가 성이고 이름이고 뭐가 관직이며 지방 이름인지 마구 헷 갈리기 시작했다. 세필과 종이를 꺼낸 임중형은 준사에게 다시 물어보기 뭣해 구루지마 도노라고 들은 왜 수군장 이름을 간단히 마돈오馬頓吾로 적었다. 그리고 임중형은 구루지마 수군의 포진과 배 숫자를 크기별로 나눠 적 었다. 그러나 임중형은 어떤 배가 대장선인지 쉽게 파악할 수 없었다. 왜 수군함대를 지휘하는 대장선을 파악하는 것은 별망군의 중요한 임무였 다. 그것은 초전에 대장선을 집중 공략하는 조선수군의 전술과도 깊은 연관이 있었다. 일전에 준사는 작대기에 둥근 공이나 우산이 매달려 있거나 술이 많이 달린 천으로 만든 특이한 깃발, 즉 마인馬印이라는 것이 있는 배가 대장 선인 어립선御立船이라 했다. 그런데 왜 수군함대에는 깃발이 종류별로 하도 많아 희미한 달빛과 횃불 빛만으로는 대장선을 찾기가 난감했다. 밤눈이 밝은 준사도 못 찾은 모양이었다. 임중형이 갑자기 생각난다는 듯이 물었다. "마다시라는 자가 왜놈 수군장 가운데서 가장 용감하다고 소문이 났던 데. 혹시 저기 있으면 어디 있는지 찾아주게." "아! 구루지마 도노가 바로 그 마다시입니다. 그렇습니다!" 준사가 고개를 연신 끄덕거리자 임중형은 더더욱 곤혹스러웠다. 마돈 오 옆에 마다시馬多時라고 작은 글씨를 덧붙였다. 임중형이 다시 고개를 들어 왜선들의 동태를 살폈다. 왜 척후선들 뒤 에는 수많은 배들이 있었지만 어란포 앞의 작은 섬인 어불도에 가려 다 보이지 않았다. 어느덧 배는 남동쪽으로 계속 흘러 어란포에 상당히 가 깝게 다가가고 있었다. 고개를 내밀어 살피는 임중형의 소매 깃을 잡고 키잡이가 조바심을 냈다. "군관 나으리! 돌아갑시다. 인자 우수영으로 돌아가도 안 되겄소!" "조금만 더 들어가세. 조금만 더 가까이 가면 어란포가 다 보이겠네." 임중형이 낮게, 그러나 강하게 명령했다. 어란포까지는 바닷길로 사오 리 정도 거리였지만 워낙 고요한 새벽녘이라 말소리가 왜군에게 들릴까 겁이 날 정도였다. "뭐라고라? 더 들어가라고라?" 느닷없는 큰 소리에 격군들이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발끈한 늙 은 키잡이는 목소리를 낮추라는 임중형의 손짓에도 아랑곳 않고 떠들어 댔다. "그러다가 왜놈들한테 잡히서 디진 놈들이 요 며칠 새 을마나 되는 줄 아요? 싸움도 하기 전에 엄한 탐망꾼만 다 직이뿔겄소! 글고, 아무리 이 통제사 어른이래도 저놈들 상대로 싸움이나 되겄소? 쩌거 쫌 보씨요, 잉!" 키잡이가 가리킨 곳으로 임중형이 고개를 돌렸다. 그 사이에 날이 더 밝아져 있었다. 남서쪽으로 트인 어란포 앞바다 전체가 희끗희끗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눈앞에 펼쳐진 놀라운 광경에 격군들이 일제히 비명 을 질렀다. 아까는 어란포와 어불도 사이로만 왜선들이 보이더니, 이제는 어불도 오른쪽 바다에도 왜선들이 정박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어란포 앞바다 는 서쪽 끝의 어란포에서 시작해 남쪽 끝인 갈두까지 바다를 빙 둘러싸 고 기다란 해안선이 이어졌다. 그리고 파도가 잔잔한 그 안쪽 바다에 왜 선이 해안을 따라 빼곡이 늘어서 있었다. 저 멀리 양도 근처에도 불빛이 어른거리는 걸로 봐서 갈두까지 왜선들이 정박해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이곳 해안선 길이가 거의 30리니 왜군의 배는 얼추 잡아도 500척은 넘었 다. "저 넓은 바다하고 갯벌이 왜선으로 다 채워졌어. 음!" 임중형은 8월말에 땅끝마을이라고도 불리는 갈두에서 조선 수군함대가 잠시 머물러 아침을 지어먹은 기억을 떠올렸다. 갈두는 남쪽으로 보길도 와 추자도, 동쪽에는 완도, 서쪽으로는 진도가 보이는 해남현의 남쪽 끝 이었다. 다도해라지만 이곳에서는 남서쪽으로 펼쳐진 널따란 수평선을 볼 수 있다. 그래서 파도도 센 편이었다. 갈두가 괘도포 또는 도괘포刀掛浦라는 한자로 달리 기록된 것은 갈이 칼의 옛말이고 괘는 걸 괘掛 자로 갈과 발음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현대 우리말로 하면 갈두 또는 도괘포는 칼머리, 즉 뾰족한 해안이나 포구 정 도이다. 그러나 사실은 바로 뒤에 낮지만 경사가 급한 갈산이 있기 때문 에 붙여진 이름이었다. "저쪽 배들은 깃발이 다른데, 장수는 누군가?" 임중형이 준사의 어깨를 치며 가리킨 곳에는 구루지마 수군의 것보다 훨씬 큰배들이 정박하고 있었다. 그 배들에 걸린 무수한 깃발 가운데 공 통된 것, 즉 그 함대의 군기는 흰 바탕에 동그란 원이 다섯 개씩이었다. "음. 동그라미가 셋이 아닌 다섯이라니. 어쨌든 도도 다카도라가 틀림 없습니다. 등당좌도수라면 아시겠군요." "좌도수? 잘 알지. 옥포에서 패한 놈이야. 그런데 구귀라는 수로대장이 여기에도 왔나?" 임중형은 잠시 뿌듯했다. 임진년에 조선수군이 연달아 대승을 올린 상 대는 저런 왜 수군함대였다. 일본수군은 조선수군의 존재를 무시한 채 배를 대놓고 포구마을을 노략질하느라 경황이 없다가 바다에서 들이치는 조선수군을 맞아 제대로 된 싸움도 해보지 못하고 거의 전멸 당했다. 바람처럼 느닷없이 나타나 불처럼 공격하며 총통과 화살을 우레처럼 쏟아 부어 적 함대를 전멸시키던 그 때가 가장 신이 났었다. 임중형은 조선수군이 패배시킨 일본 무장들 이름을 한참 지난 뒤에 알았고, 나중 에도 그들을 우습게 여겼다. 하지만 그들은 일본에서는 알아주는 용맹한 무장들이었고, 칠천량에서 간신히 도망칠 때는 그 왜군들이 마치 귀신처 럼 무서웠다. "동그라미 일곱 개를 그린 군기는 없습니다. 아마 구키 수군은 부산포 를 지키고 있는 모양입니다. 그렇다면 일본수군 대장은 바로 좌도수 저 자일 겁니다." 어란포를 가득 메운 왜선들을 한참 살피던 준사가 도도 다카도라 함대 를 가리키며 대답했다. 당시 일본수군의 선임 무장이라 할 수 있는 구키 요시다카九鬼嘉隆는 대마도와 부산포간 항로의 안전을 책임지고 있었으 니 준사의 판단은 옳았다. "왜적이라고 하게!" "예, 예. 왜적 두목은 좌도수입니다." 준사가 임중형의 싸늘한 눈길을 피하며 고개를 숙였다. 임중형이 다시 슬쩍 어란포 방향을 살피더니 키잡이를 불렀다. "자, 타공! 더 가까이 가 보세. 저기서는 여기가 안 보일테니 걱정 말 고." "아따! 안 된당께요. 저그 왜놈 배들이 왔다리 갔다리 항 거 안 보이 요? 인자 날도 새부렀소. 지발 살리주씨요, 잉?" 키잡이 말처럼 도도 다카도라의 본진에서도 작은 배들이 나와 주변을 경비하고 있었다. 요 며칠간 계속 조선수군이 야습을 극도로 경계한 것 처럼 일본수군도 야습을 겁내는지 경비는 철저한 편이었다. 엄중히 경계 하는 모습을 본 임중형은 오히려 용기가 생겼다. "우린 수군이야! 특히 우리는 적세를 탐지해야 할 탐망군이고. 왜놈들 은 아무리 수가 많아도 우리 조선수군을 상대할 수 없음을 자네도 잘 알 지 않는가?" "그건 옛날 이야기지요. 칠천량에서 버얼써 벌써 끝장나부른 이야그 아니요?" "어허! 타공, 이노오옴!" 임중형이 낮게 으르렁거렸다. 칠천량 해전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지난 두 달 간 조선수군에게는 절대 금기였다. 싸움 결과도 창피했지만 그 싸 움 과정은 조선수군에 적을 둔 사람이라면 남들 앞에서 얼굴을 들 수 없 을 정도로 부끄러운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에 겪은 공포가 그대로 남아 있는 데다가 지금은 훨씬 적은 수로 바로 그 적과 맞서야 한다는 현실 때문에 두려움을 감출 수 없었다. 늙은 타공은 키를 움켜잡은 손을 심하게 떨었다. 지금도 키를 조금씩 오른쪽으로 돌려서 배는 천천히 어란포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돌아가자 는 말만 떨어지면 잽싸게 키를 돌려 진도 쪽으로 달아날 태세였다. 그러 나 탐망선을 지휘하는 군관 임중형은 도대체 겁이 없는 것 같은 모습이 었다. 키잡이가 다시 한번 대들었다. "우리 다 디저불믄 군관 나으리 혼자 노 저 갖고 갈라요? 살아서 통제 사 어른께 보고해야 되꺼 아니요. 육지에도 탐후꾼들이 있응께 너무 무 리하지 말더라고요. 잉?" "그놈들이 제대로 일을 못하니까 우리가 나선 게 아닌가?" 참지 못한 임중형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키잡이가 움츠러들었다. 지상에서 활동하는 자는 척후군관 임준영 말고도 많았다. 이순, 박담동 같은 정탐인들은 물론 전라좌수영 소속 노비 태귀생, 박수환 같은 날랜 자들도 있었다. 다들 임진년부터 이순신이 적의 동태를 살피기 위해 적 지로 내보내거나 개인적 심부름을 맡긴 심복들이었다. 그러나 왜군들이 어란포에 집결한 다음부터 지상에서 정찰하기는 쉽지 않았다. 열을 내보내면 서넛은 돌아오지 못했고, 나머지도 제대로 된 정 보를 갖고 온 적이 별로 없었다. 그리고 척후장을 맡은 영등포만호 조계 종의 판옥선은 바다에서 적을 찾는 척후 임무에 투입되지 못하고 사실상 조선수군 정박지의 외곽 경비선이나 다름없었다. 그럼에도 계속되는 일 본수군의 야습을 막는데 판옥선 한 척으로도 큰 역할을 하고 있었다. 최근 한 달 사이에 소규모 수전이 서너 번 있었고, 그때마다 통제사의 진두 지휘로 간신히 왜선들을 몰아낼 수 있었다. 소규모라고는 하지만 통제사가 지휘하는 조선수군 전선 전체가 동원된 총력전이었고, 겁에 질 린 수군들은 싸우려는 의지가 아예 없었다. 경상우수사 배설은 보름 전 에 이미 도망갔다. 회령포부터 어란포까지 전라도 서부 남해안 일대에서는 매일 같이 조 총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이것들이 다 본격적인 전투 직전의 척후전이 라는 사실은 조선수군이나 일본수군 누구나 알고 있었다. "그리고 타공! 너무 걱정 말게. 나한테 활이 있잖은가? 저놈들 조총이 닿지도 않는 거리에서 쏠 수 있어." 임중형이 가죽활집에서 작은 활을 꺼내 보였다. 쇠뿔을 이어 붙인 싸 구려 향각궁이 아니라 물소뿔로 만든 정통 각궁이었다. 그러나 키잡이는 통제사가 직접 임중형에게 하사했다는 검은색 활을 싸늘하게 내려보며 코방귀를 뀌었다. "새벽이슬 머금은 활이 무슨 소용이 있다요? 짠바람 묵고 풀어진 활줄 백날 땡겨 보씨요. 화살이 제대로 나가나." "어허! 이 사람이, 통상 대감을 우습게 보나?" 임중형이 노인을 쏘아보았다. 활을 우습게 본다는 것은 그 활을 준 통 제사를 우습게 보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논리였다. 그러자 기가 질린 늙 은 키잡이는 당장 꼬리를 말았다. 더 이상 버텼다간 치도곤을 칠 것이다. 군관 임중형에게서 받는 처벌은 별로 두렵지 않았으나 만약 임중형이 통 제사에게 일러바치기라도 하는 날이면 키잡이는 그 날로 죽은목숨이었 다. 겁도 없이 첨사, 부사에게 곤장을 치는 수사가 이 통제사 말고 조선 땅 어디에 있단 말인가? 조선수군들은 잔인한 왜군보다 통제사를 훨씬 더 무서워했다. 평소에 는 부하 수졸들을 자상하게 살피지만 전쟁과 관련된 일에서는 추호도 용 서함이 없었다. 조선수군의 본영인 통제영이 한산도에 있을 때도 효수 당한 머리가 이곳 저곳에 걸려 있고 동헌에서는 곤장 치는 소리와 비명 이 끊일 날이 없었다. 이 통제사의 명에 의해 참수 당한 조선수군이 왜 군과 싸우다 죽은 숫자보다 더 많을 거라는 소문도 돌았다. 사실 전투에 서 죽은 조선수군은 몇 안되니 그 말은 맞을지도 몰랐다. 하긴 그랬으니 조선수군이 왜군을 상대로 제대로 싸울 수 있었을 것이 다. 짧은 사이에 그런 생각을 한 키잡이가 입술을 깨물었다. "알겄소, 알겄어. 가믄 되꺼 아니요." 키잡이가 나무로 만든 커다란 키를 중간에 놓고 고정막대를 걸었다. 그리고는 아예 뱃전에 드러누워 버렸다. 차가운 바람을 덜 맞게 되니 조 금이라도 훈훈해진 것 같았다. "씨불! 이 통제사 밑에 군관 아니랄까봐 더럽게 고지식하네. 인자 나는 모르겄다!" "뭐라고?" 임중형이 쏘아보자 키잡이는 잠시 일어났다가 다시 드러누웠다. "아따~ 나가 뭐라 그랬소? 조용히 있는 사람 괜히 윽박질르고 그랬쌌 소." - 파앙! 파팡! "뭐, 뭐야?" 엄청난 소리에 놀라 격군들이 급히 엎드렸다. 그러나 탐망선이 왜선에 게 들킨 건 아니고, 육지에서 울린 총소리였다. 고요한 새벽하늘에 울린 총성은 바다를 넘어 여기까지 메아리쳤다. 어느 조선수군 탐후인이 복병 한 왜병에게 걸린 것이 틀림없었다. "쳇! 어느 놈이 또 경쳐부렀구만!" 격군 하나가 씁쓸히 내뱉었다. 몇 년 동안 왜 수군을 상대로 함께 싸 운 거의 1만에 달하던 많은 동료들, 그러나 이제는 얼마 남지도 않았다. 한산도에서 돌림병에 걸려 허망하게 죽어갔고, 칠천량 해전에서는 제대 로 싸워보지도 못한 채 흩어져 어느 땅 어느 구석에서 죽었는지 알 수 없었다. 격군들은 수군 동료에 대한 안타까움보다는 적이 아직 이쪽을 눈치채지 못했다는 안도감에 한숨 지었다. "동그라미 두 개가 연결된 게 아래위에 각기 한 개씩 그려진 군기라. 응? 저건 한산도에서 패전한 놈들 아닌가?" "맞습니다. 와키자카 야스하루, 스모토 성 성주를 하는 유명한 무장입 니다. 아! 조선말로 협판중무, 또는 협판안치라고 합니다. 중무는 중무소 보라는 벼슬 이름이라고 저번에 말씀드렸죠?" 작은 세필로 적어나가는 임중형 옆에서 준사가 거들었다. 손을 호호 부는 준사 입에서 하얀 입김이 흘러나왔다. 벌써 겨울이 다가오는지 9월 중순인데도 무지막지하게 추웠다. "다들 우리한테 한번씩 깨진 놈들이군. 몇 년 사이에 저렇게 많은 배 를 갖추다니. 대단한 놈들이야." 임중형은 괜히 큰소리를 하고 연달아 헛기침을 했다. 그러나 뱃전에서 꾸벅꾸벅 조는 격군들은 깨어날 낌새가 보이지 않았다. 준사는 어느새 코를 골며 세상 모르고 자는 격군들을 보며 씩 웃었다. 날은 점점 밝아오고 있었다. 이제 어란포 앞바다에 가득한 왜선들이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임중형이 작은 붓으로 쓰는 글씨를 준사가 알아볼 정도였다. "다스린다는 치입니다." 준사가 종이를 힐끗 보더니 고쳐주었다. 잠시 준사를 물끄러미 쳐다본 임중형이 둘 치置 자를 지우고 다스릴 치治 자를 써넣었다. "그래. 자넨 왜놈치고는 한자를 많이 알고 있군." 준사는 임중형이 일본과 일본인에 대해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사실에 는 전혀 해당되지 않았다. 왜놈 추장 평수길 뿐만 아니라 여느 벼슬아치 나 영주, 중들도 한자를 제대로 아는 놈이 드물다고 들었다. 장수들은 더 심했다. 그런데 왜놈 졸개에 불과한 준사는 뜻밖에 한자를 많이 알았다. 조총을 쏠 줄 아는 왜놈은 한자를 좀 안다고는 하지만, 여느 항왜들과 달리 준사는 조선말 발음도 비교적 정확했다. 역사전쟁소설 // 남해 // 1권 copyright (C) 2001 김경진 외 (전쟁소설 데프콘 1, 2, 3부, 동해, 남북, 판타지 하늘길잡이 공동저자) 1. 새벽 (2) = 탐망선, 탐망군관 임중형 "저쪽은 가토 요시아키 수군이고. 아? 저기는 하치스카 이에마사 군입 니다!" 준사가 놀라자 임중형이 왜선으로 가득 찬 바다 남쪽, 갈두 쪽을 살폈 다. 그곳에는 다른 함대보다 작은 배들이 몰려 있는데, 무수한 전투를 치 른 임중형이 얼핏 판단하기에 그 함대는 숫자만 많지 전혀 위협적인 세 력으로 보이지 않았다. 작은 왜선으로 크고 높은 판옥선을 공격하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다른 배들보다 압도적으로 큰 층루선 세 척이 있을 뿐이고, 만卍 자를 단 커다란 깃발이 갑판에 휘날리고 있었다. "자네, 왜 그러나?" "하치스카 군은 수군이 아니라 육군입니다! 배도 대부분 고깃배나 니 부네荷船, 그러니까 짐배나 다름없습니다." "사국 지방의 큰 영주라는 아파수가정 말인가? 그럼..." 준사의 말을 증명하듯 갈두 쪽에서 높은 말울음 소리가 작게 들려왔 다. 임중형이 서둘러 일본군 장수 명단을 품에서 꺼냈다. 항왜들로부터 수집한 자료를 기록한 종이인데 신분이 낮은 졸병들 말을 종합해 만들어 틀린 부분이 많지만 그런대로 요긴하게 쓰이고 있었다. 임중형은 종이를 펼쳐 한자와 한글로 간단히 기록된 글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阿波守家政 姓名 蜂須嘉家政 或 하치스카 이에마사 官職 阿波守 兼 四 國 大名 或 다이묘 則 大領主云 壬辰年 兵勢 七千二百也 옆에서 실눈을 뜨고 종이를 본 준사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왜놈들 육군이 뱃길을 통해 북상하겠다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전투 중에도 언제든 배에서 내릴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음! 우린 안중에도 없다는 소린가?" 임중형은 그저께 척후군관 임준영을 통해 전달된 김중걸이라는 자의 말을 떠올렸다. 왜군에게 사로잡혔다가 도망쳐 온 김중걸은 왜 수군들이 조선수군을 전멸시킨 후 한강으로 직접 올라가겠다는 말을 들었다고 했 다. 그래서 통제사는 피난민들을 북쪽으로 올려보냈다. 그러나 왜 육군이 수전에 어떻게든 참전한다면 조선수군으로서는 골치 아픈 일이 많았다. 오랜 전란 기간 중 조선수군은 일본수군보다는 육군에게 입은 피해가 더 컸다. 작은 배를 타고 조총을 쏘며 달려드는 수군함대라면 그 수가 아무리 많아도 총통을 쏘고 불화살을 쏘아 모조리 불태워버리면 끝이었 다. 그러나 육군 수송함대라면 골치 아파진다. 해안에 배를 대놓고 산에서 조선수군을 향해 대포를 쏘아댈 것이다. 조선수군 입장에서는 겨우 배 몇 척만 불태울 수 있을 뿐이고, 그것도 산에서 쏟아지는 총탄을 무릅써 야 했다. 그리고 칠천량해전에서 조선수군이 큰 피해를 입은 것도 춘원 포에 상륙한 다음이었다. 조선수군은 땅에서는 도저히 일본군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군관 나으리! 들켰습니다. 저놈들이 이쪽을 봤어요!" 키잡이가 벌떡 일어나 키를 돌리며 외쳤다. 임중형이 왜선들을 보니 왜선에 일제히 횃불이 켜지고 뱃전에는 사람들이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뭐라 외치는 소리도 들렸다. 임중형은 가슴이 철렁할 정도로 놀랐지만 왜군들 움직임이 좀 이상하다고 느꼈다. "아냐! 이봐, 타공! 들킨 게 아니야. 왜놈들이 잠에서 깬 것 뿐이야!" 임중형이 타공을 말렸다. 그러나 그때는 새벽 추위를 버티며 꾸벅꾸벅 졸던 격군들이 퉁기듯 일어나 급히 노를 젓기 시작한 다음이었다. 임중 형이 다시 뭐라 하기도 전에 공포에 눈이 뒤집힌 키잡이가 돛을 올렸다. 반으로 쪼갠 대나무를 이어 붙인 돛이 바람을 받아 부풀어오르면서 조용 히 남동쪽으로 흐르던 배가 반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 바보들! 그만 둬!" 임중형이 이를 악물었다. 아무리 날이 조금 밝아졌더라도 10리 밖에서 조용히 흘러가는 작은 탐망선을 발견하기란 어려웠다. 그런데 왜선에 횃 불이 켜진 것만으로도 깜짝 놀란 격군들이 황망히 돛을 올리는 바람에 왜군들에게 진짜로 들키고 말았다. 왜선 갑판 위에서 사람들이 이쪽을 향해 뭐라 외치는 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어느새 함대 외곽을 돌던 왜선 몇 척이 이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이러언! 어서 가자!" 이젠 어쩔 수 없었다. 이제는 탐망선이 넓은 바다에 확연히 드러나고 말았다. 여명을 가득 받은 노란 대나무 돛은 파란 바다에서 너무나 눈에 잘 띄었다. 타공이 돛 한 개를 더 올리며 돛줄 여러 개를 한 손에 감고 다른 손으 로는 키를 잡았다. 한선은 크든 작든 대부분 돛 두 개를 쓴다. 당시 돛이 한 개인 일본 배에 비해 역풍에서도 사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격군들이 죽을힘을 다해 노를 저었다. 노는 고물에 치우쳐 양쪽에 하 나씩 있고, 노마다 서로 마주보며 두 명씩 달라붙었다. 임중형은 배의 무 게중심을 잡기 위해 조금 앞으로 움직였다. 그곳에는 둥근 화살통이 놓 여있었다. 임중형이 화살이 가득 담긴 화살통에서 몇 개를 꺼내 동개에 꽂기 시 작했다. 장전 2개에 편전 6개를 골랐다. 굵고 기다란 장전은 보기만 해도 든든했다. 가늘고 짧은 편전은 애기살이라는 이름과 달리 차갑고 날카로 운 기운을 내뿜었다. 임중형은 동개를 어깨에 맨 다음 허리 뒤로 돌렸다. 그리고 활줄을 힘 주어 홱홱 당겨보았다. 썩 좋은 상태는 아니지만 그런대로 괜찮은 편이 었다. 수군이 각궁을 간수하기란 쉽지 않았다. 매일 밤 활을 풀어 보관했다 가 출동하기 전에 숯불을 피워놓고 이리 저리 구부려 활을 다시 얹기는 하지만, 매일같이 바다에 있다보니 짠바람이 들어 활은 늘어지기 일쑤였 다. "어떻게 된 거냐? 어서 저어라!" 뒤를 돌아본 임중형이 놀라 소리 질렀다. 왜 경비선들이 점점 다가오 고 있었다. 나름대로 빠르다고 자부하는 탐망선이었지만 세 방향에서 몰 려드는 왜선들을 뿌리치고 도망가기란 쉽지 않을 것 같았다. 키잡이가 돛을 잡아당기면서 비명을 질렀다. "저것들 배가 너무 빨르당께요!" "바람 탓이야! 순풍에는 왜선이 더 빨라. 어서 저어!" 임중형이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바람은 이때 하필 북서쪽으로 불고 있었다. 덕택에 전라우수영에 더 빨리 갈 수는 있겠지만 임중형은 과연 여기서 살아남아 우수영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을지 의심스러웠다. 돛이 한 개이며 선형이 뾰족한 왜선은 순풍을 받으면 조선 배보다 더 빨랐다. 새벽안개가 바람 따라 슬며시 산으로 움직였다. 탐망선과 일본 경비선 다섯 척은 빠른 속도로 울돌목 쪽으로 달려갔다. 배 밑으로 푸른 파도가 하얗게 갈라졌다. 어느덧 수평선 구름 위로 황금빛 해가 얼굴을 내밀기 시작했다. "어여차! 어여차!" 바닷물에 거의 수직으로 꽂힌 노가 끝없이 찌그덕거렸다. 격군들은 제 한몸 살기 위해서라도 죽어라 노를 저었다. 격군들이 외치는 구령이 노 젓는 움직임을 따라가기 벅찰 정도였다. 임중형은 이 정도면 아슬아슬하게 척후장의 판옥선이 있는 곳까지 갈 수 있지 않을까 희망을 품었다. 조계종이 울돌목 입구에 제대로 있기만 하다면. 임중형은 통아 줄을 왼손가락에 매면서 준사가 하는 꼴을 지켜보았다. 항왜치고는 조선 노를 꽤 잘 젓는 편이었다. 언뜻 듣기로 준사 아버지가 젊었을 적에 해적이었던가 하는 것 같았다. - 파앙! 갑작스런 총성에 놀란 임중형이 움찔했다. 일렬로 늘어선 섬들 사이로 하얀 연기가 피어오르며, 그 아래로 왜선이 보였다. 왜군도 놀랐는지 덮 어놓고 우선 한 방 쏜 모양이었다. "중마도에 왜 소선입니다!" "진도 쪽으로 붙여! 벽파진까지만 가면 척후장이 있다. 다들 힘 내!" 왜선 다섯 척이 뒤따라오는 가운데 옆에서 다른 왜선이 나타난 것이 다. 격군들은 젖 먹던 힘까지 짜냈지만 거리는 점점 더 좁혀졌다. 손가락에 골무를 낀 임중형이 왜선을 노려보았다. 준사가 고바야라고 부르고 조선수군들은 소선이라 부르는 왜선에서 나지막한 나무방패판으 로 몸을 가린 노꾼들 사이로 왜병들이 조총을 겨누고 있었다. 거리는 400걸음武 정도, 즉 200보步였다. 이 거리에선 편전을 쏘면 충분히 맞힐 수 있지만 조총은 아무리 쏴도 목표를 맞힐 수 없다는 것을 임중형은 경 험으로 알고 있었다. - 피잉! 작은 화살은 빠른 속도로 날아가 금세 시야에서 사라지고 짧은 통아만 왼손가락에 대롱대롱 매달렸다. 임중형이 다시 잽싸게 화살을 시위에 매 겼다. - 탁! 화살은 방패판에 맞고, 화들짝 놀란 왜병들이 고개를 숙였다. 임중형은 다른 왜선을 향해 편전을 쏘았다. 작은 대롱을 통과한 애기살이 황금빛 햇살을 받아 반짝이며 왜선 안으로 사라졌다. 그 직후에 비명이 들려왔 다. "하이고! 군관 나으리. 살리주씨요." 늙은 키잡이가 임중형을 바라보며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바닷바람에 찌들고 햇살에 탄 타공의 얼굴은 나이보다 훨씬 늙어 보였다. 이 전쟁만 없었다면, 최소한 지방 수령과 아전들의 토색질만 없었다면 10년은 더 젊어 보였을 것이다. "방향이나 제대로 잡게! 기슭에 바짝 붙여!" 타공이 키를 조금 왼쪽으로 돌렸다. 탐망선은 진도의 금남산 아래를 지나가고 있었다. 임중형이 고개를 홱 돌렸다. 왜선들은 여전히 빠른 속도로 쫓아오고 있었다. 그러나 해안에 숨어있 을지도 모를 조선군의 포격을 겁내는지 해안 가까이 다가오지는 못했다. 거리가 가까워질 때마다 한 발씩 쏘는 임중형의 편전도 왜선의 접근을 막았다. 그러나 격군들은 눈에 띄게 지쳐갔다. 온몸에서 땀을 뻘뻘 흘리 고 입으로는 하얀 입김을 내뿜었다. 그러나 격군들은 미친 듯이 노를 저었다. 피로가 지나쳐 고통으로 변 한 지 오래였지만 죽음에 대한 공포를 넘어설 정도는 아니었다. 낯빛이 하얗게 변한 격군들은 뭐가 더운지 옷을 하나씩 벗어제끼면서 열심히 노 를 저었다. "나으리! 어란포에서 왜선들이 나옵니다. 바다를 새까맣게 덮었어요!" 젊은 격군 해돌이가 뒤돌아보면서 외쳤다. 임중형이 추격중인 왜선들 너머로 시선을 던졌다. 해돌이 말처럼 수백 척이 어란포 앞바다에서 나 와 천천히 북상하고 있었다. 임중형은 아군 전선을 찾았다. 그러나 척후장 영등포만호의 판옥선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해가 떠올라 물결이 반짝반짝 황금빛을 반사하 고 있었다. 파도를 헤치며 탐망선이 쏜살처럼 달렸다. '어디 숨었나? 아니면 도망갔나! 총소리가 들리면 바로 달려와 줘야 할 것 아닌가! 자기 부하 아니라고 잊어버린 건가?' 임중형이 이를 갈았다. 임중형의 배는 척후장이 지휘하는 탐망선이 아 니라 통제사가 탑승하는 상선上船 직속의 별망선이었다. 척후장 조계종 이 부리는 탐망선들은 어제 밤새 왜 수군 척후선들과 숨바꼭질하다가 결 국은 한 척도 초계선을 넘어서지 못했다. 오히려 설 건드려 왜 수군의 경계만 강화시켰을 뿐이었다. 천신만고 끝에 임중형의 별망선만 간신히 숨어들어 왜선 집결지를 염 탐할 수 있었다. 임중형이 어란포를 정찰했던 아흐레 전에 비해 경비가 무척 강화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가 본 것은 지금처럼 넓은 바다를 가득 덮은 왜선의 대함대였다. 이젠 무슨 일이 있어도 우수영으로 돌아가야 했다. 어서 돌아가 왜선 이 엄청난 숫자로 모여 이미 출발했음을 알려 통제사에게 후퇴하도록 건 의해야 했다. 어란포에 모인 왜선이 50척에서 많아야 200척 사이로 알고 있는 이 통제사는 크나큰 실책을 범할 뻔했다고 임중형은 생각했다. '통상은 패하면 절대 안돼. 이순신 영감마저 패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 조선은 완전히 무너져버릴 거야.' 7월의 칠천량 패전 이후 8월에는 남원성이 함락되고 전주성이 떨어졌 다. 9월 들어 조선 땅에 얼마 안 남은 명군은 충청도 북쪽 끝인 직산에 서 왜군에게 패해 수원을 지나 서울로 도망쳐버렸다. 서울은 지금 피난 가느라 아우성이라고 들었다. 그런 마당에 수군이, 그것도 이 통제사가 지휘하는 조선수군이 패한다 면 이 전쟁은 절망적이었다. 왜 수군은 서해를 거슬러 한강을 타고 서울 을 직접 공격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명나라 천진에 상륙해 바로 옆의 북경을 공격할 수도 있었다. 그럼 명나라는 북경 방어에 급급해 조선이 어떻게 되든 상관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만약 그렇게 되면 조선군은 절 대 안 믿고 명나라 군대를 천병이라 떠받드는 왕은 황망히 명나라로 도 망쳐버릴 것이다. 그럼 이 땅에 남은 백성들은 어떻게 된단 말인가? "뎃포다이 요이!" 일본말이 분명한 외침에 놀란 임중형이 반사적으로 활시위에 애기살을 매기며 몸을 돌렸다. 왜선에 탄 왜군들이 이쪽을 향해 총을 겨누고 있었 다. 그 사이에 이렇게 접근했다니! "군관 나으리! 왜놈들이!" 누군가 외치는 소리가 아련히 들려왔다. 임중형이 활시위를 놓는 순간 이었다. - 타타탕! 굉음과 함께 앞서 따라오는 왜선 세 척에서 동시에 하얀 연기가 피어 올랐다. 활을 쏘자마자 직감적으로 화살이 빗나갔음을 알아차린 임중형 이 장전을 꺼내 시위에 매겼다. "일어나서 노를 저어! 머리 숙이고 있다가 그냥 맞아 죽을 거야?" 임중형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총소리에 놀란 격군들이 뱃전에 엎드려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준사만이 홀로 노를 젓는데, 그래도 배는 물결에 흘러가는 정도 빠르기밖에 되지 않았다. 물살 흐름은 어느새 바뀌어 울 돌목으로 향하는 순류가 되어 있었다. "빨리 일어서!" 장전을 날린 임중형이 격군들을 발로 찼다. 정신을 차린 격군들이 겨 우 일어서는데, 노를 저으면서도 연신 뒤돌아보기를 멈추지 않았다. 왜선 에서는 왜병들이 다시 장전하는 중인지 다행히 조총을 쏘지는 않았다. 그 사이에 임중형이 연달아 화살을 날렸다. "허억!" 노를 젓다가 방패판 사이로 몸을 드러낸 왜인 하나가 옆구리에 화살을 맞았다. 왜인이 옆으로 거꾸러지며 물에 빠지려는 순간 다른 왜병 두 명 이 그를 붙잡아 끌어 방패판 옆에 숨겼다. 임중형이 그들에게 화살을 날 렸지만 빗나가고 말았다. "전쟁에서는!" 임중형이 화살통을 집어들고 뱃전에 화살을 모두 쏟아버렸다. 장전을 집어든 임중형이 다시 소리를 질렀다. "두려움을 이겨내는 놈만 살아남는단 말야!" - 피융! - 탁! 흔들리는 배에서 움직이는 목표를 맞추기란 쉽지 않았다. 그리고 역시 지금처럼 나무방패에 화살이 맞을 확률이 더 컸다. 그러나 임중형은 다 시 연달아 활을 쏘았다. 양쪽에서 노를 젓는 해돌이와 준사의 얼굴 사이 로 화살이 날아갔다. - 피융! - 탁! "머리만 처박고 오돌오돌 떨기만 하다가 죽은 놈들이 얼마나 많았어?" - 피융! "우와악!" 장전을 마치고 이쪽을 향해 총을 겨누려던 왜병 하나가 화살에 맞고 뱃전에 그대로 쓰러졌다. 나머지 왜병들은 놀라지도 않고 무릎을 꿇으며 조준했다. 그들이 겨눈 조총의 기관부 위로 심지가 타들어 가고 있었다. 격군들이 그 모습을 보고 엎드리려고 했다. "저어! 서서 노를 저으란 말야! 무섭다고 멈추면 다 죽어!" 우물쭈물하던 격군들이 눈을 질끈 감고 노를 저었다. 이상하게 왜병들 은 총을 쏘지 않았다. 임중형이 다시 한 발을 쏘았으나 화살은 왜병들 사이로 지나가 버렸다. "요이이~" 임중형은 잽싸게 화살을 매기며 소리를 낸 자를 찾았다. 두 번째로 따 라오는 왜선에 갑옷을 입은 젊은 왜장이 칼을 들어올리고 있었다. 임중 형은 왜장이 하나 뭐라고 외치는 것과 거의 동시에 화살을 쏘았다. - 타타타탕! "아악!" 비명은 탐망선에서 들렸다. 임중형이 실눈을 뜨고 왜장이 탄 배를 노 려보았으나 연기에 가려 잠시 보이지 않았다. 타공이 울부짖는 소리가 뱃전을 메웠다. "여보게, 해돌이!" 준사 반대쪽 노를 젓던 격군이 물에 빠졌고, 잠시 후에 등이 먼저 물 위로 떠올랐다. 붉은 피가 푸른 물에 천천히 번져나갔다. 천한 관노비로 태어나 20여 평생을 전라좌수영 영노로 살아오며 6년 동안 격군으로 수 군에 복무한 해돌이의 죽음이었다. 격군들은 해돌이 이름을 안타깝게 부 르면서도 계속 노를 저었다. "감부섬 사이로 들어가면 바로 벽파진이다. 척후장이 있을 거야!" 임중형이 재촉하지 않아도 격군들은 죽어라 노를 저었다. 키를 고정시 킨 타공도 격군들과 함께 노를 잡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왜선들이 잠시 따라오지 않고 멈춰 서 있었다. 다른 곳에 있던 왜선들도 한 곳에 몰려 들었다. 임중형은 무슨 일인가 지켜보았다. 갑옷을 입고 뿔 달린 투구를 쓴 왜 장들이 다른 배를 향해 손가락질하며 뭐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 는 모습이 마치 왜군들이 서로 말다툼하는 듯했다. 각 배들의 수부들과 병사들은 바다를 향해 뭐라 외치며 창이나 갈고리로 물을 들쑤셨다. "저, 저것들이! 해돌이를 끌어올리고 있어!" 타공이 분노 가득한 외침을 쏟아냈다. 임중형은 물끄러미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축 늘어진 시체가 갈고리에 찍혀 왜선 갑판 위로 올려졌다. 해돌이의 젖은 몸에서 바닷물과 함께 붉은 피가 뱃전을 적시며 바다로 뚝뚝 떨어졌다. 해돌이를 끌어올린 배의 왜군들이 환성을 내지른 반면, 다른 배에서는 아쉬워하는 소리가 이어졌다. 왜군들이 물에 빠진 해돌이를 치료해서 살리려는 것이 아니라는 것쯤 은 이 배에 탄 누구라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왜군들이 무엇을 하려는지 말을 하려는 사람은 없었다. 격군들은 묵묵히, 그러나 열심히 노를 저었 다. 해돌이를 끌어올린 왜선들은 다시 탐망선을 추격하기 시작했지만 아까 보다는 거리를 두고 조금 여유가 있는 편이었다. 그러나 왜선의 움직임 은 더 빨라 언제 조총을 쏘아댈지 모를 일이었다. = 고바야, 오니에몬 "와아!" "우헤헤! 쏘기는 지이 수군이 쐈는데 목은 우리가 건졌어." "무슨 소리야? 우리 철포대가 맞혔지. 다카도라 수군은 엉터리거든!" 왜병들과 수부들이 갑판에 끌어올려진 조선인 시체에 몰려와 시체와 다른 배들을 번갈아 보며 소리를 질렀다. 왜병들은 다른 배의 왜병들을 놀리며 신이 났다. 비록 척후전이긴 하지만 이 시체는 이번 전투에서 구 루지마 수군이 거둔 첫 전과였다. "잘했어! 우리가 해냈어! 우린 구루지마 해적의 선봉이고 전 일본수군 의 선봉이니까. 하하하!" 이 배를 지휘하는 무사 오니에몬鬼衛門은 뿔이 옆으로 길게 달린 투구 를 흔들어대며 과장되게 웃었다. 그리고 부하들이 첫 전과를 확인하며 뿌듯해하는 기분을 충분히 느낄 수 있도록 시간을 주었다. 도도 다카도 라 휘하의 배들은 다시 조선수군의 배를 추격하기 시작했다. "안 그런 것 같던데 이놈들도 앞머리를 정수리까지 밀었네?" "당연하지. 안 그러면 머리 가려워 어떻게 살겠어?" 왜병들은 뭐가 신기한지 조선수군 시체를 손가락이나 창끝으로 쿡쿡 찔렀다. 상투를 잘라 머리를 풀어헤치기도 하고 겨드랑이 털을 잡아당겨 뽑기도 했다. 그리고는 괜히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이를 드러내고 웃어 댔다. 이들이 조선인 시체를 본 것은 처음이었다. 두 달 전에 칠천량해전에 참가했지만, 그것도 선봉으로 싸웠지만 이들은 조선군 얼굴도 못 보고 말았다. 일방적으로 한참 조선수군 배들을 쫓아다니다 이상하게 시시하 게 끝나버린 다음에는 판옥선이라는 커다란 조선수군 전선들만 빈 갯가 에 놓여있을 뿐이었다. 전과는 단 하나도 올리지 못했고, 그때 육지에 있 었던 시마즈군 일부가 얼떨결에 잡은 조선수군 졸병 몇을 참획하고 얻은 머리만 봤을 뿐이었다. "됐다. 자! 이제 비켜라." 오니에몬이 병사들을 손으로 밀어내며 큰칼을 뽑았다. 큰 환도 한 자 루를 차는 조선장수와 달리 일본 무사는 다찌라 불리는 큰칼과 고다찌라 불리는 작은칼을 동시에 찬다. 오니에몬이 다찌를 높이 들어올리자 피가 옷에 튈까봐 물러서는 병사 가 서넛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은 자세히 구경하려고 다가들었다. 평소에 는 노를 젓지만 전투시에는 병사나 다름없는 구루지마 해적의 수부들도 몰려들었다. "하앗!" 오니에몬이 칼을 내리치자 피가 확 튀며 시체의 머리가 잘렸다. 잘린 머리는 옆으로 굴렀고, 병사 하나가 상투를 쥐어 조선수군의 머리를 오 니에몬에게 주었다. 머리가 잘린 시체의 목에서 붉은 피가 콸콸 쏟아졌 다. 그 피에서는 하얀 김이 올라왔다. 칼을 닦고 칼집에 넣은 오니에몬이 머리를 들어올렸다. 붉은 피가 목 에서도 뚝뚝 떨어졌다. 오니에몬이 머리를 치켜들면서 크게 외쳤다. "우린 이겼다! 이 목을 하타 노부도키님께 가지고 간다!" "와아!" = 성산, 척후군관 임준영 임준영은 말을 탄 채 언덕에서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저 멀리 탐 망선과 왜선들의 경주가 계속됐고, 어란포 쪽 바다에는 왜선들이 바다를 뒤덮으며 올라오고 있었다. 가끔 이어지는 총소리가 멀리 떨어진 이곳까 지 들려왔다. "탐망군관 나으리가 고생하십니다." 임준영 옆에서 노새에 타고 있는 태귀생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조 금 전에 어란포 근처에서 왜군들의 조총 사격을 받고 도망쳐온 사람치고 는 여유가 있어 보였다. 임준영은 척후를 무척 중시하는 이 통상 대감이 신분이 불분명한 태귀생을 정탐인으로 뽑은 이유가 거기에 있는 모양이 라고 생각했다. 이순신은 함대 내 서열 2위인 무장은 중군장 또는 중위장에, 서열 3위 는 척후장에 임명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쯤은 임준영도 눈치 채고 있었 다. 임진년 이후 전라좌수영의 중군장에는 순천부사 권준, 우척후장에는 방답첨사 이순신李純信 하는 식이었다. 칠천량 패전 이후 척후장으로 임명된 조계종은 서열은 낮지만 이순신 이 무척 신뢰하는 장수였다. 지금이 조선수군에게 극도의 위기상황인 만 큼 이순신은 이번만큼은 서열보다는 신뢰에 의지하는 듯했다. "흠! 꽤나 덥겠군." 임준영도 호기를 부렸다. 그러나 꾸역꾸역 몰려드는 왜선을 보면 마음 이 착잡했다. 아무래도 통상 대감은 울돌목에서 싸우다 죽으려고 작정한 것 같았다. 임준영은 드디어 이 황량한 바다에서 뼈를 묻는구나 싶었다. "나으리! 제가 먼저 우수영으로 뛰어갈깝쇼?" "아니다. 조금 더 지켜보자. 그런데 도대체 저 왜선들은 꼬리가 안 보 이는구나." "그렇습죠. 어란포에서 제가 센 것만 해도 5백 척이 넘습니다." "흐음. 큰일이야." 임준영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태귀생은 자꾸 임준영의 눈치를 보 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나으리. 나으리가 새로 정탐하신 것이 있습니까?" "그래. 역시 안 좋은 소식이다. 회령포에 300척이 더 있더라." "흐에엑!" = 탐망선, 탐망군관 임중형 어느새 탐망선은 진도의 연동을 지나가고 있었다. 추격해오는 왜선들 은 한 척이 줄었지만 여전히 열심히 탐망선을 따라왔다. 갯가 마을 초가집 지붕에 누런 호박이 열려 있고, 제비들이 수백 마리 나 모여 지저귀고 있었다. 깊은 가을이었다. 그때 타공의 비명이 임중형 의 상념을 날려버렸다. "벽파진에도 왜선이다! 척후장의 전선은 없어요!" "으아!" 정면에서 갑자기 나타난 일본 배가 이쪽을 향해 줄달음치고 있었다. 연달아 총소리가 울리고, 왜선에서 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기겁한 격군 들이 앞뒤를 번갈아 보며 갈피를 잡지 못했다. "송도 쪽으로 돌려! 영등포만호 이 자식은 어디 있는 거야? 내가 여기 서 살아나가면 조계종 그 개자식 반드시 죽여버릴 거야!" 임중형이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타공이 키를 돌려 넓은 바다 쪽으로 배를 틀었다. 그러나 꼼짝없이 포위된 것 같았다. 왜선에 비해 속도가 빠 르지 못한 탐망선이 빠져나갈 방법은 없었다. 그렇다고 가만 앉아서 죽 을 수는 없었다. "빨리 저어!" 임중형은 좀더 가까운 뒤쪽 왜선을 향해 연달아 화살을 날렸다. 왜선 들은 도주로를 차단한 다른 왜선의 출현을 보고는 여유 있게 천천히 접 근해왔다. 왜선 한 척은 혹시나 탐망선이 진도에 상륙할까봐 해안으로 접근하고, 아니면 해남 땅으로 도망갈까봐 오른쪽으로 방향을 돌리는 배 도 있었다. 어찌 됐건 탐망선을 포위한 다음 조선수군들을 포로로 잡거 나 조총 일제사격 한 방에 끝낼 작정인 것 같았다. "이젠 다 틀려부렀어요. 척후장 이 나쁜 놈 같으니라고." 타공이 중얼거리며 임중형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임중형은 타공 말에 신경 쓰지 않고 앞에 나타난 왜선만 쏘아보았다. 임중형의 시선이 천천히 감부섬으로 돌아갔다. 그곳에서 이상한 그림자를 본 것 같았다. "척후장이다! 영등포다!" 임중형이 외치자 격군들이 환호성을 올렸다. 섬그림자에서 막 벗어난 판옥선이 아침햇살을 받아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앞에 나타난 왜선은 영 등포만호 조계종의 판옥선에 쫓기던 중이었다. 그래서 조금 전에 왜선이 총을 쐈어도 이 근처 바다에 총알이 떨어지지 않은 것이었다. "저어! 노를 저어!" 임중형이 명령을 내리지 않아도 격군들은 힘차게 노를 젓고 있었다. 타공이 판옥선을 향해 키를 돌리고 돛줄을 당기느라 부산해졌다. 반면에 탐망선을 쫓던 왜선들은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영등포 선이 잠시 속도를 늦추고 방향을 돌리자 좌현이 천천히 드러났 다.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분명했다. 임중형과 격군들은 신이 나서 동시에 소리를 질렀다. "쏜다!" - 꽈광! 꽝! - 우지끈! 빠바바바박! 표적이 된 작은 왜선에 차대전 두 발이 명중하고 조약돌이 뒤덮어버렸 다. 현측에 커다란 구멍 두 개가 뚫리고 왜군들은 단단한 조약돌에 얻어 맞고 뱃전에서 나뒹굴었다. 왜선 주변에 작은 물기둥이 수없이 치솟아 올랐다. 온통 시뻘겋게 피칠이 된 왜선은 천천히 물이 차 올라 반쯤 가라앉았 다. 첫 번째 공격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수부 몇 명이 물로 뛰어들었다. 그 순간 판옥선에서 다시 불꽃이 번쩍거렸다. 이번에는 단 한 방이었다. - 뻥! - 촤차차차착! 보이지는 않지만 저 소리가 뭔지는 확실히 알고 있었다. 방패판이 부 서져나간 왜 소선을 수없이 많은 세전이 휩쓸어버린 것이다. 판옥선에 늘어선 사부들이 활을 쏠 필요도 없었다. "와아!" 탐망선의 격군들이 함성을 질렀다. 판옥선에 탄 사부와 포수들이 깃발 을 흔들며 탐망선의 함성에 답했다. 임중형이 뒤를 돌아보니 그 동안 탐망선을 추격해오던 왜선들이 일제 히 꽁무니를 내빼고 있었다. 속이 다 시원했다. 2. 이른 아침 (1) = 도도 다카도라 함대 어립선, 도도 다카도라 "그럼 지금부터 군의軍議를 시작하겠소." 파란 바다를 온통 뒤덮으며 나가는 5백여 척의 일본함대. 그 중앙에 위치한 상자 모양의 큰배에서 도도 다카도라藤堂高虎가 묵직한 목소리로 선언했다. 얼굴이 둥글넓적한 다카도라는 부처님처럼 큰 귀, 그리고 얼굴 절반을 덮은 큰 코와 함께 사람 좋은 인상을 하고 있었다. 다만 사람 팔 길이보다 더 긴 나뭇잎 모양의 투구 장식이 무척 부자연스러웠다. 뱃전에 각종 깃발을 들고 도열한 병사들 사이로 방금 떠난 어란포가 점점 멀어졌다. 해도海圖에 魚卵浦로 기록된 이름과는 달리 물고기 알과 는 전혀 닮지 않았다. 다카도라가 전에 본 다른 해도에는 於蘭浦로 쓰인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포구로서는 어쨌든 훌륭했다. 빙 둘러선 작은 산들이 바람을 막아 주었고 바다 쪽으로 넓은 출구가 있었다. "모두 앉으시오." 탁자에는 적국赤國, 즉 전라도의 복잡한 해안선과 무수한 섬들을 그린 해도 등 회의에 필요한 물건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가장 상석인 총대장 자리의 접의자에 앉은 다카도라가 각 함대에서 모인 무장들을 한번씩 쳐 다보았다. 화려한 갑옷과 투구 안에 들어있는 상기된 표정과 신중한 표 정이 그의 눈동자에 번갈아 들어왔다. "조선수군이 지금 적국 우수영 앞 바다에 모여 있다 하오. 이건 우리 와의 일전을 불사하겠다는 행동이오." 이른 아침이었다. 음력 9월 하순의 싸늘한 바닷바람과 부드러운 배의 흔들림이 느껴지는 가운데 다카도라는 '일전一戰'이란 말에 특별히 힘을 주었다. 그를 비롯해 지금 모여있는 일본의 수군장수 모두가 기다려 마 지않던 순간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조선정벌을 시작한 이후로 그들이 무엇보다 두려워했던 조선수군을 영원히 사라지게 할 전투였다. 그러나 다카도라는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뒤쪽에는 도도 가문을 나타내는 군기가 위용을 뽐내며 펄럭였지만 반대로 마음속 에서는 불안감이 요동쳤다. 도대체 이 불안감의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을 알아내기 위해 다카도라 는 우선 회의에 참석한 무장들을 천천히 살펴보았다. 바로 오른쪽에 비 장한 표정으로 앉아있는 구루지마 미치후사부터 가장 왼쪽에 시큰둥한 표정을 짓는 하치스카 이에마사까지. "드디어 원수를 갚을 기회가 왔소." 구루지마 미치후사來島通總가 나직이 말하며 눈빛을 빛냈다. 도도 다 카도라가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미치후사가 놀라면서 고개를 숙였 다. 하마터면 다카도라의 기다란 투구 장식에 부딪칠 뻔한 것이다. 그건 하치스카 이에마사도 마찬가지였다. 미치후사가 헛기침을 하더니 강한 어조로 말했다. "이순신의 목은 이 미치후사가 베겠소!" 적어도 일본수군 내에서 구루지마 수군의 능력을 의심할 사람은 한 명 도 없었다. 37세란 젊은 나이였지만 항해능력이나 해상에서의 전투력만 은 능히 천하제일이라 불리는 미치후사였다. 물론 일본인에게 천하란 일 본을 뜻한다. 미치후사가 많은 무장들이 모여 있는 앞에서 큰소리 쳤음에도 불구하 고 아무도 드러내놓고 반박하지 않았다. 다만 왼쪽에 있던 와키자카 야 스하루脇板安治가 냉정하게 대꾸했다. "그야 선봉을 맡은 만큼 당연한 것이오. 다만 여의치 않을 경우는 내 가 나서서 이순신을 박살내 주겠소." 둘 사이에 싸움이 나기 전에 다카도라가 끼여들었다. 자존심으로 똘똘 뭉친 일본의 무장들, 그것도 다른 누구에게 명령받는 것을 무척 거슬려 하는 수군무장들이었다. "두 분의 결의는 잘 알겠소. 그러나 지금 이 자리는 그 이순신이 이끄 는 조선수군을 어떻게 격파할까 논하는 자리요. 다른 장수도 아니고 이 순신이오. 구체적인 방책을 내놓는 것이 중요하오." 사실 수군 총대장이라는 직책은 다카도라가 감당하기에 조금 부족한 감이 있었다. 지금 이 자리에는 영지의 크기나 실력 면에서 다카도라에 조금도 뒤지지 않는 무장들도 있었다. 그러나 히데요시의 각별한 신임을 얻고 있는 다카도라가 통솔 책임을 지고 총대장이 됐고, 다른 무장들은 형식상이나마 명령을 들어야 하는 부하의 위치가 됐다. 따라서 무장들의 의견을 조율하고 때에 따라서는 명령을 내려야 하는 다카도라 입장에선 약간 어색함을 느끼고 있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이순신이나 조선수군이 문제가 아니지 않소? 우리에 게 가장 중요한 임무는 북쪽에 있는 육군에게 보급을 해 주는 것이고, 그 다음은 내 병력을 상륙시키는 것이오. 듣자하니 저기 모인 조선수군 이라 해봐야 고작 열 척 남짓이라는데 무엇이 문제겠소? 단숨에 격파하 고 올라갑시다!" 물론 전부가 명목상이라도 다카도라의 부하는 아니었다. 지금 기세 좋 게 말을 꺼낸 하치스카 이에마사蜂須賀家政가 바로 그랬다. 새빨간 갑옷 가운데에 그린 황금색 원이 떠오르는 태양에 눈부시게 빛났다. 다카도라 는 잠시 눈을 찡그렸다. 이에마사는 수군과 함께 왔지만 전투가 아닌 수송책임을 지고 있었다. 비록 연합함대 편성상 본진 병력에 속해 있어도 영지의 크기나 실력에서 오히려 다카도라를 훨씬 능가했다. 협력이라면 몰라도 다카도라에게 명 령을 들어야 할 의무는 없었다. 그래서 그런지 그는 간혹 다카도라의 지 휘능력을 믿을 수 없다는 태도를 보였다. "그 말 대로요! 이빨 빠진 호랑이나 다름없는 조선수군이 상대나 되겠 소? 겨우 열 몇 척 잡는데 뭐 그리 특별한 방책이 필요하겠소? 그저 다 시 한번 결의나 다지면 족하다고 생각하오." 군감軍監 모리 다카마사毛利高政가 이에마사 말에 적극찬성하고 나섰 다. 군감이란 무장들의 전투를 감시하고 그 전과를 히데요시에게 보고하는 직책이다. 다른 말로 이쿠사메스케軍目付 또는 부교奉行라고 불렸지만 나쁘게 말하면 본진 안에 있는 감시자였다. 그가 히데요시에게 보내는 보고서 내용여하에 따라 본국으로 소환 당하는 것은 물론 처벌까지 각오 해야 했다. "다른 의견은 없소?" 답답해진 다카도라가 조금 목청을 높였다. 정말로 아무 것도 문제되는 게 없는 걸까? 지금 느끼고 있는 불안감은 단지 기우杞憂일 뿐일까? "내 생각은 좀 다르오." 한마디도 하지 않고 생각에 잠겨있던 가토 요시아키加藤嘉明가 입을 연 것은 그때였다. "십여 척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나 그 조선수군을 지휘하는 자는 귀신 같은 장수인 이순신이오. 함부로 깔보다가는 분로쿠文祿 원년처럼 큰 화 를 당할 수도 있을 거요." 요시아키는 다른 무장과 달리 신중하고 사려 깊은 성격이었다. 별다른 장식 없이 금과 은으로 상감된 스페인 식 투구도 그의 차분한 성격과 잘 어울리는 편이었다. 요시아키는 행동하기에 앞서 항상 생각을 먼저 했다. 때문에 용맹스럽다는 말은 별로 듣지 못했지만 큰 실패와 패배를 겪지 않았다. "쓸데없는 걱정이오." 야스하루가 눈살을 찌푸리며 요시아키의 말을 부정했다. 야스하루는 손자를 달래는 시골노인 같은 요시아키의 부드러운 표정과 말투에 더 화 가 난 것 같았다. "싸움은 장수 혼자서 하는 게 아니란 걸 요시아키 님도 아실 거요. 이 순신이 병법에 밝다는 사실은 인정하지만 구체적으로 그 병법을 수행할 전력이란 게 없지 않소?" 칠천량에서 승리한 다음 일본수군은 견내량을 통해 경상도 서부와 전 라도 해역으로 물밀듯이 진출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조선수군은 전혀 저 항을 하지 않았다. 조선수군의 주력을 칠천량에서 패주시키긴 했지만 이 정도로 무인지경이 되리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해 오히려 일본수군이 더 당황할 정도였다. 포구마다 한두 척씩 세워진 빈 판옥선을 불태우거나 일본 땅으로 보낸 일본수군은 8월 중순에는 남원성 공략전에 참가하는 여유를 부렸다. 그 곳에서 수군 무장들은 이순신이 다시 통제사가 됐다는 소식을 듣고 놀랐 다. 그러나 거의 한 달 동안 조심스런 탐색전을 펼쳤지만 조선수군은 겨 우 10여 척에 불과했다. 이해할 수 없었다. 거의 100척에 가까웠던 거대한 판옥선은 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조금 믿기 어려웠지만 조선인 포로와 부역자들을 통해 얻 은 정보로 미뤄볼 때 이순신 밑에 겨우 열 척 남짓밖에 없다는 말은 거 짓이 아니었다. 일본 수군장들은 나머지 판옥선들은 아마도 서울을 지키 기 위해 강화도로 북상했을 것으로 판단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도저히 계산이 나오지 않았다. "글쎄요." 요시아키는 야스하루의 눈을 지그시 쳐다보았다. 다카도라는 그 부드 러운 표정을 보고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야스하루의 표정을 읽을 수 있었 다. "야스하루 님이 용인에서 5만의 조선군을 무찔렀을 때 거느린 수백 명 에 비해 지금의 조선수군이 적다고 생각하시오?" "그, 그건..." 순간 당황한 야스하루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가 늘 자랑스럽게 내세 우고 있는 무공武功과 방금 한 말의 모순을 요시아키가 정확히 지적했기 때문이다. 다카도라가 듣기에도 분명 맞는 말이었다. 전쟁 첫해 수원 근처에서 방심한 조선군 5만을 향해 야스하루는 겨우 천여 명의 병력으로 돌격을 감행했다. 그 공격은 멋지게 성공했고, 다음 날 새벽 숲 속에서 아침식사를 준비하던 조선군을 한 번 더 공격해 산산 이 흩어버렸다. 그래서 야스하루는 수백으로 5만을 무찔렀다는 명예를 얻었다. 그러나 우리편에게 실제 가능했던 일이 적에게 특별히 불가능할 것은 없다. "우리가 그 따위 조선군과 같소?" 야스하루가 눈을 부릅뜨고 쏘아보았다. 그러나 요시아키의 나지막한 한 마디에 야스하루는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견내량해전을 빼면, 우리 수군은 조선군보다 못하지요." 그 말에 다른 무장들도 잠시 할 말을 잊었다. 아무리 싸움 못하고 도 망 잘 가기로 유명한 조선군이었지만 진주성이나 행주에서는 훨씬 많은 병력을 동원한 일본군에 뼈아픈 일격을 가했다. 그리고 서울을 내주고 부산으로 후퇴한 것은 명나라 군대 때문이 아니라 의병이라는 도둑들의 난동에 의한 식량부족 탓이었다. 육지의 조선군도 때에 따라서는 제구실 을 했다는 뜻이다. 그러나 일본수군은 압도적인 전력으로도 이순신의 함대를 무찌르지 못 했다. 한번도 이기지 못하고 처참한 패배만 연속 당했을 뿐이었다. 그것 은 5년 동안 일본수군에게는 처절한 악몽이었다. 일본 땅에서는 수군으 로 징발되면 절대 살아 돌아오지 못하는 것으로 여기는 풍조가 만연했 다. 그래서 일본수군이 조선육군보다 못하다는 요시아키의 말은 맞았다. 당장이라도 승전할 것처럼 들떠 있던 분위기가 갑자기 착 가라앉았다. 이 분위기에 쐐기를 박듯 요시아키가 문제를 제기했다. "우린 아직 이순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지도 모르고 있소." "과연 그렇소! 나도 요시아키 님 말씀이 옳다고 생각하오." 그제야 다카도라는 알 수 없는 불안감의 근원이 어디서 온 것인지 확 실히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즉시 요시아키 말에 찬성하며 그쪽으로 화제 를 돌렸다. "이순신은 아무런 확신도 없이 일전을 벌일 정도로 우둔한 무장이 아 니오. 분명 어딘가 믿는 구석이 있을 거요. 그게 무엇인지 알아내 철저히 분쇄해야 하오." 기세는 등등했지만 따지고 보면 이 자리에 있는 수군장수 모두가 이순 신에게 철저히 패해 병력과 함대를 모조리 잃어버린 경험이 있었다. 좀 과장해서 조선수군은 무섭지 않아도 이순신만은 꿈에 나타날까 두려운 존재였다. 다카도라는 불안감의 원인을 찾았다. 그것은 다시 통제사로 임 명돼 조선수군을 이끌고 있는 '이순신李舜臣' 이라는 이름이었다. 비록 칠천량의 패전에 넋이 나가있는 병졸과 열 척 남짓의 배밖에 남 은 것이 없다해도 이순신만은 여전히 변함없는 이순신이다. 일본군을 상 대로 싸워 한번도 패배한 적이 없는 그에게 조선백성들은 여전히 믿음을 가지고 따르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위협적인 존재였다. "전력에서 도저히 상대가 안 된다는 건 이순신도 잘 알고 있을 거요. 그럼에도 저곳에서 싸우기로 마음먹었다면 나름대로 어떤 작전이 준비되 어 있을 거요. 신중하지 않으면 안되오." 요시아키는 마치 두 배쯤 되는 강한 적을 상대하는 태도였다. 그러자 잠시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던 구루지마 미치후사가 벌떡 일어나 외쳤다. "신중하다니! 여기서 더 얼마나 신중해야 하오? 적이 바로 눈앞에 있 단 말이오. 싸우는 것 외에 뭐가 필요하오?" 며칠 동안 조선함대와 전초전을 벌인 본진 다카도라 함대 외에 구루지 마 수군도 끊임없이 정찰선을 띄웠다. 그로 인해 조선수군의 움직임은 낱낱이 보고되고 있었다. "그 싸우는 방법이 문제란 거요." 고함을 지른 미치후사와 낮고 침착하게 답하는 요시아키가 서로 노려 보았다.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팽팽한 적의敵意를 느낀 다카도라는 결 론을 내리듯 말을 꺼냈다. 어쨌든 다카도라는 작전회의를 주재하는 총대 장이었다. "우선 이순신이 무엇을 노리는 지 그것을 논해봅시다." = 도도 함대 어립선, 겐타로 "영주님들이 군의를 열고 있어. 드디어 싸움이 시작될 모양이야!" 갑판 위에서는 무겁고 진지한 회의가 열리고 있었지만 막상 그 아래 야구라矢倉에서는 활기가 넘쳤다. 특히 전투가 곧 시작될 것 같다는 소 식을 들은 병사들이 그랬다. 40개나 되는 2인용 노가 달리고 수부만 80 명이 넘는 대형 아다케후네安宅船 선실 안이 순식간에 시장바닥이나 되 는 것처럼 떠들썩해졌다. 갑옷과 무기를 다시 점검하는 병사도 있고 뭐가 그리 신이 나는지 춤 을 추어대는 병사도 있었다. 출렁대는 파도에 넘어지면서도 춤은 그치지 않고 계속됐다. 노를 젓는 수부들의 땀 냄새와 습기가 밴 나무의 퀴퀴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자네는 왜 그렇게 가만히 있나?" 분위기에 걸맞지 않게 멍하니 있던 겐타로源太郞는 뒤에서 다가온 목 소리에 번쩍 정신을 차렸다. 돌아본 그의 눈에 법복을 입은 기원승祈願 僧이 비쳤다. "엔메이 님!" 겐타로는 엔메이圓明라고 불리는 이 스님이 총대장 도도 다카도라의 측근이란 것을 알고 있었다. 떡 벌어진 어깨에 강렬한 인상을 주는 얼굴 로 중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무사에 어울릴 사람이었다. 조선정벌이 시작 되기 전 첩자로서 이미 조선에 온 적이 있다고 했다. 그런 경력과 외모 때문에 이 스님이 전에는 유명한 무사였다느니, 법력을 지닌 고승이라느 니 하는 말도 있었지만 겐타로는 믿지 않았다. "다들 저렇게 들떠 있는데 자네 혼자만 이러고 있어. 무슨 사정이라도 있나?" 엔메이가 다시 물었다. 그의 날카로운 눈빛이 겐타로에게 향했지만 부 드러운 어조와 얼굴에 띠고 있는 옅은 미소는 그것이 힐책하는 의미가 아님을 알려주었다. "아무 것도 아닙니다." "허어! 자네 얼굴에는 무언가 있다고 쓰여져 있네. 말해보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뭐든지 해주겠네." 다카도라가 존중하는 측근이기에 엔메이는 상급무사에게도 하대를 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병졸인 아시가루足輕에게는 물론, 영주의 하인 직분인 쥬겐中間과 보다 격이 낮은 하인 고모노小物에게도 부드러운 말 투를 썼다. 지금도 그랬다. 도도 다카도라 군에 임시로 고용된 겐타로는 정규병사 인 아시가루에게 괄시를 받는 잡병雜兵이었다. 배에 타고 있는 사람 중 제일 낮은 신분이기에 그는 늘 하대만을 받아왔다. 겐타로는 기껏해야 노 젓는 수부 정도에게나 하대를 할 수 있을 뿐이었다. 수부는 병사가 아니므로. "실은 오늘 새벽에 꾼 꿈 때문에 그렇습니다만." 잠이 오지 않아 한참을 뒤척이다가 겨우 잠이 든 후에 꾼 이상한 꿈이 었다. "무슨 꿈인가?" "오래 전에 헤어져 소식을 모르게 된 친구가 나타났습니다." "그럼 길몽이 아닌가?" "그런데 그 친구는 불길 속에 있었습니다. 피에 젖은 몸으로 저한테 도와 달라고 손을 내밀더군요. 하지만 제가 내민 손은 친구에게 닿지 않 았습니다. 마지막으로 뭐라고 소리쳤는데 그 말조차 알아듣지 못했습니 다." "그런가..." 엔메이는 독경이나 축원 등도 신분 차별 없이 부탁만 하면 해주는 것 으로 유명했다. 그리고 그 중에는 해몽도 있었다. 겐타로는 약간 기대하 는 심정으로 물었다. "어떤 의미인지 풀어주실 수 있겠습니까?" "나무아미타부츠." 잠시 생각에 잠긴 엔메이가 눈을 감으며 손으로 염주를 돌렸다. 특별 히 믿는 것도 아니었지만 이 순간만큼은 겐타로도 신불神佛에 의지하고 픈 심정이었다. "흉몽이 될 수도 있고 길몽이 될 수도 있네." "예? 무슨 말씀인가요?" 그러나 눈을 뜬 엔메이가 한 말은 구체적인 해몽이 아니었다. "꿈속에서 죽은 사람이나 잊었던 사람을 본다는 건 마치 무더위가 계 속되고 나면 비가 오는 것과 같은 이치야. 현실을 양陽이라 하면 꿈은 음陰이니 그것이 서로 전혀 관련이 없다고도 혹은 반드시 일치한다고도 볼 수 없네." "무슨 말씀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엔메이 님." "요는 자네 마음에 달렸다는 걸세." "그렇군요. 예. 알겠습니다."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겐타로는 더 이상 엔메이에게 묻지 않았다. 성 급하게 판단한다면 친구가 부른다는 게 자기의 죽음을 의미한다고도 볼 수 있었지만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는 않았다. 엔메이가 굳이 마음에 달 렸다고 한 이유도 이와 같을 것이다. "지금은 눈앞의 싸움만 생각하게." 겐타로의 이런 마음을 알았는지 엔메이는 손으로 가볍게 그의 어깨를 쳐주었다. 격려의 의미였지만, 아무리 봐도 불도를 닦는 사람보다는 무사 에게 어울리는 태도였다. "그럼 저도 엔메이 님께 한가지 보여드리겠습니다." 우울한 기분을 전투 때까지 끌고 가고 싶진 않았다. 기분전환을 위해 겐타로는 일부러 다른 병사처럼 밝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부드러운 천에 싸서 잘 보관해 두었던 물건 하나를 꺼내 보였다. "이건?" "사카이에서 온 상인에게 산 겁니다." 겐타로가 보인 것은 오오쓰쓰大筒였다. 일반병사들이 가지고 있는 철 포鐵砲와 비슷한 모양이고 쏘는 방법도 같았지만 구경은 훨씬 컸다. 생 산지별로 천차만별이긴 하지만 철포는 12밀리에서 16밀리 정도의 탄환이 기본이다. 그러나 오오쓰쓰는 30밀리가 넘는 탄환을 쓰기 때문에 파괴력 이 엄청났다. "귀한 건데 용케 구했군." "돈을 좀 많이 줬습니다. 가진 걸 다 털어서 간신히 샀죠." 겐타로가 자랑스런 표정을 짓자 엔메이가 빙긋 웃으며 물었다. "무엇 때문에?" "듣자하니 조선의 배는 단단해서 철포에 뚫리지 않는다 하더군요. 그 래서는 전공을 세울 수 없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이거라면 뚫리겠죠." 겐타로는 허리에 찬 자루 하나를 풀어 탄환도 꺼내 보였다. 납과 구리 등이 적절한 비율로 섞인 데다 보통 탄환의 두 배가 넘는 크기로 인해 야전에서 적의 방패를 부수는 데 쓰이던 것이다. "그걸로 조선의 판옥선을 뚫겠다고?" "예. 두꺼운 나무방패도 부수는 탄환입니다. 배인들 못 뚫겠습니까?" "그건 무리일세." 엔메이는 쯧쯧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어째서입니까? 이 오오쓰쓰를 판 상인이 분명 장담했습니다. 이거면 조선의 어떤 배도 부술 수 있다고 말입니다!" 겐타로는 화가 치밀었다. "그렇게 소리치지 말게. 그야 자네는 아직 조선수군과 싸워본 적이 없 었으니 모르겠지. 자네뿐만 아닐세. 여기 탄 다른 잡병들도 마찬가지야. 조선의 배를 우리가 탄 배와 비슷하다고 생각해선 안돼." "뭐가 다르단 겁니까? 좀 클 뿐이던데요." "조선수군이 버리고 간 빈배를 봤을 뿐이겠지. 자네, 저기 저걸 보게." 엔메이의 손이 선실 가장 앞쪽에 있는 대포구멍을 가리켰다. 거기에는 쇠가죽에 덮인 커다란 물체가 있었다. "저게 뭔지 아나?" "잘 모르겠습니다." "다카도라 님이 이번 전투를 위해 급히 남만에서 사들인 대포일세." "남만의 대포라고요?" 그 당시 일본에서 남만南蠻이라면 교역 상대였던 포르투갈과 에스파냐 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겐타로도 몇 번 남만인을 본 적이 있었다. 파란 눈에 노란 머리를 한 이상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왜 그들에게 이런 무기 를 산 걸까? "남만 교역선에 실려 있던 대포야. 남만인들은 저걸 캘버린이라 부르 지." "가루바링이라고요?" "그래. 저 대포에 들어가는 탄환 크기는 자네가 가진 그 오오쓰쓰의 다섯 배가 넘어." "설마!" 겐타로가 반문했다. "그걸로도 조선의 판옥선을 격파할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네. 오오 쓰쓰 정도로 될 문제가 아냐." 엔메이는 냉정하게 겐타로에게 일러주었다. 그리고 다른 곳으로 가려 는 듯 몸을 돌렸다. "한가지 더 알려주자면..." "뭡니까?" "판옥선에는 한 척에 저런 대포가 수십 개나 있네. 그걸 일제히 쏜다 고 생각해 보게. 당해낼 수 있겠나?" 역시 믿지 못할, 아니 믿기 싫은 말이었다. 겐타로가 다시 뭐라고 반문 하려 했을 때 엔메이의 모습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그럴 리가 없어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겐타로는 이제까지 소중한 보물처럼 아껴오던 오 오쓰쓰를 갑자기 쳐다보기도 싫어졌다. 사실이 아닐 것이다. 상인이 거짓 말을 했을 리 없다. 이렇게 몇 번이나 생각을 돌리려 했지만 그렇다고 엔메이가 특별히 거짓말을 할 이유도 없었다. "제길!" 겐타로는 액땜이라도 하듯 바닥에 침을 뱉었다. 파도에 맞춰 출렁이는 배와 여전히 시끌벅적한 선실. 어느새 잊고 있었던 그 친구의 이름이 떠 올랐다. "슌스케(俊助)..." 지금은 오오쓰쓰 따위가 아닌 그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2. 이른 아침 (2) = 전라우수영 성문 밖 초가집, 김개동 "휘유~" 김개동은 이따금씩 들려오는 총포 소리에 한숨지었다. 창 밖이 어슴프 레할 때부터 들려오던 소리였다. 멀리서 또는 가까이 들려오는 그 소리 에 이제는 익숙할 만도 했지만 요즘은 그렇지 못했다. 다른 장수나 군사 들도 다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소리가 밤새 이어진 것은 알지 못했다. 김개동은 오랜만에 따뜻한 구들장에서 자고 일어나니 몸이 가뿐했다. 생각해보니 전쟁이 일어나고 6년 동안 온돌방에서 잔 적이 별로 없는 것 같았다. 수영에 소속된 관노비인 영노가 다 그렇지만, 본영을 왜군에게 빼앗기고 이리저리 떠다닌 경상우수영 영노들은 특히 더했다. 구수하게 밥 짓는 냄새가 시장기를 자극했다. 그러나 오늘 벌어질 일 을 생각하니 도무지 입맛이 없었다.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라니? 어차피 죽을 밖에 다른 길이 없는데. 왜군 배가 수백 척이나 몰려들고 있다니 걱정이었다. 그러나 다른 격군들은 코를 골며 잘만 자는 것 같아 부러웠 다. "후우~" "지랄 하덜 말고 잠이나 더 퍼 자! 쓰벌 것! 구들장이 다 꺼지겄네." 소리 나는 곳으로 고개를 돌리니 봉학이라는 전라좌수영 영노가 기지 개를 키며 일어나고 있었다. 같은 영노 주제에 평소에도 활 좀 쏠 줄 안 다고 뻐기는 꼴이 눈꼴시었는데, 도무지 정이 안 가는 놈이었다. 김개동 이 화를 벌컥 냈다. "니, 머꼬? 굴러온 돌이라꼬 박힌 돌 뽑을끼가?" "웃기고 자빠졌네. 비겁하게 쌈도 안하고 도망친 경상우수영 놈들 주 제에 까불긴! 느그들 임진년에도 그렇게 도망치다 다 말아묵어부렀지?" 9월 2일 경상우수사 배설이 도망간 이후 지휘선인 상선上船은 완전히 통제사의 차지가 되었다. 격군 부족에 시달리는 상선에는 전라좌수영 영 노 몇 명이 새로 들어왔는데, 김개동은 이들과 함께 8번째 좌우변 노에 배치되었다. 그런데 하필 마지막 여덟 번째 노꾼이라니. 칠천량패전 이후 배마다 격군이 부족해 예비 노꾼을 따로 둘 수 없었다. 게다가 막상 전투가 벌 어지면 안전한 배 안에서 노만 젓는 게 아니라 뒷번호 노꾼들부터 갑판 위로 올라가 전투를 해야 했다. 말만 격군이지 실제로는 양반 출신 갑사 나 거의 명목뿐이지만 그래도 높은 벼슬아치인 군관들과 함께 왜군과 싸 워야 하는 것이다. 요즘 세상에 양민 출신인 수군 정병은 무척 드물었다. 수군으로 뽑히 면 다들 도망가기 바쁘기 때문이다. 1년에 여섯 달을 바다 위나 각 진포 에서 보내야 하는데 어떤 미친놈이 힘들고 천대받는 일을 하면서 도망가 지 않을까? 그래서 수군 대부분은 영노나 사삿집 종 같은 천민이거나 아 니면 관아에 속한 중인 신분인 진무들이었다. 같은 번호 좌우변 노를 젓 는 9명 가운데 양민 신분은 거제수군 박재석 딱 하나밖에 없는데, 그 동 안 같이 지내며 알고 보니 지지리도 고지식한 놈이었다. "우린 배라도 간수했재, 니들은 머꼬? 기냥 튀었다 아이가?" "말조심해, 개이새끼야! 이름도 개똥같은 것이! 임진년에 느그들이 안 도망가고 제대로 싸웠으믄 전쟁이 이 모냥이 되지도 않았으꺼다!" "에이 씨! 봉학이 니 그만 안할래?"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구석에서 이불이 들썩거리며 우람한 팔뚝 하나 가 이불 밖으로 쑥 드러났다. 전라좌수영 진무 성복의 털복숭이 팔이었 다. 그러자 봉학이 찔끔하며 수그러들었다. 성복이 8노 노장櫓長이라서, 아니면 진무 신분이라서 존중하는 의미로 봉학이 가만히 있을 사람은 아 니었다. 성복은 작년 한산도에 있을 때 씨름대회에서 우승한 장사였다. - 따각따각따그닥따가각! 그때 말 한 마리가 요란하게 내달리는 소리가 골목을 울렸다. 말에 탄 사람의 숨결까지 느껴질 듯 가깝게 들렸다. "어매~ 징한 거! 인자 시작인갑다." 지긋지긋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성복이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아직 도 잠에서 깨지 못한 사람들을 발로 차며 깨웠다. "이놈 아그들아. 계생아! 윤금아! 돌쎄야! 얼릉 일어나랑께?" 창밖은 이미 환해진지 오래였다. 김개동도 동료들을 흔들어 깨웠다. 사 람들이 부시시 깨어나며 몸을 이리저리 돌렸다. 좁은 방에서 아홉 명이 나 같이 자다보니 발을 제대로 뻗지 못해 다들 옆구리가 쑤신 모양이었 다. "그랴. 다들 밥 묵으러 나가자. 묵어야 사꺼 아니냐. 글고 금이 니는 얼릉 동헌에 갔다오그라." 성복이 한 말에 금이가 졸린 눈을 비비고 앉아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 는 소린가 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따! 이 자슥아. 대못으로 귓구멍 한 번 팍 쑤사주끄나? 말 한 마리 가 우수영 남문에서 안 멈치고 동헌으로 막바로 들갔다는 거 아니겄냐. 인자 무슨 뜻인지 알긋냐?" "예에? 에구! 알았어유. 그럼 큰일났구먼유." 금이가 서둘러 일어나 옷을 입고 나가다가 문간에 머리를 찧었다. 잠 시 휘청거린 금이가 문을 박차고 뛰어나갔다. 성복이 혀를 끌끌 찼다. "통제사또 님은 저른 답답한 놈을 머가 이쁘다고 데꼬다니까?" = 도도 다카도라 함대 어립선, 도도 다카도라 "정찰활동에 따르면 적어도 조선수군이 명량 근처에서 일전을 벌이려 는 것은 확실하오. 다만 문제는 그 싸움의 의도요." 다카도라는 총대장이 아닌 한 명의 무장으로서 그가 생각하고 있는 바 를 말했다. 거의 동격인 무장들이 모여 이룬 연합함대인 만큼 모든 것이 합의를 바탕으로 움직여야 했다. 그것은 의외로 좋은 점도 있었는데 바 로 작전을 세울 때 모든 무장이 의견을 자유롭게 제시할 수 있다는 점이 다. 총대장이랍시고 무게만 잡고 있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고, 이는 다카 도라의 취향에 잘 맞았다. "이순신은 통제사로 임명되자 남해안 지역을 다니며 군량과 무기를 모 으고 배와 병력을 거두었소. 그래서 조선수군을 짧은 기간에 전투가 가 능한 상태로 회복시켰소. 이는 엔메이가 우리 쪽에 귀순한 조선인과 첩 자를 통해 확인한 사실이오." 다카도라 옆에 선 엔메이가 공손하게 허리를 숙였다. 평범한 기원승이 아닌 엔메이의 존재는 이미 다른 무장들도 알고 있었다. 신분으로 따지 면 승려에 불과했지만 한자와 조선말을 비롯해 조선의 풍습과 지리에 밝 았다. 그래서 무장도 아닌 엔메이가 다카도라에게 신임을 받으며 측근이 되고 작전회의에 참석해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았다. "하지만 조선인들도 대부분 이순신이 이길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고 있 소. 그럼에도 이순신은 지금 우리를 정면으로 막아섰소. 내가 생각하기로 이순신은 아마도..." 다카도라는 드디어 그가 심중에 담아두고 있던 말을 꺼냈다. "육지의 의병義兵처럼 유격전을 하려는 게 아닌가 생각하오." "유격전이라고요?" 그러자 야스하루가 놀라움에 가득 찬 탄성을 터트렸다. 그로서는 생각 도 못했던 사실인 듯했다. "해도를 잘 보면 알겠지만 조선의 남서해안은 해안선이 복잡하고 섬이 수없이 많소. 이런 지형을 이용해 갑자기 공격하고 달아나는 식으로 나 온다면 뾰족한 수가 없는 게 사실이오. 우린 수군이지만 함대에는 수송 선이 더 많다는 사실을 간과하면 안되오." 무장들이 일제히 다시 해도를 쳐다보았다. 과연 그들 앞에는 복잡하기 그지없는 전라도의 해안선이 있었다. 사로잡은 조선의 조운선漕運船 수 부에 의하면 조선수군은 수백 년 전부터 이런 해안선과 강을 이용해 배 로 곡식과 각종 물자를 날랐다고 한다. 적이지만 존경할 만한 일이었다. "우선은 좁은 명량을 가로막아 우리에게 최대한 피해를 주고 나서는 뒤로 후퇴해서 다시 싸움을 걸어오는 식으로 나올 거라 생각하오. 우린 군량과 군병을 실은 수송선을 호위해야 하기 때문에 저 해협을 지나더라 도 쉽지 않은 싸움이 될 것이오." "이, 이순신 녀석이...!" 야스하루가 입술을 바르르 떨었다. 다카도라가 말한 대로라면 조금 전 까지 비웃었던 이순신의 한줌도 안 되는 전력은 마치 몸에 붙은 이나 벼 룩처럼 두고두고 귀찮은 존재가 될 것이다. 의병이 얼마나 무서운 지는 잘 알고 있었다. 보급선이 끊긴 채 한겨울에 여름옷을 입고 싸우다 얼어 죽고 굶어죽은 조선정벌 첫 해의 참상은 기억하고 싶지도 않은 수치였 다. "따라서 이번에 이순신을 완전히 격파할 방책이 필요하오. 명량은 지 형으로 보아 몇 년 동안 이순신이 막던 견내량과 비슷하오. 서해안으로 가기 위한 유일한 길이오." "정 그렇다면 여기 진도를 돌아가 퇴로를 끊어놓은 후에 포위해서 싸 우면 어떻겠소?" 야스하루가 지휘봉으로 해도를 짚으며 제안했다. 그의 눈이 미치후사 를 흘낏 쳐다보았다. "유명한 구루지마 수군이 사로잡은 조선인 앞잡이까지 동원하면 충분 히 가능한 일 아니겠소?" 칭찬하는 말이지만 상당히 비꼬는 투였다. 어란포에 도착할 때부터 선 봉을 다투던 둘이었다. 결국은 항해에 보다 익숙한 구루지마 수군이 선 봉으로 결정됐지만 심기가 편치 않은 것이다. "그건 힘든 일이오." 다카도라는 잠시 군감 다카마사를 쳐다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옆에 서 있던 엔메이가 상체만 슬쩍 뒤로 움직여 다카도라의 투구 장식을 피했 다. 얇다지만 쇠로 만든 기다란 장식이라 꽤 무거울텐데도 다카도라는 맨 머리를 흔들 듯 자연스럽게 흔들었다. "명량을 돌아가는 길은 우선 물마루가 높아 위험하다 하오. 또한 자칫 하면 우리가 열 척 남짓한 조선수군을 두려워한다는 오해를 받을 수도 있소.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우리에게 시간이 별로 없다는 거요." 수송담당인 이에마사가 재촉했던 것처럼 가장 절실한 임무는 조선수군 의 격파가 아니라 충청도에 있는 병력에게 군량과 탄약을 공급해주는 일 이었다. 직산稷山까지 진격한 육군에서는 하루가 멀다하고 전령을 보내 보급을 독촉했다. 그들에게 이순신이 두려워 돌아가려 하니 며칠 더 기 다리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걱정되면 차라리 칠천량 때처럼 일부 병력을 육지에 올려보내 수륙 양쪽에서 치는 것은 어떻겠소? 아니면 초소카베 군이 남쪽으로 내 려오고 있다니까 그 예하병력을 투입하도록 요청하든지요." 육군군감 후쿠하라 나오다카福原直高가 의견을 내놓았다. 당시 초소카 베 모토치카長宗我部元親 군은 광주를 거쳐 나주로 남하하고 있었다. 임 진년에 공략하지 못했던 전라도를 이 기회에 초토화시키고 사람 코를 최 대한 많이 베는 것이 주 목표였다. 수송을 맡은 이에마사에 딸린 나오다카는 실력자인 이시다 미쓰나리의 여동생 남편이었다. 그런데 유능한 행정관료인 미쓰나리는 전공을 위주 로 커온 무장들의 미움을 받고 있었다. 때문에 나오다카를 보는 무장들 의 시선도 별로 곱지 않았다. "좋은 생각이지만 그것 역시 시간이 걸리는 건 마찬가지요." 이순신의 의도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음에도 확실하게 대처할 방책 이 없었다. 이것이 점점 다카도라의 불안감을 짙게 하고 있는 원인이었 다. "꼭 이순신이 달아난다고 볼 수도 없지 않습니까?" 잠자코 있던 엔메이가 불쑥 의문을 제기했다. 다카도라는 순간 무척 놀라 고개를 뒤로 돌렸다. 그러자 투구 장식을 피해 허리를 숙이던 엔메 이가 씩 웃었다. 다카도라가 물었다. "달아나지 않는다면?" "죽음을 각오하고 우리를 막을 생각일 수도 있습니다. 한 번이라도 이 기지 못하면 사기가 바닥에 떨어진 조선 병졸들이 따르지 않을 테니까 요. 유격전이라 해도 싸우려는 의지가 뒷받침되어야 하는 법 아니겠습니 까?" "그건 맞는 말이네만..." 주제넘게 기원승이 작전에 간여한다고 호통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다 카도라를 비롯해 아무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그만큼 이 자리에서 엔 메이의 말은 무거웠다. "밤이 되기를 기다려 단번에 돌파하는 건 어떻겠소?" "아니! 지금 야습을 하자는 거요? 요시아키 님." 불쑥 떨어진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반감이 가득 실린 말이 이어졌다. 놀 랍게도 요시아키는 야간전을 제안했고, 야스하루가 어이없다는 듯이 반 문했다. 다카도라는 당황해서 잠시 말을 잃었다. "우하하하!" 미치후사가 갑자기 큰 소리로 웃었다. 그러나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 았다. 핏발이 선 눈이 무서울 정도로 요시아키를 노려보았다. "농담을 하시는 거요? 아니면 갑자기 겁쟁이가 되셨소? 5백 척이 넘는 배를 가지고 겨우 열 몇 척을 상대로 도둑처럼 야습을 해야 하다니! 부 끄럽지도 않으시오?" 요시아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미치후사에게 수긍하는 눈치도 아니었다. 그러나 전반적인 분위기는 점차 미치후사가 내보이는 패기에 눌리고 있었다. 미치후사는 금방이라도 칼을 뽑을 태세로 외쳤다. "선봉은 나요! 정히 그렇게 걱정이 되신다면 내가 앞서 이순신을 상대 해 보겠소. 다른 분들은 달리 생각하는 바대로 행동하시오!" 이쯤 되자 다카도라도 어쩔 수 없었다. 더 이상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 면 사기만 해칠 우려가 있었다. 이순신이라는 인물을 의식해 신중하게 싸우려던 생각을 그만 접고 말았다. 이만한 병력으로 설마 한줌도 안 되는 조선수군에게 호되게 당할 거라 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전국시대를 평정한 도요토미 히데요시 밑 에서 주로 기술관료 일을 맡아오긴 했지만, 그래도 무장으로서 평생 밥 을 먹고 살아온 다카도라였다. "알겠소. 그럼 정면으로 부딪쳐 이순신과 조선수군을 깨뜨리도록 합시 다. 모두 이의가 없다면 이렇게 결정하겠소." 결정해 놓고 보니 간단한 일이었다. 오히려 이제는 생각을 한 곳으로 모을 수 있었다. 다카도라는 총대장으로서 부장에게 명했다. "출전의식을 준비하라!" 요시아키는 다소 불편한 듯 고개를 돌려 남쪽 수평선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 요시아키를 쳐다보는 다른 무장들의 눈은 한결같이 '겁장이' 라 비웃고 있었다. 다카도라는 요시아키를 돕기 위해 한 마디 해주려다 그만 두었다. 이미 말이 통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피와 싸움의 시 간이 다가온 것이다. = 정릉동 행궁, 정홍익 "그만 두시오! 이 시급한 마당에 사직을 옮기니 마니 하는 것이 정녕 중요하단 말이오?" "황공하오나 종묘와 사직은 국가의 근본이옵고 종묘와 사직이 옮겨지 면 국가도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동궁이 종묘와 사직을 받들고 서 쪽으로 떠나갔으니 이것은 옛날에도 없던 큰 변란입니다. 상께서 동궁은 명환하셨지만 종묘와 사직은 아직 봉환하지 않으셨으니, 어찌 대신들이 감히 종묘와 사직을 받들 수 있단 말씀입니까!" "전하! 어서 속히 종묘와 사직을 봉환하도록 명하소서. 사간원과 사헌 부의 대간들도 이구동성으로 봉환을..." "그만 두라니까요!" 며칠동안 계속된 중신들의 똑같은 소리에 질린 임금이 버럭 소리를 질 렀다. 동부승지 최천건이 뭐라 말을 꺼내려다가 임금이 노려보자 입을 다물었다. 검열 정홍익은 시큰둥하게 임금과 중신들의 대화를 초서체로 초책에 기록해나갔다. 새벽부터 어전에 모인 중신들은 무엇보다도 사직의 위치 에 관심이 많았다. 당장 왜적이 한강을 건너 쳐들어오느니 경기방어사가 성을 버리고 도망갔느니 하는 것보다는 한갓 명패가 더 중요하다는 주장 이었다. 그런데 정홍익이 이런 논의를 지겨워하는 임금을 이해할 수 없는 것 은, 심심하면 중신들에게 이 문제를 논의시키는 것이었다. 며칠 전까지 양위문제로 조정을 한바탕 시끄럽게 휘저은 것처럼, 이것도 대신들에 대 한 충성도 시험인가 하는 것이 정홍익의 생각이었다. "그건 그렇고 상국에서는 왜 아직도 군대를 안 보내는 거요? 이 시급 한 때를 당해도 양 경리는 내가 여색에 빠졌다느니 항상 술에 취해 있다 느니 욕만 하고 군대는 부르지도 않아요. 지금 몇 천밖에 안 되는 중국 군으로 10만이 넘는 왜군을 어떻게 막는단 말이오? 그리고, 도무지 북병 은 믿을 게 못돼! 이름만 그럴듯한 요동 마군馬軍이지, 언제 한 번 제대 로 왜적의 목을 얻었냔 말이오. 안 그렇소?" "하오나 천병이 없다면 종묘사직을 지킬 수가 없사옵고..." 판중추부사 윤두수가 떨리는 목소리로 임금의 말을 받았다. 지금은 죽 으나 사나 명나라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조정 중신들의 생각이었 다. 그러자 단번에 임금의 심기가 폭발했다. "군량만 축내고 여염집 분탕질이나 하는 명나라 군대 쓰레기들! 남원 성은 이틀만에 함몰하고 전주성은 싸움 한 번 못하고 내주고 직산에서도 쫓겨 허겁지겁 서울로 도망왔잖소! 그리고 지금 천장天將들은 서로 눈치 보며 요동으로 돌아갈 날만 학수고대한다 하지 않소? 에잉! 그게 무슨 천장인가?" 명나라 군대를 비난하는 임금 말에는 누구도 찬성하거나 반대하지 않 았다. 임금이 명나라 군대를 보는 눈이 극히 이중적이라는 것은 조정 중 신들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홍익은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내색하지 않고 대화 내용을 찬찬히 기록해 나갔다. 영의정 유성룡이 이 자리에 있었으면 좋은 말로 임금을 타이르겠지만, 영의정은 한강을 방어할 계책을 시행하느라 직산패전 이 후 계속 밖에 나가 있었다. 정홍익은 저으기 영의정의 건강이 염려되었 다. 그 불리한 전쟁을 그래도 이만큼이라도 이끈 것은 영의정 유성룡의 공이 컸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했다. 갑자기 조용해서 정홍익이 슬쩍 고개를 들었다. 임금이 어전에 입시한 신하 하나를 쏘아보고 있었다. 여러 중신들 가운데 좌의정 김응남이 부 복한 채 꾸벅꾸벅 졸고 있는 것이다. 임금이 냅다 소리를 질렀다. "좌상! 이순신은 뭘하고 있다 하오?" 화들짝 놀라 깬 김응남이 소매로 입에 묻은 침을 닦으며 대답했다. "삼도수군은 흥양 땅에서 물러나 진도 벽파진에 진을 치며 왜군을 막 고 있다고 하옵니다. 지난 달 28일에는 왜선 여덟 척이 쳐들어왔으나 통 제사 이순신과 함께 전라우수사 김억추가 선두에서 직접 포를 쏘며 쫓아 갔습니다. 용감한 김억추가 비록 수급은 얻지 못했으나..." "쿨럭!" 우승지 김신원이 갑자기 헛기침을 했다. 정홍익은 김신원이 왜 그랬는 지 알고 씁쓸하게 웃었다. 이순신이 보낸 장계에서는 그때 김억추가 선두에 서서 적을 내쫓았다 는 글귀는 전혀 없었다. 김억추를 전라우수사로 임명하도록 추천한 김응 남은 잠결에도 열심히 김억추 밀어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삼도수군? 열 몇 척 가지고 삼도수군이라? 웃기고 있어. 그런데 이순 신은 그저 서쪽으로 서쪽으로 도망만 가고 있다지? 비겁한 놈! 조그만 승리에 기고만장해 임금도 몰라본 건방진 놈! 만약 이번에 이순신이 안 도망가고 왜 수군을 막아내면, 내 조정 중신들 앞에서 분명히 말하겠소. 만약 그러면 내가 영변에 가서 손에 장을 지지겠소. 장을!" 임금이 그렇게 말하자 이 심각한 때에도 중신들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키득거렸다. 정홍익도 피식 웃었다. 직산전투의 패보가 전해지고 또 다시 서울이 왜군 수중에 떨어진다고 아우성을 친 며칠 전이었다. 지사知事 신잡이 진언하기를 '주상 전하께서 는 영변으로 가소서. 신은 일찍이 평안도 병사로 있어서 영변의 사정을 자세히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걱정되는 것은 곧 간장과 된장이 없 는 것입니다. 장을 미리 준비하지 않으면 어찌 소용되는 것을 댈 수 있 겠습니까?' 하였다. 하여튼 나라가 망할 판에 사직을 이리 옮기라 저리 옮기라 하는 데에만 정신 팔린 중신들이나, 임금이 피난 가는 판에 장 걱정을 하는 지사나, 정홍익은 다 똑같이 한심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순신 밑에 누가 있소? 중군장은 누구요?" "미조항첨사 김응함이라 하옵나이다." 병조를 맡은 좌부승지가 없어 우승지 김신원이 서장을 뒤적인 다음 대 신 대답했다. 그러자 임금이 코방귀를 흥흥 뀌었다. "그 사람은 혹시 우리 수군이 한산 싸움에서 패할 때 주장을 버리고 도망친 사람이 아니오? 다들 그랬지 않소?" "김응함은 당시 병이 있어 싸움에는 참가하지 않았다고 하옵니다." 김신원이 몹시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정홍익이 보기에 임금 의 못된 버릇이 다시 나오는 순간이었다. "흥! 주사舟師들이 거짓말하는 버릇을 믿을 수 있어야지. 그럼 다른 장 수들은 어떻소? 수군 여러 장수들이 지은 죄를 가려내 법대로 처리했어 야 하는데, 왜 아직도 습관에만 얽매어 위엄을 밝힐 교훈을 보여주지 않 는 것이오? 이럴 때일수록 잘못이 있는 장수는 목을 베어 군율을 엄히 지켜야 할 것 아니오? 어서 서둘러 권징勸懲을 시행할 방도를 마련해 보 시오!" 잠시 말이 없었다. 이것은 임금이 틈만 나면 들고 나오는 문제였다. 그 러나 왜 수군을 막고 있을 수군 장수들을 함부로 처벌할 수도 없는 일이 었다. "하오나 원균이 주장으로서 제대로 절제를 하지 못해 적들이 불시에 기습하도록 해서 전군이 패배했습니다. 그러니 죄는 모두 주장인 원균에 게 있다 하겠습니다. 지금 원균은 어디에 있는지 모르고 그 아래 장수들 은 지금 벽파진을 막고 있지만, 주상께서 그렇게 하교하시니 죄 지은 장 수에게는 벌을 내려 군기를 바로잡지 않으면 안되겠습니다." 비변사 당상 홍진이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정홍익이 천천히 고개 를 끄덕였다. 그것은 이순신과 수하 무장들에 대한 선조의 무조건적 혐 오감이 섞인 허튼 명령을 막을 유일한 답변이었다. 그리고 정홍익은 임 금이 이때 어떻게 대답할 지 예상했다. "흥! 원균 한 사람에게만 핑계대지 마시오. 원균은 충성스럽고 머리가 뛰어난 장수요." 역시 예상이 그대로 맞아 떨어졌다. 정홍익은 참을 수 없었다. 그가 알 기로는 대장인 원균의 죄가 가장 컸다. 척후도 세우지 않고 적진 속에서 술 먹고 잠을 자다니! 그런데도 임금은 원균을 잡아들이라는 명령도 내 리지 않았다. 원균은 지금도 어디선가 숨어있을 것이 틀림없었다. 칠천량패전 직후 당시 원균과 함께 배에서 내린 선전관 김식은 원균 이 달아나지 못해 소나무 밑에 앉아 있고 왜병들이 칼을 빼들고 달려들 었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며칠 후 도원수 권율이 보고한 바에 따르면 도 원수의 군관 최영길이 원균을 진주로 향하는 길에서 만났다고 했다. 얼 핏 엇갈리는 진술 같지만 선전관 김식은 원균이 죽는 모습을 본 적은 없 고 다만 죽었을 것이라고 추측했을 뿐이었다. 그때 원균은 최영길에게 대선 18척과 전라도의 전선 20척이 흩어져 있 고 한산도에 머물러 있던 군사와 백성, 군기를 남김없이 창선도에 집합 시켜 놓았다고 했다. 그리고 격군이 도망간 판옥선은 모두 육지에 정박 시켜 놓았고, 사망자는 많지 않다고 전했다. 상당히 자세하게 수군 실정을 말한 것으로 보아 원균이 살아있었을 가 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임진왜란 당시 영의정 또는 도체찰사로서 전쟁 을 지휘했던 유성룡이 지은 징비록에서도 원균이 그때 전사했는지 아니 면 살아남았는지 알 수 없다고 적었다. 임금이 딴 생각을 하는지 멍하니 천장을 보고 있었다. 잠시 짬이 난 정홍익이 호흡을 가다듬고 일필휘지로 써내려나갔다. '사신은 논한다! 한산의 패배로 인해 원균은 책형을 받아야 마땅하지 만 다른 장졸들은 모두 죄가 없다. 왜냐하면 원균이라는 사람은 원래 거 칠고 사나운 한낱 무지한 위인으로서 당초 이순신과 공로 다툼을 하면서 갖가지 방법으로 모함하여 결국 이순신을 몰아내고 그 자리에 앉았기 때 문이다. 말로는 단 한번 싸움에 적을 섬멸할 듯 큰소리를 쳤으나, 머리가 나쁘고 조심성이 없어 적을 보자 놀라 수군을 지휘할 생각도 하지 않고 배를 버리고 뭍으로 올라왔다. 그래서 사졸들이 모두 어육魚肉이 되게 내버려두었으니, 그 죄를 누가 책임져야 하는가? 한산에서 한 번 패하자 뒤이어 호남湖南이 함몰되고, 호남이 함몰되고서는 나랏일이 다시 어찌 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아! 요즘 일을 보면 가슴이 찢어지고 뼈가 녹으 려 한다.' 써놓고 보니 그럴듯했다. 특히 마지막 문장이 꽤나 마음에 든 것이다. 정홍익이 다시 천천히 읽으며 빙긋 웃었다. 그때 정홍익은 따가운 시선을 느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조정 중신들 은 물론이고 주상까지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화들짝 놀랐지만 내색하지 않고 천천히 붓을 놀렸다. 그러나 따가운 시선은 점점 더 커졌다. "너 뭘 그렇게 많이 쓰는 거냐? 또 사신은 논한다 어쩌고 자빠졌냐?" "예? 예. 황공하옵니다." 정홍익이 황급히 엎드렸다. "대답할 필요는 없다만, 설마 내 욕하는 건 아니겠지?" "망극하옵니다. 소신이 감히 그럴 리가 있겠사옵니까?" 정홍익이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 임금이 무섭긴 하지만 그렇다고 사초 를 임금에게 보여주거나 내용을 발설할 수는 없었다. 이것은 왕의 잘잘 못을 기록해 옛일을 교훈 삼게 한다는 실록과, 그것을 기록하는 사관의 존재가치 자체를 부정하는 일이었다. 선배 사관들은 목숨을 걸고 사초를 지켰다. 성왕이라고 하는 세종이 한때 사관들을 협박했지만 세종도 끝내 사초를 보지는 못했다. 사관은 자부심에 살고 죽어야 한다는 것이 정홍 익의 신념이었다. 임금이 불쾌한 듯 고개를 돌렸다. "쳇! 사관 이놈들. 평소엔 사명감에 불탄 듯 그렇게 잘난 척하더니 도 망가던 꼴이라니! 임진년에는 임금을 버리고, 목숨보다 중하다던 사초까 지 다 버리고 도망갔었지? 고얀 것들! 주둥이만 살아 나불거리는 쓸데없 는 것들!" 3. 이른 아침(3) * 점점 개그가 되는 듯합니다..-_-;; 지나치게 썰렁하면 말씀 좀 해주 세요. 다음 회까지가 전투 직전이니까 조금 더 기다리시면 화끈하겠지요. = 전라우수영, 김억추 전라우수사 김억추는 동헌에 가만히 좌정하고 있으려니 온몸이 뒤틀릴 지경이었다. 끔찍한 냄새를 지금까지 꾹 참고 있었지만 아차 하면 토할 것 같았다. 진도 쪽의 먼 산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고개를 슬쩍 돌렸다가 당장 눈살을 찌푸렸다. 붉은 두정철갑을 입었지만 다부진 인상의 무장과는 거리가 멀고 오히 려 늙은 박수무당 같은 병든 노인이 김억추 눈에 들어왔다. 비쩍 마른 얼굴, 쫙쫙 갈라지고 튼 살갗, 퀭한 두 눈 주위에는 눈꼽인지 부스럼인지 누런 것이 가득했다. 특히 온몸에서 풍기는 썩는 냄새는 끔찍했다. 산채 로 썩어 가는 시체라고나 할까? 바로 이 사람이 왜 수군을 보이는 족족 쳐부숴 조선수군만 보면 벌벌 떨게 만들고 5년 동안 부산포에 꽁꽁 묶어놓았던 겸 삼도수군통제사 이 순신이라니, 김억추는 한심한 생각이 들었다. 탁자 북쪽에 앉은 통제사는 동헌 기왓담 너머로 보이는 회색 바다에 오랫동안 눈길을 주고 있었다. 김억추가 외면하려는 순간 통제사가 슬며 시 고개를 돌렸다. "홍 첨사는 아직도 오지 않았소?" "임치첨사 홍견 말씀입니까?" 김억추가 사무적인 말투로 되물었지만 속으로는 코웃음을 쳤다. 올 것 같았으면 휘하 전선들을 거느리고 벌써 왔을 것이다. 홍견이 군관을 이 곳 우수영에 보내면서 첨사진에서 화약을 준비합네, 격군을 모집합네 하 지만 다 핑계인 줄 아직도 모른단 말인가? 아마 홍견은 이순신이 직접 붙잡아 끌고 오거나, 아니면 왜군과 싸우지 않는다는 확실한 보장이 있 어야 얼어붙은 발을 뗄 것이 뻔했다. 그리고 만약 홍견이 지금 올 사람 이라면, 애당초 칠천량에서 우수사 이억기를 버리고 도망가지도 않았을 것이다. '답답한 사람 같으니! 저렇게 사람을 잘 믿으니 뻑하면 배신당하고 나 서 가슴앓이나 하는 게지. 쯧쯧!' 김억추가 혀를 찼다. 우수사로 제수 받아 이곳에 온 뒤 아직 얼굴 한 번 본 적도 없지만, 임치첨사는 어쨌건 김억추가 장관인 전라우수영 소 속이었다. 그래서 김억추는 내키지 않지만 건성으로나마 대답했다. "예. 분명히 오늘 새벽까지 오겠다고 했습니다만. 아무래도 바람길이 막힌 모양입니다." 전라도 서해안 전체가 담당구역인 임치첨사가 거느린 전선은 지금도 꽤 여러 척이 남아있다고 들었다. 임치첨사 휘하이지만 여기 이 자리에 있는 남도포만호 강응표 말에 의하면, 임치진에 목포만호 방수경, 다경포 만호 윤승남이 거느린 전선이 있고, 그밖에 검모포, 군산포, 법성포 전선 들이 있다고 했다. 적게 잡아 포구당 3척씩만 해도 임치첨사진 휘하에 있는 판옥선은 10척이 넘었다. 물론 칠천량 패전 때 군사들이 판옥선을 버리고 육지로 도망간 경우가 많았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임진년 이후 원래 전라우수영 소속이었던 서 쪽 해안 지방이 대거 육군에 넘어가는 바람에 각 포구마다 판옥선이 많 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배는 남아돌아도 전선을 몰고 싸움을 할 군사와 격군이 없는 것이다. 그리고 무안현감 남언상을 비롯해 수군에 소속된 몇 안 되는 지방 관 리들은 분명히 한산도에서 무안으로 돌아오긴 했는데, 지금은 대부분 행 적을 알 수 없거나, 불러도 오지 않았다. 물론 와봤자 여기 모인 장수나 수졸들처럼 겁에 질린 쓸모 없는 식충이일 게 분명했다. 이 마당에 열 척이면 어떻고 스무 척이면 어떤가? 김억추는 당장 도망가는 것만이 살 길이라고 여겼다. "치도곤을 칠 놈!" 통제사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나 통제사의 왼쪽, 즉 동쪽에 앉은 김억추는 여유가 있었다. 불패의 신화를 일궈내고 백성들에게 신망을 받 는 이순신이라지만 이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을 것이다. 그럼 후퇴해야 할 테고, 죽도록 싸울 필요는 없을 것이다. "통상統相! 광주목을 노략질한 왜군들이 남쪽으로 내려오고 있다고 합 니다. 대책이 있어야 합니다." 어서 후퇴하자는 뜻인데, 말을 해놓고 보니 똑같은 이야기를 벌써 세 번째 한 셈이었다. 통제사가 흘낏 보더니 고개를 홱 돌려 외면해버렸다. 머리를 긁적인 김억추가 먼 산을 보며 궁시렁거렸다. "수군을 거느리고 강화도에 머물면 한강을 지켜 근왕한다는 명분도 있 고, 명나라 수군이 물길을 타고 내려오면 합세해서 함께 왜적을 칠 수도 있다던데 말입니다. 아! 오늘은 꽤 춥습니다, 그려." 안개가 많은 서남해안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하늘이 무척 맑았다. 점점 이 뿌려진 섬들 사이로 푸른 바다가 넘실댔다. 통제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수군 장졸들이 싸우려 하겠습니까? 한산도에서도 주장을 버 리고 다 도망갔는데, 그때보다 훨씬 더 불리한 지금 새삼스럽게 말해 무 엇하겠습니까? 그리고 전라도 곳곳이 지금 왜적들로 가득한데, 여길 지 켜 무엇하겠습니까. 그렇지 않소, 우 부사?" 김억추가 괜히 옆에 앉은 우치적에게 말을 건넸다. 지난 두 달 동안 주장인 원균을 버리고 도망갔다는 비난을 한 몸에 받아온 순천부사 우치 적은 땀만 삐질삐질 흘리며 대답이 없었다. 통제사가 노한 눈길로 김억 추를 한 번 쳐다보더니 불쾌한 듯 고개를 홱 돌렸다. "그리고 통상! 그거 아십니까? 제가 우수사를 제수 받은 날 좌상 대감 께서 제게 술을 따라주며 하신 말씀입니다. 주상께서 한산도에서 패전할 때 도망간 제장들을 모조리 참해야 한다고 펄펄 뛰셨다고 합니다. 지금 이야 괜찮겠지만 앞으로 싸움이 조금 진정되면 그때 도망친 장수들 목숨 이 어떻게 될 지 알 수 없습니다." 말을 마친 김억추가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얼굴이 거의 사색이 된 만 호, 첨사, 군수, 현감들 20여 명이 김억추 뒤에 앉아 있었다. 다들 수군절 도사와 같은 품계인 정3품 당상관이랍시고 동쪽에 자리잡은 것이다. 상 전 잘 만나 출세한 경우랄까? 김억추는 여기 모인 장수들 중에 당상관이 당하관보다 많은 현실을 비웃었다. 다시 고개를 돌려보니 탁자 건너편 서쪽에는 아무도 없고, 남쪽에는 융복을 입은 선전관 한 명만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앉아 있었다. 그리 고 거제현령 안위와 평산포대장代將 정응두 둘은 탁자에서 떨어진 대청 마루 끝에 앉아 있었다. 누구는 기준 직급이 종6품 현감이면서도 당상관 인데, 안위는 종5품 현령이면서도 공을 세운 것이 없어 직급이 올라가지 못했다. 김억추가 둘을 보며 속으로 비웃었다. '수군에 있으면서 승진도 못한 한심한 놈들.' 특히 안위는 더 그랬다. 안위는 거제현령이 되어 수전에 참여한지 오 래 되었지만, 하필 수군으로 간 계사년 이후에는 전쟁이 소강상태에 들 어 공을 세운다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았다. 게다가 안위는 역적으로 몰린 정여립의 오촌조카였다. 수천 명이 피해 를 입은 기축옥사 때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고 북변에 귀양갔다가, 왜란 이 터지자 돌아와 무과에 급제했다. 지금은 전쟁통이라 목숨은 붙어있지 만 언제 다시 귀양을 가거나 역적으로 처단될 지 모르는 불안한 신분이 었다. 김억추가 안위를 보며 씩 웃자 안위가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 '흥! 승진하려고 발악하는 역적의 일가!' 안위에 대한 김억추의 평가는 냉정했다. 결국 안위는 왜군 진영을 방 화할 계획을 세웠고, 부하 몇을 보내 왜군이 우글거리던 부산포를 홀랑 태워먹었다. 불은 바람을 타고 번져가 왜군은 밤새도록 아우성쳤다. 그러나 이것이 오히려 화근이 되어 이 통제사가 남의 공을 빼앗고 임 금을 속였다는 죄목으로 끌려가는 계기가 되었다. 부산 근처에는 가지도 않은 이조좌랑 김신국이 장계를 올려 부산포를 불태운 건 도체찰사 이원 익의 명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그러나 안위는 파직 당하지 않았다. 그것이 무슨 말인지 뻔했다. 안위 가 실제로 계획을 세우고 지휘한 것이 맞은 것으로 밝혀졌다는 뜻이다. 조정 대신들은 멀리서 일어난 일이라 확실히 파악하기 전에는 알기 어렵 다고 물러섰지만, 그때는 이미 이순신이 파직된 다음이었다. "수사! 수사는 어찌 그리 말을 하시오? 뛰어난 장수라도 많은 적을 맞 아 싸우다 패할 수도 있고, 세가 불리하면 물러설 수도 있는 것이오. 그 런 불행한 일도 있었지만 제장들이 이번에 공을 세워 패전했던 죄를 씻 어야 옳지 않겠소?" 여러 가지 감정이 뒤섞인 말이었다. 특히 통제사는 김억추에 대해 불 편한 마음을 감추지 않았다. 잠깐 대동강을 지켰던 것 빼고 수군은 처음 인데, 그까짓 격군이나 화포 숫자 못 채웠다고 길길이 날뛰다니. 참 고지 식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김억추는 통제사를 보며 빙긋 웃었다. "패전이라니요? 그냥 도망간 거지요. 왜군에게 잡혔다 도망쳐온 사람 들도 그렇게 말하고 남원성을 지키던 양원 총병도 그렇게 말하더이다. 한산도에서 패전할 때 목숨 걸고 싸우다 죽은 장수는 단 한 명밖에 없다 고 말입니다." "어허! 무슨 말씀이시오?" 노한 통제사가 그렇게 말하고 주변을 살폈다. 김억추가 슬쩍 뒤를 돌 아보니 여러 장수들은 얼굴이 뻘겋게 달아오른 채 그저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김억추는 그런 수군 장수들이 무척 가소로웠다. 유리할 때는 공을 세 우려고 앞다퉈 돌격해도, 조금이라도 불리하면 곧 도망가는 것이 조선의 장수들이었다. 그렇다면 장수라는 게 일반 병졸들과 무슨 차이가 있을 까? "끝까지 싸우다 죽은 김완 조방장만 불쌍하게 됐을 뿐이외다." 김억추가 뜰계단의 군관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두정갑이나 경번갑을 입은 군관들은 초조한 기색으로 서 있었다. 그리고 뜰아래에는 까만 흉 갑을 입고 활과 조총으로 무장한 진무들이 도열해 있었다. 담 밑에 선 녹사와 서리, 아전들은 오들오들 떨며 오직 통제사의 눈치를 보느라 바 빴다. 김억추 말처럼 당시 명군이나 조선 조정은 여러 수군 장수 가운데서 김완 혼자서만 끝까지 싸우다가 바다에서 전사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 나머지는 전사한 자가 있더라도 싸우지 않고 허겁지겁 도망치다가 죽었 다는 것이 일반적 평가였다. 그러나 김억추가 말한 것은 나중에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임 진왜란 초기부터 이순신 밑에서 사도첨사로 활약했던 조방장 김완은, 왜 군에게 사로잡혔다가 나중에 일본에서 탈출한다. 죽은 줄 알았던 김완도 사실은 살아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되면 칠천량해전에서 제대로 싸우다 죽은 장수는 한 명도 없 다. 그러나 당시 전라우수사 이억기나 충청수사 최호는 싸우다 죽은 것 으로 되어 있다. 수하 무장들이 다 도망갔어도 수사들은 책임감과 자부 심 때문에 끝까지 싸우다 죽거나 스스로 물에 몸을 던져 생을 마친 것이 다. "그런데, 통상. 충청수군은 왜 안 오는 겁니까?" "강화도에서 근왕을 하거나, 격군이 없어 못 내려오는 모양이지요." 김억추에게 대답하는 통제사의 말에는 억센 가시가 돋아있었다. 사실 충청수군이 합세해도 조선수군의 전력은 큰 차이가 없었다. 겁에 질린 조선수군은 싸울 의지가 전혀 없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었다. 조정 에서도 수군을 폐한다는 명령을 내렸다. "선전관 보시오." "예!" 선전관 강협이 앉은 채 통제사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일어나서 중문으로 갑시다. 더 늦기 전에 국궁의 예를 치러야겠소." 국궁鞠躬이란 말 그대로 몸을 공처럼 구부린다는 뜻이다. 즉 서로 인 사하는 예식이다. 선전관 강협은 품계는 낮지만 왕의 사신이라 누구도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통제사와 선전관이 일어서자 다른 무장들도 일어나 두 사람을 따라갔 다. 서리書吏 및 아전, 진무들이 눈치를 채고 먼저 중문을 우르르 빠져나 갔다. 군수, 현령, 현감 등 지방관들을 따라다니던 녹사綠事들은 선전관 이 중문 앞에 서자 일제히 허리를 굽혔다. "작은 배를 내드릴테니 반드시 수로를 통해 가시오. 육로는 이미 막혔 다 하오." "고맙습니다." 통제사와 선전관이 맞절을 했다. 다른 장수들도 선전관에게 허리를 굽 혀 절했으나 김억추만은 먼 산을 보며 외면했다. 저 선전관은 겨우 종8 품이라고 들었다. 아무리 왕명을 전하는 자라지만 절을 하고 싶은 마음 은 추호도 없었다. "나와 장수들은 여기서 죽기를 각오하고 왜적을 막을 것이오. 선전관 은 부디 주상전하를 잘 보필해 주시기 바라오." "통제사 영감을 잊지 않겠습니다. 무운을 빕니다." 선전관이 허리를 반쯤 숙이며 인사했다. 다시는 못 볼 사람을 보는 눈 길이었다. 그리고 바로 중문을 나섰다. 선전관을 군관 한 명이 따라가면 서 안내했다. 중문 밖에는 서리들이 땅에 엎드려 있고, 아전과 진무들은 대문 바깥에서 꿇어 엎드리고 있었다. "쳇! 누구는 저런 융숭한 대접을 받으면서도 싸움에 안 나서도 되니 참 좋겠다. 안 그러냐?" 김억추가 옆에 서 있던 김응추의 허리를 쿡 찔렀다. "그럼 형님도 선전관이나 하슈." 군관 김응추가 김억추를 잠시 흘겨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통제사가 헛 기침을 하며 서 있었다. 김억추는 통제사가 무슨 말을 하나 지켜보았다. "어제 내가 누누이 말한 것처럼 죽으려 하면 살고, 살려고만 하면 죽 는다는 사실을 명심하시오. 그리고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명의 적 이라도 두렵게 한다는 사실도 명심하시오. 우리가 더 이상 물러서면 서 울이 위험하오. 죽기를 각오하고 싸울 곳은 바로 이곳이오!" "큭!" 김억추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김응추가 눈치를 주었지만 김억추는 웃 음을 참느라 얼굴 근육을 일그러뜨리고 있었다. 통제사가 김억추를 보며 잠시 실룩이다가 군관 송대립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여봐라! 장2호를 불어라!" = 전라우수영 성문 밖 초가집, 계생 "요요요! 이리 한번만 와보랑께." 전라좌수영의 영노 계생은 강아지와 함께 장난을 치고 있었다. 다른 격군들은 다들 배가 불러 마당에 늘어져 있고, 성복은 방으로 들어가 밖 으로 다리를 내놓은 채 잠을 자고 있었다. 누런 강아지가 꼬리를 흔들면서 달려왔다가 계생의 손길을 피해 홱 돌 아서 뛰어갔다. 처마 밑에서는 젖퉁이가 부어오른 어미개가 걱정스런 눈 길로 강아지와 계생을 지켜보고 있었다. 똘똘하게 생긴 강아지 두 마리 도 의젓하게 앉아 계생과 막내 강아지가 노는 꼴을 지켜보았다. "아따! 이 자슥아. 안 잡아묵으께 좀 와바라." 계생은 강아지를 안아보고 싶었지만 쉽게 기회를 주지 않았다. 달려가 서 잡으려니 어미개가 무서워 함부로 그럴 생각도 못했다. 크지는 않았 지만 다른 동네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흐리멍텅한 누렁이가 아니라 마치 늑대 같았다. 계생이 어미개를 겁내는 걸 알았는지, 강아지가 오히려 사 람을 약올리고 있었다. - 뿌우우~ 뿌우우~ 강아지가 깜짝 놀라 뛰어 도망갔다. 계생도 화들짝 놀랐다. 길게 부는 나발소리가 두 번 연속 울렸는데, 그것은 분명 장2호, 출전을 알리는 나 발이었다. 다른 격군들도 바짝 긴장했지만, 다들 몸을 움직이지 못했다. "자! 나가자!" 성복이 벌떡 일어났다. 말없이 앉아있는 사람들을 한번 쭉 살피던 성 복이 계생과 눈을 마주치며 피식 웃었다. 성복은 계생을 겁쟁이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성복이 보따리를 들고나서자 계생도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사립문을 나섰다. 다른 사람들 걸음도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소걸음이었다. 봉학만 이 어깨에 활집을 메고 늠름하게 걷고 있었다. 종놈이 활을 차니 어울리 지 않았지만, 그래도 겁에 질려 있지 않은 동료를 한 명이라도 볼 수 있 어 다행이라고 계생은 생각했다. 양쪽에 늘어선 초가집의 돌담 사이로 난 넓지 않은 골목은 어느새 사 람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민가에서 쏟아져 나오는 사부와 격군들도 있었지만, 우수영에 몰려온 피난민들이 더 많았다. 다들 침울한 얼굴들이 었다. - 둥! 북소리가 한번 나고, 20걸음쯤 가니 다시 북소리가 울렸다. 계생은 수 군들의 굳은 얼굴을 보고 우울했다. 저렇게 겁에 질린 수군을 믿고 노를 저어야 한다니, 걱정이 들었다. 살아서 다시 땅을 밟을 수 있을까? 이번 에 배를 타면 묻힐 곳은 땅이 아니라 물일 것 같았다. 그것도 파란 바닷 물이 아니라 격류에 진탕된 명량의 흙탕물이었다. 계생이 다시 피난민들 표정을 살폈다. 대부분 여자와 아이들인 피난민 들은 수군들을 마치 죽으러 가는 사람을 보는 듯했다. 안쓰럽다는 듯 혀 를 차는 노인도 있고, 흐느끼는 아주머니도 있었다. "아, 울지 말어, 이 사람들아! 우리가 죽으러 가나? 재수 없게 울기는." 성복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성복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과연 그렇다고 표정으로 말하는 듯해서 계생은 더 슬펐다. 성복이 피식 웃었 다. "쳇! 죽으믄 되꺼 아녀? 도망가도 어차피 죽는 건 마찬가진디, 머." "행님은 참 낫낫하요." 봉학이 아부인지 모를 말을 하자 성복이 봉학의 활집을 보며 부러워했 다. "좋겄다. 니는 활 쏠 기회만 있으믄 신이 나는 거 같드라. 허긴, 방패 판에 엎드리서 발발 떠는 군관 양반네들보다야 니가 더 낫지." 성복이 가래침을 땅에 퉤 뱉었다. 계생이 슬쩍 피하자 성복이 느글느 글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야, 계생아. 이 개새끼야. 울지 마더라고오~ 근디 윤금이 씨발놈 어딨 냐?" "어? 안 보이는디요." 계생이 두리번거렸지만 근처에는 없었다. 계생은 성복에게서 떨어질 불호령을 예상하며 어깨를 잔뜩 움츠렸다. 그러나 큰소리는 나오지 않았 다. "쓰벌 잡것! 도망갔는갑다. 육시럴 것!" "지가 찾으러 가까요?" "쳇! 내비도라. 쪼끔 전에도 있었는디, 그 새 티부린 모냥이다. 지끔 어 디서 찾겄냐? 그냥 가자. 차라리 판옥선에 있는 거이 더 안전하껀디. 빙 신!" 성복은 기분이 잡친 듯 성큼성큼 걸어갔다. 봉학도 성복을 따라 발걸 음을 빨리해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앞서나갔다. 계생이 그들을 따라가려하자 경상도 수군 박재석이 계생을 붙잡았다. "여보게." "무슨 일이슈?" 계생이 시건방지게 대답하며 박재석의 위아래를 살폈다. 추레하게 차 려입은 데다가 흉갑만 달랑 입고 있는 모습이 영 어울리지 않았다. "설마 이곳에서 싸우지는 않겠지?" "사또 나리가 싸운다 안 그랬소?" 계생이 대답하자 박재석이 황당하다는 듯이 눈을 꿈뻑거렸다. 경상우 수영의 영노 돌쇠와 김개동이, 사삿집 종 마당쇠도 놀라 얼른 입을 열지 못했다. 간신히 정신을 차린 박재석이 다시 물었다. "겨우 열 세 척으로 천 척을 상대한단 말인가? 그게 말이 되나?" "통제사또 나리가 싸운다 그랬으믄 싸우는 것이요. 허튼 소리할 양반 이 아니랑께요. 우린 오늘 다 뒈져불겄지라. 인자 댔소?" 박재석과 다른 노비들의 안색이 하얗게 변했다. 장수나 양반들이 큰소 리치는 경우는 많이 봤지만 제대로 싸우는 것을 한번도 보지 못한 듯했 다. 계생이 피식 웃었다. "나도 통제사 나리가 무섭당께요. 사람이 좋을 때는 한참 좋다가, 무서 블 때는 드럽게 무섭지라. 그래도 워낙에 잘 싸운께 우리 같은 쫄따구가 잘 안 죽어라. 아재도 무섭드라도 싸울 때 도망가지만은 마씨요. 통제사 또 나리가 달리와서 바로 쳐죽이꺼요." 말을 마친 계생이 고개를 홱 돌렸다. 계생의 말에 전라도 수군들은 당 연하다는 듯한 얼굴을 했지만, 경상도 수군들은 파랗게 질렸다. 그때까지 잠자코 듣던 마당쇠가 한마디했다. "젠장맞을! 양반, 양인 놈들은 다 도망가고 우리 같은 노비들이나 싸우 라카네. 세상 더럽다. 칵, 퉤!" "이놈아. 나도 양인이다." 박재석이 배를 내밀며 윽박지르자 마당쇠가 어깨를 움츠렸다. 그러나 불만이 가득 섞인 눈길이었다. 어느새 포구가 눈에 가득 들어왔다. 진도쪽으로 삐죽 내민 땅과 양도 라는 작은 섬 사이의 바다는 판옥선 13척과 같은 수의 사후선으로 채워 져 있었다. 사부와 격군들이 줄지어 배에 오르고 있었다. 이곳은 다른 서남해안과 달리 밀물과 썰물의 차이가 별로 없는 것 같 았다. 그래서 계생이 서너 번 본 이 포구는 언제나 똑같은 모습이었고, 축대 밑으로 물이 찰랑찰랑했다. 파도도 없는지 돌 서너 개로 낮게 쌓은 축대 바로 옆에까지 집들이 이어졌다. - 뻥! 뻐벙! 대포소리에 놀란 사람들이 고개를 돌렸다. 언덕 너머로 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영등포 1호선이 왜선들을 맞아 싸우고 있었다. = 전라우수영 관사, 이회 밖에서는 대포소리와 북소리로 어지러운 이때, 이회는 방에서 아버지 물건을 챙기고 있었다. 각종 편지와 공문서, 장계초본, 이곳저곳에 보낼 작은 인사치레용 선물꾸러미들. 특히 누런 표지로 된 책들을 조심스럽게 집어들었다. 이회는 책과 문서들을 보따리에 담다가 문득 책 한 권을 꺼냈다. 해서 체로 병신년일기라고 쓰인 책이었는데, 잠시 씁쓸하게 보던 회가 책을 슬쩍 펼쳤다. 초서체로 갈긴 글자가 가득한 이것은 아버지 이순신의 일 기였다. 가끔 아버지의 일기를 훔쳐보기는 했지만 오늘 다시 보니 감회가 전혀 새로웠다. 이회는 이번이 아버지의 마지막 전투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자 무척 안타까웠다. 이회가 일기를 천천히 넘겼다. 어느 날은 누구 누구를 만나고, 부하들 에게 어떤 일을 시키고, 누가 무슨 말을 했는지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그리고 어떤 사안에 대해서는 생각을 자세히 기록하기도 했다. 항상 이기는 싸움을 해왔고 지는 것을 무엇보다 두려워한 아버지였다. 사람들은 아버지를 대단히 지혜롭고 용감한 장수로 여기지만, 그리고 군 법시행에 무척 냉정한 장수로 알지만 그것은 아버지의 고민과 풍부한 감 정을 모르고 하는 이야기였다. 젊어서 과부가 되셔서 평생 고생하신 할머니를 그리워하며 눈물짓는 아버지를 옆에서 지켜보노라면 답답할 지경이었다. 그리고 아들, 이회에 게는 동생을 집으로 보내면서도 제대로 길을 갈까 며칠째 잠을 못 이룰 정도로 작은 걱정에 정신을 가누지 못하는 분이었다. 그래서 같이 출발 한 종이 서둘러 다시 돌아와 무사도착을 알려야 했고. 종이 조금이라도 늦으면 병이 나실 정도로 아들들에게 다정다감한 분이었다. '그러면서도 어머니께는 항상 냉정하시지.' 이회가 씁쓸하게 웃었다. 아버지는 일기에 어머니에 대해서는 거의 언 급을 하지 않으셨다. 편지도 잘 안하시고 안부도 물은 적이 거의 없으셨 지만 어머니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는 잘 알고 있었다. 어머니도 내색은 않으셨지만 그걸 알고 계셨기에 힘든 생활을 버틸 수 있었다고 생각했 다. 첩을 두고 아들 둘에 딸 하나를 얻으셨지만 어머니는 그에 대해 단 한 번도 말을 꺼내지 않으셨다. 일기를 몇 장 더 넘겼다. 수군으로 견내량을 꽉 틀어막은 아버지는 매 일 같이 술로 보내고 계셨다. 아침부터 술로 시작해 저녁도 술로 끝났다. 어떤 날은 이임 인사차 온 부하 장수에게 억지로 술을 먹여 크게 취한 장수가 떠나지 못하게 한 적도 있었다. 이회가 빙긋 웃었다. 그러나 이것이 조정 중신들의 미움을 사게 된 원인이기도 했다는 사실 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제대로 된 병력을 줘야 부산포로 가든지, 다 른 왜군 진영을 부수든지 할 게 아닌가? 아버지는 전쟁 내내 병사 부족 에 시달리셨다. 군량이나 무기는 어느 정도 자체해결을 했지만 병사 부 족 문제만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래서 전쟁 이듬해인 계사년부터 작 년 병신년까지 내내 앞으로 진군하지 못하고 견내량 봉쇄에 급급했던 것 이다. 아버지가 술에 빠져든 것은 원수를 몰아내지 못하고 있다는 좌절 감을 견뎌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윽! 이게 뭐야?" 이회가 갑자기 땀을 흘렸다. 작년 9월, 서남해안 순행길을 기록한 일기 인데 특이한 글자가 눈에 띄였다. 홱 덮었다가 다시 슬며시 그 부분을 열어서 꼼꼼히 읽어보았다. 무장현에 며칠 머무를 때의 기록인데, 글을 읽는 이회의 눈이 크게 떠지며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9월 12일 (전략) 여진女眞과 잤다. 9월 14일 하루 더 묵었다. 여진과 두 번 관계했다. 9월 15일 (전략) 여진과 세 번이나 관계했다. "참! 아버지는 힘도 좋으셔." 이회가 머리를 벅벅 긁었다. 여진이 무장현에 속한 관기인지 아니면 여종인지 몰라도 꽤나 아버지 마음에 드신 듯했다. 그렇다고 일기에까지 이런 걸 쓰시다니. 아버지는 거의 일평생을 외관으로 떠돈 무관이셨다. 이회가 어릴 때부 터 아버지가 집에 오신 것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였다. 그런데도 어머 니와 첩실 부안댁에게서 낳은 자식이 많은 것은 이런 이유가 있구나 하 는 생각이 들어 실없이 웃었다. 3. 아침 (1) = 도도 다카도라 함대 어립선, 도도 다카도라 전투에 임하는 무장들이 바라는 것은 두 가지가 있을 수 없다. 오로지 '승리'라는 한 가지 뿐이다. 출전하기 전에 거행하는 의식은 모두 이 승 전을 기원하는 의식이었다. 전국시대에 태어나고 자란 무장들은 싸움에 나가는 것을 신성시했다. 그래서 신의 가호로 승리를 얻고 몸을 지킬 수 있다고 믿었다. 병법과 무기를 잘 쓰는 것도 중요하지만 역시 중요한 싸움의 결과에는 '운'이라 는 요소가 강하게 개입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카도라의 어립선 갑판에 작은 신사와 불전이 마련되었다. 비록 전법 에 대해서는 무장들 사이에 상당한 대립이 있었지만 승리를 얻고자 하는 데는 이견이 있을 수 없었다. 조금 전까지 언성을 높이던 무장들도 숙연 히 그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기원승이자 군사軍師의 위치를 맡 은 엔메이가 기원의식을 시작했다. "먼저 전승을 기원하는 렌카를 신불께 봉납하겠습니다!" 렌카連歌는 두 소절로 이루어진 시詩였다. 비교적 단순하고 짧아 즉흥 적으로 부를 수 있기에 학문에 밝지 못한 무장들도 쉽게 지었다. 다만 역시 약간의 교양은 있어야 했다. 지금같이 싸움을 앞두고 부르는 것은 특별히 슈진렌카出陣連歌라 했다. "그럼 제가 운을 띄우겠습니다." 렌카는 이름 그대로 두 사람이 화답하듯 이어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었 다. 엔메이가 모든 무장들을 대표해서 첫 소절을 불렀다. "하늘과 물을 가르며 나가는 수많은 창 끝..." 그러자 미리 약속해 둔 대로 총대장 도도 다카도라가 이를 받아 나머 지 소절을 불렀다. 다카도라의 기다란 투구 장식에 찔릴까 우려한 무장 들이 멀찍이 서 있었다. "이윽고 화살이 되어 적을 관통하리라!" 렌카치고는 좀 투박했지만 확실한 결의를 보여주는 구절이었다. 교양 이 풍부한 무장이라면 더 세련되게 부를 수도 있겠지만 다카도라를 비롯 해 이 자리에 있는 누구도 원하지 않았다. 곁에 있던 서기가 시를 종이 에 받아 적고는 곱게 접어 신전에 바쳤다. "다음은 삼헌의 의식이요!" 삼헌三獻은 승전기원의 가장 중심이 되는 의식이었다. 신불에게 세 가 지 물건을 바치는 의식으로, 총대장이 직접 하게 되어 있었다. "준비한 것을 앞으로." 엔메이가 가볍게 눈짓하자 부하들이 다카도라의 접의자 앞으로 기원을 위한 물품인 오시키祈數가 놓인 탁자를 가져왔다. "남향이 맞는가?" "예. 맞습니다!" 이때 다카도라의 의자는 철저히 남쪽으로 향하게 되어 있었다. 싸움에 임하기 전, 총대장의 몸과 갑옷이 북쪽을 향하는 것을 매우 불길하게 여 겼다. 이는 '북北'이라는 한자가 '패배敗北' 라는 말속에 있는 데다 북은 일본어로 '니구(にぐ)'라 읽는데, '도망친다(逃ぐ)'는 말과 같은 발음이기 때문이다. 확인이 끝나자 의식이 거행됐다. 다카도라는 남쪽을 향한 그대로 탁자 위에 올려진 술잔을 집어 술을 따르고는 세 번에 걸쳐 비웠다. 그리고 잠시 후 다시 세 번을 비우고는 안주로 마련된 세 가지 물품을 먹었다. 생선을 말려 두드린 우치아와비打鮑, 껍질을 깐 밤 가치구리勝栗, 그리 고 얇은 천 요로코부昆布로 이루어진 이 물품들은 각자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우치아와비에서 '타打'를 취하고 가치구리에서 '승勝' 을 취한 뒤 이를 '요로코부(よろこぶ)' 에 결합하면 일본말 발음으로 '쳐서 이겨서 기쁘다(打って勝って喜ぶ)'란 뜻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긴다!" 다카도라는 술잔을 돛대 기둥에 던져 산산조각 내며 외쳤다. 이것도 의식의 일부로 강한 의지를 보여주는 행동이었다. 지켜보던 무장과 병사 들이 '와아!' 하고 소리를 질러 기세를 올린 것도 이때였다. 원래는 땅에서 하는 것을 선상에서 하는 만큼 몇 가지 절차는 더러 생 략되었다. 슈진렌카와 삼헌의 의식을 마친 다카도라는 갑판 위에 병사들 을 세워놓고 막 출진을 선언하려 했다. 그런데 엔메이가 갑자기 한쪽을 가리켰다. "다카도라 님! 저걸 보십시오!" 늘어선 병사들 대열 너머 섬 기슭에서 개 한 마리가 나타났다. 요란한 소리에 놀랐는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지 이쪽을 향해 맹렬히 짖어대 고 있었다. "저것이!" 급한 성격의 야스하루가 개를 노려보았다. 그러자 개는 더 크게 짖어 대며 늘어선 병사의 대열을 우측으로 가로질러 갔다. 작지만 다부진 체 구, 진돗개였다. "이런! 흉한 징조입니다." 지켜보던 엔메이가 실망한 목소리로 모두에게 말했다. "흉조라고?" 조용히 있던 야스하루의 얼굴이 갑자기 상기되었다. 기원의식의 분위 기에 맞춰 성질을 죽이며 참고 있던 사람이었다. "만일 저 개가 대열 좌측으로 갔다면 길조가 되었을 겁니다만." 엔메이는 간단히 대답하고 곧 흉한 것을 봉하는 축원을 시작했다. 그 것이 야스하루의 화를 더 돋궜다. "빌어먹을 개가! 역시 저놈도 조선 땅에 있단 건가?" 화가 잔뜩 난 야스하루가 호위무사에게 명했다. "저놈을 쏘아 버려!" "예!" 호위무사가 조총을 들어 재빨리 화약과 탄환을 넣은 다음 개를 향해 쏘았다. 그러나 물살에 흔들리는 배에서 쏜 탓인지 제대로 맞지 않았다. 개는 더 요란한 소리로 짖으며 달아났다. "제길!" 다시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기원의식으로 떠들썩해야 할 갑판 위에 무 거운 침묵만이 흘렀다. 출진을 선언하고 최종단계로 깃발을 올리게 하려 던 다카도라는 입술을 깨물며 가만히 있었다. 이때 미치후사의 휘하인 구루지마 수군의 무사와 병사 몇 명이 작은 배를 타고 기함에 올라왔다. 그들은 급한 보고인 듯 미치후사에게 다가 오더니 귀에 대고 몇 마디 속삭였다. 그리고 옻칠을 한 나무상자 하나를 공손하게 바쳤다. 순간 미치후사의 눈빛이 다시 빛났다. "여러분!" 미치후사의 자신감 넘치는 소리가 갑갑한 침묵을 깨고 울렸다. "지금 한 가지 물건과 한 가지 정보가 들어왔소!" "그게 뭐요?" 다카도라가 퉁명스럽게 물었다. "우선은 방금 베어온 조선병사의 목이요! 이걸로 다시 한번 점을 쳐보 도록 합시다!" 당시 무장들이 길흉을 점치는 방법에는 베어낸 적의 목을 검사해 그 얼굴 표정을 보는 방법도 있었다. 희생자가 목을 베일 때의 정황과 그 심리상태에 의해 묘하게 경직되는 눈동자 위치와 입 모양을 가지고 보는 방법이었다. "어디 한번 보여주십시오." 흉조를 봉하는 의식을 마친 엔메이가 다가왔다. 그러자 미치후사는 손 수 나무상자를 열어 그 안에서 목을 꺼냈다. 목에서 흘린 피가 갑옷소매 를 적셨지만 미치후사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자, 잘 보고 판단하시오." 목을 건네주며 미치후사는 조금 언성을 높였다. 눈을 부리부리 뜨기도 했다. '이번에도 흉조라 하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위협의 뜻이 담겨 있었 지만 엔메이는 받아든 목만을 신중히 살펴볼 뿐이었다. "좀 어떤가?" 다카도라가 엔메이에게 고개를 돌렸다. 출전을 앞두고 흉조만 나타나 서는 아무리 이를 봉해 없앤다 해도 개운치가 않았다. 적어도 한가지 길 조는 나타나 줘야 했다. 다카도라도 은근히 엔메이가 거짓말을 해서라도 병사들의 사기를 높여주길 바랬다. "이것은 좌안左眼. 이번에도 흉조입니다." 그러나 엔메이는 두 사람의 기대에 응해주지 않았다. 차가운 그의 말 이 모두를 찔렀다. "뭐라고?" 야스하루가 험악한 표정을 지으며 엔메이에게 다가왔다. 아무리 다카 도라의 측근이라도 이쯤 되면 가만둘 수 없다는 태도였다. "이 목의 눈동자는 둘 다 좌측을 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입 근처는 꽉 다문 상태지요. 이건 적에게 길하다는 표시입니다." 평정을 유지한 상태인 불안佛眼, 위로 치켜 뜬 눈인 천안天眼, 땅을 보 는 지안地眼 등 많은 표정이 있고 걔 중에는 가문에 따라서 해석이 틀린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좌안의 경우만은 전부 불길하다는 것으로 해석이 일치됐다. 엔메이가 고개를 저으며 불호를 외웠다. "아미타부츠..." 이는 죽은 조선병사에 대한 공양의 의미이자 점의 결과가 이미 나와서 움직일 수 없다는 표시이기도 했다. "다 소용없는 짓이오!" 미치후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챙 하는 소리를 내며 허리에 찬 칼을 뺐다. 정말 사람을 베고 말 분위기였다. 미치후사의 살기 어린 눈초리가 엔메이를 노려보자 다카도라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여차할 경우 제지하기 위해서였다. "잘 보시오!" 그러나 힘차게 뽑아든 미치후사의 칼이 벤 것은 엔메이가 아니라 자기 갑옷 위쪽을 죄는 상대上帶의 한쪽 단端이었다. "흐음, 과연!" 지켜보던 무장들이 일제히 탄성을 터뜨렸다. 그것은 절대 그쪽 끈을 풀지 않겠다는 것으로 '결코 갑옷을 벗지 않고 이길 때까지 싸우겠다'라 는 결사의 각오를 나타내는 행동이다. 총대장인 다카도라도 하지 않는 결의를 미치후사가 한 것이다. "방금 들어온 정보에 의하면 이순신이 우리를 발견하고 급히 함대를 이동시켜 해협 입구를 막았다 하오!" 잘라낸 끈이 바람에 펄럭이며 뒤쪽 바다 위에 떨어졌다. 미치후사는 칼을 들어 명량해협 쪽을 가리켰다. "나는 기필코 이순신을 무찌를 것이오! 내 목숨과 모든 것을 바쳐서라 도!" 아침 햇살이 미치후사의 칼에 비쳐 환한 빛을 뿌렸다. 타오르는 듯한 눈동자와 빛나는 칼. 그것은 이제까지 행한 기원의식 전체보다 훨씬 엄 숙하고 강렬한 인상을 모두에게 주었다. 의식을 행하던 엔메이조차 그것 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깃발을 올려라!" 마침내 다카도라는 의식의 최종단계를 선언했다. 지금까지 소속부대를 나타내기 위해 몇 개만 세워져 있던 군기軍旗가 일제히 올라갔다. 그리고 기함에는 총대장이 있음을 나타내는 마인馬印 이 올랐다. 그것은 황금으로 만든 삿갓이었다. 이제는 돌이킬 수 없다. 물고기 비늘 모양의 거대한 어린진魚鱗陣을 형성한 함대는 그 머리를 명량으로 향하며 유유히 나갔다. 다카도라는 입 속으로 가만히 중얼거렸다. "왠지 그물 속으로 들어가는 느낌이 드는군." = 거제1호선, 안위 판옥선 장대 위에서 내려다 본 포구에는 많은 피난민들이 몰려나와 안 쓰러운 눈빛으로 판옥선들을 전송하고 있었다. 오랜 피난 생활에 이미 지친 사람들이 오히려 수졸들을 더 불쌍하게 생각하는 듯했다. 마치 다 시 못 볼 사람들을 보는 듯한 얼굴이었다. 거제현령 안위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씁쓸하고도 초라하군. 안 그렇소, 정 만호?" 안위가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조라포만호 정공청에게 말을 건넸다. 안 위의 배에 얻어 탄 셈이 된 정공청은 뭐가 창피한지 우물쭈물 말을 제대 로 하지 못했다. "너무 부끄러워 마시오. 하긴, 수군 장수가 배를 떠나서야 되겠소이까? 기병이 말을 잃은 꼴이지요." 안위가 정공청을 위로하는 척하며 비웃었다. 안위는 이것이 똑같이 도 망치더라도 부하들과 함께 배로 도망친 자와 배를 버리고 뿔뿔이 흩어져 육지로 도망친 자의 차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혼자만 살기 위한 행동 이었다. 같은 배에 탄 자들이 서로를 믿지 않는다면 죽는 도리밖에 없었 다. 수군만호는 무관직으로서 종4품, 현령은 문관 지방수령직으로 종5품이 다. 그리고 안위는 무과급제자로서 현령이라는 문관직을 수행하며, 현령 이 무관으로서는 종6품에 불과한 병마절제도위를 겸하니 감히 만호에게 뭐라 할 직급은 아니었다. 그러나 조선시대 내내 무관을 경시하는 풍조가 만연해 무관이 직급만 으로 고을 수령을 함부로 누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만호나 첨 사는 정식 무과급제자가 제수되는 경우도 있지만 지방 토호가 간단한 시 험을 거쳐 임명되는 경우도 많았다. 그래서 첨사나 만호 같은 지방 군영 의 전문직 무관은 같은 무관 중에서도 더더욱 천시당했다. 함경도 같은 북변이나 남해안의 지방 수령은 무관이 임명되는 경우가 많았다. 외적을 막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지방수령은 조정에서도 상 당히 신경 써서 임명한 편이었다. 무과에 급제하지 못한 만호나 첨사가 공을 세우거나, 나중에 무과에 급제한 다음 포상으로서 현감이나 현령에 임명된 예도 자주 있는데, 이는 조정에서도 만호나 첨사가 품계에 걸맞 지 않게 현령, 현감에 비해 못한 대우를 받는다고 인정한 것이나 다름없 다. "정 만호의 군관들은 별로 힘이 없어 보이는구려." 안위가 장대 아래를 내려다보며 정공청에게 다시 농을 걸었다. 전투 직전의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수졸들이 전투준비를 하느라 바삐 움직이 는데, 안위의 말처럼 조라포 소속 군관 2명과 진무들은 어깨가 축 늘어 진 채 서 있을 뿐이었다. 군사들을 지휘할 수 없으니 그들은 다만 일개 활 쏘는 사부에 불과했다. 예전에 전선 세 척을 지휘할 때의 위용은 정 공청에게서는 전혀 찾을 수 없었다. "승기升旗~~" "승기~~" 중군선인 미조항1호선에서 외침이 들리자 기라졸들이 일제히 따라 외 치며 깃발을 세웠다. 안위의 배에도 거제라고 쓴 커다란 깃발이 세워졌 다. 비록 열 세 척밖에 안 되지만 일사불란한 행동으로 인해 무릇 장엄해 보였다. 다시 신호가 오자 배들이 일제히 닻을 올리고 천천히 노를 저어 바다로 내려갔다. 징이 울리고 중군선에서 빨간 깃발이 오르자 나발 소리가 바다를 아련 히 울렸다. 판옥선들이 분주히 움직여 첨자찰尖字札로 결진했다. 이것은 함대가 이동할 때의 기본 진형이었다. 그러나 아직 출전하려면 마지막 절차가 남아있었다. 바로 통제사의 좌선 탑승이다. "흥! 미조항첨사는 중군장이 뭐 별다른 벼슬인 줄 알아? 되게 뻐기는 군." 안위가 씁쓸하게 내뱉었다. 미조항첨사 김응함은 원래 찰방 벼슬을 하 던 문관이었는데, 어쩌다 공을 세워 무장으로 발탁된 인물이었다. 무과급 제자 출신인 안위나 그래도 정식 무관인 정공청이 보기에 별로 믿음직스 럽지는 못했다. 평양성 공략전에서 먼저 물러났다가 화가 치민 중국군 장수에게 곤장을 맞았다는 소문은 안위도 들었다. "수사가 위장을 맡아야지, 중군을 맡을 수는 없지 않소?" "쳇! 그렇지만." 안위는 정공청의 말에 혀를 차면서도 동의했다. 겨우 열 세 척밖에 안 되는 함대였지만 통제사는 오위제五衛制의 간략편제인 삼군분읍제에 의 한 편제를 선택했다. 중위는 경상우수영, 좌위는 전라우수영, 우위는 전 라좌수영 전선들이 소속되고 각기 통제사와 전라우수사, 조방장 배흥립 이 지휘를 맡고 있었다. "나는 좌위가 걱정됩니다. 신임 전라우수사 저 사람 소문이 영 안 좋 아요. 도대체 제대로 싸운 적이 없답니다. 이런 시급한 때에 왜 하필 저 런 사람을 수사로 내려보냈는지 알 수가 없어요." "싸운 적도 없지만 도망간 적도 없어서 그렇다고 하더이다. 위에서 우 릴 우습게 본 것이지요." 안위가 분개하자 정공청이 허탈하게 말했다. 두 사람 말처럼 김억추는 절대 적전도주를 한 적이 없지만 그렇다고 단 한 번도 제대로 싸운 적이 없다는 인물이었다. 한 마디로 지능적인 탈주에 능하다고 할 수 있었다. "저 해남원 잘난 꼴 좀 보시구려. 새파랗게 젊은 놈이 이런 판에도 아 부하려고!" 안위가 혀를 찼다. 해남현감 유형이 장대에서 아래를 향해 뭐라 소리 를 지르고 있었다. 아마 도훈도나 기패관을 나무라는 모양이었다. 올해 갓 서른 살이 된 유형은 부하들에게는 고지식한 수령으로 악명이 높았다. 전쟁통이라 웬만하면 봐줄 만한 가벼운 사안도 곧이곧대로 처리 하며 추호도 용서가 없었다. 그래서 성격이 비슷한 통제사 이순신이 관 심을 갖고 기회 있을 때마다 추켜세워 콧대가 하늘을 찔렀다. "거제원께서는 이제 나이 서른 다섯이시지요?" 정공청이 슬쩍 긁자 안위가 쏘아보았다. 안위는 유형과 함께 이순신에 게 치열하게 충성경쟁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아무 의미가 없 게 됐지만. - 뿌우우~ 뿌우~ 뿌우우우~ 장3호 나발소리였다. 통제사가 우수영에서 출발한다는 뜻이다. 이어서 대취타가 연주되었다. 태평소가 울리자 피난민들 사이의 분위기는 어느 정도 밝아진 것 같았다. 피난민들이 웅성거리며 통제사가 지나가길 기다 렸다. 우수영과 통하는 골목길을 가득 메웠던 사람들이 서서히 양편으로 갈라지며 길이 생겼다. 남도 백성들에게 이 통제사는 명망이 매우 높았다. 안위는 이번에 이 통제사가 왜군들과 싸우다 죽으면 관운장처럼 무당들이 신으로 모실 거 라고 생각하며 씁쓸하게 웃었다. 물론 조선이 없어지지 않는다면. 안위가 무심하게 피난민들을 살폈다. 다들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희망을 잃은 사람들에게서는 더 이상 환한 것을 기대할 수 없었다. "봄꽃이!" 갑자기 안위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하며 신음처럼 한 마디가 새어나왔 다. 피난민들 사이에서 낯익은 얼굴을 찾고 놀란 것이다. 머리를 딴 아가 씨는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사람을 찾는 듯했다. 그때 정공청이 끼여들었 다. "예? 누구 말씀이시오?" "아, 아무 것도 아니오. 좀 아는 얼굴이라서." 안위가 얼버무렸지만 정공청은 안위가 왜 놀랬는지 알아챈 것 같았다. 피난민들을 살피다가 빙긋이 웃은 정공청이 입을 열었다. "월화를 아시지요? 손인갑 전 첨사는 대단한 애인을 두었지요. 그 분 은 이미 돌아가셨지만 같은 사내 입장으로서 참 부럽소이다." "흠! 언제 다시 월화가 가야금 타는 소리를 들을 지 모르겠소." 당황한 안위가 적당히 얼버무렸다. 그러면서도 피난민들 사이에 서 있 는 여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전에 가덕진첨사를 지낸 손인갑은 초계 인근에서 낙동강을 배로 거슬 러 오르는 왜군을 여러 차례 격파하다가 모래구덩이에 빠져 죽은 의병장 이다. 곽재우처럼 왜군의 보급로를 끊어 본인은 잘 몰랐지만 결과적으로 서울과 평양에 주둔한 왜군들을 큰 위기로 몰아넣은 인물이었다. 손인갑의 애인이란 기록은 난중일기에 두 번 나온다. 이름은 알 수 없 지만 군중을 돌면서 가야금을 뜯어 객고에 지친 장병들을 위로한 것으로 되어 있다. 동래 인근 고을의 관기일 수도 있지만, 오히려 집안이 몰락해 고급 기생으로 신분이 떨어진 양반가의 후손일 것으로 보는 편이 더 타 당하다. 난중일기를 보면 손인갑의 애인에 대해서는 이순신과 수군 장수 들이 꽤 정중하게 대한 느낌이 있다. 지난해 봄이었다. 저녁에 웅천현감 이운룡이 월화月花라는 기생을 데 리고 진달래가 활짝 핀 한산도에 들어왔다. 그 유명한 월화가 왔다는 소 식이 들리자 장수들이 운주당에 몰려들었다. 월화가 가야금을 몇 곡조 타자 통제사를 포함한 모든 장수들이 함께 눈물을 흘렸다. 고향이 들렸다, 사랑이, 절망이 들렸다고 하면 이상한 표현이겠지만, 월화가 타는 가야금 곡조에는 분명 그런 것들이 들어 있었다. 나중에 통 제사는 어머니를 뵙는 듯하다고 말했다. 그때 안위는 고향 김제의 너른 평야가 한 눈에 들어온 듯한 착각에 빠 졌다. 어린 벗들과 함께 뛰어 놀며 도랑에서 붕어를 잡던 추억에 깊이 빠져들었다. 그리고 곤장을 맞고 북변으로 유배되던 때의 끔찍한 악몽에 몸서리쳤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가야금 곡조에 불과했다. 월화는 뛰어난 미인이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전체적으로 무척 단아한 느낌이 들었다. 시와 글씨에도 뛰어나다고 했다. 그러나 월화는 전직 수 군첨사이며 이미 전사한 장수의 애인이었다. 술을 좋아하고 호방한 것을 높이 치는 무장들도 월화를 함부로 대하지는 못했다. 장수들은 월화를 전쟁미망인 대하듯 무척 조심스러웠다. 그때 안위의 눈에 띈 사람이 있었다. 월화가 봄꽃이라고 부르며 데리 고 다니던 열 일곱 살 짜리 여동생이었다. 나이답지 않게 땋은 머리를 흔들며 뛰어다니던 봄꽃이를 귀엽게 본 안위가 몇 마디 말을 붙였다. 그 리고 그 길로 안위는 봄꽃이에게 빠져들고 말았다. 봄꽃이는 뜻밖에 천방지축 어린애가 아니었다. 언니를 뛰어넘을 정도 로 높은 학식과 교양이, 그리고 슬픔과 희망이 이미 17살 소녀에게 들어 있었다. 억울하게 죽은 부모를 대신해 언니가 자기를 위해 술과 웃음을 파는 기생이 되었다고, 그러다가 손인갑을 만나서 잠시 행복한 삶을 보 냈다가 지금은 다시 이렇게 같이 떠돌아다닌다고 울지도 않고 잔잔하게 말했다. 그리고 손인갑이 자기를 글방에 보내고 좋은 선생을 붙여줘서 글을 배 웠다고 했다. 글이란 게 옛 사람들과 대화할 수 있어 재미있고, 남녀와 귀천을 가리지 않고 모든 백성들이 배우면 좋겠다고 했다. 그리고 사람 이 원래 똑같이 귀한데 양천의 신분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자칫 위험 할 수도 있는 소리까지 했다. 안위가 빙긋이 웃으며 농담처럼 말했다. "너 나한테 시집오지 않겠느냐? 나이 차이가 딱 두 배이다만은, 나만 한 사내대장부 만나기도 쉽지 않을 것 아니냐?" "에이~ 사또는 이미 혼인하셨지 않습니까?" "허허! 그래? 그럼 내가 홀몸이면 나한테 오겠느냐?" "헤~ 생각 좀 해보구요." 안위는 그때 발그레 물든 봄꽃이 얼굴이 무척 예쁘다고 여겼다. 쑥스 러워 두 손을 맞잡고 쭉 뻗는 봄꽃이 얼굴에서 살포시 들어간 보조개에 안위는 잠시 정신을 잃었다. 뜨거운 눈길을 느낀 봄꽃이가 얼굴이 빨개 진 채 고개를 숙였다. "혹시 정여립을 아느냐?" 봄꽃이가 잠시 안위를 쳐다보며 초롱한 눈을 깜빡였다. 잠시 망설이다 가 용기를 낸 봄꽃이가 또박또박 대답했다. "사람들은 그 분을 역적이라고 합니다만, 사또 어른을 믿고 제 생각을 말씀드릴게요. 언니는 학식이 뛰어난 그 분이 억울하게 역적으로 몰려 죽었다고 했어요. 그 분도 양반인데 세상에서 신분차별이 없어져야 한다 고 제자들을 가르치셨다니, 참으로 사심 없고 용기 있는 분이 아니겠어 요? 게다가 나라에서는 임금보다 백성이 더 중하다고 하셨으니, 주자학 에만 빠진 양반님네들이 듣고 반성해야 하지요." 안위는 속으로 감탄했고, 무척 고마웠다. 안위는 짐짓 노한 목소리로 물었다. "넌 내가 누군줄 아느냐?" "잘은 모르지만 문관 같기도 하고 무관 같기도 해요. 슬픔을 가슴에 많이 담아두고 계신 분 같아요. 그래서..." "그래. 난 너와 여러 면에서 비슷하단다." "그래서... 헤헤! 좋아요." 봄꽃이는 두 손으로 빨개진 얼굴을 가렸다. 안위가 턱을 괴고는 봄꽃 이를 보며 빙긋 웃었다. 가슴속에 뜨거운 것이 휘몰아쳤다. 안위는 격동 을 잠시 억누르며 차분히 말했다. "나는 통제사 어른을 옆에서 성심껏 모시고 있단다. 진정 백성을 위하 는 분이시지. 그런데 임금의 음흉한 꼴이 보기 싫구나." 봄꽃이가 고개를 홱 쳐들었다. 안위의 말에 큰 충격을 받은 표정이었 다. 두 사람은 잠시 말이 없었다. 잠시 후 저쪽에서 월화가 봄꽃이를 불 렀다. 자못 경계심이 깃들은 목소리였다. 안위가 자리를 털고 일어서면서 부드럽게 말했다. "안타깝게도 나는 이미 혼인을 한 몸이다. 그러나 네가 나를 믿는다면, 같은 뜻을 지닌 동지로서 믿는다면 말이다. 함께 이 세상을 살아가면 좋 을 텐데. 그래. 너라면 차라리 내 뜻을 꺾고, 다 버리고 산에 들어가서 둘이서 오붓하게 살아도 좋으련만." "사또." "그래. 말해보아라." "저를 어여삐 봐주셔서 감사하옵니다만, 제게는 불행해진 언니가 있사 옵니다." "그래. 네 언니는 참 좋은 분이다. 어서 이 지긋지긋하고 참혹한 전쟁 이 끝나면 좋겠구나. 하지만 그 다음을 생각하는 것도 좋은 일이란다." 봄꽃이는 월화에게 손을 잡혀 끌려갔다. 어둠 속에서 멀어지는 봄꽃이 는 몇 번이나 안위를 돌아보았다. "현령은 아시오? 얼마 전에 월화가 죽었다 하오. 양식을 구하러 산에 서 내려왔다가 왜적에게 못된 꼴을 당하고... 에잉!" "저런, 세상에!" 정공청의 말에 안위가 이를 악물었다. 봄꽃이가 왜 여기에 있는지 알 것만 같았다. 정공청이 말을 이었다. "월화에게 여동생이 있는데 말이오. 험험! 함안 사람으로 먼 친척이라 는 사람한테 끌려갔다오. 내가 듣기론 난리통에 부모 잃은 여자애를 끌 고가 팔아먹는 나쁜 놈들이 많지요. 특히 글 깨나 읽은 양반집 여식들은 부잣집에 첩으로 팔아먹기도 한다지요. 여자애들 입장에서도, 이런 난리 통에 굶어죽지 않으려면 어쩔 수 없겠지만 말이오." 안위는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것 같았다. 만약 그 놈이 그랬다면, 요절 을 내고 말리라 다짐했다. 안위의 눈길도 모른 채 봄꽃이는 아직도 사람들 사이에서 누군가를 찾 고 있었다. 안위는 봄꽃이 이름을 큰소리로 부르고 싶었다. 당장에 사후 선을 불러 타고 봄꽃이에게 뛰어가고 싶었다. 그러나 안위는 그 생각을 접었다. 지금 죽으로 가는 길에 봄꽃이를 데려갈 수는 없었다. 안위가 이 를 악물고 고개를 숙였다. 그때 피난민들이 크게 술렁이기 시작했다. 우수영에서 출발한 통제사 일행이 골목으로 나오는 모양이었다. 초가집 지붕에 가려서 보이지는 않 지만 돌담 사이로 언뜻언뜻 당파 창날의 행렬이 아침햇살에 비쳐 반짝거 렸다. "사또~ 사또~ 아이고!" 누군가 곡을 하자 피난민들이 낮게 울부짖기 시작했다. 백성들은 조선 수군이 칠천량에서 패한 이후 그 동안 이순신이 얼마나 큰 역할을 했는 지 깨달았다. 그러나 후회해도 이미 늦었다. 이제는 이순신도 어쩔 수 없 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백성들은 그저 그를 사지로 보내며 울부짖을 뿐 이었다. "통상은 대단한 신망을 얻었소. 지나치게. 그래서 상上의 눈밖에 난 것 이겠지만." 정공청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안위도 그것은 잘 알고 있었다. 그것 때 문에 통제사가 얼마나 많은 모함을 받고 얼마나 고심하는가를. 안위도 씁쓸히 말했다. "이제는 통상 말씀처럼 싸우다가 한번 죽을 뿐이오." 취타대를 앞세운 통제사 행렬이 드디어 포구로 나왔다. 통제사는 갈색 말에 올라탄 채 힘겹게 안장을 붙잡고 있었다. 멀리서 봐도 병색이 완연 했다. 그런데 진무나 영노 같은 경마가 아니라 엉뚱하게도 순천부사 우 치적이 고삐를 잡고 말을 이끌었다. 백성들이 꿇어 엎드려 흐느꼈다. 출전하는 장수의 앞길에서 울음소리 를 내지 않으려고 억지로 참는 백성들의 흐느낌은 처절했다. 무릎을 꿇 은 봄꽃이의 얼굴에서도 한 줄기 빛나는 눈물을 본 것 같았다. 안위가 슬쩍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태양이 중천에 떠올라 있었다. - 둥~ 둥~ 둥~ 재앵! 북소리 세 번과 함께 나 가 울렸다. 통제사가 말에서 내리다가 굴러 힘없이 우치적의 품에 떨어져 안겼다. 피난민들 사이 여기저기에서 비명 소리가 울리고, 통제사의 투구가 길바닥을 굴렀다. 비틀거리며 간신히 일어선 통제사가 우치적의 부축을 받으며 힘겹게 걷기 시작했다. 피난민들의 흐느낌이 이제는 아예 통곡으로 변했다. "도저히 안되겠소. 통제사는 이미 기력을 잃었소." 정공청이 안타깝게 말했지만 안위는 동의하지 않았다. 통제사는 맨날 끙끙 앓다가도 왜놈만 나타나면 어디서 그런 힘이 솟는지 펄펄 날면서 다 때려잡는다는 이야기는 유명했다. 좀 더 지켜보기기로 했다. - 우웨엑~ 꾸엑! 안 봐도 뻔했다. 통제사가 몸에 든 것을 토해내는 소리로, 이미 부하 장수들에게는 익숙해진 지 오래였다. 통제사가 엎드려 입에서 누런 것을 마구 쏟아내고 있었다. 우치적의 부축을 받아 일어선 통제사의 코에서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그 모습을 보고 기절하는 피난민들이 못해도 너 덧 명은 되는 것 같았다. "아예 산송장이요. 다 틀렸소." 정공청이 혀를 찼다. 안위는 통제사가 국문을 받을 때 몸이 많이 상했 다는 말을 듣고 있었다. 안위가 보기에도 통제사는 몇 달 사이에 10년은 더 늙어 보였다. 저 허옇게 센 머리는 도저히 쉰 세 살 무관의 것이 아 니었다. 그렇다고 이렇게 사람 많은 곳에서 참지 못할 정도라니, 정말 이번에 는 힘들겠다고 느꼈다. 마지막 전투를 화려하게 장식하고 싶었지만, 통제 사의 몸 때문에 그것도 힘들 것 같았다. 우치적에게 업힌 통제사가 천천히 배에 올랐다. - 재앵~ 둥둥둥둥둥! 취타대가 나를 한번 울리고 북을 연달아 쳤다. 그러자 좌선에 거대한 수帥자 깃발이 올랐다. 일반 판옥선의 절반 크기나 되는 큰 깃발이었다. - 와아! 와아! 와아! 모든 판옥선의 수졸들이 동시에 짧은 고함을 세 번 연달아 질렀다. 절 도 있지만 절망적인 목소리였다. 배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포구가 조금씩 멀어졌다. 잔잔한 바닷물이 햇빛에 반사되어 황금빛으로 반짝거 렸다. 안위는 봄꽃이를 보고 있었다. 봄꽃이의 눈물어린 눈동자는 무엇을 보 고 있을까? 안위는 그것이 가장 궁금했다. 3. 아침(2) = 도도 다카도라 함대 어립선, 엔메이 "엔메이!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명량해협 근처 지형을 살피던 엔메이가 뒤를 돌아보았다. 다카도라가 접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다가오고 있었다. 흥분과 여러 가지 생각으로 인해 침착을 유지하기 힘든 모습이었다. "뭘 말씀입니까, 다카도라 님?" 엔메이가 다가가며 대답했다. 하얀 천으로 진막陣幕이 쳐진 어립선에는 긴장된 침묵만이 감돌았다. 진막 안은 육지의 본진과 같았다. 다카도라 주위에는 가신들과 부장 도 도 만고하치로藤堂孫八郞를 비롯해 각각 깃발, 활, 창, 화물을 맡은 부교 奉行들이 줄지어 있었다. 거기에 군기를 들고 있는 병사, 마인을 잡은 병 사, 치료를 맡은 약사藥師 등을 비롯해 진막 안에만 40여명이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배가 물살을 가르는 소리와 잔물결 소리가 뚜렷이 들릴 정도였다. 그만큼 모두 긴장하고 있는 것이다. "자네도 들은 것처럼 이순신이 가진 건 단 열 세척이야. 이상하지만 요코메橫行의 정찰보고에서도 더 이상은 없어. 그리고 방금 돌아간 사자 말대로 선봉을 맡은 미치후사는 당장이라도 공격하겠다고 펄펄 뛰고 있 어." 엔메이도 조금 전에 다카도라에게 온 보고를 들었다. 구루지마 수군은 전에 해적이었던 전력前歷을 자랑이라도 하듯 총대장 다카도라 앞에서도 행동을 삼가지 않았다. 전령으로 온 병사조차도 오직 자기 대장에게만 충성하겠다는 듯 다카도라에게는 거친 목소리로 적정과 미치후사의 결의 를 전할뿐이었다. "예. 분명 열 세척입니다. 뒤에 배가 백 여 척쯤 더 보인다고 했지만 그건 어선으로 밝혀졌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순신은 그 열 세척을 갖고 대담하게도 좁은 해협을 막고 있 어. 도대체 무슨 생각일까?" 다카도라는 전령에게 일단 진형을 바꾸어야 하니 절대 경솔히 움직이 지 말라고 말해 돌려보냈다. 그것을 기억한 엔메이가 빙긋 웃으며 대답 했다. "다카도라님, 전 그냥 기원승입니다. 그건 작전에 해당되는 사항 아닙 니까?" "새삼스럽게 그렇게 말할 필요는 없어. 자네가 평범한 기원승이 아닌 내 군사軍師란 건 다들 알고 있으니까." "그렇습니까?" 짐짓 사양하던 표정이던 엔메이는 다카도라가 이렇게 말하자 안색을 진지하게 바꿨다. "병법은 제쳐두고 일단 조선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를 보면 여기 있는 아무도 자네를 당하지 못할 거야. 요컨대 적을 알아야 제대로 이길 수 있겠지." "어차피 숫자에서 도무지 상대가 안되지 않습니까?" 다카도라가 다가올수록 엔메이는 무의식적으로 한 발짝씩 물러섰다. 다카도라의 기다란 투구장식에 눈을 찔린 사람도 있다고 들었다. "그래서. 자네도 그냥 저 해협 안에 들어가기만 하면 쉽게 이길 거란 생각인가? 이순신은 그저 절망적인 저항을 하고 있을 뿐이다?" "그건 아닙니다." 정색을 한 엔메이는 명량으로 고개를 돌리며 대답했다. "물론 지금 조선군도 괴로울 겁니다. 병사들 사기는 형편없이 떨어졌 을 테고 장수들도 이길 가망이 없다고 생각할 겁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순신은 그들을 이끌고 싸우러 나왔습니다. 그들에게 아주 유리한 곳에 서 말입니다. 이순신은 절대 이번 싸움에 죽으려고 나온 것은 아닙니다." "그래! 바로 문제는 거기에 있다." 다카도라의 지휘봉이 해도로 향하며 해협 안에 있는 한 곳을 짚었다. 해협 중에서도 가장 좁은 곳, 해협 양쪽에서 바위가 튀어나온 곳이었다. "설마 했는데 역시 이곳이었어. 조선인들이 울돌목이라 부르는 이곳에 서 싸우기 위해 이순신은 그 동안 끊임없이 우리를 속인 거다." 다카도라는 이미 정찰선 한 두 척에서 열 척이 넘는 함대에 이르기까 지 끊임없이 배를 내보냈다. 이순신의 움직임을 살피고 더 나아가 야간 기습으로 조선수군의 자체붕괴를 노린 것이다. 칠천량해전에서는 이것이 크게 주효했다. 그러나 이순신은 야습까지 포함된 연속된 공격을 번번이 격퇴했다. 그 러면서 그는 항상 위치를 옮겨 다녔다. 그 교묘한 움직임은 과연 어느 곳이 그가 진정으로 지키려는 곳인지 알 수 없게 만들었다. "이순신은 방어에 더없이 유리한 이 지형에 마지막 기대를 걸고 있는 겁니다. 다카도라 님께서 말씀하셨다시피 이곳은 그가 수년동안 우리 함 대의 서쪽 진출을 틀어막았던 견내량과 같은 지형입니다." 엔메이의 눈도 다카도라가 가리킨 해도를 바라보았다. 그곳에 표시된 빨간 점 몇 개. 적을 표시한 그 점들이 무겁게 압박하는 것처럼 느껴졌 다. "두려우십니까?" 엔메이가 주변을 살피다가 나직이 물었다. 마침 군감 다카마사는 병사 들을 둘러보기 위해 잠시 아래쪽 선실에 내려가 있었다. 다카도라는 해도에서 고개를 들어 빤히 엔메이의 눈을 쳐다보았다. 섬 기는 주군을 무려 여덟 번이나 바꿨으며 그때마다 녹봉이 올라가고 지위 가 상승했다는 인물. 맨몸 하나로 전국시대의 치열한 세상에 뛰어들어 여기까지 올라온 무장의 눈이 지그시 엔메이를 응시했다. 마흔 한 살임 에도 불구하고 훨씬 나이가 들어 보이는 이유도 그 때문일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두렵다." 다른 무장과 달리 마음속에 있는 것을 소탈하게 말하는 정직함. 화려 한 전공을 세웠으면서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가난한 사무라이' 라며 구박받던 젊은 시절 때부터 그는 늘 그랬다. 건축과 축성에 더 능했기에 용맹한 무장이라기보다 정직한 장인匠人에 가까운 성격을 지니고 있었 다. "다이코 전하께서도 일전에 이렇게 말했지. 조선수군을 보면 싸우지 말고 도망치라고. 그건 이순신을 보면 도망치라는 말이다. 어떻게 생각하 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때 간바꾸關白 자리를 양아들에게 물려주고 지 금은 다이코太閤라는 관직을 차지하고 있었다. "분명 이순신은 무서운 존재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도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이 싸움 하나로 그의 운명이 결정될 겁니다." 용기를 주려는 듯 엔메이가 '위기' 라는 말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다 카도라는 희미하게 한번 웃어 보였다. "위기. 그리고 운명이라. 그래.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엔메이. 차라리 여기서 싸우다 패한다면 할 수 없겠지. 하지만 만일 내가 이 열 척 정도 에 불과한 적선과 이순신이 무서워 해협을 돌아가거나 진격을 늦춘다면, 난 어떻게 될까?" "그때는 당연히 여러 무장들의 비웃음과 다이코 전하의 노여움을 사게 되겠지요. 아마 이 자리에 더 이상 머물지 못하실 겁니다." "잘 알고 있군." 침착하고 얄미울 만큼 냉정하게 예측하는 엔메이 말에 다카도라는 잠 시 말을 끊었다. 엔메이가 씁쓸하게 웃었다. 다카도라 얼굴에 어려있는 웃음이 점점 스스로에 대한 자조의 의미로 비치기 시작한 것 같았다. "우리가 크게 이긴 칠천량 싸움에서 조선의 원균도 마찬가지였을 거 다. 나아가자니 두렵고 가만히 있으면 겁쟁이가 된다. 지금 가토 요시아 키 님이 겁쟁이로 몰리고 있지만 따지고 보면 나도 똑같은 처지다." "어차피 출발할 때부터 방법은 하나밖에 없지 않았습니까?" 엔메이가 다카도라에게 가장 기본적인 것을 다시 확인시켰다. 어차피 여기서 이순신을 넘지 못하면 군량 보급이나 충청도 상륙 같은 것은 전 혀 기대할 수 없었다. 다카도라는 이순신과 싸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 어차피 처음부터 내가 취할 수밖에 없는 행동이다. 지금에 와서 이런 게 무슨 소용이냐." 다카도라가 지휘봉을 다소 거칠게 해도 위에 내던졌다. 곧이어 솜씨 좋은 목수가 건축작업을 지휘하는 듯한 목소리가 진막 안을 울렸다. "그럼 시작해 볼까? 나와 이순신 중에서 어느 쪽이 어육魚肉이 되는지 결판을 내는 거다!" 일본 함대가 어린진을 친 상태에서 어육을 논하는 대장 다카도라의 말 이 또 하나의 흉조로 느껴졌지만, 엔메이는 그것을 말하지 않았다. 그리 고 다카도라도 그것을 알고 일부러 말한 것 같았다. 다카도라의 눈빛이 점점 전장의 열기에 물들어갔다. "만고하치로! 진형을 바꾼다. 새 진형은 봉시진鋒矢陣으로! 진형을 바 꾸는 즉시 해협으로 진입해 적을 공격한다. 전 함대에 알려라!" 그러자 부장 만고하치로가 이 명령을 다시 한번 복창했다. 어립선 갑 판 위에 선 병사들이 그것을 듣고 신속하게 큰북과 종을 울려 함대 전체 에 알렸다. "시작이다 엔메이!" 기운차게 소리치는 다카도라 위로 갈매기 한 마리가 스쳐 지나갔다. 마치 어육을 말한 다카도라에게 '네가 어육이 될 거다' 라고 비웃는 듯했 다. 엔메이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 전라우수영 좌선, 김억추 김억추와 김응추는 장대 위에서 점점 멀어지는 포구를 바라보고 있었 다. 피난민들은 땅에 주저앉아 아예 통곡을 하고 있었다. 남편이나 자식 이 판옥선에 탔는지, 땅으로 따라오며 손을 흔들며 울부짖는 아낙네들도 있었다. 포구에는 낡은 판옥선 세 척이 남아 있었다. 한 척도 아쉬웠지만 격군 이 모자라 배를 부릴 수 없었다. 지난 8월 26일인가? 김억추가 판옥선 한 척을 몰고 합세하러 어란포에 갔을 때 통제사는 무척 못마땅한 표정 으로 쏘아보았다. 전라우수사 김억추의 판옥선도 인원이 부족해 배가 제 구실을 못했던 것이다. - 끼드득! 포구에 있던 판옥선 한 척이 나무판자 부서지는 소리를 내며 천천히 가라앉았다. 수졸들과 피난민들이 아연실색했지만, 김억추는 그걸 보며 뭐가 우스운지 자꾸 키득거렸다. "왜요? 형님. 무능력한 게 자랑스러워서 그러세요?" 김억추가 눈썹을 씰룩거리며 김응추를 쏘아보았다. 그리고는 칼을 반 쯤 뽑으며 노한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 "수사 영감이라고 불러라, 이놈아! 지엄한 군율이 무섭지 않느냐?" "쳇! 남들 있는 데서는 말조심할 테니 걱정 마슈." 김응추가 가소롭다는 듯이 웃으며 멀리 명량해협 건너편을 바라보았 다. 갑자기 김응추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아! 형님. 왔습니다!" 김응추가 가리킨 쪽에는 멀리서 바다를 가득 메우며 왜선들이 몰려오 고 있었다. 척후군관 임준영에게 듣던 대로 장관이었다. 홀로 해협 앞을 가로막은 영등포만호 조계종의 판옥선은 그대로 녹아 없어지는 것 같았 다. 갑판에서는 겁에 질린 수졸들이 낮은 신음소리를 질렀다. 김억추도 왜선들을 보았다. 두려워하는 모습은 전혀 아니었고, 다만 구 경꾼처럼 가벼운 탄성을 지를 뿐이었다. "저 섬들만 없으면 더 잘 보일텐데. 그렇지 않냐?" 명량해협 입구 근처에는 녹도, 굴섬, 현도가 있다. 우수영 쪽에서 보면 섬이 큰 녹도는 왼쪽 육지와 연결된 것처럼 보이고, 진도에서 튀어나온 벽파진 뒤쪽 오류리 근처는 거대한 산들이 이어져 있어 마치 육지 같은 느낌이 들었다. 굴섬과 현도 사이는 왜선들로 완전히 메워져 진도의 오 류리 바닷가가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구경났수. 어? 그런데." "키득! 그렇게 말야. 응?" 김억추가 김응추의 시선을 따라갔다. 우수영 포구 쪽에서 사후선 두 척에 탄 격군들이 갈고리를 들고 물 속에서 뭔가를 끄집어올리고 있었 다. 격군들이 한참 힘을 쓴 다음 물에 손을 집어넣고 뭔가를 들어올렸다. 녹이 벌겋게 슨 쇠사슬이었다. 지금 격군들은 우수영 포구를 가로막는 쇠사슬을 연결하고 있는 것이다. 포구에 따라 방법은 다르지만 수군 진포 앞바다에는 쇠사슬이 걸쳐 있 었다. 먼저 전라좌수영처럼 밀물과 썰물의 차가 심한 곳에는 구멍 뚫은 큰돌에 쇠사슬을 걸고 통나무를 연결해 물에 띄운다. 그러나 전라우수영 처럼 위치가 특이해 밀물과 썰물 차가 적은 곳에서는 물 속에 말뚝을 박 고 이를 쇠사슬로 직접 연결한다. 쇠사슬이 물밖에 드러나지 않을 정도 로 약간 낮게 설치하기 때문에 만약 왜군이 직접 배로 포구에 들어가려 면 고생 깨나 해야 했다. 작업을 끝낸 사후선들이 각자 소속된 판옥선으로 들어갔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김억추가 문득 입을 열었다. "혹시 말이다. 응추야. 저런 쇠사슬을 길게 만들어서 해협에 걸면 좋지 않을까? 왜선들이 아예 명량해협을 못 지나가게 하거나, 아! 지나가는 왜선을 걸어서 전복시키면 어떨까? 간단하잖아? 우린 물에 빠진 왜적들 을 수박통 깨듯 몽둥이로 두들기면 되고 말이다." "쇠사슬을 진도까지 걸어요? 그럼 그런 무거운 걸 누가 들어요? 격군 이 없어 판옥선도 제대로 못 띄우는데." 김응추가 목소리를 높이자 김억추가 포구를 가리켰다. "여자들이라고 힘이 없겠냐? 막게 같은 것에 걸어서 돌리면 힘도 덜 들잖아." 포구를 가득 메운 작은 배들이 하나씩 떠나고 있었다. 어느새 텅 빈 포구에는 배를 끌어올리거나 그물을 걷어올리는 나무 막게 두 개가 덩그 러니 서 있었다. 바닷바람에 찌들어 검게 변한 막게 두 개는 을씨년스러 운 분위기를 더했다. 그때 우수영을 빠져나온 판옥선 12척은 명량해협 출구를 가로막으며 한 줄로 길게 늘어서는 대형을 취했다. 전라우수영 좌선은 우수영 쪽을 기준으로 왼쪽에서 두 번째였다. 말이 좌위장이지 왼쪽에는 해남현감 유형의 판옥선, 오른쪽에는 가리 포첨사 이응표가 지휘하는 판옥선뿐이었다. 60척에 달하던 전라우수영의 전성기를 회상하기에는 너무도 초라한 몰골이었다. 단 세 척으로 위衛 하나를 형성하자니 전부장, 중부장 같은 세부 편제는 생략되었다. "형님! 사람들 움직이는 게 왜선에서 뻔히 보일텐데, 왜군들이 여자들 한테 조총을 쏘면요?" "음. 하긴. 총소리에 혼비백산해 군사들도 도망가는데 여자들이... 그럼 좀 길게 만들어서 안전한 양쪽 산꼭대기에서 쇠줄을 잡아당기면 어떨 까?" "형님도 참.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총통 만들 쇠도 없는데 쇠사슬 만 들 쇠가 어디 있다고 그래요? 제대로 싸울 생각이나 하세요." 김억추가 머리를 긁었다. 그런데 투구를 쓰고 있어서 여지없이 바보짓 을 하고 말았다. 그런데 갑자기 뭔가 생각난다는 듯 김억추가 무릎을 쳤 다. "아! 왜군들이 겁먹고 공격하지 못하게 하는 방법이 있다. 저 피난민들 한테 갑옷을 입혀서 근처 산을 빙빙 돌게 하는 거야. 바닷가마을에서 여 자들이 노는 강강술래 알지? 그럼 숫자가 엄청 많은 것처럼 보일 거야." 김억추가 신이 나서 진도 망금산과 우수영 쪽 야산을 가리켰다. 그러 자 김응추가 한심하다는 듯이 대꾸했다. "해가 벌겋게 떠 있는데 왜놈들이 눈이 삐었다고 속겠어요? 그리고, 육지에 우리 군사가 떼로 모여 있어도 신이 나서 칼을 빼들고 달려드는 것들이 왜놈들인데요. 그럼 어떻게 되는지 알죠?" "뭐, 하긴 그렇다. 우리 군사가 수만 많으면 뭐하냐? 왜놈 몇 명한테 쫓겨 다 도망가겠지. 판옥선에서는 도망 못 가니까 어쩔 수 없이 싸우는 게지." 시무룩해진 김억추를 김응추가 점잖게 타일렀다. "형님. 그냥 싸울 생각이나 해요. 말도 안 되는 이상한 생각하지 말 고." "뭐? 내가 언제 도망가는 것 봤냐?" "쳇! 내가 언제 형님이 도망간다고 그랬어요? 싸울 생각이나 하라 그 랬죠. 에이! 그만해요. 씨이!" 김억추가 김응추 목을 잡고 졸랐다. 그때 장대 밑에서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 보니 호적 소리가 길게 울리고 있었다. "수사 영감 나으리! 중군선에서 청도기가 올랐습니다!" 김억추가 중군선을 바라보니 그곳에는 어느새 청도기가 올라와 있었 다. 깃폭은 파란색, 테두리는 빨간색. 가운데에 청도淸道라는 글이 쓰여 있었다. "기껏 첨사 주제에 정삼품 당상관 수군절도사인 날보고 오라, 이거 지?" 김억추가 투덜거리며 장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군관 몇 명이 전투준 비하느라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김억추는 가장 바쁘게 돌아다니는 군 관을 불렀다. "어이~ 배 군관!" "예! 우수사 영감." "나 대신 갔다와. 알았지?" "알았습니다." 군관 배영수는 불만이 가득한 얼굴이었지만 감히 대꾸하지는 못했다. 진무들에게 몇 가지 지시한 다음 배영수가 사후선으로 내려갔다. 다른 배에서도 만호나 군관들이 작은 사후선으로 갈아타고 중군선을 향하고 있었다. "장관과 선장은 모두 나오라아!" 거대한 소리가 울돌목 전체를 쩌렁쩌렁 울렸다. 김억추는 잠시 귀를 막았다. "놀래라! 애 떨어지겠네." 중군선 앞에 늘어선 사후선 10척에서 장수들이 일제히 몸을 돌려 중군 선 뱃머리를 올려다보았다. 거기에는 중군 미조항첨사 김응함이 우뚝 서 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통제사가 탄 좌선은 중군선 뒤에 있었다. 김억추는 수군의 출정식을 그저 신기하다는 듯이 구경하고 있었다. 가 끔 관전평도 잊지 않았다. "쳇! 이번 싸움에서는 장관과 선장船將의 구별이 없잖아? 각 진포별로 한 척씩도 갖추지 못했는데 무슨..." - 둥! "전우수 1선 대장代將 배영수요!" 중군선에서 북소리가 한번 울리자마자 배영수 군관이 무릎을 꿇으며 외쳤다. 외침은 다른 장수들에 의해 계속 이어졌다. "평산포대장 정응두요!" "회령포대장 배세춘이요오!" "낄~ 민정붕이 놈은 곤장 맞은 게 아직도 아픈가 보다." 김억추가 무척 즐거운 듯이 웃었다. 회령포만호 민정붕은 위덕의라는 사람에게 사사로이 판옥선을 빌려줬다가 통제사에게 들켜 곤장 20대를 맞은 지 한 달도 되지 않았다. 아직도 선실에 엎드려 엉덩이를 어루만지 고 있을 민정붕을 생각하니 김억추는 무척 고소했다. 당시 위덕의는 조정에서 군량을 운반하는 일을 맡고 있었고, 명나라 제독부참군 여응종으로부터 훗날 극찬을 받은 일이 있었다. 난중일기에 피난민으로 기록됐지만 일반 백성은 아니고 벼슬은 형조좌랑에 이르렀으 며, 당시 큰 규모의 장사를 한 것으로 추정된다. "형님. 남의 일이 아닙니다." 김응추가 짐짓 걱정스러운 듯 말을 꺼냈다. 당상관 벼슬을 하고 있는 사람은 잘못이 있더라도 상관이 직접 곤장을 치지 않는다. 대신 수하 군 관이나 아전이 붙들려가 곤장을 맞는 것이 당시 관례였다. "설마 통제사가 수사를 곤장 치겠냐? 품계 차이도 달랑 하난데?" "도원수가 통제사 곤장 치는 세상입니다요, 형님." 김억추가 권율에게 곤장 맞은 원균을 생각하며 잠시 땀을 흘렸다. 생 각해보니 이순신이라면 그러고도 남을 인간 같았다. 그리고 김억추는 이 순신에게 이미 몇 번이나 찍힌 몸이었다. 김억추는 군법 시행이 권율이 지독한지 이순신이 지독한지 잠시 생각 해보았다. 아무래도 이순신이 더 독이 올랐을 것이 분명했다. 외침이 잠시 끊기자 김억추가 장대 바깥으로 머리를 내밀었다. 품계가 낮은 군관 세 명은 무릎을 꿇었는데 다른 장수들은 서로 눈치만 보고 있 는 것 같았다. 장수들 시선이 한 사람에게 집중되었다. 시선이 집중된 곳은 거제현 소속 전선의 사후선이었다. 안위는 잠시 서서 주변을 한번 쓱 돌아보았다. 그러다가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마지 못해 무릎을 꿇었다. "거제현령 안위요." 팽팽한 긴장감이 풀리자 기다렸다는 듯이 외침이 이어졌다. "안골포만호 우수요!" "발포만호 소계남이오!" "해남현감 유형이오!" "녹도만호 송여종이오!" "가리포첨사 이응표요!" "조방장 배흥립이요!" 김억추가 사람들이 연달아 무릎 꿇는 것을 지켜보다가 깜짝 놀랐다. 조방장 배흥립은 벼슬도 높고 이순신보다 한 살 아래로 나이도 많았다. 절대로 첨사 김응함 따위에게 무릎을 꿇을 사람이 아니었다. 김응추가 끼여들었다. "형님! 배 영감한테 좀 배우세요. 큰 것을 위해 자존심을 죽이잖아요. 얼마나 사람이 커 보여요?" "쳇! 바보지 뭐." 김억추가 간단히 평했다. 그러나 이것은 당시 간단한 일이 전혀 아니 었다. 진주성대첩 직전 진주목사 김시민은 직속 상관인 경상우병사 유숭 인의 입성을 막았다. 결국 우병사가 지휘한 부대는 이틀 후 왜군에게 전 멸하고 말았는데, 김시민으로서는 지휘계통이 흔들리면 성이 쉽게 무너 질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고육지책이었다. 그리고 충무공의 위업을 소재로 한 영화나 TV드라마를 보면 충무공 이 사소한 명령까지 직접 내리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그러나 조선 수군 함대에서 제장들이 직접 명령을 수령하는 것은 통제사가 아니라 중 군장이고, 통제사는 중군장을 통해서 함대 전체에 명령을 내린다. "장관과 선장들은 들어라아!" 다시 중군 김응함이 찌렁찌렁한 목소리로 사방을 뒤흔들었다. "음. 귀가 멍멍할 정도로군. 김응함이 중군장이 된 건 저 목소리 때문 이 아닐까?" 중위에 편제된 경상우수영에서 가장 높은 관직을 가진 사람이 김응함 이다. 그러니 통제사를 대신해 전군을 통솔하는 중군장이 될 장수는 당 연히 김응함이다. 그걸 뻔히 알면서도 김억추가 동생에게 농을 걸었다. "대단합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울돌목 물 떨어지는 소리보다 우 렁차군요." "귀로는 징과 북소리를 들으며어, 눈으로는 깃발을 보고오, 배 몰기를 마치 말타듯하며어, 적을 보면 앞다퉈 돌진하고오. 한 배를 탄 자들은 운 명을 같이 하며어, 배마다 죽을힘을 다해 싸워야 한다아! 물러서는 자는 군법이 용서치 않으리라아!" 이것은 조선후기 수군이 훈련을 시작할 때 중군장이 제장들에게 하는 훈시 내용이다. 일반적인 사기고양 외에 지휘체계의 유지를 특별히 당부 하며, 특히 수군으로서 같은 배에 탄 군사들의 협동심을 강조하는 내용 이었다. "통제사께서도 이미 말씀하셨다아. 병법에 이르길, 죽고자 하면 살고, 살려고 하면 죽는다 했고, 한 사람이 길목을 막고 지키면, 천 명도 두렵 게 할 수 있다고 했다아!" 김억추가 눈을 감고 나지막이 읊었다. "음. 필사즉생必死則生 필생즉사必生則死이라. 그리고 일부당경一夫當 逕 족구천부足懼千夫이다. 참 좋은 말이다." 여기까지는 그런 대로 참 좋았다. 그러나 김억추는 여기서 멈추지 않 았다. "응추 너는 이 말이 어디에 있는 구절인지 아느냐?" "형님. 전혀 안 어울립니다." "으헤헤! 좀 그렇지?" "그리고 형님이 그런 걸 알 리가 없잖습니까? 그건 오자입니다!" "쳇! 나처럼 무식한 무관이 모를 수도 있지 뭐. 무과 필수과목도 아니 잖아?" 위의 구절은 병법서 오자吳子에 나오는 내용과 문맥은 비슷하지만 조 금 다르다. 즉 오자에서는 필사즉생必死則生 행생즉사幸生則死이며, 뒤의 것은 일인투명一人投命 족구천부足懼千夫이다. "이곳 울돌목이 바로 그런 길목이다아! 이곳을 지키지 못하면 나라도, 백성도 없다! 여기서 목숨을 바쳐라아!" 김응함이 갑자기 칼을 빼어들었다. 눈에서 시퍼런 불이 활활 타오르는 것 같았다. "나는 여기서 싸우다 죽겠다아! 너희들도 아예 살려는 생각을 말아 라!" 김억추는 기가 막혔다. 아무리 김응함이 중군장이라지만 품계가 더 높 은 무장들한테 할 말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말은 좀 다르게 삐져 나왔다. "뭐야? 저 놈은 바보같이 수전에서 칼을 쓰겠단 말인가? 칼로는 왜놈 졸병 하나 못 당하는 주제에." "그게 아니라 형님이 또 도망가면 칼로 치겠다는 소리 같은데요?" 옆에서 김응추가 농을 걸었다. "또 라는 말은 왜 또 붙이냐?" "안 붙이는 게 이상하죠. 안 그렇습니까?" "저길 봐라. 수졸들은 나를 철썩 같이 믿지 않느냐? 나는 저들의 기대 를 저버릴 수 없다." 갑판에서는 정말로 수졸들이 몰려오는 왜선과 김억추를 번갈아 바라보 고 있었다. 김억추를 따라 다니는 소문, 즉 김억추 밑에 있으면 절대 안 죽는다는 소문이 저들에게도 전달된 듯해서 김억추는 내심 뿌듯했다. "저들이 뭘 기대하는데요?" "하하! 그렇다는 게지. 다 알면서 그렇느냐?" "쳇! 그냥 도망가겠다고 하세요." 중군선을 바라보니 김응함이 뱃머리에 우뚝 서 있었다. 훈시는 그걸로 끝이었다. 김억추가 중군선 앞에 늘어선 장수들을 보니 그들은 머리를 조아리고 묵묵히 무릎 꿇고 있었다. 갑자기 귀청 떨어지는 소리가 김억 추의 판옥선 갑판에서 울렸다. "타공舵工은 지각관知殼官의 신호를 못 보거나 키를 잘못 써서 싸움에 불리하게 하면 목을 쳐서 군중에 돌리겠다!" 김억추가 놀라 장대 아래를 내려보았다. 병선군관 당언량이 갑판 뱃머 리에 서서 수부와 사부들을 향해 외치고 있었다. 다른 배에서도 군관들 이 비슷한 훈시를 하느라 함대 전체가 떠들썩했다. 김억추는 몰랐지만 출정식 전에 행해지는 절차인 듯했다. "예!" "요수 手는 제때에 돛을 내리고 올리지 않거나, 적의 불화살 공격에 돛을 태우면 참수하겠다!" "예으이!" 돛을 담당한 수부 두 명이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김억추가 보니 입술을 앙다문 당언량의 눈에서도 불길이 일고 있었다. 김억추가 보기에 다들 정신이 나간 것처럼 보였다. 하긴, 저 많은 왜선들을 상대해야 하니 제 정신 가진 사람이 견디기 어려울 것이라 조금 이해가 갔다. "정수 手는 닻을 부러뜨리거나 적에게 빼앗기면 목을 베겠다!" "예!" "대장隊長은 도망가거나 부하 군졸이 무서워서 싸우지 않으면 목을 치 겠다!" "예!" 장대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던 김억추가 피식 웃었다. "원, 무서워서 살겠나. 그런데 항상 그렇듯이 말만 그럴 듯하지 뭐." - 퍼벙! 뻥! "뭐, 뭐냐?" 김억추가 깜짝 놀라 방패판 뒤로 숨으며 울돌목 쪽으로 고개를 돌렸 다. 척후장으로 나갔던 영등포만호 조계종의 판옥선이 엄청난 속도로 해 협을 달려오고 있었다. 그 뒤로 바다를 새까맣게 덮은 왜선들이 따라왔 다. = 구루지마함대 고바야, 오니에몬 (*부록 예정) 어린진魚鱗陣은 일본의 전국시대 당시 쓰이던 팔진법八 陣法 가운데 하나로 상대보다 병력수가 많을 때 본대本隊를 안전하게 보 호하면서 적을 제압하기 위한 진형이다. 맨 앞에 다수의 전초부대를 놓 고 그 뒤에 둘로 나누어진 반원형 부대 둘을 배치한다. 이것을 선수先手 라 하며 선봉부대가 된다. 그리고 그 양 옆으로 유세遊勢라 하여 선봉을 도와 적을 돌파하는 유 격부대를 둔다. 이어서 뒤쪽으로 비늘처럼 펼쳐진 이진二陣과 본대가 있 다. 본대 양옆에는 다시 이를 보호하는 친위대 격인 기본세旗本勢가 있 고 뒤쪽에는 후힐後詰이라 칭하는 후미부대가 배치된다. 두텁고 적을 돌 파하는 힘이 강한 전법으로 학익진을 펼친 상대에 특히 효과가 있었다. 하지만 어린진의 이런 장점은 넓은 장소에서만 그 효과를 볼 수 있다. 좁은 장소에서는 펼치기 어렵고, 어린진 자체가 벌린 각도가 비교적 커 서 돌파력에서 뒤지기 때문이다. 이 점을 보완하기 위해 나온 것이 바로 봉시진이다. 이것은 어린진에서 선수先手를 하나로 합쳐 화살촉 모양처 럼 만들고 유세를 뒤로 후퇴시킨 진형으로 전체적으로 본대와 이진이 앞 으로 전진배치되어 돌파에 보다 더 전력할 수 있었다. "돌격명령이다! 앞으로! 모두 필사의 각오로 나가는 거다!" 미치후사가 지휘하는 구루지마 수군. 선수를 맡아 화살촉 진형을 편성 한 함대 맨 앞에 나와있는 고바야小早에서 우렁찬 목소리가 울리고 있었 다. 기다란 칼을 빼든 하급무사였다. 고바야는 일본수군에서 쓰는 가장 소형 전선이다. 전투선의 주력일 뿐 만 아니라 화물과 인원 수송에 널리 쓰이는 세키부네關船에 비해 크기도 작거니와 숨어서 총과 화살을 쏠 수 있는 2층 다락銃矢倉도 없었다. 기 본적으로 방어력이 전무한 배다. 다만 구루지마 군이 갖춘 고바야는 보통 고바야와는 틀렸다. 와키자카 군이나 도도 다카도라 군이 가진 고바야는 수부 14명, 전투원 6명으로 구성되어 주로 정찰선과 전령선으로 쓰였다. 하지만 이쪽은 크기부터가 다른 전투용이었다. 수부가 20명이 넘어 엄청난 기동력을 가진데다 전투 원도 10명이나 타고 있었다. 물론 그래도 고바야는 어디까지나 고바야였다. 여기서는 함대의 주력 이라기보단 기습을 노리는 특공전력特攻戰力에 가까웠다. "앞으로오! 적을 쳐부셔라!" 해협 입구까지는 아직 거리가 있었다. 적선은 멀리 보이지만 아직 돌 격할 때는 아니었다. 열심히 노를 젓는 수부들이 그를 보며 씩 웃었다. 그러나 그런 시선을 개의치 않는 듯 갓 스물을 넘긴 듯한 하급무사 얼굴 에는 활기가 가득 넘치고 있었다. 전국시대를 살아가는 무사가 스물을 넘겼다면 전투경력이 최소한 5년이 넘는다는 소리다. "적은 겨우 열 척 정도인 뎁쇼? 도깨비 나리." 세 번째 줄에서 노를 젓던 수부가 이마에 손을 댄 채 대꾸했다. 멀리 보이는 해협 바깥쪽에 늘어선 조선 군선들을 보는 것이다. 좁은 배에 병 력이 빽빽이 들어차 수부는 갑옷을 입은 병사와 등을 맞대고 있었다. "뭐라고?" 뒤로 홱 돌아선 무사의 얼굴이 순간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다른 병사 들보다 조금은 더 화려한 갑옷에 뿔이 달린 투구까지 쓴 무사였다. 뱃머 리에 우뚝 선 그는 이 배의 우두머리였다. "열 척이라고 무시하지 마라! 지금 멀어서 잘 안 보일지 모르지만 저 배는 보통 배가 아니다!" "보통이 아니면 뭡니까, 오니에몬 나리?" 바로 뒤에서 활을 든 병사 한 명이 킥킥 웃으며 무사의 본명을 불렀 다. 오니에몬鬼衛門. 이것이 그 무사의 이름이었다. 본명이나 별명인 '도깨 비 나리'나 별 차이가 없었다. 그것이 도깨비를 뜻하는 '귀鬼' 자가 들어 간 때문인지 아니면 하는 행동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제길! 이누스케犬助 너한테 그런 소릴 듣고 싶진 않다! 그건 그렇고 말이다." 활을 든 병사 이누스케도 '개犬'라는 글자가 이름에 있어 술을 마실 때 마다 '술 취한 개' 라고 놀림받았다. 그것을 지적하며 오니에몬은 진지하 게 말했다. "저 배는 크기도 일단 우리와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크다. 게다가 대 포가 수 십 개나 있다. 그것이 일단 불을 뿜기 시작하면 제 아무리 큰배 라도 부서져 나간다. 조선수군이 얼마나 무서운지 너네들 고향이나 출전 직전에 나고야名護屋에서 많이 들어봤지?" 수부와 병사들은 잠시 아무 말이 없었다. 소문이란 어느 정도 과장되 기 마련이지만, 조선수군에 대해서는 그 정도가 지나쳐서 어디까지 믿어 야 할 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이들이 전투에 참가한 것은 오늘 새벽 조선수군의 척후선을 뒤쫓다가 운 좋게 수급을 하나 주운 것뿐이었다. "이번에 선봉을 맡은 우리가 할 임무는 매우 간단하다." "어떤 겁니까?" "우리 일본 배가 5백 척이 넘는다지만 실제로 맨 앞에서 싸우는 건 우 리뿐이다. 이 작은 고바야로 저들을 당할 수 있겠나?" 이누스케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결국 우리들은 그저 뒤에 따라올 배들을 위한 방패가 되는 거다!" "방패." 이누스케 얼굴에서 순식간에 핏기가 사라졌다. 원래 구루지마 해적은 소형 고바야로 적선에 상륙해 기어오르는 것을 장기로 삼았다. 그러나 조선수군과의 싸움에서 그런 작은 배로는 도저히 싸움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전통을 이어받는다는 핑계로 미치후사는 이번 싸움에서도 고바야들을 선봉으로 내세워 습격전투를 시키고 있었 다. 미치후사가 노리는 것은 따로 있었다. 오니에몬이 말한 것처럼 전투에 전혀 쓸모 없는 고바야들에게 조선수군의 화력에 대한 방패 역할을 기대 한 것이다. "일단 그 배에 올라타기만 하면 조선수군은 어이없을 정도로 약하다. 하지만 그때까지는 온갖 탄환과 화살을 마구 쏘아댄다. 그걸 다 맞고 가 다간 상대 배에 닿기도 전에 몰살당한다. 그래서 우리 같은 작은 배 쪽 에 그 탄환을 쏘게 하고, 그 틈에 큰 세키부네를 돌격시켜 이기려는 거 다. 알겠나?" 오니에몬은 당연한 일을 말하는 양 차분히 설명했다. 병사들과 수부들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운이 좋으면 살겠지." 오니에몬은 은근히 '죽는다'는 것을 강조했다. 사실 그가 생각해봐도 이런 경우에 살기를 기대한다는 건 좀 무리한 일이었다. 피할 곳도 도망 갈 곳도 없는 좁은 해협 안에서 적선들이 쭉 늘어서서 이쪽으로 화포를 겨누고 있다. 어서 오라고 손짓하는 그들을 향해 돌격해 가야 하는 것이 다. 아무리 선봉이 영예스러운 일이라 해도 이런 것만은 피하고 싶었다. "이건 싸움이다. 안 그래? 땅에서 싸울 때도 선봉은 원래 그렇잖아?" 그래서 차라리 현실성이 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이미 장가까지 간 몸 으로 명색이 무사인데 철이 덜 든 아이 마냥 바락바락 소리를 지른 것도 그 때문이다. 어차피 죽을 거라고 생각하면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오니에몬이 싱긋 웃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처음에 말을 건넨 수부를 비롯해 활을 쓰는 이누스케, 구석에서 말없이 철포를 겨누고 있는 다케 지로竹次郞 등 그와 친한 병사들이 보였다. 그는 무사임에도 별로 신분 을 따지지 않고 병사들과 친하게 지내왔다. "제길! 하긴 싸움이 맞지요. 잘 알겠습니다 나리!" 수부가 바다 위에 침을 탁 뱉으며 계속 노를 저었다. "뭐 이 배에는 도깨비 나리가 계시니 그리 쉽게 맞지는 않겠지요." 이누스케 오른쪽에 선 철포병 다케지로가 그렇게 말하곤 화승에 미리 불을 붙여 시험했다. 칙 하는 소리를 내며 화승이 잘 타 들어갔다. 그것 을 손으로 잡아 끈 다케지로가 오니에몬을 다시 바라보며 웃었다. "새색시가 집에서 기다리는데, 나리는 억울해서라도 못 죽을 것 아닙 니까?" "그래. 억울해서 순순히 당하지는 못하겠다." 오니에몬 투구에 달린 뿔이 잠시 뒤로 돌아 다케지로를 겨누더니 앞을 향했다. 다케지로 말대로 오니에몬에게는 고향에 두고 온 처가 있었다. 하급 무사의 적은 녹봉 탓에 계속 미루다가 작년 말에 겨우 맞아들인 처였다. 하지만 결혼한지 한 달도 안돼서 미치후사의 동원령을 받고 구루지마 성 으로 가야했고, 바로 그 길로 멀고 먼 조선까지 왔다. 이제 겨우 열 다섯 인 처의 뽀얀 살결과 부드러운 손길을 생각하면 몇 번이고 배를 몰아 일 본으로 돌아가고픈 충동을 느꼈다. "그러니 잘 해보자! 적들을 모조리 베어 죽이는 거다!" 따지고 보면 그렇게 처와 헤어지게 된 것도 이 조선인들 때문이다. 오 니에몬은 그렇게 조선에 책임을 미루며 새삼 마음속에서 적개심을 불러 일으켰다. "물론입니다!" 이누스케가 거의 키만큼 큰 활에 화살을 매기며 소리쳤다. 등에 멘 구 루지마 군기가 곧장 뒤로 펄럭였다. 적색 바탕에 세 개의 띠. 그리고 밑 에 그려진 '카미上' 라는 글자가 선명했다. 물에서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 는다는 무라카미村上 해적을 상징하는 깃발이었다. 비록 지금은 히데요 시의 지배하에 들어가 평범한 세력이 됐지만 한 때 해적으로 일본 전국 에 걸쳐 그 이름을 떨친 그들이 가진 긍지이기도 했다. "아직은 천천히! 조금 있다가 돌격명령이 떨어지면 그때 빨리 가면 된 다!" 먼저 해협으로 돌입하는 구루지마 수군은 총 32척, 2천여 명 규모였다. 이 가운데 오니에몬이 탄 배를 비롯해 선봉에 선 고바야는 여섯 척이었 다. 이곳이 좁은 수로이기 때문에 오히려 신속하게 움직이는 작은 배가 지닌 장점을 모두 발휘할 수 있었다. 드디어 해협 중앙으로 들어가는 정면에 박혀있는 작은 섬 하나가 보였 다. 조선말로 노쿠도(녹도)라고 했던가, 구루서무(굴섬)라고 했던가? 출 전할 때 주변 지형에 대해 좀 들은 것이 있었지만 지금은 거의 생각나지 않았다. 오니에몬은 섬을 돌아가고 있는 배 위에서 힐끔 뒤쪽을 쳐다보 았다. 온 바다를 뒤덮으며 떠있는 수많은 배와 깃발, 사람들이 보였다. 아마 조금만 있으면 해협 전체가 배로 가득 찰 것이다. 섬을 돌아 막 해협에 들어서는 순간 갑자기 배가 빨라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오니에몬과 함께 적을 관측하던 병사 한 명이 큰 소리로 알렸다. "적선이 저기 앞에 있습니다! 배 위에 개미새끼처럼 움직이는 것도 보 입니다!" 오니에몬이 멀리 조선함대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과연 그곳에는 커다 란 배 12척이 나란히 일자로 서 있었다. 그리고 그 뒤에 조금 더 큰 배 한 척이 커다란 깃발을 휘날리며 떠 있었다. 다 합해 겨우 13척이었지만 도저히 '겨우' 라고 느껴지지 않았다. 위압 감마저 느끼게 하는 거대함에 오니에몬은 잠시 온몸에서 전율을 느꼈다. 오니에몬이 조선함대의 대장선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려 할 때 뒤에서 북소리가 요란히 울렸다. 오니에몬이 바다가 모두 떠나가라 큰 소리로 외쳤다. "돌격! 앞으로!" 그 북소리는 미리 약속해 둔 돌격 신호였다. 그런데 명령을 마친 오니 에몬의 발이 순간 휘청거렸다. 배가 갑자기 미친 듯이 앞으로 나갔기 때 문이다. 물 속으로 곤두박질할 뻔한 오니에몬이 수부들을 돌아보며 악을 썼다. 이곳은 물살이 흐르는 소리 때문에 옆 사람 말이 들리지 않을 정 도였다. "속도를 줄여라! 너무 빠르다!" "이건 물살 때문입니다! 굉장한 물살입니다!" 아까 도깨비 나리라고 부른 수부가 당황한 얼굴로 노를 멈췄다. 다른 수부들도 노를 멈춘 채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런데도 고바야는 엄청난 속 도로 달리고 있었다. 오니에몬은 그만 적을 살펴야 하는 시선을 내려 바다를 보았다. 거기 에는 양쪽으로 흰 거품까지 일으키며 마치 빨아들이듯 배들을 몰아가는 거센 물살이 있었다. 이곳 물살이 매우 빠르다는 것 정도는 이미 들어 알고 있었다. 사로잡 은 조선인 어부를 통해 지형에 대한 정보를 듣고 간단한 해도까지 작성 해 두었다. 그렇지만 말로만 듣는 것과 실제 겪는 것은 역시 틀렸다. 구 루지마 해적의 근거지인 세토내해內海에도 비슷한 곳이 있었지만 그곳과 는 상대가 안 되게 빨랐다. "어떻게 해서든 속도를 줄여라! 다른 배들과 보조를 맞춰 나가야 한단 말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러나 다시 뒤쪽을 쳐다본 오니에몬은 그럴 필요가 전혀 없음을 알았 다. 이런 격류에 당황한 것은 오니에몬이 탄 배만이 아니었다. 진형을 짠 채로 조이듯 적을 압박하려던 배들 모두가 질서를 잃고 적 앞으로 떠밀 려가고 있었다. 다른 배에 탄 자들도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노를 반대로 저어라! 그리고 전투준비!" 이리저리 흔들리며 나가는 배의 움직임에 수부들은 제대로 노를 젓지 못했다. 수부들 앞에는 겨우 하체를 가리는 나무방패가 한 개씩 세워져 있었다. 수부들이 입은 간단한 가죽갑옷이 그 방패와 부딪치며 달깍달깍 소리를 냈다. 수부와 몸을 맞댄 병사들은 자꾸만 서로 부딪치는 것에 짜 증을 냈다. 심한 움직임에 가벼운 현기증까지 느꼈지만 오니에몬은 침착하려 애썼 다. "조금만 참아라! 조금만 있으면..." - 꽝! 꽈광! 이긴다는 말을 내뱉기도 전에 육중한 폭음이 저편에서 울렸다. 깜짝 놀라 시선을 돌린 오니에몬 눈에 해협 반대편에 늘어선 적선과 그들이 일제히 내뿜은 흰 연기가 보였다. 잠시 후 그 연기를 뚫고 검은 물체 한 무리가 마치 까마귀 떼처럼 하 늘에 떠올랐다. 그리고 바로 내려오며 배에 쏟아졌다. "으아악!" 배에 탄 누군가 소리를 질렀다. 공포에 가득 찬 목소리였다. "뭐, 뭐야!" 오니에몬은 반사적으로 오른 팔을 머리 위로 올렸다. 그러자 찌르르 하는 통증이 느껴졌다. 뭔가에 맞은 것이다. 팔을 내려보니 짧고 작은 화살이 팔꿈치 약간 밑에 박혀 있었다. 대나 무로 만든 팔목보호대籠手를 뚫고 박힌 것이다. "빌어먹을!" 상식적으로 사람이 쏘는 화살 같은 걸로는 닿을 거리도 아니고 이렇게 많이 쏠 수도 없다. 그런데 조선수군은 대포로 작은 화살을 무더기로 쏘 았다! 기가 막히기도 했지만 그 순간은 그것이 얼굴에 맞지 않은 행운보 다는 오른팔에 맞은 불행을 생각했다. 방패 역할이라는 말이 주는 실감 이 화살을 통해 무겁게 전해져 왔다. 오니에몬은 왼팔로 허리에 찬 작은칼을 뽑았다. 오니에몬은 고다찌로 화살 깃을 자르고는 힘을 주어 화살을 뽑았다. "읍!" 고통과 피가 솟았다. 바로 오른쪽에서 흘러가던 배는 커다란 포탄에 맞았는지 앞쪽에 있던 작은 누각이 온통 부서져 내렸다. 배 주위에 빽빽이 설치한 나무방패가 부서지고 바닥에 구멍이 뚫린 배도 있었다. 부서진 방패에는 핏줄기가 쫙 뿌려져 붉은 채색을 한 것처럼 보였다. 비명과 신음이 마구 터져 나 오며 주위가 무척 시끄러워졌다. "공격! 공겨억!" 오니에몬은 도망가고 싶은 마음을 꾹 눌러 참았다. 방패는 어디까지나 방패다. 자기가 부서지면서 남을 보호해야 한다. - 팡! 파앙! 팡! 귀가 멍멍할 정도로 큰 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오니에몬이 지휘하는 고바야에 겨우 3정 있는 철포 소리였다. 다른 원거리 무기로 궁병이 쓰 는 불화살도 있지만 그걸 쓰기에는 아직 거리가 멀었다. 좀 더 접근해야 했다. 화살에 맞은 오른 팔에선 계속 진득한 피가 흘러내렸다. 원래 파란 색 이었던 손목 보호대가 온통 붉은 색으로 바뀔 정도였다. "소리를 질러라! 계속 돌격이다!" 오니에몬은 개의치 않고 갑판 위에 우뚝 서 명령했다. 불로 지지는 것 만 같은 통증에 얼굴이 자꾸만 일그러졌다. 그리고 오니에몬은 뒤를 돌 아보지 않았다. 비명소리로 미뤄 이 고바야에 탄 수부와 병사 몇 명이 화살에 맞은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오니에몬은 그들 모습을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적이 발사한 물건은 다양했다. 방금 오니에몬이 탄 고바야를 맞춘 것 처럼 작은 화살도 있고 사발 만한 돌덩이와 철환도 있었다. 철환은 특히 무서웠는데, 수백 개가 한꺼번에 고바야를 덮쳐 제대로 맞기만 하면 살 아남을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그래도 한 가지만 맞은 쪽은 차라리 운이 좋았다. 한 배에 대고 여러 가지를 쏘았는지 대개는 커다란 돌과 함께 작은 철환이나 화살을 동시에 뒤집어썼다. "우아악!" 바로 옆을 달리던 고바야에서 병사들이 비명을 울렸다. 빽빽이 들어선 수부와 병사들로 피할 곳도 방패도 없었다. 한 바탕 비명이 끝나고 나면 배는 짓눌려서 으깬 시체더미와 꿈틀거리는 부상자를 싣고 흔들거리며 떠내려갔다. = 전우수 좌선, 당언량 병선군관 당언량은 해협을 통해 왜군의 소선 몇 척이 빠른 속도로 몰 려오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우수사의 명령이 없어 아직 대포 를 쏘지는 않았지만, 중앙에 배치된 경상우수영의 판옥선 몇 척이 대포 를 쏘아 무지막지하게 박살내고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 뒤의 수많은 왜선들이었다. 뱃전에는 사부들이 늘어서서 활을 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지자총통, 현자총통에 조란탄과 차대전을 각각 장전한 화포장과 포수들이 명령만 떨어지면 바로 포를 발사할 준비를 마친지 오래였다. 당언량은 물에 젖 은 솜과 가마니를 깔아 질퍽해진 갑판을 걸으며 이를 악물었다. 이제 곧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될 것이다. "도훈도!" 장대 위에서 전라우수사 김억추가 도훈도를 불렀다. 아래 갑판으로 통 하는 사다리 바로 위에 서 있던 도훈도가 장대 밑으로 즉시 달려왔다. 도훈도는 수부들과 격군들을 지휘하며 배의 운항을 책임진 아전급이었 다. 현대의 배로 치면 일등항해사 정도로 볼 수 있다. "도훈도 대령이오!" "물살이 엄청 세지? 격군이 힘들어하지 않나?" 우수사의 말을 잠시 이해하지 못한 도훈도가 고개를 돌려 명량해협 쪽 을 바라보았다. 판옥선들이 한 줄로 늘어서 대포를 쏘고 있는 이곳은 명 량해협이 끝나 조금 넓어진 곳이라 물살은 그다지 세지 않은 편이었다. "이 정도 물살은 충분히 견딜 수 있습니다. 비록 역류이긴 하지만 해 협 안쪽으로 거슬러 내려갈 수도 있습니다." "그건 자네 생각이고, 격군들은 무척 힘들 거야. 잠깐 내려갔다 와보 게." "예! 보고 오겠습니다." 도훈도가 1층 갑판과 통하는 사다리로 내려갔다가 곧 다시 올라왔다. 당언량은 배영수와 얼굴을 마주보며 우수사의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 초 조했다. "노 하나당 네 명 전원이 젓고 있지만 아직은 힘들어하지 않습니다. 판옥선은 돛만으로 운행하는 범선이 아니라..." 평생 판옥선을 탄 도훈도가 고지식하게 대답했다. 김억추가 수군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몰라서 그런 말을 한다고 생각했는지 친절히 설명까 지 곁들였다. 전임 전라우수사 고 이억기는 고지식한 편이었다. 훨씬 더 고지식한 이 통제사보다야 조금 너그러웠지만, 그래도 그런 수사 밑에서 아전들이 일하기는 괴로웠다. 그런 고충도 모를 김억추가 도훈도의 말을 잘랐다. "어허! 힘을 절약해야 한대도. 원균 통제사가 칠천량에서 왜 졌는지 자 넨 아직도 모르겠나? 미리 격군의 힘을 빼놓으면 정작 싸울 때는 어떡하 라는 것인가?" "소, 소인은 그런 깊은 뜻을 미처 몰랐습니다. 그럼 두 명씩만 젓게 하 겠습니다." "그래. 일단 힘을 절약했다가 결정적 순간에 그 힘을 쓰도록 하게. 빨 리 도노장한테나 가보게!" "예으이!" 도훈도가 아전답게 엉덩이를 뒤로 빼고 머리를 조아린 다음 부리나케 갑판 밑으로 내려갔다. 수사의 명령만 전달해서 될 일이 아니었다. 이것 은 이 판옥선의 모든 격군을 지휘하는 도노장都櫓長에게 수사의 깊은 뜻 을 설명해야 할 정도로 오묘한 명령이었다. "이봐, 배 군관, 당 군관!" 당언량은 잠시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위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놀 라 고개를 들었다. 김억추가 방패판 사이로 계단 밑에 서 있는 군관들을 부르고 있었다. 전라우수영 군관 배영수와 함께 당언량이 즉각 한쪽 무 릎을 꿇었다. "예! 하명하십시오." 우수사 군관이 우수사를 보좌하고 명령을 전라우수영 소속 다른 배에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면, 병선군관은 그 판옥선의 실제 전투지휘를 담당 하는 군관이다. 현대 해군의 편제와 비교하면 삼도수군통제사가 해군 작 전사령관 겸 연합함대 사령관, 수사가 함대사령관, 수군우후가 부사령관, 우수사 군관이 함대사령관의 참모라면, 병선군관은 단일 함정의 함장이 라고 할 만하다. 이 경우 당언량은 전라우수영 함대의 기함에서 함장을 맡은 셈이다. 조선후기 삼도수군이 오위제로 편성됐을 때 5위衛는 각 수사가, 그 아 래의 5부部는 첨사가 맡고, 그 아래 초관은 부사, 군수, 현감 등 지방관 이나 전문수군 장수인 만호가 맡는 것으로 정해졌다. 임진왜란 때까지 부사 등 문관직을 우대한 품계서열 위주였다면, 후대에는 첨사를 중심으 로 한 전문 수군장이 실제 전투를 지휘하는 것으로 바뀐 것이다. 수군에 서는 초관이라 해도 100여 명을 거느린 당시 육군과 달리, 밑에 판옥선 몇 척을 거느린 현대의 전대장급이다. 잠시 아무 말이 없자 당언량이 고개를 슬쩍 들어 옆눈으로 살폈다. 각 종 깃발을 든 기라졸들이 전라우수사에게서 명령을 받을 채비를 갖추며 긴장하고 있었다. 드디어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는 것이다. 당언량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앞으로 엄청나게 많은 적을 상대해야 하 겠지만 통제사 말처럼 해협 입구를 틀어막으면 이길 자신이 있었다. 지 금은 해협입구를 막아 왜 수군이 서해안으로 들어서는 것을 막는 것만으 로도 이기는 것이다. 물론 언제까지 막고 있을 수만은 없겠지만. "그러니까... 그렇단 말이야. ...하게 한다. 알겠나?" 김억추가 장대 위에서 뭐라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원래부터 시끄러 운 명량해협에 대포와 조총 소리가 어울려 잘 들리지 않았다. 당언량이 배영수와 함께 계단 위로 뛰어 올라갔다. 우수사 김억추가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당언량은 방패판 틈으로 살근살근 말하는 김억추가 더 한심해 보였다. 옆집 애들끼리 담장 너머 로 잡담하는 것도 아니고 이게 뭔가. 그런데 김억추 뒤에는 친동생이라 는 김응추가 뒷모습을 보이고 서 있었다. 김응추는 웃음을 참지 못하는 지 어깨를 들썩거렸다. "이 사람들 참. 다시 말하지. 그러니까 병법에 이르길, 전쟁에서 이기 기 위해서는 결정적인 순간에 모든 힘을 집중해서 적을 몰아쳐야 한다고 했어. 그러기 전에 그 힘을 비축해야 할 때도 있는 법이라고 했다. 들어 는 봤나?" "무, 물론입니다." 당언량이 당황하며 대답하자 김억추 뒤에서 김응추가 고개를 갸웃거렸 다. 당언량은 수사의 말이 어떤 병법서에 나왔는지 사실 기억이 나지 않 았다. 비슷한 말들은 많은데, 수사가 그것들을 합해 이상하게 해석한 모 양이었다. 그때 김억추가 손을 흔들며 다른 사람을 불렀다. "어이~ 이 만호." "예! 수사 영감." 금갑만호 이정표가 활을 들고 뱃전에 서 있다가 장대 아래로 뛰어왔 다. 무장으로서 무척 다부진 생김새였다. 이순신 아래에서 싸웠던 수군장 수들이 나중에 출세한 경우가 많았지만, 이정표도 뒤에 포도대장이 되어 수많은 부하들을 호령하며 입신양명한 인물이었다. 김억추가 말을 시작했다. "그러니까... 말이야. ...한다. 알겠나?" "예? 무슨 말씀입니까? 죄송하지만 크게 하명하십시오." 이정표가 밑에서 큰 소리로 되물었다. 그러나 당언량은 수사 옆에서 분명히 들었다. 김억추가 한 말이 이정표에게 안 들린 게 아니라, 김억추 는 '그러니까, 말이야, 한다, 알겠나'라는 말만 하면서 중간에서는 입만 벙긋거린 것이다. 당언량은 배영수와 얼굴을 마주보며 식은땀을 주르륵 흘렸다. "에에. 그러니까 우리끼리 합의를 봤네. 배를 뒤로 조금만 물리기로 말 야. 저 뒤에 피난선들을 우리가 보호해야 하지 않겠나?" "중군선에서는 그런 명령이 없지 않습니까?" 이정표가 당장 반발했다. 이정표는 이억기라면 몰라도 김억추에게는 상당한 반감을 가진 듯했다. 그러자 김억추가 소리를 질렀다. "어허! 이 사람. 장수가 전쟁터에 나가면 임금 말도 듣지 않는다고 했 어. 전쟁터란 워낙 상황이 급변하니까 장수가 알아서 판단해야 하는 거 야. 알겠나?" "그건 통제사 같은 대장이 해야 할 말 아니오이까?" 만호 이정표의 목소리가 뱃전에 우렁차게 울렸다. 그때 판옥선 위로 하얀 연기를 길게 끌며 뭔가 날아갔다. 김억추가 깜짝 놀라 고개를 숙였 다가 다시 방패판 사이로 눈을 빼꼼히 드러냈다. "자넨 내 부하니까 내 명령을 들어! 그리고 배를 잃고 남의 배에 탄 객장 주제에! 말 다했나?" 이정표가 장대 위를 노려보았다. 눈이 이글이글 타올랐다. 당언량은 중 간에서 어쩔 바를 몰랐다. 옆에서 묘한 자세로 계단 난간을 잡고 있는 배영수도 곤란한 표정이었다. "알겠습니다." 이윽고 이정표가 허리를 숙여 군례를 올렸다. 허리를 세운 이정표는 잠시 격류로 진탕하는 명량해협을 바라보다가 활을 뱃전에 팽개치고는 아래로 내려가 버렸다. "그 사람, 성질하고는." 김억추가 툴툴거렸다. "형님! 앞에..." 갑자기 김응추가 딱딱히 얼어붙었다. 김억추가 벌떡 일어나 방패판 사 이로 해협을 바라보았다. 해협 안에서는 작은 배 몇 척을 선두로 100여 척이 넘는 왜선들이 쇄도하고 있었다. "이런! 도훈도! 도훈도는 뭐하는 거야?" 그때 판옥선이 뒤로 조금 빠졌다. 물살에 조금씩 밀린 것이다. 가리포 첨사 이응표와 해남현감 유형이 진형을 유지하기 위해 전라우수사 판옥 선을 따라 조금씩 뒤로 물러섰다. 운동장에 반듯이 한 줄로 세운 아이들 이 중간부터 열이 틀어지듯이, 판옥선들이 대포를 쏘며 천천히 물러서기 시작했다. = 거제1선, 안위 "우수사 저놈이! 아니! 중군장마저!" 거제현령 안위가 방패판을 부술 듯이 흔들며 안절부절했다. 판옥선들 이 약속이라도 한 듯 천천히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심지어 항상 통제사 의 좌선 앞에 있어야 할 중군선도 좌선을 지나쳐 뒤로 빠져 나오고 있었 다. "김응함, 이놈! 아까 그렇게 큰소리치더니. 그것이 다 허언이란 말인 가?" 그렇게 소리를 지른 안위는 혹시나 다른 명령이 내려오지 않았나 중군 선을 살폈다. 그러나 아무리 봐도 중군선의 깃발은 그대로였다. 그렇다면 정식 명령체계에 의한 함대 운영이 아니고 각 판옥선들이 개별적으로 뒤 로 물러서고 있다는 말이 된다. "싸우기도 전에 패주라니! 또 칠천량 꼴이 되려 하는구나! 다 김억추 탓이야. 병선군관! 도훈도!" 안위가 이를 갈며 장대 아래에 선 군관들과 도훈도를 불렀다. 다른 장 수들이 다 도망가도 안위만은 좌선과 함께 최후를 마칠 각오였다. 안위 가 도훈도에게 좌선 옆으로 배를 붙이라고 말하려는 순간 조라포만호 정 공청이 안위의 갑옷 깃을 붙잡았다. "무슨 일이오, 정 만호?" 안위가 쳐다보니 정공청이 안색이 하얗게 변한 채 말을 더듬었다. "거제! 우리도 줄을 맞춰 조금 물러섭시다. 적이 너무 많아요. 자칫하 면 포위되고 말겠소." "그게 말이 되오? 칠천량패전 때처럼 주장을 버리고 또 도망치자는 것 이오?" "그, 그건 아니지 않소? 통제사께서도 줄을 맞춰 물러서시면... 여기서 싸우기 벅차다는 건 주상전하께서도 인정하셨지 않소?" "하지만 이 통제사가 물러설 것 같소? 여기서 끝장을 보아야 하오!" 한산도에 처박혀 술에 쩔어 있느라 왜적을 공격하지 않는다고 조정 중 신들에게 욕먹고, 형벌이 가혹하다고 수졸들에게 욕먹는 이 통제사였다. 그러나 안위가 확실히 이순신을 인정하는 부분이 있었다. 그것은 통제사 가 싸우는 방법을 안다는 것이다. 비록 척후들과 부하 장수들이 고달프기는 하나 이 통제사가 있을 때는 한 번도 왜선들로부터 야습을 당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무리 병력이 적 고 불리한 상황에 처해도 최소한 패배한 적은 없었다. 말도 안 되는 명 령을 받고 장문포 싸움처럼 불리한 전투를 할 때도 아군의 피해를 최소 화한 사람이 이순신이었다. 조선수군의 판옥선이 견고하고 커서 왜선들이 공격하기 어렵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었다. 심지어 왜장들도 다 아는 이야기라고 했다. 왜선이 사거리가 짧은 조총을 쏘는 반면 판옥선은 대포를 쏘아 화력에서도 압도 적이라는 사실도 양측이 모두 인정했다. 상식적으로 볼 때 왜 수군은 조 선수군을 당할 수 없었다. 그러나 왜 원균은 칠천량에서 그렇게 말도 안 되는 패배를 당했단 말 인가? 칠천량에서 패할 때는 척후를 세우지 않았고 지친 수졸들이 지레 겁을 먹고 도망가서 졌다고 치자. 그럼 그 전에 있었던 부산 앞바다 싸 움과 가덕도에서는 왜 그렇게 얼토당토않은 결과가 나왔을까? 그때는 도 대체 제대로 싸운 적이 없었다. 안위는 지금도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칠천량패전 직후 백의종군 중 인 이순신을 만났을 때 안위가 먼저 원균을 그렇게 욕했지만, 원균이 아 니라 만약 통제사가 다른 사람이었더라면 결과가 달랐을까 하는 질문에 는 대답할 자신이 없었다. 안위가 생각하기에 이 통제사는 분명 다른 장수들이 갖지 못한 어떤 특이한 것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 밑에 몇 년 째 근무한 안위는 아직 그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깨닫지 못했다. 적을 만나면 도망가기 바쁜 조 선군이라는 것은, 육군이나 수군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이순신은 육 군보다 질이 훨씬 떨어진다는 수군을 데리고도 연전연승했다. 해남현감 유형은 언젠가 이런 말을 했다. 역시 술자리였지만. 이 통제 사는 지략이 뛰어난 것이 아니라 워낙 고지식하기 때문에 승리할 수밖에 없다고. 그리고 또, 다른 장수가 이 통제사를 대신하지 못하는 것은, 다 른 자들이 그 유리한 조건들을 충분히 활용할 역량이 되지 못하기 때문 이라고 말했다. 알쏭달쏭한 말이었지만, 건방진 유형이 한 말이므로 안위 는 곧이 듣지 않았다. "우리가 다 뒤로 물러서면 도저히 혼자서는 싸울 수 없을 것 아니오? 그럼 뒤에서 기다렸다가 통제사가 오시면 함께 서해안을 타고 북쪽으로 올라갑시다. 나중에 충청수군이 합세해 준다면 왜군을 어느 정도 막을 수 있을 게요." "그건 안되오!" 정공청이 안위를 붙들고 통사정하자 안위가 뿌리쳤다. 그리고 정공청 을 쏘아보았다. 그렇다고 정공청이 특별히 겁쟁이는 아니었다. 같이 싸울 때 봤지만 적진을 향해 대포를 요란히 쏘며 돌격하는 장수를 겁쟁이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아마 이런 자가 일반적인 조선수군 장수의 모습이리라. "거제원께서는 정여립의 오촌조카라면서요? 그것 때문에 북변에 귀양 간 적도 있고 말이오. 주상전하께 목숨 바쳐 충성할 필요 있겠소?" 정공청이 슬쩍 방향을 바꿨다. 그러자 안위가 갑자기 움찔했다. 안위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손이 엉덩이로 향했다. 안위가 귀양만 간 것은 아니었다. 장류杖流는 곤장을 맞고 유배를 떠나는 가혹한 형벌이었 다. 많은 사람이 장독이 올라 중간에서 죽는데, 안위는 이를 악물고 악착 같이 걸어 간신히 함경도의 유배지에 도착했었다. 되돌아 생각해보면 지 금까지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기적이라 할 수 있었다. 안위는 잠시 긴장했다. 항상 역적의 일족이라 손가락질 받아온 안위였 다. 누구에게든 조심해야 했다. "이런! 국왕의 은혜를 입은 장수가 어찌 그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이 오?" "살아서 뒷날을 기약합시다. 제발! 고향에는 늙으신 노모가..." 무릎을 꿇으며 안위의 손을 잡은 정공청 얼굴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렀 다. 안위가 정공청이 불쌍하다고 생각한 순간, 정공청의 어머니는 이미 돌아가셨고 부친이 젊은 후처를 들였다고 말하며 허탈하게 웃은 기억이 떠올랐다. 안위가 슬쩍 방패판 사이로 바깥을 살폈다. 어느새 좌선이 거제1선의 앞에 있었다. 안위의 판옥선이 그 사이에 뒤로 물러선 것이다. 안위가 펄 쩍 뛰며 장대 아래를 향해 외쳤다. "도훈도 이노옴! 명령 없이 배를 물리다니, 죽고 싶은 게냐?" = 구루지마함대 고바야, 오니에몬 "와아! 와아!" 선봉인 오니에몬의 배에서 지른 함성을 신호로 다른 배 두 척에 탄 병 사들이 간간이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함성만 온전했을 뿐 돌격은 전혀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 이미 다친 병사와 수부가 많고 거친 물살로 인 해 배가 제대로 조정되지 못했다. 대형을 이루어 돌격하던 고바야는 순식간에 가랑잎이 흘러가는 것처럼 제각기 흘러갔다. 그건 이미 전선이 아닌 조난선의 모습 그대로였다. 고바야들이 흐르는 옆으로 하얀 물결이 길게 일어나고 있었다. 그곳에 닿으면 죽음뿐이라고 했다. 수부들이 죽어라 노를 저어 그 암초지대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쳤다. 그러나 해협 중간이라고 나을 건 없었다. 거센 격류에 휘말려 배가 위아래로 오르내렸고, 넘어지지 않으려면 뭔가 꽉 붙들어야 했다. 다시 조선함대의 포격이 쏟아졌다. 아니, 정확히 보니 그것은 함대가 아니었다. 단 한 척이었다. 오니에몬이 조선수군의 갑작스런 진형변화에 눈을 크게 뜨고 긴장했다. "그 유명한 학익진인가?" 조선수군은 일본에서 악명이 무척 높았다. 구키나 구루지마 등 유명한 수군도 아무도 제대로 싸우지 못하고 전멸을 당할 뿐이라고 들었다. 특 히 조선수군이 바다 위에서 펼치는 오묘한 진형변화를 눈여겨 보지 않으 면 아차 하는 사이에 포위되어 사방에서 불화살과 포환이 날아든다고 들 었다. 어느새 앞에 늘어섰던 조선 함선들은 뒤로 조금 물러섰고, 뒤에 있던 큰배가 앞으로 드러난 채 이쪽의 모든 배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오니에 몬은 그만 팔에서 몰려오는 통증도 잊었다. "적 진형이 바뀐다!" 왜 갑자기 적이 진형을 바꿔 한 척을 앞에 내세웠지는 모르겠지만 그 건 궁금하지도 않았다. 저 큰배에 휘날리는 거대한 깃발에 한자가 한 자 써 있었지만 글을 모르는 오니에몬은 그게 무슨 뜻인지 알지 못했다. 그 러나 지금 중요한 건 단 몇 번의 포격에 질서를 잃어버린 우리편이었다. "뭐 하는 거야? 제대로 배 못 몰아?" "그게, 물살 때문에 잘 안됩니다!" 당황한 수부들이 필사적으로 배를 조정하려 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오 니에몬의 배도 몇 번인가 주위에 있는 배에 들이박을 뻔했다. 죽음의 길 이라는 하얀 물살에 닿을 뻔하기도 했다. 그리고 키잡이는 가슴과 배에 화살을 막고 죽어버린 지 오래였다. 대신 들어간 수부 한 명이 익숙하지 않은 솜씨로 키를 잡고 있었다. 배가 크게 흔들리자 갑판 위에서 그나마 사격을 하던 병사들이 술 취 한 주정뱅이처럼 엎어졌다. 오니에몬은 일어서며 조금 전의 당당한 모습 이 이렇게 형편없이 바뀌기까지 너무도 짧은 시간이 걸렸다는 것을 깨닫 고 이를 갈았다. "이게 무슨 추태냐! 지금 미치후사 님이 우리를 보고 있다!" 큰 전투는 아니고 아주 작은 싸움에 불과했지만 오니에몬도 일본에서 몇 번이나 싸움에 나간 적이 있었다. 비록 작은 고바야를 이끌고 있었지 만 그때마다 늘 상당한 활약을 보여오던 오니에몬과 병사들이었다. 오니에몬과 부하들은 늘 고함을 크게 지르며 힘차게 노를 저어 적선에 다가갔고 용감히 싸웠다. 불화살과 철포를 쏘아 두 배나 큰 배를 불태운 적도 있었다. '구루지마의 도깨비'라는 수군에서는 제법 알아주는 별칭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겨우 몇 번의 공격으로 전열이 흩어져 버 렸다. "다케지로! 사격준비해라! 곧 적선에 돌입한다!" "알겠습니다!" 다케지로가 절룩거리며 걸어왔다. 그가 지나온 갑판 위에는 피가 줄줄 이 묻어 나오고 있었다. 뱃전에 쓰러진 수부와 병사들은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다쳤나? 다케지로!" "괜찮습니다, 도깨비 나리. 이봐! 되도록 저 망할 배 가까이 몰아줘! 저것들을 다 죽여버리겠어!" 다케지로는 허벅지를 맞은 것 같았다. 이를 악물며 고통을 참는 표정 으로 다케지로가 아직 살아서 노를 젓고 있는 수부들에게 외쳤다. 팔에 는 철포가 단단히 쥐어져 있었다. "네 녀석도 맞았구나." 이 배에 탄 30명 가운데 벌써 10명이 시체로 변했다. 배를 모는 수부 는 그 숫자가 반으로 줄어있었다. 오니에몬은 철포나 활을 잡으려던 생각을 버리고 큰칼을 빼들었다. 적 을 내리치려는 게 아니라 아군을 격려하고 독전하려는 의도였다. "이누스케! 살아있나?" "으... 아직은... 살아있습니다!" 다소 괴롭고 거친 숨소리와 대답이 들렸다. 그리고 왼쪽 눈을 한 손으 로 감싸쥔 이누스케가 천천히 앞으로 나왔다. 그 손 밑에서 붉은 피가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죽은 사람보다는 나았지만 별로 재수가 좋지 못 했던 것이다. 아슬아슬하게 뱃전을 걷던 이누스케가 바닥에 널린 시체에 발이 걸려 넘어졌다. - 와지끈! 큰소리에 놀라 오니에몬이 고개를 돌렸다. 바로 앞에서 포탄과 화살을 잔뜩 뒤집어써 반쯤 부서진 고바야가 적선에 부딪친 순간이었다. 얇은 삼나무 판이 부러지는 소리를 내며 고바야는 형체도 알 수 없게 흩어져 버렸다. 서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는데, 원래 그랬는지 아니면 충돌하 는 순간 그렇게 됐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마치 도끼로 내리친 장작 같은 최후였다. 오니에 몬은 순간적으로 엄청난 공포를 느꼈다. "모두 정신 똑바로 차려라! 줄사다리를 준비해라!" 함성과 포성으로 인해 이제는 악을 써야 겨우 말소리가 잘 들렸다. 오 니에몬은 점점 가까워지는 적선을 보며 절규에 가깝게 소리쳤다. "적을 공격한다! 여기서 우리가 한 발이라도 더 맞으면 반대로 뒤에서 오는 배가 한 발을 적게 맞는다! 말했듯이 우리는 방패다! 부서질 때까 지 적을 막는 방패란 말이다!"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보다 차라리 스스로에게 다짐하는 말이었다. 이 왕 죽을 거라면 확실히 해두고 싶었다. "우아아!" 고바야가 드디어 적선 정면을 향해 돌입하자 오니에몬은 소리를 질렀 다. 먼저 부서진 다른 고바야의 잔해와 죽어가는 사람들이 옆으로 순식 간에 스쳐지나갔다. 나뭇조각들은 열기를 뿜으며 활활 타오르는 불에, 사 람들은 붉은 피와 비명에 덮여 있었다. 미칠 것만 같은 답답함에 소리라 도 지르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판옥선은 배라고 하기엔 너무 컸다. 오니에몬은 고개를 한참 위로 들 어올려야 했다. 마치 거대한 성을 상대로 혼자서 돌격하는 기분이 들었 다. 척 보기에도 묵직한 널빤지들이 오니에몬을 압박했다. "우리는 이긴다! 우리는 이제 이기는 거야!" 뒤에서 따라오는 세키부네들은 아마 상처 하나 없이 전속력으로 적선 에 도달할 것이다. 오니에몬은 그들이 닥치는 대로 적을 유린하는 모습 을 상상해 보았다. 활과 대포만 잘 쏘는 조선군은 칼 잘 쓰는 무사 몇 명만 갑판에 올라가도 갈팡질팡할 것이다. 겁쟁이 조선군을 일본도로 마 구 베며 불화살을 쏘아 배를 불태운다. 상상만으로도 짜릿한 광경이었다. "그때는 아무리 살려달라고 사정해도 봐주지 않아!" 오니에몬은 눈앞에 점점 다가오는 적선을 노려본 채 갑판 위에 반듯이 앉았다. 커다란 철환이 하나 떨어지고 뭔가 시커먼 것들이 다시 무리로 날아들었다. 배가 크게 흔들리고 뱃전에서 물기둥이 치솟아 올랐다. "야! 이 못된 녀석들아!" 오니에몬 뒤에서 다케지로가 욕설을 퍼부으며 철포 한 발을 쏘았다. 하지만 그 직후에 그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이누스케가 적선을 향해 '개 같은 녀석!' 이라 소리쳤지만 웃을 수 없었다. 한 줄기 바람처럼 철 환 수백 개가 한꺼번에 몰아치자 아무도 더 이상 말하지 못했다. 그 바람이 몸에 닿는다고 느낀 순간 오니에몬은 재빨리 고개를 숙이며 몸을 수그렸다. 등뒤에 따끔한 아픔이 느껴졌고 오니에몬의 몸은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졌다. 찌그러진 투구가 머리에서 벗겨졌다. 어깨에서 떨어져나간 갑옷 조각 을 짚고 일어선 오니에몬의 이마에 한 줄기 핏물이 흘러내렸다. 겨우 살 아남은 수부 2명이 노를 집어던지고 바다로 뛰어들고 있었다. 그러나 오 니에몬은 그들을 구루지마 해적답지 않은 비겁한 수부라고 욕하지는 않 았다. "이누스케! 다케지로!" 오니에몬이 둘을 부르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오니에몬 눈에 비쳐진 것은 부서진 갑옷 조각과 형체마저 온전하지 않은 핏덩어리 시체였다. 방금 전까지는 이누스케였고 다케지로였을 지도 모를 시체뿐이었다. 배 위에 살아남은 사람은 이제 오니에몬밖에 없었다. "이런..." 오니에몬과 그가 탄 고바야는 졌다. 오니에몬은 끝까지 오른손에 쥐고 있던 칼을 던져버렸다. 이대로 적선에 어떻게 간다해도 공격할 방법은 없었다. 줄사다리가 시체들 밑에 깔려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일본수군은 절대로 지지 않는다. 시체와 잔해를 넘어서 끊임없 이 돌격할 것이고 끝내는 이길 것이다. 오니에몬은 그런 생각을 하며 이 를 악물었다. 천천히 가라앉는 오니에몬의 고바야를 거센 물살이 적선으로 밀어붙였 다. 판옥선 위에 탄 조선군 병졸과 장수, 군기까지 뚜렷이 보였다. 공포와 오기가 동시에 몰려왔다. 오니에몬은 일부러 가슴을 쫙 폈다. 그리고 바닥을 구르는 창을 집어들었다. 적선 위에서 장수 한 명이 오니 에몬을 노려보았다. 그 눈빛에 오니에몬도 지지 않고 노려보았다. 피가 줄줄 흐르는 팔에서 기운이 빠져나갔지만 어금니를 꽉 물며 버텼다. - 피잇! 조선 장수가 이쪽을 향해 활을 쏘았다. 그 장면이 가슴을 관통하는 아 픔이 되기까지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뜨거운 것이 가슴을 파고드는 느낌. 이때 고바야가 둔탁한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그리고 오 니에몬은 나무벽에 내팽개쳐졌다. 사공 잃은 고바야가 적선을 들이받은 것이다. "내... 내가..." 이젠 일본에 돌아갈 수 없다. 열 다섯 살의 처도, 고향도, 그리고 푸른 하늘도 볼 수 없다. 오니에몬은 고꾸라지려는 몸을 간신히 가누며 우뚝 일어섰다. 가슴에 꽂힌 화살의 깃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오니에몬이 창을 들어 힘껏 적선에 박아 넣었다. "이 오니에몬이... 하! 하! 이번 싸움의... 일번창一番槍이다아!" 얼굴에 흐르는 눈물이 가슴에 박힌 화살보다 더 뜨겁게 느껴졌다. 이 건 슬픔이 아니다. 용감히 돌진해 적에게 가장 먼저 창을 꽂은 일번창. 그 영예에 대한 감격이었다. 몸은 없어질 지라도 이 명예만은 오랫동안 남을 것이다. 이어서 무너지는 몸이 차가운 바다 속에 빠지는 것을 느끼 면서도 오니에몬은 계속 그렇게 생각했다. 4. 오전 (1) (제목 짓는 역량이 부족 -_-;;) = 조선수군 좌선, 우치적 "그놈은 어떻게 됐느냐아?" 온 배가 쩌렁쩌렁 울렸다. 군관 박영남이 황급히 장대를 향해 머리를 조아리며 보고했다. 그 목소리가 몹시 떨렸다. "가슴에 화살을 맞고도 좌선에 창을 박은 다음에야 거꾸러졌습니다." "고오야안 노오옴!" 마치 거대한 호랑이가 낮게 으르렁거리는 소리 같았다. 통제사와 함께 장대에 오른 순천부사 우치적은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울돌목을 가득 메우며 들어오는 왜선들보다 옆에 서서 노호하는 통제사가 더 무서웠다. 우치적은 이 통제사가 조금 전까지 사경을 헤매던 사람이라고는 도저 히 믿어지지 않았다. 아까 말에서 떨어지는 통제사를 받았을 때는 몸이 너무 가벼워 하마터면 하늘로 던져 올릴 뻔했었다. 좌선에 탈 때도, 장대 에 오를 때도 우치적이 업고 올라야 했다. 조금 전 만해도 반쯤 누운 채 숨을 헐떡이던 모습은 절대 꿈이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모습은 전혀 찾을 수 없었다. 싸울 때라서 그런가? 통제사는 어느새 눈빛을 반짝이며 온몸에는 생기 가 돌았다. 아니, 엄청난 기도가 몸밖으로 발산되는 것 같았다. 그 기세 에 눌려 우치적은 머리카락이 곤두설 정도였다. '이 분은 역시 이곳에서 죽을 생각이신가?' 우치적은 무서웠지만, 한편으로는 걱정스러웠다. 통제사가 이곳에서 요 행히 죽지 않더라도 앞으로 며칠 못 살 것 같았다. 통제사가 평생의 기 를 한꺼번에 써버리는 듯해서 안타까웠다. 그러나 기운을 아낄 필요는 없을 것이다. 어차피 여기서 다 죽을 테니까. "어서 앞으로 나서라. 해협을 막아야 한다!" 사람 몸에서 나오는 소리 같지 않았다. 마치 거대한 동굴 안에서 노한 호랑이가 울부짖는 소리였다. 우치적이 퍼뜩 정신이 들어 장대 아래로 소리를 질렀다. "지각관! 어서 중군에 알려라. 모든 배에 명령해 앞으로 돌격토록 하 라!" 우치적의 명령을 받은 군관 송희립이 절도 있게 허리를 숙였다. 그리 고는 일렬로 서 있는 기라졸들 중에서 중군장에게 전진을 명령하는 깃발 을 든 기라졸을 지목했다. 그러자 그 기라졸이 뛰어나와 돛대로 기어올 라갔다. "허억!" 갑자기 우치적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우치적 어깨에 커다란 손이 턱 올려진 것이다. 어깨가 무겁고 온몸에 식은땀이 쫘악 흘렀다. 통제사였 다. "선장! 당장 좌선을 전진시켜라! 울돌목을 막아야 한다. 어서, 급하다!" 통제사가 직접 선장船將 송한에게 명령하고 있었다. 우치적은 몸이 얼 어붙어 움직일 수가 없었다. 총통에 아직 장전이 끝나지 않았으니 조금 물러서자는 말을 하려 했지만 입마저 얼어붙었다. 통제사의 손이 아직도 어깨에 올려져 있기 때문이었다. 송한이 장대 위를 바라보더니 잠시 주저하는 듯했다. 우치적이 알기로 송한은 흔하디 흔한 갑사甲士 출신 군관에 불과했다. 정식으로 무과에 급제한 것도 아니고 제대로 공을 세워본 적도 없었다. 다만 갑사로서 수군에 배속 받았다가 병역을 마치고도 전쟁이 끝나지 않 아 계속 진중에 머물렀을 뿐이었다. 이 배에는 순천부사 우치적 말고도 보성군수, 강진현감, 제포만호 주의 수나 당포만호 안이명, 판관 정제, 그 외에 송희립 같은 군관들처럼 오랫 동안 수군을 지휘한 장수들이 많았다. 그런데도 송한이 선장을 계속 맡 은 것은 칠천량해전 전부터 경상우수사 배설 밑에서 이 배의 선장으로 있었다는 이유 단 하나 때문이었다. 격군들이 보충되면 이 장수들은 다른 배를 지휘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계획과는 달리 노를 저을만한 젊은 사람들은 대부분 멀리 달아나 버리고 없었다. 한산도에서 엄청난 군세를 자랑하며 왜 수군을 위압할 때도 끝없이 도망가던 격군들이었으니, 칠천량 패전 직후인 지금은 말할 것도 없었다. "어서 전진시키라니까!" 통제사가 다시 송한을 재촉했다. 통제사는 여차하면 장대에서 뛰어내 려 송한을 베어버릴 듯한 말투였다. 우치적이 슬쩍 눈알을 돌렸다. 정말 로 통제사는 칼자루를 잡은 손에 힘을 잔뜩 주고 있었다. 송한이 이내 결심한 듯 왜선들을 바라보며 덜덜 떠는 도훈도에게 소리 를 질렀다. "도훈도! 통상 말씀을 들었느냐? 전진하랍신다! 양쪽 바위가 튀어나온 목까지다. 빨리!" "예? 예." 도훈도는 잠시 다리가 떨어지지 않는 듯했다. 덜덜 떨며 장대 위와 송 한, 그리고 해협을 가득 채운 왜선들을 번갈아 바라만 보고 있었다. 송한 이 성큼성큼 다가가면서 칼집에 손을 댔다. 한 걸음씩 내딛을 때마다 갑 판에 깔린 가마니에서 물이 흥건히 배어나왔다. "이놈이 감히! 군률을 시행해야 말을 듣겠느냐?" "아닙니다요, 나리. 어이, 도노장! 목까지 전진하랍신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도훈도가 허겁지겁 엎드려 사다리 아래로 소리쳤 다. 그러나 배는 움직이지 않았다. 기다리다 못한 송한이 칼을 빼들었다. 시퍼런 칼날이 아침햇살 아래 황금빛 빛무리를 만들었다. 손을 들어 막 는 도훈도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잠깐! 잠깐만 기다려주십쇼! 내, 도노장 이놈을!" 도훈도가 사다리를 타고 아래로 뛰어내려갔다. 잠시 아래 갑판에서 고 성이 오가고, 간간이 도훈도의 말이 들려왔다. 왜군에게 죽기 전에 통제 사나 군관들에게 먼저 죽겠다는 뜻 같았다. 배는 곧 앞으로 전진하기 시작했다. 그제야 통제사가 우치적 어깨에 올린 손을 내렸다. 우치적이 겨우 숨을 내쉬었다. 갑자기 생각난 듯이 우치적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왜 대선들이 목으 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런데 하얀 물결이 일어나는 가장자리를 피해 중 앙으로 두 척씩 돌입하고 있었다. "포수들은 빨리 장전해라!" 송한이 재촉했지만 장전은 보통 때보다 훨씬 늦어지고 있었다. 화포장 과 포수들의 손이 얼어붙어 작업이 제대로 진행되지 못한 것이다. 발사 준비완료, 즉 포구를 통해 철환이나 차대전 등을 채워넣으려면 아직 시 간이 더 필요했다. 지금은 약통에 약통에 약선을 끼우고 화약을 채워 넣은 다음, 부리를 통해 격목이나 흙을 쑤셔 넣고 다지는 중이었다. 차대전 같은 대형 화살 을 쏠 경우에는 약통 앞에 격목을 끼워넣고, 작은 철환을 한꺼번에 쏠 때에는 격목 대신 흙을 다져 넣는다. 임진왜란 당시의 총통류는 일반적으로 화약을 넣는 약통보다 포구가 더 넓다. 약통과 포구 사이에 안으로 갈수록 지름이 좁아지는 부분이 짧 게 있어 그곳에 적당한 크기로 가공한 나무토막을 끼워 약통을 밀폐시킬 수 있다. - 징! 징! 지잉! 멀리서 징 소리가 짧게 세 번 연달아 울렸다. 우치적이 뒤돌아보니 물 러선 판옥선들이 일자진을 그대로 유지한 채 물위에 떠 있었다. 분명 중 군선에서 울린 징소리였다. - 징! 지잉! 징! 다시 징 소리가 울렸다. 무슨 뜻인지 파악한 우치적이 슬그머니 통제 사의 눈치를 살피며 보고했다. "중군선에서 자꾸 후퇴를 청합니다. 아,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우치적이 눈을 내리깔았다. 통제사의 부리부리한 눈이 우치적을 쏘아 보고 있었다. 그때 아래에서 송한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직 활을 쏘지 마라! 사수들은 방패판에서 한 발 물러서라!" 송한은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명령을 내렸다. 이것은 이 배의 전투를 지휘하는 선장으로서 아주 정상적인 명령이었다. 그러나 활을 든 군수, 현감, 만호, 군관들은 일제히 송한을 노려보았다. 순간 갑판에서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러나 잠시 후 장수들이 방패판에서 일제히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송한과 장수들을 지켜보던 우 치적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 거제1선, 안위 "도훈도 이노옴! 네가 죽고 싶은 게로구나아!" 장대를 내려온 안위가 칼을 빼어들고 도훈도에게 다가갔다. 뒤로 나자 빠진 도훈도는 그저 벌벌 떨 뿐 도망갈 생각조차 못했다. 뭐라고 입을 벙긋거리긴 했지만 말소리가 되어 나오지는 못했다. 전투 외의 일로 배에 문제가 생겼을 때 가장 큰 책임을 지는 자는 도 훈도였다. 난중일기에 나오는 수많은 도훈도들은 온통 처벌, 문책 당하는 것만으로 등장한다. 곤장 일흔 대에서 아흔 대를 맞거나, 심지어 처형까 지 당한다. 충무공이 원균이나 이억기 등 수사들과 마찰을 빚을 때 그들 대신 끌려와 곤장을 맞는 사람도 도훈도였다. 조라포만호 정공청이 안위를 따라가며 말렸다. "현령이 잠시 참으시오! 그리고 저길 보시오." "으음!" 안위가 절로 신음을 질렀다. 왜선들이 새까맣게 몰려온다는 표현이 맞 았다. 특히 이미 해협 안으로 진입한 왜선들은 좌선을 향해 빠른 속도로 돌진하고 있었다. 그 왜선들에 맞서 통제사의 좌선이 홀로 돌진하고 있었다. 마치 혼자 서 모든 왜선들을 막겠다는 듯이. "저런! 통상! 물러서시오!" 안위가 뱃전으로 뛰어가며 안타깝게 불렀다. 그러나 안위가 외친다고 멀리 떨어진 좌선에서 들릴 리가 없었다. 정공청이 안위 옆에 섰다. "이 통제사는 이미 쓰러졌을 지도 모릅니다. 아까 보셨지 않소? 말에 서 굴러 떨어지고 토악질해대는 통제사를 말이오." "하지만 통상 어른은..." "우린 중군의 명령만 따르면 되오. 중군을 임명하고 명령을 따르도록 한 건 통제사가 아니오?" 중군선은 바로 옆에 있었다. 장대 위에 선 김응함이 바로 옆에서 손을 뻗으면 잡힐 듯 가까이 보였다. 김응함은 얼굴이 파랗게 질린 채 잠시도 가만있지 못하고 좌선을 바라보았다. "어쩔 수 없소.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할 수밖에." 정공청의 말에 안위는 대꾸하지 못했다. 삭탈관직 당하면서 애써 키운 함대를 잃어버린 통제사는 이제 목숨도 내놓게 생긴 것이다. 여기서 패 하면 조선수군을 이 꼴로 만든 조정 중신들이나 임금도 결코 무사하지 못할텐데, 어찌 이런 바보 같은 결과를 예측도 못했는지 안위는 무척 답 답했다. 조정의 명령처럼 수군을 이끌고 뭍으로 올라가 싸운다면? 그건 정말 바보짓이었다. 뻔히 이기지 못할 싸움에 용감하게 돌진할 조선수군은 아 무도 없었다. 한줌도 되지 않는 수군으로 육지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으으!" 안위가 신음소리를 크게 내질렀다. 얼굴이 뻘겋게 달아오르고 땀이 흘 러내렸다. 창피하고, 한편으로는 분했다. 여기서 물러선다면 조선수군이 앞으로 다시는 싸우지 못할 것이다. 계 속 왜군을 피해 물러설 일만 남은 것이다. 이런 결과를 빚은 것은 이순 신을 잡아들이도록 주청한 조정중신들과, 이를 조장한 임금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안위는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오촌당숙 정여립의 주장이 맞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어쩌면, 혹시나 잘하면 여기서 살아남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장수로서 비겁한 생각이었지만, 안위는 어떻게든 살아남고 싶었다. 왜적이 점령한 조선땅에서 노예가 되든지, 중국 땅으로 들어가 거지가 되더라도 일단은 살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러면 임금이나 조정 중신들 이 왜적들에게 잡혀 죽는 꼴을 구경할 수 있을 지 모른다는 엉뚱한 상상 까지 했다. = 구루지마함대 세키부네, 하타 노부도키 "선두 고바야 6척 전멸! 세키부네들이 접전하고 있습니다." 앞쪽을 관측하던 병사가 정루井樓 위에서 큰소리로 외쳤다. 일본수군 연합함대에서 선수先手를 맡은 구루지마 수군에서도 맨 앞에 나선 무장은 하타 노부도키波多信時였다. 갑판 위에 접의자를 놓고 앉은 노부도키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검게 그을린 다른 무장들과 달리 유 난히 희고 말끔한 얼굴이 투구 안에 있었다. 노부도키는 선봉부대인 구루지마 수군 가운데서도 다시 선봉부대를 이 끄는 젠군가시라前軍頭의 위치였다. 맨 앞에서 돌진하다가 전멸한 고바 야 6척과, 지금 공격을 시작한 세키부네 8척이 휘하에 있었다. 그가 탄 배는 전투용 세키부네였다. 고바야보다 훨씬 큰 선체 위에는 네모진 다락(統矢倉)이 얹혀있었다. 수부들과 활, 철포를 쏘는 아시가루 들이 사격을 위해 뚫어놓은 구멍 사이로 보였다. 그 다락 위가 세키부네 의 실질적인 갑판이 된다. 갑판 위에는 창과 칼을 든 병력이 빽빽이 서 있었다. 특별히 노부도키 주위는 병력과 함께 군기와 각종 장식물이 많 아 화려하게 보였다. 다급하게 들리는 보고를 들으면서도 노부도키는 접의자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가마우지 깃털을 뽑아 가지런히 세로로 붙인 회색 투구가 조금 움직였을 뿐이었다. 손에 들린 작은 부채가 탁하고 손바닥을 쳤다. "방패가 부서져 나갔군." 별로 대수롭지 않다는 투였다. 하지만 입에서 나온 말과는 달리 노부 도키의 안색은 좋지 않았다. 구루지마 수군에게 이번 출진은 벼르고 벼른 끝에 이루어진 기회였다. 인원이든 장비든 모든 면에서 고르고 골라 데려왔다. 작은 크기의 고바 야였지만 하나 하나 모두가 구루지마 해적의 정예병력이었다. 그들이 삽 시간에 전멸했다는 건 충격이었다. 방금 한 말은 오히려 그 충격을 숨기려고 하는 말이었다. 대장은 무슨 일이 있어도 흔들려선 안 된다. 대장이 동요하면 무사들은 안정을 잃고 병사들은 지휘에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노부도키는 입술을 깨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역시 무사들이 다소 흔 들리고 있었다. 입 속으로 뭐라 중얼거리거나 괜히 일본도를 뽑아들고 내리치는 시늉을 하는 모습들이 보였다. "적은 더한 상처를 입을 거다! 우린 겨우 살가죽을 조금 베였지만 적 은 뼈까지 통째로 잘리게 된다!" 기세가 중요했다. 노부도키는 강하게 부하들을 격려했다. 제대로만 싸 운다면 이기지 못할 리가 없는 싸움이었다. 상식으로 보든 병법에 비추 어 보든 결과는 정해져 있었다. 수전의 전문가이자 시고쿠四國 지방에서 가장 유명한 병법가兵法家. 이것이 일본에서 노부도키를 일컫는 말이었다. 떠돌아다니는 낭인무사에 불과했던 그를 특별히 미치후사가 등용해 이번 해전에 참가시킨 것도 그 병법을 높이 샀기 때문이다. 일본 땅에는 육전에 능한 병법가는 넘치도록 많았다. 하지만 해전을 제대로 하는 병법가는 거의 없었다. 노부도키는 해적시절 많은 싸움으로 단련된 구루지마 수군이 인정할 정도로 뛰어난 전술능력을 가지고 있었 다. 대대로 이어오던 구루지마 가문의 가신들이 이런 노부도키를 질시하고 크고 작은 마찰을 만들었지만 미치후사는 언제나 노부도키를 옹호해 주 었다. 그 은혜를 갚기 위해서라도 그는 이번 싸움에서 공을 세워야 했다. "적의 움직임에서 특이한 것은?" "처음에는 일자로 늘어서 포격을 가했습니다! 그러나 그건 단 한번. 지 금은 모든 배가 뒤로 물러섰습니다! 한 척이 앞쪽에서 우리 배들을 막고 있습니다!" 옆에 대기하고 있던 무사가 머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그것 참 이상하군." 노부도키는 고개를 흔들었다. "고바야 뒤에서 돌진해 간 세키부네를 봤을 텐데 아무런 수도 쓰지 않 겠다는 건가?" 어쨌든 노부도키의 의도는 성공하고 있었다. 비록 약간의 고바야가 부 서지긴 했지만 그건 경미한 피해였다. 전열을 벌린 조선수군의 집중포격 을 겨우 그 정도의 피해로 견뎌낸 것이다. 지금 주력함인 세키부네 6척 이 적선에 아무 피해 없이 육박하고 있다. 해협 자체가 너무 좁아 두 척 씩 세 겹으로 들어가고 있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큰 문제는 아니었 다. "적은 앞에 있는 한 척을 제외하면 전혀 공격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정말로 뭔가 이상합니다." "뒤에 있는 작은 배들이야 위장한 가짜니까 그렇겠지. 그런데 약간 물 러서 있는 다른 전선들은 뭐지?" 총 13척의 조선수군이 막아선 해협 뒤에는 작은 배 100여 척이 있었 다. 그러나 그것들은 어선과 피난선에 불과했다. 병력을 많게 보이려는 의도였다. 그것까지는 노부도키가 대번에 간파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싸움 이 시작되자 한 척만 앞으로 나오고 다른 전선들이 약속이나 한 듯 뒤로 물러선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대기하고 있다가 한꺼번에 몰려나와 공격하려는 의도일지 모른다." 노부도키가 그렇게 말했지만 지금 조선수군이 너무 약하게 나오는 것 이 이상했다. 병법에 따르면 실제 전력이 약할 때는 일부러 강하게 보이 는 수법이 있다. 강하게 보이면 상대는 함부로 공격하기를 주저하게 되 고 사기가 꺾여 방어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반면 실제전력이 강할 때는 일부러 약하게 보이기도 한다. 상대가 방 심한 상태에서 공격해 오기를 기다렸다가 갑작스레 역습을 가해 완벽한 승리를 얻기 위해서다. 그런데 조선수군은 지금 필요이상으로 약한 모습 을 보이고 있었다. 오른 팔처럼 부리고 있는 측근무사와 이야기하면서 노부도키는 의혹을 가졌다. 어쨌든 이번에는 귀신같은 장수라 소문이 자자한 이순신이었다. 한시도 방심할 수 없는 상대인 것이다. - 타다당! 한꺼번에 터지는 요란한 총소리와 함께 해협 안쪽이 하얀 연기로 뒤덮 였다. "우리편 세키부네와 적선이 드디어 접촉했습니다! 전투개시!" 관측을 맡은 병사가 다시 소리쳤다. 그 동안 약간 뒤쪽에 있던 이 배 도 이제는 적을 뚜렷이 확인할 수 있는 위치까지 왔다. 노부도키는 찬찬히 앞을 살폈다. 울돌목을 막고 있는 적선 한 척은 조 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무섭게 돌입하던 고바야에 이어 거의 눈앞까지 접근한 세키부네 두 척조차 단숨에 무찌르겠다는 기세였다. "저건?" 그 순간 노부도키는 적선에 매달린 깃발 하나에 주목했다. '수帥' 라는 글자가 선명했다. 그가 알기로 그것은 조선에서 삼도수군통제사가 탄 배 에만 달 수 있는 깃발이었다. "저런 바보 같은! 설마 저 배에 이순신이 탔단 말인가?" "예?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노부도키는 연신 폭음과 연기를 내뿜고 있는 세키부네 두 척 뒤에 버 티고 선 적선을 노려보며 말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측근무사도 놀란 듯 부릅뜬 눈으로 적선을 보았다. "기가 막히는 싸움이다, 이건." 조선수군 판옥선 단 13척이 아군 500여 척을 막겠다고 나온 싸움이었 다. 게다가 그 13척 가운데 가장 선두에 나온 배가 총대장이 탄 기함이 라니! 아군 깊숙한 곳에서 몇 겹의 든든한 호위를 받으며 싸우는 도도 다카도라를 생각해 보았다. 같은 총대장이지만 그 위험도가 하늘과 땅 차이였다. "노부도키님. 어쩌면..." "뭐냐?" 잠자코 싸움을 지켜보던 측근무사가 노부도키를 향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저건 전술이나 병법 같은 게 아닌지도 모릅니다." "뭐라고?" "단지 총대장 이순신을 뺀 모두가 겁을 먹고 도망치려는 건지도 모릅 니다. 그래서 이순신이 탄 기함만 저렇게 나와서 싸우는 것일지도... 조선 군은 엄청난 겁쟁이들입니다." "그건 말도 안 된다!" 노부도키는 벌컥 소리를 지르며 측근무사의 말을 끊었다. 세상에 그렇 게 한심한 군대가 존재할 리 없다. 아무리 세력이 약하고 전황이 불리해 도 주군을 위해 목숨을 바치려는 측근이 있기 마련이다. 저렇게 약속이 나 한 듯 대장을 버리고 뒤로 물러서는 부대는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 다. "저건 조선수군이야. 이순신이 지휘하는 조선수군이라고!" 조선수군, 특히 이순신이 지휘하는 조선수군의 무서움에 대해서는 아 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았다. 전쟁 초기 배를 버리고 도망치기에 바 쁘던 조선수군의 모습만 본 일본수군 각 함대는 이순신에게 치명적인 패 배를 연이어 당했다. 안골포에서 포구 안에 갇힌 채 일방적으로 공격받던 일본수군 총대장 구키 요시다카와 함께 있던 가토 요시아키는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 겼다. 나중에 요시다카는 그때의 전투를 놓고 '신령님이 도와서 살았다' 라고 공공연히 말했다. 심정은 알겠지만 무장으로선 낯뜨거울 정도로 부 끄러운 이야기다. 그나마 무장들은 여유 있는 편이다. 병사들은 조선수군이란 말만 들어 도 다리를 떨며 고개를 내저었다. '이수웅시누', 또는 이수사 장군이라는 되지도 않는 발음과 이름은 병사들 사이에서 '죽음' 과 같은 의미였다. 물론 두 달 전에는 조선수군이 크게 패해 무너졌다. 그러나 그때는 이 순신이 없는 동안에 벌어진 일이었다. 지금은 상황이 전혀 달랐다. 바로 그 유명한 이순신이 조선수군을 다시 지휘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강력했던 조선수군이 겨우 단 한번의 패배로 대장 혼자 싸우는 엉터리 부대로 전락했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노부도키는 이순신의 역 량을 크게 평가하고 있었다. "하지만 노부도키 님!" "조용히 해라!" 다시 뭐라고 말하려는 측근무사를 누르며 동시에 노부도키는 동요하는 스스로를 억눌렀다. 만에 하나라도 측근무사가 말한 그대로일 수도 있었 다. 또한 병법에 비추어봐도 그 외에는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그러 나 아직 성급하게 판단할 일은 아니다. "두고보면 알게 된다. 조금만 더 두고보면." 노부도키가 신음하듯 측근무사에게 말했다. 총성과 함성이 들려왔다. 그리고 여전히 흔들리지 않고 산처럼 무겁게 버티고 있는 적선이 보였 다. 조선에서 판옥선이라 부르는 배였다. 크기로는 일본에서 최고로 큰 아다케후네와 비슷한 데다 대포만 해도 수 십 개가 있었다. 판옥선은 겨우 한 척이라 해도 무시할 수는 없는 전투력을 갖고 있었 다. 우선 저 배 한 척을 우선 한계를 보일 때까지 밀어붙여야 한다. 만일 적에게 뭔가 계략이 있다면, 그때는 보이지 않을 수 없다. 설마 이순신이 스스로를 선봉으로 내세워 세키부네 몇 척과 뒤바꾸려 하지는 않을 것이 틀림없었다. "뭘 노리는 거냐? 이순신! 보여봐라! 어서!" 들리지도 않을 적선에 대고 노부도키는 낮게 중얼거렸다. = 구루지마 함대 세키부네 이들은 일본에서도 알아주는 정예 수군이었다. 통일신라와 겹치는 시 기인 헤이안平安 시대에 생겨 여몽연합군이 쳐들어온 가마쿠라鎌倉 시대 에 맹활약했다고 자랑하던 무라카미 해적. 그것을 이은 구루지마 수군이 었다. 선두 고바야들이 제대로 공격도 못하고 전멸했지만 이들은 전혀 기가 죽지 않았다. 좁은 해협으로 두 척씩 들어온 세키부네들이 일제히 이순신의 기함에 공격을 가했다. "가마에(겨눠)!" 거리가 좁혀지자 양 세키부네에서는 먼저 철포부대를 썼다. 전립戰笠 을 쓴 철포병들이 나무와 대나무로 만든 다락 안에서 목표를 조준했다. 탄환주머니와 화약주머니를 허리에 주렁주렁 매달고 팔꿈치에 긴 화승火 繩을 둘둘 감고 있는 모습이었다. 15명에서 30명까지 한 조組 단위로 운 용되는 이들 철포병은 각 조마다 뎃뽀가시라鐵砲頭라고 부르는 조장이 통솔했고, 이들 조장은 철포대장이 지휘했다. 대량의 철포를 집중운용해 파괴력과 명중률을 극대화시키는 전술. 이 것은 일본을 제패한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가 1575년 나가시노 전투에서 선보인 이후 일본에서 가장 기본적인 전술이 되었다. 철포부대를 셋으로 나누어 교대로 쏘게 했기에 '삼단철포' 라는 이름이 붙은 전술이었다. 그러나 조선에 쳐들어온 일본군은 철포부대를 셋으로 나누어 쓰지 않 았다. 일본병사와 달리 조선병사들은 저돌적으로 돌격해와 근접전을 벌 이거나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신 일본군은 철포사격이 끝나면 다음 발사준비에 걸리는 시간간격에 활을 쏘게 했다. 철포의 최대 사거리는 500미터지만 쏴서 사람이 다치는 살상가능거리 는 200미터였다. 하지만 200미터조차도 정확한 조준으로 쏠 수 있는 거 리는 아니었다. 실제 전투가 벌어지면 눈으로 조준해 맞출 수 있는 거리 가 되어야 쏘게 했다. 그래서 실제로는 50미터 이내가 확실한 발사거리 가 된다. 지금 철포대장도 그렇게 거리를 측정하고 발사를 지시하고 있었다. 사 격을 위해 세키부네는 판옥선을 향해 선체를 약간 사선으로 기울이며 전 진하고 있었다. 철포대장 손에서 대나무 지휘봉(指揮杖)이 힘차게 내려졌 다. "하나세(쏴)!" - 타타당! 수십 개의 총구가 일제히 불을 뿜었다. 다락 안이라서 총소리가 쩌렁 쩌렁 울렸다. 요란한 그 소리에 옆에서 노를 젓던 수부 몇 명이 얼굴을 찡그렸다. 흰 연기와 매캐한 화약냄새가 좁은 다락 안을 가득 채웠다. "궁대 앞으로!" 처컥처컥 하는 발소리가 들렸다. 이어서 자기 몸만큼이나 큰 활을 맨 궁수들이 철포병들 사이로 나오며 활을 겨눴다. 물푸레나무로 만들어진 일본식 활은 단일재질이었다. 필요한 탄력을 얻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크기가 커져야 했다. 때문에 조선 활이 너무도 작은데 놀란 일본인들은 조선 활을 반궁半弓이라 불렀다. 절반크기의 활 이란 뜻이다. 철포와 활을 쏘기 위해 삼각형으로 뚫린 구멍狹間 너머로 화살촉만이 삐죽 나왔다. 그리고 지휘구령에 맞춰 화살이 일제히 시위를 떠나 날았 다. 궁대가 활을 쏘고 물러나자 다시 철포부대가 나와 총을 쏘았다. 지금 세키부네들이 상대해야 하는 적선은 단 한 척이었다. 탄환과 화 살이 무더기로 쉴새없이 판옥선으로 날아갔다. "빌어먹을! 도대체 맞는 거야? 안 맞는 거야?" 철포병 한 명이 총알을 장전하며 큰소리로 투덜거렸다. 뒤에 서 있는 철포대장 얼굴에도 짙은 불안감이 흘렀다. 쇠로 만든 붉은 새 장식을 붙 인 철포대장의 투구 밑에서 땀이 흘러내렸다. 앞에서 대신 적의 포화를 받아주고 사라진 고바야들 덕분에 아직은 공 격 한번 받지 않고 여기까지 왔다. 그러나 이쪽에서 콩 볶는 소리를 내 며 맹렬하게 쏜 총탄은 판옥선의 두터운 선체에 박히거나 갑판 위에 빽 빽이 세워둔 판자를 두들길 뿐이었다. 판자 뒤에 숨어서 가끔 한두 명씩 얼굴만 내미는 조선군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오른쪽 세키부네와 경쟁 하듯 철포와 화살을 쏘았지만 도대체 한 명이라도 맞았는지 의심될 지경 이었다. "뎃포다이 요이(철포대 준비)!" 철포대장이 다시 발사준비를 지시했다. 적선 쪽으로 세차게 흐르는 물살 때문에 수부들은 노를 거꾸로 젓고 있었다. 첫 번째 세키부네 두 척은 적선에 돌입해서 점령하는 것보다는 최대한 화력을 퍼부어 적선을 무력화시키는 임무를 띄고 있었다. 서서히 접근하는 판옥선을 보며 철포병들이 신속하게 발사준비를 했다. 철포는 16세기초 일본 다네가시마種子島에 온 포르투갈 무역선에서 전 래됐다. 화약무기에 관해서 문외한이나 다름없던 일본무장들은 이 새로 운 무기에 대단한 관심을 보였다. 그래서 거금을 주고 사들여 연구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스스로 만들 수 있게 됐다. 다만 이 무역선에서 준 철포는 유럽에서 군용총으로 쓰던 것이 아니었 다. 새나 짐승을 잡을 때 쓰는 사냥총이어서 긴 총신에 격발장치로 화승 을 쓰는 방식이었다. 좀더 진보한 기술로 화승을 쓰지 않고도 발사가 가 능한 프린트 록 방식의 군용총이나 짧은 총신에 한 손으로도 잡고 쏠 수 있는 마상총은 훨씬 나중에야 일본에 들어왔다. 그래서 우습게도 16세기 말 일본은 세계 최대의 사냥총 보유국이자 그 사냥총을 군용으로 생산해 최대의 성과를 본 나라가 되었다. 어쨌든 그래서 이 사냥총 출신의 철포는 복잡한 발사준비를 필요로 했 다. 먼저 총구에 화약을 넣고 그 다음 탄환을 넣는다. 꼬질대로 화약과 탄환을 안쪽에 잘 눌러준 다음 밖으로 연결되는 구멍火皿에도 화약을 조 금 부어놓는다. 그리고는 화승을 알맞는 크기로 자른다. 그것을 방아쇠와 연결된 튀어나온 금속에 이어놓고 불을 붙여 쏘게 된다. 총을 쏘는 것보 다 이런 준비에 보다 많은 훈련이 필요했다. "뭐지? 드디어 됐나?" 철포병 하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판옥선 앞부분에서 뭔가 번쩍거리 며 하얀 연기가 피어오른 것이다. 그는 그것을 판옥선이 불타오르는 것 으로 착각했다. - 쿠웅! "아앗!" 이때까지 공격했지만 아무런 대응이 없던 판옥선이 갑자기 반격을 가 해왔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육중한 충격이 세키부네를 덮쳤다. 발사준비 를 하던 철포병들이 짚단처럼 쓰러지며 갑판 위에 나뒹굴었다. "뭐야? 이게 뭐야?" "적의 공격이다!" 반격을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었다. 그러나 화살이나 탄환을 예상한 그들에게 처음 떨어진 반격은 상상을 초월한 것이었다. 뭔가 엄청나게 크고 무거운 것이 세키부네 뱃머리에 떨어졌다. 네모나게 썰어만든 삼나 무 판자가 썩은 고목나무 마냥 부서졌다. "저, 저길 봐!" 사격구멍 너머로 판옥선을 쳐다보던 병사가 비명을 질렀다. 거대한 성 을 연상시킬 정도로 큰배 앞부분에서 화염과 흰 연기를 내뿜었다. 겨우 일어선 철포병들이 우르르 구멍으로 몰렸다. 그때 그들이 본 것은 거대 한 '나무기둥'이었다. 성을 쌓을 때나 씀직한 큰 나무기둥이 마치 화살처 럼 곧장 이 배로 날아오고 있었다. "통나무가 날아온다!" 누군가가 소리쳤다. 보통 통나무는 아니었다. 그 끝에는 쇠로 만든 뾰 족한 촉이 있고 뒤에는 역시 쇠로 만든 날개도 붙어있었다. 그러나 이 상황에선 뭐라고 정확히 표현할 말이 없었다. 1592년 안골포에서 이것에 당한 일본의 수군장수 구키 요시다카九鬼嘉 隆도 '조선의 화살은 그 크기가 통나무만 하다.' 라고 표현했다. 이 표현 은 일본 학자들이 이것을 고대인들의 전형적인 과장법으로 보거나 문서 의 신뢰성 자체를 부인하는 원인이 됐다. 하지만 그런 거대한 화살을 대포에 넣고 쏘는 것이 조선수군이었다. 요시다카도 지금 이곳의 철포병들도 이것이 조선의 '대장군전大將軍箭'이 란 무기임은 몰랐던 것이다. "윽!" 두 번째 통나무가 정확하게 다락 중간에 명중했다. 순간 세키부네는 크게 흔들렸다. 화살과 총탄만을 대비해 얇은 나무판으로 만든 다락 일 부분이 여지없이 부서지며 무너졌다. 철포병들이 다시 바닥에 나뒹굴었 다. 그 중에는 철포와 탄약주머니를 놓쳐 버리는 병사도 있었다. 위 갑판 에서 떨어진 창병도 있었다. "으악!" "계속 쏴!" 비명과 명령이 엇갈린 순간이었다. 그러나 본격적인 혼란은 지금부터 시작되었다. 머리 위로 맨하늘이 보이자 노를 젓던 수부들이 크게 놀랐 다. "배가 부서졌다!" 수부들이 울부짖었다. 세키부네는 철포병과 궁수가 활동하고 수부들이 노를 젓는 다락 위에, 접근전을 대비해 창과 칼을 든 병사들이 있는 2층 구조였다. 갑판 위에 있는 병사에게 대장군전은 배를 흔들리게 하며 가 라앉히려는 물체정도로 인식되었다. 하지만 그것에 직접 맞는 아래층 수부들은 공포에 질려 미칠 지경이었 다. 사람 키보다 크고 두께도 굵은 나무기둥이 뱃전을 박살내며 들어온 것이다. 같은 다락 안에 있긴 하지만 비교적 잘 훈련되어 이런 상황에서 도 통제가 가능한 병사와는 달랐다. "으... 으으..." 대장군전에 정통으로 맞은 수부 한 명이 입에서 피를 쏟으며 신음했 다. 하복부를 맞으면서 멀리 나동그라진 그의 하체는 이미 존재하지 않 았다. 잘 다져진 닭고기같이 변한 살점이 피와 범벅이 되어 뼈마디에 붙 어 있었다. "물이다! 물이 쏟아져 들어온다!" 대장군전은 그 수부의 몸을 뭉개고 동시에 배 밑바닥까지 깨뜨렸다. 차가운 바닷물이 순식간에 배 안으로 밀려들어왔다. "막아! 물을 막아라!" 철포대장이 목이 터지도록 소리쳤지만 그 목소리에 호응하는 수부는 없었다. 작은 구멍도 아니고 머리통보다도 큰 구멍으로 들어오는 물줄기 였다. "안됩니다! 물살이 너무 강합니다!" 구멍을 막으려고 손에 잡히는 대로 판자와 이불을 들고 접근하던 병사 들도 세찬 물줄기에 밀려나 곧 포기하고 말았다. 수부들이 다투어 갑판 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노를 젓는 게 문제가 아니었다. 이대로 있다간 차 오르는 물에 익사할 판이었다. "올라가지마! 올라가면 죽는다!" 철포대장이 칼을 빼들고는 갑판에 올라가려는 수부 몇을 베며 외쳤다. 그러나 이미 노를 젓거나 물을 막으려는 수부는 한 명도 없었다. "올라가지 말란 말이다!" 방금 벤 수부의 피를 얼굴에 뒤집어쓴 철포대장이 버럭 고함을 질렀 다. - 꽈앙! 이때 판옥선에서 다시 대포 쏘는 소리가 들렸다. 정면에 달린 천자총 통 2문에서 대장군전을 쏜 판옥선이 이번에는 선수를 조금 돌려 현측에 서 현자총통과 지자총통을 발사한 것이다. 반쯤 부서진 다락을 다시 뚫고 들어온 차대전이 철포대장의 머리에 명 중했다. 철포대장의 머리는 잘 익은 수박처럼 터져 나갔다. 이어서 찌그 러진 투구가 날아갔다. 부서진 새 장식물이 차 오르는 물 속에 떨어졌고 머리를 잃은 몸통이 그 위로 엎어졌다. "하나세(쏴)! 하나세(쏴)!" 그 모습을 본 뎃뽀가시라 한 명이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공포인지 복수인지 알 수 없는 광기가 감도는 목소리였다. 철포병 대부 분이 두 번이나 바닥에 나뒹굴어 발사준비를 전혀 하지 못했다. 그럼에 도 그 뎃뽀가시라는 상관없이 소리치고 있었다. - 팍! 파박! 따다닥! 갑자기 수부와 철포병들이 바닥에 떼로 나뒹굴었다. 갑판 위에 서 있 던 창병들도 뭔지 모를 것에 맞아 굴러 떨어졌다. 이번에는 현자총통에 서 발사된 철환 200개가 한꺼번에 덮친 것이다. 온 사방에서 처절한 비 명이 터져 나왔다. - 탕! 탕! 세키부네에서 별로 요란하지도 규칙적이지도 못한 발사음이 울렸다. 준비를 마친 철포병 몇 명이 쏜 것이다. 무조건 쏘라는 외침과 비명 속 에서 궁병들도 순서를 기다리지 않고 쏘았다. 무릎까지 차는 물과 사방 을 울리는 절규 속에서 이들은 결사적으로 싸웠다. 그러나 물은 곧 허리까지 차 올랐다. 물에 젖어 쏠 수 없게 된 철포와 줄이 늘어진 활이 물위에 떠다녔다. 마지막을 알리듯 단 한 방의 총소리 가 더 난 다음 다락은 완전히 침묵했다. 세키부네의 공격이 현저하게 약화되자 판옥선에서 잠시 사람 그림자가 아른거렸다. 조선군관과 병사들이 작은 활을 들고 세키부네를 겨눴다. 곧 화살 수십 발이 날아들어 부서지고 침몰하는 배에서 정신없는 왜군들을 쓰러뜨렸다. 이제 노를 젓는 수부는 한 명도 없었다. 물에 반쯤 잠겨 무거워진 세 키부네가 격류를 타고 흘러나갔다. 세키부네는 판옥선 옆을 지나고 있었 다. 판옥선에서 조선수군들이 연달아 화살을 날려 살아남은 왜군 병사들 을 하나씩 쓰러뜨렸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상한 것이 날아들었다. 보통 화살에 이어서 가느다 란 흰 연기를 끌며 날아온 화살. 그것이 명중한 세키부네 두 척의 갑판 위에는 새로운 고함소리가 추가됐다. "불이야!" "어서 불을 꺼라! 어서!" 판옥선에서 새로 발사된 화살은 화살촉 바로 아래, 즉 화살촉대에 종 이와 베로 둥그렇게 말은 것이 매달려 있었다. 심지에 불이 붙은 채 날 아온 불화살은 배 이곳저곳에 꽂히더니 곧이어 펑펑 터지기 시작했다. 불똥이 사방으로 튀며 여기저기 불이 붙었다. 특히 천으로 된 돛은 불이 가장 잘 붙는 물건 중 하나였다. 돛과 돛대는 순식간에 불타올랐다. "뜨! 뜨거워!" 근처에 있던 병사 두 명이 온몸에 불이 붙었다. 두 사람은 갑판 위를 돌아다니며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아무도 둘을 도와주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자기 목숨을 돌보기도 힘들었다. 한 명은 갑판을 뒹굴고, 다른 한 명은 비명을 지르며 바다로 뛰어들었다. 적선에 올라가 싸울 때를 기다리며 무수히 쓰러져가면서도 끝까지 창 과 줄사다리를 준비하던 병사들이 아직 남아 있었다. 그러나 배에 불이 붙자 이들은 다투어 배 위를 뛰어다녔다. 어떻게든 불길을 잡아보려는 행동이었다. 그러나 계속 쏟아지는 화살과 불화살은 그들을 절망하게 했 다. "제길!" "살려줘!" 화공에 대비해 물에 적신 천과 짚을 깔아놓긴 했으나 그것 만으론 도 저히 감당할 수 없었다. 불길이 번지자 배를 버리고 바다에 뛰어드는 사 람이 늘어났다. 처음엔 수부가 대부분이었으나 곧 병사와 무사도 다투어 뛰어들었다. 배 자체가 불타고 있는 데는 아무리 용감한 자도 별 도리가 없었다. "도망가지 마라! 배를 지켜라!" 광기에 휩싸인 무사가 칼을 빼들고 도망가는 병사의 목을 베며 독전했 다. 그의 갑옷에는 화살이 3개가 꽂혀 있었다. 화살이 꽂힌 부위에서 흐 르는 피가 바닥까지 적셨지만 여전히 고함을 지르며 싸우는 것이 처절하 기까지 했다. 그러나 지금의 상대는 찌르고 베면 바로 죽는 사람이 아니라 살과 뼈 를 태우는 불길이었다. 앞장 서 가던 세키부네 두 척은 삽시간에 타오르 는 거대한 장작더미가 되어 해류에 떠내려갔다. = 도도 다카도라 함대, 도도 다카도라 "구루지마 수군 휘하 하타 노부도키 부대 전투 돌입! 일번창은 하급무 사 오니에몬!" 전령이 무릎을 꿇은 채 다카도라에게 보고했다. "전황은?" "선두 고바야 전멸! 세키부네 6척이 차례로 공격 중!" 싸움이 시작되자 다카도라의 본진에는 쉴새없이 작은 배가 들락거렸 다. 육지의 싸움이라면 총대장은 성이나 언덕 위에 있게 된다. 싸움이 일 어나고 있는 곳을 한 눈에 보고 지시를 내리기 위해서다. 그러나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지형의 고저가 없는 바다인데다 폭이 좁은 명량에 대 함대가 밀집해 있다. 해협 안으로 들어간 건 구루지마 수군뿐이었다. 와키자카 함대, 그리고 이 함대에 딸린 나카가와 히데나리 中川秀成의 함대는 해협 입구에서 넓게 포진해 있었다. 도도 다카도라의 본진은 더 멀리 있었고, 수많은 배들에서 휘날리는 깃발 때문에 본진에 선 적이 눈으로 보이지도 않을 정도였다. 그래서 본진에 있는 고바야들이 연락선 역할을 맡아 선두의 구루지마 수군과 본진 사이를 쉴새 없이 왕복하고 있었다. 중간에 워낙 배가 많아 정찰선들이 왕복하기도 쉽지 않았다. "예상은 했지만 역시 쉽게 풀리진 않는군." 보고를 듣고 난 다카도라가 엔메이를 바라보며 가볍게 웃었다. 깃발도 적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답답함을 숨기려는 의도였다. "아직은 아플 것도 가려울 것도 없습니다 다카도라님." "알고 있다, 그런 건." 엔메이가 일부러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이쪽은 500척이 넘는 함 대였다. 일본 전체에 남은 배를 다 모아도 지금 이 정도 규모가 되지 못 할 정도였다. 현재 조선에는 일본 군선이 1,500척이나 있었다. 나머지 배 들은 이곳으로 오고 있거나, 해안 근처에서 군량이나 병력을 수송하는 육군의 수송함대였다. 다카도라는 무척 초조했다. 그러나 간단한 계산을 한 다음 마음을 다 잡을 수 있었다. 여기서 설령 100척이나 200척 정도를 잃는다 해도 이번 싸움에만 이기면 그걸로 대성공이었다. 서울로 통하는 한강까지는 거의 방해를 받지 않고 갈 수 있었다. 계산상으로는 아직도 조선에 판옥선이 50척쯤 남아있었다. 그러나 전 라도와 충청도 곳곳에 파견한 요코메들이 아침에 새로 보내온 정보에 따 르면 그것들은 전투원이 없어 포구에 매인 빈배이거나 싸울 의사가 전혀 없이 도망 다니는 배들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지금 여기서 약간의 손실 을 두려워 할 필요는 없었다. "만고하치로!" 다카도라가 큰 소리로 부장을 불렀다. 다카도라가 가장 신임하는 부하 로 본명은 다카요시高吉였다. 그러나 올해 28살인 이 젊은 무장을 다카 도라는 매우 좋아했다. 일부러 양자로 삼아 도도藤堂라는 자기 성을 줄 정도였다. 본명을 놔두고 아명인 만고하치로라고 부르는 것도 같은 이유 였다. "예! 주군!" 즉시 다가온 만고하치로가 명령받을 자세를 취했다. 그는 언제나 다카 도라를 '주군'이라 불렀다. 일시적으로 곁에 있는 측근이 아닌, 대대로 섬 기는 가신이라는 의미였다. 그와 달리 엔메이는 아무래도 다카도라가 '일 시 고용한 신하' 라는 의미가 강했다. "뒤에 있는 요시아키 님에게 전령을 보내라." "어떤 말씀을 전하시겠습니까?" "긴장을 늦추지 말도록. 그리고 후방경계를 소홀히 하지 말라고 해라." "알겠습니다!" 다카도라는 '님'이라고 존칭을 붙이면서도 군령은 하대로 내리는 것이 모순처럼 느껴졌다. 어쩔 수는 없는 일이었다. 명을 받은 만고하치로가 진막을 나가자 다카도라는 엔메이와 다시 대화를 이어 나갔다. "일번창에 대해 포상을 해야겠지?" "예. 당연한 일이겠지요. 사기를 올리기 위해서라도 꼭 필요한 일입니 다." 육전이라면 일번창은 말할 수 없이 중요하다. 적진에 가장 먼저 돌진 해 적에게 창을 찌르는, 정말 용감한 행동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약한 적 이라도 다가오는 선두 몇 명은 죽일 수 있다. 잘못하면 전쟁의 승패와 상관없이 죽을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모두 선두를 꺼린다면 싸움이 제대로 될 리 없다. 그래서 전장에서 일번창을 비롯해 일번검, 적 대장의 목을 벤 자 등은 누구보다 후하게 포상했다.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기회 있을 때마다 자랑 하는 '시즈가다케의 칠본창' 이란 명예도 시즈가다케의 싸움에서 가장 앞 장서 창을 찌르고 나간 일곱 명을 가리킨 말이다. 하지만 해전의 경우, 특히 조선수군과 싸운 해전에서는 접근전 자체가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조선수군은 늘 멀리서 포를 쏴서 일본수군의 배 를 부쉈다. 일본수군도 철포와 불화살로 대항했다. 사람과 사람이 싸우는 게 아니라 배와 배가 싸우는 게 수전(水戰)이다. 게다가 늘 공격당해 패 하는 입장이다 보니 일번창이든 일번검이든 그 의미가 없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상황이 다를 지도 몰랐다. "오니에몬이라고 했나? 그 무사는 살아있나?" 아직 자리를 뜨지 않은 전령에게 다카도라가 물었다. 그런데 들려온 대답은 다카도라를 비롯해 그 자리에 있는 엔메이까지도 곤혹스럽게 만 들었다. "용감히 적 배에 창을 꽂은 후 죽었습니다." "적 병사가 아니라 적 배라고?" "예. 그렇습니다." "그랬구나. 병사가 아니라 배였단 말이지..." 다카도라는 거의 신음에 가깝게 입 속으로 말을 곱씹었다. 고바야 여 섯 척에 탄 병사들은 단 한 명도 판옥선에 오르지 못하고 전멸했다는 뜻 이었다. "하긴 그것도 일번창은 맞습니다." 엔메이는 이런 다카도라를 안정시키려 했다. 그럭저럭 수긍한 표정을 지은 엔메이가 한마디 덧붙였다. "사람보다 배가 더 중요한 수전이니까요." "맞는 말이다." 긍정하면서도 다카도라는 전혀 개운치 않았다. 적 배에 올라가 보지도 못한 채 창만 찌르고 죽은 것도 무공으로 포상해야 한다는 것이 견딜 수 없었다. 그러나 이런 것을 포상할 여유가 있는 전투조차 이때까지 한번 도 없었다. 일본수군이 지금까지 이순신을 맞아 싸운 해전은 늘 심하면 전멸, 보통은 패주, 아니면 기껏 잘해야 일방적인 수비로 끝났다. "오니에몬의 남은 가족에게 금 백냥을 내리겠다." 전국시대에 성공한 무장이자 영주로서 다카도라는 보기 드물게 부하를 사랑하고 인간미 있기로 유명했다. 상당한 거금을 주도록 만고하치로에 게 명하면서 다카도라는 바랬다. "남은 가족에게 조금이라도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군." 비록 죽은 자의 목숨을 대신할 수는 없겠지만. 다카도라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덧붙였다. = 경상우수영 좌선, 송한 "적이 또 몰려온다!" 수졸들이 외치기 전부터 송한은 왜선들의 움직임을 지켜보고 있었다. 왜선들은 이 판옥선을 향해 계속 두 척씩 달려들었다. 그러나 이쪽은 아 직 화포가 준비되지 않았다. 송한은 간간이 활을 쏘면서 왜선들을 노려 볼 뿐이었다. 보통 때 같으면 판옥선 한 척이 왜 대선 한 척 상대하기도 벅찼을 것 이다. 멀리서 화포를 쏘아대는 판옥선이 결국에는 이기겠지만, 그런 결과 를 볼 때까지는 시간이 한참 걸렸다. 그런데 지금은 두 척을 동시에, 그 것도 바로 붙어서 상대해야 했다. 항상 선봉을 맡아 악전고투를 치렀던 우치적도 이만저만 긴장되는 게 아닌지, 장대 위에서 계속 소리를 지르며 송한을 들볶았다. "선장! 왜 포를 쏘지 않느냐? 다가오기 전에 어서 쏘아라!" 우치적은 송한이 사부射夫들을 지휘해 편전을 쏘는 것을 지켜보다가 답답해서 참을 수 없는 것 같았다. 조금 전에 전멸한 왜 소선들과 달리 대선에는 다락과 나무방패판이 잘 갖춰져 있어 편전으로 쏘는 강력한 애 기살도 다락 안에서 총을 쏘아대는 왜군들에게는 전혀 위협적이지 못했 다. 그것을 알면서도 우치적은 계속 송한에게 핀잔을 주었다. "화살 낭비다. 이놈아!" 송한은 소리 지르는 우치적을 힐끗거리며 소태 씹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화살 쏘기를 멈추지 않았다. 지금은 방법이 없었다. 왜선들도 판 옥선처럼 뱃전에 물을 적신 거적을 깔아서 불화살도 소용이 없었다. 조선수군 입장에서는 빨리 총통을 쏘아서 왜선의 갑판과 방패판부터 부숴야 했다. 그래야 왜군들 몸이 노출되고 화살에 쉽게 맞는다. 그럼 왜 군들이 화살비 앞에 몸을 드러내고 나무에 붙은 불을 끌 수가 없으니 불 화살 공격도 쉽게 이뤄질 수 있었다. 수전에서 총통과 화살과 화공, 이 셋은 서로를 밀접히 보완하는 관계라 하나라도 빠지면 무엇 하나 제몫을 다할 수가 없었다. 조바심이 난 송한이 화포장에게 달려갔다. 어느 나라든 무장들은 사내 다움을 과도하게 숭상하는 경향이 있다. 송한의 목소리도 우치적만큼 우 렁찼다. "총통은 준비됐는가아?" "보면 모르오? 장전중이지 않소?" 늙은 화포장이 투덜대면서 지자총통 약선 구멍에 심지를 끼우고 있고, 포수는 포구를 통해 약통 내부를 씻고 있었다. 화포장은 숙련된 기술자 답게 손놀림이 무척 재빨랐다. 하지만 단지 활을 쏠 줄 모른다는 이유 때문에 새로 포수가 된 수졸들은 겁에 질려 부들부들 떠느라 동작이 무 척 더뎠다. 이 배에서 근무했던 포수들 절반 이상이 도망갔으니, 그만큼 을 어떻게든 보충해야 했다. 그러나 어느 정도 화포 교육을 받았더라도 정작 실전에서는 이렇게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 잘난 활로 왜놈들을 다 쏘아 죽이지 그러시우?" 화포장이 발사준비를 마치고 다른 화포로 움직이면서 송한의 속을 박 박 긁었다. 그러자 송한도 종이봉지 안에 든 화약을 손으로 비비는 화포 장을 따라가며 귀에 대고 다시 소리를 질렀다. "아직 불화살을 쏴봤자 소용없어! 빨리 장전해서 쏴!" 고개를 한번 흔든 화포장이 못 들은 척 자기 할 일만 했다. 송한은 성 질 같아서는 화포장을 칼로 베어버리거나, 못하더라도 당장 주먹을 날리 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이 배에 탑재된 화포는 종류별로 합해 20개 가까이 되고, 화포에 화약 을 쟁여넣는 화포장은 겨우 여섯 명이었다. 대장군전이나 철환을 장전하 고 나서 화포를 직접 쏘는 포수들에 비해서도 수적으로 훨씬 적었다. 그 러니 이들은 어느 누구보다 바쁠 수밖에 없었다. "방포가 늦는 놈은 목을 베겠다! 어서 쏘아라!" 송한이 이번에는 포수들 옆에서 칼을 빼들고 바락바락 악을 써댔다. 그러나 적과 아군 모두에게 두려움을 느낀 포수들은 실수가 잦아질 뿐이 었다. 포수 한 명이 총통에 꽂힌 차대전을 빼고 다시 격목을 집어넣고 있었다. 워낙 다급하다 보니 중간 과정을 빼먹은 것이다. 송한이 눈알을 부라렸다. "온다!" 사부들이 소리를 지르자 송한이 난간으로 달려갔다. 판옥선만큼이나 큰 왜선 두 척이 어느새 이 배에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쪽에서 화 포를 쏘지 못해 왜선의 피해는 거의 없다시피 했다. 방패판 뒤에서 가끔 머리를 내미는 왜군들이 죽도록 미웠다. "어서 활을 쏘아라!" 송한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옆에 서 있던 강진현감 이극 신이 송한의 멱살을 틀어잡았다. "너 임마! 나중에 두고 보자. 죽인다." 송한은 이극신의 부리부리한 눈을 마주하자 겁이 더럭 났다. 상대는 정식 무관에, 지방에서는 권세가 대단한 벼슬아치였다. 그러나 지금은 이 극신 때문에 겁을 낼 필요는 없을 때였다. 송한이 뱃전에 단단히 발을 딛고 단호하게 대꾸했다. "여기서 살아나면 그때 나를 죽이시오!" 잠시 두 사람 사이에서 불꽃이 튀었다. 다른 사람들은 왜선을 향해 화 살을 날리고 있는데 두 사람은 마치 오래도록 움직임이 멈춘 것 같았다. "그래. 여기서 살아남을 것 같지도 않다. 젠장!" 이극신이 송한을 밀치고 활에 화살을 메겼다. 팽팽히 당겨진 시위를 놓자 커다란 장전이 하늘을 향해 쏘아져갔다. 그 옆에서는 군관들이 활 과 승자총통을 쏘고 있었다. 준사라는 왜놈은 수졸 몇 명과 함께 왜선을 향해 조총을 쏘는데, 장전하는 속도가 다른 수졸들에 비해 무척 빠른 편 이었다. 송한이 장대를 물끄러미 올려보았다. 통제사와 순천부사가 계속 송한 을 지켜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 구루지마 수군의 세키부네, 마쓰고로 "형." "가만있어!" 마쓰고로松五郞는 두려움에 떠는 동생을 달래지 않았다. 지금까지는 한번도 그런 적이 없었다. 항상 동생을 각별히 돌보던 마쓰고로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도저히 그럴 여유가 없었다. 공을 세워 출세하고픈 욕심과 싸움터에 가득한 흥분이 마쓰고로를 온통 채우고 있었다. 19살이 라는 젊은 혈기 탓도 있었다. 배가 거세게 흔들리는데도 아랑곳 않고 커 다란 칼을 잡은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무섭단 말야." 하지만 로쿠지로六次郞는 두려움 외에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하는 듯했 다. 고작 두 살 아래 동생이었지만 늘 마쓰고로의 보호를 받아오며 자랐 기 때문이다. "고개 들지마!" 방패판 위로 머리를 들려는 로쿠지로를 마쓰고로가 황급히 손으로 잡 아 눌렀다. 여기는 다락 안이 아니라 위였다. 언제 어디서 화살이나 탄환 이 날아올지 몰랐다. 그리고 비록 한 척이지만 적선은 엄청난 양의 화살 과 탄환을 쏘고 있었다. 조금만 방심해도 죽거나 다치게 된다. "겁난다면서 왜 자꾸 머리를 내미냐?" 마쓰고로가 핀잔을 주면서도 슬쩍 고개를 들어 바깥을 살폈다. 이제 적선까지의 거리는 얼마 남지 않았다. 곧 적선에 돌입하게 되는 순간이 었다. - 치각! 마쓰고로와 로쿠지로가 동시에 흠칫하며 방패판에서 조금 물러섰다. 뭔가 대나무방패판을 뚫고 들어오다가 멈춘 모양이었다. 대나무방패는 말린 대나무 몇십 개를 둥글게 묶은 다음 난간을 따라 연결한 것이다. 일반적인 화살이나 철포 탄환이라면 절반쯤 뚫고 들어와서 멈추게 된다. 그러나 이것도 조선수군의 화포에 대해서는 전혀 속수무책이었다. "끄아아악!" 바로 옆에서 고개를 쳐들던 병사 한 명이 목에 화살이 꽂힌 채 울부짖 었다. 짧은 화살을 잡은 손 사이로 쏟아져 나온 피가 흘러 바닥까지 떨 어졌다. 그 병사는 이내 쓰러지더니 고통스럽게 컥컥 소리를 질렀다. 그 리고는 곧 화살을 잡은 손을 힘없이 바닥에 떨궜다. 그 병사가 죽는 과정을 끝까지 지켜본 형제가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 다. 동생은 겁에 질린 표정이 역력했다. 차라리 철포에 맞으면 소리도 못 내고 죽는다. 그러나 화살에 맞으면 몸이 마지막으로 부르르 떨릴 때까 지 저런 끔찍한 비명소리가 계속되었다. "자칫하면 저렇게 된단 말야! 가만히 숨어있어!" 마쓰고로와 로쿠지로 형제는 구루지마 수군에서 발도족경조拔刀足輕組 에 속했다. 야전에서 쓰는 큰칼을 들고 돌격해 적을 베는 부대였다. 육전 이라면 전투가 한참 진행되어 창과 창이 격돌할 무렵 투입된다. 해전에 선 재빨리 적선에 기어올라 적을 베고 배를 점령하는 기습부대로 쓰였 다. 아직은 적선에 접근하는 도중이었다. 그래서 숨어있어도 무방했다. 적 선에 접근하면 그때 행동하면 된다. 갑판에는 사다리와 갈고리가 달린 밧줄이 준비돼 있었다. 그것을 이용해 기어올라가는 것이다. 아래 다락 속에서 총과 활을 쏘는 다른 병사들이 지금 목숨을 건다면, 발도족경조 는 그때 목숨을 걸게 된다. "칼을 뽑아들고 있어!" 동생이 아직 칼을 뽑지 않은 것을 보고 마쓰고로가 소리쳤다. 이들이 탄 세키부네는 빠른 속도로 적선에 접근했다. 앞에 가던 세키부네 두 척은 빠른 해류에 노를 반대로 저으며 철포공 격을 하다가 강력한 조선수군의 화포에 격파 당했다. 그것을 본 이 세키 부네의 지휘무사는 접근전을 명했다. 적선이 화포를 쏘기 전에 바람같이 달려가 적선에 달라붙는 작전이었다. 갑판 밑에서는 수부들이 해류에 더해 온 힘을 다해 노를 저었다. 그러 자 배가 나가는 속도는 마치 시위를 떠난 화살 같았다. "공을 세우는 거야! 그래서 무사가 되어 당당히 고향에 돌아가는 거 야! 알겠어?" 풀이 죽은 얼굴로 힘없이 칼을 뺀 동생에게 마쓰고로는 몇 번이고 다 짐했다. 그것이 한사코 말리는 어머니에게 억지를 써가며 로쿠지로까지 데리고 온 이유였다. 별로 비옥하지도 못한 농지에서 백날 농사를 지어 봐야 희망은 없었다. 무사로 출세해서 마을사람들에게 인정도 받고 수많 은 병사들 위에서 호령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 가장 빠른 방법은 역 시 전쟁에 나가 공을 세우는 것이었다. "알았어, 형." 로쿠지로가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마쓰고로가 보기에 분명 로쿠지 로도 무사가 되고픈 욕심은 있었다. 다만 태어날 때부터 여린 심성이라 싸우거나 죽이는 일을 싫어했을 뿐이다. "곧 익숙해질 거야." 그제야 늘 해오던 것처럼 로쿠지로를 달랬다. 마쓰고로도 사람을 베는 일에 익숙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해낼 수는 있다. 그리고 죽이지 않고 는 출세할 수 없었다. 로쿠지로도 마찬가지로 해낼 수 있을 것이다. 마쓰 고로는 동생의 손을 꽉 잡았다. "너는 내가 지킬 거야! 네가 죽으면 나도 죽는다!" 형제가 기어이 떠날 때 어머니는 로쿠지로를 잘 부탁한다고 계속 말했 다. 무엇을 걱정하는지, 아니면 무엇을 예감하는지는 몰랐다. 어머니는 눈물을 흘렸다.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도 싸움터에 나가 죽었다고 했던 가? 마쓰고로는 동생의 손이 꽤 차갑다는 걸 느꼈다. "응." 로쿠지로는 마쓰고로를 쳐다보며 웃어 보였다. 조금 무리가 있었는지 억지 웃음 같아 보이긴 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안심이 되었 다. 마쓰고로는 방패 너머로 살짝 고개를 들었다. 흰색 옷 위에 까만 갑을 걸친 병사와 번쩍이는 갑옷을 입은 조선 무장들이 커다란 배의 나무방패 사이로 올려다 보였다. "거의 다 왔다. 이제 곧..." = 전라우수영 좌선, 김억추 "수사 영감! 왜 물러나게 한 것이오?" 해남현감 유형이 사후선을 타고 와 좌선에 올랐다. 유형은 오자마자 장대로 뛰어올라올 기세였다. 김억추가 나무방패 사이로 얼굴을 빼꼼 내 밀었다. "해남원이오?" "영감! 이대로 물러설 것이오? 또 다시 통제사를 내버리고 도망갈 것 이냔 말이오!" 유형은 몹시 흥분한 것 같았다. 직속 상관을 따라 일단 여기까지 왔지 만 부끄러움을 견딜 수 없어 전라우수영 좌선으로 달려온 것이다. "어이~ 이봐. 칠천량에서 통제사를 버리고 도망간 건 당신들이야. 난 그런 적 없어." "뭐라고요? 젠장! 좋소. 그럼 지금은 뭐요?" 유형이 김억추를 쏘아보며 이를 갈았다. 잠시 김억추는 문관직, 즉 지방수령직에 앉은 무관하고 다퉈서 좋을 것은 없다고 판단했다. 벼슬이란 언제 위아래가 뒤바뀔 지 모른다. 특히 이번 임금은 인사에 대중이 없었다. 얼마 전까지 부하로 있던 사람이 어 느 날 보니 상관으로 앉아서 헛기침하는 경우가 많았다. 똘망똘망한 해 남현감이라면 임금 눈에 쉽게 드러날 것이고, 그럼 어느새 벼슬이 역전 될 수도 있었다. "중군장하고 같이 있는데 내가 언제 도망갔다고 그래? 중군하고 같이 있으면서 중군의 명령을 들어야지. 안 그렇소?" "무슨 말씀이시오, 영감? 중군은 저 앞에 있지 않소?" 다른 판옥선들은 김억추의 배 훨씬 앞에서 중군선을 중심으로 일자진 을 형성하고 있었다. 지금 울돌목에서 싸우고 있는 좌선은 김억추의 배 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가물가물할 정도였다. 아무리 오십 보 백 보라지 만 김억추의 판옥선만이 이렇게 뒤떨어져 있으니, 그건 제대로 된 변명 일 수가 없었다. 유형이 다시 호통 치자 김억추가 뒤쪽을 보면서 변명했 다. "피난민도 보호해야 하고 말이오. 현감도 알겠지만 저 사람들 대부분 우수영으로 피난 온 사람들이오. 당연히 내가 지켜줘야지. 현감도 여기서 이들을 지켜주시오. 해남 사람도 많을 테니 말이오." 옆에서 김응추가 낮게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빙긋 웃은 김억추 가 소매에서 뭔가를 꺼내 유형에게 내밀었다. "현감! 우리네 인생이 오늘 하루뿐이겠소? 그렇게 열 받지 말고 이거 나 하나 드시오." "그게 무엇입니까?" 궁금해서 장대 계단 끝까지 올라온 유형이 이를 갈았고, 김억추는 이 빨을 드러내며 웃었다. 김응추가 배를 잡고 떼굴떼굴 구르는 사이에 얼 굴이 뻘겋게 달아오른 유형은 뒤도 안 돌아보고 자기 배로 돌아가 버렸 다. 그런 유형 뒤에 대고 김억추가 소리 질렀다. "이건 욕이 아니라 진짜 엿인데. 큭큭! 엿 먹으라는 게 나빠?" "어쨌든 한 척으로 대단하군요. 그런데, 형님. 이 통제사가 앞으로 얼 마나 더 버틸까요?" 김응추가 꺼낸 질문에 김억추가 곰곰이 계산해보았다. 그건 그렇고 여 기는 정말 전망 하나는 끝내줬다. 장대는 판옥선 중에서도 가장 높은 곳에 있다. 무상舞上이나 기라졸도 높다란 돛대에 올라가지만 그건 일반적인 경우가 아니었다. 뭐니뭐니 해 도 싸움구경과 불구경이 최고라 하는데, 안전한 이곳에서, 그것도 높은 장대에서 구경하자니 손에 땀이 날 지경이었다. 그리고 지금 싸움은 조 선수군의 대장인 통제사의 배 단 한 척이 수많은 왜선들에 맞선 아주 특 이한 싸움이었다. "글쎄다. 내 계산으로는 왜선 20척 정도가 한계다. 제대로 싸우더라도 말이다. 화살이나 화약이 그렇게 많은 것도 아니니까 끝까지 저렇게 싸 울 수는 없겠지. 음. 이제 8척 잡았으니까 앞으로 12척 정도?" "일부당경 족구천부란 말은 틀렸군요." 김응추가 씁쓸하게 내뱉자, 김억추가 눈을 크게 뜨고 반박했다. "틀리긴 왜 틀려? 통제사가 언제 거짓말하는 거 봤냐?" "형님 생각으론 좌선이 왜선 20척까지밖에 감당 못한다면서요? 적선은 500척이 넘으니..." 김응추는 웬일로 형이 통제사를 옹호하나 싶어 말끝을 흐렸다. 그러나 김억추는 역시 김억추였다. "이 통제사가 언제 왜군한테 이긴다고 했냐? 다만 적을 겁나게 한다고 했지. 족구천부가 그런 뜻이잖아?" "으윽! 형님도 참. 이 통제사가 참 안 됐습니다. 형님 같은 잘난 수사 를 부하라고 두었으니 말입니다." "흐흐! 그게 내 잘못이냐? 무장이란 자고로 적당히 패하거나 겁을 낼 줄도 알아야지. 이 통제사는 종친도 아닌 주제에 사람이 너무 고지식해 서 탈이란 말야. 그럼 어떤 임금이 좋아하겠어?"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임진년 당시 경상우수사 원균은 임금의 사돈인 윤두수의 인척이었고, 전라우수사 이억기는 왕실의 친척, 즉 종친이었다.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일찍부터 그렇게 공을 많이 세워 삼도수군통제사를 겸임했지만, 이순신은 끝내 경상우수사나 전라우수사에 임명되지 못했다. 전라좌수영이 동원할 수 있는 인적, 물적 자원은 다른 수영의 절반에도 못 미쳤으니, 결국 그것은 이순신이 더 큰공을 세울 기회에 한계를 지운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김응추의 말에서도 단적으로 드러난다. "역사상 뛰어난 장수들이 역적죄로 처단된 것 말씀인가요?" "그렇지. 아무리 나라를 구하고 적이 두려워하고 해도 소용없다. 신하 가 너무 커지면 임금한테 부담이 가니까. 그런데 이 통제사를 봐라. 비록 전쟁에 이기기 위해서라지만 임금 말에 자꾸 토를 달았다. 부하나 백성 들도 임금보다 통제사를 더 잘 따른다. 그것이 바로 역적이 아니고 뭐 냐?" "장수가 외적을 막는 거야 당연한 도리 아닙니까?" 김응추는 머릿속에 각종 병법서에 나온 구절들이 빙빙 도는 모양인지 무척 당혹스러워 했다. 김응추도 익히 들어서 알기는 하지만 인정하기 어려운 사실을 김억추는 아주 쉽게 내뱉었다. "너는 군대가 왜 존재하는 지도 모르느냐? 외적이 아니라 반란을 막기 위해서다. 태종대왕, 세조대왕을 봐라. 숱하게 많았던 역적모의를 봐라. 왕 입장에서는 그 누구에게도 병권을 몰아주면 절대 안 된다. 외적과 싸 워 이긴 명장이라고? 흥! 임금 입장에서는 백성과 부하들이 존경하면 할 수록 더 위험한 자다!" "충신 되기도 참 힘들군요. 이래서야 목숨 걸고 싸우겠습니까?" 당시 임금 이연은 철저한 사람이었다. 겉보기에는 인사원칙이 전혀 없 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철저하게 한 가지를 고수한 셈이었다. 그것 은 왕권을 지키고 강화하는 정책이었다. 이것을 위해서라면 그 어느 것 이 희생되어도 임금에게는 상관없었다. 그리고 함부로 건드리기 어려울 정도로 백성들로부터 신망을 받는 장 수를 수하로 두는 것은 역대 어느 왕조 어느 임금에게나 큰 부담으로 작 용했다. 안록산의 난 등 수많은 내란을 겪은 중국에서도 똑똑한 장수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군권을 맡긴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조선에 서 한 지방의 병권을 감사와 한두 명의 병마절도사들에게 나눠 맡긴 것 도 같은 이유였다. "김덕령을 봐라. 목숨을 부지하지도 못하지 않느냐? 그리고 올해에는 의병도 안 일어났다. 조정에서는 왜 임진년만큼도 의병이 궐기하지 않는 지 의문을 갖는 모양이더라. 그 이유를 모른다면 그놈들은 정말 바보들 아니냐?" 김덕령은 전라도 담양에서 의병을 모아 주로 경상도에서 싸운 의병장 이다. 장문포해전에서는 곽재우와 함께 이순신을 도와 싸우기도 했다. 김 덕령은 1596년 충청도에서 이몽학의 난이 일어난 다음 역적 혐의를 받고 맞아 죽었다. 당시 관군은 의병과 의병장을 견제하는 경향이 있었고, 이 순신도 휘하에 들어오는 의병은 좋게 대우했지만 관할지역의 병력자원을 빼가는 의병에 대해서는 감정이 무척 좋지 않았다. "분부하는 대로 고분고분 따르고, 그저 저는 주상전하보다 훨씬 못 낫 습니다요, 한 수 가르쳐주십시오 하고 머릴 조아려야지. 신하가 감히 임 금보다 잘난 척하면 안 되지." 이것은 김억추의 처세술이었다. 전투에 임했을 때 싸우지도 않고 그렇 다고 도망가지도 않는 전술과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었다. "지금 임금보다 못난 장수도 없을 것 같은데요, 뭐." "그렇지는 않다. 지금 임금이 머리는 굉장히 좋아. 잘난 놈들을 너무 시기해서 그렇지 말야." 김억추가 전라우수사로 부임하러 충청도를 통해 육로로 가는 동안 길 가에 늘어선 많은 사람들이 김억추를 이순신으로 착각하고 술과 음식을 바치는 등 한바탕 난리가 난 적이 있었다. 김억추는 모르는 척하고 넙죽 넙죽 받아먹었지만 내심 기분은 좋지 않았다. 그리고 이순신에 대한 민 심이 계속 이렇다면 이 전쟁이 끝난 다음 이순신이 그 어떤 죄목으로든 걸려들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다. "20척이라. 형님! 그럼 우리가 물러서지 않고 울돌목을 틀어막고 있으 면 이길 수도 있단 말입니까?" "그거야 당연하지. 이길 수도 있는 게 아니라 당연히 이긴다. 그 전에 왜놈들이 도망가겠지. 그런데 말이다, 응추야. 어차피 다른 배에 탄 놈들 도 그걸 알면서도 도망갔을 거야. 뭐하러 목숨 걸고 싸워야 하겠니?" "싸우면 이기고 죽을 가능성도 적은데 싸우지 않는다? 그러다가 다 죽 잖아요?" "뭐, 할 수 없지. 다들 이겨서 공을 세우고는 싶지만, 누가 목숨을 걸 고 싶겠냐? 칠천량에서도 다 그런 식이었지. 힘을 합해 죽어라 싸웠으면 그렇게 패하지는 않았을 텐데, 다들 앞다퉈 우르르 도망가다 보니까 그 렇게 된 거지." 그것은 겁에 질리거나 싸움에 익숙하지 못한 군대의 전형적인 모습이 었다. 특히 대부분의 역사에 나타난 중국군대가 그런 모습을 자주 보인 다. 김응추가 고개를 끄덕였다. "주장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달라지겠군요." "하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적이 너무 많은 것도 있지만, 장수들이 아직 은 서로 못 믿기 때문에 저렇게 도망간 거다. 이 통제사만 불쌍하게 됐 지." 오랜만에 형다운 그럴듯한 말을 한 김억추가 기지개를 폈다. 멀리서 보니 왜선들이 조총을 쏘아대며 좌선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불쌍하게도 좌선에서는 총통 한번 못 쏴보고 그대로 접근을 허용하고 있었다. 이번 에 잘 막아내면 다음 번에 몰려올 적선 몇 척은 화포를 쏘아 쉽게 막겠 지만, 만약 이번에 왜병이 단 하나라도 올라가면 좌선도 끝장날 수가 있 었다. 그것이 당시 조선수군이 왜군과의 전투에서 뼈저리게 체득한 경험 이었다. "아웅! 근데 왜 이리 나른하냐?" "형님 전쟁터에서 참 배짱도 좋소." "긴장해서 그런가? 하아품! 으그! 졸립진 않은데 왜 이렇지?" 김억추가 하품과 기지개를 연달아 해댔다. 속이 더부룩한 표정을 짓자 그제야 눈치를 챈 김응추가 슬슬 웃었다. "흐흐! 이제 보니 형님, 멀미가 시작됐군요. 수군절도사가 배멀미라니. 자랑이요." "멀미라니 무슨 소리야? 쳇! 내가 배를 탄지 얼마나 됐는데." 김억추는 1차 평양성전투 때 대동강 주사대장을 지냈고 전라우수사로 부임해 이곳에 온 지도 한 달 가까이 되었다. 배에 탄 적이 많았어도 멀 미한 적은 없어 김억추가 강하게 부정했다. "우수사아! 어찌 그럴 수가 있소오! 그러고도 수사가 나라를 지키는 장수라 할 수 있소오? 백성들이 비웃고 왜적들이 비웃고 있소!" 걸걸한 목소리에 놀라 김억추가 소리가 난 곳을 찾았다. 그리고는 한 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건 또 뭐야?" 바다에는 노인 하나와 청장년 네 명이 탄 조그만 배가 김억추의 판옥 선 옆을 지나가고 있었다. 멀리 피난민 배들 사이에서도 그런 배가 몇 척 더 나왔다. "유생들인가 본데요? 활에 창, 칼이라. 저 작은 배로 싸우려는 모양인 데, 어쨌든 대단한 기셉니다." 말은 그렇게 했어도 김응추는 그런 사람들을 비웃고 있었다. 워낙 작 은 배에 노가 하나밖에 없어 속도는 거의 나지 않았다. 이곳은 물살이 센 편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순류도 아니었다. 아들로 보이는 젊은이 둘이 땀을 흘리며 열심히 노를 젓고 있었다. "억추 이 못난 놈아아! 우린 싸우다 죽으러 간다. 너는 머리 처박고 벌 벌 떨고나 있어라. 왜놈들이 칼로 똥구멍 팍팍 쑤셔줄 때까지 숨어있어 라아!" 노인이 고래고래 소리 지르다가 이제는 화가 치밀어 오르는지 상소리 까지 곁들여졌다. 행색을 봐서 양반 떨거지 같은데 하는 짓은 전혀 선비 같지가 않았다. "쳇! 저것들, 바보 아냐? 그래. 실컷 싸우다 죽어라." 김억추가 장대 아래에서 계속 지켜보았다. 작은 배 몇 척이 더 지나갔 는데, 그럴 때마다 배에 탄 사람들이 이쪽을 향해 경멸의 눈초리를 보냈 다. "그건 그렇고 아버님은 잘 피하셨을까요? 너무 바깥으로 멀리 나가시 는 게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걱정 마라. 왜놈들 배로는 멀리 못 나간다. 걔네들 해안선에 바싹 붙 어 다니잖아?" 김억추는 오늘 새벽에 부친을 부랴부랴 배에 태워 종들과 함께 먼바다 로 내보냈다. 사공이 하는 말로는 피난지로는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흑 산도가 좋다고 했다. "왜놈들은 대마도에서 건너왔잖습니까? 섬나라 놈들이니 항해에 능숙 할 텐데요. 그리고 남만인들하고 무역도 한다잖습니까?" "대마도에서 거제도하고 부산진이 보이니까 그렇지. 걔네들 먼바다로 나갈 능력은 없다. 그리고 남만인들이 무역하러 섬나라에 갔지, 일본 놈 들이 남만까지는 못 가지 않느냐? 그런데... 욱! 우웩!" "잘났소." 김응추가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보며 멀찍이 물러섰다. 김억추는 올라 오는 것을 억지로 참아 막았다. 핏발선 눈으로 숨을 몰아쉰 김억추가 헉 헉거리면서 간신히 말했다. "멀미에는 잠이 최고라더라." "그래서, 자려고요? 대단하오." "이런 판국에 잘 수야 없지만, 우에엑! 꽥!" 결국 김억추는 안에 든 것을 토해내고 말았다. 김응추는 토사물이 원 래 모습이었을 때의 이름을 하나하나 내뱉다가 결국 포기했다. 종류가 너무 많았고, 무엇보다도 냄새가 지독했기 때문이다. "으그~ 느끼느끼해. 아까는 통제사가 토하더니, 이번엔 수사가 토하는 구려. 아랫사람들 보기 창피하지도 않으슈?" = 구루지마 수군의 세키부네, 마쓰고로 "핫도아시가루구미! 요이!" 지휘무사의 고함이 세키부네에 쩌렁쩌렁 울렸다. 발도족경조에 속한 왜병들은 칼과 창을 바로잡고 준비했다. 다락 위 갑판에는 일순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드디어 왔다!" 마쓰고로는 자세를 바꾸어 뛰어나갈 준비했다. 그 모습을 본 로쿠지로 도 어설프지만 자세를 고쳤다. 동생 손에는 커다란 칼이 어색하게 들려 있었다. 적선에서 쏘는 철포와 대포소리가 더 요란하게 들렸다. 그러나 단박에 이 세키부네가 부서지지 않은 것으로 봐서는 일본에 있을 때 말로 듣던 그 무시무시한 조선 대포는 아닌 것 같았다. 대신 불화살 몇 발이 날아 와 뱃전 여기저기에 꽂혔다. 그러나 불화살에서 펑 소리와 함께 불이 한 번 뿜어진 다음에는 곧 꺼지고 말았다. 조선 배에서 함성과 알 수 없는 말이 뚜렷이 들렸다. 당연히 조선말일 것이다. 그렇지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 것도 한순간뿐이었다. 배와 배 가 옆으로 부딪치는 둔탁한 소리와 충격이 몸에 전해졌다. "헉!" 마쓰고로는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로쿠지로가 손을 잡아 주지 않았 다면 정말 넘어졌을 것이다. 겁먹던 동생에게 이럴 때 오히려 도움을 받 다니 부끄럽기도 했다. "마에(앞으로)!" 그토록 기다리던 돌격명령이 드디어 떨어졌다. 병사들이 사다리를 들 고 일제히 일어섰다. 화살을 쏘는 조선수군의 일그러진 얼굴이 바로 눈 앞에 보였다. 그 화살은 마쓰고로 앞에서 사다리를 걸치려는 병사의 가 슴에 꽂혔다. 화살에 맞은 병사의 비명은 다시 들어도 역시 끔찍했다. "가자! 로쿠지로!" 총소리와 비명, 연기와 함성이 뒤섞인 속에서 마쓰고로는 오직 한가지 만을 생각했다. 빨리 적선에 올라 닥치는 대로 베고 죽여 공을 세우는 것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아직 남아있는 일번검一番劍의 영예도 차지하 고 싶었다. 등에 매달려 펄럭이는 깃발이 무사들에게 보일지 은근히 신 경 쓰였다. 동생 손을 놓으며 마쓰고로는 힘차게 앞으로 나갔다. 대나무 방패 같 은 건 이제 필요 없었다. 돌쩌귀를 열어 방패판을 눕힌 병사들이 사다리 를 판옥선에 걸치기 시작했다. 마쓰고로가 오른손에 잡은 타도打刀가 묵직하게 느껴졌다. 조금이긴 했지만 검술을 익힌 적이 있는 마쓰고로였다. 짧고 가벼운 직도直刀가 더 손에 맞았지만 여기는 검술대결이 아닌 싸움터였다. 길고 무거운 타 도가 단연 유리했다. "겁쟁이 조선 놈들아! 이 마쓰고로가 간다! 기다려라!" 마쓰고로 입에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 상대가 알아듣기를 바라고 지른 것은 아니었다. 적에게 다가갈수록 커지는 공포를 떨쳐버리기 위해서였 다. 마쓰고로는 대나무 사다리를 들어 적선에 걸쳤다. 가볍다고 알려진 대나무 사다리였지만 이것도 물에 젖어서 그런지 오늘따라 이상하게도 묵직했다. 다른 병사들은 이미 적선을 향해 열심히 올라가고 있었다. 마쓰고로가 탄 세키부네와 판옥선 사이에는 어른 키가 약간 넘는 높이 차이가 있었다. 선체는 세키부네가 훨씬 낮은 편이지만 다락을 기준으로 판옥선의 갑판과 비교하면 큰 차이는 나지 않았다. 그러나 판옥선에는 갑판에 세운 여장과 방패판이 따로 있어 판옥선에 올라가야 할 왜군들 입장에서 판옥선은 무척 높아 보였다. 따라서 발도족경조는 마치 성을 공격하는 것처럼 행동했다. 쓰고 있는 것도 공성을 위한 도구였고 대열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점이 있다면 적 선이 정말 성처럼 단단한 배인 반면 이쪽 세키부네는 공격을 받으면 썩 은 널빤지 마냥 부서진다는 점이다. 딛고 있는 바닥조차 안심할 수가 없 는 것이, 얇은 삼나무는 사람 무게도 지탱하기 힘들 정도였기 때문이다. "비켜!" 마쓰고로가 사다리를 막 올라가려 할 때 험악하게 생긴 병사 한 명이 다가왔다. 병사는 마쓰고로를 밀치고 먼저 사다리를 올라가기 시작했다. "뭐야? 이 자식!" 화가 난 마쓰고로가 병사 등에 대고 욕설을 퍼부었다. 싸움이 있기 전 몇 번이나 훈련을 했지만 막상 실전에서는 소용없었다. 담당구역이나 질 서 같은 것이 이런 혼전에서 있을 리가 없었다. 그리고 공을 세우려고 눈이 벌겋게 된 동료에게 협동을 기대하는 게 바보였다. 어쩔 수 없이 마쓰고로는 잠시 기다렸다. 마쓰고로의 사다리를 빼앗은 병사는 조선수군과 칼을 맞대고 있었다. 어떻게든 밀고 올라가려 했지만 조선수군의 방어도 필사적이었다. 마쓰고로는 칼날 부딪치는 소리가 무척 거슬렸다. 창에 찔리고 사다리 에서 떨어져 물에 빠지는 병사도 속출했다. 비명과 아우성, 병장기 부딪 치는 소리가 온 바다에 가득했다. 다른 빈 사다리를 찾으려 고개를 돌린 마쓰고로 눈에 동생이 들어왔 다. 일단은 겁에 질리고, 그리고 뭘 해야 할지 어쩔 줄 몰라하고 있었다. 우두커니 선 동생 손에 들린 칼이 햇빛을 반사하며 계속 반짝거렸다. 동 생이 몹시 떨고 있다는 뜻이었다. "제길!" 이미 발도족경조 대부분이 적선에 기어오르고 있었다. 한심하게도 마 쓰고로와 로쿠지로 둘은 나란히 올라가지 못한 축에 속한 것이다. 마쓰 고로는 동생을 도와주려는 마음을 억지로 눌렀다. 집에서 농사를 지을 때라면 투덜대면서도 도와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전공 을 세워야 하는 중요한 때였다. "어떡하든 나는 말야!" 마쓰고로는 판옥선에 반쯤 걸쳐진 빈 사다리를 발견했다. 이 사다리의 주인은 세키부네와 판옥선 사이의 빈틈으로 떨어져 물에서 허우적대고 있었다. 마쓰고로가 왼손으로 사다리를 번쩍 치켜들었다. 그것을 판옥선에 걸 치며 마쓰고로는 계속 소리쳤다. "공을 세워 무사가 될 거야! 알아? 무사가 될 거라고!" 그 일념으로 모든 것을 버렸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었 다. 마쓰고로 눈에 핏발이 섰다. 더 이상은 아무 것도 무섭지 않았다. "아아악!" 곤봉에 머리를 맞은 병사 하나가 피를 뿌리며 뱃전에 굴러 떨어졌다. 판옥선의 방패판을 잡고 막 오르던 병사 하나는 도끼질에 손이 잘려나가 며 아래로 떨어졌다. 격류에 진탕치는 청회색 흙탕물이 벌겋게 변했다. 병사는 몇 번 물위로 얼굴을 내밀더니 그대로 잠겨 더 이상 떠오르지 않 았다. 조선수군은 창으로 찌르고 몽둥이를 휘둘러 왜병의 판옥선 진입을 악 착같이 막고 있었다. 빨리 단 한 명이라도 올라가면 훨씬 쉬워질텐데, 아 직은 아니었다. - 깡! 마쓰고로는 사다리를 오르며 필사적으로 조선수군의 창날을 맞받았다. 원래는 밑으로 찔러오는 창 공격을 한 손에 쥔 타도로 막기는 힘들었다. 그러나 조선수군의 창질이 서툴렀는지 마쓰고로는 잘 막으면서 사다리를 한 칸씩 밟고 올라갔다. 마쓰고로는 조선수군의 겁에 질린 얼굴을 향해 씩 웃어주는 여유까지 보였다. - 퍼벙! "우아악!" 폭음과 비명이 주변을 덮쳤다. 마쓰고로는 등판이 불에 데인 듯 따가 웠다. 할 수 없이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면서 등을 만졌다. 두꺼운 갑옷을 입어 확실치 않았지만 뭔가 등에 박힌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가 선 주변에는 온몸이 불에 검게 그을린 병사 몇이 피를 흘 리며 쓰러져 있었다. 병사 하나는 얼굴이 피에 젖은 채 꿈틀거리며 바닥 을 기어갔다. 그리고 발 밑에는 새까맣게 탄 판자들을 가로질러 커다랗 게 구멍이 뻥 뚫려있었다. 다락 안에서 이쪽을 향해 고개를 든 수부들과 철포병의 당황한 모습까지 다 내려다 보였다. 그리고 매캐한 하얀 연기 가 사방에 퍼지며 코를 찔렀다. "뭐야? 이게 뭐야?" 마쓰고로는 방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무래도 뭔가 폭발한 듯했다. 그것이 동료 병사들을 죽이고 마쓰고로에게 상처를 입힌 것이다. 뭔가 날아오는 듯해서 마쓰고로가 고개를 들었다. 새까맣고 둥그런 나 무통이 떨어져 떼굴떼굴 뱃전을 굴렀다. 그 방향에 있던 병사 둘이 그게 뭔가 쳐다보고 있었다. 요강처럼 뚜껑 같은 것도 달려 있는데, 밑에서 실 처럼 가는 흰 연기 두 줄이 새어나왔다. - 펑! 시뻘건 불길이 사방으로 확 번지자 마쓰고로가 놀라 주저앉았다. 고개 를 들었을 때는 자욱한 연기 사이로 조금 전에 봤던 것과 똑같은 상황이 펼쳐져 있었다. 폭발이 있던 곳의 병사 둘은 나자빠져 있고 갑판 일부분 이 깨지고 불타올랐다. 마쓰고로는 그것이 조선군이 사용하는 질려포통 이라는 것은 몰랐지만 위험한 것만은 틀림없다고 온몸으로 느끼며 전율 했다. "어?" 마쓰고로가 다시 판옥선에서 떨어지는 하얀 물체를 발견했다. 수직으 로 떨어진 둥근 돌이 갑판을 부수며 뚫고 다락으로 내려갔다. - 우지끈! 뚝! 소리는 약간 차이를 두고 두 번이나 들렸다. 수부들의 비명이 들려오 는 듯했다. "바닥이 깨졌다. 물이 들어온다!" 잠시 후 수부들의 확실한 비명이 밑에서 들렸다. 적선과 부딪친 충격 때문에 조금 부서지긴 했지만 그것 때문은 아니었다. 적선에서 대포를 쏜 것도 아니었다. 다급해진 조선수군들이 대완구에나 넣고 쏘아야 할 커다란 단석을 세키부네에 던져대고 있었다. 병사 머리에 맞지 않더라도 선체가 약한 나무로 만들어진 세키부네에는 치명적이었다. "으악!" 사다리에서는 동료들이 계속 굴러 떨어졌다. 그 중에는 오늘 아침까지 웃으며 함께 밥을 먹던 사람도 있었다. 창에 꿰인 채로 바다에 떨어지는 이웃마을 아저씨도 보였다. 마쓰고로가 숨을 헐떡였다. "사, 살려줘!" 와지끈 부러진 사다리와 함께 바닥에 떨어진 한 명이 손을 내밀었다. 피로 범벅이 된 얼굴을 자세히 보니 아까 마쓰고로를 밀치고 먼저 올라 가던 병사였다. 곤봉이나 철퇴에 맞아 머리가 깨졌는지, 도움을 청하는 표정이 핏물과 함께 엉겨 흉한 몰골이었다. "비켜!" 이렇게 대답하며 마쓰고로는 병사의 몸을 발로 찼다. 못된 놈이 그 꼴 이 된 걸 보니 마쓰고로는 오히려 용기가 샘솟는 것 같았다. 잠시 여유 를 찾은 마쓰고로가 잠시 주변을 살폈다. 기세 좋게 올라가 공격을 시작한 발도족경조였지만 아직 아무도 적선 에 올라가 보지 못했다. 갑판이나 바다에 떨어진 시체가 늘었을 뿐이다. 하지만 겁은 전혀 나지 않았다. 두 번인가 가보았던 노름판과 이번에 처 음 온 싸움터가 다른 곳이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노름이든 전쟁이든 결 과는 양자택일이었다. "네 패는 그거냐? 내 패는 지금부터 봐야 한단 말야!" 죽음이냐 아니면 출세냐. 둘 중 하나였다. 그 확실함이 마쓰고로의 마 음에 들었다. 마쓰고로는 사다리를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 직후에 무슨 일인지 세키부네의 선체가 급히 옆으로 기울었다. "앗!" 칼을 든 나머지 한 손만으로 올라가던 마쓰고로는 있는 힘을 다해 사 다리를 잡고 위태롭게 매달렸다. 그 바람에 머리에 쓴 진립陣笠이 날아 가 버렸다. 간신히 몸을 가눈 마쓰고로가 위쪽을 보았다. 자기를 노리고 있을 적 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운 좋게도 마침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 다. 엉켜버린 대열 속에서 아무렇게나 걸친 사다리가 마침 조선 배의 뱃 머리에 걸쳐진 것이다. 배끼리 옆면을 대고 싸우기 때문에 전투가 없는 뱃머리 쪽은 조선수군이 그다지 신경을 못 쓰는 것 같다고 마쓰고로는 생각했다. "좋았어!" 빙긋 미소를 지은 마쓰고로는 재빨리 사다리를 올라갔다. 일번검의 영 광은 바로 눈앞에 있었다. 조선 배의 방패판이 눈 높이에 맞춰졌다. 일단 배 위에 올라가기만 한다면 그 후에는 자신 있었다. 오늘의 일번검은 마 쓰고로라고 높이 소리지르며 마음껏 실력을 과시할 참이었다. 등에 맨 깃발도 힘차게 나부끼는 것 같았다. 고위 무사들이 지켜보길 바라며 사다리를 힘차게 딛고 판옥선에 뛰어 들기 직전이었다. 판옥선 뱃전 위에서 활을 쏘거나 칼을 휘두르는 조선 수군들이 한눈에 보였다. 그리고 그제야 이쪽을 발견하고 뭐라고 외치는 조선 장수들의 당황한 얼굴도 보였다. "아악! 형!" 그때 뒤에서 날카로운 비명이 마쓰고로의 귀를 찔렀다. 로쿠지로 목소 리였다. "뭐야?" 반사적으로 마쓰고로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비명이 들린 아래쪽 을 살폈다. 방금 전까지 보았던 로쿠지로의 모습은 갑판에 없었다. 눈에 띠게 기울어진 세키부네에서 반쯤 부서진 채 각종 물건이 쓸려 내려가고 있는 고물. 바로 그곳에서 로쿠지로가 소리치고 있었다. 물살이 거세게 넘실거리며 고물 쪽 갑판에 있던 시체들을 바다로 쓸어 넣었다. "저런!" 잠시 난간을 잡고 버티던 로쿠지로는 결국 견디지 못하고 바다로 쓸려 갔다. 갸름하고 여자 같은 로쿠지로 얼굴은 파도 속에서 파랗게 질려있 었다. "로쿠지로!" 마쓰고로 손에서 칼이 떨어졌다. 그리고 여태까지 단단히 사다리를 붙 잡고 있던 왼손에서도 힘이 빠졌다. 마쓰고로는 동생 로쿠지로가 전혀 헤엄을 못 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마쓰고로 몸이 사다리에서 떨어 졌다. 그리고 풍덩하는 소리와 함께 바다 속에 빠져 들어갔다. "이런 빌어먹을!" 차가운 물이 온몸을 감쌀 때 로쿠지로는 숨과 함께 욕설을 내뱉었다. 이제 일번검의 영예도 무사가 될 희망도 사라졌다. 거추장스럽게 무거운 갑옷을 재빨리 풀어버렸다. 로쿠지로는 그것이 곧 출세의 희망도 동시에 버리는 것임을 알고 있었다. '정말 좋은 기회였는데...' 평범한 농민으로 일생을 마치고 싶지는 않았다. 출세를 위해 모든 것 을 버리겠다고 다짐했다. 그런데 동생 로쿠지로만은 버리지 못한 것이다. 동생에게 다가가기 위해 몸을 바삐 움직이는 마쓰고로는 얼음장같이 차 가운 한기와 가슴을 찌르는 안타까움에 사로잡혔다. 마쓰고로는 거센 물살을 헤치고 허우적대는 로쿠지로에게 접근했다. 다행히 마쓰고로와 로쿠지로가 빠진 곳은 육지에 가까운 어귀였다. 물은 좀 먹겠지만 충분히 벗어날 수 있는 거리였다. 마쓰고로는 수영에 능했 다. 세키부네 쪽에서 끊임없이 들려오던 함성이 갑자기 뚝 멎었다. 대신 엄청난 폭음과 함께 비명과 절규가 이어졌다. 마쓰고로가 슬쩍 돌아보니 세키부네에서 불꽃과 연기가 치솟고 있었다. 조선수군이 뭔가를 계속 마 구 던졌고, 세키부네에서는 공격을 포기하고 이제는 도망치려는 기색이 느껴졌다. 그러나 이제는 살아남은 사람도 몇 안 되는 것 같았다. 수부 몇 명이 절망적으로 노를 저었지만 갈고리가 조선 배에 걸린 세키부네는 반쯤 가 라앉은 채 물살에 이리저리 떠밀리고 있었다. 조선수군 몇 명이 방패판 사이로 몸을 내밀어 창으로 갈고리에 걸린 밧줄을 끊었다. 그러자 판옥 선에 달라붙었던 세키부네 두 척이 물살에 휩쓸리며 떠내려갔다. "로쿠지로! 가만히 있어!" 아까 대나무 방패 뒤에 있을 때와 똑같은 말을 하며 마쓰고로는 옆에 떠다니는 나무판자 하나를 끌어당겼다. 마쓰고로 얼굴에 웬일인지 다시 미소가 떠올랐다. "지금 구해줄 테니까!" 물위에는 배들끼리 벌이고 있는 치열한 싸움의 흔적이 흘러 다녔다. 붉은 피가 흐르는 시체와 깃발, 천 조각이 어지럽게 흐르고 있었다. 판자에 동생을 태우고 헤엄치면서 마쓰고로는 옛날일 하나를 생각했 다. 물이 무섭다고 수영을 배우지 못한 동생을 억지로 강속에 집어넣던 일이었다. 그러나 로쿠지로는 수영을 배우지 못했고, 결국 물만 더 무서 워하게 되고 말았다. 마쓰고로가 입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 기회에 너도 수영을 좀 배워보는 게 어때?" (* 김경진입니다. 일본인 병사 형제가 등장하는 꼭지는 안병도 님이 쓴 것인데 야오이계의 거장답게 역시 본인은 전혀 의식하지 않았는데도 야오이풍이 마구 묻어나고 있습니다. 제가 느끼기에는 현재까지 그다지 오해될 여지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혹시나 몰라 다른 분 의견을 듣고 싶 습니다. 닭살이 심히 돋는다고 느끼시는 분은 오발탄란에 올려주시기 바 랍니다. 이 꼭지만으로는 큰 문제가 없다고 할 수도 있겠는데, 뒤에 이 형제들 이 배를 타고 돌아가는 장면이 다시 나옵니다. [[ "미안해. 나 때문에..." "뭘?" "형은 늘 전공을 세우겠다고, 그래서 무사가 되겠다고 그랬잖아? 그런 데 나 때문에 결국..." 로쿠지로는 고개를 푹 숙였다. 목소리도 다 기어 들어가고 있었다. "괜찮아." 마쓰고로는 가볍게 웃어 보였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미련을 털어 버 리듯 고개를 한번 흔들었다. "널 구한 것. 그게 내가 오늘 세운 최고의 전공이니까." ]] 이쯤에서 누군가 얼굴을 붉히면 완벽한 야오이물이 됩니다..--;; 여자 분들이야 좋겠지만... 의견을 내주십시오.) 5. 하타 노부도키 (1) = 구루지마군 젠군前軍, 하타 노부도키 "이런 꼴불견이 있나!" 세키부네 4척이 연이어 격파되자 노부도키가 부채를 접으며 벌떡 일어 났다. 판옥선이 있는 곳은 조금 전까지 요란한 함성과 총성이 자욱한 연 기와 함께 가득 찼었다. 그런데 막상 연기가 걷힌 뒤에 보니 참으로 한 심한 광경이었다. 부서지고 불타면서 뒤로 흘러가는 세키부네와 끄덕도 않고 서 있는 판옥선이 극적으로 대비되었다. 둘 사이에 정말 싸움이 있 었는지조차 의심될 정도였다. "벌써 10척이 당했습니다. 마치 어른과 아이 싸움 같습니다, 노부도키 님." 측근무사가 무심코 내뱉었다. "그걸 말이라고 하나!" 노부도키가 부채로 무사의 투구를 치며 일갈했다. 일본수군 연합함대 에서 선수先手를 맡은 구루지마군에서도 선봉함대인 젠군前軍의 대장 하 타 노부도키였다. "아이라 해도 저 정도 숫자면 어른 쪽도 상처를 입는다. 그런데 봐라! 이순신이 탄 배에 작은 상처라도 있는지를!" 고바야 6척과 세키부네 4척을 잃은 것으로 노부도키가 통솔하는 함대 는 이제 세키부네 4척 뿐이다. 하지만 노부도키가 답답해하는 건 남은 전력이 아니었다. 아직도 단 한 척만으로 모든 공격을 끄덕 없이 저지하 고 있는 적 움직임에 있었다. "이렇게 되면 적의 기세가 너무 오르게 된다. 적어도 이순신이 한 척 만 가지고는 견딜 수 없다는 것을 느끼게 해 줘야 한다. 만약 그래도 적 선들이 도우러오지 않는다면, 그때는 이순신도 좌절하고 자포자기하겠 지." 노부도키가 보고 있는 가운데 세 번째로 두 척이 돌격했다. 잠시동안 노부도키는 그곳을 가만히 응시했다. 여전히 함성을 지르며 세차게 돌진 하고 있긴 했다. 그러나 어쩐지 저대로는 안 될 것만 같았다. 뭔가 맥이 빠진 느낌이었다. "노부도키 님! 미치후사 님이 사번을 보내왔습니다!" "사번使番이라고?" 측근무사가 황급히 부르는 소리에 노부도키는 천천히 생각하려던 것을 그만 접어야 했다. 구루지마 함대에 단 한 척 밖에 남지 않은 고바야를 타고 온 연락병이 노부도키 앞에 무릎을 꿇었다. "미치후사 님께서 전하는 말씀입니다!" "뭔가?" "선두의 고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살고 죽는 것은 무사의 숙명. 돌 파하여 아군의 진로를 열도록." "그런가..." 보다 강한 공격을 재촉하는 군령이었다. '살고 죽는 것은 무사의 숙명' 이라는 비논리적인 말은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라는 말이었다. 노부도키 는 부채를 천천히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다른 말씀은 없었나?" "도쿠이 미치토시得居通年 님에게 전진을 명했다. 이렇게 말씀하셨습 니다." "알겠다." 도쿠이 미치토시는 미치후사의 3살 위 친형으로 구루지마 함대에서 쥬 군가시라中軍頭를 맡고 있었다. 미치후사는 본진 앞에 배치된 분함대 지 휘관 미치토시에게 노부도키의 지원을 명한 것이다. 동시에 이것은 강한 독전의 의미가 있었다. 제대로 된 공격을 보이지 않는다면 즉시 선봉을 미치토시에게 내놓으라는 뜻이었다. "이젠 방법이 없군." 노부도키가 허리에서 칼을 빼 들었다. 병법가로서 좀 더 여러 가지 전 술을 써보고 싶었지만 이제는 하는 수 없었다. "미치후사 님께 전해라!" "예!" 노부도키는 전령에게 찬찬히 일렀다. 말로 전하는 것이라 길게 할 수 없고, 최대한 함축적으로 전달해야 한다. "이 노부도키, 분하게도 기량이 모자라 이순신이 탄 배 한 척을 제압 하지 못했음. 이에 미치토시 님의 함대를 기다려 생사生死를 결決할 생 각임." 미치후사의 명령대로 목숨을 걸고 돌파하겠다는 답이었다. 비장한 각 오가 물씬 풍겼다. "노부도키 님!" 답을 받은 전령이 사라지기 무섭게 측근무사가 소리쳤다. 일본수군 입 장에서는 비교적 여유 있게 진행되던 싸움이 갑자기 죽음을 각오한 싸움 으로 돌변한 것이다.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꼭 죽는다는 건 아니다. 놀라지 마라." 노부도키는 놀란 무사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그 미소는 잠시 뿐이었다. 곧 노부도키의 차갑고 날카로운 눈빛이 빛났다. "내게도 병법가로서 자존심이 있다. 일부러 미치토시 님을 기다려 공 격하겠다고 했다. 그것으로 신나게 이순신을 밀어붙여 주겠다. 적어도 이 순신이 당황하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거다. 기다려 봐라." "그렇지만..." 측근무사는 노부도키의 얼굴에 스친 광기를 보고 입을 다물었다. 그것 은 위험한 감정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목숨을 걸 가치는 있는 거다." 이어서 한 노부도키의 말이 그것을 뒷받침했다.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 고 있는 앞쪽과 지나칠 정도로 조용한 뒤쪽. 그 사이에서 노부도키의 나 머지 두 척이 돌격준비를 시작했다. 뒤에서 미치토시의 함대 8척이 전진 해 왔다. 8척 단위는 전형적인 해적 편제였다. = 경상우수영 좌선, 박영남 "흥! 싸움이 끝난 다음에야 화포를 쏠 수 있게 되다니. 쓸데없이!" "그럼, 나으리. 화약을 뺄깝쇼?" "능글능글한 놈!" 군관 박영남은 뒤에서 송한과 화포장 사이에서 농이 오가는 것을 들으 며 앞을 지켜보았다. 왜 대선 두 척이 또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 에는 여유가 있었다. 일단 화포로 두들길 수 있기 때문이다. 조금 전처럼 접근전을 허용할 필요가 없었다. 조금 전에는 정말 큰 위기였다. 하마터면 왜군의 진입을 허용해 갑판 이 난장판이 될 뻔한 것이다. 왜병 하나가 판옥선에 거의 다 올라왔다가 어찌 된 셈인지 물에 뛰어내린 것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박영남이 아는 왜놈이라면 무조건 악착같이 돌격해 와서 닥치는 대로 베고 찌르는 무식한 놈들이었다. 혼을 빼앗긴 마귀의 졸병이나 될까? 그런데 그 왜병 은 스스로 물에 뛰어내렸다. 그 얼굴에 어린 안타까움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 지 지금도 알 수 없었 다. 그 왜병은 지금 다른 왜병과 함께 판자조각을 탄 채 기슭으로 헤엄 치고 있었다. 그놈은 거센 물살에 휩쓸리면서도 헤엄을 잘 쳤다. 같이 가 는 놈은 아마 헤엄을 못 치는 모양인지, 그저 허우적대고 있었다. 박영남은 강진현감 이극신이 그 왜병에게 활을 쏘려는 걸 말렸다. 이 극신이 화를 버럭 냈지만 박영남의 진지한 표정을 보고는 다시 활을 쏘 려다 말았다. 이극신도 별로 내키지 않는 모양이었다. 왜병 둘은 물에 휩쓸려 떠내려가다가 거의 기슭에 도착했다. 활을 쏘 면 지금도 충분히 맞힐 수 있는 거리였다. 하지만 그들을 쏘면 적이 아 니라 사람을 쏘게 되는 것 같아 왠지 꺼림칙했다.. 전형적인 왜병이라면, 맨 처음에 소선에 타고 돌진해온 왜장 같은 놈 이었다. 그놈은 박영남이 쏜 화살을 가슴에 맞고도 창으로 판옥선을 찌 르고 쓰러졌다. 그리고 물에 빠진 다음 허공을 향해 손을 몇 번 저으며 소리를 지르고 죽었다. 전혀 사람 같지 않은 놈들이었다. 박영남은 옆에서 준사가 조총 두 개에 화약을 장전하는 모습을 물끄러 미 바라보았다. 화약종이를 입에 물고 꼬질대로 총구를 쑤시는 모습이 무척 진지해 보였다. 얼마 전에 송한에게 들으니 칠천량에서 판옥선을 몰고 빠져 나온 것도 이놈의 공이 컸다고 했다. 박영남은 준사가 전혀 왜놈 같지 않고 사람 같아 보였다. "이보게, 선장! 거리가 적당하겠네." 우치적이 송한에게 잔뜩 초조한 말투로 재촉하는 소리였다. 과연 왜선 두 척이 빠른 속도로 달려오고 있었다. 그러나 이 배의 전투지휘권은 송 한에게 있었다. 상황에 따라서는 장대 위의 통제사나 우치적도 송한의 명에 따라야 했다. 그건 통제사가 정한 규율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통 제사가 보이지 않았다. 또 쓰러진 모양이었다. 박영남은 두 달 전에 통제사를 직접 만난 적이 있었다. 아직도 그 날 짜를 기억했다. 바로 칠석날이었니까. 그때 통제사는 백의종군 중이었고, 박영남은 당시 통제사 원균 대신 원수부에 잡혀가 곤장을 맞은 날이었 다. 행정에 관한 잘못은 아전이, 작전에 관한 일은 군관이 대신 벌을 받 는 것이 관례였다. 며칠 후 도원수가 직접 통제사 원균을 불러들여 곤장 을 치긴 했지만. 그날 박영남은 통제사와 자기 신세를 한탄하며 눈물을 줄줄 흘렸다. 그런데 통제사는 간밤에 무슨 꿈을 꾸었는지 원균에 대해서는 좋은 말을 했다. 누구 탓에 이렇게 됐는데, 참 할 말이 없었다. 그런데 그날 온갖 데에서 선물을 보내고 온갖 사람들이 통제사에게 인 사를 하고 갔다. 백의종군 중인 죄인에게 잘 보일 필요도 없을 텐데, 통 제사는 사람이 좋은 건지 능력을 인정받은 건지 알 수 없었다. 어쨌든 들락거리는 사람들 때문에 통제사하고 조용히 말을 나누기도 어려울 지 경이었다. 박영남이 전임 통제사가 머무는 초가집에 있는 동안 들른 사람은 안각 형제, 박응사, 심준과 그 일행들, 의령현감 김전 등이었고, 초계현감은 사 람들을 시켜 햇물건을 많이 보내왔다. 박영남은 그 사람들이 온 것이 임 금이나 원균 귀에 들어가면 어떡하려고 그러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긴 박영남도 원수부에 들르기 전에 그렇게 통제사를 먼저 찾지 않았던 가? 박영남이 볼기짝을 한번 쓱 문질렀다. "도훈도, 천자총통 준비하라." 이제 전투가 시작될 참이었다. 송한이 명령하자 갑판 가운데에 선 도 훈도가 갑판 아래에 소리를 지른 다음 벌떡 일어섰다. 뱃전에 늘어선 군 관들은 천천히 활을 들어올렸다. 박영남도 통아에 애기살을 끼우고 시위 를 살짝 잡아당겼다. 준사처럼 조총을 쏘는 군관들은 심지에 불을 붙였 다. 뱃전에서 왜선들과의 거리를 가늠한 송한이 도훈도에게 소리를 질렀 다. "천자총통을 쏘아라!" "천자총통을 쏘랍신다~" 도훈도가 엎드려 아래에 대고 명령을 전하고 약간 시간이 흐른 다음이 었다. 박영남은 손바닥을 들어 귀를 막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었 다. - 뻥! 굉음과 함께 배가 잠시 흔들렸다. 그리고 매캐한 냄새와 함께 하얀 연 기가 뱃전에 치솟았다. 박영남이 눈을 똑바로 떴다. 연기 사이로 커다란 대장군전이 왜선을 향해 똑바로 날아가는 것이 보였다. 첫 발은 왼쪽에서 오는 대선의 다락 을 부수고 들어갔다. 다락 속에서 아우성치는 왜군들이 들여다보였다. 대 부분이 조총을 쏘는 왜병들이었다. - 뻥! 이번에는 오른쪽 천자총통이 발사되었다. 판옥선 앞에 장착된 천자총 통은 두 자루밖에 없었다. 화포가 워낙 크고 화약을 많이 소모하지만 위 력이 화끈해서 좋았다. 그런데 오른쪽 배를 향해 날아간 대장군전은 날개가 부러졌는지 궤도 가 삐뚤삐뚤했다. 급기야 공중에서 빙빙 돌며 날아갔다. 대장군전은 돛을 내린 왜선의 돛대에 옆으로 부딪혔는데, 박영남의 예상과 달리 단번에 돛대가 부러지고 말았다. 돛대가 앞으로 쓰러지고 대장군전이 갑판 위에 서 나뒹굴자 대나무방패판 뒤에 숨은 왜병들 사이에서 소란이 일어났다. "배를 우로 틀어라. 좌변 화포 준비!" 송한이 외치자 도훈도가 아래로 명령을 전달했다. 배가 제자리에서 오 른쪽으로 천천히 돌았다. 물살이 거세 제자리에 서있는 것만으로도 격군 들에게는 무척 힘들 것이라고 박영남은 생각했다. 판옥선이 뒤로 조금 밀렸다가 다시 조금 앞으로 가는 것으로 알 수 있었다. 물살을 옆으로 받자 배가 밀린 것이다. 만약 이곳에서 닻을 내린다면 배가 물 속에 빨려들 것을 염려해야 할 정도로 이곳은 물살이 셌다. 큰 나무에 돌을 매달은 닻이 과연 밑바닥에 닿을까도 의심스러웠다. 그리고 전투를 하는데 닻을 내리고 할 수는 없 었다. 판옥선에 사부보다 더 많은 격군이 필요한 것은 기동성을 살리기 위해서이다. 갑판 왼쪽에서는 포수들이 목표를 향해 당차를 돌리고 있었다. 화포는 배에 고정된 것이 아니라 당차 위에 실려있어 좌우로 어느 정도 돌릴 수 있었다. 작은 나무수레에 화포를 싣고 밧줄로 단단히 묶은 다음 뱃전에 도 밧줄을 연결해 고정시키는데, 그 수레가 당차이다. 횃불을 든 포수들 이 짤막한 화포 심지 가까이 불을 갖다댄 채 기다리고 있었다. "쏴라!" 송한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포수들이 심지에 불을 붙였다. 치직거리 는 소리를 내며 하얀 연기가 가늘게 뿜어져 나왔다. - 펑! 당차가 크게 흔들리며 뒤로 확 물러섰다. 그러나 여장 기둥에 고정시 킨 밧줄 덕택에 한번 튀어 오르더니 다시 앞으로 밀려갔다. 포수가 포구 를 통해 솔을 집어넣어 찌꺼기를 빼냈다. 먼저 차대전 같은 대형 화살이 발사되었다. 그 다음이 철환이나 조란 탄이었다. 부서진 배 위와 다락 안에서 왜병들이 우수수 쓰러지는 것이 이곳 뱃전에서도 보였다. 박영남은 이번에는 화살이 제대로 위력을 발휘하겠다고 생각하며 신중 히 목표를 노렸다. 첫 목표는 칼을 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왜장이 었다. 박영남이 시위를 놓았다. - 촥! 작은 화살이 날아가 그 왜장의 가슴에 꽂혔다. 왜장은 뭔가 하고 고개 를 숙여 가슴을 살폈다. 그때 가슴에서 피가 쫙 터져 나왔다. 그러더니 왜장은 그 자세 그대로 엎어졌다. 그 다음은 일방적인 학살 수준이었다. 다락과 방패판이 부서져 정신없 이 도망 다니는 왜병을 향해 화살이 하나둘씩 날아갔다. 가끔 왜병이 숨 어서 조총을 쏘았지만 가물에 콩 나듯 드물었고, 승자총통에서 날아간 세전 15개에 재수 없는 주변 왜병들과 함께 나가 떨어졌다. 신이 난 송한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이번에는 배를 좌로 틀어라! 우변 화포 준비!" 다시 우현의 지자, 현자총통이 일제히 발사되었다. 화포는 대부분 왜선 에 명중했고, 왜군들은 방패가 없이 맨몸으로 노출된 꼴이었다. 당황한 그들을 향해 철환이 휩쓴 다음 사부들이 쏜 화살의 비가 쏟아졌다. "화전을 쏘아라!" 송한이 때맞춰 명령을 내렸다. 세키부네 두 척이 판옥선에 다가올 쯤 에는 왜군의 조직적인 저항은 거의 끝나고 일부 살아남은 수부들이 노를 집어던지고 물에 뛰어들고 있었다. 부러지고 부서져 바싹 마른 면을 드러낸 나무에 불화살 몇 개가 꽂혔 다. 그러자 그것을 불쏘시개로 해서 왜선이 홀랑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왜선 두 척은 판옥선 좌우로 스쳐 지나갔다. "이번엔 아주 간단하구만." 박영남이 다른 군관들과 함께 옆으로 지나가는 왜선을 구경했다. 물에 반쯤 잠긴 왜선들은 상부구조물이 불에 타면서 흘러가고 있었다. 왜선에 는 거꾸러진 시체들이 잔뜩 있어서 군관들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군 관들 입장에서는 감투가 흘러가고 있는 것이다. 잘린 적의 머리를 수급 首級이라 하는데, 이는 군사들이 적의 머리를 벨 때마다 한 계급씩 올려 줬다는 중국의 고사에서 비롯된 것이다. "또 온다! 이번엔 네 척이 한꺼번에 온다!" 구경에 정신 팔렸던 군관들이 화살을 메기며 뱃전에 달라붙었다. 송한 이 다급하게 소리쳤지만 화포장과 포수들은 할 일을 다하고 있었다. "빨리 장전해라! 빨리!" = 구루지마군 어립선, 미치후사 "너무 지나치신 게 아닌지요." 전령이 돌아와 노부도키의 최후결의를 알리자 미치후사의 부장이 말했 다. "뭐가 지나치단 건가?" 미치후사가 눈썹을 조금 찡그리며 물었다. 그는 전령이 보고하는 동안 내내 한 곳을 노려보고 있었다. 멀리 이순신이 탄 대장선이었다. 그 외에 는 아무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태도였다. "노부도키는 나름대로 능력을 발휘하고 있다고 보입니다. 다만 적이 너무 강할 뿐입니다." "마음에 안 들어!" 미치후사는 낮지만 강한 목소리로 외쳤다. "제법 큰소리를 치며 돌아다닌 병법가다. 그래서 발탁했고 귀중한 병 력도 할당했다. 그런데 겨우 한 척을 어쩌지 못했다. 그렇다면 책임을 져 야지." "하지만 그렇다고 꼭..." "죽음으로 책임을 지는 것은 노부도키만이 아니다! 나도 마찬가지다. 이순신을 격파하지 못하면 나는 결코 살아 돌아가지 않겠다!" "주군!" 부장이 눈을 크게 떴다. 미치후사가 보인 결의에 압도됐다기보다는 가 문이 망할까 염려한 것이다. 미치후사에게 아들이 있긴 하지만 아직은 어렸다. "우리 구루지마 해적에게는 노부도키 저 녀석이 선두이자 방패다. 하 지만 우리 군 전체로 보면 어떨까? 왜 내가 선봉이 될 수 있었겠나? 그 건 나를 방패로 삼자는 거다! 이 구루지마 미치후사를 말이다!" 출진을 앞둔 며칠 전부터 구루지마 미치후사는 와키자카 야스하루와 심한 선봉다툼을 벌였다. 총대장 도도 다카도라 앞에서 벌인 이 다툼에 서 미치후사와 야스하루는 감정적 대립까지 보였다. 결국 다카도라의 중 재로 인해 미치후사로 결정됐지만 그 과정에서 미치후사는 다른 무장들 의 미움을 받게 됐다. 원래부터 미치후사는 그 출신이 다른 무장과 확연히 달랐다. 육전을 주로 해 오던 무장들이 해적출신의 미치후사를 제대로 인정할 리 없었 다. 이런 상황에서 미치후사가 살아남는 방법은 단 하나뿐이었다. 그 모 든 무장들이 인정할 수밖에 없는 공을 세우는 것이다. "뒤에서 다른 무장들이 주시하고 있다. 그들이 날 어떤 눈으로 보고 있겠나? 정규군이 아닌 해적은 어쩔 수 없다는 식이겠지. 여차하면 선봉 의 부진을 이유로 치고 나올 기회만 노리고 있다. 조금만 느슨하게 하면 이제까지 보인 싸움의 공로조차 인정받지 못한다." 미치후사도 결코 편한 위치에 있는 건 아니었다. 그걸 알자 부장도 더 이상 미치후사 말에 이의를 달지 못했다. 그렇지만 부장은 다른 점을 걱 정했다. "하지만 불길한 말씀은 하지 마십시오. 미치유키 님의 일, 잘 알고 계 시지 않습니까?" 5년 전에 있었던 시나노노가미(信濃守:시나노 지방을 다스리는 관직 명) 구루지마 미치유키來島通之의 죽음은 큰 충격이었다. 약하기 그지없 다는 조선군에게 당하다니! 미치후사는 며칠동안 아무 것도 입에 대지 못했다. 분함을 이기지 못한 무사 몇 명은 그 자리에서 할복했다. 주군을 따라 죽는 순사殉死였다. 그때 미치후사에게 알려진 보고는 이랬다. 미치유키는 이순신의 조선 수군에게 패했으나 간신히 살아 섬에 올라갔다. 그리고는 치욕을 이기지 못해 스스로 할복 자결했다고 했다. '참으로 결연하신 최후였습니다.' 라 고 전하는 사람마다 눈물을 글썽거렸다. 그러나 그 후 새로운 사실이 전해졌다. 미치유키의 최후가 알려진 바 와 다르다는 것이다. 미치유키가 타고 있던 3층 짜리 아다케후네는 조 선수군의 배들로부터 집중공격을 받고 부서졌다. 그리고 미치유키는 아 다케후네가 불태워지기 전 적의 화살에 맞아 전사했다는 것이다. "물론 잘 알고 있다." 너무도 처참했기에 전령이 형의 죽음을 차마 제대로 전하지 못하고 그 런 거짓을 꾸며냈는지 모른다. 그것을 생각할 때마다 미치후사는 온몸에 경련이 일었다.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억제하지 못하는 것이다. "잘 들어라. 물론 복수도 중요하다. 분노도 중요하다. 그러나!" "예." 그리고 그것들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 미치후사는 그것을 말하고 싶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부장에게 미치후사가 꺼낸 대답은 단 한마 디였다. "나는... 싸울 때만 비로소 자유로울 수 있다." "무슨 말씀이신지." 부장이 재차 그 의미를 물었다. 그러나 미치후사는 대답하지 않았다. = 해남현, 마쓰고로 간신히 헤엄쳐 올라간 해변이었다. 동생 어깨를 부축한 마쓰고로는 다 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한 걸음, 두 걸음을 떼자 두 사람은 그만 쓰러지 고 말았다. 마쓰고로는 하늘을 보며 숨을 몰아쉬었다. 파란 하늘이 노랗 게 보였다. 마쓰고로는 간신히 힘을 내어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 있는 사람은 마 쓰고로와 로쿠지로만이 아니었다. 갑옷과 무기를 버리고 죽을힘을 다해 헤엄쳐 온 일본병사들과 수부들. 그들은 엎어져서 가쁜 숨을 몰아 쉬고 있었다. 여기까지 헤엄치지 못하고 죽은 사람들은 잔뜩 부풀어오른 배를 위로 하고 해변 곳곳에 널브러져 있었다. 물살에 휩쓸려 떠다니는 시체 들도 많았다. 해변이라 해도 모래사장같이 부드러운 곳이 아니었다. 울퉁불퉁한 검 은 색 바위가 아무렇게나 늘어서 있는 곳이었다. 바위 끝이 걸을 때는 발바닥을, 누우면 등짝을 마구 찔렀다. 바위조차도 이들에게 조선 땅을 어서 떠나라고 재촉하는 것 같았다. 게다가 어디 한두 군데 부상을 입은 자들이 대부분이었다. 몸을 가누 기도 힘들어 걸을 수도 없는 상태였다. "제길! 한심하군." 어느새 욕설이 입에 붙은 마쓰고로가 동생 로쿠지로를 반듯이 눕혔다. 그러나 로쿠지로는 돌아눕기가 무섭게 옆으로 몸을 돌렸다. "우웩!" 로쿠지로가 구역질을 했다. 그다지 위험한 상태는 아니었다. 의식이 돌 아오며 물을 토해낸 것이다. "꺾이지 마라! 우린 반드시 이긴다!" 갑옷도 입지 않은 무사 한 명이 고함을 질렀다. 바닷물이 뚝뚝 떨어지 는 투구를 머리에 쓴 채 고래고래 소리치는 모습이 슬프기도 하고 우스 워 보이기도 했다. 꼭 성 아랫마을에서 어쩌다 볼 수 있는 사루메구루시 猿回し 같았다. 원숭이에게 재주 피우고 구경꾼에게 돈을 받는 장사꾼 같은 그 무사는 배를 다쳤는지 말을 할 때마다 입에서 피를 쏟아냈다. 마쓰고로가 웃음기를 거뒀다. 또한 전혀 우습지 않은 사람들이 그 무사를 쳐다보았다. 한쪽 팔이 부 러졌는지 관절과 따로 놀며 덜렁거리는 병사가 물끄러미 무사를 쳐다보 고 있었다. 간신히 헤엄쳐 오기는 했지만 이미 몸 전체가 그을리거나 화 살을 맞아 피를 많이 흘려 실신한 병사들이 주변에 널려있었다. 조금 뒤 면 그들은 모두 시체로 변해 버릴 것이다. "괜찮아? 로쿠지로?" 어쨌든 지금 마쓰고로에게 중요한 것은 동생이었다. 마쓰고로는 어느 새 자상한 형으로 돌아와 있었다. "난 괜찮아." 한참동안 구역질을 한 로쿠지로는 핼쓱해진 얼굴을 형에게 돌리며 대 답했다. "여긴 안전한 거 같아. 그러니 잠시 쉬고 있어." 바로 눈앞 바다에서는 대포소리와 총소리가 계속 울렸다. 조선 전선은 뒤쪽만 보이지만 거기서 쏘는 대포소리는 정말 우렁찼다. 그러나 해변에는 조선군도 없고 싸움도 없었다. 방금 전까지 치열한 싸움의 당사자였던 일본병사들은 해변에 닿는 순간 단순한 구경꾼이 되 었다. "모두 일어서라! 우리 진영으로 가자!" 무사들이 독촉하자 병사들은 간신히 힘을 내어 걷기 시작했다. 다른 부상병을 도와줄 여력은 없었다. 다리가 부러진 병사가 쩔뚝거리면서 울 부짖었지만 다들 못 들은 척하고 말았다. 어서 여기를 벗어나고 싶었다. 몸은 물먹은 솜처럼 늘어지고 다리근육은 마비된 지 오래였다. 그럼에 도 불구하고 이들은 악착같이 걸어서 아군 배들이 있는 곳 해변까지 왔 다. 마치 조선의 군선 뒤에 있으면 포로가 되고 만다는 두려움에 떠는 것처럼. "오이(이봐)! 고찌다(이쪽이다)!" 아직 기운이 남아 있는 병사들이 일제히 소리를 질렀다. 배를 부르려 는 것이다. 자존심이고 뭐고 살 수 있는 방법은 그것밖에 없었다. 모두가 지옥에서 빠져 나온 기분이었다. 거지가 동냥하는 것처럼 애달픈 목소리 로 배를 부르고 있었다. 몇 명은 두 손을 모으고 애걸하는 자세를 취하 기도 했다. 이들이 바로 조금 전까지 늠름한 표정으로 창과 활을 잡았던 동료들이라니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나 한참 싸우고 있는 구루지마 수군은 일부러 모른 척했다. 전투 에 진 패배자들을 건질 배는 없다는 것이다. 왜병들은 할 수 없이 더 걸 어가기로 했다. 후방에 있는 구루지마 수군 배는 도와줄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한참을 걸어가자 병사들이 부르는 소리에 응해 고바야 한 척이 다가왔 다. 군기로 보아 뒤에 있던 와키자카 함대 소속이었다. 배는 암초를 피해 조심조심 다가오고 있었다. 마쓰고로가 털썩 주저앉았다. "이제 끝난 건가?" 마쓰고로는 잊고 있던 아쉬움을 다시 느꼈다. 이대로는 고향에 돌아갈 면목이 없었다. 어머니를 뵐 면목도 없었다. 의기양양하게 나섰던 길을 초라한 몰골로 고개를 숙이며 돌아가야 한다. 둘 다 안 다쳐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응?" 이 때 무심코 언덕 쪽을 쳐다본 마쓰고로 눈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비 쳤다. 낡고 지저분한 흰옷을 입고는 다친 이쪽 병사보다 더 초라한 몰골 을 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해변에 떠밀려온 일본병사들을 다소 겁먹은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조선인?" 조선사람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조선군은 아니었다. 무기도 없고 주로 노인이나 아이들, 나이 든 여자들이었다. 아마도 근처에 사는 어민이 아 닐까. 마쓰고로는 그렇게 생각하다가 커다란 보따리를 보니 그것도 아닌 듯했다. "뭘 보는 거야! 어디든 꺼져버려!" 아까 고함을 지르던 무사가 이번에는 조선인들을 노려보며 외쳤다. 그 러나 무사에게는 무기가 없었다. 창은 물론이고 무사가 반드시 차고 다 니는 대도大刀와 소도小刀도 없었다. 조선인들은 그 고함소리에 흠칫 놀 라긴 했지만 그 이상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멀뚱멀뚱 쳐다볼 뿐이 었다. 과연 저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마쓰고로는 잠시 생각에 잠겼 다. 아마 적선에서 활과 돌을 날리던 적들도 저렇게 생겼으리라. 같은 조 선인이니까. 그리고 보니 이제까진 싸우는 적이 누군지 관심조차 가지지 않았다. 보이는 건 사람이 아니라 배였다. 배를 상대로 고함을 지르고 활과 철 포를 쏘았을 뿐이다. 한 사람이 한 사람과 싸웠던 게 아니라 스스로 배 의 일부분이 되어 적선과 싸운 것이다. 그래서 쓸데없이 강한 적개심을 일으킬 수 있었고 양심의 가책 같은 것도 없었다. 배가 부서진 다음 마 주 대한 조선인에겐 적개심이나 감정을 품을 수 없었다. 어째서일까? 그 리고 저들도 지금 내가 느끼고 있는 걸 느낄까? "가자! 로쿠지로!" 배가 해변에 도착하자 마쓰고로는 재빨리 동생을 끌어 일으켰다. 어쨌 든 조선인들의 시선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어서!" 다친 데가 아무 데도 없었기에 마쓰고로와 로쿠지로는 부상자들보다 훨씬 빨리 배에 다가갈 수 있었다. "형." "왜?" 마쓰고로의 손에 이끌려 가던 로쿠지로는 배에 오르기 전 작은 목소리 로 말했다. "미안해. 나 때문에..." "뭘?" "형은 늘 전공을 세우겠다고, 그래서 무사가 되겠다고 그랬잖아? 그런 데 나 때문에 결국..." 로쿠지로는 고개를 푹 숙였다. 목소리도 다 기어 들어가고 있었다. "괜찮아. 잊어버려." 마쓰고로는 가볍게 웃어 보였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미련을 털어 버 리듯 고개를 한번 흔들었다. "널 구한 것이 내가 오늘 세운 최고의 전공이니까. 우리 형제 둘 다 다친 데 없이 살아서 다행이야. 최소한 어머니에게는 면목이 서겠군." (* 로쿠지로가 얼굴을 붉혔다...-_-? 이 정도로는 괜찮다니 다행입니 다.) = 구루지마군 젠군前軍, 하타 노부도키 '결사적' 이란 말이 딱 들어맞았다. 남은 세키부네 두 척으로 돌격하는 하타 노부도키의 함대는 무척 조용 했다. 앞서 함성을 지르며 돌격한 다른 배들과는 틀렸다. 지시가 있기 전 까지는 절대로 총을 쏘지도 함성을 지르지도 말라는 명령 때문이었다. 울돌목을 막아선 이순신의 판옥선은 마치 살아있는 거대한 생물 같았 다. 헤엄치는 고래처럼 자유자재로 선체를 돌리며 퍼붓는 포화에 접근한 모든 배들이 먹이가 되고 말았다. 두 척씩 돌격한 배들이 처참하게 격파되자 노부도키는 전술을 바꿨다. 뒤에서 온 미치토시 함대 소속의 두 척과 함께 4척이 일제히 돌격하는 전술이었다. 압도적인 수의 우세를 이용하자는 것이다. 이번에는 미치토시의 배 8척과 합친 합계 열 척의 함대가 움직였다. 노부도키가 포함된 4척이 먼저 앞에 서고 뒤에 다시 4척이 섰다. 이렇게 두 겹으로 된 공격선 뒤에 미치토시의 배와 다른 배 한 척이 더 있었다. 적을 돌파하지 못한 죄로 노부도키가 탄 배는 맨 앞에 있는 하나의 전선 으로 전락해 버린 다음이었다. "삼단철포 준비!" 그러나 노부도키는 조금도 기가 죽지 않았다. 오히려 신중하던 병법가 에서 용맹한 무사로 변해 있었다. 조금도 거칠 것 없이 나오는 목소리가 갑판 위를 쩌렁쩌렁 울렸다. 이미 병사들 눈빛도 변해 있었다. 이번 돌격이 성공하든 실패하든 살 아남을 수 없다고 전해들은 그들이었다. 처음에는 당혹해 하는 병사도 있고 기운을 잃은 병사도 있었다. 그러나 약간 시간이 지나자 그런 절망은 적에 대한 분노로 바뀌었다. 죽음을 피할 수 없다고 체념하자 어떻게 하든 적을 하나라도 같이 데리 고 가자는 분노가 앞섰다. 다가가는 도중에 적이 쏜 포탄이 배 여기저기 떨어졌지만 아무도 동요 하지 않았다. 뜻밖에 커다란 기둥만큼 큰 화살은 날아오지 않아 피해도 적었다. 어쩌다 화살에 맞고 부상한 병사는 더 이상 비명을 지르지 않았 다. 오히려 화살을 뽑고 분노의 눈길로 판옥선을 쏘아볼 뿐이었다. "밀어붙인다!" 고작 한 척이 날뛰는 꼴을 더는 볼 수 없었다. 그것이 노부도키의 솔 직한 심정이었다. 비록 그 한 척이 강하기로 이루 말할 수 없는 조선수 군과 이순신이라 할 지라도. 아무리 배가 크고 대포가 강력해도 싸움은 결국 사람이 하는 것이다. 사람은 언젠가는 지친다. 더구나 지금처럼 격한 물살 속에서 싸우면 노 를 젓는 수부들이 쉽게 피로를 느낀다. 역류에 저항하며 싸우고 있는 판 옥선이 화살과 탄환은 막을지 몰라도 그 피로를 막을 수는 없다. 노부도 키는 그 점을 노리고 있었다. 기습에 의한 공격이 실패하자 이제는 적에 게 극심한 소모를 주기로 작정한 것이다. "쏴라!" 철포가 닿을 수 있는 거리에 도달하자 노부도키가 명령했다. 그러자 철포병들이 사격을 개시했다. 이번에는 발사음이 그다지 크지 않았다. 한꺼번에 쏘는 집중사격이 아 니기 때문이다. 대신 삼단철포는 일단 사격을 시작하면 그치지 않는다. 비록 두터운 나무방패 뒤에 숨어있는 조선군이 맞지는 않더라도 함부로 머리나 몸을 내밀 수 없게 된다. 사격에 대한 판옥선의 대답은 금방 왔다. 약간 돌린 판옥선 뱃전에서 꽝하는 소리와 화약연기가 치솟았다. 그러자 누군가 소리를 질렀다. "온다!" 말로 듣던 것보다는 좀 작은, 그러나 여전히 통나무 만한 화살이 날아 들었다. 지자총통에서 쏘는 차대전이었다. 맞았을 때의 충격도 컸지만 우 선은 그 거대한 물체가 공중에 떠서 날아드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기 가 질릴 정도였다. 배 위에 있는 모두가 주위에 있는 아무 물건이나 꽉 움켜잡았다. 저 '화살'은 배를 깨뜨리면서 거세게 흔들어 갑판 위에 있는 사람을 바다에 빠뜨린다고 들었다. 따라서 일단 몸을 고정하는 것이 중요했다. "겁먹지 마라!" 노부도키는 철포대가 사격하고 있는 바로 뒤편까지 나와서 독전했다. 목숨에 대한 집착을 버린 이상 두려울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스스로가 그랬듯이 모든 병사들이 그런 자세로 싸워주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육중한 충격이 배 전체를 강타했을 때도 그는 일부러 옆에 있는 방패를 한 손으로 잡은 채 버텼다. "걱정 마십시오, 노부도키 님! 적어도 저 한 척은 어떻게든 멋지게 밀 어붙이겠습니다!" 충격이 지나가자 장창족경조長槍足輕組를 점검하던 부장이 말했다. 그 는 판옥선에 접근하는 즉시 이들을 이끌고 뛰어들 작정이었다. 선봉함대 의 부장이라는 위엄 같은 건 이미 없었다. 있는 것은 오로지 싸우겠다는 투지뿐이었다. "그래, 한자에몬半佐衛門. 믿고 있겠다!" 처음으로 노부도키는 부장의 이름을 불렀다. 전술에 실패한 대장을 끝 까지 믿고 싸워주는 그가 정말 고마웠다. 이제까지는 그저 어디나 있는 부장일 뿐으로 생각했지만 지금 이 순간만은 특별히 여겨졌다. "으악!" 선미 쪽에 있던 병사 십여 명이 일제히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판옥 선이 쏜 것은 차대전만이 아니었다. 조란탄도 있었다. 백 개는 됨직한 작 은 자갈이 퍼져 나와 마치 그물을 친 것처럼 선미를 덮었다. 두터운 갑 옷도 소용없었다. 무서운 속도로 날아온 돌은 두터운 나무판에 퍽퍽 박 힐 정도였다. 맞은 병사는 온몸이 벌집이 되어 버렸다. 짓이겨진 머리와 몸통이 분 리되어 흩어졌다. 피와 살점이 마구 날리는 모습은 차마 눈뜨고는 못 볼 정도였다. 방금까지 옆에 있던 동료의 살점과 피를 뒤집어쓴 병사가 창 을 놓고는 구역질을 하며 갑판을 기었다. "앞으로! 앞으로!" 어차피 거리가 떨어져 있는 동안에 세키부네는 판옥선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노부도키는 한시라도 빨리 판옥선에 접근하도록 재촉했다. 코끝 에 느껴지는 매캐한 화약냄새가 그의 혈액 속을 흥분으로 가득 채웠다. "적선에 붙어라! 그러면 적은 더 이상 포를 쏘지 못한다!" 다행히 물살은 아직 적에게 불리하게 흘렀다. 빠르게 흐르는 그 물살 덕택에 짧은 시간에 판옥선에 접근할 수 있었다. 그리고 쉴새없이 철포 를 쏘아댄 까닭에 화살도 별로 날아오지 않았다. "붙었다!" 다락이 반쯤 부서진 노부도키의 세키부네는 끝내 불타지 않고 판옥선 오른쪽에 접현하는데 성공했다. 같이 돌격한 세키부네 3척도 마찬가지로 각각 판옥선을 감싸고 달라붙었다. "노부도키 님! 먼저 가겠습니다!" 부장이 선두에서 장창족경조를 이끌고 판옥선을 향해 달려들었다. 먼 저 가겠다는 의미가 여러 가지로 들렸다. 그것은 병력을 몰고 앞서 돌격 하겠다는 게 아니라 먼저 저 세상으로 가겠다는 뜻으로 들렸다. "곧 뒤따라가겠다!" 노부도키 역시 여러 가지 의미로 들리는 대답을 했다. 대나무 사다리와 줄 달린 갈고리가 판옥선 배 위에 수없이 걸쳐졌다. 용감히 돌격하는 병사들을 보며 노부도키는 잠시 뒤쪽을 노려보았다. 그 곳에는 구루지마 미치후사와 총대장 도도 다카도라가 있었다. = 경상우수영 좌선, 박재석 웅천수군 박재석은 죽어라 노를 저었다. 물살이 엄청나게 빨라서 판옥 선을 제자리에 서있게 하는 것도 힘들 지경이었다. 다른 격군들은 유연 하게 몸을 놀려 잘 젓고 있는데, 박재석은 수군이 된지 8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이 일이 힘에 겨웠다. "거 똑바로 못하냐? 씨얄 떼 없이 손으로만 잡아땡기지 말고 허리를 쓰랑께! 집구석에서 니 마누라하고 밤일하대끼. 잉?" 진무 성복이 우람한 근육을 뽐내면서 힘껏 노를 잡아당겼다. 별로 힘 을 주지 않는 것 같은데도 4명이 잡은 노 하나 가운데 성복의 손잡이에 가장 많은 힘이 들어간 것 같았다. "씨발놈, 피죽도 못 얻어묵었냐? 잉?" 성복은 계속 박재석을 갈궜다. 그러나 박재석이 함부로 대꾸하지 못하 는 것은, 성복은 노를 젓는 격군이 아니라 노장櫓長이기 때문이다. 종 윤 금이 도망가서 대신한다지만 정작 노장의 임무는 같은 번호 좌우변 노꾼 들의 힘을 조절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박재석은 성복에게 조금 미안하고, 고맙기도 했다. "아, 미안하다. 잘못 말했다. 그래도 힘 좀 쓰그라, 잉?" 박재석은 방금 성복이 한 말 뜻은 알고 있었다. 임진왜란이 시작된 이 후 경상도는 가장 많은 피해를 입었다. 전쟁이 시작된 직후에는 왜군들 이 곧 물러갈 줄 알고 성에 들어갔다가 떼로 죽었고, 그 다음해 진주성 에서도 한꺼번에 6만 명이나 몰살당했다. 객지에서 힘겨운 피난살이를 하는 사람들도 대부분 경상도 사람들이었다. 그런데도 경상도 사람들은 다른 도 사람들에게 의심의 눈초리를 많이 받았다. 경상도 사람들이 왜군들을 위해 농사를 짓고 장사를 한다는 비 난이 가장 많았다. 물론 그런 사람도 있었다. 관군이 왜군을 막지 못해 다 도망가고 임금도 몽진을 떠난 다음 새로운 세상이 왔다고 믿고 왜군 들 편에 붙은 부역자들도 많았다. 그러나 가장 많은 의병이 일어나 왜군 의 군량수송로에 가장 큰 타격을 준 것도 경상도민이었다. 그리고 경상도 수군은 다른 수군들이 무척 불쌍하게 여겼다. 하필 원 균 밑에 있다가 왜군들과 무모하게 싸우다 죽거나 굶어죽은 수군이 많다 는 뜻이었다. 힘든 상황에서도 이순신이나 이억기 같은 다른 수사들이 군량을 도와준 적이 많았는데도 그랬다. 그런데도 많은 경상도 수군들이 굶어죽은 것은 다른 이유가 있었다. 전라도와 충청도 수군들은 원균이 통제사가 된 다음에야 왜 그랬는지 사 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서울로 끝없이 이어지는 뇌물수레 때문이었다. 수많은 수군들이 뇌물을 바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훌쩍!" 코가 막혀왔다. 박재석은 울고싶었다. 전쟁 전에도 1년에 여섯 달 동안 복무해야 하는 수군으로 있기 싫었다. 너무 힘들었다. 번을 서러 제포에 가보면 배를 타고 하는 훈련은 거의 없고 각종 부역에 동원됐을 뿐이었 다. 그 외에 진포에서 쓴다는 명목으로 잡다한 비용을 물어야 했다. 그러 나 박재석이 바친 것이 제포만호 입으로 들어갔는지, 아전들 입으로 들 어갔는지 모를 뿐, 진포 운영비용으로 들어간 것이 아니라는 것만은 알 고 있었다. 박재석은 전쟁이 났다는 소리를 듣고 당장 제포로 달려갔다. 그러나 순진한 수군 몇 명만 만호진에 몰려와 소란을 떨 뿐 만호는 없고 진무들 도 다 도망쳐 텅텅 비어 있었다. 포구에는 가라앉은 판옥선 두 척 뿐이 었다. 그후에 박재석은 가족들을 데리고 순천으로 갔다. 전라좌수사는 박재 석 가족을 돌산섬에 정착시켰고, 황무지를 개간하는 고된 삶이었지만 그 런 대로 살만하다고 느꼈다. 그러나 전라좌수사가 잡혀가고 경상우수사 가 통제사가 되자 완전히 뒤바뀌었다. 박재석은 경상우수영에 다시 소속되었다. 그런데 좌수사가 있었을 때 는 전쟁 중에도 1년 중 절반 정도는 가족에게 돌아갈 수 있었다는데, 이 제는 상번이고 하번이고 없이, 10월에 수졸들 대부분이 집으로 돌아가는 것도 없이 무조건 한산도에서 살아야 했다. 그리고 며칠 휴가라도 갈라 치면 반드시 뭔가를 위에 바쳐야 했다. 그리고 칠천량해전이었다. 박재석은 운이 좋았는지 나빴는지 계속 배 에 남게 되었다. 새벽에 문틈으로 보니 다른 배에서는 장수고 수졸이고 가리지 않고 뭍에 내린 다음 무조건 서쪽으로 뛰고 있었다. 그러나 경상 우수사 배설은 다른 배들과 함께 서쪽으로 도망쳤다. 그리고 지금은 이 자리였다. 가족들은 살아있는지 없는 지조차 알 수 없었다. 괜히 눈물이 났다. "아, 재수 없게 울지 말드라구, 잉? 그만혀. 나가 잘못혔어." 성복이 말은 그렇게 해도 딴에는 무척 다정다감한 목소리였다. 박재석 이 억지로 울음을 삼켰다. 하긴, 육지에서 죽어라 도망치는 길만이 사는 길인 관군이나 역적으로 몰려 죽는 의병들보다 조금 낫긴 했다. 하지만 이제는 끝이었다. 겨우 13척으로, 이제는 그것도 좌선 하나만으로 저 많 은 왜군을 어떻게 당한단 말인가? 그때 천장에 뚫린 출입구에서 진무가 외쳤다. "배를 왼쪽으로 틀랍신다!" "좌변 멈춰. 우변 반 저어!" 도노장都櫓長의 고함소리에 맞춰 판옥선의 왼쪽 노를 잡은 격군들이 일제히 노를 세워 정지시켰다. 이것도 젓는 것보다 힘이 만만찮게 드는 게, 물살 흐름에 맞춰 노를 젓는 것과는 반대방향으로 힘을 잔뜩 줘야 하기 때문이다. "우변 멈춰, 좌변 저어. 우변도 저어!" 도노장은 이물에 난 창을 통해 적선을 살피면서 격군들을 지휘하고 있 었다. 화포를 쏘기 위해 뱃머리를 조금 돌리는 만큼, 지나쳐도 모자라도 안 되는 것이 바로 양쪽 노의 균형을 맞추는 것이었다. 게다가 이곳 울 돌목은 물살이 워낙 세어 조금만 현측을 많이 보여줘도 그대로 물살에 떠밀리고 말았다. 이곳에서는 노 젓는 것도 악전고투라 할 만했다. - 뻥! 뻐벙! 위에서 큰소리가 들리고 진동이 배를 뒤흔들었다. 그 사이로 조총 소 리도 요란했다. "천자총통은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느냐?" 사다리 위에서는 병선진무가 안타깝게 외치고 있었다. 격군들이 노를 젓는 1층 갑판에 들어와 있는 것은 이물의 천자총통 두 자루였다. 화포 장이 화약은 간신히 채워넣었지만 아직 대장군전을 화포 부리에 끼우지 는 못하고 있었다. 선실에서 나온 포수 두 명이 낑낑대며 56근짜리 대장 군전을 날랐다. 원래 그건 예비노꾼이 해야 할 일인데, 예비노꾼은 하나 도 없고 노꾼들 전원이 역류에 노를 젓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 쿠웅~ 쿵~ 몇 차례 작은 진동이 판옥선 전체에 차례로 전해져왔다. 격군들이 서 로 얼굴을 마주보았다. 계생과 마당쇠는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이번엔 네 척이여. 네 척! 큰일나뿌렀소!" 계생이 부들부들 떨었다. 마당쇠는 이빨을 딱딱 부딪쳤다. 아까 두 척 을 상대할 때도 한바탕 난리가 났었다. 판옥선이 왜선과 양현을 맞대고 싸우다니 도대체 말이나 될 법한 일인가? 박재석도 통제사가 절대 그런 싸움을 하지 않을 줄 알았다. 그러나 이미 그런 싸움을 한번 했고, 이번 이 두 번째이자 어쩌면 마지막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 빵! 타당! 퍽퍽! 온갖 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려왔다. 왜군들이 판옥선에 기어오르고 있 는 모양이었다. 간간이 비명도 들려왔다. 그러나 성복은 묵묵히 노를 저 을 뿐이었다. - 빠박! 펑! "웜메! 배에 총알이 드와부네!" 박재석 옆에 서서 노를 젓던 계생이 놀라 펄쩍 뛰었다. 노를 꽂는 틈 사이로 총알이 들어와 천장에 박힌 것이다. 화약 냄새가 지독하게 흘러 들어왔다. "우릴 못 보고 쏘는 것이여. 신경 끄더라고. 기냥 계속 젓으랑께!" 성복이 소리를 질렀지만 다른 격군들 사이에서도 동요가 무척 심했다. 전투경험이 많은 다른 격군들이 생각하기에도 격군이 직접 총격을 받은 적은 거의 없었다. "급하다! 몇 명 올라오랍신다이!" 병선진무가 외치자 도노장이 복도 한가운데에 섰다. 뒷 번호의 노들은 같은 번호 좌우변 노가 고물 선실에 서로 가릴 수도 있지만 도노장은 모 든 격군들에게 한가운데에 보였다. "좌우변 8로, 승로!" "우변 8로 승로!" "좌변 8로 승로!" 격군들이 우렁차게 복창한 다음 힘을 합쳐 노씹을 통해 노를 끌어올렸 다. 그리고는 노를 선실 벽 낮은 곳에 난 고리에 끼웠다. 이 판옥선은 노 를 최대한 20개까지 저을 수 있었다. 그러나 격군 인원에 따라 얼마든지 줄일 수 있었다. 젓지 않는 노는 이렇게 배 안으로 끌어들이는 식이다. (*음... 복도쪽 창문 닫으세요. -_-;;) 배와 상황에 따라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앞에서부터 1번, 끝번, 2번 순 으로 노를 뺀다. 여기 울돌목에서의 좌선은 추진력이 아니라 거센 물살 에 버티는 힘이 중요하므로 앞 번호 노는 계속 젓고 뒷 번호를 빼게 된 것이다. "올라가자!" 성복이 노꾼들을 인솔해 사다리를 올라갔다. 봉학은 뭐가 그리 좋은지 활집을 들고 신나게 올라갔다. 박재석은 덜덜 떠는 마당쇠 엉덩이를 억 지로 밀어 올려 올라가게 한 다음 사다리를 탔다. "으아악! 난 못해. 안 가! 안 가꺼여!" 사다리 밑에서 갑자기 계생이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는 노를 잡아 저 었다. 위에서 성복이 죽인다고 협박했지만 소용이 없을 것 같았다. 박재석은 신경 쓰지 않고 사다리를 타고 올라갔다. 이미 올라온 격군 들은 무기를 들고 적과 맞서 싸우는데, 마당쇠는 갑판에 주저앉아 머리 를 다리 사이에 처박고 덜덜 떨기만 했다. 바지춤이 젖은 게 오줌을 싼 듯했다. 박재석은 무기통에 세워진 창을 잡고 군관들 틈을 비집고 들어갔다. 총소리가 요란하고 방패판에 뭐가 마구 튀었다. "이요오~" 시커먼 그림자가 갑자기 바로 앞에 나타났다. 희번득한 것을 내리치는 것 같아 박재석이 냅다 창으로 찔러버렸다. 뭔가 푹 들어가는 느낌이었 다. "끄윽! 끅! 끄어억!" 박재석은 고개를 들고나서 화들짝 놀랐다. 긴칼을 쥔 왜병이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튀어나온 왜병의 눈은 뻘겋게 충혈이 되고, 입술은 부 들부들 떨렸다. 그리고 팔을 돌려 칼을 휘두를 듯 말 듯 움찔거렸다. 그 럴 때마다 박재석은 한쪽 눈만 깜빡깜빡 감았다. "으으! 힘들어. 빨리 죽어라!" 박재석이 창을 잡은 손에 힘이 빠지고 있었다. 사람 몸무게가 창에 몽 땅 실려 있었다. 왜병의 배에서 나온 붉은 피가 창을 타고 이쪽으로 흘 러왔다. "어서 창 버려, 임마!" 솟구쳐 오른 다른 왜병 가슴에 맞대고 활을 쏜 군관이 박재석에게 외 쳤다. 화살에 맞은 왜병은 비명을 지르며 떨어졌고, 군관이 짜증난다는 듯이 박재석을 노려보며 어깨 쪽에서 화살을 뽑았다. 순천감목관 김탁이 었고, 등에 맨 동개에는 화살이 두 발밖에 남지 않았다. 박재석이 창을 놓았다. 창 손잡이가 위로 휙 올라가면서 방패판 뒤로 사라졌다. 박재석은 잠시 손에 잔뜩 묻은 시뻘건 피를 쳐다보며 몸서리 쳤다. "싸우지 않고 뭐해? 너도 저놈처럼 죽을래?" 김탁이 외친 말에 정신을 차린 박재석이 얼른 뒤돌아보았다. 뒷모습을 보이고 있는 키가 큰 장수의 큰칼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런 데 그 앞에는, 마당쇠가 틀림없을 수졸의 목에서 피가 울컥 울컥 솟아나 고 있었다. "마당쇠를! 통제사가!" 그 순간에 통제사가 고개를 홱 돌려 박재석과 눈이 마주쳤다. 통제사 눈에서 시퍼런 불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박재석은 잠시 온몸이 굳어 버렸다. 박재석은 통제사가 너무 무서웠다. 그러나 이대로 있으면 마당쇠처럼 되고 말 것이 분명했다. 저놈 주인은 평생 사삿집 종으로 살게 될 줄 알 고 마당쇠라는 평범한 이름을 줬을 것이다. 그러나 전쟁터에서 적군도 아닌 아군, 그것도 통제사 칼에 맞아 죽게 될 것이라고 상상이라도 했을 까? 여기서 마당쇠는 주로 마당을 쓰는 머슴이라고 알기 쉽다. 그런데 현 대의 인도 중남부 인들과 스리랑카 등의 타밀족이 쓰는 드라비다어에서 마당구는 머슴을 둔다는 뜻이다. 마당극에 등장하는 창기 초란이는 드라 비다어의 출란, 즉 창녀와 잘 대응되고, 밀가루란 뜻의 빈디는 우리말 빈 대떡과 잘 연결된다. 기타 많은 어휘가 우리말과 직접적으로 대응되는데, 단순히 가야어와 드라비다어와의 대응인지, 아니면 그 전의 공통조어가 분산되고 남은 잔해인지는 연구가 더 진행되어야 알 수 있다. 박재석은 이를 악물고 힘겹게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방망이를 집어들 고 돌아왔다. 마당쇠의 죽음보다는 통제사에게 더 놀란 박재석이 숨을 헐떡거릴 사이도 없이 왜군들은 끝없이 악을 쓰며 올라왔다. 미처 화살 을 장전하지 못한 김탁 앞으로 왜군이 날아들었다. 등에 멘 깃발이 펄럭 거렸다. "야압! 죽어!" 두 번 때릴 기회는 없었다. 공중에서 중심을 잃은 왜병은 방패판 끝에 발을 디딘 채 뒤로 팔을 몇 번 돌리더니 그대로 나가 떨어져버렸다. 총 소리와 함성 사이로 풍덩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 직후에 다시 방패판 사이로 손이 올려졌다. 박재석은 몽둥이로 찍 어버렸다. 피가 튀고 그 손은 금세 사라져버렸다. 5. 하타 노부도키 전사 (2) = 해남현 방향 언덕, 표헌 역관 표헌은 중국인 관헌과 호위병들을 따라 열심히 언덕 위로 올라갔 다. 별로 높은 언덕도 아닌데 워낙 가팔라서 오르기가 쉽지 않았다. 40이 훌쩍 넘은 나이 탓도 있었다. 차가운 바닷바람이 불었지만 이마와 등줄 기에서는 진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뒤로 함성과 조총 소리가 시끄럽게 계속 울리는데 중국인들은 무섭지 도 않은지 언덕 끝까지 오를 기세였다. 바다를 내려다보며 시끄럽게 울 부짖는 피난민들 사이를 지나 표헌은 간신히 꼭대기에 올랐다. 중국인이 땅바닥에 앉더니 부채를 꺼내 부쳤다. "허허! 다행히 아주 늦지는 않았구만." "다행입니다, 양 대인 나리." 표헌은 숨을 고르면서도 중국인에게 공손하게 대답했다. 양 대인이라 불린 중국인은 나이 30 정도에 배짱이 두둑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야불수夜不收 양보楊甫, 이 중국인의 벼슬과 이름이었다. 그러나 명나 라 군대 고위급 관리나 장수의 특별연락관 또는 정탐수를 뜻하는 야불수 가 정식 관직명인지 아니면 임시로 맡은 임무인지 아직 제대로 알지 못 했다. 한자로 手나 守가 아니라 收를 쓰는지는 최근에 알았다. 그리고 양 보라는 이름에서 보甫도 당나라 시인 두보杜甫처럼 남자의 미칭, 즉 아 무개란 뜻에 불과했다. 야불수가 왜선 네 척과 맞붙어 싸우는 판옥선에서 수帥자 기를 발견하 고 잠시 놀란 표정을 지었다. 자욱한 연기 사이로 언뜻 보이는 검은 깃 발은 표헌이 알기에도 분명 통제사 배의 깃발이었다. "저건 조선 수병水兵대장의 배가 아니냐? 역시 듣던 대로 이 총병이 선봉에서 용감하게 잘 싸우는구먼. 허허!" "이 총병이요? 아!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 말씀이시군요. 예! 예. 배신 겸 수군총병입니다, 양 대인 나리." 양보가 눈살을 찌푸리자 표헌이 사죄하며 연신 굽신거렸다. 중국인들 은 조선 장수들의 벼슬을 중국에 맞춰 바꿔 부르는 것이 보통이었다. 물 론 서너 등급씩 낮추는 것도 잊지 않았다. 겨우 1, 2천명 거느린 유격이나 부총병도 조선 임금과 마주앉고 심지 어 상석을 차지하는 중국군이었다. 군량 운송이 늦다고 조선관리를 잡아 다 곤장을 치고, 명령을 듣지 않는다고 조선장수들 목을 베겠다고 날뛰 는 명나라 장수들이었다. 심지어 마음에 안 드는 조선 장수 목에 줄을 매달아 끌고 다니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임진년부터 명나라 장수들에게 워낙 강한 인상을 심 어줬는지, 명나라 장수들은 이순신을 보통 병사 3천에서 1만명 정도를 거느리는 총병으로 불렸다. 제후국의 신하를 이르는 배신陪臣치고는 엄 청난 대우를 한 셈이다. "왜 우는 거냐?" 야불수는 옆에 피난민들이 흐느끼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표헌 은 몰라서 묻느냐고 반문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고, 또한 적당히 둘 러댈 말도 없었다. 왜선들에 포위된 통제사의 배는 자욱한 연기에 가려 지금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허허! 불리한 싸움이다, 이거냐? 그래. 다른 배들은 다 도망가고 대장 혼자서 싸우고 있으니까 울만도 하겠구나. 그러나 싸움은 끝까지 해봐야 알 수 있지." 야불수는 호쾌한 척하는지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표헌은 알고 있 었다. 명나라 군대는 초조하게 이번 조선수군과 일본수군의 싸움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물론 여기서 조선수군이 당연히 패하리라는 것도 예상 했다. 표헌이 지난 몇 달 간 명나라 진영에서 통역을 하면서 눈치를 보니 명 나라 본국에서는 당장 대군을 조선에 파병할 뜻은 전혀 없는 것 같았다. 조선 조정에서 사신들을 끊임없이 파견해 눈물로 호소해도 소용이 없었 다. 지금 서울에 있는 기껏 몇 천의 명군으로는 10만이 넘는 왜군을 막 을 수 없다는 것쯤은 누구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명나라는 조선의 멸망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명나라 입장에서는 당장 북경에 불똥이 튈 판이었다. 즉 일본수군이 서해안으로 들어오면 명나라는 당장 북경 지키기도 급급한 것이다. 50년 전에 겨우 몇천의 해적도 막기에 급급했는데 한꺼번에 정예 왜군 수십 만이 배를 타고 북경으로 향한다면? 그건 명나라의 멸망을 뜻했다. 지금 명나라 조정에서 난리가 났다는 것은 표헌도 대강 눈치채고 있었 다. 칠천량에서 조선수군이 전멸하자 명나라 조정은 당장 계엄에 들어갔 다. 북경 인근 지방의 모든 병력을 동원해 해안지대에 투입하고 있었다. 수군도 어느 정도 모았지만 일본수군에 상대가 될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 은 아무도 없었다. 절강병법을 창시하고 절강, 복건의 왜적을 몰아낸 것 으로 유명한 척계광도 물이 아니라 주로 육지에서 싸워 이긴 사람이었 다. 그래서 조선에 주둔중인 명군은 후퇴할 시점을 찾고 있었다. 조만간 왜 수군이 서해안으로 돌아 서울로 들이칠 것이고, 그럼 싸움이 어렵다 는 핑계로 조선에서 물러서려는 것이 명나라의 속셈이었다. 결국 조선수 군의 확실한 패배 시기가 명군이 언제 조선 땅에서 퇴각하느냐를 결정하 는 요인이었고, 그건 바로 오늘이었다. "자네 표 역관 아닌가? 참! 지사역원사知司譯院事로 출세했다지?" 약간 역겨운 목소리에 표헌이 고개를 돌렸다. 비쩍 말랐지만 단단해 보이는 중년이 날카로운 눈매의 젊은이 세 명과 함께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특이하게도 청포를 입고 허리에는 환도를 차고 있었다. 표헌이 당장 땅에 엎드렸다. "어이구~ 대감마님께서 어인 일로 이곳까지 행차하셨나이까?" 야불수와 명나라 병사들은 갑작스런 사내들의 등장에 호기심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경리나 군문 등 조선에 파견된 명나라 최고 관리들의 통 역을 맡으면서 웬만한 조선 벼슬아치들은 우습게 보던 표헌이 황망히 엎 드려 절을 하고 몸이 마치 사시나무 떠는 듯하니 신기한 구경거리였던 셈이다. "일어서게. 오랜만에 보는구먼." 표헌이 주춤거리며 일어났지만 머리는 계속 조아린 채였다. 표헌은 잽 싸게 머리를 굴렸다. 김양보가 어명을 받들어 이 싸움의 결과를 확인하 러 온 것이 분명했다. 다른 내시도 아니고 김양보를 파견한 만큼 이 싸 움을 임금도 중요하게 여긴다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자기 이름이 어전에 들어갈 수도 있겠고, 김양보에게 잘 보이면 잘하면 좋은 벼슬 하나 차지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조선이 망하지 않아야 하겠지만, 나중에 어찌 됐건 일단 벼슬이 높아서 나쁠 건 없었다. 표헌이 고개를 슬쩍 들어 눈치를 살폈다. 김양보는 야불수 앞에서 가 슴을 활짝 펴며 당당하게 서 있었다. 김양보 뒤에는 호위 무사들처럼 주 변에 날카로운 시선을 던지는 세 사람이 있었는데, 명나라 병사들 앞에 서도 기가 죽지 않는 게 다른 조선 관리나 장수들과 전혀 다른 자부심이 엿보였다. 김양보가 입을 열었다. "소신은 배신 겸 내수사 부제조 김양보라 하오." 표헌이 야불수에게 김양보를 조선의 시랑이라고 소개했다. 임금을 곁 에서 모시고 조선 조정에서 엄청난 권력을 휘두른다는 사실도 빠뜨리지 않았다. 당하관이 장관인 중앙관서의 상징적 수장이 도제조, 또는 제조이며 일 반적으로 정승이나 판서가 겸한다. 부제조는 통상 정3품 당상관이 맡지 만 김양보는 이미 판서와 같은 급인 정2품에 이르고 있었다. 일전에 정 여립 일당을 체포하고 몽진 중인 임금을 호종하는 등 공을 여러 번 세워 가자가 거듭되었기 때문이다. 김양보는 나중에 호종공신 3등에 이른다. 야불수는 상대가 대단한 벼슬아치라는 말을 듣고 자리를 털고 일어섰 다. 당시 조선인이 품계를 서너 등급 깎아도 명나라 관헌보다 높으면 서 로 맞절을 하거나 읍을 하고, 명나라 관헌이 조금이라도 높거나 같으면 조선 관리가 절을 하게 되어 있었다. 물론 조선을 깔보는 명나라 관헌은 애써 조선 관리를 무시하지만, 야불수 양보는 표헌이 보기에 기본적인 양식이 충분히 있는 사람이었다. "자리가 누추하오니 두 분께서는 서로 간단히 읍만 하시지요." 중간에서 표헌이 야불수와 김양보에게 조, 명 관원으로서의 상견례 의 식을 제의했다. 김양보는 약간 자존심이 상한 표정이었으나 이내 두 손 을 맞잡고 들어올렸다. 그러나 야불수는 갑자기 손을 내리더니 인상을 찌푸렸다. "여보게, 통사. 이 사람들 출신이 뭔가?" 야불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김양보를 살피다가 문득 표헌에게 물었 다. 네 사람이 모두 성인 남자의 상징이랄 수 있는 수염이 없음을 알아 차린 것이다. 야불수의 의문이 뜻한 바를 알고 있는 표헌이 공손하게 김양보는 명나 라 식으로 하면 태감이라고 통역했다. 김양보는 궁궐에서 기거하며 임금 을 모시는 장번내관長番內官이며 무예를 배운 시위내관 중에서도 높은 자리에 있었던 것이다. 표헌은 야불수가 깜짝 놀랄 것이라 기대했다. 당 시 명나라에서는 내시 출신인 태감들의 권세가 대단했기 때문이다. 명나라에서는 후기로 갈수록 태감이 조정에 공납물 일정액을 납부하고 대신 한 지방의 조세 수취권을 받은 경우가 많았다. 지방관들의 인사권 도 이들에게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명나라 후기에는 태감들의 수탈이 상상을 불허할 정도로 심했다. 일반적으로 명나라가 여진족과의 전쟁에서 무력에 진 것으로만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태감들의 발호와 착취로 경제가 피폐하여 군사력 동원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한 것도 중요 한 패배 요인이었다. 그리고 태감들은 조선에 사신이나 책봉사로 빈번하게 왕래했다. 임진 왜란 이후에는 이들이 광해군과 인조 등 정통성에 문제가 있는 조선 왕 들의 약점을 물고 늘어져 엄청난 양의 은과 인삼을 뜯어내기도 했다. 그 소문이 태감들 사이에 퍼지자 명나라 황실에 은 수만 냥을 바치고 갖가 지 명목으로 자진해서 조선에 온 경우도 잦았고, 밑천을 들인 만큼 갖은 구실을 들어 그 몇 배의 은을 수탈해간 것도 당연했다. 광해군 2년에 태 감 염등은 남대문에 올라가서 조칙을 받들 때 은으로 사다리를 만들게 하여 이것을 가졌다. 이후 계속된 태감들의 행차에서 조선은 나라가 휘 청거릴 정도로 수탈에 시달려야 했다. 당시 조선에는 임진왜란 때 군대를 파병한 명나라에 은혜를 갚아야 한 다는 생각이 재조지은再造之恩이란 이름으로 널리 퍼져 있었다. 조선이 명나라에게서 입은 은혜가 나라를 다시 세운 은혜에 비할 만하다는 뜻이 다. 그런 조선이 명청 교체기의 예민한 때에 뜻밖에 중립외교를 시도한 것에는 조선에 와서 지긋지긋할 정도로 은을 수탈해간 명나라 태감들에 대한 불만도 어느 정도 작용했다고 할 수 있다. 명 초에 대규모 함대를 거느리고 남해원정을 떠난 정화도 내시 출신이 다. 이후 원정이 계속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이렇게 내시들이 중요한 역 할을 한 때도 많았다. 그러나 1449년에 몽골군 2만과 싸우다가 명군 50 만이 전멸하고 황제 영종이 끌려간 토목보의 변은, 당시 원정을 영종에 게 건의한 태감 왕진이 작전권마저 쥐고 흔들었기 때문에 일어난 참변이 었다. (*으... 설명이 깁니다. 광해, 인조조의 태감 관련 글은 삭제할까요?) "아니! 그럼 이 자가 환자宦者란 말인가?" 갑자기 야불수의 목청이 높아졌다. 손가락질까지 하자 표헌은 화들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슬쩍 김양보를 보니 중국말을 통역해주지 않아도 이미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양 대인 나으리. 이 분은 벼슬이 아주 높은 데다가 직접 왕명을 받들 고 온 분입니다. 제발 예의를 지켜주십시오. 이러시면 제가 곤란해집니 다." 표헌이 몇 번이나 머리를 조아리면서 야불수에게 간절히 부탁했다. 표 헌이 역관으로 나서는 경우는 명나라의 최고 관리에 대해서일 뿐이었다. 그런데 표헌이 이번에 야불수를 따라온 것은 그만큼 이번 야불수의 임무 가 무척 중요하다는 뜻이었다. 그런 표헌이 이 정도로 간절히 부탁한다 면 곤란한 사정을 야불수도 충분히 알텐데, 야불수에게서 돌아온 것은 차가운 냉대와 적대감일 뿐이었다. "나는 고자한테는 읍을 못해! 저리 꺼지라고 해! 토색질이나 일삼고 나라 망하게 하는 것들! 사내구실 못한다고 그게 다 변명이 될 줄 알 아?" 표헌은 이 말은 도저히 통역하고 싶지 않았다. 표헌은 눈앞이 캄캄했 다. 그런데 이때 명나라 호위병들이 야불수 앞을 가로막고 나서며 내관 들을 창으로 위협해 물러서게 했다. 젊은 내관들이 차갑게 쏘아보며 칼자루에 손을 댔다. 여차하면 명나라 군사들과 조선 내시들이 한바탕 싸움을 일으킬 태세였다. 그러나 야불수는 삿대질을 하면서 욕설을 계속 퍼부었다. 참다못한 김 양보가 뭔가 결단을 하려는 순간이었다. "아이고! 대감! 제발 살려주십시오!" 표헌이 울부짖었다. 임금을 가까이 모시는 시위내시라면 무예도 고강 할 게 분명했다. 젊은 내관들의 차분하고 날카로운 눈초리가 이를 입증 했다. 자칫하면 명나라 관헌들이 화를 입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미치자 표헌은 몸을 날려 김양보의 신발을 붙잡고 눈물을 뿌렸다. 이런 참극이 생겼다고 명나라 군문이나 조선 조정에 보고되면 표헌이 살아남을 길이 없었다. "대감! 양 대인이 명나라에 있을 때 어느 못된 태감한테 여동생을 빼 앗겼다고 합니다. 원수를 진 것은 명나라 태감이지만 대감께도 감정이 좋지 못할 것입니다. 부탁입니다, 대감! 나라를 먼저 생각해 주십시오!" 그 사이에도 야불수는 내시들을 향해 끝없이 저주를 퍼부었다. 피난민 들이 웅성거리며 이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표헌은 창피한 것은 둘째 문제였다. "여기서 일을 그르치면 대감께서 무슨 면목으로 주상전하를 다시 뵐 수 있겠습니까? 제발 참으십시오! 주상전하를 위하는 길입니다. 죄는 나 중에 제가 달게 받겠사옵니다!" 표헌이 어깨를 들썩거리면서 울었다. 뜨거운 눈물이 김양보의 신발을 축축하게 적시자 김양보가 한 걸음 물러섰다. 김양보는 야불수를 잠시 노려보더니 홱 돌려 동쪽으로 걸어가 버렸다. 시위내시들이 김양보를 따 라가며 가끔 고개를 돌려 중국 군인들에게 인상을 썼다. 그들의 등을 향 해 야불수의 저주가 날아가 꽂혔다. "꺼져! 변태새끼들아! 돈만 밝히는 악귀들아!" = 다카도라 함대 어립선, 엔메이 "선두 구루지마군 고전 중!" 포성과 총성만 이따금 들리는 다카도라의 본진함대에 전령의 보고가 날아들었다. 이제는 연기가 자욱해 망루 위에서도 해협 안쪽 상황이 전 혀 보이지 않았다. "힘들다고?" 다카도라가 다시 한번 전령에게 물었다. 엔메이도 눈살을 찌푸렸다. 당 장이라도 이순신의 목을 베겠다고 달려든 미치후사의 패기를 생각하면, 그럴 리가 없었다. 적어도 대등한 전투는 보여주어야 될텐데, 예상과는 다른 전개에 엔메이도 놀랐다. "제가 보기에도 힘든 싸움을 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쪽은 열 몇 척을 잃었지만 적은 단 한 척도 잃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무슨 생각인지 적은 모든 배를 뒤로 물린 채 어립선 한 척만 싸우고 있다 합니다." "심하군!" 다카도라가 자기도 모르게 내뱉었다. 엔메이도 조선수군이 강한 것이 야 익히 알고 있었다. 엔메이는 다카도라도 몇 차례나 겪은 패배를 통해 그것을 뼛속 깊이 느끼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렇 게 일방적인 수적 우세임에도 쉽게 조선수군을 제압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이건 의외로 시간이 걸릴지도 모르겠습니다." 엔메이가 낮게 입을 열었다. 걱정되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런 식으로 계속 몰아붙이면 승리는 일본의 것이 아니겠냐는, 일종의 위로였다. 그러 면서도 엔메이는 이순신의 위명이 새삼 실감나게 다가왔다. 장수나 병사 들 사이에 이순신에 대한 공포심이 다시 무섭게 올라올 것이다. 엔메이 는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사람이지만 이순신이 혹시 귀신이나 괴물의 형 상을 하고 있지는 않을까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임진년에 진주성대첩을 이끈 진주목사 김시민은 일본에서 모쿠소 장군 이라 불렸다. 직책인 목사를 사람 이름으로 잘못 안 것이다. 그리고 엄청 나게 힘이 세고 도깨비처럼 무섭게 생긴 그 조선 장수가 혼자서 일본군 을 수도 없이 도륙한 것으로 알려졌다. 다음해에 일본군들은 복수를 결의하고 진주성을 끝내 함락시키고 성민 을 몰살시킨다. 그리고 목을 여럿 베어 그 중에 하나가 모쿠소 장군의 목이라 하여 도요토미에게 바친다. 그리고 이는 가부키로 만들어져 한때 일본에서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진주성 함락 당시 김시민은 이 미 죽고 없었다. 김시민 장군은 1차 진주성전투가 끝나기 직전에 이마에 적탄을 맞고 며칠 동안 병석에 누웠다가 죽은 것이다. "어떻게 된 거요? 군량은 제대로 가지고 갈 수 있는 거요?" 돌아가는 상황이 조금 이상해지자 군감 모리 다카마사가 신경질적으로 다카도라를 쏘아보았다. 회의에서도 나온 이야기지만 지금 일본수군에게 급한 것은 싸움이 아니었다. 당장 한성에 가깝게 도달한 육군에게 군량 과 물자를 보급하는 게 중요했다. 싸움은 다만 이 과정에서 장애물을 제 거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좀 더 지켜봐 주시오." 다카도라는 차분하게 군감을 달랬다. 그러나 모리 다카마사는 쉽게 가 라앉지 않았다. "미치후사 님은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거요? 좀 전까지는 당장이라도 조선수군을 눌러 버릴 수 있다고 말하지 않았소!" "글쎄, 조금만 있어 보시오." "만일 지금 하치스카 이에마사 님이 가지고 온 양식이 제대로 도착하 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 줄 아시겠죠? 다카도라 님?" "물론 알고 있소." 다카도라가 자신감이 넘치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엔메이는 다카도라가 큰소리치는 것을 빙긋 웃으며 지켜보았다. 다카도라는 속내와 달리 연기 는 잘하는 편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화약과 탄약이 없으면 제대로 싸우기 어렵다는 것. 그리고 싸우기 위 해서는 우선 먹어야 한다는 것. 모두 잘 알고 있었다. 엔메이는 분로쿠노 에키(文綠の役:1592~1596년의 임진왜란을 일본에서 일컫는 말)때 제대로 보급을 받지 못하고 싸우던 일본군에 닥친 참상을 떠올렸다. 조선을 공격한 일본군 가운데 가장 맹장이라 일컬어지는 인물은 뭐니 뭐니해도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政였다.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와 함께 각각 제1군과 제2군으로 선봉을 맡아 싸우던 그는, 선조도 그 이름을 기 억할 정도였다. 용맹한 만큼 악명도 높아 조선 쪽 민담이나 일화에서 포 악한 적장으로 자주 나왔다. 그러나 그건 조선 쪽의 입장일 뿐이다. 일본 에서 볼 때 가토 기요마사는 충의에 가득 찬 용장이었고 싸움에도 아주 능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런 기요마사도 함경도를 점령하는 데는 실패했다. 일단 기세 좋게 공격해 일시적으로 공략하는 데는 성공했다. 하지만 그것이 1592년 11월 이었다. 다음해 2월까지의 혹한 동안 이 점령지에서 버티던 기요마사는 심각한 절망을 맛봐야 했다. 혹한과 굶주림에 얼어죽고 굶어죽는 병사들 이 속출했고 아예 도망쳐 버리는 자도 있었다. 거기다 함경도 점령을 위 해 작은 성에 분산해 주둔시킨 병력이 의병의 습격을 받고 성을 빼앗기 는 일까지 발생했다. 본국에 연락해 군수물자의 보급을 요청했지만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수군은 연패했고 육상에서도 의병의 저항으로 인해 한양까지도 제대로 물자가 전해지지 않았다. 마침 히데요시의 소환명령이 있자 기요마사는 병력을 돌려 철수하고 말았다. 이때 전해진 일화가 있었다. 경상도 밀양에서 일본으로 가기 위해 대 기하고 있던 기요마사에게 도다 가쓰다카라는 자가 찾아왔다. 이미 휴전 협상이 맺어진 후였고 십리사방에 조선군은 없었다. 때문에 가쓰다카는 평상복 차림이었다. 그런데 그를 마중한 기요마사와 병사들의 차림은 전 혀 틀렸다. 모두 갑옷과 무기를 갖추었으며 기요마사는 투구를 쓰고 말 을 탄 채였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이상했지만 중요한 것은 그 다음이 었다. 본진에 도착한 기요마사가 허리에 차고 있던 요대를 풀어놓았다. 그 안에서 나온 것은 쌀과 된장이었다. 이유를 묻는 가쓰다카에게 기요마사 는 '대장된 자로서 한치라도 방심하는 것은 금물'이라 대답했다. 그러나 엔메이가 생각하기에 그건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싸워야 했던 비참한 상 황 때문이었다. 언제 다시 그런 상황이 올지 모른다는 초조한 마음이 그 렇게 대비하도록 만들고 있는 것이다. 또 다른 이야기도 있었다. 히데요시가 가장 신임하는 부교, 즉 행정관 인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가 일본에 돌아온 기요마사를 찾아왔다. 그 리고는 당시 히데요시의 관직명인 다이코가 개최하는 꽃놀이에 기요마사 를 초대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자 기요마사는 어이가 없다는 듯 잠시 미쓰나리를 쳐다보다가 가겠다고 답했다. 그러면서 혼잣말처럼 내뱉었다. "적어도 피죽은 나오겠군." 조선에서 제대로 먹지도 못하며 싸우는 사람은 상관없이 오사카에선 꽃놀이나 각종 한가한 유희가 벌어졌다. 그걸 들은 기요마사는 도저히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아직은 겨우 싸움이 시작된 정도입니다, 다카마사 님. 벌써부터 그렇 게 염려하실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엔메이가 옆에서 끼여들어 다카마사를 달랬다. 그러자 다카도라도 엔 메이를 거들었다. "잘 알고 있소. 무슨 일이 있어도 해낼 결심이니 안심하시오, 다카마사 님." "알고 계시다면 더 이상 말하진 않겠소." 잠시 다카도라를 쳐다보던 군감 다카마사가 고개를 돌렸다. 그도 더 이상 재촉하는 모습을 보이는 건 싫은 듯했다. 잠잠해진 다카마사에게서 고개를 돌린 다카도라가 엔메이를 불렀다. "엔메이. 아무래도 자네가 직접 가줘야겠다." "제가 말입니까?" "사번과 함께 선두로 가라. 가서 와키자카 야스하루 님에게 전해라. 구 루지마 군이 위험하면 즉시 도우라고." "알겠습니다." 엔메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더 말한 것이 있지 않냐는 듯이 다카도라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또 한가지, 미치후사 님에게 전해라. 목숨을 걸 필요는 없다 고. 어렵다고 생각되면 언제든 뒤로 물러서라고 말이다." "글쎄요. 명령대로 전하겠습니다만 미치후사 님이 그 명령을 들을 지 는 의문입니다." 미치후사에게 전하라는 말에 이르러서 엔메이는 회의적이 되었다. 엔 메이가 먼저 다카도라에게 원한 명령인데도 다시 생각해보니 자신이 없 었다. "알고 있다. 하지만 반드시 전해라. 이 시점에서 미치후사 님이 행여 부상이라도 입는 일이 있어선 안 된다." "잘 알겠습니다." 다카도라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간단했다. 배나 병사를 약간 잃는 것 쯤이야 정말 가벼운 문제다. 싸움이 끝난 다음 나중에 얼마든지 보충하 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을 이끌고 있는 무장이 다치기라도 하면 전 체적인 사기에 큰 영향을 미친다. 엔메이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혼자서 가는 건 위험하다. 지켜줄 사람을 데리고 가라."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는 선두로 가는 일이었다. 다카도라는 그 위험에 대한 배려를 잊지 않았다. "염려, 감사합니다." 인사를 마친 엔메이는 즉시 그 자리를 물러났다. 전령이 탄 고바야가 그를 위해 대기하고 있었다. 엔메이는 잠시 누굴 데리고 갈까 생각했다. 잠시후 그의 뇌리에 커다란 오오쓰쓰를 들고 설치던 젊은 병사 한 명이 스쳤다. = 다카도라 함대 어립선, 겐타로 "뭐야? 이건?" 막상 싸움은 시작됐지만 지금은 전혀 할 일이 없었다. 앞으로도 할 일 이 없을 것이 뻔했다. 제대로 머리가 있는 사람이라면 이 싸움이 곧 끝 날 것은 너무나 분명했다. 총대장의 어립선에 있다는 것이 결코 좋은 게 아니란 걸 겐타로는 깨 달았다. 목숨이야 안전하겠지만 싸울 기회가 전혀 없는 것이다. 이래서야 모처럼 산 오오쓰쓰도 전혀 의미가 없었다. 겐타로가 벌컥 짜증을 냈다. "싸움도 못하고 이게 뭐야!" "이봐! 좀 조용히 해!" "뭐야?" 다른 쪽에 모여있던 아시가루 가운데 한 명이 소리쳤다. 그러자 겐타 로는 신경질적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답답한 건 겐타로만이 아니었다. 싸 움을 기다리는 병사든, 죽음이 두려워 속으로 떨고 있는 병사든 모두 신 경이 잔뜩 날카로워져 있었다. "겨우 잡병 주제에 혼자 싸움 다하는 것처럼 큰소리 치지마!" 겐타로에게 소리친 자는 정규 아시가루였다. 아마 요코야마橫山란 이 름이었던가? 겐타로는 아시가루 사이에서 대장노릇을 하던 이 거구의 이 름을 기억해 냈다. 여태까지는 별 신경도 안 썼고 다만 뭔가 재수 없다 고 생각해 무시하고 있었다. 겐타로는 비로소 눈을 들어 요코야마를 자세히 보았다. 몸집도 크고 힘도 있어 보였다. 겐타로도 나름대로는 힘깨나 쓴다고 자부했지만 전혀 급수가 틀렸다. 상대는 엄청난 체격을 한 거한이었다. 일본에서 한 때는 스모 선수였다고 자랑하듯 떠버리는 것도 들었다. 요코야마 뒤에는 다른 아시가루 병사들이 한 덩어리를 이루어 서 있었 다. 거한을 앞장세우고 자기들은 안전한 뒤에서 남을 욕하려는 것이다. 설령 여기서 겐타로와 거한의 싸움이 벌어진다 해도 그들은 지켜보기만 하면 된다. "그래서? 내가 잡병이고 그쪽이 아시가루니까 잠자코 있어라?" 겐타로는 말하면서 오오쓰쓰와 각종 주머니들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당연한 소리! 돈이나 먹을 걸 바라고 온 네놈과 우리들이 같은 처지 인 줄 알아?" 요코야마가 멸시가 가득 담긴 눈초리로 겐타로를 쏘아보았다. (*부록에 수록 예정) 전국시대 초기에 일본은 병농일치兵農一致의 군사제도를 채택하고 있 었다. 평상시에는 영지의 백성들을 농사일에 종사시키고 싸움이 시작되 면 동원하는 방식이었다. 이렇게 영지에서 직접 동원된 병사를 아시가루 足輕라고 불렀다. 그런데 전국시대 말기에 들어 점차 싸움이 장기화하고 일상화되면서 그런 동원방식은 여러 가지 문제점을 드러냈다. 이때 일본의 패자가 된 오다 노부나가는 병농분리兵農分離를 진행했 다. 농민은 철저하게 농사에 전념하게 하고 대신 유랑민이나 낭인들을 돈으로 고용했다. 이들은 가난을 이기지 못하고 떠돌아다니거나 출세욕 에 불타는 부류였다. 적은 돈이나 양식만 주면 쉽게 모집이 가능했다. 이 들은 아시가루와 구별되는 명칭으로 잡병雜兵이라 불렸다. 전투력만 놓고 본다면 분명 잡병은 도저히 아시가루의 상대가 되지 못 했다. 각 마을 단위로 단단히 결속돼 있는 아시가루는 만약 전투에서 먼 저 도망가면 돌아와서 '저놈이 먼저 도망쳤어.' 라는 손가락질을 받으며 치욕을 겪어야 한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도망가지도 못하고 용감히 싸 우게 된다. 하지만 그런 것이 없는 잡병은 불리하면 서슴없이 도망친다. 사는 곳이 일정치 않기에 특별히 영지를 지켜야 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 한다. 그러나 잡병은 항상 싸울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또한 아시가루는 만 약 전사하면 그 가족에 대한 보상도 해 줘야 한다. 잡병은 그런 것도 필 요 없다. 이것이 가장 큰 장점이었다. 아시가루는 아무리 강해도 결국은 농민이었다. 농번기에 농지로 돌려 보내지 못하면 영주는 당장 수입에 큰 지장이 생긴다. 그렇다고 아시가 루를 돌려보내면 당장 지켜야 할 성은 비고 만다. 잡병이라 해도 거의 비어있는 성을 점령할 수는 있다. 결국 괴롭게도 아시가루를 잡아두며 버티게 된다. 그러나 한두 번이면 몰라도 이렇게 몇 년을 걸쳐 싸운다면 어느 영주든 두손들고 만다. 바로 이런 전법으로 오다 노부나가는 일본의 패자로 군림했다. 그 뒤 를 이은 토요토미 히데요시도 당연히 이 병농분리 체제를 계승했다. 그 렇지만 병농분리는 막대한 돈이 들기에 마음만 먹는다고 어느 영주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때문에 대개 아시가루와 잡병은 섞여서 편성되었 다. 대대로 영주의 땅에서 자라 충성해온 영민인 아시가루 병사와 아무 데 서나 떠돌던 유랑민이 돈에 고용된 잡병. 둘 사이에는 당연히 상당한 반 목과 충돌이 있었다. "돼지 같이 살만 디룩디룩 찐 녀석이!" 겐타로는 즉각 요코야마에게 달려들었다. 겐타로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거한이지만 개의치 않았다. 꽉 쥔 주먹이 상대의 얼굴을 후려갈겼다. "어라? 이것도 주먹이라고 갖고 다니는 거냐?" 요코야마는 분명 주먹에 맞았음에도 약간 얼굴을 돌렸을 뿐 꿈쩍도 하 지 않았다. 마치 일부러 맞아준 듯했다. 비웃는 목소리가 다시 새어나왔 다. "자, 어디." 요코야마의 손이 잽싸게 겐타로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거대한 몸집과 달리 동작은 엄청나게 빨랐다. 겐타로는 이 자가 진짜로 스모 선수 출신 이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팔뚝은 겐타로의 허벅지만큼 굵었 다. 억센 그 힘에 겐타로는 숨이 막혀왔다. 그러나 내색은 하지 않았다. "이번엔 내가 한대 쳐줄까?" 맷돌처럼 커다란 주먹 하나가 눈앞에 보였다. 그리고 뒤에서 비웃는 아시가루들이 보였다. 겐타로는 순간 자기편이 아무도 없다는 절망감에 휩싸였다. 따지고 보면 이 안에는 분명 다른 잡병들이 있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애써 이쪽을 외면하고 있었다. 자기 신분에 대한 체념과 함께 아 시가루들의 결집된 힘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제길!" 겐타로는 힘을 모아 발로 상대의 낭심을 걷어찼다. "윽!" 낮은 신음을 지르며 요코야마는 겐타로를 놓았다. 그리고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무릎을 꿇었다. 겐타로가 급히 칼집을 잡고 칼을 빼들었 다. 창문으로 희미하게 들어오는 햇빛에 칼날이 섬뜩하게 빛났다. 반면 겐타로는 어둠 속에 있어서 입술이 움직이자 마치 잔혹하게 웃는 듯했 다. "죽고 싶으면 덤벼라!" 비록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더 이상 물러서고 싶지 않았다. 거 한의 말에 약간의 일리는 있었다. 끝까지 몰린 삶이었다. 선택할 여지도 없이 돈과 먹을 것을 준다는 말에 지원했고, 이렇게 잡병이 되었다. "적어도 한 놈은 내 칼에 죽는다!" 그때는 적어도 단 한 명, 목숨까지 나눌 수 있는 친구가 있었건만... 지 금은 아니다. 모두가 적이다. 겐타로는 요코야마만이 아니라 뒤에 있는 아시가루 전체를 노려보았다. 단순한 주먹다툼만을 생각했다가 겐타로가 칼을 뽑아들자 그들은 심각한 표정으로 변했다. "먼저 죽을 놈이 누구냐? 나와라! 네 놈들이 싫어하는 잡병 손에 어디 한번 죽어볼 녀석?" "이 녀석이 정말로 죽고 싶은가 보군!" 낭심을 움켜잡던 요코야마가 무서운 표정으로 칼을 뽑았다. 근육으로 덮인 몸이 씰룩이며 경련을 일으켰다. 둘 중 누가 죽든지 끝장을 보자는 태도였다. "와라! 돼지녀석!" 겐타로가 요코야마의 미간을 향해 칼을 겨누었다. 순간 슌스케의 이름 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함께 고생하며 같이 웃던 그는 지금 어떻게 되었 을까? 조선에 수군으로 가면 무조건 죽는다는 말처럼 이미 죽었을까? 슌스케의 소식은 아무한테서도 들을 수 없었다. "이얍!" 요코야마가 괴성을 지르며 칼을 머리 위로 치켜들었다. 겐타로는 무릎 을 약간 구부렸다. 죽을 망정 더 이상 업신여김을 받고 싶지는 않다. 그 래. 단숨에 끝내자. 누가 죽든지 단숨에 끝내는 거다! 겐타로는 마음속으 로 각오를 굳혔다. "아미타부츠..." 그때였다. 위쪽 갑판으로 향한 문이 열리며 건장한 스님 한 분이 들어 왔다. "에, 엔메이 님!" 거한도 겐타로도 싸우려던 그 자세 그대로 굳어버렸다. = 구루지마군 젠군前軍, 하타 노부도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밀어붙여!" 노부도키는 치열하게 벌어지는 접전을 맞아 고함을 버럭 질렀다. 그가 보는 앞에서 판옥선은 마지막 저항을 하고 있었다. 거리가 좁혀 지고 세키부네들이 가득 달라붙자 그 무섭던 대포도 쏘지 못했다. 화살 과 가끔 날아오는 화약통 같은 것이 전부였다. 빽빽이 걸쳐진 사다리와 밧줄을 타고 발도족경조와 장창족경조들이 기 어올라갔다. 정면과 양 측면 모두 세키부네들이 빙 둘러쌌다. 삼면에서 적을 맞은 판옥선은 기어오르려는 일본병사를 필사적으로 저지했다. 그 러나 인원이든 배든 이쪽이 압도적이었다. 아직은 한 명도 올라가지 못 했지만, 단 한 명이라도 올라가는 데 성공하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조선 군의 약점이 접전에 있음을 노부도키는 알고 있었다. "배를 대라!" 더구나 노부도키는 뒤에 대기하고 있던 세키부네 두 척을 다시 끌어들 였다. 판옥선 정면에 두 척, 양 뱃전에 네 척이 접하고 맹렬히 공격하고 있는 데다, 앞쪽 뱃전에 달라붙은 두 척에 각각 세키부네 한 척씩을 더 잇댄 것이다. 이로서 판옥선을 공격하는 세키부네는 모두 여덟 척으로 늘었다. 아무 리 큰 좌선이라도 2백 명도 안 되는 판옥선 인원에 비해 공격하는 쪽은 노부도키가 탄 대 세키부네 1척과 중 세키부네 7척을 합쳐 6백 명을 넘 었다. 접전만 벌어진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었다. "와아! 와아!" 약간 뒤에서 지켜보고 있는 도쿠이 미치토시의 기함과 그 옆에 있는 배에서 함성을 질러왔다. 싸우고 있는 일본 병사들에 대한 응원이었다. 좁은 울돌목 주변은 이미 판옥선을 포함한 아홉 척으로 꽉 차버렸다. 더 이상 배가 들어올 공간이 없어 실질적으로 도와주는 것이 불가능하자 함 성으로 사기를 올려주는 것이다. "불화살 준비!" "쏴!" 철포대가 쉬지 않고 총탄을 퍼부었고 뒤이어 궁대가 불화살을 판옥선 위로 날렸다. 반쯤 부서진 노부도키의 배 위로 옆에 잇댄 세키부네에서 병력이 우르르 몰려왔다. 효과는 금방 나타났다. 철포소리가 더 요란해졌 고 사다리 밑에는 미처 기어오르지 못한 병력들이 창을 들고 기다리기까 지 했다. "가아상(어머니)!" 대나무 사다리 하나가 기름과 불을 뒤집어쓰며 넘어졌다. 그 위에 타 고 있던 병사는 비명을 지르며 떨어졌다. 아직까진 판옥선 쪽에서도 효 과적으로 저항하고 있었다. 불화살이 날아오면 재빨리 물을 끼얹었고 화 살이 맞지 않는 방패 뒤에서 올라오는 사다리와 줄을 자르고 불태웠다. "남은 병력을 전부 모아라!" 하지만 노부도키는 판옥선과 조선군이 점차 한계에 도달해 감을 눈치 챘다. 가끔 들리는 알 수 없는 조선말 뒤에 숨이 차는 지 헉헉하는 숨소 리가 있었다. 악을 쓰는 목소리도 있었다. 노부도키는 회심의 미소를 지 었다. 노부도키의 남은 병력 모두가 배 아래에 집결했다. 철포사격도 다른 배에서 건너온 철포대에게 맡겼다. 앞서 돌격했던 부장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함성과 비명이 교차되는 어딘 가에서 용감하게 싸우다 사라졌으 리라. 전투지휘 때문에 그의 마지막 모습을 보지 못한 것이 조금 아쉬웠 다. 그러나 살고 죽는 것쯤은 무사의 숙명이었다. 무엇이 두려우랴! "모두 돌격준비!" 이제는 다른 배에서 온 병력이 주가 되어 판옥선 공격을 맡고 있었다. 노부도키는 그들에게 잠시 적을 맡겼다. 잠시 전의를 가다듬고 다시 공 격하기 위해서였다. 다른 배에서 온 병사들은 사다리로 올라갈 뿐만 아니라 판옥선 옆에 난 문을 도끼로 부수려고 시도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판옥선이 커다란 노를 내린 구멍 사이를 향해 조총을 쏘아대고 있었다. 노부도키는 그것 도 꽤 괜찮은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 고깃배, 마이룡 올해 스무 살 된 마이룡은 동생 마화룡과 함께 죽어라 노를 저었다. 이런 물살에서는 노를 젓고 가기도 힘들었다. 울돌목에 가까워질수록 물 살은 점점 세어졌다. 아버지 마하수와 형님 마성룡, 마위룡은 활에 화살 을 메긴 채 멀리 좌선을 포위한 왜선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이봐아! 당신드을! 더 이상 가까이 가지 마아!" 조금 전 판옥선들을 지나올 때와 똑같은 소리였다. 사후선에 탄 격군 들은 물에 떠내려 온 왜군들을 창으로 찌르고 몽둥이로 머리를 때리느라 바쁜 와중에도 가까이 오는 고깃배를 걱정했다. 사방에 나뭇조각과 천조 각, 그리고 왜병들 시체가 흐르고 있었다. "이 자식들아! 너희들도 수군이면 통제사또를 도와 싸워야 할 거 아 냐!" 아버지 마하수가 벌컥 화를 냈다. 마이룡은 마화룡과 함께 또다시 감 동의 물결에 빠져들었다. 용감한 아버님, 전라도 장흥 사투리는 전혀 안 쓰시는 서울 사람 아버님! 벼슬이 자그마치 주부에까지 오른 문무 겸비 하신 아버님! "백 진사는 따라오느냐?" "예! 열심히 노를 젓고 있습니다, 만!" 성룡 큰형님이 실눈을 뜨고 뒤를 바라본 다음 고했다. 진사 백진남은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자고 사람들 앞에서 가장 먼저 맹세했으면서 벌써 저만큼 뒤쳐졌다. 백 진사가 아버지 마하수 마음에 영 안 든 듯했다. "에잉~ 겁이 조금은 나겠지. 유생 나부랭이가 말이나 잘하지. 원! 이럴 때는 늙었지만 나 같은 무관이 앞장서야 한다니까. 에잉!" - 퍽! 마하수는 괜히 신경질을 내며 철퇴를 들어 배 옆으로 쓸려가던 왜병 머리통을 박살냈다. 마이룡은 흐뭇했다. 노를 이쪽으로 저은 보람이 있었 다. 마이룡은 다음 목표를 찾았다. 배가 가는 방향 근처에 휩쓸려 떠내려 오는 왜병은 많았다. 이번에는 번쩍거리는 갑옷을 입은 걸로 보아 왜장 같은 놈을 목표로 노를 저었다. "저, 아버님. 수급은 안 거두실 겁니까?" 마성룡이 쭈뼛쭈뼛하다가 간신히 말을 꺼냈다. 그러자 아버지는 불같 이 화를 내며 장남을 나무랐다. "이놈아! 남의 모가지 잘라서 뭐하게? 벼슬 얻게?" "그게 아니고요. 저, 수급을 모아서 사상께 바쳐야 하지 않으까요?" "그런 일은 저어 뒤에 있는 쓰레기들이나 하라고 해! 억추 쓰레기, 안 위 쓰레기, 유형 쓰레기한테. 억추가 무슨 뜻인지 알아? 억수로 추하다는 말이야! 빌어먹을 놈!" 마이룡과 마화룡은 다시 주체할 수 없는 감동의 도가니에 빠져들었다. 노를 젓는 손에 힘이 절로 들어갔다. = 경상우수영 좌선, 우치적 "위험! 위험합니다!" 우치적은 더 이상 장대에만 붙어있을 수 없었다. 활을 뽑아들고 내려 와 통제사 곁에 섰다. 통제사는 서서히 몸을 돌리면서 세 방향에서 동시 에 벌어지는 전투를 지켜보고 있었다. 선장 송한은 어느새 온몸에 피를 흠뻑 덮어쓴 채 싸우고 있었다. - 빠각! 나무방패 부서지는 소리에 놀란 우치적이 장대를 올려다보았다. 기라 졸들을 전원 전투에 투입시키고 장대에 올라간 송희립이 엉덩방아를 찧 고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방금 방패판을 부순 것은 조총 중에서도 상당히 큰 조총인 모양이었다. 우치적은 이제 보니 이렇게 왜선들과 접 근한 다음에는 장대도 무척 위험해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으음!" 갑자기 통제사가 번개같이 왼쪽 뱃전으로 달려갔다. 그리고는 수졸의 창을 잡고 판옥선으로 막 뛰어오르려던 왜병을 위에서부터 베어버렸다. 피가 옆으로 쫙 퍼져 주변에서 싸우는 수졸들 옷을 시뻘겋게 뒤덮었다. 다시 뱃전 가운데로 돌아온 통제사는 고개를 좌우로 돌려 살피고 있었 다. 왜병이 하나라도 배에 올라오면 그것으로 끝장이었다. 조선군이 전쟁 내내 뼈저리게 느낀 것이 바로 이 근접전이었다. 예리한 칼날을 휘두르 는 왜병에게는 도저히 당할 수가 없었다. "너도 창을 잡아라!" 통제사가 오돌오돌 떨고 있는 도훈도에게 한 말이었다. 도훈도는 간신 히 발을 떼어 앞으로 달려갔다. 그러더니 도훈도가 미친 듯이 왜병들을 찌르는 것이다. 언뜻 보이는 도훈도 입에서는 통제사에게서 도망쳐 왔다 는 안도감이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통상! 하나만 여쭤보겠습니다." 간신히 용기를 낸 우치적이 통제사에게 다가가 큰 소리로 물었다. 병 장기 부딪치는 소리와 함성소리에 우치적의 걸걸한 목소리가 파묻혔지만 통제사는 고개를 뒤로 돌렸다. "말하시게." 우치적은 전쟁이 시작된 이후 거의 영등포만호로만 근무했다. 경상우 수영 관할이고, 당연히 오랫동안 원균의 부하였다. 순천부사가 된 것은 올해 5월, 통제사가 백의종군 중이었을 때였다. 우치적이 이순신을 직속 상관으로 모신 것은 사실상 이번이 처음이라는 뜻이다. 순천은 전라좌수영의 소재지였고, 동시에 전라좌수영의 가장 중요한 배후기지였다. 지금도 전라좌수영 소속 수군의 절반 정도가 순천부에 살 고 있었다. 임진왜란 당시 순천부는 지금의 통합 여수시를 포함하고 있 었고, 충무공과 전라좌수영 유적 대부분은 현재의 여수에 남아 있다. "죽음을 각오하셨습니까?" "죽음을 각오해야 하네." 통제사가 우치적을 슬쩍 바라보았다. 우치적은 실망한 표정을 짓다가 금방 그 표정을 풀었다. 어차피 죽을 생각을 하고 이 자리에 있는 우치 적이었다. 우치적은 원균보다 이순신을 좋아했지만, 지금까지 이순신보다 원균에 게 더 많은 은혜를 입었다. 순천부사라는 직책은 대단한 벼슬이었다. 정 식 무과급제자도 아닌 우치적이 바라볼 수 있는 벼슬이 절대 아니었다. 칠천량에서 혼자만 도망쳐 원 통제사에게는 지금도 미안했다. 그러나 이 제는 더 이상 미안할 필요가 없게 될 것 같았다. 이제는 도망갈 생각도 없었지만, 도망칠 수도 없었다. "이거, 안돼!" 우치적이 소리가 난 오른쪽으로 몸을 홱 돌렸다. 그리고 뱃전의 방패 판 사이, 회색 대나무 사다리를 짚은 손을 향해 활을 돌렸다. 곧이어 기 다란 칼이 보였다. 바로 옆에 있는 군관과 격군은 다른 왜병과 싸우느라 올라오는 왜병을 안타깝게 빤히 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 직후에 올라오는 왜병의 이마에 대고 우치적이 화살 한 발을 날렸 다. 날카로운 비명이 들린 직후 손이 그 자리에서 없어졌다. 어이없게도 그 왜병은 가슴에 화살을 맞고 물에 떨어졌다. "하지만 나도 살고싶네. 나는 계백 장군이 아닐세." 통제사가 말을 계속했다. 우치적에게 말하는 통제사의 눈은 질려포통 밑 심지에 불을 붙이는 화포장에게 향하고 있었다. 늙은 화포장은 무표 정한 표정으로 불이 붙은 질려포통을 바깥을 향해 홱 던졌다. 지금은 정 확히 던질 필요가 전혀 없었다. 곧이어 울리는 폭음과 비명. "그렇습니까? 고맙습니다, 통상." 우치적은 무척 다행이라 여겼다. 통제사는 여기서 죽을 마음은 없는 것 같았다. 이제는 그게 그거지만. 전면에서 뛰어오른 왜병을 향해 통제사가 바람같이 달려드는 뒤에서 우치적이 화살을 날렸다. 쌍칼을 들고 좌우의 군관들을 밀어내며 뛰어든 왜병이었는데, 화살은 목을 정확히 관통하고 있었다. 통제사가 분한 듯이 왜병의 목을 내리쳤다. 즉시 죽이긴 했지만 처음으로 적에게 갑판에 오 르는 것을 허용한 셈이었다. 어제 통제사는 장수들을 불러모아 여러 가지 이야기를 했다. 그 중에 는 백제의 5천 결사대를 이끌고 신라의 5만 대군과 싸우다 죽은 계백 장 군에 대한 이야기도 빠지지 않았다.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라는 뜻이었는 데, 아무래도 부하 장수들에게는 함께 죽자는 뜻 같아서 슬펐다. 그러나 이 싸움은 살기 위해서 하는 것이었다. 정신없이 활을 쏘고 창 으로 찔러대는 군관들, 수졸들을 보면 그것을 알 수 있었다. 왜선에 몸을 날리면서까지 싸우는 군사는 없었다. 이 치열한 싸움에서 아직 정신을 차리고 있다는 말이 된다. 다행이었다. 우치적도 어떻게든 이번에 살아남고 싶었다. 물론 이 상황에서는 말도 안 되겠지만. "왜놈들이 아래층 문을 부수고 있습니다!" 도노장이 사다리를 반쯤 타고 올라와 질겁하며 외쳤다. 다른 군관들이 그 소리를 듣고 잠시 주춤했다. 노 젓는 아래 갑판에는 왜군과 싸울 사 람이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갑판 선실 하나에는 화약도 가득 있었다. 만 약 아래 갑판을 적에게 빼앗긴다면 이 배가 곧 불타오르게 된다는 뜻이 었다. 우치적은 불타오르는 판옥선의 최후를 목격한 적이 있었다. 칠천량에 서였다. 엄청난 굉음과 함께 화염이 하늘높이 치솟았다. 작은 나뭇조각 같은 것들이 불타며 사방으로 날아 우치적이 눈을 감았다. 그리고 우치 적이 다시 눈을 돌렸을 때 바다에 떠 있는 것은 부서진 나무판자 조각뿐 이었다. "내가 내려가겠다! 다들 자리를 지켜라!" 소리를 지른 우치적이 사다리를 뛰어내리듯이 타고 내려갔다. - 쿵! 쿵! 왼쪽 문에서 나는 소리는 분명 도끼 같은 것으로 나무를 찍는 소리였 다. 그런데 아래층 격군들은 이상하게도 가운데로 몰린 채 불안한 눈으 로 왼쪽과 오른쪽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격군들의 시선은 도끼 소리가 울리는 출입문 한 곳에 집중되지 않았다. 우치적은 위험은 반드시 문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더 이상하게도 뒤쪽에는 격군 한 명이 피를 뿌리고 죽어 있었다. "저 자는 어쩌다가 저 꼴이 됐는가?" "왜놈들이 노씹을 통해 조총을 쐈습니다. 지금도, 억!" - 투앙! 우치적이 놀라 팔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밑에서 올라온 총탄이 천장 에 맞고 나뭇조각이 튄 것이다. 계속되지는 않았지만 이따금씩 노 구멍 을 통해 총탄이 들어오고 있었다. 우치적이 왼쪽 문으로 향했다. 격군들이 배에 오르내릴 때 사용하는 문으로, 안에서 잠겨져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문이 흔들거릴 정도로 위 험했다. 문이 부서지기 직전이었다. "부사 어른. 천자총통을 끌고 와서 확 갈겨버릴깝쇼?" 화포장이 두려운 눈길로 말했다. 우치적이 활집에 활을 담고 환도를 뽑으려다가 말았다. 문틈에는 칼로 내리칠만한 곳이 아직 없었다. 이럴 때는 길쭉한 창이 좋을 텐데. 그러나 위층에서 창을 가져오기 전에 문이 부서질 것만 같았다. "문이 부서지면 안 된다." 우치적이 화살을 매긴 다음 문틈으로 겨눴다. 부서진 작은 틈으로 왜 병이 도끼를 휘두르는 것이 보였다. - 픽! "꾸아악!" 미안하게도 목표는 왜병의 사타구니였다. 우치적은 어깨에서 연달아 화살을 뽑아 쏘아댔다. - 픽! "까아악!" 틈으로 보니 도끼로 문을 치던 왜병들은 다 떨어진 모양이었다. 그리 고 이쪽을 향해 손가락질하며 외치는 왜병들이 보였다. 이제 곧 조총 세 례가 이곳에 쏠릴 때였다. - 덜컥! 밑에서 소리가 난 동시에 우치적이 활을 아래로 돌려 시위를 놓았다. 화살이 쏘아지고 난 다음에야 이곳 노 구멍에 조총 총구가 걸쳐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비명이 들리고, 풍덩 하는 소리가 이어졌다. 우치적이 한 놈이라도 더 잡자고 어깨 뒤로 손을 돌렸다. 하지만 화살 이 잡히지 않았다. 동개를 앞으로 돌려보니 어느새 텅 비어 있었다. "일단은 됐다. 통나무를 걸고 나머지는 판자를 붙여 못을 박아라. 나머 지는 노 구멍을 판자로 덮은 다음 계속 노를 저어라. 문을 부수는 소리 가 또 들리거든 판자를 더 붙여. 나무는 많잖아? 이럴 때는 장군전이라 도 써!" "예!" 격군들이 잽싸게 움직였다. 일부는 양쪽 문에 판자를 덧대 못질을 하 고 일부는 제자리로 돌아가 노 구멍을 틀어막은 다음 노를 저었다. 우치 적은 아까보다 훨씬 안정된 노꾼들을 보며 사다리를 타고 올라갔다. 우치적이 눈을 크게 떴다. 통제사는 눈을 감은 채 서 있었다. 늘어뜨린 칼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에는 잽싸게 몸을 날려 기어오르는 왜적을 향했다. 우치적이 이번에는 다른 군사들을 살폈다. 장대에서 송희립이 연신 활 을 쏴대고 있지만 방패판은 절반 이상 부서진 다음이었다. 송한이 아직 살아있다면 저 시뻘건 놈일 거라고 생각했다. 왜병의 칼날을 맨손으로 잡고 왜병의 배에 칼을 쑤셔 박은 채 좌우로 돌려대고 있었다. 왜병이 축 늘어지자 송한이 멱살을 잡아 당겼다가 홱 던져버렸다. "풋!" 우치적은 갑자기 웃음이 터져 나왔다. 강진현감 이극신이 엉덩이에 커 다란 화살이 꽂힌 채 활을 쏘아대고 있었다. 언뜻 보면 장끼의 기다란 꼬리 같았다. 왜군의 화살은 조선의 장전보다 훨씬 길었다. 그만큼 활도 컸는데, 이 극신은 하필 불화살에 맞은 모양이었다. 엉덩이가 지글지글 타올랐지만 이극신은 동개에서 화살을 꺼낼 때마다 한번씩 찡그리며 쳐다볼 뿐이었 다. 지금은 엉덩이에 박힌 화살을 뽑을 틈이 없었다. 성복은 잘 싸우는 편이었다. 힘이 좋은 성복은 철퇴 두 개를 연신 휘 둘러 왜병의 머리를 부수고 있었다. 봉학은 신이 나서 활을 쏴대고, 다른 격군들도 기대 이상으로 열심히 싸우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다들 지쳐가고 있었다. 더 이상 버티기 힘들 것이다. 우치 적은 잠시라도 군사들에게 짬을 주고 싶었다. 숨이라도 한번 몰아쉬게끔. "장병겸을 준비하라!" = 구루지마군 젠군前軍, 하타 노부도키 한숨 돌린 노부도키의 병력이 다시 돌격준비를 했다. 철포대는 철포를 버리고 허리에 찬 칼을 뽑아 들었다. 궁대도 마찬가지로 자기 키만한 활 을 버렸다. 칼보다는 창이 좋다고 창을 드는 병사도 있었다. - 꽝! "아악!" 폭음 하나가 추가됐다. 오른쪽 약간 떨어진 곳에 날아온 작은 나무통 하나가 폭발했다. 판옥선에서 던진 것이었다. 주위에 있던 병사 몇 명이 피투성이가 되어 바닥에 누웠다. 조총 연기로 가득한 하늘 위로 짙은 화 약연기가 추가되어 자욱하게 번져갔다. 질려포통이라 부르는 무기였다. 던지면 터지며 안에 있는 파편을 사방 으로 날린다. 두터운 갑옷도 소용없이 온 몸에 쇳조각이 박혀 버린다. 조 금 전까지 소리를 지르고 뛰어다니던 몸이 폭음과 불꽃 하나가 사라질 시간만에 조용한 시체로 변한다. 마치 잡아 올린 지 오래된 생선처럼. 돌격준비를 하던 병사들 시선이 잠시 그쪽을 향했다. 그들도 언제건 저런 생선토막이 될 수 있었다. "나도 같이 돌격한다!" 노부도키는 이번을 마지막으로 잡았다. 이번에야말로 이순신이 탄 대 장선을 완전히 밀어붙일 생각이었다. 그리고 직감은 그 기회가 곧 올 것 임을 알려주었다. "아아악!" 사다리 쪽에서 비명이 들려오면 언제나 따르는 소리가 있었다. 병사가 물에 거꾸로 빠지는 소리였다. 격한 물살이 반쯤 잠긴 이 세키부네 위로 흐르고 있었다. "적이 무너진다!" 누군가 그렇게 소리쳤다. 노부도키는 즉시 소리가 들린 곳을 쳐다보았 다. 확실히 그곳에 있던 조선 병사 둘이 바로 눈앞까지 올라온 사다리와 창날에 어쩔 줄 모르고 있었다. 다른 쪽에서 온 조선 병사가 칼을 휘둘 러 재빨리 막기는 했으나 이제는 조선수군들이 동요하고 있음은 분명했 다. 근접전에 익숙하지 못한 조선수군은 여기까지가 한계임이 분명해 보 였다. "돌격!"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노부도키가 명령했다. 격렬하게 저항하던 조선 군에 보인 이 작은 빈틈을 파고들어야 한다. 그렇게만 된다면 당장 죽더 라도 원통할 건 없었다. 명장 이순신을 몰아붙였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노부도키에게는 길이 남을 명예가 될 것이다. - 꽈앙! 꽈앙! 다시 몇 개인가의 질려탄이 날아와 폭발했고 상당수의 화살이 날아왔 다. "분... 하다!" 고슴도치처럼 갑옷에 화살이 박힌 무사 한 명이 갑판 위에 서서히 엎 어졌다. 그는 작은칼을 빼들고는 자기 배에 가져다 대고 있었다. 할복하 려는 것이다. 마지막 명예를 지키려는 할복, 그것은 원래 지극히 조용한 곳에서 가 이샤쿠(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뒤에서 목을 쳐주는 행동)를 위한 사람과 명복을 비는 스님을 동반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 무사 옆에는 스님도 가이샤쿠를 깨끗이 해 줄 믿음직한 부하도 없었다. 핏물에 젖어 처절한 비명을 지르는 아시가루와 질려탄에 온 몸이 갈기갈기 찢겨 날아 가는 수부들만이 있었다. 압도적인 일본군의 병력과 과감한 돌격에 대해 지금까지 조선수군이 내보인 대처법은 언제나 똑같았고 들었다. 그것은 압도적인 판옥선의 화 력이었다. 그리고 일본군은 언제나 일방적으로 피해를 입어야 했다. 그러 나 지금은 조선수군이 화포를 쏠 기회가 없었다. 거의 피해를 입지 않고 세키부네 여덟 척이 적 대장선에 달라붙은 것이다. 그런데도 이렇게 고 전하다니, 노부도키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고막을 찢는 듯한 폭음과 비명에도 노부도키를 비롯한 돌격조는 고개 를 돌리지 않았다. 오로지 판옥선과 그 위에 있는 조선수군만을 노려보 며 일제히 사다리를 들고 달려들었다. 홍수 때 터져 나온 물처럼 거센 기세에 위에서 지켜보던 조선수군도 잠시 움찔했다. 반면 조금 전까지 공격하던 일본군은 뒤에서 이어진 공격에 힘을 얻어 더 맹렬히 공격을 시작했다. 노부도키도 사다리 하나를 놓고는 그 위로 몸소 기어올라갔다. 찔러오는 창을 칼로 걷어냈다. 눈앞에 활이 보이고, 화살이 날아와 어깨에 꽂혔다. 하지만 아픔을 느낄 여유도 없었다. 위에서 조선병사가 뭐라고 떠들었다. 잘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분명 한 욕설이었다. 그리고 판옥선 아래쪽을 향해 다급히 누군가를 불렀다. 아마도 노를 젓던 병력도 불러들이려는 것이리라. 노부도키는 그렇게 생 각했다. 초조한데다 공포감에 질려있을 이순신의 얼굴이 눈앞에 보이는 듯했다. 그런데 다음 순간, 위쪽에서 뭔가 거대한 그림자 하나가 번쩍하고 스 쳐갔다. 그리고 올라가던 일본병사들 쪽에서 다급한 비명이 잇따라 터져 나왔다. 병사의 목 하나가 피를 뿌리며 하늘로 날아올랐다. "으아!" "저건 뭐냐!" "낫이다! 거대한 낫이다!" 판옥선 뱃전에 걸쳐 있던 낫 두 개가 별안간 좌우로 춤을 추기 시작했 다. 어른 5명 키 만한 자루에 웬만한 칼보다 훨씬 큰 날이 붙어있었다. 그 거대한 낫이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단순히 흔들흔들 움직이 는 것이 아니다. 먹이를 노리고 찍는 사마귀의 손처럼 살짝 치켜들었다 가 사정없이 찍고 베어버렸다. 위로 들린 그 낫이 햇빛에 번뜩이는 모습 은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아악!" 와지끈 소리가 들리며 대나무 사다리가 무더기로 부러져 나갔다. 그 위에 올라있던 병사들은 가을바람에 날리는 나뭇잎처럼 배 위나 바다 위 로 떨어졌다. 노부도키는 그 낫이 어떻게 움직이는 지를 살폈다. 판옥선 양쪽 끝에 사람 머리 대여섯 개가 붙어 함께 움직이고 있었다. 도깨비나 쓸 수 있 음직한 큰 낫을 그들은 걸개에 걸어 노를 젓듯 움직이고 있었다. 장병겸은 한번은 현측을 훑다가 한번은 세키부네 위를 쓸었다. 걸리는 것은 모두 부서지거나 베어졌다. 사람이든 나무든 상관이 없었다. 혹시라 도 한꺼번에 너무 많은 왜병을 베어 속도가 떨어질라치면 낫은 즉시 허 공을 향해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왔다. 이번에도 대여섯 명이 한꺼번에 바다로 떨어졌다. 노부도키가 머리를 숙여 간신히 장병겸을 피했다. "으! 으으..." 사다리가 부서진 후에도 병사 몇 명은 악착같이 판옥선 갑판에 매달렸 다. 그들은 나무와 나무 사이의 작은 이음새에 손가락 끝을 걸치고는 악 착같이 버티고 있었다. 그것이 죽지 않으려는 본능적인 행동인지 아니면 조선군을 끝까지 죽이겠다는 적개심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손톱이 부러지고 피가 맺힌 손가락으로 그들은 천천히 뱃전을 기어올랐다. 고통 에 흉하게 일그러진 얼굴이 귀신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들은 곧 힘없이 떨어졌다. 미끄러운 뱃전에서 진동과 몸무게 를 지탱하기에 사람의 손가락은 너무도 가늘고 약했다. 부러진 손가락과 거기서 나온 핏자국만이 판옥선 갑판에 선명히 남았다. "아아!" 용감하게 돌격한 마지막 공격이 수포로 돌아가는 순간이었다. 이미 부 서진 채 힘없이 판옥선에 걸린 사다리도 계속 부러져 나갔고 함성과 투 지, 결사의 각오도 한 줌의 핏물로 변했다. 잠시 절망적인 소리를 낸 노 부도키는 있는 힘을 다해 판옥선에 대고 외쳤다. "과연 훌륭하오! 통제사! 하지만 계속 혼자 싸울 수 있겠소? 계속 혼 자서 우리를 막을 수 있겠소?" 그 소리를 들었는지 큰 낫이 이번에는 노부도키가 있는 사다리를 노렸 다. 바람소리를 내며 들어올려지는 날에서 빛나는 광채를 보며 노부도키 는 칼을 높이 올렸다. 마치 장병겸을 맞상대하려는 듯한 자세였다. 그리고 그 낫이 노부도키가 탄 사다리를 올려쳐 부술 때 그의 몸은 하 늘로 솟구쳤다. 숨이 딱 멈춰졌다. 그리고 보았다. 뱃전 중앙에 선 장수 가 장대를 향해 뭐라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그리고 판옥선 돛대 위에 깃발이 다급히 올라가는 것과 신호를 위한 불꽃 화살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저건!" 그대로 바다에 추락하면서 노부도키는 방금 본 신호를 생각했다. 그건 분명 혼자서 견딜 수 없게 된 이순신이 뒤에 있는 병력을 부르는 신호였 다. 노부도키는 그 순간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느꼈다. "해냈다!" 결국 이순신이 탄 판옥선을 제압하지는 못했다. 그렇지만 혼자서 버틸 수 없게 만들었다. 노부도키가 모든 것을 버려서 한 마지막 돌격은 성공 한 것이다. 노부도키는 최후로 부르짖었다. 내가 이순신을 몰아붙였다! 다른 누구도 못한 일을 이 노부도키가 해낸 것이다. 저 이순신이 나로 인해 견디지 못하고 뒤쪽에 대고 구원을 요청하고 있다! 몸이 물 속으로 빨려들고 있었다. 거센 흐름이 그를 북서쪽으로 밀어 붙이고 있었다. 점점 의식이 흐려져 갔다. 몸에 힘이 빠지는 것을 느끼며 노부도키는 모든 것을 잊었다. 역사전쟁소설 // 남해 // 1권 copyright (C) 2001 김경진 안병도 신재호(필명) 공저 업로드 김경진 (전쟁소설 데프콘 1, 2, 3부, 동해, 남북, 판타지 하늘길잡이 공동저자) 6. 우리는 조선수군이다. = 해남현 언덕, 임선 "총소리가 멈췄다!" "끝났다. 아아!" 언덕에서 내려다보던 피난민들이 일제히 일어섰다. 그러나 자욱한 연 기에 가려 해협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해협에는 왜군이 무지막 지하게 쏴댄 조총의 연기에 질려포통의 화약연기, 그리고 배가 타면서 피어오르는 연기로 가득했다. 싸움이 어떻게 진행되나 목을 길게 빼고 보던 피난민들이 털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흐느끼기 시작했다. 흐느낌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지켜보던 사람들에게까지 번져갔다. "졌어. 그래. 애초에 이기기를 바랄 수는 없었지." "망했다! 이 나라는 이제 망했어." "사또! 통제사또! 에구, 가엾어라. 불쌍하신 분." 진사 임선은 말을 잃은 채 연기 속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그렇게 하면 연기 속에서 통제사의 좌선이 멀쩡하게 나타나기라도 할 것처럼. 울돌목 쪽에서 잠시 아무 소리도 없자 임선도 털썩 주저앉으며 소매로 눈물을 훔쳤다. 기적이 일어나 왜선들이 물러가 주길 바랬지만 이제는 그런 것도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임선은 눈앞이 캄캄했다. "형님. 이제 어서 배를 타고 도망가야 하는 거 아닙니까?" 옆에서 흐느끼던 임환이 먼저 정신을 차렸다. 피난민 일부는 이제는 정말 끝장났다면서 축 늘어진 어깨로 언덕을 내려가고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은 언덕에 남아서 통곡하거나 초점 잃은 눈으로 멍하게 울돌목만 바라보고 있었다. 이번 전쟁에서 남편과 자식을 잃은 늙은 여자들이 대 부분이었다. 전라도는 정유재란 때만 일시적으로 왜군이 침범했기 때문에 인명피해 가 적은 것으로 오해하기 쉽다. 그러나 임진년에 용인전투에서 패배하고 흩어진 근왕군의 주력은 전라도 관군이었으며, 이후 수많은 의병, 관군들 이 서울이나 경상도 방면의 전투에 참전했다. 권율이 지휘한 행주산성과 서울 주변의 병력은 전라도 관군, 그리고 2차 진주성전투 때 전멸한 병 력은 대부분 전라도 의병이었다. 왜군 점령하에 들어간 지방은 조정에서 인적 자원을 징발할 수 없었 다. 반면 전라도에서는 젊은 남자들이 거의 빠짐없이 징발됐다고 할 수 있다. 실록이나 난중일기를 보면 전라도에 과중하게 부과된 병력 동원과 물력 고갈에 대한 논의가 심도 깊게 진행된 바 있다. 그리고 수년간 조 선군의 후방기지 역할을 감당한 전라도에 대해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보 복 차원에서 학살과 철저한 초토화를 명령했고, 실제로 그것이 실행됐다. "도망가면 뭐하겠느냐. 이젠 또 어디로 가야 한단 말이냐? 하늘이 이 미 우릴 버렸는데." 임선의 탄식이 길게 이어졌다. 주변을 둘러보니 통곡하다 지쳐 까무러 친 여자들이 많았다. 이제는 어머니를 부르는 통곡 소리가 더 커질 정도 였다. 울돌목 물길이 뚫리면 이곳도 곧 왜군 수중에 떨어질텐데 뜻밖에 도망가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이제 보니 임환도 일어서지 않고 있었다. 임환은 다만 형 임선이 왜군 에게 해를 당할까봐 걱정돼서 임선에게 도망가라고 한 말일 뿐이었다. 이들 형제는 노모를 막내 임업에게 맡기고 왔다. 저 멀리 뒤에 전선인 것처럼 위장하고 늘어서 있는 어선과 피난선들 가운데 가장 큰배가 임씨 집안의 것이었다. "사상. 미안하오. 정말 미안하오. 내가 손수 노를 젓더라도 어떻게든 도와줘야 하는 게 이 나라 백성 된 도리였는데. 미안하오. 나라가 망했는 데 양반의 체면이 다 뭐란 말인가. 학문이 뭐란 말인가! 아! 결국 이렇게 됐으니, 이젠 어떡할꼬! 어떡하면 좋을꼬." 임선은 고개를 숙인 채 어깨를 들썩거렸다. 진사 임선은 며칠 전에 통제사를 만나봤었다. 어떻게 도울 방법이 없 을까 해서였다. 집안이 제법 괜찮아 이 난리통에도 배에 싣고 다니는 쌀 이 몇백 석은 되었다. 그리고 집에서 부리는 종도 수십 명이었다. 그 정 도면 판옥선 한 척까지는 안되더라도 절반 정도는 격군을 충당하고도 남 았다. 격군 부족에 시달리는 조선수군에 큰 보탬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임선은 겁에 질린 수군과 병색이 완연한 통제사를 보고 나서 지레 포기하고 말았다. 명색이 주인으로서 집안 노비들을 뻔히 질 싸움 에, 의미 없는 죽음으로 내몰 수는 없다는 책임감 때문이었다. 그리고 노 비들도 수군이 되는 것을 무척 두려워했다. 조선수군이 승승장구했을 때 도 차라리 육군으로 나섰다가 개죽음 당하는 것을 낫게 여기는 것은 이 유가 있었다. 수군은 워낙 힘든 데다가 사람들이 무시하는 천역이고, 대대로 수군역 을 물려받아야 한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임시로 수군에 소속됐다 가 잘못돼서 평생, 또는 대대로 수군이 되면 그것은 후손에게 못할 짓이 었다. 그리고 수군으로 복무하다가 물에 빠져 죽으면 시신을 건져 장례 를 치를 수 없다는 것도 당시 유교적 통념 하에서는 백성들이 수군 복무 를 무척 꺼릴만한 충분한 이유였다. "그래. 이제는 어쩌랴. 나라는 망하고, 우린 어느 구석에서 죽을 줄 모 르는데. 그래." 임선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물 너머로 들어오는 하늘은 맑고 햇 살은 따사로웠다. 한 달 전에 떠나온 고향 나주도 이렇게 좋은 곳이었다. 그냥 이렇게 살다 가면 좋을 것을. 전쟁은 왜 나서 많은 사람들이 죽고 이토록 고생해야 하는지, 임선은 너무나 안타까웠다. "그래. 약한 나라는 이렇게 없어지는 거야. 나라가 망하면 그 백성들도 뿔뿔이 흩어지고, 살아남아도 잘해야 남의 나라 노예 신세가 되겠지. 잔 인무도한 왜놈들이 이 땅을 집어삼키게 되었구나. 이제 나도 왜놈들의 반찬거리가 되겠구나!" 왜군들이 조선 땅에서 자행한 각종 잔혹행위는 사실보다 훨씬 과장되 어 퍼뜨려졌다. 가장 충격적인 것이 왜군들이 조선인들을 잡아먹는다는 소문이었다. 굶주린 조선인 피난민들 가운데 일부가 사람을 잡아먹었다 는 말은 이전부터 있었다. 그러나 왜군이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말은 최 근에 널리 퍼진 소문이었다. 그것은 소문이 아니라 사실이었다. 일본의 종군승 겸 의원인 경념慶念 의 조선일일기에는 경상도에서 왜군들이 조선인들에게 짐을 나르게 하 고, 도착한 다음에는 때려죽이고 가죽을 벗겨 그 고기를 먹었다는 기록 이 있다. 정유재란 초기에는 일본군이 그다지 식량부족에 허덕이지 않았 고, 또한 당시 일본인들이 육식을 별로 즐기지 않았기 때문에 의아스러 운 내용이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었고, 전쟁터의 광기, 인명경시 풍조 등으로 설명 될 수 있다. 시간과 장소가 정확하지는 않지만 임진왜란 때 일본인 종군 화가가 그린 그림에도 굶주린 일본군이 동료 시체의 살을 베어먹는 장면 이 있다. "형님! 이렇게 된 것, 우리끼리라도 싸웁시다! 흉악한 암군이 명나라로 도망가더라도, 토색질하던 관리, 아전들 다 도망가더라도 우린 끝까지 싸 웁시다." 동생이 흐느꼈다. 다른 피난민들은 통곡하다 지쳐 다들 몸이 축 늘어 져 있었다. 그때 아이 하나가 벌떡 일어났다. "아! 좌선이 보여요!" "뭐야?" "맞다! 저, 저길 봐! 세상에!" 피난민들이 일제히 울돌목 쪽을 바라보았다. 임선도 눈물을 훔치고 바 다를 내려다보았다. 아마도 수군들은 이미 왜적들에게 모두 도륙 당하고 불타오르는 판옥선만 덩그러니 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연기가 바람에 휘날리며 판옥선 한 척이 천천히 드러났다. 돛대에 나 부끼는 수자기는 분명히 저 배가 좌선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런데 군 관, 수졸들이 뱃전을 빽빽하게 메우고 서 있었다. 그리고 좌선 뒤에는 철 저하게 부서지고 반쯤 가라앉은 왜선 몇 척이 물살에 아무렇게나 떠밀려 내려가고 있었다. 잠시 기가 막혀 아무도 말을 꺼내지 못했다. 사람들이 주춤주춤 일어 섰다. 도저히 믿을 수 없어 눈을 비벼대고 얼굴을 꼬집는 사람도 있었다. "이, 이겼다! 이겼어!" "이겼다아! 우리 수군이 이겼다!" 몇 사람이 목이 터져라 고함을 질렀다. 하지만 나머지 대부분은 지금 눈에 보이는 것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아 보고, 또 보기를 계속했다. 그래 도 역시 좌선은 울돌목에 당당하게 떠 있었다. "만세! 통제사또 만세!" "만세? 그래. 나도 만세다. 김덕령 장군 같은 충신들 다 쳐죽이고, 응? 백성 버리고 도망가는 임금이 무슨 소용이람! 응? 통제사또 만세!" "만세! 만만세!" 피난민들이 팔을 힘차게 하늘로 뻗치고 소리를 질렀다. 너무 좋아 날 뛰거나 덩실덩실 춤을 추는 사람도 있었다. 임선이 동생을 와락 껴안았 다. 또 다시 눈물이 끝없이 흘러내렸다. "사상! 고맙소. 우리도 이제부터 싸우겠소. 사상이 우리가 싸워야 할 이유를 가르쳐주었소." 동생을 안고 흐느끼던 임선이 슬쩍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옆에 웬 처 녀가 앉아서 울고 있었다. 꽃다운 나이에 하필 이런 못된 전쟁을 만나 고생했을 처녀를 생각하니 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때 누군가 잔뜩 쉰 목소리로 외쳤다. "또 온다! 왜선들이 또 달려든다!" = 구루지마군 쥬군中軍, 하타 노부도키 "믿을 수가 없군!" 도쿠이 미치토시는 자기 눈을 의심했다. 하타 노부도키가 필사적으로 돌격하고 미치토시 휘하 배들이 전부 달려들었다. 그런데 이순신이 탄 판옥선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조금 흔들리긴 했다. 그렇지만 그런 동요는 패배 나 후퇴로 이어지지 않았다. 판옥선 위에는 바람에 나부끼는 초요기가 계속 걸려 있었다. 몰리고 있다는 표시였지만 바꿔 말해 지원만 있으면 얼마든지 버틸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미치토시는 아찔했다. 이제는 미치토시가 나설 차례였다. 저 판옥선 한 척이 길목을 지키고 있는 동안에는 일본수군이 결코 이 해협을 통과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했다. 이제는 무조건 싸울 수밖에 없었다. 온통 피 칠을 한 저 판옥선에 피 한 방울을 더할 각오로 싸워야했다. "젠군가시라 전사!" 전령이 와서 하타 노부도키의 죽음을 알렸다. 조선수군 대장선에서 약 간 거리를 두고 싸우던 세키부네에서 온 병사였다. 부러진 군기와 어깨 에 꽂힌 화살 한 개가 싸움의 치열함을 잘 보여주고 있었다. "그래, 하타가 죽었단 말이지." 드디어 주요 무장이 죽고 함대 하나가 통째로 전멸했다. 가볍게 이길 수 있는 싸움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아니었다. 서로가 목숨을 걸지 않으면 안 되는 결전이 됐다. 미치토시는 그 의미가 어떤 것인가를 알고 있었다. 이제 미치토시로 그치지 않을 것이다. 승리를 얻기 위해서 선봉 에 선 구루지마군 전체가 전멸할 각오까지 해야했다. 그래야 최후의 승 리를 얻을 수 있다. "노부도키 세키부네 침몰! 하타대波多隊 전멸!" 판옥선에 붙은 세키부네 가운데 먼저 하타 노부도키 휘하의 배 두 척 이 대열에서 떨어져 나갔다. 앞장서서 격렬한 전투를 치렀던 그들은 열 명도 안 되는 수부만 남기고 모두 전멸했다. 다락 속에서 노를 젓던 수 부들도 창칼을 들고 싸우다가 대부분 죽은 것이다. 판옥선과 연결된 갈고리와 밧줄이 떨어져 나가자 두 척은 힘없이 뒤로 떠내려갔다. "앞으로!" 더 이상 보고만 있을 수 없게된 미치토시가 명령을 내렸다. 비교적 안 전한 뒤쪽에 있던 그의 배와 다른 세키부네 한 척이 앞으로 나갔다. 돌 격할 준비를 하는 것이다. 노부도키의 배 두 척이 흘러간 다음 판옥선을 둘러싼 세키부네의 공격 은 다시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비오듯 쏟아지는 화살과 거대한 낫이 완강하게 버티며 그들을 막았다. 게다가 일본군은 수백 명이 죽은 반면 조선군을 아직 한 명도 죽이지 못했다. 눈에 보이는 성과가 없다보 니 무사들이 아무리 독전해도 병사들의 사기가 올라가지 못했다. 미치토 시는 구루지마 미치후사에게 보낼 전령을 불렀다. "주군께 전해라! 나 미치토시도 고전하고 있다고. 그러나 결코 구루지 마군의 명예를 더럽히지 않겠다고!" "알겠습니다!" 전령이 그 뜻을 알고 비장하게 고개를 숙였다. 전황에 따라선 언제든 스스로 돌격해 싸우겠다. 미치토시는 이런 결의를 전령에게 전한 것이다. 전령을 보내고 난 뒤에 미치토시는 그래도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역시 믿을 수가 없어. 아무리 그래도 겨우 한 척인데..." 아까 그 세키부네들은 화포에 몇 발 맞고 전투력이 줄어든 것도 아니 었다. 그런데도 여덟 척이나 되는 배의 군사들이 한 척을 잡지 못한 것 이다. 아직도 살아남아 싸우고 있는 병사들은 거의 패잔병 꼴이었다. 승 패는 이미 결정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육전에서 조선군은 도저히 일본군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 싸움은 화포전도 아니고 배를 잇대고 싸우는 것이니 육전과 다를 바 없 었다. 그런데도 왜군은 판옥선 한 척을 어쩔 수 없었다. 미치토시는 1차 진주성 전투, 그리고 행주산성 전투에서 왜군들이 패 한 이유를 떠올려 보았다. 그리고 판옥선을 한번 쳐다보았다. 마치 철옹 성처럼 단단한 거대한 성곽 같았다. 판옥선과 싸워본 수군 무장들이 똑 같이 느끼는 감정이었다. "과연 조선군은 들에서는 양떼, 성에서는 사자인가?" 둘 사이에 공통점이 느껴지자 미치토시가 씁쓸히 내뱉었다. 그러나 이 말은 조선군의 용맹에 대한 칭찬이 아니었다. 성이나 배나, 안에 있는 조 선 군사들은 도망가지 못하고 싸울 수밖에 없다는 공통점을 강조한 말이 었다. = 경상우수영 좌선, 박재석 "보았느냐아?" 우렁찬 목소리였다. 뱃전 중앙에 선 통제사가 군사들과 하나씩 눈을 맞췄다. 박재석은 통제사의 타오르는 눈길을 보고 부들부들 떨었다. 두려 움이 아니라 벅찬 감회였다. 왜군과 창칼을 맞대고도 전혀 밀리지 않은 것이다. 이것은 살고싶으면 왜군과 절대 칼날을 맞부딪치지 말라는 말을 수없이 들어온 조선수군들에게 큰 충격이었다. "너희들은 정녕 보았느냐아!" "예! 보았습니다, 통상!" 떨리는 목소리로 선장 송한이 허리를 굽히며 대답했다. 머리끝부터 발 끝까지 온통 피에 젖은 송한은 감격에 겨운 듯 몸을 떨었다. 다들 피로를 잊은 지 오래였다. 박재석은 조금 전까지 온몸이 아프고 지쳐서 당장 쓰러질 것만 같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벅차 오르는 느낌 이 온몸에 회오리쳤다. 박재석도 통제사처럼 군사들을 하나하나 살폈다. 몇 년 동안 보상 한 번 제대로 받지 못하고도 통제사를 모신 황득중과 오수, 마치 통제사인 양 장대에 올라 우뚝 서서 스스로 왜군이 쏘는 조총의 표적이 된 송희 립, 전쟁이 끝나야 받겠다며 면천첩을 사양한 봉학, 위험하게도 방패판 사이로 계속 머리를 내민 채 화살을 날리던 순천감목관 김탁, 빠른 동작 으로 연달아 조총을 쏜 왜놈 준사, 전투는 처음이었지만 스스로가 자랑 스러워 어쩔 줄 모르는 돌쇠와 김개동 같은 경상우수영 영노들. 박재석 은 이런 자들과 함께 싸운 것이다. 박재석은 뿌듯했고, 두렵거나 외롭지 않았다. 양인 신분으로서 천역을 하며 자손 대대로 수군 패찰을 차고 다녀야 했지만 지금은 다만 살아남 았다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용감하게 싸워 자랑스럽다는 것은 더 좋았다. 다른 판옥선들은 지금도 저 멀리서 좌선이 언제 불타나 지켜보고 있었지 만, 박재석은 앞으로 그럴 일은 절대 없다고 단정했다. 이제는 그런 겁쟁 이들은 없어도 된다는 자신감이 강하게 들었다. "왜선이 천 척이라도 감히 우리 배에 올라오지 못한다. 끝까지 이렇게 싸우면 우리 배 한 척으로도 울돌목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너희들도 이제 자신이 생겼느냐!" "예에!" 군사들이 일제히 허리를 숙여 대답했다. 통제사 말은 지나친 것 같기 도 했지만 전혀 불가능한 것도 아니었다. 방금 쳐부순 왜선 8척의 공격 은 화포를 사용하지도 않고 막아냈다. 박재석은 이런 식으로 계속 싸우 면 왜선이 천 척이라도 못 막을 일은 없을 것 같았다. "너희들은 동요하지 말고 힘을 다하여 싸우라! 도망가지 않으면 너희 들이 죽을 일은 없다. 용감히 싸우는 동안은 죽지 않을 것이다. 내 말뜻 을 알겠느냐!" "예에!" "와아! 와아아! 와아아!" 군관들이 다시 일제히 허리를 숙였다. 나머지 수졸들과 영노들은 끝없 이 함성을 질렀다. 박재석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대장이 먼저 달아나고 장수들과 수졸들이 다투어 달아나기 바빴던, 그래서 격군들이 허무하게 왜군의 칼에 맞아 죽거나 물에 빠져 죽은 칠천량해전과 완전히 달랐다. 그때도 이렇게 싸웠으면 죽을 사람도 없었을 것을. "우리는 조선수군이다!" 이번에는 우치적이 나섰다. 임진년부터 전쟁터나 술자리에서 외치던 구호였다. 왜군에게 단 한번도 패한 적이 없는 수군이라는 자부심이 가 득 담긴 구호였다. 그러나 우치적은 비교적 젊은 나이에 순천부사라는 고위 관직에 오른 인물로, 수군들이 원수처럼 미워하는 원균이 밀어준 사람이었다. 작년 말, 삼도수군통제사 겸 전라좌수사인 이순신을 견제하기 위해 조정에서 일부러 원균의 사람인 우치적을 순천부사에 앉혔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그리고 춘원포에서 대장 원균을 버리고 달아난 비겁한 사람이기도 했다. 그래서 아무도 그의 말에 찬동하지 않았다. 특히 수졸과 영노들은 우치 적에게 싸늘한 눈길을 보냈다. "우리는 조선수군이다!" 선장 송한이 가운데로 발걸음을 옮기며 외쳤다. 원래 빨간 두정갑이 핏물에 젖어 이제는 아예 시뻘갰다. 피에 젖어 얼굴을 알아볼 수도 없었 다. 왼손에서 시뻘건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것은, 싸울 때 방패 대신 손 을 사용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자랑스런 조선수군이다!" 이번에는 진무 성복이 나서서 우렁차게 외쳤다. 갈갈이 찢긴 소매 사 이로 비치는 팔뚝과 얼굴에는 온통 시뻘건 피딱지가 앉지 않은 곳이 없 었다. 그러나 그는 활짝 웃었다. "우리는 진짜 수군이다! 나는 수군이 좋다!" 전라좌수영 영노 봉학이 활을 들어올리면서 외쳤다. 얼마나 활시위를 잡아당겼으면 지금도 오른손 손가락 마디마다 피가 줄줄 떨어지고 있었 다. 박재석이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간신히 움직여 외쳤다. "그래! 우리 모두 조선수군이다!" "와아! 우린 조선수군이다!" 외침은 한동안 이어졌다. 그리고 서로를 쳐다보면서 웃었다. 그 무섭기 그지없는 통제사도 주름진 이마를 찡그리며 웃고 있었다. 그러나 눈은 왜선들이 있는 곳에서 떼지 않았다. "목마른 자는 물을 마시고, 배고픈 자는 미숫가루를 물에 타서 먹어라! 다친 사람은 의원의 치료를 받아라." 우치적의 명령에 군사들 시선이 처음에는 물통을 들고 오는 무상 김돌 손을 향했다가 다시 일제히 이극신으로 향했다. 강진현감 이극신은 여전 히 입술을 앙다물고 있었다. 엉덩이에 꽂힌 불화살의 불은 이미 꺼졌지 만 갑옷 뒤쪽과 바지가 새카맣게 그을려 있었다. 의원 정종이 이극신에 게 다가갔다. "됐네. 됐어. 나중에 싸움이 끝나면 좀 봐주게." 이극신이 손사래를 쳤지만 정종은 이극신의 소매를 잡아 사다리로 이 끌었다. 선실로 내려가려는 것이다. 이극신이 간신히 반걸음씩 옮기며 따 라갔다. 끌려갔다는 표현이 맞았다. 몇 걸음 걷다 만 이극신이 입을 반쯤 열고 겨우 말했다. "어허! 지금은 됐대도, 이 사람아." "현감 어른. 지금 바로 뽑으셔야 합니다. 독이 오를 지도 모릅니다." 이극신은 아직까지 아픈 표정 한번 짓지 않았다. 그러나 의원 정종이 화살을 손에 잡자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아악! 아파! 아프단 말야! 제발 놔줘, 엉엉!" 박재석은 다른 수졸들과 함께 물을 마셨다. 마셔도 마셔도 갈증은 가 시지 않았다. 맥이 풀려 허기를 느낄 새도 없었다. 미숫가루 탄 물은 아 무도 먹지 않았다. "어허! 천천히 마셔. 물은 많으니까. 그러다 탈 날라." 수졸들은 김돌손의 말에는 신경도 쓰지 않고 계속 퍼마셨다. 무상은 물을 긷고 나르는 급수군이 아니라, 돛대 위에서 망을 보는 사람으로 배 의 항해를 맡은 수부들 중에서 가장 경험이 많은 자라 할 수 있다. 일명 선두무상船頭舞上이라고 한다. "선장 나으리이! 죄송하지만 격군들을 잠시라도 쉬게 교대를..." 사다리에서 반쯤 몸을 내민 도노장이 선장 송한에게 말하다가 놀라 얼 어붙었다. 온몸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게 마치 나찰 같았다. 우뚝 서 있는 송한은 이제는 말할 힘도 없어 보였다. 박재석은 선장이 시키지도 않았는데 후들거리는 다리로 간신히 사다리 를 내려갔다. 그 뒤를 성복, 김개동 등이 따랐다. 생각해보니 이런 격류 에서 계속 노를 저은 격군들은 아마도 죽을 맛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안 전한 갑판 아래에 있는 편이 낫다고 박재석은 생각했다. "계생 아닌가? 왜 죽었지?" 그들이 돌아온 곳에는 계생이 죽어 누워있었다. 싸움이 두렵다고 올라 가지 않고 7노 사람들과 함께 노를 계속 저은 것으로 알았는데, 전혀 뜻 밖이었다. 박재석은 판자를 얼기설기 붙인 출입문과 총탄 자국이 가득한 천장을 쳐다보고 나서야 이곳에서 벌어진 일을 알아챌 수 있었다. 격군 들이 선실벽에 걸린 노를 힘껏 들어 올렸다. "좌우변 1로 승로!" "좌변 1로 승로!" "우변 1로 승로!" 박재석이 이제는 조금 익숙해진 자세로 노를 저었다. 싸우느라 팔에 감각이 전혀 없었지만 상관없었다. 이제는 박재석도 허리를 제대로 이용 해 노를 저을 수 있게 되었다. = 와키자카 함대 어립선, 겐타로 "알겠다."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이 말밖에 하지 않았다. 전령과 함께 온 엔메이 나 겐타로는 일부러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의 관심은 오직 멀리 보이는 조선수군의 대장선과 구루지마군 뿐이었다. 짙은 갈색을 한 야스하루의 갑옷이 겐타로 눈에 확 들어왔다. 위 아래 로 엮어진 금색 원 두 개가 가슴과 배 부위에 걸쳐 그려진, 훌륭한 갑옷 이었다. 와키자카 부대에 속한 자로 고가시라小頭(아시가루 3~5명을 통 솔하는 하급무사) 이상은 누구나 입는 것이지만 야스하루의 갑옷은 특별 히 화려했다. 어깨에 걸치는 끈은 특별히 금실로 만들었고 갑옷 전체에 걸쳐 번쩍번쩍 광택이 났다. 야스하루의 부장部將이 겐타로를 흘낏 쳐다보았다. 보통 철포가 아니 라 무거운 오오쓰쓰를 들고 있는 겐타로가 신기했던 모양이었다. 겐타로 는 자랑스럽게 으쓱해 보였다. "적 대장선에서 깃발이 새로 올랐습니다!" 앞을 바라보던 와키자카 군 병사가 보고했다. "어떤 깃발이냐?" 야스하루가 물었다. 선수에 나와 양다리를 조금 벌리고 서 있는 자세 가 매우 늠름했다. 그리고 지금 타고 있는 아다케후네의 웅장한 크기도 그런 야스하루를 돋보이게 해 주는데 한몫 했다. "사로잡은 조선 어부가 말하기를, 다른 배를 부르는 데 쓰는 초요기라 했습니다!" "초요기라고? 이순신도 지금 다급하긴 한 모양이구나. 하긴 대장선을 버리고 전부 뒤로 도망쳐 있으니. 흥! 그래봤자 아무도 오지 않을 거다!" 멀리 보이는 판옥선 10여 척에 대고 야스하루는 비웃음 섞인 말을 토 해냈다. "겁쟁이 조선 놈들!" "야스하루 님.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엔메이가 궁금하다는 듯 야스하루에게 말을 걸었다. 조선 육군이야 워 낙 겁쟁이라는 소문이 자자했지만 수군은 용감하다는 말을 전부터 들어 왔다. 조선수군에게 딱 한번밖에 이겨보지 못한 일본수군이었다. 그것도 제대로 싸워서 이긴 것도 아니었지만. "어째서 아무도 이순신을 돕지 않을 거라 장담하시는 겁니까?" "간단한 일이다!" 답답하다는 듯 야스하루가 잘라 말했다. "10년 전 지금과 똑같은 일이 있었다. 그때도 궁지에 몰린 조선수군 배 한 척이 초요기를 올려 같은 편을 불렀지. 그런데 그때 아무도 오지 않았다." 1587년, 즉 정해년 3월에 일본 오도五島 왜구들이 배 16척에 타고 전 라도 고흥에 있는 손죽도에 침범한 일이 있었다. 이 왜구를 토벌하기 위 해 전라좌수군 각 전선이 집결하여 대치했다. 그러나 조선수군은 녹도만 호 이대원만 용감히 돌격했을 뿐 나머지는 아무도 싸우려 하지 않았다. 포위 당한 채 사력을 다해 싸우던 이대원은 곧 견디지 못하고 초요기를 올려 구원을 청했다. 그러나 겁에 질린 조선수군은 아무도 이대원을 도 와주지 않았다. 그리하여 이대원은 전사했고 수졸 백 여명은 왜구의 포로가 되었다. 그때 포로가 된 수졸들을 통해 일본은 조선의 실정과 수군에 대한 지식 을 얻을 수 있었다. 야스하루도 당시 조선 포로 몇 명을 직접 심문해 본 일이 있었다. "일단 겁에 질리면 형편없이 약해지는 게 조선군이다. 그런데 지금이 바로 그렇다. 저 뒤에 있는 전선들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그렇군요." 야스하루의 설명에 엔메이는 수긍이 간다는 얼굴을 했다. 그러나 겐타 로는 이해할 수 없었다. 적과 싸우는 아군을 뻔히 보면서도 돕지 않는다 는 것은 도저히 사람이 할 짓이 아니었다. 그러나 야스하루가 말한 것은 사실과 달랐다. 당시 그 전투 전에 이대 원이 왜선 몇 척을 쳐부숴 전공을 세운 적이 있었고, 전라좌수사 심암이 전공을 빼앗으려다 실패했다. 그래서 심암은 이때 이대원을 척후에 세우 고 다른 판옥선들에 이대원을 구원하지 않도록 명령했던 것이다. 그 사 실이 밝혀진 다음 심암은 당고개에서 참수 당하고 조리 돌림을 당했다. 그런데 선조는 싸우다 죽은 이대원의 벼슬을 올리자는 조정 중신들의 의견에 반대했고, 이대원의 늙은 어머니에게 내려준 것은 고작 쌀 20가 마에 불과했다. 후에 이대원의 사당이 세워진 것은 수졸들이 전라감사에 게 요청했기 때문이다. 이대원은 광해군 때에야 공신록에 들어갈 수 있 었다. "엔메이." "예, 야스하루 님." 엔메이가 허리를 팍 숙였다. 겐타로는 야스하루의 말이 떨어질 때마다 고개를 숙이는 엔메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지위가 높아져도 다이묘 들에게 저렇게 절을 자주 해야 하니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 묻겠다. 자네가 보기에 과연 저 구루지마군이 이순신을 이길 수 있을 것 같나?" "허!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야스하루의 느닷없는 물음에 엔메이가 손을 올려 머리를 한번 쓰다듬 었다. 머리카락이라곤 하나도 없는 대머리를 쓰다듬는 모습이 겐타로가 보기에 좀 우스웠다. "소승이 그런 건 어떻게 미리 알겠습니까?" "도도 다카도라 님의 측근에다 승전기원까지 한 자네가 아닌가? 능력 이 없다고 말하지는 않겠지." "곤란하군요." 엔메이는 슬쩍 고개를 숙였다가 들며 말했다. "만일 구루지마군이 진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진다는 말이군. 말을 빙빙 돌리지 마라." 야스하루는 엔메이가 내놓은 말에 금방 알겠다는 태도를 보였다. 그러 자 반대로 엔메이가 물었다. "야스하루 님 생각은 어떠십니까? 방금 초요기가 올라도 이순신에게 구원은 오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그럼 구루지마군이 이긴다는 말입니 까?" "구원이 오지 않는다는 것과 구루지마군이 이긴다는 건 다른 문제다." "그럼..." "구루지마군은 이기지 못한다. 투지는 훌륭하고 실력도 제법 있지만 기껏해야 해적떼다. 그런데도 그들은 혼자서 조선수군 전체를 이기려 하 고 있다. 그런걸 바로 과욕이라 하는 거다." "과욕... 입니까?" 야스하루가 한 말을 엔메이가 되씹었다. 야스하루는 손을 들어 약간 떨어진 곳을 가리켰다. "저길 봐라. 내 휘하 배들이 저렇게 안쪽까지 진입했지만 미치후사는 일부러 막고 있다. 그에게는 앞에 있는 이순신도 적이지만 뒤에 있는 나 도 적이 되는 거다." "저런!" 이번에는 엔메이보다 먼저 겐타로가 소리쳤다. 야스하루가 가리킨 곳 에는 구루지마군 배들이 전투대형으로 밀집해 있었다. 안전한 후방임에 도 그들은 야스하루 함대에 대해 빈틈없는 경계를 펴고 있었다. "구루지마군 후미를 맡은 시라가와 아카기白川赤鬼요. 우리 군 선봉에 대고 더 이상 접근하지 말라며 아까부터 저러고 있소." 야스하루의 부장이 덧붙여 설명했다. 공을 세우려는 아군끼리의 충돌 이 벌써부터 시작된 것이다. 겐타로는 기가 막혔다. 무장들끼리 전공 다 툼이야 언제든 있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어쨌든 총대장 다카도라 님께서는..." "알고 있다! 같은 말을 두 번 하게 하지 마라!" 엔메이가 다시 다카도라의 명령을 언급하자 야스하루는 거칠게 그 말 을 잘랐다. "명령은 지킨다. 구루지마군이 위기를 맞으면 할 수 있는 한 돕겠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그리고 야스하루는 알 수 없는 말을 하나 던졌다. "일단 싸우게 된 다음에는 나도 생각하는 바가 있다. 그 뒤에 내 휘하 는 내가 지휘한다." = 고깃배, 마이룡 "어허! 이놈아, 빨리 저어라!" 아버지 마하수가 노호성을 질렀지만 마이룡과 동생 마화룡은 땀만 흘 리고 대답하지 못했다. 해협이 가까워지자 물살이 장난이 아니었다. 아무 리 저어도 배가 앞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군선이라면 여러 명이 노를 저 어 해협을 지나가는데 큰 상관이 없겠지만 2명이 젓는 고깃배에는 여기 까지가 한계였다. 그러나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고 옆으로 이동하는 게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거의 제자리를 지키면서도 마이룡은 물결에 흘러오는 왜병들 을 따라 배를 좌우로 움직였다. - 빡! 뱃전에 앉은 마하수는 표정 하나 안 바꾸며 철퇴를 내리쳤다. 허부적 거리면서 물에 거의 빠져 죽기 직전에 배를 향해 다가온 왜병이 머리가 깨지면서 가라앉았다. 왜병의 몸이 몇 번 물위에 뜨더니 곧 아주 보이지 않게 되었다. 마이룡과 마하룡은 마주보며 입을 쫙 벌리며 웃었다. 아버지 마하수가 지금까지 왜병을 열 명 넘게 때려잡은 것 같았다. 뛰어난 장수도 못할 일을 아버지가 힘들지 않게 해치우자 아버지에 대한 존경심이 샘솟듯 했 다. 그런 다음에 마이룡은 다시 물에 떠내려오는 왜병을 찾았다. 이미 죽 은 건 필요 없고 물위에서 허우적대는 왜병이어야 했다. 둘이 힘을 합해 삐걱거리며 노를 젓자 배는 점점 옆으로 움직였다. 이번 목표는 판자를 잡고 주둥이만 간신히 물 밖으로 내민 왜병이었 다. 그 왜병이 고깃배를 보더니 반대쪽으로 죽어라 헤엄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거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네 이놈들! 겨우 물에 빠진 놈 때려죽이자고 우리가 여기까지 온 것 이더냐? 정녕 네놈들이 죽고 싶은 게로구나. 지엄한 군율을 시행해야 정 신을 차리겠느냐?" 마하수가 환도를 빼들었다. 마이룡은 큰소리를 지르는 멋진 모습의 아 버지에 대한 존경심이 새록새록 돋아났다. 하지만 정말로 아버지가 자식 들에게 칼을 내리칠지 모를 일이었다. 마이룡이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간신히 변명했다. "아부지. 참 죄송한디요. 아무리 저사도 안 나가는디요." "이런!" 마하수가 벌떡 일어서자 마이룡이 다급하게 둘째형을 불렀다. "행임. 행임. 위룡이 행임. 화룡이하고 교대 쫌 해주믄 안대까다?" 그러나 마위룡은 땀을 뻘뻘 흘리는 셋째, 넷째 동생들을 한번 쳐다보 더니 코웃음을 쳤다. "느그들, 활 쏠 줄이나 아냐?" 마이룡은 할 말이 없었다. 그러나 마위룡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한 마디 한 마디가 마이룡의 가슴을 콕콕 찔렀다. "활은 10년 넘도록 죽~으라 연습해야 된단 말이다! 근디 닌 몇 달 쏘 다 말았지? 근다고 글공부는 제대로 하냐? 맨날 술 퍼묵고 기집질이나 허고 안 그래쌌냐? 니 그래 가꼬 장가나 제대로 가겄냐? 칵! 저른 것들 은 수군에 처너부러야 정신을 차리는디." "허허! 그만 두거라. 아직 애들 아니냐." "죄송합니다, 형님." 큰 형님 마성룡은 서른이 넘은 나이였다. 따뜻한 눈으로 동생들을 바 라보자 마이룡은 죄송한 마음뿐이었다. 여기서 크게 뉘우치고 마음을 잡은 마이룡은 나중에 무과에 응시해서 꿈에도 그리던 수군장수, 그것도 전쟁시의 전라좌수영 수군우후가 된다. 그러나 그때는 하필이면 병자호란이고 뱃길도 멀어서 일단 출동은 했지 만 거의 역할을 할 수 없었다. "우수영 쪽으로 붙여라. 기슭으로 가면 물살이 약하다." "허연 거품이 일어나는디요?" 큰 형님 말에 마이룡이 실눈을 뜨고 우수영 쪽을 바라보았다. 해협을 통과하는 흙탕물 위에 하얀 물거품이 기슭 가까운 곳에 한 줄기씩 흘렀 다. 그것들은 우수영 앞바다에서 좌우로 활짝 벌어졌다. 그리고 우수영 앞바다에 섬이 하나 있고, 그 사이로 물이 흘러 물살은 굉장히 약한 편 이었다. "그건 암초 때문에 그런 거다. 걱정 마라." 큰형 말에 마이룡은 걱정이 더 많이 됐다. 이 작은 배가 암초에 부딪 치면 살아남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때 화를 누그러뜨린 마하수가 입을 열었다. "왜선이 보이면 말이다. 애들아. 130보 정도 거리를 두고 나하고 성룡 이, 위룡이는 활은 쏜다. 딱 과녁 거리 아니냐? 그리고 셋째하고 막내는 제자리에서 밀리지 않을 정도만 노를 저어라." "왜선이 다가오면요?" 마이룡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싸움이라면 무조건 적에게 돌격 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그때는 물러서라. 왜선이 다가오는 만큼만 물러서면 된다. 그럼 절대 조총에 안 맞는다. 우리는 안전한 곳에서 계속 적에게 화살을 날릴 수 있다. " 마하수가 찬찬히 설명해주었다. 마이룡이 듣고 보니 대단한 작전이었 다. 우리는 안전한 곳에서 마음놓고 적을 공격한다. 이런 싸움이라면 식 은 죽 먹기였다. 마이룡이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렸다. "오오! 아버님은 역시 재갈공명 뺨치는 훌륭한 책략가이십니다! 존경 합니다!" "나도이다!" 마화룡도 빠지지 않았다. 역사전쟁소설 // 남해 // 1권 copyright (C) 2001 김경진 안병도 신재호(필명) 공저 업로드 김경진 (전쟁소설 데프콘 1, 2, 3부, 동해, 남북, 판타지 하늘길잡이 공동저자) 7. 철갑선 = 구루지마군 쥬군中軍, 도쿠이 미치토시 "물러서라고? 그게 정말 나한테 내린 군령인가? 주군의 군령인가?" 미치토시는 순간 흥분해서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미치후사가 보 낸 전령이 전한 군령 때문이었다. 젠군은 전멸했고 하타 노부도키가 죽 었다. 이어서 쥬군도 붕괴하고 있었다. 결사적으로 돌격하겠다는 미치토 시에게 다시 한번 반복하는 전령의 말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무조건 물러서서 명령을 기다릴 것. 미치후사님의 군령입니다." "어떻게... 어떻게 내가 여기서 물러설 수 있겠느냐!" 미치토시는 뽑아든 칼끝으로 조선수군의 좌선을 가리켰다. 판옥선 근 처에는 다 부서진 판잣집처럼 처참한 모습으로 변한 배들이 불타며 물살 에 떠내려가고 있었다. 악착같이 고함을 지르며 싸우는 무사와 창을 잡은 병사들이 보였지만 이들은 요란한 폭음과 불꽃이 한번 훑고 지나가고 나면 썩은 짚단처럼 우수수 쓰러졌다. 물위에 떠 있는 시체들에서 흘린 피로 바다는 붉게 변 한 지 오래였다. "봐라! 지금 저기서 내 부하들이 죽어가고 있다. 나와 지난 20년을 함 께 했던 부하들이 말이다! 내가 어찌 저들을 내버려두고 빠져나갈 수 있 겠나? 비겁하게 나 혼자만 살겠다고 후퇴하란 말이냐?" "군령입니다. 반드시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전령은 끝까지 냉혹했다. 그러면서도 전령은 제대로 격식을 갖 추고 있었다. 미치토시는 이 전령이 오랫동안 미치후사를 모신 근습이라는 것을 알 고 있었다. 미치후사는 혹시라도 미치토시가 말을 듣지 않을까 염려해 특별히 무사를 전령으로 보낸 것이다. 도쿠이 미치토시는 주군 구루지마 미치후사와 비슷한 미치토시라는 이름을 버리고 싶은 욕망을 지금처럼 강하게 느낀 적이 없었다. "크윽!" 미치토시 입에서 알 수 없는 소리가 나왔다.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목 구멍에서 나온 소리였다. 미치토시가 칼을 갑판에 박으며 대답했다. "알겠다. 군령이라면... 따르겠다. 주군께 그렇게 전해라." 삼나무 판에 박힌 검날이 부르르 떨렸다. = 경상우수영 좌선, 우치적 "앞에 오는 적선 두 척은 별 것 아닙니다. 하지만 뒤를 보십시오, 통 상. 적선 20척 정도가 한꺼번에 움직이고 있습니다." 통제사는 고개만 끄덕거렸다. 그러나 지금 우치적과 통제사의 시선은 왜선이 아니라 선장 송한에게 가 있었다. "천자총통을 쏘아라!" 익숙한 진동과 함께 하얀 연기가 판옥선을 휩싸며 피어올랐다. 송한은 아까보다 훨씬 여유가 있어 보였다. 그리고 차분한 송한의 음성을 들은 우치적은 다른 수졸들도 점차 흥분을 가라앉히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 다. "도훈도, 왼쪽으로 틀어라! 우변 화포 발사 준비!" 화포장과 포수들도 자신감에 넘쳤다. 당장 포를 쏘는 것보다는 그 다 음 과정을 미리 준비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처럼 여유를 부리며 움직였 다. 저들이 전투 초반에 손이 덜덜 떨리면서 자꾸 실수하던 포수들이라 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곧이어 오른쪽으로 다가오던 왜 대선이 집중포격을 받고 형편없이 부 서졌다. 표적이 된 왜선 갑판에서는 왜군들이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송 한은 여유를 갖고 대처해나갔다. "좌변 화포 발사 준비. 도훈도, 오른쪽으로!" 도훈도도 아까보다 훨씬 안정을 찾고 있었다. 이제는 익숙해졌는지 도 노장과 격군들도 손발이 척척 맞아들어갔다. 배가 오른쪽으로 틀자 왼쪽 현의 포수들이 발사준비를 마쳤다. 그때 왼쪽으로 다가오던 왜 대선에서 화려한 갑옷을 입은 왜장이 작은 배로 옮겨 타고 있었다. "저 자는, 분노하면서도 무척 부끄러워하는 것 같습니다." "저 자가 대장인가? 위험했네. 막아낸 것은 천행이었어." 우치적이 가리키자 통제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치적은 전혀 뜻밖이 라는 듯이 통제사를 다시 쳐다보았다. 우치적이 알기로 이만큼이라도 통 제사가 적을 칭찬한 적은 없었다. 조선군의 집중된 화살공격을 받으면서 도 접의자에 앉은 채 꿈쩍하지 않는 왜장을 보고도 단지 '고얀 놈'이라고 욕한 통제사였다. - 퉁! 투퉁! 차대전과 조란탄이 곧 날아갔다. 하지만 왜장이 탄 배는 아슬아슬하게 대선을 떠나고 있었다. 각종 화포에 10발 가까이 명중한 왜 대선은 벌써 반쯤 기울어지고 있었다. "편전을 쏘아라!" "불화살을 쏘아라!" "장전을 쏘아라!" "질려포통을 던져라!" 송한이 단계별로 연이어 명령을 내렸다. 거친 물살 위에 새로운 난파 선 두 척이 추가되었다. 이런 전투방식에 이미 익숙해진 군사들이 다음 싸움에 대비해 준비하고 있었다. "아! 저것들을 보십시오! 세 척은 엄청나게 큽니다." 우치적이 가리킨 곳에는 빨간 배 세 척이 움직이고 있었다. 뱃전에서 는 군관들 사이에 잠시 탄식이 일었다. 햇빛을 받아 번쩍거리는 것이, 갑 판에 철판까지 깐 모양이었다. "큰일났습니다!" 우치적의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조선수군에게 5년 넘게 당한 왜군들 도 바보는 아니었다. = 거제 1선, 안위 "아무리 불러도 가는 놈이 없구나. 중군장마저!" 좌선 돛대 끝에는 여전히 파란 초요기가 휘날리고 있었다. 거제현령 안위는 부끄러워 죽고싶은 마음뿐이었다. 칠천량해전에 이어 이번에도 대장을 버렸고, 피난민들도 작은 배를 타고 싸우러 가는데 명색이 수군 장수가 이곳에 있자니 낯을 들 수가 없었다. "통제사가 제법 버텼지만 누가 가고 싶겠소? 누가 목숨까지 바쳐가면 서 임금께 충성하겠소?" 조라포만호 정공청이 울돌목을 바라보면서 실실 웃었다. 당시에는 장 수로 임명된 무장들 가운데 성심껏 직책을 수행하려는 사람은 별로 없었 다. 다만 전쟁 중이라 왕의 명령 없이 직책을 버리면 탄핵을 받기 때문 에 어쩔 수 없이 수군에 남아있을 뿐이었다. 안위도 지금 임금에게는 충성을 바치고 싶지 않았다. 무장들이 기껏 열심히 목숨 걸고 싸워봤자 임금으로부터 거짓말한다고 의심만 받았다. 역적 혐의로 목이나 잘리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작년 말에 안위가 부하들을 시켜 부산포 왜영을 불질렀지만 결과는 이 를 조정에 보고한 통제사의 삭탈관직과 백의종군뿐이었다. 안위도 남의 공을 빼앗았다고 의심만 받았다. 나중에 안위가 주도한 것으로 사실이 밝혀지자 이번에는 통제사가 안위의 공을 가로챘다는 소문이 무성했다. 공을 세웠더니 통제사는 쫓겨나고 안위는 주변으로부터 의심만 받고 만 셈이었다. 그런데 안위가 나중에 알고 보니 이것은 매우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용감하게 왜군과 싸워 공을 세운 장수들이 김덕령처럼 매를 맞고 죽거나 목이 잘린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안위는 한심한 생각이 들었다. 임금이 이런데 도대체 누가 목숨 걸고 싸우려 한단 말인가? "명나라에서는 인삼이 꽤나 비싸다고 합니다. 거제원께서도 피난 떠날 준비는 됐습니까?" 정공청이 은근히 물었다. 안위가 정공청의 여유작작한 낯빛을 보니 그 는 이미 가족을 명나라로 보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위는 정공청을 욕할 마음이 없었다. 조정 중신들도 다 명나라로 떠날 준비에 여념이 없다고 들었다. 명나라에서 돈이 될만한 것들을 챙기느라 서울에 서는 물가가 폭등했다고 한다. 안위는 가족들을 떠올려보았다. 정여립 사건 이후 풍비박산 난 일가친 척들은 요즘도 서로 연락을 끊고 쥐죽은듯이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하 마터면 가족 전체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뻔했고, 안위가 북변으로 귀 양 간 다음 처자식들은 천민으로 신분이 떨어질 뻔했다. 실로 살아남은 것이 다행이었고, 안위 입장에서는 유배를 당한 직후 전쟁이 난 것이 오 히려 고마울 정도였다. "거제원께서는 배 수사하고 절친하게 지내셨지요?" 이번에도 안위는 대답하지 않았다. 지난 한달 내내 왜군과 신경전이 벌어지자 겁에 질린 경상우수사 배설은 9월 2일에 도망갔다. 문벌이 대 단한 집안이므로 고위 관료들이 돌봐줄 것이다. 배설이 도망간 죄로 참 수될 가능성은 별로 없었다. 그래도 안위는 안타까웠다. 안위 입장에서는 훌륭한 동지가 될 수 있 는 자였는데 배설은 그만 혼자 야반도주해버린 것이다. 안위는 그 동안 배설과 죽이 잘 맞았다. 안위가 배설과 둘만 있을 때는 무능하고 시기심 많은 임금을 욕하느라 날 새는 줄 몰랐었다. 안위 입장에서는 고지식한 통제사보다는 훨씬 쉬운 상대였고, 배설은 뭔가 모르지만 안위와 비슷한 계획을 추진하고 있는 것 같았다. 서로 터 놓고 확인하기 직전에 배설이 도망가고 말았지만. "사또! 보고만 계실 것입니까?" 낮지만 분노가 가득 담긴 목소리였다. 안위가 깜짝 놀라 장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군관 김국이 환도를 잡은 왼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안위가 물끄러미 김국을 바라보았다. "통제사 혼자만 싸우게 하실 겁니까?" 김국의 목소리가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무슨 뜻인지 알아챈 안위가 빙긋 웃었다. 김국이 저렇게 용기가 있던 자인가? 안위는 새삼 사람을 다시 보았다. "사또! 우린 조선수군입니다!" 이번에는 이순과 박담동, 박수환이 나서서 김국 옆에 섰다. 통제사가 탐후인으로 부리던 자들로, 용맹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자들이었다. 안위는 통제사 주변에 이런 자들이 30명이 넘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안위는 용맹한 자들이 자연스럽게 통제사 주변에 모인 것인지, 아니면 통제사 근처에 있으면 용맹해지는 것인지 아직도 그것이 궁금했다. 이들 뒤로 다른 군관과 수졸들이 하나씩 가세했다. 눈빛이 심상치 않 은 게, 여차하면 선상반란이라도 일으킬 태세였다. 안위가 재빨리 머리를 굴려보았다. 여기서 왜군을 막지 못하면 서울도 끝장이었다. 충청도에 있다는 왜군은 군량을 보급 받은 다음 물밀 듯이 서울로 쳐들어갈 것이다. 명나라 군대는 겨우 몇 천에 불과하고, 명나라 에서는 더 이상 병력을 보내지 않았다. 조선은 이미 망했다는 소문이 파 다했다. 더 이상 싸워봤자였다. 안위는 명나라로 피난간 다음 상황을 가정했다. 명나라가 과연 왜군의 침범을 막아낼 수 있을까? 안위는 고개를 저었다. 명나라가 강군이라고 자랑하는 요동 마병도 왜군에게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아무래도 안위가 명나라로 가도 소용이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조선 출신 피난민이라면 결과가 어떨지 뻔했다. 어차피 여기 있어도 죽고 명나라로 도망가도 편 한 삶은 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나 통제사를 도와 싸운다면? 통제사의 좌선은 운이 좋아 조금 버 티기는 했지만 누가 보더라도 오래 버틸 수는 없었다. 판옥선 한두 척쯤 더 가세한다 해도 사실 소용이 없었다. 결과는 죽음뿐이었다. 그리고 안위가 더더욱 싫은 것은, 임금을 위해 죽는 것이었다. 안위 입 장에서는 이것만큼 바보스러운 죽음도 없었다. "너희들은 진정으로 싸우겠느냐?" 안위가 슬쩍 떠보았다. 옆에서는 정공청이 웃기지도 않는다는 듯이 킬 킬댔다. "우리가 싸우는 것은 가족을 위해, 백성을 위해서입니다. 더 생각할 것 이 없습니다." "합세해서 싸우면 이길 수 있습니다. 더 늦기 전에 가야 합니다." 장대 아래에 우뚝 선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 안위는 이들이 좌선의 싸움을 보고 용기를 얻었나 생각했다. 확실히 통제사는 잘 싸웠 고, 어쩌면 이길 수도 있다는 희망을 심어주었다. "어차피 우린 죽을 것이다. 너희들은 싸우다 죽겠다는 뜻이냐?" 안위가 약간은 신경질적으로 쏘아붙였다. 임금이 생각날 때마다 안위 는 짜증이 났다. "그렇습니다. 이래도 저래도 우리는 죽습니다. 이왕 죽을 바에는 싸우 다 죽겠습니다." 김국의 말이었다. 안위가 한참 눈을 마주쳤는데도 김국은 피하지 않았 다. 확실히 죽을 각오가 된 듯했다. "좋다. 선장! 아무래도 통제사를 도와야겠다. 싸우다 같이 죽자꾸나. 도 훈도! 출전 준비하라!" 군관 김국과 다른 사람들이 안위에게 일제히 군례를 올렸다. 뜻밖에 어느 정도 공감대가 형성된 것 같아 안위는 의아했다. 그러나 예외는 있 었다. "어흠! 거제원, 거제원! 그거 아시오?" "뭘 말이오? 이제 곧 전투가 시작되니 만호도 마음을 다잡는 편이 좋 을 것이오." 정공청이 다급하게 말하자 안위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배가 천천히 앞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어허! 먼저 내 말을 들어보시오. 작년 7월 그믐날일이었소. 내가 날짜 까지 기억하오. 그날 통제사께서 봄꽃이를 불렀소." "봄꽃이를요?" 안위의 눈이 커졌다. 그럼 봄꽃이가 이곳에 온 것은 통제사를 만나기 위해서였을까? 갑자기 눈에서 불이 나는 것 같았다. 안위의 눈치를 살핀 정공청이 신이 나서 말을 계속했다. "그렇소. 불러서 한참을 한 방에 있었소. 다른 사람들은 물리치고 봄꽃 이 혼자만 데리고 말이오." "이런!" 안위가 방패판 모서리를 쥔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피난민 여자들 을 건드리는 경상우수영 장수들을 그 동안 통제사가 얼마나 비난했던가? 안위의 뇌리에 떠올리기 싫은 장면이 자꾸 떠올랐다. "우습지 않소? 봄꽃이 같은 어린애를 부르다니 말이오. 통제사는 작년 에 한산도에서 술에 잔뜩 취해 계집종하고 같이 잔 적도 있었소. 하긴, 봄꽃이가 언니보다 예쁘니까, 신분도 그러니까 그런 생각을 할 수도 있 겠지요." 그때 김국이 계단을 올라오고 있었다. 허리를 펴고 당당히 올라오는 김국을 보더니 정공청의 낯빛이 하얗게 변했다. "제가 그날 사후선을 타고 고성 땅으로 봄꽃이를 마중 나갔습니다." "그래. 무슨 일이었느냐?" 안위는 장대 밑에서도 그 말이 들리나 의심스러웠다. 그러나 김국은 정공청이 무슨 말을 했는지 듣지 않고도 아는 듯했다. 아뿔사! 안위가 봄꽃이하고 뭔가 있다는 것이 부하 장수들에게 소문이 난 모양이었다. 안위는 갑자기 낯이 뜨거워졌지만 지금은 김국의 말을 들을 때였다. "제가 통제사의 명을 받아 손인갑의 애인에게 양식을 보내주었습니다. 월화는 동생을 보내 통제사께 감사 편지를 전한 것입니다. 저도 그날 운 주당에 같이 있었습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정공청은 가끔 헛기침만 할뿐이었다. 안위가 김국 에게 미소짓자 김국이 씨익 웃고는 장대를 내려갔다. 갑판 밑에서 노장들이 외치는 구호가 판옥선 전체를 울렸다. 그런데 전혀 불안감이 없이 씩씩하게 들렸다. 이제 두렵지 않다는 건가? 안위는 참 의아스러웠다. 배는 역류를 타고 천천히 앞으로 나갔다. 뒤에 처진 판옥선 10여 척에 서 군사들이 안위의 배를 주시하고 있었다. 뒤돌아보지 않아도 안위는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어흠! 험! 험! 거제원. 갑자기 중군장을 만나뵈야겠다는 생각이 드오." 정공청이 목을 길게 빼어 거제전선에 딸린 사후선을 찾았다. 정공청이 중군장을 핑계로 도망가려는 것이다. 그러나 안위가 정공청의 변명에 쐐 기를 단단히 박았다. "중군장도 따라오시는구려." 안위는 안절부절못하는 정공청을 보며 피식 웃고 말았다. 그러나 좌선 이 가까워질수록 걱정이 들었다. 통제사가 길길이 날뛸 것이 분명했다. 어떤 욕을 먹을지 알 수는 없었지만 일단 싸우고 볼일이었다. 나중에는 어떻게든 뒤로 물러난 책임을 져야겠지만. = 구루지마군 어립선, 미치후사 영令이란 글자를 새긴 전령깃발을 매단 고바야가 구루지마 미치후사의 배로 바삐 다가왔다. 그리고는 그 안에서 회색 가사를 입은 승려 한 명 과 오오쓰쓰를 든 병사가 수부들의 도움을 받으며 갑판 위로 올라왔다. 떠들썩해진 그곳을 잠시 쳐다보던 미치후사가 혀를 차고는 일부러 고개 를 돌렸다. 이번에 온 자는 말이 좀 많을 것 같았다. "총대장 다카도라님이 전하라는 말입니다." "뭐냐? 말해보라!" 다가온 엔메이에게 미치후사는 짜증부터 냈다. 뒤에 있는 총대장 다카 도라는 연신 전령을 보내 전황을 보고 갔다. 그러더니 급기야 측근승려 를 보내왔다. 도대체 무슨 속셈일까 알 수 없었다. "목숨을 걸 필요는 없다. 어렵다고 생각되면 언제든 뒤로 물러서라. 이 렇게 말하셨습니다." "쓸데없는 참견이다!" 미치후사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전혀 무장답지 않은 말이고 생각했고, 이 말을 미치후사가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했는지조차 의심스러웠다. "우리 구루지마 해적이 패할 이유도 없거니와, 설사 패하더라도 뒤로 물러나 구차하게 목숨을 이어갈 생각은 없다! 이순신이 죽든 아니면 내 가 죽든 어떻게든 결판을 낼 작정이다!" "하지만 지금 고전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엔메이는 최대한 부드럽게 말했다. 될 수 있으면 미치후사의 날카로운 성격을 건드리지 않으려는 것이다. "한꺼번에 싸우기 불편한 지형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긴 하다. 그러 나 곧 결판이 난다." 미치후사의 목소리가 약간 가라앉았다. 그는 조금 전 결사의 각오를 보인 도쿠이 미치토시에게 일단 돌아와 본진에 합류하란 명령을 내렸다. 세살 위 형을 그렇게 죽게 할 수 없다는 감정도 작용했지만, 그보다 중 요한 건 아직 감춰두고 있는 비장의 무기가 있기 때문이었다. "저쪽을 봐라." 미치후사가 손을 들어 직접 통솔하는 본진함대 일부를 가리켰다. 엔메 이와 겐타로의 시선이 그리로 향했다.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오오!" 갑자기 엔메이가 탄성을 발했다. 함대 뒤에서 천천히 앞으로 나오고 있는 배들은 특별히 큰 세키부네 로, 다락의 장갑을 강화한 전혀 새로운 형태였다. 활과 철포를 쏘는 갑판 이 간략화 된 대신 사방에 둘러쳐진 나무판에 철판이 덧대어 있었다. 게 다가 앞쪽에 있는 포구멍에는 커다란 오오쓰쓰까지 설치되어 화력도 보 강되었다. 그런 배가 3척이나 나란히 있었다. 그 배들의 잇댄 철판이 햇 빛을 반사해 마치 은으로 만든 것처럼 보이는 것도 장관이었다. "저런 배를 어떻게 만드셨습니까?" "신기할 테지." 미치후사는 의기양양한 눈으로 엔메이에게 설명했다. "이순신에게 여러 번 당한 후에 구키 요시다카 님을 비롯한 여러 무장 들이 모여 패인을 검토하고 대책을 논의한 적이 있다. 그때 나온 대책을 바탕으로 만든 거다." "대책이라면 어떤 것이온지요?" "첫째로 배를 좀더 크게 만들 것. 작은 배로는 근본적으로 적선을 압 도할 수가 없다. 둘째로 배에 철판을 덮을 것. 그렇게 되면 불에 타지 않 고 포환에도 부서지지 않는다. 셋째로 배에 화포를 실을 것. 화포로 공격 하는 조선수군에게 이쪽도 화포로 공격하는 거다." "그렇군요." 그때 일본 무장들이 분석한 패인과 대책은 실로 정확한 것이었다. 이 순신이 선조에게 올린 장계에서 늘 걱정하던 것이, 일본수군이 판옥선같 이 큰배를 만들어 거기에 화포를 탑재하면 당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그렇지만 다행히도 일본은 끝내 이렇게 하지 않았다. 배를 크게 만드 는 것만은 어느 정도 진척되어 나중에는 판옥선과 맞먹는 크기의 아다케 후네나 세키부네가 나왔다. 그러나 다른 것은 무엇하나 제대로 실현된 것이 없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아무래도 물에서 싸우는 수군이 갑자기 그 전법을 바꿀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어제까지 가벼운 배로 물살을 가르며 돌진해, 적선에 뛰어들어 닥치는 대로 칼과 창을 휘 둘러 싸우던 자들이었다. 오늘 갑자기 육중한 배에 타고 익숙하지 않은 화포를 쏘는 것으로 적을 제압하라고 말한다 해서 그대로 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저 배들에는 충분히 훈련된 자들이 타고 있다. 두고봐라! 이미 지친 조선수군이 혼비백산할 테니." 미치후사는 총대장 다카도라도 나름대로 남만에서 수입한 포를 기함에 싣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돈으로 살 수 있는 포보다 중요한 건 돈으로 살 수 없는 병사였다. 숙련되지 못한 자가 다루는 대 포가 적에게 위협이 될 리는 없었다. "하지만 오오쓰쓰만으로 판옥선을 부수지 못합니다. 이미 아시겠지만." 엔메이는 옆에 멀뚱히 선 겐타로가 힘겹게 들고있는 오오쓰쓰를 흘낏 보며 말했다. 왜군의 화기를 한마디로 철포 아니면 오오쓰쓰라고 구별하긴 해도 엄 밀히 말하면 겐타로가 가지고 있는 것은 중간크기의 나카쓰쓰라 불리는 것이었다. 힘이 좀 센 자가 잡고도 쏠 수 있는 정도의 크기였다. 반면 미치후사가 자랑한 철갑선鐵甲船 3척에는 밧줄로 감아 배에 고정 시켜야 쏠 수 있는 정도의 크기를 가진 진짜 오오쓰쓰가 있었다. 미치후 사가 지금 보이고 있는 자신감도 결국은 오오쓰쓰의 화력에 대한 믿음이 었다. 하지만 엔메이가 보기엔 나카쓰쓰나 오오쓰쓰나 다를 게 없었다. 화포 가 아니라 단지 철포의 구경을 늘린 것에 불과했다. 명나라나 조선식 화 포와는 크기와 위력에서 비교도 할 수 없었다. "부술 필요도 없다. 그냥 눌러버리면 그뿐이다." 미치후사는 가볍게 엔메이의 걱정을 일축했다. 그리고 부장에게 명했 다. "아카기에게 앞으로 나와 본진에 합류하라고 해라. 더 이상 뒤를 지킬 필요는 없다!" "알겠습니다." 부장이 전령을 불러 명령을 전했다. 그 동안 미치후사는 엔메이를 쳐 다보며 조금 작게 말했다. "배가 모이면 이번엔 내가 직접 돌격할 생각이다. 다카도라 님께 잘 보시라고 해라. 내가 죽는지 아니면 이순신이 죽는지를." "무슨 불길한 말씀을... 당연히 이순신이 죽지 않겠습니까?" "불길한 점만 쳤던 네가 그렇게 말하는 거냐? 고맙긴 하군." 미치후사가 엔메이를 보고 피식 웃었다. 처음 보인 웃음이었지만 날카 롭기 그지없었다. "저도 다카도라 님을 모시는 몸입니다.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엔메이는 찌르듯 하는 미치후사의 눈길을 피했다. 기원의식을 할 때도 그랬지만 비할 데 없이 날카로운 눈초리였다. 분노와 약간의 웃음까지 섞인 그 눈은 누군가의 죽음을 바라고 있었다. = 구루지마군 철갑선, 무사 마나베眞中衛 반질반질한 은빛 철판을 빛내며 철갑선은 그 머리로 바닷물을 가르기 시작했다. 배 전체에 걸쳐 새빨갛게 칠해진 나무판들이 철판의 은빛을 더욱 강조해 주었다. 뱃머리에 부딪치는 바닷물이 거품을 사정없이 뿌리 는 소리를 만들어냈다. 묵직한 느낌이 드는 배였음에도 일단 노를 젓기 시작하자 놀라울 만큼 날렵했다. "드디어 우리에게 기회가 왔다!" 노 젓는 수부들의 후덥지근한 열기가 올라오는 갑판이었다. 여기에서 늙은 무사 마나베는 병사들 모두에게 들리도록 큰소리로 외쳤다. "미치후사 님께 붉은 색을 쓰도록 허락 받은 우리다! 이제는 우리가 그 힘을 보여드릴 때다!" 철갑선 3척은 선체와 거기에 탄 모든 병사들의 갑옷과 무기, 그리고 깃발까지 붉은 색으로 통일하고 있었다. 철판을 댄 부분만 은색으로 보 일 뿐 나머지는 모두 붉은 색 투성이였다. 한마디로 '적색 함대' 라고 말 하면 딱 어울릴 모습이었다. 적색은 일본에서 재앙을 쫓는다는 믿음 외에도 그 화려함 때문에 주목 받았다. 때문에 가장 앞장서 싸우는 부대라든가, 가장 뛰어난 능력을 가 진 정예부대에 한해 그 영주들이 붉은 색을 사용하도록 하는 경우가 많 았다. 전국시대 최고로 강한 군대라 불린 다케다 신겐의 경우, 갑옷과 마갑 馬甲등을 모두 적색으로 통일한 휘하 기마부대가 명성을 떨쳤다. 나중에 일본을 통일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그 부대의 일부 무장과 병사를 받아 들이면서 그들이 예전과 같은 적색을 사용하는 것을 허락해 정예부대로 길렀다. 붉은 색의 말과 무사가 무리 지어 일제히 평원을 달리면 마치 불덩어리가 나가는 것만 같아 적에게는 공포를, 아군에게는 용기를 주었 다고 한다. 지금 푸른 바다를 가르며 나가는 철갑선들도 그와 같았다. 커다란 불 덩어리 세 개가 일제히 조선수군의 좌선으로 육박하고 있었다. 보통 세 키부네보다 훨씬 큰 몸통과 막강한 전투력을 지닌 배들이었다. 겨우 한 척이 버티고 있는 좁은 물길을 휩쓸어버릴 기세로 나가는 모습이 늠름했 다. - 빠각! 저 멀리 앞에서 판옥선과 맞서고 있던 세키부네 한 척이 화포에 직격 당했다. 나뭇조각과 함성이 사방으로 튀었다. 불길이 오르는 그 세키부네 아래 선실에서 창과 칼을 든 수부들이 발악적으로 기어 나왔다. 이들은 비록 노를 젓는 수부였지만 다른 함대처럼 평범한 수부는 아니 었다. 구루지마 해적의 일원답게 용기와 투지가 넘치고 있었다. 판옥선에 서 날아오는 화살과 돌에 맞아 연신 바다에 빠지고 쓰러지면서도 어떻게 든 적을 죽이겠다는 집념이 엿보였다. "저 대포만 없으면... 조선 놈들을 모두 토막내 버리는 건데!" 아시가루 한 명이 적개심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 앳되어 보이는 얼굴에는 살기가 가득 차 있었다. "걱정할 것 없다." 늙은 무사가 침착하게 아시가루의 말을 받았다. 투구사이로 흰 백발이 삐져나와 보이는 걸로 보아 넉넉히 50살은 넘어 보였다. 전국시대를 살 아온 무사 나이가 50이라면 당시로서는 대단했다. "우리가 탄 이 철갑선은 보통 나무배들과는 다르다. 이것 하나면 백 척도 이길 수 있다." "백 척이라고요? 설마요." 창을 든 병사들이 의문을 제기했다. 그러자 늙은 무사가 그들에게 다 가가 호통을 쳤다. "아직 어리구나! 네 놈들은 모를 거다!" "모르다니요. 뭘 말입니까? 마나베 님." 병사는 정말 모르겠다는 듯이 물었다. "네놈이 태어나기도 전 일이다. 거의 20년 전에 있었던 싸움이니까. 그 때 난 이런 철갑선과 싸워봤다. 그리고 처참히 패했지. 이걸 봐라!" 마나베는 잠시 투구를 벗었다. 그러자 송두리째 떨어져나가 흔적만 남 은 오른쪽 귀가 드러났다. "이게 그때 입은 상처다." 갑판에 빽빽이 탄 병사들 모두가 잠시 마나베의 백발과 그 아래 있는 흉한 귀를 보았다. 그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늙은 용사에게 상처를 입 힌 철갑선이라는 생각이 들자 이 배를 다시 보는 표정들이었다. 그것을 확인하며 마나베는 다시 투구를 썼다. "철갑선은 강하다. 20년 전에 내 귀를 빼앗아 갔던 그 철갑선과 똑같 은 배가 지금은 나를 태우고 적에게 육박하고 있다." 불타는 배와 함성, 그리고 싸움. 눈동자에 들어오는 그것들을 보며 마 나베는 잠시 옛날을 회상했다. 덴쇼天正 6년, 즉 1578년이었다. 당시 일본을 제패한 실력자 오다 노부 나가는 불교세력인 혼간사本願寺와 싸우고 있었다. 그런데 제대로 된 수 군이 없던 노부나가는 정예수군을 보유한 모리 가문이 혼간사와 연합해 대항하자 물에서는 계속 패할 수밖에 없었다. 생각 끝에 시마志摩 해적 출신의 구키 요시다카九鬼嘉隆를 등용해 싸워보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 였다. 여기서 노부나가는 기상천외한 발상을 해냈다. '절대로 부서지지 않을 거대한 배를 만들라' 는 명령을 내린 것이다. 일본 천하를 쥐고 있던 노 부나가인 만큼 돈이나 인력에서 부족함은 없었다. 때문에 이에 착안한 요시다카는 종래의 세키부네를 간단히 능가하는 엄청난 크기의 오오아다 케후네大安宅船를 만들었다. 배 전체를 철판으로 감싸고 오오쓰쓰를 탑 재한 괴물 같은 배였다. 그 해 6월에 완성된 이 거대전함이 요시다카의 인솔하에 차례로 사카 이 항구에 들어왔다. 그러자 이 요란하고 거대한 배를 구경하려고 인파 가 항구에 가득 찼다. 한 승려가 기록한 다문원일기多聞院日記에 따르면 '병력 오천은 능히 태우고 화포 3정과 장총을 장비하고 있다' 고 한다. 상당한 과장이 있는 표현이겠지만 적어도 당시 어떤 배보다 이 철갑선의 전투력이 뛰어나다는 것을 증명해 준다. 마나베가 이 괴물 같은 철갑선과 싸운 것은 그 해 11월이었다. 오오사 카만大坂灣에 들어온 이 배들을 둘러싸고 모리에게 속한 무라카미 수군 300여 척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이 가운데는 당시 무라카미가의 일원이었던 구루지마 수군도 있었다. 철포에 능한 사이가 패들을 태운 이들은 철갑선을 향해 맹렬한 공격을 퍼부었다. 하지만 탄환도 불화살도 철판에 맞으면 아무런 소용도 없이 퉁겨나갔다. 도리어 철갑선에서 쏜 오오쓰쓰는 무라카미 수군의 배들을 단번에 부셔버렸다. 고작 6대 300이라는 이 전투에서 구키와 철갑선은 압도적인 승리를 거 뒀고 마나베는 죽을 고비를 넘겼다. 그때 느낀 무력감과 공포를 마나베 는 평생 잊지 못했다. 그리고는 미치후사가 만든 이 철갑선이 완성되자 자청하여 이에 탄 것이었다. "쏴라!" 갑판 아래의 다락에서 철포대장의 고함소리가 울렸다. 그 직후에 큰 폭음과 진동이 올라왔다. 보통 철포와는 다르게 둔중한 그 소리는 분명 오오쓰쓰의 발사음이었다. 거리가 좁혀지자 철포대장이 명령을 낸 것이 다. "불꽃이다! 세 개의 불꽃이 적을 태워버릴 거다." 양옆에서 나란히 가고 있는 철갑선을 보면서 마나베는 주먹을 꽉 쥐었 다. 그것은 적절한 비유였다. 붉은 배 3척은 한 덩어리가 되어 물살을 타 고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마치 불화살처럼. 그 화살촉들이 겨누고 있 는 곳을 주시하며 마나베의 심장은 터질 듯 고동치고 있었다. 저 멀리 조선수군의 판옥선 한 척이 보였다. $$$ 1권 끝 역사전쟁소설 // 남해 // 2권 copyright (C) 2001 김경진 안병도 신재호(필명) 공저 업로드 김경진 (전쟁소설 데프콘 1, 2, 3부, 동해, 남북, 판타지 하늘길잡이 공동저자) 1. 꿈 (1) = 구루지마 본진 어립선, 구루지마 미치후사 그때만 해도 앞을 막을 자는 아무도 없었는데. 미치후사가 옛일을 생 각하며 씁쓸히 웃었다. 그 동안 잊고 있었는데 정말 오래 전 이야기였다. "그럼 전 돌아가겠습니다. 다카도라 님께 그 말씀 꼭 전해 드리겠습니 다." 엔메이의 목소리가 미치후사의 귓가를 찔렀다. 미치후사는 잠시 옛 생 각을 접어야 했다. 전투 중에 딴 생각을 했다는 게 부끄럽게 여겨지진 않았다. 그만큼 그때의 기억은 소중했다. 미치후사가 진정으로 인정하는 무장은 드물었다. 엔메이가 정중히 고개를 숙여 보이고 미치후사 앞을 물러가려 했다. 겐타로도 꾸벅 절을 했다. 그때 갑자기 미치후사가 눈을 번뜩였다. "기다려라!" "왜 그러십니까? 미치후사 님. 더 전할 말씀이라도 있습니까?" "아직 함대가 모일 동안 시간이 좀 있다. 그 동안 자네와 술 한 잔 하 고 싶다." "뭐라고요?" 어이가 없는 말이었다. 난데없이 술이라니. 앞에서는 판옥선과 싸우다 죽은 병사들이 바다를 뒤덮고 있다. 그리고 거대한 철갑선들이 함대 전 면에 나서고 있었다. 이제 구루지마 해적이 마지막 패를 내보일 중요한 때였다. 그 와중에 술을 마시겠다는 미치후사의 말이 엔메이는 이해되지 않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술을 가져오너라!" 그러나 미치후사는 엔메이의 대답이 있기도 전에 술자리를 결정지어 버렸다. 엔메이와 겐타로는 할 수 없이 그 자리에 머물러야 했다. "미치후사 님, 저는..." "오카모토는 잘 있는가?" 다시 엔메이가 뭐라고 말하려는 때 미치후사의 물음이 날카로운 칼날 처럼 날아들었다. 엔메이는 그제야 미치후사가 왜 자기를 잡았는지 알 수 있었다. "미치후사 님!" 엔메이는 너무도 놀라 말을 더듬었다. 미치후사의 시선은 엔메이가 걸 친 승복의 한쪽 소매에 머물러 있었다. 거기에 '하賀' 라는 작은 글자가 있었다. 5년 전, 그러니까 일본이 조선정벌을 시작한 첫해의 일이었다. 구루지 마 미치후사는 형 미치유키와 함께 조선에 건너가는 배들의 호위를 맡았 다. 당주 미치유키는 구루지마 수군 전체를 이끌고 제5군을 지키며 조선에 올 예정이었다. 간첩들의 보고를 듣고 조선수군의 존재는 아예 무시했기 에, 본진이 고니시 유키나가의 제1군이나 가토 기요마사의 제2군을 따라 오지 않았다. 하지만 적이 없다고 해서 위험이 없는 건 아니었다. 제대로 알지 못하 는 물길과 조류도 문제고 현지의 기상이 어떨 지도 몰랐다. 때문에 가토 기요마사의 제2군에는 두 척으로 이루어진 구루지마 수군함대가 딸렸다. 말이 함대지 세키부네도 아닌 고바야 달랑 두 척으로 이루어진 작은 함 대였다. 그 빈약한 함대를 이끌고 뱃길을 개척하러 온 사람이 바로 미치 후사였다. 나고야名護屋에서 부산포까지의 뱃길은 정말 형편없었다. 며칠간 대마 도에서 순풍을 기다렸다가 출발했는데도 뻔히 보이는 부산포까지 거의 하루가 걸렸다. 북동쪽으로 흐르는 거센 물살도 문제였고 세토내해와 달 린 거친 파도도 문제였다. 배에 익숙하지 못한 기요마사 부대 병사는 물 론이고 구루지마 휘하 병사들 중에서도 멀미를 하는 자가 나왔다. "역전의 구루지마 해적이 이게 무슨 꼴이냐!" 미치후사는 어이가 없어 호통을 쳤다. 물에 살고 물에 죽는 병사들이 갓 배를 탄 자와 마찬가지 행동을 하다니.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부산포에 닿아서도 싸움을 할 필요는 없었다. 앞서 도착한 고니시 유 키나가군이 성을 비롯한 주변 마을을 장악해 둔 뒤였다. 그저 포구에 배 를 대고 화물을 내리면 그것으로 족했다. 그런데 구루지마수군이 함께 포구에 내렸을 때 자그마한 소란이 일어 났다. 인원을 점검하던 기요마사군 병사들과 구루지마 병사들 사이에 충 돌이 벌어진 것이다. 보통 병사간의 다툼이란 게 그렇듯 시작은 사소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다 점차 언성이 높아지고 나중에는 무리를 지 어 칼을 뽑고 창을 겨누는 사태까지 발전했다. "뭐냐! 무슨 소란이냐!" 상륙해서 잠시 포구와 주변을 살피고 있던 미치후사가 다가가 소리쳤 다. 아직은 31살이란 젊은 나이였다. 20대의 패기가 남아있는 데다 본래 부터의 사나운 기질이 겹쳐 마치 잘 갈아놓은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허 공을 가르는 그 목소리에 당장이라도 칼부림을 할 듯하던 병사들이 주춤 했다. "미치후사 님!"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구루지마 병사 한 명이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저 녀석들이 우리를 깔보고 함부로 입을 놀렸습니다!" "그래? 뭐라고 하더냐?" "제대로 싸움도 할 줄 모르면서 지켜준다는 명분으로 밥만 축내는 녀 석들이라 했습니다." 미치후사 얼굴에서 핏기가 삭 사라졌다. 미치후사가 기요마사군 병사 들을 노려보자 병사들이 흠칫하며 눈길을 피했다. "그리고? 또 있느냐?" "그렇게 조그만 배를 타고 오다니. 도대체 누가 누구를 지키는 거냐고 했습니다." "후훗." 미치후사는 사정을 듣자 가볍게 웃었다. 그러나 그건 유쾌한 웃음이 아니었다. 살기와 차가움이 감도는 미소였다. "맨 처음 누가 그런 말을 했느냐?" "저 녀석입니다!" 구루지마 병사가 기요마사군 병사 한 명을 가리켰다. "알겠다. 이봐! 너 이리 나오너라." "부르셨습니까?" 비록 부대가 다르긴 했지만 미치후사가 입은 화려한 갑옷과 장식이 달 린 투구는 단연 돋보였다. 대번에 높은 지위의 무사임을 알아챈 기요마 사 부대 병사가 내키지 않는 걸음을 옮겼다. "나는 네가 조금 전 비웃은 구루지마 해적의 무사 미치후사다. 넌 네 입으로 한 말에 스스로 책임질 수 있겠느냐?"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내 휘하 병사를 가리키며 제대로 싸우지 못한다고 한 말." "제가 틀린 말을 했습니까? 기요마사군 병사는 비록 상대가 무사라는 데 눌리긴 했으나 꺾이지 않 겠다는 듯 가슴을 폈다. 거기엔 자기가 특별히 히데요시의 총애를 받는 무장 가토 기요마사 휘하라는 자부심도 있었다. 하긴 기요마사에 비하면 히데요시 앞에서 구루지마 미치유키나 미치후사 따위는 아무 것도 아니 었다. "그럼 증명해라!" "어떻게 말입니까?" "결국 시험해 보면 되는 일이다. 여럿이 뭉쳐 소란 떨 것도 없다. 그렇 게 자신 있다는 너! 여기 내 병사와 싸워 봐라! 이기는 쪽이 강한 거겠 지. 서로 칼을 들어 목숨을 걸고 싸우는 거다." "그런 거라면 얼마든지!" 건장하고 억세 보이는 기요마사군 병사는 자신 있게 앞으로 나섰다. 그러자 씨익 웃은 미치후사가 몸을 돌렸다. "단, 싸우는 장소는 저기다." "예?" 자신만만하던 병사가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미치후사가 가리킨 장소는 포구 앞 바다였다. 파도가 약간씩 치고 있는 그 바다 속에서 싸 우란 것이다. "우리는 네 녀석들을 바다 위에서 지켜주려고 온 거다. 비웃으려면 바 다에서 우리를 이기고 난 후에 해라. 그 후에는 얼마든지 받아주겠다." "하지만..." "아니면 선택권을 주겠다. 저 배 위에서 싸워라!" 포구에 닻을 내린 고바야는 작은 파도에도 끝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저렇게 흔들리는 배 위에서 싸운다면 당연히 수전에 익숙한 구루지마 해 적에게 유리했다. "그게 말이나 됩니까?" "네가 한 말이다. 책임을 진다고 했다. 어서 해라!" 더 이상 듣지 않고 미치후사는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바다가 잘 보이 는 포구 한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접의자를 가져오너라!" 앞으로 벌어지게 될 싸움을 지켜보겠단 태도였다. 휘하 병사가 가져다 준 접의자에 앉자마자 미치후사는 두 병사를 재촉했다. "자, 시작해라!" 이대로 있다간 겁쟁이로 몰릴 판이었다. 기요마사군 병사는 입술을 깨 물며 바다로 걸어갔다. 작은 배에서 싸울 엄두는 나지 않은 것이다. 얼굴 에 희미한 미소를 띤 구루지마군 병사가 뒤따랐다. "미치후사 님! 이거 대단히 실례했습니다!" 그제야 무사 한 명이 수하를 이끌고 달려와 고개를 숙였다. 뒤늦게 보 고를 받은 모양이었다. "이이다飯田라 합니다. 부디 제 병사가 저지른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젊은 무사였다. 새파랗게 젊다고는 말하지 못해도 아직 부대를 이끄는 자가 갖추는 중후함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그저 약간의 침착함을 보이 는 것이 고작이었다. "용서하고 말 것도 없소."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는 이이다를 앞에 두고도 미치후사는 냉정했다. 겉이야 어쨌든 이미 받은 모욕이었다. 병사들의 태도는 당연히 그들을 통솔하는 무사의 영향을 받는다. 이이다라는 이 무사가 평소 어떤 식으 로 병사들을 가르쳤는지 알 수 있었다. "무슨 말씀입니까?" 이끌고 온 병사 숫자는 이이다가 훨씬 많지만 미치후사와 이이다의 지 위는 틀렸다. 미치후사가 한 가문을 이끄는 사람임에 비해, 이이다는 기 요마사 휘하의 중신조차 못되는 겨우 일개 무사였다. 존칭을 써가며 사 과하는 이이다에 일부러 경어를 써주면서도 미치후사는 상대방 얼굴도 쳐다보지 않았다. "싸워보면 알게 되는 것이오. 하찮은 병사라도 일단 내뱉었다면 그건 사나이의 말. 목숨을 걸고 증명해야하지 않겠소?" "그, 그럼...?" 정중하게 사과하면 간단히 수습될 거라 생각한 이이다 얼굴에 낭패한 기색이 스쳤다. "지켜보시오." 미치후사는 가볍게 손가락으로 대결이 벌어지고 있는 장소를 가리켰 다. 이미 병사 두 명은 칼을 뽑아들고 허리 위까지 잠기는 바다 위에 서 있었다. 양쪽을 응원하는 병사들 사이엔 가벼운 함성까지 나왔다. 대결은 의외로 싱겁게 끝났다. 한쪽이 물 속에서 자유롭게 몸을 움직 이는데 비해 다른 한쪽은 몸조차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기요마사군 병 사는 단번에 목에 칼을 맞고 쓰러졌다. 이긴 구루지마 병사가 그 목을 잘라들고는 달려왔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그 병사 머리에는 도저히 어 찌할 수 없는 공포가 그대로 나타나 있었다. "보는 대로요. 어느 쪽이 물에서 강한지가 분명해졌소." 미치후사는 병사에게 수고했다고 말하고 접의자에서 일어났다. 이이다 의 얼굴이 분노와 수치심으로 일그러졌지만 신경도 쓰지 않았다. 이이다 는 드디어 참을 수 없다는 듯 외쳤다. "미치후사 님! 잠깐 기다리시오!" "무슨 일이오? 아직도 할 말이 남았소?" "분명 내 병사가 잘못을 저지른 것은 사실이오! 그렇지만 이럴 수는 없소! 이건 기요마사 님과 우리 이이다대 전부를 무시하는 행동이 아니 오?" 이이다도 나름대로 자부심이 있는 무사였다. 이이다의 오른손에는 다 이코 히데요시에게 받았다는 흰색 창이 들려있었다. 가토 기요마사와 함 께 창법을 익혔을 때 그 소문을 들은 히데요시가 하사한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하실 거요? 이대로 나와 일전이라도?" 분위기가 갑자기 험악해졌다. 대결을 계기로 미소를 띠던 구루지마군 병사들이 살기를 띠며 미치후사 주위에 모여들었다. 그러자 이에 질세라 이이다 휘하 병사도 반대쪽에 모이며 눈을 흘겼다. "잠깐 기다리시오!" 금방이라도 칼을 뽑을 듯한 미치후사와 지지 않고 버티는 이이다. 이 둘 사이에 흐르던 긴장을 깬 것은 이이다보다 더 젊은 무사였다. 그 무 사는 성큼 다가와 두 사람 사이에 끼어 들었다. "이이다 님! 주군께서 급히 찾으십니다!" "오카모토岡本 님 아니시오? 주군께서 날 찾는다고요?" "예. 아마도 중요한 용무 같습니다만." "그래요? 그럼 할 수 없지요." 이미 싸움이 시작되었다면 이이다는 결판을 내고 가겠다고 했을 것이 다. 그러나 그 전에 기요마사가 부른 것이다. 치욕은 있더라도 이 자리에 서 더 이상 뭔가를 할 수는 없었다. 이이다는 노골적으로 미치후사를 노 려본 다음 몸을 돌렸다. 기요마사가 있는 동래성으로 가는 그 뒤를 따라 병사들이 우르르 몰려갔다. "돌아가는 사정은 전부 들었습니다. 뭐라고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이이다가 사라지자 오카모토가 미치후사에게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저도 기요마사 님 휘하입니다. 비록 제 부대 병사가 한 것은 아니지 만 책임을 느끼고 있습니다." "뭐, 대수롭지 않은 일이오." 이렇게 되자 날카로운 성격의 미치후사도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털 어 버리듯 말한 미치후사가 몸을 돌렸다. "미치후사 님,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부하들을 이끌고 성으로 들어가려는 미치후사에게 오카모토가 다시 다 가와 말했다. "사과의 뜻으로 제가 술을 대접하고 싶습니다." "괜찮소." "아닙니다. 꼭 대접하게 해 주십시오." 사양하는 미치후사에게 오카모토는 거듭 요청했다. "정히 그렇다면. 갑시다." 기요마사는 억세고 거친 성품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대체로 그 수하 무사들도 그런 성품이 많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오카모토란 이 무사만 은 그렇지 않았다. 얼굴도 갸름한 것이 무사라기 보단 시동侍童에 가까 웠다. 미치후사는 조금씩 오카모토에게 묘한 친밀감을 느꼈다. "감사합니다." 미치후사는 환하게 웃는 오카모토의 모습을 천천히 살펴보았다. 그리 고 오카모토가 입은 무사복 소매에 작게 쓰여진 글자 하나가 눈에 들어 왔다. '하賀'라는 글자였다. "무라카미 해적의 명성은 익히 듣고 있었습니다." 미치후사와 마주 앉은 술자리에서 오카모토는 가볍게 말을 꺼냈다. 술자리라 해봐야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 말린 정어리 여섯 마리 에 된장과 쯔케모노(야채절임) 안주가 고작이었다. 이 자리도 조금 큰 군 막에 불과했다. 그렇지만 대접을 하는 오카모토의 진지한 태도와 성의는 미치후사의 마음에 들었다. "알아주니 고맙소." 구루지마군의 원류는 무라카미 해적이었다. 전국시대, 현재의 히로시마 현과 아이치현 접경일대에 떠있는 게이요제도芸予諸島에서 해상을 제패 한 세력을 산도우 무라카미三島村上라 일컬었다. 이 무라카미 해적은 당 주 무라카미 요시히로의 세 아들에게 분할, 상속되었다. 장남이 승계한 세력을 노지마能島 무라카미, 차남 쪽을 구루지마來島 무라카미, 삼남 쪽 을 인노지마因島 무라카미라 불렀다. 각기 근거지 지명에서 유래된 이름 이다. "그대도 보통 사람은 아니군." "무슨 말씀입니까? 전 그저 가토 기요마사 님 휘하의 평범한 무사입니 다만." "평범하다고..." 미치후사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대가 맡고 있는 부대는?" "철포대를 이끌고 있습니다. 3백 명 정도로 그다지 많은 편은 아닙니 다." 겸손하게 말하긴 했지만 결코 오카모토의 지위가 낮은 건 아니었다. 다른 부대에 비해 철포의 숫자가 그다지 많지 않은 가토 기요마사 부대 였다. 3백이라면 기요마사가 보유한 전체 철포대의 반에 가까웠다. "역시 철포대였군." "역시라니요?" 오카모토가 뜻밖이라는 얼굴로 되물었다. 그렇지만 미치후사가 말하고 싶은 건 그 숫자가 아니었다. "사이가 패가 가진 그 기술이 어디 가겠나?" "아!" 오카모토는 당혹한 표정으로 미치후사의 표정을 살폈다. "그, 그걸 어떻게..." "뭐, 그대도 알고 있는 사실이겠지만 사이가 패와 우리 무라카미 해적 은 예전에 밀접한 협력관계에 있었다. 사이가 패의 비밀스러운 부분까지 어느 정도는 알고 있지." "그랬... 군요." 오카모토의 목소리가 약간 떨렸다. 하극상과 혼란이 계속된 전국시대에 일본에선 기존의 영주나 호족과는 다른, 특별한 세력들이 많이 일어났다. 해상을 활동무대로 삼은 무라카미 해적도 그렇거니와 상업을 통해 얻은 부를 배경으로 한 사카이 상인들, 둔갑술과 공작에 뛰어난 닌자 등이 그랬다. 사이가 세력은 철포 제작과 사용에 뛰어난 능력을 지닌 사람들이 모여 만든 것이었다. 때문에 전쟁이 벌어지면 많은 영주들이 다투어 그들을 고용했다. 창이나 칼과 달리 전문적 기술이 많이 요구되는 철포는 뛰어 난 위력의 신무기였기에 당연히 그 수요가 많았고 사이가 패는 크게 번 창했다. 그러나 그런 번영은 오래가지 않았다. 불행히도 사이가 패는 일본을 통일하기 시작한 실력자 오다 노부나가와 토요토미 히데요시에 대항했 다. 긴 항쟁이 계속 됐으나 결국 사이가 패는 히데요시의 집요한 공격에 궤멸 당했다. "잠시 잊고 있었습니다." "그게 아니겠지. 그대는 아직 숨기고 싶었던 거다. 내 말이 틀리나?" 어색하게 변명하는 오카모토에게 미치후사는 술 한 잔을 따라 주었다. 추궁하는 듯한 말투에 악의가 없다는 것을 나타내는 행동이었다. "맞습니다." "신기한 일이군. 사이가 패라면 벌써 다 전멸하고 사라진 줄 알았는데 말이야. 다시 그 문양을 보게 될 줄은 몰랐어." "이것 말이군요." 오카모토는 소매를 올려 그 안에 쓰여 있는 글자를 보았다. 賀는 사이 가雜賀에서 한 글자를 딴 것이다. "그것, 사이가 패가 특별히 다른 부대에 첩자를 파견할 때 서로 알아 보기 위해 쓰는 표지가 아닌가." "잘 알고 계시는군요." "같은 편이었으니까." "하지만 배신했지요, 구루지마 가문은." 침착함이 돌아온 오카모토 얼굴에 이번엔 경멸의 빛이 스쳤다. 사이가 패가 오다 노부나가에 대항해 그 반대세력을 돕고 있을 때 무 라카미 해적도 처음에는 사이가 패와 같은 편이었다. 그래서 혼간사本願 寺를 둘러싸고 벌인 싸움에서 모리毛利 가문에 속해 나란히 싸웠다. 무라카미 해적이 모는 배에 사이가 패들이 올라타 철포를 쏘아대면 그 것만으로도 오다 가의 병사들은 기가 꺾여 달아났다. 그렇게 몇 차례나 승리를 거뒀지만 나중에 무라카미 가문은 분열됐다. 이미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고 천하를 노리고 있는 오다 가문에 붙는 쪽이 났겠다는 주장과 기존의 의리를 지키자는 주장이 대립한 것이다. 여기에 해묵은 계승권 다툼까지 겹치자 구루지마 세력은 무라카미 가를 배신하고 오다 쪽에 가 담했다. 사이가 패로서도 뼈아픈 사건이었다. "지금이라면 몰라도 그때는 아직 어떤 쪽도 믿을 수 없던 때였다. 어 느 쪽에 가담하는 가는 각자 살아남기 위한 선택일 뿐. 비난받을 일은 아니다." 미치후사가 오카모토에게 그 일을 사과하거나 변명할 필요는 별로 없 었다. 그러나 미치후사는 왠지 명분을 달고 싶었다. 술기운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긴 미치후사 님 말씀이 틀린 건 아닙니다. 대세를 이룬 세력에게 가담하든 저항하든 그건 각자가 알아서 할 몫이겠죠." "사이가 패는 어리석었던 거다." "그렇지 않습니다!" 오카모토의 목소리가 갑자기 높아졌다. "비록 세간의 이치는 그럴지 몰라도 세상에는 대의大義란 게 있습니 다. 사이가 패가 전멸할 때까지 싸운 건 바로 그 대의를 위해서였습니다. 눈앞의 이익보다 더 중요하다 믿었기 때문입니다." "대의라고?" "힘만으로 천하를 얻으려는 자에게 무엇을 바란단 말입니까? 그런 자 가 천하를 얻고 나면 과연 무슨 일이 벌어질지 생각해보신 적이 있습니 까?" "그런 생각은 해 본 적이 없다." "그 결과가 바로 이겁니다." 미치후사가 따라준 술잔을 한번에 들이킨 오카모토는 눈동자에 가득한 분노를 숨기지 않았다. "조선으로의 이번 출진. 내심으론 누가 찬성했습니까? 다들 싫으면서 도 어쩔 수 없이 싸우려고 온 것 아닙니까?" "감히 다이코 전하를 욕하는 건가?" 견딜 수 없게 된 미치후사가 오카모토를 노려보았다. 생각이야 그도 오카모토와 같았다. 그러나 입 밖으로 쉽게 낼 수 있는 말은 아니었다. "미치후사 님도 한때는 그 다이코 전하와 싸운 몸 아닙니까. 그때는 무슨 생각으로 싸우신 겁니까?" "그대도 제법 날카롭군." 미치후사는 눈빛을 누그러뜨리며 말린 정어리를 입에 집어넣었다. "이곳엔 우리 둘만이 있습니다. 억지로 꾸며 말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오카모토가 나직이, 그러나 힘있게 말했다. "잊고 있었다." "잊고 계신 게 아니겠죠. 아직 숨기고 싶었던 겁니다. 제 말이 틀렸습 니까 미치후사 님?" 미치후사가 했던 말이 그대로 오카모토에게서 나왔다. 미치후사는 쓴 웃음을 지었다. 사이가 패나 구루지마 해적 모두 근본적으로 영주나 호족에게서 독립 된 세력이었다. 세력 자체는 크지 않았지만, 영주들이 각기 작은 세력으 로 쪼개져 서로 싸웠기에 그들 사이에서 적당히 힘의 균형을 취하며 살 아남을 수 있었다. 하지만 통일기에 접어들자 이야기가 달라졌다. 강대한 힘을 상대하게 되자 그들의 독립성은 크게 위협받았다. 싸우다 전멸한 사이가 패나 배 신하고 살아남은 구루지마 해적이나 근본으론 같았고 서로에게 친밀감을 느끼고 있었다. "우린 결국 다른 길을 걸었다. 대의니 뭐니 해도 살아있지 않아서야 아무 소용도 없지 않은가. 힘있는 자에겐 따를 수밖에 없는 거다." "사이가는, 그리고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미치후사가 다소 힘없게 말했지만 대답하는 오카모토는 갈수록 눈동자 를 빛냈다. "죽더라도 관철하고픈 의지가 있다면 그 길을 가야 합니다." "그대의 그 관철하려는 의지란 도대체 뭔가?" "사이가의 정신입니다." "정신이라고? 겨우 철포나 쏘는 무리들에게 그런 게 있었나?" "미치후사 님!" 오카모토가 무서운 얼굴을 했다. "무라카미 해적도 다른 영주와 무사에게 괄시를 받는 것, 잘 알고 있 습니다. 하지만 나름대로 신념에 따라 행동하고 있을 터. 물에서 싸운다 고 특별히 업신여김을 받을 이유는 없습니다. 누구에게도 고개 숙일 필 요 없이 살아오지 않았습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다이코 전하에게 명령 을 받기 전의 미치후사 님 모습과 지금 모습. 비교가 되지 않습니까? 내 키지 않는 싸움을 해야하고 목숨도 바쳐야 합니다. 그렇다고 어떤 후한 대가가 돌아오지도 않고 인정을 받는 것도 아닙니다. 미치후사 님은 정 녕..." 다음에 오카모토는 힘주어 말했다. "옛날의 자유로움이 그립지 않다는 말입니까? 마치 사슬에 묶인 개처 럼 부려지는 지금의 구루지마 해적이 그리도 좋습니까?" "말이 심하다!" 버럭 화를 내 본 미치후사는 그러나 곧 고개를 숙였다. 늘 날카로운 표정으로 상대를 쏘아보던 그가 지금은 오카모토의 얼굴을 똑바로 보지 못하고 있었다. "한 잔 주게." 미치후사가 잔을 내밀었다. 오카모토는 말없이 그 잔에 술을 채웠다. 잠시 후 미치후사는 마치 주정을 하듯 참고 있던 것을 쏟아내기 시작했 다. "알고 있다. 알고 있단 말이다! 나도 좋아서 이렇게 있는 것이 아니다! 때때로 예전의 자유롭던 시절을 생각하곤 한다. 그렇지만 어쩔 수가 없 어. 뭘 어떻게 할 수 있단 말인가. 대항해서 싸우는 것조차 지금은 가능 한 일이 아냐. 명분도 서지 않고 실리도 없는 이번 출진은 나도 싫다!" 미치후사의 주먹이 쿵하고 바닥을 쳤다. 상이 흔들려 술병이 쓰러졌다. 미치후사가 잔을 단숨에 비우고 말했다. "무라카미 해적은 이미 죽었어. 우리 구루지마 해적도 겨우 연명하고 있을 뿐 예전의 그 기상 같은 건 사라진지 오래다. 차라리 사이가 패처 럼 최후까지 싸우다 장렬하게 죽는 게 나은 지도 모르지. 우린 사는 편 을 선택했다. 치욕스럽긴 하지만 목숨을 선택했던 거다. 그래도 아직 전 쟁이 벌어지고 물에서 싸워야 할 일이 있을 때는 조금 낫겠지. 만일 그 럴 일조차 없어지는 세상이 오면 우린 조용히 사라지게 될 거다. 말라죽 는 풀처럼. 결국!" 미치후사는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평소의 신경질적인 날카로움이 가 신 맑은 눈이 오카모토를 쳐다보았다. "나는... 싸울 때만 비로소 자유로울 수 있다." 오카모토는 미치후사의 눈이 젖어 있는 것을 보았다. = 후힐 어립선, 가토 요시아키 가토 요시아키는 무장치고는 무척 신중한 성격이었다. 아니, 신중한 정 도를 지나 의심이 지나치게 많다는 느낌도 있었다. '돌다리도 두들겨 보 고 안 건넌다' 는 말이 있는데 수군을 이끌게 된 후 그의 행동이 그랬다. 충분한 준비가 없이는 경솔히 함대를 움직이지 않았고, 일단 출진한 후 라도 끊임없이 적의 움직임에 신경을 썼다. 특히 이번 싸움에서 그의 이런 면은 너무도 여실히 부각되었다. 구루 지마 미치후사나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겁쟁이라 불러도 할 말이 없을 만 큼 우물쭈물하는 태도를 보였다. 가까이 모시는 중신들은 물론, 근습들도 고개를 저을 정도였다. 물론 요시아키의 그런 면이 가져다 준 안전함을 부인할 가신은 없었 다. 신중한 주인 덕에 비교적 평탄한 길을 걸은 그들이었다. 또한 비록 성격은 판이하게 달라도 시즈가다케에서 와키자카 야스하루와 똑같이 창 을 들고 적진에 뛰어든 전력도 있었다. 즉 시즈가다케의 칠본창이란 용 맹한 칭호는 요시아키도 가지고 있다. 아무리 답답하게 생각하는 가신이라도 요시아키를 한심한 주인이라 함 부로 말하지 못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저 도도 다카도라 앞에서 보여 준 지나치게 신중한 태도를 안타까워 할 뿐이었다. 그렇지만 총대장에게 온 군령을 받아 시행하는 요시아키의 모습은 모 두의 눈을 휘둥그래하게 만들었다. '긴장을 늦추지 말도록. 그리고 후방경계를 소홀히 하지 말라.' 이런 군령을 받아 요시아키는 정중하게 잘 알겠다고 말하고 전령을 돌 려보냈다. 전령이 멀리 떠나자 요시아키는 가신들에게 다짜고짜 말했다. "약간의 경계병을 남기고 모두 푹 쉬도록 해라. 투구를 쓰고 있는 자 는 벗고 갑옷끈을 지나치게 졸라매고 있는 자는 느슨하게 풀어라. 충분 히 체력을 비축해 놓도록." 아무리 후방에 있다고 하나 일단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선두에서 연이어 함성이 울리고 요란한 총성이 들리는 데 쉬라니. 가신 한 명이 앞으로 나가 말했다. "요시아키 님! 싸움이 이미 시작된 이 마당에 우리만 갑옷을 풀고 쉬 다니요. 비록 여기가 후방이라 어떤 위험도 없다지만 지나친 처사입니다. 자칫하면 총대장 다카도라 님의 노여움을 살지도 모르고 요시아키 님의 무명武名에도 나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그러나 열심히 간하는 중신에 대고 요시아키는 그저 빙그레 웃어 보일 뿐이었다. "상관없소. 다 생각이 있어서 하는 일이오. 또한 지금은 다카도라 님이 화를 낼 지는 모르지만 끝까지 화를 내지는 않으실 거요. 잠자코 내 말 대로 따라 주시오." 불만으로 볼이 부어있는 중신과 근습들을 달래며 요시아키는 다시 명 했다. "잠이 모자란 자는 잠시 배 안에서 눈을 붙여도 좋다. 또한 아직 밥을 먹지 못한 자는 천천히 요기를 하도록 하라." 이쯤 되면 이건 마치 방관하고 있는 사람과 다를 바 없었다. 요시아키 바로 앞에는 다카도라 본진과 하치스카 이에마사 부대가 있다. 비록 싸 우지는 않지만 엄중한 경계와 함께 언제라도 전투에 나설 준비가 되어 있었다. 잔뜩 긴장한 다른 부대 병사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이쪽은 들놀 이라도 온 듯 누워서 잠을 청하고 있었다. 아침을 먹지 못한 병사들은 허리에 찬 타위대打違帶에서 병량환兵糧丸을 꺼내 먹었다. 이 당시 일본인들은 점심이 없이 아침, 저녁 두끼 식사가 보통이었다. 지금과 같이 하루 세끼 식사가 보편화된 건 에도江戶시대 이후의 일이 다. 적어도 일상적으로는 모두 하루에 두끼만을 먹었다. 하지만 싸울 때가 되면 모든 게 변한다. 육지에서 싸우는 경우라면 된 장과 소금으로 끓인 장국에 흰쌀밥을 배부르게 먹고 횟수도 하루 세 번 으로 변했다. 야간에 경비를 서는 병사에게는 야식도 있었다. 모두 출진하기 전 밥을 먹게 했지만 병사들 중에는 정찰이든 무슨 일 이든 하게 되어 아침을 먹지 못한 병사들이 있었다. 이들이 싸우다 배가 고플 경우나 보급이 끊길 경우를 대비해 준비한 식량이 병량환이었다. 격렬한 전투는 체력을 많이 소모시키기 때문에 병량환은 당연히 간단 히 먹을 수 있으면서도 즉각 힘을 낼 수 있게 만들어야 했다. 직경 4, 5 센티미터의 공 모양으로 굳힌 이 음식에 대해서 전술적 연구가 뒤따랐음 은 물론이다. 당시 전국시대에 유서 깊고 강한 병사를 거느린 가문 가운데 하나인 우에스기上衫가에 전해오는 병량환의 조합법은 이렇게 되어 있다. - 마의 열매껍질을 벗기고 검은콩과 함께 가루로 만든 다음, 쌀가루를 섞는다. 다음으로 거기에 술을 붓고 햇빛에 말린 다음 다시 술을 붓고 말린다. 그런 다음 역시 술을 사용하여 둥글게 뭉친다. 술을 사용하는 건 역시 약간의 취기에서 사람이 더 용감해진다는 것과 알콜이 피로를 풀어준다는 점에 착안한 것이리라. 위와 같은 기본적인 것 위에 별도로 하는 조합이 있었다. - 말린 매실의 과육果肉, 인삼, 감초, 말린 생선 등을 가루로 만들어 섞는다. 가문에 따라선 설탕이라든가 다른 재료를 섞는 경우도 있었다. 결국 중요한 건 단순히 밥과 된장 외에 여러 가지 재료를 섞어 병사들에게 큰 힘을 낼 수 있게 해주려는 시도였다. 널리 퍼진 불교의식에 따라 생선이 나 새 종류를 제외한 네 발 짐승의 고기를 먹지 않는 일본이었다. 그래 서 이런 방식으로 모자라는 열량을 보충하려 한 것이다. 어쨌든 이렇게 휴식과 식사를 하며 여유를 부리는 요시아키 함대의 모 습은 금방 눈에 띠였다. 싸움만 안 하고 있다 뿐이지 함부로 기침도 못 할 정도로 긴장한 주변 부대 병사들 시선이 일제히 요시아키 함대로 향 했다. 뱃놀이라도 하듯 느긋한 요시아키 병사와 무사들을 보자 다른 함 대 병사들이 노골적으로 외쳤다. "너희들! 거기 뭐냐! 지금 앞에서 싸우고 있는 게 안보이냐? 정신차 려!" 이름 있는 무사들은 점잖게 항의했다. "거기 있는 무사 님은 들으시오! 아무리 후방에 있다하나 이미 출진해 전군이 죽기로 싸우는 상황이오. 그런데 투구를 벗어놓고 갑옷 끈조차 늦추고 있다니요? 무사로서 부끄럽지도 않으시오! 이에 요시아키 병사들은 아예 무시하고 고개를 돌렸다. 무사들은 차마 정중한 항의를 외면할 수 없어 대답했다. "나도 그러고는 싶소만, 주군의 명령이오. 무사의 마음가짐도 중요하지 만 주군의 명령은 더 중요한 법. 양해해 주시오." 기껏 변명한다는 것이 요시아키에게 모든 책임을 넘기는 말이었다. 이것은 즉각 본진에 보고되었다. 곧 화가 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 른 하치스카 이에마사가 작은 배를 타고 요시아키의 어립선에 나타났다. 요시아키가 이에마사를 무뚝뚝하게 맞아들였다. "이에마사 님께서 갑자기 어쩐 일이오?" "요시아키 님! 이게 무슨 짓이오!" 태평하게 쉬고 있는 무사와 병사들, 그에 더해 요시아키는 스스로도 투구를 벗고 편한 차림으로 있었다. 이래서는 오히려 단단히 무장하고 찾아온 이에마사와 무사들이 우스웠다. "뭘 말씀하시는 건지." "몰라서 물으시오!" 딴전을 피는 요시아키에게 이에마사는 단도직입적으로 따졌다. 그의 손이 요시아키 주위 병력을 가리켰다. 잔뜩 늘어져 있다가 민망해진 병 사들이 자세를 조금 가다듬었다. 그러자 요시아키가 병사들에게 계속 쉬 라고 손짓하곤 이에마사에게 대답했다. "경계는 소홀히 하고 있지 않소. 다만 생각이 조금 있어 그렇게 지시 한 것뿐이오." "생각이 있다고요? 이게 말이나 된다고 생각하시오? 도대체..." "이에마사 님!" 요시아키 눈에 순간 강한 불쾌감이 떠올랐다.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이에마사 님이 걱정하시는 바가 뭔지 이해하고 있소. 그러나 말하지 않았소? 나대로 생각이 있어 명한 것이오. 책임추궁이라면 나중에 총대 장 다카도라 님에게 받겠소. 그러니 그리 알고 물러가 주시오." 이에마사 얼굴이 다시 한번 빨갛게 상기됐다. 잠시 요시아키의 눈을 들여다보더니 이에마사는 말없이 몸을 돌려 돌아갔다. "요시아키 님. 이래서는 도저히..." 노기가 서려 물러간 이에마사를 본 중신 가운데 한 명이 나섰다. 적과 싸우는 앞에서 같은 편끼리 분열이 일어나 있는 상황이다. 그 점을 말하 려 하는 것이다. 군의에서 너무도 신중한 자세로 영주들에게 비겁자로 낙인찍힌 건 그렇다 치더라도 이번에는 아군을 깔보는 자세로 문제를 일 으켰다. 그들로선 도저히 요시아키의 본심을 알 수 없던 것이다. "기다려라. 참고 기다려 보면 안다." 요시아키는 잠자코 다시 중신들을 달랬다. 그리고 한 마디 했다. "우린 최후로 적을 막게 된다. 그때는 정말 괴로울 거다." = 구루지마 본진 어립선, 구루지마 미치후사 세키부네 위에 설치된 누각에서 잠시 함께 술을 마시던 미치후사는 곧 자리를 물리쳤다. 그리고는 엔메이에게 그와 오카모토 사이에 있던 일을 간략히 말해 주었다. 그러자 엔메이도 처음의 놀라움에서 벗어나 이야기 를 하기 시작했다. 옆에 붙어 있던 겐타로는 무사들에 이끌려 누각을 내 려왔다. 자리에 남은 건 미치후사와 엔메이 둘 뿐이었다. "그 뒤에 오카모토가 조선 쪽에 항복했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그래서 그쪽 무장이 됐다고?" "예." 엔메이가 대답했다. 항복해오는 왜인들을 조선에선 항왜降倭라 불렀다. 그런데 전에는 몇 명 안되던 이들이 임진왜란 때 엄청나게 불어났다. 대부분은 전쟁이 교 착상태에 빠지고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리다 못해 항복한 자들이다. 그러나 드물게는 뚜렷한 신념에 근거해 귀순한 이들도 있었다. 오카모 토 경우가 그랬다. 그는 부산진에 도착하자마자 휘하 병력을 전부 이끌 어 조선에 항복했다. 그때는 일본군이 승승장구하고 있을 때로 전쟁의 승패나 보급 따위와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신념이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지금은 조선왕에게 이름을 받아 김충선金忠善이라 불리고 있습니다. 관직도 받았으며 휘하 병력도 3천명으로 늘었습니다." "제법 출세했군." 미치후사가 일부러 비꼬는 투로 말하려 했지만 막상 나온 말에는 악의 가 실리지 않았다. 일본에서도 천황에게 직접 이름을 하사 받는 일은 무 척이나 영예스런 일로 여겨졌다. 그렇게나 인정을 받았다니 역시나 보통 은 아닌 인물이라 느꼈다. "그럼 엔메이 너도..." "짐작하시는 대로입니다. 저 역시 그 분과 약간의 인연이 있습니다." "역시 엔메이 자넨 조선 쪽 첩자로군." "아! 그건 아닙니다." 엔메이는 단정하는 미치후사에게 고개를 저었다. 미치후사는 그저 빙 긋 웃고 있었다. "물론 김충선 님과의 인연이 있긴 하지만 그분을 섬기고 있는 건 아닙 니다. 제가 지금 입은 이 옷은 선물로 받은 것뿐입니다." "사연이 있는가?" "예." "말해보라." 미치후사 함대 전부가 전열을 가다듬기까지는 의외로 오랜 시간이 걸 렸다. 누각에서 내려다보면 그 움직임이 손에 잡힐 듯 보였다. 뒤에 있는 시라가와 함대가 앞으로 나오는 데 특히 시간이 많이 걸렸다. 워낙 좁은 해협이었다. 빽빽이 모여선 배들은 조심스럽게 움직여야만 충돌을 피할 수 있다. 엔메이가 말한 사연은 이랬다. 조선의 정세를 살피는 첩자였던 엔메이 는 일본이 명나라와 강화를 맺게 될 즈음 다시 정탐을 위해 전라도 쪽으 로 갔다. 그런데 거기서 일본말을 쓰는 병사들 한 무리가 철포를 쏘며 연습하는 걸 보았다.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다가간 엔메이는 단번에 잡혀 버렸는데, 그들이 바로 김충선이 이끄는 항왜부대였던 것이다. "첩자로 잡힌 저를 단숨에 목을 날려버리거나 한양으로 보냈어도 할 말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김충선 님은 이해한다고 말하며 극진히 대해주 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은혜는 결코 잊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다카도라 님을 위해 일하고 있는 것과는 별도로 말입니다." 엔메이 말에 어떤 거짓이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정말 첩자라면 적어도 조선측 사정을 그렇게 자세하게 알려주는 행동은 하지 않을 것이다. "저는 어렸을 적 절에서 학문을 닦은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원래 병 사였지만 특별히 첩자로 뽑혔습니다. 한때는 함께 싸운 적도 있는 그들 을 배신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런가." 미치후사는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말을 꺼냈다. "뭐 누구에게나 사연은 있는 법이니까." 따지고 보면 미치후사가 있는 구루지마 가문에도 많은 사연이 있었다. 구루지마 세력이 이탈해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가담하자 무라카미 세력 은 이런 구루지마를 배신자로 낙인찍고 맹렬히 공격했다. 본거지 구루지 마 성이 협공을 받아 함락직전에 이르자 당주 혼자만 탈출해 히데요시에 게 구원을 요청한 일도 있었다. 그런 과정을 거쳐 대세에 가담한 구루지 마 해적과 끝까지 저항한 사이가 패는 나름대로 신념을 가지고 행동한 것이다. 누구를 탓할 일도 아니었다. 미치후사는 엔메이의 말을 받아들였 다. "어쨌든 지금 오카모토가 잘 있다니 다행이다." 일본에서도 적이었던 사이가 패였고 지금으로 말하자면 일본을 배신하 고 조선편이 된 무장이었다. 그러나 미치후사는 오카모토가 왠지 마음에 들었다. 강한 기백과 신념을 가지고 사는 그에게서 어쩌면 미치후사가 택할 수 없었던 다른 길을 본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엔메이에게 물어 보고 싶었던 것도 바로 그것이었다. 조선에 투항한 오카모토가 끝까지 그 신념을 관철하고 잘 되기를 바란 것이다. "함대 결진을 마쳤습니다!" 누각 아래에서 고함소리가 들렸다. 부장이 큰 소리로 보고해 왔다. "이만 내려가 보자. 그리고 부탁이 있다. 잠시 내가 싸우는 광경을 보 고 가도록 해라." 일종의 예감이랄까. 미치후사는 엔메이를 잡았다. "알겠습니다." 엔메이는 간단히 승낙했다. 미치후사는 곧바로 누각 아래로 내려갔다. 전투란 사람이 하는 것이기에 어떤 형식으로 고정할 수 없다. 마치 살 아있는 생물과 같은 것이다. 단순히 생각해 본다면 한 척으로 수십 척을 상대한 판옥선은 지쳐서 싸울 기력도 없어야 했다. 그러나 그 판옥선 한 척은 승기를 잡았다는 사실 하나로 인해 조선수군 병사들은 지치지도 않 고 계속 해협을 막아서고 있었다. "앞에서 싸우고 있는 적 대장선이 계속 뒤쪽을 향해 신호를 보내고 있 습니다! 나오라는 신호 같습니다!" 조선수군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한 부장이 보고했다. 미치후사는 잠시 판옥선과 자기 함대를 찬찬히 둘러보았다. "우리 쪽 준비는?" "이제 다 됐습니다." "좋다! 철갑선을 선두로 일제히 돌격시켜라!" 미치후사도 이젠 승부수를 던지지 않으면 안됐다. 일본에서 데리고 온 배 절반이 벌써 타버린 장작더미로 변했다. 조선수군의 거센 저항은 각 오하고 있었지만 너무도 큰 피해였다. "앞으로!" 후미에 있던 배까지 총동원한 구루지마 함대가 전진했다. 그렇지만 그 숫자는 16척으로 줄어있었다. 38척 가운데 벌써 22척이 전투불능이 된 것이다. "아직 적은 단 한 척에 머물고 있다. 기세는 있어도 지친 거야 어쩔 수 없겠지. 이걸 철갑선으로 밀어붙이면 반드시 이긴다!" 미치후사가 노리는 바는 이것이었다. 지금까지 본 것처럼 아무리 지친 적이라도 일본의 평범한 배는 이길 수 있었다. 하지만 강한 철갑선 몇 척을 앞세우고 간다면 얼마 버티지 못하고 무너질 거란 계산이었다. 미 치후사는 조선수군의 대장선을 무너뜨린 다음에 나머지 조선 판옥선들을 추격할 생각을 잠시 해보았다. 역사전쟁소설 // 남해 // 2권 copyright (C) 2001 김경진 안병도 신재호(필명) 공저 업로드 김경진 (전쟁소설 데프콘 1, 2, 3부, 동해, 남북, 판타지 하늘길잡이 공동저자) 1. 꿈 (2) = 경상우수영 좌선, 우치적 "거제1선이 다가옵니다!" "와아! 이제 살았다. 와아!" 군사들이 들뜬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모두들 기뻐하는 기색이 역력 했다. 우치적도 빙긋 웃었다. 우치적이 우현으로 가서 보니 과연 멀리 연기 속에서 거제1선이 다가 오고 있었다. 기라졸들이 기뻐하며 교룡기와 황색 휘를 마구 휘둘렀다. 그러나 우치적은 순간적으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이제야 나타나다니! 우치적이 멀리 보이기 시작한 안위에게 욕을 퍼부으려 숨을 한껏 들이쉬 었다. "야, 개놈아! 꺼져! 너 같은 겁쟁이는 안 와도 돼!" 우치적이 깜짝 놀랐다. 그러나 그것은 우치적이 욕을 하기도 전에 순 천감목관 김탁이 내지른 소리였다. 그제야 다른 군사들도 정신을 차린 듯 거제1선을 향해 손가락질하거나 혀를 차기 시작했다. "어허! 이보게. 그럼 쓰나." 우치적이 김탁을 말렸다. 우치적이 욕하려다가 부하가 먼저 욕하는 걸 보니 도리에 맞지 않는 것처럼 느껴진 것이다. 김탁이 씩씩거리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진작 왔으면 좀 좋았겠습니까? 하마터면 우리 좌선이 왜놈들한테 당 할 뻔하지 않았습니까?" 김탁이 한 말은 누구나 아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그때 우치적은 갑자 기 모골이 송연해서 뒤를 돌아보았다. 통제사가 우현으로 뚜벅뚜벅 걸어 오고 있었다. 놀란 군사들이 후다닥 흩어져 자리를 비웠다. 통제사가 우 치적 바로 옆에 서자, 우치적은 털이란 털은 모조리 빳빳이 서는 느낌이 었다. "네 이놈 안위야아아!" 통제사가 방패판을 움켜잡고 판옥선 바깥을 향해 외쳤다. 기가 약한 군사들은 귀를 틀어막거나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오줌을 싸면서 주저앉 는 군사도 있었다. 우치적은 곁눈질로 통제사를 슬쩍 살폈다. 병색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 다. 오히려 통제사는 기운이 펄펄 나는 듯 이마에서 파란 힘줄이 돋아났 다. 붉어지는 얼굴에는 노기가 충만한 듯했다. 우치적이 슬쩍 고개를 돌려 의원 정종을 찾았다. 아무래도 정종이 의 심스러웠다. 며칠 전에 정종이 산에 올라가 뭔가를 찾는 것 같았다. 아까 통제사에게 약을 쓴 모양인데, 도저히 일반적인 약이라 할 수 없었다. 우 치적이 가진 상식으로는 죽어 가는 사람에게서 억지로 힘을 끌어내는 약 은 오히려 독이라 할 수 있었다. 우치적이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우치적은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가슴에 잔뜩 힘을 주었다. 또 우렁찬 소리가 통제사 몸에서 터져 나오기 직전이었다. 그런데 우치적이 보기에 거제1선의 장대 위에 우뚝 서 있는 안위는 뜻밖에 당당한 얼굴이었다. "네 이놈! 군법에 죽고 싶으냐?" 통제사가 소리를 지르는 순간에도 거제1선은 점점 가까워졌다. 판옥선 방패판 사이로 보이는 군사들은 묵묵히 통제사를 지켜보았다. 다들 비장 한 표정이었고, 왜군에게나 통제사에게나 겁을 집어먹은 것 같지는 않았 다. 뜻밖에 저들은 제 발로 싸우러 온 것이다. 우치적은 통제사가 굉장히 화난 줄 알았다. 아무래도 안위가 단단히 혼나게 생겼다고 생각했다. 다른 배들이 모두 뒤로 물러나 있는 동안 좌 선 혼자서 그 동안 악전고투했었다. 만약 다른 배들을 불러오려면 좌선 이 직접 뒤로 움직여야 했는데, 그럼 울돌목은 뚫리고 말았을 것이다. 좌 선 입장에서는 움직이지도 못하고 어쩔 수 없이 혼자 싸운 것이다. "네 이놈 안위야! 네가 정녕 군법에 죽고 싶으냐? 도망간다고 네가 어 디 가서 살 수 있겠느냐!" 거제1선이 좌선 옆을 스쳐 지나갔다. 가장 가까워졌을 때 안위가 이쪽 을 향해 머리를 숙여 정중하게 군례를 올렸다. 우치적은 장대 위에 안위 말고도 다른 장수가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 장수가 정공청이라고 생각했을 때, 그는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가 금 세 방패판 뒤로 다시 숨어버렸다. 안위는 무척 비장한 얼굴이었다. 통제사와 잠시 눈길을 교환한 안위가 장대 아래를 향해 외쳤다. "돌진하라!" 장대를 지켜보고 있던 김국이 절도 있게 허리를 숙이더니 다시 벌떡 세웠다. 그리고는 몸을 홱 돌려 도훈도를 향해 외치는 모습이 보였다. 도 훈도는 다시 갑판 아래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우치적은 거제1선에 탄 군사들이 전혀 겁을 내지 않는 모습을 보고 조 금 놀랐다. 칠천량패전 때나, 바로 오늘 아침까지 본 거제1선의 군사들이 아니었다. 물론 정공청은 빼고. 우치적은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통상은 확실히 원공과 다르십니다." "장수들과 군사들도 다르지. 그렇지 않은가?" 우치적은 통제사의 대답을 듣고 나서야 실언했음을 깨닫고 고개를 숙 였다. 그리고 얼굴이 달아올랐다. 지난날이 생각난 것이다. 우치적이 슬 쩍 고개를 들어 통제사의 눈치를 살폈다. 그때 우치적은 분명히 보았다. 통제사의 바싹 마른 얼굴에 눈물이 흘 러내리고 있었다. "중군장의 배가 옵니다!" 눈이 좋기로 유명한 무상 김돌손이 보고했다. 과연 자욱한 포연 사이 로 중군장의 황색 깃발이 나부끼고 있었다. 대장선에 용 두 마리가 구름 속을 노니는 교룡기가 세워진 반면, 중군장의 돛대에는 바탕과 깃술이 중앙을 의미하는 황색으로 온통 물든 중군장기가 휘날리고 있었다. 이윽고 중군선이 좌선 옆에 도착했다. 중군장 미조항첨사 김응함은 부 끄러워 몸둘 바를 모르고 있었다. 잠시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은 통제사 가 소리를 질렀다. "너는 중군장이라는 자가 대장을 버리고 멀리 피했으니, 그 죄를 어찌 감당하려느냐?" 고개 숙인 김응함은 아무 소리 못했다. 우치적은 웃음이 나오려는 것 을 간신히 참았다. 싸움 직전에 부하 장수들에게 목숨을 걸고 싸우자고 했던 중군장의 초라한 행색이었다. "당장 처형해버리고 싶지만 일단 싸움이 급하니 공을 세울 기회를 주 겠다. 알겠느냐?" 통제사가 말을 마치자 허둥지둥 군례를 한 김응함이 서둘러 판옥선을 앞으로 몰았다. 이 자리를 어서 피하고 싶은 마음뿐인 것 같았다. 우치적 도 통제사에게 꾸중을 듣느니 차라리 왜군과 싸우는 편이 나을 것 같았 다. = 거제 1선, 정공청 거제현령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창피한 모양이었다. 정공청은 짜증이 마구 솟았다. 통제사한테 좋은 소리도 못 듣고 결국은 싸우다 죽 겠다며 속으로 투덜거렸다. 이제라도 사후선으로 옮겨 타 도망가고 싶었 다. 그러나 정공청을 태울 배는 없었다. "흑!" 갑자기 안위가 울먹이기 시작했다. 무서워서 우는 모양인지 거제현령 은 어깨를 들썩거렸다. 이 사람을 장대 밑으로 확 밀어버리고 선장에게 명령해 배를 되돌릴까 생각도 해보았다. 그러나 무장으로서의 안위는 결 코 만만치 않았다. "통상! 고맙습니다." 안위의 입에서 나온 소리였다. 울먹이면서 하는 소리가 고맙다니? 정 공청은 그렇게 야단 맞고도 고맙다고 말하는 안위에게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봄꽃이도 고마워. 하지만 이젠 마지막이야." "봄꽃이가 저기 있어요?" 정공청이 전혀 뜻밖이라는 듯 거제현령의 시선을 좇았다. 거제현령이 눈물을 흘리며 바라본 곳은 우수영 쪽 언덕이었다. 그곳에는 수많은 피 난민들이 함성을 지르며 수군을 응원하고 있었다. 봄꽃이 같은 젊은 처 자는 거의 없을 텐데. "아! 저기." 정공청도 봄꽃이를 찾고 말았다. 화사한 용모는 아니지만 어디서나 눈 에 확 들어오는 봄꽃이었다. 아버님은 젊은 처자들을 훔쳐보면서 찬란한 젊음의 빛이라고 하셨던가? 정공청은 아버님 말씀을 전혀 납득할 수 없 었지만 봄꽃이를 본 다음부터는 이해가 갈 듯도 했다. 봄꽃이는 함성을 지르는 피난민들 사이에서 가야금을 타고 있었다. 여 리면서도 강렬한 곡조가 여기까지 들려오는 듯했다. 거제현령도, 선장 김 국도 가야금 곡조에 빠진 듯 멍한 눈길로 하염없이 언덕만 바라보고 있 었다. '말도 안돼!' 애써 부정하는 정공청도 환청처럼 들려오는 그 소리는 어쩐지 봄꽃이 의 언니 월화의 곡조를 닮은 듯도 하면서 분명히 다르게 느껴졌다. 만약 마음속에서 울리는 이 소리가 봄꽃이의 가야금 곡조라면? 가야금 곡조를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환상을 불러일으키는 실력에 있어서는 봄꽃이가 월화에 못지 않은 것 같았다. "마치 장송곡 같소이다? 사랑하는 남편을 저승으로 보내는 청상과부 의..." 정공청이 고개를 슬쩍 돌리자 거제현령과 눈이 마주쳤다. 거제현령이 고개를 홱 돌리더니 장대 아래를 향해 외쳤다. "여봐라!" 선장 김국을 포함해 모든 군사들이 일제히 안위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안위가 호랑이처럼 포효했다. "통제사는 단 한 척으로 20척을 쳐부쉈다!" "쳇! 그거야 뱃전에 군관들이 빽빽이 섰으니까 그런 거 아니오? 우리 배엔 사부가 몇 명이나 있다고 이러는 거요?" 정공청이 작은 소리로 궁시렁거렸다. 그러나 안위는 들은 척도 않고 계속 말했다. "같은 판옥선인데 우리가 적선 기껏 열 척을 못 부수겠느냐? 그리고 좌선과 함께 싸우면 이 좁은 물길 하나 못 막겠느냐! 싸우자!" "싸우자! 싸우자! 싸우자!" 안위의 선창에 따라 군사들이 무기를 치켜들며 목청을 높였다. 다들 각오는 단단히 한 듯했다. 정공청이 슬쩍 뒤돌아보았다. 좌선은 그 자리 에 묵묵히 서 있었다. 눈길을 앞으로 돌리니 거대한, 판옥선 만한 왜선들 이 다가오고 있었다. "미치겠다! 이따위 싸움에 죽어야 하다니." 정공청은 생각할수록 억울했다. 집에 숨겨놓은 은괴, 인삼은 이제 소용 이 없었다. 죽음이 눈앞에 보였다. 이렇게 죽는다고 생각하니 너무 억울 했다. 한산도에 있을 때가 좋았다. 견내량을 꽉 막고 있을 때는 왜선이 천 척이라도 두려울 게 없었다. 가끔 삼도수군이 집결해 견내량 안으로 밀 고 들어가 시위라도 할라치면 왜군들은 당장 배를 버리고 산에 올라가 벌벌 떨었다. 그저 도망가는 왜군을 향해 화포 몇 방 쏘고 빈 배를 끌어 와 불태워버리면 끝이었다. 쉬운 싸움이었다. 그리고 다른 군대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한산도에 있을 때는 언제든 배 불리 먹을 수 있어서 좋았다. 통제사가 군량을 마련하는 데도 재주가 비 상했지만, 뭐가 고마운지 양식을 바치는 백성이 줄을 잇기도 했기 때문 이다. 그래서 한산도 주변에는 항상 굶주린 피난민들이 몰려들었고, 쌀 한 말 정도에 몸을 파는 여자도 수두룩했다. 항상 군량부족에 시달리는 경상우수영은 언제나 통제사에게 손을 벌렸 다. 관할지역이 대부분 왜군 점령지였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정공청은 경 상우수영이 어쩐지 백성들에게 밉보였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군량은 항상 부족했고, 군졸들은 굶어 죽거나 탈영자가 속출했다. 원체 판옥선 수도 부족했지만 이를 운영할 격군도 턱없이 모자랐다. 군졸들은 쌀을 수사에게 바치고 고향으로 돌아갈 날만 기다렸다. 통제사가 여자 문제로 경상우수영 장수들을 비난하는 이유는 거기에 있었다는 것쯤은 정공청이 알고도 남았다. "뻐벙!" 정공청이 화들짝 놀랐다. 드디어 최초의 대포소리가 울린 것이다. 한번 적대한 이상 왜선들이 이 배를 가만 놔두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거제1선이 조선수군의 선봉이었다. 정공청이 울상이 되어 활시위 에 화살을 메겼다. "그래. 죽자! 죽어. 제기랄! 에라! 나도 모르겠다." = 구루지마군 어립선, 미치후사 미치후사의 승부수는 이미 결정적인 시기를 놓쳤다. 함대가 제대로 배 치되기까지 걸린 시간도 문제였지만 가장 중요한 차질은 다른 데서 벌어 졌다. 계속 좌선 한 척만 싸우던 조선수군에 드디어 변화가 일어난 것이 다. "뒤쪽 적선이 앞으로 옵니다!" 대장선을 적 앞에 버려둔 채 꾸물대던 판옥선들이 서서히 나오기 시작 했다. "앞으로! 빨리 앞으로!" 미치후사는 아군을 연이어 격파한 적이 드디어 기세를 타고 있다고 판 단했다. 미치후사는 애가 타는 속마음을 감추면서 함대전진을 재촉했다. 멀리서 보기에도 확실히 조선수군의 좌선은 지쳐있는 기색이 역력했 다. 이때 강력하게 한바탕 밀어붙이면 확실히 이길 수 있었다. 그런데 그 기회가 사라지고 있었다. 안타까워서 견딜 수 없었다. 조금 전까지 미치후사가 비교적 여유가 있었던 이유는 뒤에 있는 조선 판옥선들이 대장선을 전혀 도와주지 않을 것으로 가정하고 작전을 세웠 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급변했다. "저건 거제현령의 배입니다. 뒤이어 천천히 오는 건 중군장의 배입니 다." 엔메이가 다가오는 조선 배들의 지위를 정확히 짚어줬지만 신경 쓸 여 유가 없었다. 중요한 건 조선수군 대장선 주위에 도착한 그 배 두 척에 의해 조선수군 전력이 급속히 강해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판옥선 세 척이면 해협이 꽉 메워지고도 남았다. "늦고 말았다." 미치후사 입에서 낮은 신음이 새어나왔다. 엔메이가 거제현령이 탄 배 라 지적한 판옥선이 잠시 대장선 옆에서 지시를 받더니 무서운 속도로 이쪽으로 돌격해 왔다. 조금 전까지 그 자리를 지키는 데 급급하던 조선 군이 반격에 나선 것이다. "이렇게 된 이상 철갑선들은 맨 앞에 오는 적선을 노려라! 적의 예봉 을 먼저 꺾어버린다!" 미치후사의 지시에 따라 조선 대장선을 향해 나가던 철갑선들이 방향 을 돌렸다. "거제현령이라는 자, 이름이 뭔지 알고 있나?" 미치후사가 분한 듯 엔메이에게 물었다. "안위라 합니다." "유명한 장수인가?" 미치후사는 저 판옥선이 과연 구루지마 해적 비장의 무기인 철갑선 세 척을 상대할만한 가치가 있는지 무척 궁금했다. 그리고 저 정도로 과감 히 돌격한다면 무명이 뛰어난 장수가 분명하다는 것이 미치후사의 생각 이었다. "그건 아닙니다. 나이가 젊고 전공도 별로 없던 장수로 알고 있습니 다." "뭐야? 음. 그렇다면 지금이 아마 저 장수가 평생 보인 활약 중에서 가장 훌륭한 전공일 것이다." 못내 아쉬운 표정을 지은 미치후사가 갑자기 안위를 칭찬했다. "어째서입니까?" "그가 지금 보이는 돌격이 조금만 늦었어도 이 싸움은 우리가 쉽게 이 겼을 것이기 때문이다." 기회를 어이없이 놓쳐버린 미치후사로서는 이렇게 적을 칭찬하는 편이 차라리 덜 부끄러운지 연신 아쉬운 듯 한숨을 지었다. "그렇다고 우리가 질 이유도 없다. 자, 나가라! 모두 싸우는 거다!"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선 부하들의 불안을 살 염려가 있었다. 미치후사 는 곧바로 굳은 결심을 보이며 고함을 질렀다. "튀어나오는 저 녀석을 쳐라! 박살내 버린다!" 철갑선 2척이 안위의 배를 향했다. 그리고 그에 더해 세키부네 1척이 가세한 3척이 포위를 개시했다. 철갑선 2척은 안위의 포격에 대해 오오쓰쓰를 쏴대며 기세를 올렸다. 적어도 그들은 다른 세키부네와 다르게 판옥선에도 상당히 위협적이었 다. 안위의 배 앞머리에 설치된 천자총통에서 대장군전이 쏘아져 날아갔 다. 그것은 철갑선에 대놓은 철판에 맞았지만 다락을 부수지는 못했다. 철갑선은 약간 흔들리긴 했지만 별로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 보통 세키 부네가 대장군전이나 돌덩이에 맞으면 곧바로 썩은 나무기둥처럼 부서지 는 것과 매우 대조적이었다. "다른 적선 한 척이 오른쪽에서 접근!" 급한 보고가 다시 들렸다. 이번엔 조선 중군장의 황색 깃발이 선명한 배가 포를 쏘며 전진해 왔다. "시라가와 함대 전진! 적을 막아라!" 이에 맞서 미치후사는 시라가와 아카기에게 지시를 내려 막게 했다. '붉은 귀신' 이란 별명을 갖고 있는 아카기는 구루지마 해적에서도 알아 주는 용장이었다. 즉각 아카기의 배가 앞장서 함대를 이끌고 나갔다. 철 갑선 한 척이 그에 합세했다. 침착하게 하나씩 대응해 나가는 미치후사의 모습은 크게 돋보였다. 하 지만 당초 계획에서 크게 어긋난 상황이란 점만은 어쩔 수 없었다. 공격 할 예정이던 구루지마 함대가 반대로 조선함대의 역공을 맞아 방어를 하 고 있는 모습이었다. 비록 공격하려던 기세로 거세게 맞서긴 했으나 이 래서는 성공한다 해도 승리가 오는 건 아니었다. 다만 패배를 면할 뿐이 었다. "쥬군가시라 님이 앞으로 나갔습니다!" 이때 도쿠이 미치토시가 명령도 기다리지 않고 앞으로 나갔다. 미치후 사의 엄한 명령으로 자기 함대가 전멸 당하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해야 했던 미치토시였다. "어지간히 분하셨던 모양이구나." 미치후사가 씁쓸하게 말했다. 미치토시는 미치후사의 형이지만 당주가 되지 못하고 다른 가문 둘에 동시에 양자로 들어가 가통을 잇게 됐다. 그래서 원래 성인 구루지마를 버리고 도이土居와 도쿠노得野 두 가문을 이었기 때문에 한 글자씩 떼어 도쿠이得居라고 성을 지었다. 미치후사는 이 형에 대해서만은 유난히 애정을 보이곤 했다. 도쿠이 함대가 격파되면서 약간 한산해졌던 해협은 다시 배들로 꽉 채 워졌다. 조금 전까지 싸우다 패해 불에 탄 배와 물에 빠진 일본병사들, 그들이 흘린 피는 이미 해협 뒤로 빠져나갔다. 지금은 일본병사들이 다 시 똑같은 꼴을 당할지, 아니면 이번에는 반대로 조선병사들이 그 꼴이 될지 알 수 없는 순간이었다. 함성과 절규, 아우성이 우렁찬 북소리보다 더 높게 허공에 울렸다. "우리도 앞으로 나가자!" 미치후사는 부장에게 명령해 급히 어립선을 앞으로 나가게 했다. 구루 지마 쪽에서 보아 왼쪽으로 가장 돌출해 있는 안위의 배를 공격하기 위 해서였다. 그 적선은 강한 방어력을 가진 철갑선 두 척에 질려서 처음의 기세를 잃고 허둥대고 있었다. 여기서 미치후사의 어립선이 친히 앞으로 나선다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압박이 될게 분명했다. "와키자카 함대가 움직입니다! 앞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그때 뒤쪽을 살피던 병사가 소리쳤다. 미치후사의 얼굴이 순간 잔뜩 일그러졌다. "미치후사 님을 지원해주기 위해 움직이는 겁니다. 미치후사 님이 고 전하고 있다고 판단하고 있나 봅니다." 엔메이가 재빨리 그 의미를 좋게 해석해 주었다. "내버려둬라." 미치후사는 귀찮다는 듯 말하고 나서 전방만을 주시했다. 신경 써 오 던 건 사실이지만 더 이상 그럴 필요는 없었다. "곧 결말이 난다. 내가 앞으로 나선 이상 반드시 끝을 낸다!" 미치후사의 배 옆에는 고바야 한 척이 바짝 붙어 대기하고 있었다. 전 황의 변화에 따라 바로 다카도라에게 달려가 보고하기 위해 준비해 놓은 배였다. "이순신이 죽든가, 아니면 내가 죽든가." 미치후사의 비장한 심정이 바로 말이 되어 나왔다. 엔메이가 놀란 얼 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 구루지마 철갑선, 마나베 - 까각! 병사들이 흠칫 놀라며 물러섰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물 끄러미 다락 위쪽에 시선을 집중했다. 철판이 조금 우그러지긴 했지만 조선수군이 쏜 화포에 철갑이 뚫리지 않은 것이다. 마나베가 호쾌하게 웃었다. 그런 마나베의 얼굴에 주름살이 깊게 패였 다. "겁낼 필요 없다 했지 않느냐? 안전하게 적선에 다가가면 그때 우리가 공격하는 거다. 조선 배하고 높이 차이도 많이 나지 않으니 단번에 뛰어 올라가 공을 세워라. 알겠느냐?" "예!" 병사들이 우렁차게 대답했다. 붉은 갑옷을 입은 병사들 사이에서는 자 신감이 넘쳐흘렀다. 지금까지 조선수군과의 사이에서 벌어진 상황과는 정반대였다. 이쪽에서는 조총으로 공격할 수 있지만 조선수군의 화포 공 격은 전혀 먹혀들지 않았다. 아래 다락에서는 지금도 총성이 계속되고 있었다. - 뻥! 가끔 울리지만 철포보다 훨씬 큰 이 소리는 오오쓰쓰가 내는 소리였 다. 밀폐된 다락 속에서 울리는 소리는 위층 다락까지 쩌렁쩌렁 울렸다. 마나베가 작은 창문을 통해 바깥을 살폈다. 철갑선은 벌써 조선 배 가 까이 접근하고 있었다. 조선군들이 화포를 쏘고 불화살을 쏘았지만 두터 운 전면 장갑에는 전혀 소용이 없었다. 그때 조선 배에서 불꽃이 한번 번쩍거렸다. - 따다다다당! 따닥! 화포 소리에 이어 엄청난 소리가 계속되자 병사들이 일제히 귀를 감싸 쥐었다. 조선군이 뭘 쐈는지 몰라도 철판을 돌로 때리는 소리가 한꺼번 에 수백 번이나 계속되었다. "우아! 죽을 염려는 없겠지만 귀부터 멀겠습니다. 마나베 님은 괜찮으 십니까?" 젊은 병사가 필요 이상 큰 소리로 외쳤다. 귀가 멍멍한 모양이었다. "나는 괜찮아. 한쪽 귀가 떨어져 나갔으니까." 마나베가 당당하게 말했지만 사실은 정반대였다. 이 철갑선이 조선군 의 화포에 대한 방어력은 충분했지만 병사들을 귀머거리로 만들어버릴 것 같았다. 평생을 싸움터에서 살아온 늙은 무사는 어서 싸움이 시작되 길 바랐다. 마나베가 다시 슬쩍 고개를 내밀었다. 판옥선과 부딪치기 직전이었다. 판옥선 갑판에는 조선군 병사들이 손에 잡힐 듯 바로 앞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겁에 질린 표정들이었다. 판옥선에 남은 방패판은 다 부서져 이미 몇 장 남지 않았다. 그리고 세키부네의 정루와 비슷한 조선 배 갑판의 오두막도 너절하게 부서져 있 었다. 철포병들이 마지막 사격을 조선 배에 퍼붓자, 피할 곳도 없는 조선 군들이 연달아 쓰러졌다. "돌격 준비!" 마나베가 외치자 병사들이 일제히 좌우현의 경첩을 열었다. 병사들이 철판을 밀어붙이자 빛이 확 쏟아져 들어왔다. 옆에는 엄청난 격류가 흐 르고 있었다. 조선군 화포에서 쏜 돌무더기가 철판에 쏟아질 때보다 더 큰 소리였다. 갈고리를 든 병사들이 맨 앞에 서서 판옥선에 걸 준비를 마쳤다. = 거제1선, 김국 "이, 이게 도대체 말이 되냔 말이야!" 군관 김국은 할 말을 잃었다. 도대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허약한 왜선 주제에 철갑선이라니! 대장군전에도 끄떡없고 단석도 철갑을 뚫지 못하고 조금 우그러뜨릴 뿐이었다. 판옥선의 무장으로는 저 왜선들을 공 격할 방법은 없었다. 병사들이 하얗게 질렸다. - 따다당! 철갑선 두 척이 다가오면서 속에서는 연달아 조총을 쏘아댔다. 궁수들 은 다만 방패판 뒤로 숨을 뿐, 공격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거기에 다시 또 다른 왜선이 다가오고 있었다. 듣도 보도 못한 엄청나게 큰배들이었 다. - 딱! 왜선에서 뭔가 큰 연기가 솟는다 생각하면 그 즉시 방패판이 하나씩 떨어져 나갔다. 방패판 뒤에 서 있던 군졸들이 이따금 피를 뿜으며 쓰러 지는 걸로 봐서는 왜선에서 작은 화포를 쏘는 것 같았다. 장대도 엉망이 되고 현령은 갑판에 내려선 지 오래였다. 조라포만호는 아예 갑판 밑으로 내려가 숨어버렸다. "선장! 백병전 준비다. 오른쪽을 맡아라. 난 왼쪽을 맡는다." 거제현령의 외침에 김국이 난간 위로 슬쩍 고개를 내밀었다. 바로 눈 앞에 커다란 왜선 두 척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왜선의 옆면이 열리 고 있었다. "에잇!" 김국이 화살을 날리자 갈고리를 든 왜병 하나가 비명을 지르며 아래로 떨어졌다. 김국은 잽싸게 화살을 재며 주변을 살폈다. 병사들 절반은 죽 거나 부상했고 나머지는 겁에 질려 뒷걸음질치고 있었다. 승병들만이 창 을 든 채 접근전에 대비했다. 왜선 두 척은 거제1선의 좌우로 다가오고 있었다. - 차칵! 착! 끼이이이익! 갈고리가 연달아 난간에 걸렸다. 그리고 배끼리 옆면을 스치는 소리가 날카롭게 허공에 울렸다. 지금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총통 과 화살을 그렇게 쏘아댔지만 왜병들은 전혀 피해를 입지 않고 판옥선에 접현하고 있었다. 김국이 날린 마지막 화살이 젊은 왜장의 투구를 꿰뚫었다. 왜장은 끔 찍한 비명을 지르며 뒤로 나가떨어졌다. 그 틈을 타고 왜병들이 판옥선 에 뛰어오르려고 일제히 달려들었다. 김국이 난간에 세워둔 맥도貊刀를 집어들었다. 창인지 칼인지 구분이 안 갈 정도로 칼날과 자루의 길이가 비슷한 칼이다. 맥도란 중국에서 이 런 종류의 칼에 붙인 이름이고, 맥궁의 예에서 보듯이 맥은 일반적으로 고구려의 것을 뜻한다. "싸워라! 물러서지 마라!" 전혀 의미 없는 말이 김국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첫 번째 왜병이 뛰 어오르자 김국이 맥도로 냅다 찔러버렸다. 기다란 맥도에 찔려 허공에서 버둥거리는 왜병을 치켜들었다. 그리고 갑판에 패대기친 다음 김국이 맥 도를 옆으로 휘둘렀다. 왜병들이 칼로 막을 엄두를 못 내고 엎드렸다. "얍! 죽어! 올라오지 마!" 승병들이 전혀 스님답지 않은 말을 마구 쏟아냈다. 승병들이 찔러대는 창이나 몽둥이가 왜병들을 죽이지는 못했지만 왜병들이 쉽게 판옥선으로 올라오지 못하게 하는 효과는 있었다. 다행히 왜선의 갑판보다 판옥선의 갑판이 사람 크기 절반 정도 높았 다. 평상시에는 단숨에 뛰어오르기에 전혀 문제가 없겠지만 싸움이 한창 인 지금은 약간 무리였다. 전혀 비무장인 채로 뛰어오르다간 아무리 접 근전에 능력이 없는 조선군이라도 공격하기에 어려움이 없었다. 김국이 슬쩍 앞뒤를 살폈다. 군졸들은 대부분 고물로 도망갔고 일부는 사다리를 타고 갑판 아래로 숨어버렸다. 사부 몇 명이 도망친 와중에도 활을 쏘아줘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지금 갑판에는 승병들과 몇 안 되는 탐후인들만이 용감하게 싸우고 있 었다. 거제현령도 열심히 싸우고는 있지만 왜병 하나 상대하기도 버거운 모습이었다. "이야아아아!" 김국이 난간에 배를 붙인 다음 팔을 뻗어 맥도로 사정없이 내리쳤다. 느낌으로 보아 왜병 두셋쯤은 제대로 걸린 것 같았다. 사지가 잘려나갔 는지 피가 공중으로 튀었다. 그러나 곧이어 왜병의 칼에 퉁겨져 맥도가 위로 솟구쳤다. 허공에 딱 정지하는 순간 그 탄력을 이용해 반대쪽으로 휘둘렀다. '그래. 난 다른 여자를 사랑하고 말았어. 나를 사랑하지도 않는 여자야. 그래. 미안해. 내 잘못이야. 네가 날 떠난 지 10년이 넘었어. 널 슬프게 해서 나도 너무 괴로웠어. 정말 미안해. 난 그때 너무 어렸고, 너무 이기 적이었어.' 김국은 갑작스레 옛 생각이 나면서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주마등 처럼 옛일이 스쳐 지나갔다. 열 여덟 살이었던가? 그때 지현은 열 일곱 이었다. 청춘남녀가 물레방앗간에서 남 몰래 만나 달빛 아래 책을 읽었 겠는가? 그러나 좋은 날만 있었던 게 아니었다. 둘은 날이 갈수록 자주 다퉜고, 왜 싸우는지 서로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싸우는 동안에는 사랑하는 여자 보다 자존심이 더 중요했다. 멀리 도망가 함께 살자던, 죽어도 같이 죽자 던 맹세는 티끌처럼 날아가고 사소한 꼬투리를 잡아 싸우기 여념이 없었 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우유부단한 김국은 부모의 성화를 이겨낼 수 없었 다. 김국의 집안은 어엿한 양반네였고, 지현은 고을 아전의 여식이었다. 그것도 하필 첩의 자식이었다. 복사골 박 진사 여식과 혼담이 오고가는 동안 먼저 시집을 간 것은 지현이었다. '그렇다고 평안도로 가버리다니! 평생 내 꼴 보기 싫다는 건가?'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김국이 술로 세월을 보내는 동안 혼담이 깨졌고, 정신을 차릴 때쯤에는 전쟁이 터졌다. 갑사로 싸움터에 나섰다가 지금은 거제현령의 군관이 되었다. 씁쓸했다. '하필이면 상전이 좋아하는 아가씨를 좋아하게 되다니.' 그때 왜병이 창을 들고 김국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그 순간 승병이 찌른 창이 왜병의 목에 꽂히고, 붉은 피가 확 쏟아져 김국의 얼굴을 뒤 덮었다. "선장! 정신 차리십시오!" 승병 하나가 어깨로 김국을 밀쳤다. 퍼뜩 정신이 든 김국이 다시 팔을 뻗어 난간 뒤에 숨은 왜병들을 쓸어나갔다. 비명이 터져 나오고, 몽둥이 를 내리치는 승병들의 가쁜 숨소리와 기합소리가 김국의 뇌리를 하얗게 채워나갔다. 역사전쟁소설 // 남해 // 2권 copyright (C) 2001 김경진 안병도 신재호(필명) 공저 업로드 김경진 (전쟁소설 데프콘 1, 2, 3부, 동해, 남북, 판타지 하늘길잡이 공동저자) * 환절기입니다. 감기 몸살 조심하세요. 오늘은 간단히 올리겠습니다. 뒤쪽 다기에 관한 내용은 정리가 좀 더 필요할 듯합니다. * 최제환님과 윤민혁님이 철갑선의 방호력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셨습 니다. 대장군전 등이 절반쯤 관통하거나 철판을 부숴서 철갑 세키부네 구조물에 어느 정도 손상을 입히고, 내부 인적 피해는 전무한 것으로 수 정하겠습니다. 2. 삶과 죽음 (1) = 거제1선, 구루지마군 무사 마나베 - 추추추추축! "우아악! 끄억!" 기껏 판옥선에 올라온 부하 병사들이 화살에 맞아 한꺼번에 나뒹굴었 다. 마나베는 비명을 지르는 부하들은 신경 쓰지 않고 조선군을 향해 뚜 벅뚜벅 걸었다. 작달막한 창을 겨눈 조선군들이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그 뒷줄에는 활을 든 조선 장수들이 서서 허둥지둥 화살을 메기고 있었다. "이야아!" 마나베에게 선공을 뺏길세라 다른 철갑선에서 내린 병사들이 뛰쳐나갔 다. 일번창은 정해졌지만 아직 일번검은 남아 있었다. 신분상승의 호기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 그러나 이들도 줄줄이 화살에 맞고 쓰러졌다. 옆구리에 작은 화살이 박힌 병사 하나는 꼼짝 못하면서 그저 돼지 멱따는 소리를 내질렀다. 그 사이에 어깨에 화살이 꽂힌 병사가 달려가 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조선군 3명이 동시에 찌른 창에 꿰어버렸다. 조선군들이 창을 비틀어 쓰 러진 병사 몸에서 창날을 뽑고 있었다. "창과 활의 결합이라. 훌륭하다." 마나베가 고개를 끄덕였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상황이었다. 판옥선 갑 판에 왜병이 단 한 명이라도 올라가면 그 판옥선은 끝장이라던데, 지금 은 듣던 것과는 조금 다르게 진행되고 있었다. 그리고 접근전에서 활을 쓰다니. 어느 모로 봐도 조선 활은 썩 괜찮은 무기였다. 길기만 한 일본 활과 비교해 저 짧은 조선 활은 확실히 접근 전에서도 효과가 있었다. 사정거리도 길지만 무엇보다 관통력이 좋았다. 일본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일 때 무사들은 화살 한두 발 맞는 것쯤은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그러나 여기서 조선 활에 맞으면 그걸로 끝장일 것 같았다. 그래서 마나베는 장대 옆으로 몸을 날렸다. - 촤차착! 조선군들이 활을 쏜 것과 거의 동시에 왜병들에게 화살이 꽂혔다. 워 낙 짧은 거리라서 피할 틈이 없었다. 왜병들이 갑판에 줄줄이 쓰러지고, 동시에 철갑선에서 연달아 쏘아대는 철포에 조선군들도 하나씩 쓰러졌 다. 마나베가 이 순간을 놓치지 않고 장대 뒤에서 잽싸게 뛰쳐나갔다. 바 로 앞에 조선군의 겁에 질린 눈동자들이 눈길에 가득 들어왔다. "나는 구루지마 해적의 무사 마나베다!" 찔러오는 창을 비껴 막은 즉시 마나베가 칼을 옆으로 휘둘렀다. 묵직 한 게 걸리고, 회색 옷을 입고 머리를 깎은 조선군 하나가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다시 칼을 내리쳐 방금 마나베를 창으로 찔러오던 조선군을 베었다. 두 명이 거의 동시에 우당탕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염주알 같은 것들이 갑판에 흩어졌지만 마나베는 방금 쓰러진 조선군들이 설마 스님 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마나베는 쓰러진 조선군들을 타넘어 적 중심부로 뛰어들었다. 잔뜩 당 황한 조선군들은 대적하지도 못하고 그저 칼에 맞고 비명을 지르며 쓰러 졌다. 이제는 조선군들이 더 이상 물러날 곳도 없었다. 마나베는 가슴이 벅차 올랐다. 싸움은 이런 맛에 하는 것이다. 조선군 20여 명 가운데 마나베 단 한 명에게 대여섯 명이 연달아 쓰러졌다. 나 머지도 곧 똑같은 꼴이 될 것이다. 마나베는 온몸에 흠뻑 피를 뒤집어썼 다. 그런데 조선군은 어찌 이다지도 못 싸운단 말인가? 마나베가 약간 불 쾌해지려는 순간, 칼날이 맞부딪치면서 불꽃이 튀었다. 마나베는 다시 즐 거워지기 시작했다. "이이익!" 눈을 마주치고 보니 약간 젊은 조선 장수였다. 번쩍거리는 갑옷을 입 은 조선 장수는 이를 악물고 칼을 맞대며 마나베를 밀어붙였다. 마나베 뒤에서는 부하 병사들이 함성을 지르며 다가오고 있었다. "흥! 칼질은 그렇게 하는 게 아냐!" 마나베가 칼로 상대방의 칼을 밀치면서 몸을 낮춰 제자리에서 한바퀴 돌았다. 칼에 회전력을 실어 그대로 조선군 장수를 베려는 순간이었다. - 피육! "크윽!" 마나베 허벅지에 화살이 꽂혔다. 약간의 각도 차이로 칼이 허공을 가 르고, 놀란 조선군 장수는 조선군들 틈으로 숨어버렸다. 마나베는 몸을 회전하는 동안 순간적으로 본 이물 쪽 상황을 다시 떠 올렸다. 방금 마나베를 도와주러 달려오던 병사들은 셋이 화살에 맞아 쓰러져 있었다. 반면에 고물 쪽에서는 부하 둘이 조선군들과 싸우고 있 었다. 철갑선에서는 병사들이 계속 판옥선으로 올라서고 있었다. 마나베는 다시 소리를 지르며 돌격했다. = 거제1선, 안위 "아! 무너지는가?" 시위를 당기는 선장 김국의 입에서 깊은 탄식이 터져 나왔다. 안위는 숨을 헐떡이면서 상황을 살폈다. 달려드는 왜병 둘을 간신히 처치하자 늙은 왜장은 다시 장대 뒤로 숨 어버렸다. 조금 전에 상대한 왜장은 안위에게는 무척 버거운 상대였고, 김국이 바로 옆에서 화살을 날리지 않았으면 하마터면 안위가 당할 뻔했 었다. 늙은 왜장이 장대 옆으로 슬쩍 고개를 내밀었다. "저 왜놈 늙은이!" 안위가 존경인지 경멸인지 모를 말투로 내뱉었다. 그리고 시선을 판옥 선 좌우에 붙인 왜선으로 향했다. 조총을 든 왜병들이 열심히 화약을 재 고 있었다. 지금 당장은 위험이 없었다. 군관들이 날린 화살에 장전중인 왜병들이 하나씩 계속 쓰러졌다. 이제는 피차 피할 곳도 없어 쏘면 무조건 맞았다. 수적으로는 거제 군 사들이 조총을 쏘는 왜병들보다 훨씬 적지만 지금 이 순간은 장전이 빠 른 활을 쏘는 조선군이 유리했다. 그러나 문제는 판옥선 갑판에 올라 칼 과 창을 들고 달려드는 왜병들이었다. 수부들까지 창을 쥐고 싸웠지만 이들은 거의 보탬이 되지 않았다. "사또!" 부르는 소리에 안위가 고개를 홱 돌렸다. 무척 낯선 호칭이었다. 임진 년 이후 거제도는 왜군의 소굴이었다. 그래서 안위는 말이 거제현령이지 거제성에는 들어가 본 적도 없었고, 다만 거제 출신 수군과 피난민들의 우두머리일 뿐이었다. 선두무상이 고물 바깥쪽을 가리켰다. "바보 같은 것들이!" 안위가 신음소리를 냈다. 고물에 높이 솟은 배꼬리 사이로 격군 예닐 곱 명이 거센 물살에 휩쓸리는 것이 보였다. 급한 나머지 뒷문을 열고 물에 뛰어든 것 같았다. 갑판 위에서 우당탕거리는 소리가 나고 비명이 연속 울리니 아래층에서는 도저히 참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해가 가지 않았다. "문을 잠궜으니 안전할 텐데 뭐하러..." 왜군이 상장 갑판을 점령하더라도 배에 불을 지르지만 않는다면 노 젓 는 갑판에서 꽤 오랫동안 버틸 수 있었다. 그런 안전한 곳에 있던 격군 들이 뒷문을 열고 물에 뛰어들면 어떡하겠다는 것인지 안위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나무토막이라도 잡고 헤엄치면 말을 안하겠는데, 저들은 맨손 이었다. 그리고 헤엄을 칠 줄 아는 자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런 자가 있더라도 이런 거센 물살에는 그저 휩쓸려갈 뿐이었다. '그렇게 왜군이 무섭단 말인가?' 안위가 씁쓸하게 웃었다. 안위는 지금 그런 왜군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이제는 군사들도 얼마 남지 않았다. 진무, 수군, 영노, 수부, 승병들이 두 셋 정도씩 남아 있었다. 활을 쏠 줄 아는 사람은 안위와 김국, 그리고 진 무 셋에 불과했다. 붉은 갑옷을 입은 왜병들은 전열을 정비한 다음 다시 쳐들어오기 직전 이었다. 이번에는 조금 전과 달리 한꺼번에 쳐들어올 모양이었다. 활 숫 자보다 다섯 배는 넘어 보였다. 늙은 왜장이 안위를 향해 가느다란 미소 를 보냈다. 무척 신경 쓰이는 적이었다. 철갑선에 탄 왜병들은 이쪽을 향해 조총을 겨누고 있었다. 조총 위에 서 심지가 타는지 가느다란 연기가 피어올랐다. 조선의 총통과 달리 조 총은 방아쇠를 당기면 발사되는 방식이라는 것을 안위도 알고 있었다. 안위는 바로 그 조총의 표적이 되고 있었다. 안위가 문득 고개를 돌려 좌선과, 언덕 위를 바라보았다. = 해남현 방향 언덕, 표헌 "꼭 이겨야 할텐데. 쉽지 않겠어. 허허!" 표헌은 야불수의 너털웃음을 들으며 의주에서 피난 준비중인 집안 사 람들을 생각했다. 표헌은 여차하면 식구들을 데리고 요동을 통해 명나라 로 건너가려고 인삼과 은을 잔뜩 준비했다. 사신들을 따라 명나라에 몇 번 들어가 봐서 잘 아는데, 그 정도면 명나라에서도 한 평생 떵떵거리며 살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조선은 어차피 망할 나라, 망해도 싼 나라였다. 표헌은 역관으로 오래 있으면서 남몰래 재물을 쌓아놓은 것이 천만 다행이라 여겼다. 전쟁이 나자 표헌은 정말 혼신의 힘을 다해 명나라 장수들에게 조선의 실정을 알리고 도움을 구했다. 병력을 얼마나 파병할 것인가, 그리고 군량을 어 느 쪽이 얼마나 책임질 것인가 하는 예민한 문제에 직면해서는 없는 말 을 꾸며가면서까지 조선에 유리하게 협의를 이끈 숨은 공로자이기도 했 다. 그러나 이제는 포기하기로 했다. 돌아가는 꼴을 보니 얼마 못 가 조선 은 망할 게 틀림없었다. 임금이든 조정대신들이든 과연 나라를 구할 생 각이 있는지조차 의심스러웠다. 걱정만 하지 제대로 된 대책을 내놓을 생각을 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이런 급한 때에도 신분 따지고 절 차 따지는 사람들이었다. 차라리 망하는 편이 낫다고 표헌이 생각한지 한 달이 조금 넘었다. "저놈은 누구냐? 조선 사람 같지는 않구나." 야불수가 가리킨 곳으로 표헌이 눈길을 돌렸다. 피난민들이 드문 곳 작은 소나무 밑에 어정쩡하게 서 있는 젊은 사내가 눈에 띄었다. 갸름한 얼굴에 주먹코, 뻐드렁니. 표헌은 머리칼이 곤두서는 느낌이었다. "왜놈입니다. 나으리! 잡아서 공을 세우소서!" 표헌은 왜인 정탐수가 도망갈까봐 조바심을 냈다. 왜인도 이쪽을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군 호위병 둘이 창을 겨누고 달려가려는 순간, 야 불수가 호위병들을 말렸다. "어허! 우리는 싸우려고 여기 온 것이 아니지." 왜인도 눈치를 채고 도망갈까 말까 망설이는 모습이었다. 야불수가 손 짓하며 허름한 바지저고리를 입은 왜인 정탐수를 불렀다. 표헌이 보기에 변장은 안 하느니만 못했다. "이리 와. 괜찮아. 어허~ 이리 오래도?" 표헌이 야불수의 뜻을 조선말로 통역해주었다. 왜말을 하는 통사가 이 곳에 없어서 왜인이 조선말을 알아듣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 명나라 병사들이 공격하려는 태세를 거두자 왜인은 조금 용기를 냈는 지 천천히 다가왔다. 그때 일본인임을 단번에 알아차린 피난민들이 웅성 거렸다. "왜놈이다! 여길 어떻게!" "쳐죽일 놈!" 왜인은 쭈뼛거리며 천천히 다가왔다. 이왕 들켰으니 이제는 차라리 명 나라 관리와 함께 있는 편이 안전했다. 표헌이 소리를 지르고 명나라 군 사들이 창을 휘두르자 피난민들은 곧 조용해졌다. 저 아래쪽에 내수사 부제조 김양보와 시위 내관들이 이쪽을 쏘아보고 있었다. 표헌이 슬쩍 시선을 피했다. "잘 부타구하무니다. 나는 척후루 맡은 요코메이므니다. 진짜는 상인, 장사꾼이무니다." 왜인이 어줍잖은 조선말로 인사하며 허리를 굽혔다. 무척 촌스러운 자 세였다. 표헌은 듣기 좋으라고 그럴 듯하게 인사말을 꾸며서 야불수에게 전해주었다. "수고가 많다. 병법에 전쟁을 하더라도 사신은 두 진영을 끊임없이 오 간다고 했어." "하! 좋은 마루쓰무이므니다." 표헌이 통역해주자 왜인이 연신 굽신거렸다. 그러나 표헌이 생각하기 에 이 왜인이나 야불수가 서로 접근한 것은 뭔가 속셈이 있지 않나 의심 이 들기 시작했다. 그걸 증명이라도 하듯이 야불수가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저놈한테 칼을 갖고 있는지 물어보게. 내가 적당한 걸 줄 테니 달라 고 하게. 왜도는 우리 명나라에서도 최고로 쳐준다. 쇠를 두드리고 계속 접어서 만든다지? 하여튼 지독한 놈들이야." 왜검은 단조법으로 만든다. 일반적인 단조가 아니라 철판을 높은 온도 에서 납작하게 두드린 다음 접고 다시 두드리기를 수천 번을 반복한다. 그래서 완성품은 층층마다 재질 특성이 약간씩 다르고, 그래서 실전에서 는 강하면서도 쉽게 부러지지 않는다. "칼은 왜 그러십니까?" 표헌이 야불수에게 물었다. 왜검을 팔아먹거나 쓰려는 건 아닌 것 같 았다. 야불수에게는 예전에 병부시랑 송응창한테서 받은 보검이 있었다. "위에 바치면 전공으로 인정해줄 거 아닌가? 전에 이 총병한테서 일본 안장을 예물로 받았는데, 아! 표 통사 자네도 그때 나하고 같이 있었지? 그래. 그걸 바치니까 일본 장수 한 명을 잡은 걸로 인정해주더군." "아! 맞습니다. 그때 그랬지요." 임진년에 있었던 일이었다. 당시 한산도를 방문한 야불수에게 당시 전 라좌수사였던 통제사가 맏아들을 시켜 선물을 보내주었다. 상자를 열어 본 야불수는 너무 좋아서 기뻐 날뛰었다. 통제사의 아들이 어안이 벙벙 한 표정을 지어서 표헌은 옆에서 보기가 민망할 정도였다. 물어보니 이 왜인에게는 칼이 없었다. 그렇게 긴 왜도를 숨길 수는 없 을 것이다. 그러나 칼 말고도 값진 것이 있는 듯, 다른 기회를 노리는 듯 했다. 실망하는 야불수에게 표현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조선에서도 왜도 같은 일본 물건을 많이 만든다고 합니다." 여차하면 표헌이 왜도를 구해주겠다는 뜻이었다. "알아. 그런 식으로 공을 가짜로 세우는 거지 뭐. 그래도 자기 편 죽여 서 목을 베어 바치는 것보다 훨씬 낫잖아?" "왜군처럼 보이도록 앞머리는 밀고요." "겁쟁이들일수록 전공을 세우고 싶은 마음은 더 강해. 그렇다고 불쌍 한 조선인 피난민들을 죽이나?" 잠시 민망한지 야불수가 헛기침을 하며 해협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런 짓을 한 것은 조선군이나 명군이나 다를 게 없었다. 바다에서는 판옥선 한 척이 왜선 여러 척에게 포위된 채 치열하게 저 항하고 있었다. 그러나 표헌이 보기에 거제 깃발이 달린 저 판옥선은 가 망이 없었다. 갑판에서 저항하는 조선군은 이제 몇 남지도 않았다. "다완 있스므니까? 값은 후하게 쳐드리겠스므니다. 상인인 제가 뭐하 러 요코메 일을 하겠스므니까? 장사할 게 없나 보러 왔스므니다." 왜인이 뜻밖의 제안을 했다. 왜군을 따라 조선에 들어온 장사꾼들은 병사들에게 보급품을 판매하고 유곽을 운영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군 대를 따라다니면서 조선인 노예를 사냥하러 온 경우가 더 많았다. 그러 나 포르투갈인들이 주로 사들이는 노예 가격이 폭락하자 이렇게 사업 방 향을 바꾼 장사꾼들도 있었다. "다완茶碗? 차 그릇 말인가?" "그렇스무니다. 고려다완은 아주 좋스므니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뭐가 좋은지 왜인이 입을 헤 벌렸다. 야불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일본에서는 찻잔 하나를 조총 열 자루하고 바꾼다더니 정말인가 보 군. 성 한 개하고도 바꿨다는데, 그거야 풍신 씨한테 특별한 의미가 있는 다기였으니까." "그럴 리가 있겠스므니까? 그건 바가지 쓴 것이므니다." 요코메가 마구 흥분했다. 여차하면 명나라 호위병들에게 죽을 지도 모 른다는 사정은 안중에도 없는 듯했다. 그때 지게를 진 노인이 슬그머니 다가와 옆에 앉았다. 표헌이 보기에 이 쭈글쭈글하고 겁에 질린 노인은 왜인 밑에서 일하는 조선 사람 같았 다. 호위병들도 왜인과 조선인을 번갈아 보더니 접근을 막지 않았다. "음. 그렇게 안 바꾼다는 건가? 꽤 비싸다고 들었는데. 그럼 조총 세 자루? 두 자루?" 야불수가 한 자루냐고 묻기 전에 인상을 잔뜩 찌푸리던 요코메가 대답 했다. "고급 다기는 조총 100자루하고도 안 바꾸므니이다." "그래? 대단하군. 음! 야불수 때려치우고 나도 장사나 할까보다." "어떤 다기를 최고로 치나?" 그때 표헌이 끼여들었다. 표헌은 사옹원에서 궁중에서 쓸 그릇을 만든 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잘하면 뭔가 큰 사업꺼리가 생길 지도 몰랐다. "일본에서는 오오이도나 아오이도를 최고로 치므니다. 무거워 보이면 서도 새털 같이 가볍고 전체적으로 무척 부드러운 다완이므니다. 오오이 도大井戶의 시원하고 깊은 비파색, 아오이도靑井戶의 따스한 회갈색. 크 고 널찍해서 풍성해 보이는 모양. 아아! 생각만 해도 기쁘므니다." "그게 다완이야? 그건 내가 생각하는 다기가 아닌데, 혹시 막사발 종 류를 잘못 말한 건 아닌가?" "바로 그것이므니다. 그건 예술입니다. 보고 있자면 마음이 평화롭고 한없이 기쁘고 숭고하고 편안하므니다. 아! 우리 일본인에게는 첫째 가 는 보물이고 신불神佛이나 다름없는, 거의 무한한 신앙의 대상이므니다." 요코메가 제 말에 감동해서 표헌의 질문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는 듯했 다. 요코메는 하늘을 바라보며 바보처럼 웃을 뿐이었다. 표헌은 무척 골치 아프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벌떡 일어나서 피난민들 사이로 들어갔다. 쌀 한 되를 피난민에게 주어 값을 치른 표헌 이 막사발 하나를 들고 왔다. 물그릇으로 쓰던 것이었다. "이런 거 말이지? 그런데 이건 주둥이에 얼룩이 져서 썩 좋은 건 아 냐." 표헌이 막사발을 내밀자 요코메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 막사발을 소중히 받아 살피던 요코메가 가장자리를 경건하게 만 졌다. "얼룩이라니요. 요변, 그러니까 단풍이무니이다. 아! 아름답스므니다! 구름처럼 자연스럽스무니다. 이런 마쿠사바루면 최고이므니다. 소박한 미 완성의 미! 일본에서는 절대 못 만드므니다. 오늘 저는 눈이 무척 즐겁 스므니다." "왜?" 표헌이 의혹에 가득 찬 눈으로 물었다. 해도 해도 너무했다 싶었다. 이 것은 분명히 조선인들이 김치그릇이나 막걸리 사발로 쓰는 극히 평범한 사발이었다. 일본인 영주들이 이렇게 큰그릇으로 차를 마시다니, 이런 싸 구려 막사발이 일본에서는 엄청난 가치가 있다니,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 다. 야불수도 고개를 갸웃거리며 막사발을 살피고 있었다. "고려다완은 같은 모양이나 같은 특징을 가진 것이 하나도 없이 다 다 르고 개성이 있지 않스므니까? 그러면서도 무척이나 자연스럽스므니다. 일본인은 그렇게는 절대로 절대로 만들지 못하는 것이 마쿠사바루이므니 다. 아아! 예술이므니다." 일본인은 절대 그렇게 만들지 못하는 것은 제작과정 차이가 아니라 문 화 차이 때문이다. 일본인은 수천 개를 만들더라도 똑같은 규격으로 만 들지만, 조선인은 눈대중으로 대충대충 만든다. 이것은 때에 따라서는 무 척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무위자연無爲自然을 넘어선 무작위無作爲의 창조활동, 그것이 일본인들이 막사발을 높이 평가하는 이유였다. "그 다완을 제게 팔지 않으시겠스므니까? 은 한 덩이를 드리겠스므니 다." 왜인이 은덩이를 꺼내자 표헌이 야불수와 눈을 마주쳤다. 야불수의 눈 이 사발만큼 커졌다. 야불수는 정신이 나가 피난민들에게 뛰어갔다. 호위 병들도 양식이나 은을 잘라서 주고 막사발을 사느라 정신이 없었다. 해 협에서는 전투가 한창이었지만 피난민들 사이에서는 웅성거림이 계속됐 다. 요코메는 야불수와 호위병들이 건네는 막사발을 받을 때마다 은 한 덩 이를 건넸다. 이들이 바로 눈앞에서 엄청난 폭리를 취하는데도 일본 상 인은 여유만만했다. 이 물건을 일본에 가져가면 이득을 몇십 배나 취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더 없겠스무니까? 많을수록 좋스무니다." - 퍼벙! 표헌이 깜짝 놀라 해협을 내려보았다. 다시 자욱한 연기가 피어올라 제대로 보이지는 않지만 조선수군이 밀리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었다. 표 헌이 고개를 들어 건너편 진도를 살폈다.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이보게. 저 앞에 섬에는 도요지가 많아. 고려청자가 사라지고 퇴화한 것이 분청사기 등 여러 종류인데, 막사발도 비슷한 방법으로 만들거든. 그리고 저 섬엔 개가 많아. 그러니 개밥그릇으로 쓰는 막사발도 많을 거 야." "아! 그렇스무니까? 고맙스무니다." 왜인이 절을 몇 번이나 하고 나서 허둥지둥 자리를 떴다. 피난민 노인 도 지게를 지고 왜인을 따라갔다. 표헌이 혀를 찼다. "쯧쯧! 저 친구. 개밥그릇 훔치다가 진돗개한테 물리지나 않을지." 역사전쟁소설 // 남해 // 2권 copyright (C) 2001 김경진 안병도 신재호(필명) 공저 업로드 김경진 (전쟁소설 데프콘 1, 2, 3부, 동해, 남북, 판타지 하늘길잡이 공동저자) 2. 삶과 죽음 (2) = 경상우수영 좌선, 우치적 "어서 거제1선을 구하라!" 통제사가 칼로 가리킨 곳에는 안위의 배가 있었다. 좌선의 군사들은 더 이상 쉬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뱃전 아래에서는 다시 도노장과 격군 들이 쉰 목소리로 외치는 구호가 가득했다. 꿀맛 같은 짧은 휴식, 그리고 엄청난 수의 적을 상대로 싸우고도 살아남았다는 안도감이 이들에게 앞 으로도 살 수 있다는 희망을 준 듯했다. 거제1선에서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왔다. 왜군들에 밀 린 군졸들은 장대를 내주고 점점 고물로 물러서고 있었다. 이제 더 물러 설 곳도 없었다. 얼마 남지 않은 군졸들이 악착 같이 막고 있지만 거기 까지가 한계였다. "바보 같은 놈들!" 우치적이 통제사의 시선을 따라갔다. 거센 물살에 파묻힌 채 떠내려가 는 격군들이 마지막 손길을 하늘로 뻗고 있었다. 좌선이 역류를 타고 천천히 나아갔다. 왼쪽에서는 중군장 김응함의 배 가 왜선 두 척을 맞아 그런 대로 잘 싸우고 있었다. 왜군의 철갑선은 옆 면이 흉하게 깨지고 무너져 수많은 왜군들이 쓰러져 있는 속이 그대로 드러났다. 얼마 남지 않은 왜군들이 중군장의 배에 올라타려 했지만 조 선수군들이 잘 막아내고 있었다. 그리고 중군장 배와 싸웠을 다른 왜 대 선 한 척은 부서진 채 좌선 옆으로 떠내려갔다. 좌선이 앞으로 더 나가자 진도 가까운 바다에서 악전고투하는 거제1선 이 한 눈에 들어왔다. 뱃전에는 시체가 산을 이루고 왜군과 조선군은 시 체를 밟은 채 격렬하게 싸우고 있었다. 조선군은 겨우 열 명 남짓 남았 고, 지금도 하나씩 쓰러지고 있었다. "선장! 어서 왜적을 공격하라!" 통제사가 초조한 듯 군관 송한을 재촉했다. 만약 거제1선에 탄 군사들 이 다 죽는다면 뒤에서 거제1선의 전투를 주시하고 있는 판옥선들은 아 예 올 생각을 하지 않을 것이다. 좌선 입장에서는 이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거제1선을 구해야 했다. 그러나 좌선에서는 포를 쏠 수가 없었다. 함몰 위기의 거제1선은 왜선 들에 반쯤 가려있고 접근하기가 곤란했다. 쏘더라도 잘못하면 아군이 맞 을 가능성도 있었다. - 파바방! 왜선에서 좌선을 향해 총을 쏘기 시작했다. 멀어서 맞는 사람은 없었 지만 탄환은 충분히 이곳까지 날아왔다.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어 송한과 포수들이 우물쭈물하자 우치적이 나 섰다. "도훈도! 배를 왼쪽으로 틀어라. 그리고 우변 화포는 조란탄을 먼저 쏜 다. 목표는 거제 1선이다!" "부사 영감! 우리 군사가 맞으면 어떡하시려고..." "급해! 한 명이라도 살리려면 어서 왜적들을 쓸어버려야 해. 쏘아라!" 반발하는 송한을 밀치고 우치적이 포수들에게 직접 명령했다. 잠시 망 설인 포수들이 배가 방향을 틂에 따라 포구 방향을 조심스럽게 조정했 다. 우현의 화포 가운데 작은 자갈을 장전한 총통은 3문이었다. 자칫하면 절망적으로 저항하는 조선수군들까지 모조리 쓸어버릴 수가 있었다. 작 은 불꽃이 심지를 타고 구멍 속으로 빠르게 들어갔다. - 뻐벙! "우악!" 마지막까지 미세한 각도로 당차를 돌리던 늙은 화포장이 뱃전에 나뒹 굴었다. 현자총통이 발사된 반동으로 당차가 뒤로 뛰어오르고, 이것이 화 포장의 무릎을 친 것이다. 포수들이 늙은 화포장을 부축해 일으켰다. 다 행히 큰 부상은 안 입은 듯했지만 당분간은 걸을 수 없을 것 같았다. 화포장이 비교적 정확히 쏜 듯했다. 거제1선에서 칼날을 치켜들고 고 물로 돌격하던 왜병들이 일제히 쓰러졌다. 그리고 철갑선에서 좌선을 향 해 조총을 쏘던 왜병들도 쓰러지는 자가 많았다. 살아남은 왜병들이 서 둘러 철판을 끌어올려 다락을 닫았다. "왜선에 차대전을 쏘아라!" "적선은 철갑선입니다! 소용이 없습니다." "그럼 안 쏘겠다는 건가? 옆에서 쏘면 괜찮단 말이다!" 우치적이 송한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다툴 때가 아니라는 듯 우치적이 다시 포수들에게 직접 명령했다. "뭐하느냐? 어서 차대전을 왜선에 쏘아라." 곧이어 굉음과 함께 커다란 나무기둥 다섯 개가 허공을 갈랐다. 널따 란 일본 철갑선의 우현 장갑은 전면처럼 두터운 철판으로 연결되어 있었 다. 그러나 수직 방향에서 날아온 차대전의 충격력을 버틸 정도는 아니 었다. 차대전 두 개는 철판을 깨고 들어가고 다른 두 개는 퉁겨 나왔다. 차 대전 네 개가 연달아 명중하자 다락 전체가 기우뚱거렸다. 그 직후에 다 락이 뒤쪽부터 차례로 무너져 내렸다. 철판은 두껍고 철판에 덧댄 대나무방패도 두터웠지만 왜선의 구조 자 체는 그리 강하지 못했다. 무너진 다락에서 빠져 나오며 왜병들이 아우 성을 쳤다. "그래! 거제1선에서 쏜 화포에도 맞았으니까 더 이상 견디지 못한 거 야." 늙은 화포장이 실눈을 뜨고 그 광경을 바라보며 웃었다. 짧은 시간이 었지만 화포장이 포수들을 잘 가르친 보람이 있어 명중률은 좋은 편이었 다. 화포장火砲匠은 천민 신분인 장인匠人인데 화약을 장전할 뿐만 아니 라 평시에는 화약과 화포를 만들고 화포를 쏘는 포수들을 훈련시키는 일 도 담당한다. 그래서 다른 명칭은 화포교사이다. 좌선이 거대한 검은 깃발을 휘날리며 철갑선을 향해 다가갔다. "도훈도! 목표는 왜선들의 뱃전 아래다. 천자총통을 쏘아라! 사부들은 화전을 준비하라!" 우치적은 감상할 겨를도 없었다. 일단은 거제1선을 공격하는 왜병들을 물리치고 배를 안전한 곳으로 빼돌려야 했다. 천자총통이 발사되자 대장군전 두 발이 철갑선의 현측을 뚫었다. 철판 도 없는 곳이었다. 노가 한쪽에만 40개가 넘게 달려 마치 지네를 연상시 키는 큰 배였다. 반대쪽을 향해 움직이던 노가 동시에 10개 넘게 멈춰 섰다. "적선들이 다가옵니다." "선두 2척에 나눠서 좌변 화포 발사!" 송한의 보고와 동시에 우치적이 명령을 내렸다. 송한은 어느새 우치적 에게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었다. 화포가 연속 발사되고, 배가 위험할 정 도로 기우뚱거렸다. 다락이 무너지고 자갈을 뒤집어 쓴 왜군들은 아우성 을 쳤다. "아! 중군장!" 군사들이 탄성을 질렀다. 중군선이 천천히 움직여 좌선 왼쪽으로 나가 고 있었다. 거제1선을 도우려는 좌선을 옆에서 호위하는 형태의 포진이 었다. 덕택에 좌선의 군사들은 철갑선과의 싸움에 전념할 수 있게 되었 다. "이번에는 불화살이다. 쏘아라!" 불화살 수십 개가 철갑선을 향해 날아갔다. 불화살은 다락이 무너져 정신이 없는 상갑판과, 커다란 구멍이 뚫린 현측으로 들어갔다. 몇 군데 에서 동시에 불길이 일어났다. 그러자 멈춰 선 노의 개수가 급격히 늘어 나고, 철갑선 두 척과 거제1선은 함께 북서쪽으로 떠밀리기 시작했다. 이때 배 세 척이 한꺼번에 빙글 돌았다. 거제1선 오른쪽에 붙은 왜선 은 계속 남동쪽으로 노를 젓고 왼쪽에 붙은 왜선은 불이 붙어 노꾼들이 노를 젓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절호의 기회를 우치적은 놓치지 않았다. "쏘아라!" 화포가 한 발씩 줄줄이 발사되자 아직 멀쩡했던 일본수군 철갑선이 엉 망이 되었다. 왜선을 향해 좌선이 다가가며 활을 쏘기 시작했다. 철갑 벽 과 지붕이 통째로 무너진 왜선에서 왜군들은 부서진 철판과 나무더미에 서 빠져 나오기도 힘겨워하는 움직임이었다. 이곳저곳에서 불길이 치솟 았다. 거제1선에서도 반격에 나섰다. 조선수군도 얼마 남지 않았지만 전투원 들이 대부분 쓰러진 일본 철갑선은 더 이상 전투능력은 없었다. 왜선의 수부들이 칼을 들고 올라오려 했지만 거제1선의 수군들이 던진 질려포통 에서 발화된 불길을 피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우치적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송한의 지시에 따라 배는 거제1선 과 싸우는 왜선을 향해 서서히 접근했다. 무수한 화살이 적의 대선을 향 해 날아갔다. 전투력을 상실한 철갑선 두 척은 이제 뒤로 도망가려 했다. 하지만 좌 선에게 집중적으로 얻어맞은 한 척은 진도 쪽 해안 암초에 좌초되고 다 른 한 척은 불길이 치솟자 수부들이 물로 뛰어들기 시작했다. 그 철갑선 은 북서쪽으로 천천히 떠내려갔다. 부서진 철갑선이 좌선 옆으로 지나가 자 군사들이 불붙은 솜을 집어 던졌다. 철갑선은 시커먼 연기를 내뿜으 며 흘러갔다. "어려운 싸움이었어. 큰일날 뻔했군." "그렇습니다. 거제가 잘 싸워줬기 때문에 저 배들을 물리칠 수 있었습 니다." 통제사와 함께 우치적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멀리 보이는 안위는 아직도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있고 다른 군졸들은 뱃전에 간신히 서서 헐떡이고 있었다. 동료들 시신을 돌아보며 눈물짓는 군사들도 있었다. 군사들이 아예 싸울 의욕을 상실한 것 같아 통제사가 기라졸들을 시켜 거제1선을 뒤로 물러서게 했다. 그러나 거제1선에서는 이상하게 반응이 전혀 없었다. 이상하게 생각한 우치적이 장대 주변에서 이상한 자를 발 견했다. "아! 왜장 한 명이 남아있습니다." "빨리 죽여버리지 않고 거제는 뭐하는 걸까?" 통제사의 말을 흘려들으며 우치적이 중군장의 배를 살폈다. 왜선들과 치열하게 싸우면서도 피해는 아직 거의 없는 듯했다. 저렇게 잘 싸우는 사람이 겁을 먹고 싸움을 피하려 하다니. 우치적이 혀를 끌끌 찼다. 배는 거의 거제1선에 도착했다. 거제1선을 공격하던 다른 왜선들은 이 제 좌선이 맡아 일방적으로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왜선들 가운데에서 거 대한 누각이 서 있고 비단으로 온통 화려하게 치장한 배가 눈에 띄었다. 그 왜선을 향해 각종 포환이 어지럽게 날고 화살이 하늘을 가렸다. = 거제1선, 안위 늙은 왜장은 시체더미 사이에 서서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온몸이 피투성이였다. 갑주에 깊이 박힌 화살 세 개 말고도 왜장의 몸은 만신창 이였다. 이마가 깨졌는지 피가 줄줄 흘러 눈을 완전히 뒤덮었다. 왜장이 등을 기댄 장대는 조란탄에 뚫려 엉망으로 부서지고 판자 곳곳 에 손바닥만한 길이의 세전이 박혀 있었다. 이것은 좌선의 화포장이 몸 을 다쳐가면서 발휘한 솜씨였다. 바로 그 밑에는 세전 여러 발을 맞아 고슴도치가 된 왜병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가! 저리 가!" 안위가 왜장에게 손짓하며 암초에 좌초한 왜선을 가리켰다. 공격하지 않을 테니 어서 타고 온 배로 돌아가라는 뜻이었다. 군관 김국이나 승병 들이 나서자 안위가 그들을 말렸다. 왜장을 공격하다가는 틀림없이 이쪽 이 더 많이 다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만 놔둬도 왜장은 가망이 없었다. 차라리 내버려두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그러나 좌선이 대신 싸우고 있는 마당에 거제1선에서는 이렇게 가만히 지켜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어서 저 왜장이 도망가면 좋을 텐데, 곤란하게도 왜장은 그저 이쪽을 노려보고만 있었다. - 팡! 굉음이 울리자 늙은 왜장이 뒤로 휘청했다. 그리고 놀란 표정을 지으 며 가슴을 살폈다. 부서진 흉갑 두 군데에서 시뻘건 피가 솟구쳤다. 다시 굉음이 울리자 왜장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안위가 놀라 뒤돌아보았다. 어느새 나타난 조라포만호 정공청이 고물 에 서 있었다. 아마도 뒤쪽 문으로 나와서 키를 타고 갑판으로 올라온 것 같았다. 정공청이 쌍자총통을 흔들면서 외쳤다. "내가 잡았다! 내가 왜장을 잡았어! 거제원. 보셨소? 내가 저 왜장을 잡았단 말이오!" 안위는 씁쓸했다. 좌선이 와서 도와주는 것은 밑에서 봤을 테고, 갑판 의 위기상황이 끝난 것도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렇다고 이제야 나타나 공을 세웠다고 날뛰는 정공청을 보니 한심한 생각이 들었다. 정공청이 칼을 뽑아 왜장의 목을 베러 다가갔다. 왼손에는 의기양양하 게 쌍자총통을 들고 있었다. 승자총통 2개를 나란히 붙이고 뒤로 막대기 를 꽂는 형태였다. 한번 장전해 6번을 연속 쏠 수 있고 한번에 납탄 1개 또는 2개를 쏠 수 있다. "이이익!" 늙은 왜장이 칼을 짚으며 다시 일어서고 있었다. 무릎을 꿇은 왜장이 정공청을 쏘아보았다. 그리고는 칼을 번쩍 들고 달려들었다. "히익! 불! 불 어딨어?" 정공청이 눈이 뒤집힌 채 네 발로 기었다. 정공청은 칼로 왜장과 맞싸 울 생각은 전혀 없는 듯했다. 그러나 총통 심지에 붙일 불은 근처에 없 었다. 이때 김국과 안위가 늙은 왜장을 향해 몸을 날렸다. "끄으윽!" 안위보다는 김국이 조금 빨랐다. 안위는 왜장을 내려치려다가 말고 칼 을 거뒀다. 왜장은 이미 무릎이 꿇리고 생명력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비 록 적이지만 용감히 싸운 늙은 무장의 투혼이 존경스러웠다. 안위는 군사들에게 눈짓해 어서 싸움에 참가하라고 독촉했다. 간신히 살아남은 군사들이 움직이는 순간이었다. "끄으! 끄으!" 그러나 왜장은 아직도 쓰러지지 않았다. 맥도에 배를 깊숙이 찔렸으면 서도 팔을 들어 정공청에게 칼을 집어던지려 했다. 그러자 김국이 맥도 를 꽂은 채 휘돌려버렸다. 그제야 왜장은 쓰러졌고, 손에서 칼을 놓았다. "질렸다." 안위가 다가가 왜장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흰머리가 투구 밖으로 삐 져 나오고 얼굴에는 온통 주름살 투성이인 왜장은 뜻밖에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무장으로서 전쟁터에서 싸우다 죽어 행복하다는 뜻일까? 안위는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저 자는 빨리 죽여주길 원한 겁니다." 김국이 씁쓸하게 말하며 왜장의 몸에서 맥도를 뽑았다. 하지만 언제 다시 왜장이 일어설지 몰라 불안한지 김국은 맥도를 계속 시체에 겨누고 있었다. = 구루지마군 어립선, 미치후사 필사의 각오로 싸운 미치후사에겐 불행한 일이었다. 미치후사의 독전 과 구루지마군 병사들의 분투도 헛되이 조선군의 기세는 맹렬해졌고 일 본군의 배는 연이어 격파됐다. 비장의 무기로 내놓은 철갑선이 조금 전가지 효과를 보이긴 했다. 앞 에 나선 판옥선 한 척은 크게 흔들렸고 거의 점령될 뻔했다. 판옥선의 노꾼 7, 8명이 물에 뛰어드는 것을 보고 미치후사는 이제 됐다 싶었다. 그러나 이런 위기를 가만히 놓아둘 이순신이 아니었다. 잠시 숨을 돌 려 기운을 되찾은 조선 대장선이 다시 움직이더니 철갑선 두 척을 단박 에 깨뜨려버렸다. 그 모습은 정말로 늠름하기 이를 데 없었다. 구루지마 군 무사들 가운데 몇몇은 싸우는 것도 잊은 채 탄성을 질렀다. 비록 적 이지만 훌륭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분하지만 대단한 인물이다. 내 기량으로는 미치지 못하겠어." 미치후사조차 마침내는 이순신을 칭찬하고 말았다. 방금 전까지 그렇 게도 거세게 적의를 불태우던 상대였다. 엔메이와 겐타로도 망연히 조선 수군의 대장선을 주시했다. 펄럭이는 수자기가 모든 일본군을 굽어보고 있었다. 일본 전국시대 무장들은 전쟁을 일종의 예술로 여기는 경향이 있었다. 그래서 상대가 멋진 전술을 보여주거나 강한 인상을 남길 경우 아무런 망설임 없이 칭찬하고 감탄했다. 이것은 조선의 선비들이 비록 반대당파 의 사람일지라도 높은 학식과 덕망을 갖춘 인물에게 찬사를 보내는 것과 같다. 같은 무장으로서 순수하게 감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에 비해 침략 받았다는 입장 때문인지 조선 장수들에겐 이런 사고방 식이 없었다. 칭찬 받을 만한 적이란 존재할 수가 없는 것이다. 비겁한 적은 비겁해서, 용감하거나 똑똑한 적은 그만큼 우리편에 위협적이므로 나쁜 것이다. 같은 편이었다면 칭송 받아 마땅한 자세를 보여준 일본군 무장에게도 그저 '괘씸한 놈!' 이란 평가가 있었을 뿐이다. "적선 두 척이 더 가담했습니다!" 대장선의 움직임과 계속되는 승세에 자극 받았는지 조선수군은 전반적 으로 활기를 찾아갔다. 판옥선 두 척을 상대하기에도 힘겨웠던 구루지마 군에게 다시 새로운 판옥선 두 척이 달려들었다. "제길!' 미치후사가 크게 소리쳤다. 마음먹은 대로 움직이는 것은 한가지도 없 었다. 새로 온 2척을 포함해 판옥선 다섯 척이 일제히 포격을 집중하자 선두에 서서 싸우던 세키부네 두 척도 마침내 완전히 부서졌다. 치열하 게 쏘던 오오쓰쓰 소리가 뚝 그쳤다. "쥬군가시라를 불러라!" 드디어 어립선에도 포환이 날아들기 시작하자 미치후사는 급히 도쿠이 미치토시를 불렀다. 그 사이에 거대한 화살이 날아들어 다락 일부를 부 수고 계속 뚫고 들어가 뱃전 아래를 휘저어버렸다. 밑에서 수부들이 배 에 물이 들어온다고 아우성을 쳤다. "무슨 일이시오?" 갑자기 받은 호출에 어리둥절해진 미치토시가 어립선으로 왔다. 미치 후사의 배와 시라가와 함대에 가려 뒤쪽에서 기회를 노리고 있던 참이었 다. "급히 해줘야 할 일이 있소." "뭐요?" 미치토시가 형이지만 신하이고, 동생인 미치후사는 당주였다. 그래서 두 사람은 서로를 높여주는 식으로 말했다. "지금 즉시 연락선을 타고 다카도라 님의 본진으로 가시오." "뭐라고요?" 전투가 한창이고 구루지마군이 고전하고 있는 판이었다. 이때 뒤쪽으 로 가라는 미치후사 말에 미치토시가 눈을 치켜 떴다. "무엇 때문이오?" "엔메이와 전령을 무사히 돌려보내지 않으면 내 체면이 서지 않소. 그 리고 다카도라 님에게 전할 말이 있소." "전할 말이라면 무엇이오?" 미치토시의 목소리가 높아졌지만 꾹꾹 참는 모습이었다. "이 미치후사, 끝까지 싸우고 있다고. 그리고 만일 내가 죽으면 내 시 체를 딛고라도 반드시 조선군을 무찌르라고 전하시오." "그런 거라면 그냥 다른 사람을 시켜도 될 일이 아니오." 드디어 미치토시가 폭발했다. 날 어떻게 보느냐는 힐난의 눈초리가 미 치후사를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이건 군령이오!" 그러나 미치후사도 거세게 받아쳤다. 그런데 그 눈은 조금 젖어있었다. 미치후사가 약간 작은 소리로 다시 말했다. "형님까지 이 자리에서 함께 죽게 하고 싶진 않습니다." 그것이 미치후사의 진심이었다. 늘 날카롭고 냉정한 그였지만 마음속 에 일말의 따뜻함은 숨기고 있었던 것이다. "윽!" 옆에 있던 미치후사의 부장이 허벅지에 작은 화살을 맞았다. 본격적인 공세에 들어간 조선군이 어립선을 향해 화살과 포탄을 마구 날리고 있었 다. 이젠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알겠습니다!" 도쿠이 미치토시가 이를 악물며 대답했다. "군령을 따르겠습니다." "고맙소.' 미치후사가 어립선 옆에 준비했던 고바야가 그대로 연락선이 되었다. 미치토시를 비롯해 약간의 구루지마 병력과 엔메이, 겐타로가 거기에 탔 다. "그럼 가겠습니다." 엔메이가 마지막 인사를 했다. 패색이 짙은 전황은 이제 누구든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승려답게 엔메이는 평온한 기색으로 미치후사에게 합 장을 해 보였다. 엔메이의 합장에 미치후사는 미소로 응수했다. 그리고 갑자기 생각난 듯 우렁차게 외쳤다. "엔메이! 혹시 오카모토를 다시 보게 된다면 전해라!" 엔메이가 약간 당황했다가 평온을 되찾았다. 미치후사가 씩 웃으며 계 속했다. "끝까지 그 의기를 관철하라고 말이다! 그리고 내가 어떻게 죽었는가 를 똑똑히 전해줘라!" "알겠습니다.' 미치후사 옆에 도열한 무사들이 눈물을 흘렸다. 미치후사가 지금 보여 주고 있는 의연하고 장엄한 모습 때문이다. 이순신만큼의 기량은 없었지 만 무장으로서의 마음가짐만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주인이라는 생각 이었다. 고바야에 타고 다카도라에게 가는 병사들도 주군과 동료들을 향 해 눈물을 보였다. "자, 그럼 이제부터..." 고바야가 출발하고 난 뒤 미치후사는 배에 탄 모두를 둘러보았다. 무 사와 병사들은 긴장된 와중에 미치후사에게 살짝 미소를 건네고 있었다. 미치후사에게 보내는 무한한 신뢰와 따뜻한 동지애였다. 미치후사가 크 게 외쳤다. "멋지게 죽어보자! 모두!" 미치후사는 접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배 가운데 높이 솟아있는 누각에 올랐다. 그러자 근습과 중신들이 따라 올라왔다. 누각 위에서 적을 향해 총을 쏘던 병사들 눈이 휘둥그래졌다. 셋은 쓰러져 있고 살아있는 둘도 최소한 서너 군데의 부상을 입은 자들이었다. "그만 내려가라." 병사들에게 명하던 미치후사의 뇌리에 5년 전 누각에서 끝까지 싸우다 죽었다는 형이 떠올랐다. 똑같이 이순신에게 당한 패배. 그리고 똑같이 누각에서 맞는 최후전투. 그때 형 미치유키도 역시 이런 심정이었을까? 미치후사는 그것이 조금 궁금했다. 갈매기 한 마리가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잇단 폭음과 함성에 이젠 익 숙해진 모양이었다. 미치후사는 자유롭게 날아가는 갈매기를 보며 중얼 거렸다. "싸울 때만 비로소 자유로울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생각해보니 죽은 다음에는 더욱 자유로워지겠군." 어립선에 조선수군의 대장선이 서서히 다가왔다. 역사전쟁소설 // 남해 // 2권 copyright (C) 2001 김경진 안병도 신재호(필명) 공저 업로드 김경진 (전쟁소설 데프콘 1, 2, 3부, 동해, 남북, 판타지 하늘길잡이 공동저자) * 전에 약속드렸던 2월말인데 아직입니다. 역시 늦춰지는군요. -_-;; * 제발 여기서만 읽으십시오. 이걸 다른 사람들한테 메일로 보내고 자 료실이나 게시판에 올릴 이유는 없지 않습니까? 카피라이트 문구는 괜히 집어넣은 것이 아닙니다. 2. 삶과 죽음 (3) = 경상우수영 좌선, 우치적 - 빠캉! 이물의 방패판 하나가 반쯤 부서져 나갔다. 그러자 우치적이 통제사를 몸으로 가리며 나섰다. "도훈도! 거리 주의하게." 새파랗게 질린 도훈도가 서둘러 사다리 아래 도노장에게 경고했다. 도 노장은 좌우변 노 4개씩을 젓지 않게 함으로써 배를 뒤로 약간 물렸다. 조선수군은 수많은 전투를 치르면서 일반 조총의 유효 사거리가 50보, 즉 100걸음 정도임을 알아냈다. 그러나 흔하지는 않지만 사거리가 조금 더 길고 위력은 훨씬 센 조총이 있는 것 같다는 것을 조선수군 장수들이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었다. 지금 좌선은 바로 그 특이한 조총의 사거리 내에 들어온 것이다. 화포가 연속 발사되는 소리를 들으며 우치적이 고개를 들어 시선을 장 대로 향했다. 장대에서는 송희립이 우치적과 통제사를 멀뚱히 내려다보 고 있었다. 계단으로는 군졸들이 새 방패판을 나르고 있었다. 장대에는 성한 방패판을 찾을 수 없는데도 송희립은 상처 하나 없었다. "이제 더 이상 왜놈들과 칼질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구먼. 안 그런가, 우 부사? 이제는 내가 장대에 올라가겠네." 전투를 지휘할 판옥선들이 있다는 것은 통제사에게 기쁜 일일 것이다. 그리고 대장은 육전에서든 수전에서든 전장에서 약간 떨어진 높은 곳에 서 지휘하는 법이다. 좌선의 높은 장대는 전장을 아래로 굽어보고 다른 판옥선들을 지휘하기에 알맞았다. 그러나 우치적은 다른 것을 걱정할 수 밖에 없었다. "통상. 아십니까? 얼마 전부터 장대가 조총의 집중표적이 되고 있습니 다." "음. 보성군수와 평산포만호의 일 말인가? 듣긴 했네만." 통제사가 한숨을 내쉬었다. 올해 6월 하순의 일이었다. 원균의 무리한 지휘 때문에 장수 둘을 헛되이 잃었다는 것이 당시의 일반적인 평가였지 만 우치적 생각은 좀 달랐다. "그렇습니다. 안홍국과 김축은 그때 장대에서 싸움을 지휘했습니다. 그 런데 방패판이 통째로 부서져나가면서 사람까지 꿰뚫었습니다." "보통 조총은 아닌 모양이군." 그때 군졸들이 장대에서 부서진 방패판을 갖고 내려왔다. 장대에서는 새 방패판을 세우느라 못질이 한창이었다. 통제사가 어두운 표정으로 커 다란 구멍이 뚫린 방패판을 찬찬히 살폈다. "왜놈들 조총은 참 여러 가지인 것 같습니다. 장대에는 잠시 제가 올 라가 있겠습니다. 적선이 멀리 있지 않으니 지금은 뱃전에 계십시오." 아직은 좌선이 뒤로 물러설 때는 아니었다. 여기서 통제사가 적탄에 맞기라도 하면? 우치적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통제사가 뭐라 말하 려 하자 우치적은 모르는 척하고 장대 위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송 군관! 그만 내려오게." "그럴 수는 없습니다. 뒤에 있는 전선들을 계속 불러들여야 할 것 아 닙니까?" 송희립은 우치적에게 여전히 차갑게 대꾸했다. 그러나 그의 눈빛에서 적대감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우치적이 피식 웃었다. "깃발이 부르지 자네 얼굴이 부르나? 내 말 듣고 통상을 모시게." 그제야 송희립이 고개를 끄덕였다. 통제사를 6년 동안 가까이 모시면 서 수족처럼 움직인 송희립이었다. 통제사의 부관격인 대솔군관으로서 통제영의 각종 연락업무를 도맡아 했지만 활솜씨와 지휘능력도 뛰어났 다. 다른 군관들이 판옥선을 지휘해 공을 세워 통제사의 막하를 떠나도 송희립은 계속 진중에 남아 있었다. 그래서 눈빛만으로도 통제사가 무엇 을 말하는지 알 수 있었다. "녹도와 평산포가 옵니다!" 장대를 내려오면서 송희립이 큰소리로 외쳤다. 과연 녹도만호 송여종, 평산포대장 정응두의 배가 다가오고 있었다. 적선을 향해 화포와 활을 쏘던 군졸들이 그것을 보고 일제히 함성을 질렀다. "감목관! 같이 올라가세." "예! 부사 어른." 우치적과 김탁은 가볍게 발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군졸들도 자신감에 넘쳤다. 판옥선 두 척이 더 가담했으니 이제는 두려울 게 없었다. 잠시 후 판옥선 다섯 척이 해협을 꽉 채웠다. "콜록!" 장대에 오른 우치적은 매캐한 흰 연기에 잠시 정신이 혼미했다. 방패 판 사이로 좌선 바로 앞에서 공격받는 왜선들뿐만 아니라 해협 남동쪽 바다를 가득 메운 왜선들이 한꺼번에 들어왔다. 좌선 앞에서 중군장 김 응함의 배가 마치 돌격선처럼 용감하게 싸우는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우 치적은 전망이 좋다는 생각보다는 왜군들이 이 장대만 노리는 것 같아 두려운 느낌이 들었다. 우치적이 활을 들고 목표를 찾았다. 바로 앞에서 형편없이 부서지고 있는 커다란 왜선에는 특이하게도 무척 높은 망루가 있었다. 화려한 갑 옷에 붉은 비단을 걸친 왜장이 가장 먼저 눈에 띄고, 그 옆에 선 다른 자들도 풍뎅이 같은 투구를 쓰고 있어서 한눈에 봐도 그들이 장수들임을 알 수 있었다. 우치적과 김탁이 시선을 마주쳤다. - 취익! 흔들리는 배에서, 그것도 높은 장대에서 쏘는 화살이었다. 그러나 우치 적과 김탁이 쏜 화살은 정확히 왜장을 향해 날아갔다. 이 정도 거리에서 는 급소를 정확히 맞히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사람 크기 정도는 충분히 맞힐 수 있었다. "응? 저것들이 몸으로 가려?" 그런데 전혀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붉은 비단을 걸친 왜장 앞을 다른 왜장들이 가로막고 나선 것이다. 화살을 맞은 왜장 둘 가운데 하나가 옆 으로 굴러 떨어졌다. 망루의 난간은 워낙 약해 사람 몸무게도 견디지 못 하고 부서졌고, 그 왜장은 무너지고 기울은 다락을 따라 구르다가 이내 물에 빠졌다. 그 왜장은 다시는 물위로 떠오르지 않았다. 김탁이 다시 활을 쏘자 다른 왜장이 또 가로막았다. 대신 화살에 맞은 왜장은 가슴에 맞은 화살을 움켜쥐면서 끝까지 버텼다. 우치적이 활을 쏘자 그 왜장은 천천히 무너졌다. "지독한 놈들!" 화살을 재며 우치적이 투덜거렸다. 우치적은 조금 전에 자기가 통제사 를 몸으로 가린 사실 따위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사또! 저 자가 대장인가 봅니다." 김탁이 흥분했는지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우치적의 기억으로도 왜군 들이 저런 모습을 보인 적은 없었다. 어쩌면 저 자는 500척을 이끄는 총 대장은 아닐지라도 이곳 해협에 들어와 싸우고 있는 왜선들의 대장일 지 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왜장들이 하나씩 화살에 맞고 쓰러졌다. 우치적과 김탁은 연달아 화살을 날렸다. 망루의 왜장들은 뱃전에 선 조선 군관들이 쏘기에는 조 금 높아서 이 장대에서 해치우는 편이 나았다. 어느덧 망루에는 붉은 비 단옷을 입은 왜장 하나만 남았다. "쏘십시오, 사또!" 김탁이 화살을 메긴 활을 아래로 내린 채 우치적을 응원했다. 감목관 은 원래 그 지역 수령이 겸직한다. 그러나 넓은 지역을 다스리고 관내에 위치한 전라좌수영을 뒷바라지를 해야 하는 순천부사는 해야 할 일이 무 척 많았고, 순천목장은 순천부에서 너무 멀었다. 그래서 종6품으로서 현 감과 동격인 순천감목관은 목장일 외의 여러 가지 일에서도 순천부사의 대리인인 셈이다. "아차!" 시위가 손을 떠난 직후 우치적은 잘못 쏜 것을 깨달았다. 목표가 왜군 의 대장이라고 생각하니 너무 긴장해서 화살이 조금 아래로 향한 것이 다. 그러나 화살은 사람 키 반쯤 되는 나무난간을 뚫고 들어가 왜장의 허벅지에 박혔다. 그런데 왜장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저 왜장은 담담하게 죽음을 맞겠다는 자세로군." 우치적이 전혀 뜻밖이라는 표정으로 말했다. 우치적 옆에서 활을 겨누 던 순천감목관 김탁도 공감했다. "그렇습니다, 사또. 저들에게 싸움은 인생이며 철학입니다. 죽을 때도 어떻게든 멋있게 죽으려고 고민한답니다." 말을 마친 김탁이 차분하게 화살을 날렸다. 그러나 이번에는 화살이 왜장의 어깨에 박혔다. 우치적과 얼굴을 마주친 김탁이 멋쩍어했다. "잠깐! 쏘지 마." 우치적이 다시 화살을 겨눈 김탁을 말렸다. 밑에서 항왜 준사가 통제 사에게 달려가더니 왜선을 가리키며 뭐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우치적은 준사가 잔뜩 호들갑 떠는 꼴을 특이하게 여겼다. 준사는 좌선에 탈 정도 로 통제사의 신임을 받고 있는 항왜였다. 우치적이 그 동안 유심히 지켜 보니 준사는 왜놈치고는 무척 차분하고 머리도 좋은 편이었다. 통제사가 장대를 올려보자 우치적이 화살을 잡은 손을 왜장에게 향했 다. 통제사에게 왜장을 양보하겠다는 뜻이었다. 우치적이 김탁에게 나직 하게 말했다. "저 왜장이 우리 화살에 맞아 죽지 않은 것은 저 자가 통상의 몫이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 참이네." 통제사가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송희립이 활과 화살을 바쳤다. 옻칠을 한 흑각궁에 기다란 장전이었다. 잠시 왜선의 망루를 향해 고개를 끄덕 이던 통제사가 천천히 활시위를 당겼다. = 구루지마군 어립선, 미치후사 - 빵! 빠바바바방! 빠방! 탁! 요란한 소리를 내며 대나무방패가 한꺼번에 줄줄이 터져 나갔다. 막혀 있는 대나무 마디마디에 차 있던 공기가 불길에 의해 갑작스럽게 팽창하 면서 대나무를 터뜨리거나 쪼개는 소리였다. 날카로운 대나무 조각에 찔 린 병사가 목을 움켜잡고 쓰러져 버둥거렸다. 조선에 와서 불화살에 그렇게 당했으면서도 일본에서의 습관을 바꾸지 못한 벌이었다. 조선의 화전은 불타는 솜뭉치를 매단 정도가 아니라 일 종의 화약무기였다. 살촉 바로 아래에 화약통이 터지면서 불길을 내뿜거 나, 살대 뒤쪽에 추진용 화약통이 달려있어 멀리 날아가거나, 살촉 아래 의 화약통이 추진체를 겸하는 세 가지 방식이었다. 다락은 산산이 부서진 지 이미 오래였다. 작은 조약돌과 작은 화살의 구름이 갑판을 휩쓴 지 조금 지났다. 많지 않은 병사들이 마지막 저항을 하고 있는 순간이었다. "그립군." 두 번째 화살이 어깨에 꽂혔을 때 미치후사는 신음과 함께 중얼거렸 다. 누각에 올라있는 그에게 판옥선에서 쏘는 화살이 끊임없이 날아왔다. 처음에 그 화살들은 미치후사를 몸으로 감싸던 중신이나 근습들에게 맞 았다. 화살에 맞은 자는 한참을 버티다 쓰러지거나 누각 아래로 굴러 떨 어져 바닷물 속에 처박혔다. 이제 누각에는 미치후사 혼자였다. 이미 각오를 한 만큼 특별히 화살 을 피하려 하지 않았다. 첫 번째 화살이 허벅지에 박혔을 때도 그저 조 용히 서있었다. 미치후사는 화살을 뽑을 생각도 하지 않고 칼을 빼든 채 적선을 가만 히 노려보았다. 그 모습을 본 병사들을 모두 숙연하게 최후의 저항을 하 고 있었다. 믿었던 철갑선들까지 그렇게 된 후 구루지마 해적은 급속히 무너지고 있었다. 그러나 병사들은 누구 하나 도망치려는 자는 없었다. 미치후사가 겪는 고통은 결코 견딜 만한 것이 아니었다. 허벅지에선 진득한 피가 흘러내려 발치에 고이고, 어깨를 파고든 화살은 정신이 아 득해질 정도로 큰 고통을 주었다. 오로지 정신력으로 버틴다는 말이 딱 맞았다. 그러나 점점 만신창이가 되는 어립선과 함께 미치후사의 몸도 부서지고 있었다. "그 때가 정말로 그리워. 오카모토. 아니, 김충선. 너도 그렇게 생각하 겠지?" 미치후사 눈앞에 몇 가지 기억이 등불처럼 흔들거렸다. 구루지마 해적 의 이름을 사방에 떨치며 바다를 누비던 때, 그 때는 아무 것도 두려울 것이 없었다. 원숭이 얼굴을 한 히데요시가 천하인입네 하며 복종을 요 구하지도 않았고 그렇게 강력한 적대세력도 없었다. 그만그만한 영주 가 운데 도전해 오는 세력이 있으면 과감히 싸워 깨뜨렸다. 구루지마 해적이 누군가에게 굴복해 그를 주군으로 모신다는 건 꿈에 도 생각해 본 일이 없었다. 육지에서는 어느 누가 얼마만한 세력을 가지 고 있든 말든 물위에서는 무라카미 가문의 깃발을 나부끼는 구루지마 해 적이 최고였다. "사이가 패인 너도 그랬겠지." 미치후사는 김충선과의 마지막 밤을 떠올렸다. 부산진에 머문 그가 마 지막으로 본 모습이었다. "조선이란 나라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한창 술기운이 올랐을 때 김충선이 물었다. "조선?" 이렇게 조선 땅에 오긴 했지만 미치후사는 별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 다. 일본 천하를 통일한 히데요시의 명을 받아 조선을 치게 됐지만, 거의 대부분 영주가 조선에 대해 어떤 생각도 없었다. 나쁜 감정도 없고 특별 히 호의를 가진 것도 아니었다. 그저 주군으로 받들어야 하는 히데요시 가 명나라를 치려하는데 조선이 방해한다 하니 싸워야 한다는 정도였다.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미치후사는 반대로 김충선에게 질문을 돌렸다. "대단한 나라라고 생각합니다." "어째서?" "우리 일본에는 없는 걸 가지고 있으니까요." "우리에게 없는 것이라고? 그게 뭔가?" "문화입니다." "문화? 그거라면 차라리 일본이 낫지 않은가? 상업이 발달하고 장인들 이 갖가지 물건을 만들어내고 있어. *그런데 자네, 오버하는군. 문화라는 단어가 이 시대에 있을 리가 없잖아? 그건 19세기말에나...(이상, 삭제.)" "물질 말고 정신 말씀입니다." 미치후사는 이야기를 할수록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이가 패에 좀 유별난 자가 많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눈앞에 있는 이 젊은 무장 같은 경우는 처음이었다. 겨우 하급무장이면서 많은 생각을 하고 교양이 엿보 이는 점도 그렇고 조선과 문화를 논하는 것도 그랬다. 이런 이야기는 아 마 조선에 능통한 상인 출신의 고니시 유키나가 정도가 할 수 있을 것이 다. "문화라면 우리도 없는 게 아니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나?" 어쨌든 미치후사는 김충선에게 흥미를 갖게 됐다. 때문에 좀 더 화제 를 이끌어 나갔다. "우리 일본이 강한 무기를 갖추고 많은 병사를 거느린 건 사실입니다. 그리고 나름대로의 문화를 갖추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건 고작해야 중 국이나 남만에서 전해진 것에 옷만 갈아 입힌 것과 같습니다. 마치 머리 에 아무 것도 든 게 없는 거한이 비단옷을 걸치고 큰소리치는 것과 같습 니다. 그에 비해 조선은 중국의 것을 완벽히 소화했을 뿐만 아니라 어떤 분야에선 오히려 중국을 능가하기도 합니다. 이것만으로도 이 나라는 만 만히 볼 나라가 아닙니다." "쓸데없는 겉치장이다, 그런 건!" 미치후사가 김충선의 말을 일축했다. "불경을 잘 외우는 중이 창을 잘 쓰는 무사보다 나은 건 아니다. 싸움 이 벌어지면 그깟 중놈은 도망이나 가는 게 고작이야. 자네가 말하듯 그 렇게 훌륭한 문화를 갖고 있는 조선인들이 지금 어떻게 행동했던가? 비 겁한 데다 약해빠진 녀석들이라고 무장들이 모두 비웃고 있어. 설마 이 렇게까지 약할 줄 몰랐다고 말이야." "글쎄요." 김충선은 침착하게 답했다. "제 생각이지만 조선인들은 결코 우리에게 굴복하진 않을 겁니다." "어째서?" "일본에서는 무력으로 짓밟으면 대개 굴복합니다. 강한 자에게 머리 숙인다 해서 특별히 자존심이 상할 것은 없고, 오히려 그건 당연하게 받 아들이니까요. 하지만 높은 문화를 이룩해 놓고 그것에 긍지를 가진 조 선인들은 우리에게 굴복하는 자체가 엄청난 굴욕입니다. 목숨을 걸고 저 항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입니다. 아니, 목숨을 잃어도 상관없어 할겁 니다. 그편이 차라리 명예로운 죽음이라 여기겠죠." "흥! 우리에게 머리 숙이는 게 그 정도로 참을 수 없단 말인가?" "만일 개나 고양이가 이빨을 드러내며 미치후사 님더러 머리를 숙이라 면 숙이시겠습니까?" "뭐라고?" 미치후사 눈에서 불꽃이 일었다. 그러나 김충선은 여전히 침착하게 말 했다. "문화를 가진 사람들에게는 제대로 된 문화가 없는 자는 개나 고양이 와 다를 바 없게 비칩니다. 조선인들이 우리를 보는 시선이 바로 그렇겠 지요. 철포나 칼을 들이댄다고 해서 그들이 우릴 얼마나 따르겠습니까?" "우리가 짐승이란 말이지?" "딴은 그렇지요." "어이가 없군." 미치후사는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힘이 없으면 그 어떤 정의도 있을 수 없는 세상. 그것이 그가 태어나고 자란 일본이었다. 때문에 어떻 게든 힘을 기르고 쓰는 것에 모든 것을 바쳤다. 그런데 힘이 아닌 문화 와 자존심만으로 굽히지 않는 세상이 여기에 있다고 김충선이 말하고 있 는 것이다. "저는 오히려 이런 조선이 마음에 듭니다." 그리고 김충선은 더욱 노골적으로 조선에 대한 호감을 나타냈다. "문화가 좋단 건가? 힘은 없어도?" "예." 김충선은 단언했다. "문화는 무엇보다 큰 힘이니까요. 솔직히..." "솔직히 뭔가?" "전 차라리 조선을 돕고 싶습니다." "뭐야?" 김충선은 태연하게 속마음까지 털어놓았다. 김충선이 사이가 패로서 무라카미 해적의 무사인 미치후사에게서 어떤 동질감을 느껴서인지, 아 니면 단순한 용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미치후사는 점점 곤혹스러 워졌다. 신분이나 관록도 변변치 않은데, 놀랄 정도로 당돌하게 말하는 이 젊은 무장을 어떻게 대해야 할 지 몰랐다. "우리가 곧 이겨서 조선은 굴복할 거다. 고니시와 가토가 지금 대나무 베듯 서울로 진격하고 있다는 소식은 들었지 않은가? 자네 신념은 가상 하지만 패배할 것이 확실한 나라를 도와서 좋을 게 뭐가 있겠나?" 마지막으로 미치후사는 김충선에게 현실을 들이댔다. 조선은 지금 맥 없이 패하고 있었다. 강력한 저항을 예상했던 일본군이 놀랄 정도로 반 격은 전혀 변변치도 않았다. "말씀드렸다시피 이 나라는 결코 일방적인 힘에 굴복하지 않을 겁니 다. 그리고 설령 패한다해도 좋습니다. 문화를 지키기 위해 한번 목숨을 걸어보는 것도 무사로서 나쁠 것은 없지 않겠습니까?" 김충선은 희미하게 웃었다. 그 웃음이 너무도 천진하게 보였다. "어차피 전 사이가와 함께 죽었어야 할 몸이니까요." 그 때 미치후사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굳은 얼굴로 돌아 섰을 뿐이다. 신념대로 행동하는 것이 좋다는 말도, 감히 배반자가 되겠 느냐고 다그치지도 못했다. 남은 것은 힘에 굴복해 자유를 포기한 스스 로에 대한 회의였다. 그리고 그로부터 며칠 뒤, 일본으로 돌아가는 배에서 김충선이 조선 쪽에 투항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녀석. 끝내 했구나." 미치후사는 이 말 외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조선과의 싸움에서 형 미치유키를 잃고, 또 많은 구루지마 해적을 잃 었다. 그래서 솟구치는 분노에 때로는 잠도 이루지 못할 지경이었다. 이 순신이 찢어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웠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스스로에 대한 회의가 몰려왔다. 애초부터 그가 이 순신이나 조선과 무슨 원한이 있고 무슨 관계가 있었던가? 힘에 굴복하 고 강한 편에 붙어 목숨과 세력을 유지했지만 그게 무슨 소용이었던가. 결국 그 힘에 밀려 이렇게 싸움을 강요당하고 있지 않은가? 그나마 싸울 때가 아니면 살아있다는 것조차 느끼지 못할 지경이었다. 피가 튀고 함성이 오가고, 마음대로 병사를 지휘할 수 있을 때만 비로소 자유를 느낄 수 있었다. 그럴 때는 오랜만에 자유로웠던 옛 시절에 대한 꿈을 꾸었다. 물살을 가르며 나가는 배와 승리에 취한 병사들의 드높은 함성. 미치후사는 영원히 그 꿈속에서만 살고 싶었다. "그래. 어서 나를... 그곳으로 데려가라." 임박한 죽음과 패배를 앞두고 미치후사는 접의자에 좌정했다. 미치후 사 대신 먼저 쓰러진 근습들 위에 앉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누각을 향해 연달아 화살을 퍼붓던 조선 대장선에서는 잠시 화 살 쏘기를 멈추고 있었다. 이상하게 여긴 미치후사가 고개를 들었을 때 조선수군 대장선에서 눈에 확 들어오는 사람이 있었다. 황금빛 갑옷을 입은 늙은 장수가 미치후사에게 활을 겨누고 있었다. 백발이 성성한 데다 수염까지 새하얀 장수였다. 다른 조선군 장수들은 묵묵히 늙은 장수와 미치후사 사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미치후사 얼굴에 가느다란 미소가 떠올랐다. 피잇 소리가 나며 화살이 미치후사의 왼쪽 가슴에 박혔다. "고맙소. 이순신 공公!" 마지막으로 미치후사는 크게 소리치고 싶었다. 그러나 피가 다 빠져버 린 몸엔 한 점의 기운도 없었다. 말이 소리가 되어 나와주지 않았다. 입 안에서 피거품이 부글거리는 소리만 울렸다. 미치후사의 몸이 천천히 기 울어지며 파란 바다 속으로 빨려들었다. 구루지마 미치후사. 한때 최강을 자랑했던 무라카미 해적의 직계로, 구 루지마 해적을 이끌고 치열한 난세를 헤쳐온 인물이었다. 천하를 통일한 권력자에 맞서 싸우던 다른 해적들이 차례로 소멸할 때 유일하게 살아남 은 무장은 이렇게 먼 조선 땅에서 그 최후를 마쳤다. 나름대로 신념은 있었지만 결국 권력에 굽힌 군소세력의 우두머리로서 비참하다고 말할 만한 최후였다. 한편 그와 함께 하룻밤 술잔을 기울이던 오카모토는 조선에 귀화해서 '김충선'이란 이름을 얻었다. 대의를 위해 조선에 투항했다고 밝힌 김충 선은 과연 사이가 패의 후손답게 철포와 화약 제조법을 조선에 전수했고 전쟁터에서도 크고 작은 공을 세웠다. 조선의 군제와 훈련방법에도 크게 영향을 끼친 그는 이괄의 난과 병자호란 때에도 앞장서 싸워 삼난공신三 亂功臣이라 불렸으며 품계가 정2품 정헌대부에 이르렀다. 지금도 경상도 달성군 우록동에는 김충선의 후손들이 집성촌을 이루며 살고 있다. 역사전쟁소설 // 남해 // 2권 copyright (C) 2001 김경진 안병도 신재호(필명) 공저 업로드 김경진 (전쟁소설 데프콘 1, 2, 3부, 동해, 남북, 판타지 하늘길잡이 공동저자) 3. 죽음 = 해남현 교동, 태귀생 된재, 흰재에 이어 세 번째 싸움은 교동 근처 벌판에서 일어났다. 왜군 들이 다시 조총을 쏘자 하얀 연기가 푸른 하늘로 피어올랐다. 그러나 태 귀생은 이제는 긴장감도 느끼지 못했다. 천천히 말을 달리며 왜군들에게 화살을 날리는 척후군관 임준영은 계 속 아무 말도 없었다. 태귀생에게 명령을 내릴 때도 다만 손짓을 하거나 턱 끝으로 방향을 가리킬 뿐이었다. "재미없어." 태귀생은 화살을 재면서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크게 했다. 전투가 지 속될수록 태귀생은 따분해졌다. 이번이 세 번째 싸움이지만 변화는 전혀 없었다. 다만 왜군들 숫자가 조금 줄었고, 그에 따라 화살통도 조금 비었 고, 울돌목에 조금 더 다가섰을 뿐이다. 하지만 아직 여기서 울돌목까지 는 한참이었다. 하늘은 파랗고 가을걷이가 끝난 들판은 누렇게 말라붙었다. 남쪽과 북 쪽은 개펄을 가득 채운 바닷물이 찰랑거렸다. 들판 한구석에 몰려 서서 고양이 울음 같은 함성을 지르는 왜군들 빼고는 무척 평화로운 바닷가 마을 풍경이었다. - 취익! 화살이 공기를 가르며 날아가고, 재수 없게 눈에 맞은 왜병이 비명을 지르며 뒤로 나자빠졌다. 키보다 낮은 대나무방패가 무슨 소용이람? 태 귀생은 저런 왜군들에게 패해 남원에서 떼죽음 당한 명나라 마병들이 무 척 한심하게 느껴졌다. 이렇게 싸우면 간단한 것을. '쳇! 차라리 대장간에서 칼을 두들길 때가 더 재미있었어.' 통제사에게 장검을 만들어 바칠 때는 일에 몰두하느라 밤잠을 잊었고, 통제사가 그 칼에 형 태구련의 이름을 새기도록 허락해줬을 때가 일생 일대에 가장 기뻤다. 바로 그 통제사가 태귀생을 잡아들여 염탐은 안하 고 술을 퍼마시고 잤다는 이유로 곤장 50대를 쳤다는 사실 따위는 이미 잊어버렸다. 태귀생은 이순신이 통제사에 다시 제수됐다는 소리를 듣고 달려갔다. 수군은 더 희망이 없었지만 통제사와 함께 있으면 죽을 때 죽더라도 제 대로 싸울 수 있을 것 같았다. 태귀생이 통제사 일행과 합류한 날은 남 원성이 떨어진 날이었고, 동생 태천생은 남원성에 남아있었으니 죽었을 게 분명했다. 형 귀생貴生은 살고 동생 천생賤生은 죽었으니, 우스웠다. 발해가 망하고 나서 고려에 귀부한 태太씨들은 대조영의 후손이었다. 고려시대에는 왕실의 후원을 받아 그런 대로 괜찮게 살 수 있었지만 조 선에 들어서 태씨 일부는 태귀생처럼 이렇게 천민 신분으로 떨어졌다. 그들은 다만 조상 대대로 뭔가 만들기를 좋아한다는 죄밖에 없었다. "흥! 발전이 없는 놈들. 꽉 막힌 놈들!" 태귀생이 왜군인지 조선 양반들인지 모를 자들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화살에 분노를 실어 날렸다. 그렇게 당하고도 똑같은 포진으로 그저 화 살에 맞아 죽어 가는 왜군들을 보니 더 답답했다. 태귀생이 보기에 지금 당장 왜군들에게 필요한 것은 사정거리가 긴 각궁과 그 활을 제대로 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왜군들에게는 쓸데없이 많은 숫자와 조총과 용기뿐이었다. "뒈져라!" 태귀생이 노새를 탄 채 다시 화살을 날렸다. 옆구리에 화살을 맞은 왜 군이 죽겠다고 아우성을 쳤다. 왜군들이 계속 한곳에 몰려있으니 잘 맞 아서 좋았다. 물론 왜군들이 서로 떨어져 있을 수는 없겠지만. 태귀생은 통제사 덕택에 천민 신분을 면할 수 있었다. 그것은 태귀생 이 목숨을 걸고 왜적들과 힘겹게 싸워 얻은 결과였다. 그러나 다른 노비 들은 관아에서 훔친 쌀을 다시 다른 관아에 바쳐 간단히 면천하는 것을 보고 태귀생은 머리가 돌 지경이었다. 조정에 쌀 몇 가마를 더 바친 다 음 이름뿐인 벼슬을 받아 양반행세를 하는 노비도 있었다. 그러나 태귀생은 대장장이일밖에 할 줄 몰라 천민신분으로 떨어진 조 상들처럼 뭔가 만드는 걸 좋아했다. 통제사 밑에서 전쟁을 할 때에는 척 후 같은 위험한 일을 즐겼다. 쌍놈은 할 수 없다는 소리를 듣기도 했지 만 이렇게 살다가 그냥 죽고 싶을 뿐이었다. "끼야아아아!" 왜군들 사이에서 갑자기 함성이 울렸다. 왜장이 말을 타고 긴 창을 흔 들며 달려오는 것이다. 투구 아래 얼굴에는 붉은 칠을 하고 흰 수염이 달린 가면을 써서 마치 도깨비 같았다. 계속 무덤덤한 표정을 풀지 않은 태귀생이 왜장이 탄 말을 향해 화살 을 날렸다. 끼히힝 하는 말울음 소리가 길게 울리고, 왜장은 뒷발로 일어 선 말에서 굴러 떨어졌다. 태귀생이 왜장이 쓰러진 곳으로 천천히 노새를 몰았다. 안장도 없고 등자도 없지만 고삐만으로 태귀생은 중심을 잘 잡았다. 여긴 조총 사거리 바깥이라 맞을 걱정은 없었다. 왜장을 구하기 위해 달려오던 왜병 두 명은 연달아 날린 임준영의 화살에 쓰러졌다. 용감한 바보들이 치르는 죄값이었다. 어깨에 화살이 박힌 채 푸르륵거리는 말 밑에서 왜장이 비틀거리며 일 어섰다. 도깨비 가면은 부서진 채 땅에 처박혀 있었다. 태귀생이 다가가 자 왜장이 고개를 홱 돌렸다. 가면을 썼을 때처럼 사나운 얼굴이었지만 앳된 얼굴이 드러났다. 열 일곱 살쯤 돼 보였다. - 이요오오오! 왜장이 칼을 뽑아들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절룩거리는 다리를 조금 움직이던 왜장은 풀썩 쓰러지고 말았다. 어깨를 들썩이며 우는지 떠는지 알 수 없었다. "이걸 쳐죽여, 말아?" 왜군들은 겁에 질려 있었다. 이들이 손해를 보면서도 도망가지 못하는 이유는 위에서 받은 명령도 있겠지만 기마궁사들에게 등을 보이고 도망 갈 경우 살아남을 놈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태귀생은 그렇게 생각했다. 역시 왜병들은 냉철한 놈들이었고, 진정 용 감하고 살아남을 방법을 아는 놈들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최선이었다. 시 간과 화살만 충분하다면 저 왜군들은 오늘 안에 다 죽은목숨이었다. 가끔 이렇게 용기를 내어 달려드는 놈들이 있었다. 하지만 화살밥이 되어 벌판에 쓰러질 뿐이었다. 이 어린 왜장을 죽일까 말까 태귀생이 망 설이는 사이에 임준영이 불렀다. "가자." 딱 한 마디였다. 태귀생이 임준영을 따라 노새를 몰았다. 뒤에서는 왜 병들이 우르르 따라오고 있었다. 처음에는 보병 500명에 말을 탄 자가 20명 정도였지만 말을 탄 자는 대여섯밖에 남지 않았다. 그들은 걷는 대 신에 말에 탔을 뿐, 말을 타고 제대로 싸울 줄을 모르니 기병이라고 할 수조차 없었다. 어쩌면 이런 싸움 방식은 조선수군이 왜선들을 상대로 싸우는 방식과 무척 닮았다고 생각했다. 활이든 화포든 긴 사정거리를 이용한 공격에 왜군은 전혀 맥을 추지 못했다. 그러나 울돌목을 지키는 수군의 싸움은 공간을 자유로이 활용할 수 있는 지금 이곳의 싸움과는 달랐다. "울돌목에선 싸움이 끝났겠죠? 당연히 우리편이 졌을 테고, 몇 척이나 살아서 도망쳤을까요?" "모른다." 임준영은 그저 명령을 수행할 뿐이라는 식이었다. 통제사로부터 받은 명령은 육지 쪽으로 왜군이 오면 최대한 시간을 끌라는 것이었다. 목숨 을 걸고 왜적과 싸울 필요는 없고, 적당히 방해하면 그걸로 족한 것이다. 태귀생 생각으로는 전투는 이미 끝났을 게 분명했다. 더 이상 싸울 필요 가 있을까 싶었다. 안고쿠지 에게이安國寺惠瓊 부대가 거창에서 김면의 의병군 일부 병력 인 산척들에게 바로 이런 방법으로 크게 당했다. 그리고 창릉과 경릉 등 왕릉을 침범한 왜군들 수백 명도 경기도 고양의 진사 이노와 친구들 다 합해 단 3명의 화살공격에 의해 쫓겨났다. 그 조선 궁수들이 숨어서 활을 쐈다면, 임준영과 태귀생은 조총이 미 치지 못하는 충분한 거리를 두고 활을 쏘고 있는 셈이었다. 무기는 상대 적이고, 활용하기 나름이었다. = 경상우수영 좌선, 김돌손 "마다시다! 적장 마다시다!" 고물에서 키를 잡고 있던 김돌손이 소리난 곳으로 뛰어갔다. 구경난 듯이 우변 군사들이 방패판 사이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좌변 군 사들은 사람들이 한쪽으로 쏠렸다간 판옥선이 엎어질까 두려워 제자리에 서 발만 동동 굴렀다. 항왜 준사가 펄쩍펄쩍 뛰며 가리킨 곳에는 왜군 시체들이 부서진 나뭇 조각들과 함께 물살에 떠내려가고 있었다. 왜군들은 빛나는 갑옷 아래에 울긋불긋한 옷을 입은 경우가 많아 누가 그 유명한 왜장인지 구별하기 힘들었다. "그놈이 어떤 놈이야?" 김돌손이 준사에게 물었다. 수군이나 뱃놈들이 보기에 생긴 것이나 말 하는 것이나 전혀 왜놈 같지 않은 왜놈이 준사였다. 그런 준사가 안타깝 다는 듯이 물살에 휩쓸린 시체 하나를 가리켰다. "화려한 무늬가 보이죠? 저 붉은 비단옷을 입은 자가 마다시입니다! 아까 통제사 어른이 쏜 화살에 맞고 물에 빠졌어요." "그래? 음. 으음. 그렇군. 그런데 그 자가 대장인지 어떻게 아나?" 김돌손이 방패판 아래에 걸린 갈고리를 집어들었다가 다시 놓았다. 슬 쩍 고개를 돌리니 뱃전 한가운데에서 통제사가 이쪽을 노려보고 서 있었 다. "제가 안골포에 있을 때 봤어요. 틀림없어요!" "그래? 쩝." 안타깝다는 듯이 준사가 계속 펄쩍펄쩍 뛰었지만 김돌손은 입맛만 다 셨다. 싸움 중에는 적의 목을 베지 못하게 하는 통제사가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그 앞에서 수급을 얻고자 바다에 갈고리를 던질 수는 없었 다. "그놈을 당장 끌어올리지 않고 무엇 하느냐?" 통제사가 전혀 뜻밖의 명령을 내렸다. 김돌손이 놀라 통제사를 쳐다보 자 옆에 서 있던 송희립이 빨리 하라고 손짓했다. "자! 좀 비켜달라고!" 김돌손은 신이 나서 밧줄 달린 갈고리를 머리 위로 붕붕 돌렸다. 그리 고 시체가 흘러가는 속도를 가늠한 다음 힘껏 던졌다. 갈고리는 시체를 타고 넘어 조금 떨어진 물에 빠졌다. 김돌손이 천천히 밧줄을 끌어당겼 다. "아싸! 걸렸다!" 김돌손이 신이 나서 밧줄을 잡아당겼다. 갈고리가 옆구리 갑옷 사이에 단단히 걸린 모양이었다. 시체가 배 밑까지 끌려오자 다른 군사들이 자 루에 달린 갈퀴로 마구 찍었다. 그리고 여러 명이 힘을 합쳐 왜장의 시 체를 뱃전에 끌어올렸다. 투구는 벗겨져 있고 몸에 부러진 화살이 세 개 나 박혀 있었다. "마다시가 틀림없습니다! 구루지마 해적 두령 마다시입니다!" 준사는 뭐가 그리 좋은지 손뼉을 마구 쳤다. 얼마 전까지 같은 편이었 을 텐데, 김돌손은 준사를 참 특이한 놈이라 여겼다. 김돌손이 본 바로는 준사는 칠천량에서 패할 때도 도망가지 않고 왜적들과 싸운 몇 안 되는 조선수군이었다. '조선수군이란 말이다.' 김돌손이 입안으로만 중얼거렸다. "목을 베어 돛대에 걸어라!" 통제사의 명령에 따라 군관 송한이 나섰다. 시퍼렇게 날이 선 환도는 송한이 오늘 싸움에서 세 번째로 바꾼 칼이었다. 송한이 칼을 치켜들자 군사들이 서너 걸음 뒤로 물러섰다. 군사들이 입은 옷은 이미 피범벅이 었지만 새로 튀길 핏물을 한사코 피하려고 했다. - 카칵! 붉은 피가 튀고 머리가 옆으로 굴렀다. 송한이 왜장의 머리를 치켜들 자 군사들이 함성을 질렀다. 김돌손도 무척 뿌듯했다. 그런데 그 왜장의 머리는 뜻밖에 평온한 표정이었다. "자! 돛대 높은 곳에 걸게." "예이!" 김돌손이 송한에게서 머리를 받아들고 단숨에 돛대를 타고 올랐다. 한 손과 두 발만으로 돛대를 오를 수 있는 사람은 조선수군을 통틀어 몇 되 지 않았다. 다람쥐처럼 빠른 움직임이었다. 김돌손은 돛대 가장 높이 나 무못이 박힌 곳에 왜장의 상투를 찔러 넣었다. "끙차! 이렇게 해놓으면 왜적 놈들 기세가 팍 꺾이겠지?" 김돌손이 그렇게 말하며 다 부서져 가는 해협 안의 왜선들을 바라보았 다. = 구루지마군 후군, 아카기 미치후사가 전사한 뒤, 남은 구루지마군을 이끌고 있는 것은 고군가시 라後軍頭 시라가와 아카기였다. 그는 아카기赤鬼란 이름 그대로 '붉은 귀 신' 이란 별명을 얻고 있는 용맹한 자였다. 원래 이름은 한우에몬半上衛門이었다. 몇 년 전 싸움에서 그가 탄 고 바야가 적선 세 척에 포위된 적이 있었다. 적은 기세를 올리며 배에 뛰 어들었다. 그때 한우에몬이 창을 들더니 '자, 가자!' 하고 외치며 서슴없 이 앞장서 거꾸로 적을 향해 돌진했다. 닥치는 대로 찌르고 베는 활약에 용기를 얻은 병사들은 적선 세 척을 모두 격파했다. 전투가 끝난 후 구 루지마 미치후사는 피로 범벅이 된 그의 얼굴을 보더니 '실로 붉은 귀신 이로다' 라고 말했고, 그 이후 아카기가 한우에몬의 이름이 되었다. 그러나 이런 아카기도 지금은 무너진 함대를 수습하느라 정신이 없었 다. 용감히 돌격한 휘하 배들이 연달아 판옥선에 격파되고 이제는 단 한 척이라도 적선을 잡을 희망조차 보이지 않았다. 해협에 늘어선 판옥선 다섯 척은 화포만으로도 구루지마 해적의 모든 배를 압도했다. "틀렸다. 이젠 방법이 없구나!" 아카기는 탄식했다. 본진 함대가 무너지고 난 후에 조선수군이 본격적 인 공세를 개시했는데 구루지마군에는 이를 막을 방법이 없었다. 뒤에서 와키자카 군이 지켜보고 있지만 전공을 세우기 위해 진입을 막으면서까 지 견제했던 구루지마군이었다. 이제 와서 도와달라고 할 수는 없었다. "최후까지 싸워라! 구루지마 해적의 기개를 보이는 거다!" 조선수군에게 거의 전멸 당했지만 구루지마군이 싸울 의지를 완전히 상실한 건 아니었다. 후군과 중군의 배가 마구 뒤섞이고 연달아 격파되 자 통일적인 움직임을 보일 수 없어 뒤로 주춤하고 있을 뿐이었다. 선혈이 낭자한 다락 위에는 시체와 부상자들이 가득했다. 기운이 좀 남아있을 때는 시체를 다락 안으로 옮기고 부상자를 치료했지만 지금은 모두 기진맥진했다. 활에 복부를 맞아 연신 피를 토하는 자가 있는가 하 면 차라리 죽여달라고 애원하는 부상자도 있었다. 갑판 위를 돌던 무사들 몇 명이 가끔 이런 자들에게 마지막 자비를 베 풀어 한 칼에 목을 베어 주기도 했다. 어떤 무사는 그럴 기운도 없어 칼 이 심장을 빗나가 더 괴롭게 해주는 수도 있었다. 아카기는 살아 돌아갈 생각을 버렸다. 주군인 미치후사도 격전 중에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다. 전 당주인 미치유키가 죽고 난 후에 다음 당 주조차 조선수군에 당한 것이다. 이렇게 되면 구루지마군은 조선수군과 철저히 싸우다 죽는 길만이 남았다. 이제는 일본으로 살아 돌아간들 남 은 건 아무 것도 없었다. "앞으로! 앞으로!" 거칠어지는 호흡을 느끼며 아카기는 목이 터져라 함성을 질렀다. 그때 뭔가가 커다랗게 눈에 들어왔다. 화포를 쏘며 다가오는 판옥선 한 척과 돛대에 매달린 어떤 것이었다. 그것을 좀더 자세히 살핀 아카기는 경악 했다. "저, 저건!" 그때 수없이 많은 작은 돌이 배를 뒤덮었다. = 구루지마군 고바야, 미치토시 "나 혼자만 살았다. 나 혼자만 살아 돌아간다." 도쿠이 미치토시는 쉴새없이 혼잣말을 해댔다. 미치후사의 명령과 임 무에 어쩔 수 없이 승낙하긴 했으나, 무사의 오기와 죽은 사람에 대한 책임감이 한꺼번에 몰려온 것이다. 어쨌든 군령은 수행해야 했다. 그 후에야 미치토시는 뭘 하든 할 수 있었다. 어립선과 동료들의 처참한 패전광경을 목격한 병사들은 잔뜩 풀 이 죽어 있었다. "다카도라 님께 알리오! 주군 미치후사 님께서 전하라는 말씀이오!" 다카도라의 본진에 도착하자 미치토시는 배에서 내리지도 않고 바로 소리쳤다.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긴 했으나 도도 다카도라도 비참한 구루 지마군의 상황을 알고 있을 것이다. 다카도라가 무례를 눈감은 채 뱃전 으로 걸어나와 미치토시의 말을 들을 준비를 마쳤다. "이 미치후사 끝까지 싸우고 있다! 그리고 만일 내가 죽으면 내 시체 를 딛고라도 반드시 조선군을 무찌르라고 하셨소!" "그런가." 피를 토하는 듯한 외침이었다. 미치토시의 눈에는 핏발이 서 있었다. 사납게 노려보는 그 눈빛에 대해 다카도라는 잘 들었다는 표시만 한 채 한참동안 말이 없었다. 미치토시의 고바야에 타고 있던 엔메이와 겐타로 가 배로 올라갔지만 다카도라는 돌아보지도 않았다. 그저 물끄러미 미치 토시와 그가 탄 고바야를 살펴볼 뿐이었다. 피로와 핏물로 물든 구루지 마 병사들은 다카도라의 시선 앞에서도 당당했다. "그럼 미치후사 님은..." "다카도라 님!" 다카도라가 입을 여는 순간 다른 고바야가 어립선에 다가왔다. 다카도 라의 전령이었다. "뭐냐?" "지금 구루지마 미치후사 님의 목이 적 대장선에 매달렸습니다!" "뭐라고!" 미치토시에겐 피가 거꾸로 솟는 듯한 충격이었다. 용맹과 기량을 자랑 하던 구루지마 해적의 미치후사가 지금 비참하게도 죄인처럼 적선에 목 이 매달려있다! 그것도 한창 양군이 싸우는 도중에. "야스하루 님은 뭘 하고 있는가!" 한번도 보인 적 없는 노성이 다카도라 입에서 튀어나왔다. "이런 수치를 당하고 있는데 아직도 적선을 내버려두고 있나!" 일본 무장은 죽는다는 자체는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았다. 싸움터에서 태어나고 자란 이상 싸우다 죽는 것은 오히려 영예스러운 일이기도 했 다. 그러나 명예롭게 죽지 못하는 것은 큰 수치였다. 대장급 무사가 적에 게 목이 잘려 내 걸리는 건 드문 일이고, 그나마도 싸움이 끝난 후가 대 부분이다. 전투가 벌어지는 도중에 이런 경우는 거의 없었다. "이놈들이!" 미치토시가 분을 이기지 못하며 소리쳤다. 고바야에 같이 탄 무사와 병사들 얼굴도 굳어졌다. "미치토시 님, 뭐라고 할 말이 없소." 다카도라는 총대장으로서 이런 사태를 맞게 된 것을 미치토시에게 사 과하려 했다. "아니오!" 그러나 미치토시는 그 말을 막았다. "선봉으로서 적을 물리치지 못한 건 우리 책임. 다카도라 님이 사과할 일이 아니지요. 그럼 이만 실례하겠소!" 말을 마친 미치토시는 재빨리 갑옷과 투구 끈을 다시 졸라맸다. "어딜 가겠단 거요?" 놀란 다카도라가 물었지만 미치토시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리 고 고바야에 탄 최후의 구루지마군 병사들에게 명령했다. "적을 향해 간다! 주군의 복수를!" "옛!"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병사들은 대열을 정비했고 수부들이 힘차게 노 를 저었다. "잠깐 기다리시오! 그런 상태로는..." 의도를 알아챈 다카도라가 황급히 말리려 했지만 이미 고바야는 뱃머 리를 돌려 나가는 중이었다. 다카도라가 탄식하는 소리가 뒤에서 작게 들려왔다. "한 척으로... 겨우 고바야 한 척으로 승세를 탄 조선수군에 반격하겠 단 건가?" 어립선에 탄 사람들은 불안감과 함께 숙연한 분위기에 한참동안 조용 했다. 그러나 미치토시는 심장이 거세게 고동쳤다. 죽으러 가는 길이었 다. = 전라우수영 좌선, 김억추 "시체들이 일어나는구나. 에비~ 왜놈들이 얼마나 겁나겠어? 우하하! 칠 천량에서 다 죽은 놈들 아냐?" 김억추가 장대에서 내려다보며 배꼽을 잡았다. 저 앞에는 해남현감 유 형의 배가 김억추의 제지를 뿌리치고 노를 저어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 다. 그 앞에는 조방장 배흥립과 안골포만호 우수, 영등포만호 조계종, 그 리고 회령포 전선이 달려갔다. "형님. 우리는 안 갑니까?" 김응추가 기지개를 펴며 넌지시 물었다. 김억추가 고개를 몇 번 갸웃 거리더니 망설였다. "험! 험! 우리도 가야할까?" "가야지요. 천천히." "그래. 천천히. 아! 안돼!" 고개를 끄덕거리던 김억추가 갑자기 소리를 높였다. "왜요?" "아직 안 간 놈들이 있다. 흐흐. 우리는 중요한 인물들이니까 마지막에 움직인다." 김억추가 가리킨 곳에는 가리포첨사 이응표의 전선, 녹도만호 송여종 의 전선, 그리고 발포만호 소계남의 배가 남아 있었다. "저 놈들이 움직이지 않으면 소용없다. 전라좌수영 배 두 척이 여기에 물러서 있으면 절대로 왜선들을 막지 못한다." 김억추 말에 수긍한다는 듯 김응추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가리포첨사 이응표의 전선이야 그저 그런 판옥선에 불과하지만 다른 배 두 척은 확 실히 달랐다. 그러나 김응추는 의문이 생기는 눈치였다. "형님이 저들을 끌어들이면 되지 않습니까? 우리 수군이 승세를 탄 마 당에 저들이 나선다면 간단히 왜선들을 몰아붙일 수 있을 텐데요. 형님 이 생전 처음으로 큰공을 세울 기회 아닙니까?" "흥이다!" 김억추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는 듯했다. 김억추가 항상 하는 말로는 싸움에 임한 휘하 장수들의 판단을 존중한다는 것이지만, 사실은 부하 장수들이 도망가도록 방관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리고 가리포 전선을 빼면 다른 배들은 김억추의 지휘하에 있지 않았다. "솔직히 말씀해 보세요. 뭔가 믿는 구석이 있죠?" "흐흐! 내 동생 아니랄까봐 눈치 하나 빠르구나. 그래. 어명이다." 자랑스러워하는 김억추에 대한 김응추의 반응은 시큰둥함 그 자체였 다. "형님더러 싸움 중에 뒤에 물러나 용두질이나 하라는 어명인가요?" "이 자식이! 상께서 나를 조용히 부르시더니, 이순신에 대해 말씀을 많 이 하셨다. 삼남 지방 백성들이 이순신을 보는 눈이 이상하다고 말이야." "그거야 당연하잖습니까? 지금까지 삼남 백성들을 지킨 건 임금이 아 니라 통제사니까요. 조정에서 삼도수군에게 뭐 하나 제대로 도와준 적이 나 있습니까? 괜히 수군에서 빼앗아가기나 하고 부하 장수들을 이리 빼 고 저리 넣고 방해만 했지요. 하지만 임금께서는 꽤 섭하시겠지요." "그래. 바로 그거다. 충신이라면 당연히 임금의 분부를 받들어야 하는 게 아니겠냐? 비록 명확히 옥음으로 명령한 것은 아니지만, 속내를 들여 다보고 알아서 움직여야지." 그렇다고 김억추가 지금껏 알아서 움직인 건 없었다. 움직이지 않은 적은 무척 많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죽음을 도외시하고 싸우는 장수를 도와주기는커녕 딴 지를 걸어요? 너무하시네요." "흥! 아까도 말했지만 이순신은 통제사가 되더라도 언제나 전라좌수사 로 끝이었다. 절대 전라우수사나 경상우수사가 되지 못한다." "전에 이억기 수사도 그랬지만 형님 같은 분이 전라우수사니까 통상도 함부로 못하겠죠. 그런데 도대체 상께서는 우리가 이기길 바랍니까, 지길 바랍니까?" "그런 건 상관없이 통제사가 죽길 바란다는 것이 정확한 말이지. 그것 이 권력이다. 상께서는 왕권을 지키는 것 말고는 관심이 없으시다." "나라가 망하더라도요?" "왕권이 있고 나서 망하든 말든이다." "왕은 이 나라 사람이 아닙니까?" 김응추가 대꾸할 때 판옥선에 올라온 사람이 있었다. 탐망군관 임중형 이었다. 임중형은 어디서 한바탕 드잡이질을 했는지 갑옷에 구멍이 나고 얼굴은 불에 데이고 하여튼 엉망이었다. 그러나 표정은 무척 밝았다. "사또! "무슨 일인가?" 임중형이 계단을 뛰다시피 올라왔다. 김억추와 김응추는 무슨 좋은 소 식이 있나 해서 임중형에게 귀를 기울였다. "바깥 바다에 큰 해일이 났다고 합니다. 우수사 영감의 부친께서 외해 로 나가셨지요?" "뭐야? 그게 사실인가?" "그렇소이다. 흑산도로 떠났던 피난선들이 허겁지겁 이쪽으로 몰려오 고 있소이다. 영감의 부친께서 탄 배가 침몰했다고 합니다." "이러언!" "형님! 이거 큰일 아닙니까?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김억추의 얼굴이 하얗게 변하고 김응추는 발을 동동 굴렀다. 그런 두 사람을 향해 임중형이 이죽거렸다. "그래서요. 판옥선을 몰고 외해로 나가 보시겠소이까? 그렇시든지요. 그럼 소인은 이만 가보겠소이다." 말을 마친 임중형이 발걸음도 가볍게 탐망선으로 뛰어갔다. 웃음을 억 지로 참는지 얼굴 근육이 잔뜩 일그러졌다. = 구루지마군 고바야, 미치토시 조선군은 겁쟁이에 불과했다. 멀리서 활이나 포를 쏠 때는 제법 용감 했지만 막상 접전상황으로 들어서거나 사상자가 많이 나오면 파리떼 흩 어지듯 사방으로 도망쳤다. 일본군 병사 단 몇 명이 성벽을 넘어 창칼을 휘둘러도 그것만으로 큰 동요를 보였다. 일본무사들은 그런 조선군을 경멸하는 것이 보통이었으며 적으로 칠 가치도 없다고 여겼다. 존경할 만하다면 그런 적과 싸우는 것을 자랑스 럽다고 여기는 그들이었다. 조선군은 그들에게 존경받는 적이 될 수가 없었다. 단 예외가 있다면 바로 이순신과 조선수군이었다. 비록 일본군이 익숙 하지 못한 수전이긴 했지만 일본에서 상당한 기량을 인정받는 무장들이 연이어 이순신에게 격파됐다. 그것도 대등한 싸움이라 부를 수도 없는 참패였다. 패한 무장들 가운데 살아남은 자는 너무도 창피해서 이 사실 을 남에게 말하는 것조차 꺼렸다. 조선 양반이 학식과 벼슬길에 오른 경력이 명예의 원천이라면 일본 무 장은 갈고 닦은 무술과 그로 이룩한 전공을 밑천으로 삼는다. 전국시대 의 무장들이 강한 적을 만나 끝까지 선전하다 패한 것은 차라리 전공이 었다. 그렇지만 이순신에게 당한 패배는 그런 부류에조차 끼지 못할 정 도로 참담했다. 그리고 여기 구루지마군도 그런 참상을 맞고 말았다. 칠천량에서 원균 을 상대로 조선수군을 격파한 일본군 누구도 생각 못한 참상이었다. "잘 들어라! 한 명이라도, 단 한 명이라도 좋다! 적선에 올라가고 죽는 거다! 그렇지 못하고야 죽은 미치후사 님을 무슨 낯으로 뵙겠느냐!" 칼을 뽑아 든 미치토시가 고바야에 탄 30명 남짓을 격려했다. 전투를 위한 병사가 열 명이고 나머지는 배를 움직이기 위한 수부였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구별도 없이 모두 손에 칼과 창을 들고 갑판에 서 있었다. 키를 잡는 자 한 명이 남았을 뿐 노를 젓지 않고 있는 것이다. 흐르는 물살이 자연스럽게 그들을 조선수군 앞으로 밀었다. 판옥선들 은 오히려 천천히 앞으로 나오며 구루지마군의 배들을 몰살하고 있었다. 미치토시의 고바야는 그런 조선군 가운데로 깊숙이 들어갔다. 키잡이는 시키지도 않았는데 배를 조선수군 대장선을 향해 몰았다. "함성을!" "와아! 와아!" 조선수군 대장선이 가까워지자 미치토시의 구령에 따라 모두 소리를 질렀다. 보통 때라면 그저 기세를 올리기 위한 함성으로 들릴 것이 이번 에는 사뭇 달랐다. 조선군에게 추격 당해 전멸 당하고 있는 구루지마군 함선들 사이로 그야말로 비장한 돌격을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 콰앙! 콰앙! 함성을 들었는지 대장선이 뱃머리를 약간 돌리며 육중한 포성을 내뿜 었다. 고바야에 탄 모든 병사들과 수부들이 포구에서 나오는 거대한 불 꽃을 볼 수 있었다. 우지끈하고 나무가 부서지는 소리가 먼저 들렸다. 이어서 퍽퍽 하는 소리와 낮은 신음이 터져 나왔다. 배가 기우뚱하며 기울기 시작했고 붉 은 액체가 사방으로 튀었다 "으윽!" 미치토시가 몸에 받은 충격에 비틀거렸다. 그런 미치토시 눈에 커다란 철환이 뚫고 지나간 갑판에 수없이 박힌 작은 화살이 보였다. 화살은 갑 판 위에 몰려있던 병사들을 한번에 휩쓸어 버렸다. 순식간에 처음 인원 의 반수가 죽었다. "이, 이런!" 미치토시는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미치토시가 입은 갑주에도 그 작은 화살이 너덧 개나 박혀 있었다. 분했다. 미치도록 분했다. 죽기 를 각오한 마지막 돌격마저 겨우 적이 쏜 한번의 포격에 비참하게 무너 지고 있다. "부디! 복수를!" 온 몸에 열 개가 넘는 화살을 맞은 병사가 마지막 함성을 지르더니 털 썩 쓰러지고 말았다. "그래! 반드시 복수를 하는 거다! 살아서 안되면 죽어서라도 말이다! 모두들 여기서 죽어 악귀가 되자! 그래서라도 적을 무찌르는 거다!" 미치토시가 절규했다. 부상당한 자들이 피를 뚝뚝 흘리면서도 일어나 창칼을 번쩍 치켜들었다. 배 밑창을 통해 물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러나 배에서 뛰어내리는 병사는 하나도 없었다. "가자! 가서 단 한 명이라도 베는 거다!" "와아!" 살아남은 병사들이 다시 한번 함성을 올렸다. 그 중에는 목에 화살이 박혀 피를 철철 흘리고 쓰러진 병사도 있었다. 그렇지만 기를 쓰고 일어 서서 창을 들고 소리를 질렀다. 그들은 마침내 대장선에 가까이 접근했다. 조금만 더 가면 닿을 수 있 었다. 미치토시가 이를 악물었다. "기다려라, 이순신! 구루지마 해적의 기개를 보여주겠다!" 미치토시가 선두에 서서 사다리를 들었다. 그때였다. 미치토시 눈에 확 들어오는 뭔가가 있었다. "저건!" 대장선의 돛대에 걸린 구루지마 미치후사의 목이었다. 군데군데 피가 묻어있긴 했지만 전쟁터에서 죽은 무장답지 않게 잠이 든 듯 편안한 표 정이었다. 부릅뜬 눈에 잔뜩 원통한 표정을 상상했던 미치토시는 이상하 게도 당주 미치후사의 얼굴에 비친 표정 앞에서 적개심을 잃었다. 그의 분노는 급속하게 슬픔이 되어갔다. "미치후사! 너는!" 비록 동생이지만 미치토시는 다른 가문의 양자가 되었고 미치후사는 당주가 되었다. 그 때문에 늘 높임말을 써야했고 당주에 어울리는 존칭 을 써야했다. 미치토시는 죽은 미치후사를 앞에 두고야 비로소 동생처럼 부를 수 있었다.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 콰앙! 미치토시의 눈에 막 눈물이 맺혔을 때 옆에 있던 판옥선 한 척의 포구 에서 불꽃이 한번 일었다. 하얀 포연이 허공으로 흩어졌고 우박 같은 탄 환이 미치토시의 고바야를 덮었다. "으악!" 비명이 일었다. 그리고 나뭇조각과 사람이 허공을 날았다. 두 번째 포 격을 받은 미치토시의 고바야 위에는 아무도 살아남지 못했다. 피에 적 신 고바야는 격류를 타고 조선수군의 대장선 옆으로 흘러갔다. 역사전쟁소설 // 남해 // 2권 copyright (C) 2001 김경진 안병도 신재호(필명) 공저 업로드 김경진 (전쟁소설 데프콘 1, 2, 3부, 동해, 남북, 판타지 하늘길잡이 공동저자) 4. 차가운 추억 (1) = 다카도라 어립선, 겐타로 "제길! 뭐가 이렇게 복잡해?" 어립선으로 돌아온 겐타로는 마구 투덜거렸다. 처음에는 그저 싸움에 참가해 공을 세우지 못하는 것이 분했다. 그러나 엔메이와 함께 여기저 기 다니다 보니 여러 함대들이 제각각 다른 생각으로 행동하고 있음을 알았다. 이기기 위해 싸운다는 점이야 같겠지만 그 과정에서 무장들끼리 서로 견제하고 심지어는 총대장인 다카도라의 명령까지 무시하는 형편이 었다. 겐타로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어립선으로 돌아오자 더 이상 엔메이의 호위역할을 할 필요가 없었다. 다카도라에게 가는 엔메이를 내버려두고 겐타로는 다시 갑판 밑으로 내 려왔다. "이봐! 겐타로! 앞쪽은 어때?" 구석에서 어느 잡병이 물었다. 전투가 시작되자 한동안 활기에 넘쳤던 그들도 기다리다 슬슬 지치고 본진 병력은 싸울 필요가 없다는 소문에 실망해서 아예 앉아서 졸고 있는 병사들도 있었다. "전멸." "조선군이?" 병사들이 심드렁한 표정을 지으며 천천히 일어나 창문 틈으로 바깥을 살폈다. 싸움이 끝났으니 이제 함대가 다시 움직일 것이란 예상 때문이 었다. 그러나 어립선은 아까부터 계속 이 자리였다. "아니, 우리 쪽. 구루지마 해적이 몽땅." "그런 바보 같은 말이 어디 있어? 겨우 열 척한테?" 짧게 대답한 겐타로 말에 병사들이 일제히 술렁거렸다. 그들한테 구루 지마 미치후사가 목이 잘려 돛대에 내걸렸다는 이야기를 하면 놀라 자빠 질 것이다. "아, 피곤하다!" 어립선은 싸움에 참가하지 않고 있지만 어쨌든 전투 중이기에 병사들 은 각자 위치에서 대기해야 했다. 하지만 겐타로는 바닥에 벌렁 누워버 렸다. 돌연한 겐타로의 행동에 병사들이 눈을 크게 뜨고 무사들은 눈살을 찌 푸리며 혀를 찼다. 그렇지만 기원승 엔메이와 친한 것 같다는 점과 위험 을 무릅쓰고 전선까지 갔다온 점을 봐서 겐타로의 행동을 용인할 수밖에 없었다. "우쭐대고 있어, 저 녀석!" 멀리서 굵은 목소리 하나가 들렸다. 엔메이가 나타나기 전, 겐타로와 싸울 뻔한 스모 선수 출신 아시가루였다. "쳇! 너 같은 녀석은 알지도 못할 거야." 눈을 감은 겐타로 입에서 아주 작은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그리고 오쯔키를 어떻게 만나고 어떻게 떠 나보냈는지." 겐타로의 의식은 멀리 몇 년 전의 일본을 향해 날아가기 시작했다. "한 놈. 반드시 한 놈은 벤다!" 겐타로는 단단히 각오를 하고 풀숲에 숨었다. 눈은 풀숲 사이에 난 작 은 길을 노려보았다. 손에 들린 시퍼런 날이 선 칼은 무사가 쓰는 것처 럼 좋은 칼은 아니지만 잘 손질되어 있었다. 살을 에는 추위가 몸 속에 스며들었다. 낡고 해진 옷에 짚으로 엮은 덮개를 둘렀건만 제대로 추위를 막아주지 못했다. 겐타로는 속으로 떨고 있는 스스로에게 용기를 불어넣기 위해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저 길에 첫 번째로 나타나는 놈을 베는 거야! 그 놈이 중이든 농부든 내가 알 바 아냐! 무조건 베고 나서 돈을 손에 넣고 한 잔 하는 거야!" 분로쿠 원년(1592년). 정월 초사흘 날이었다. 천하인 도요토미 히데요 시가 바다 건너 조선과 명나라를 정벌하겠다고 하는 바람에 규슈九州지 방에서는 병력과 식량을 모으느라 난리도 아니라고 했다. 그러나 겐타로 에겐 아무 의미도 없었다. 지금 덮쳐오는 추위와 흥분을 상대로 겐타로 는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었다. 잔뜩 흐려있는 하늘에서 하얀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눈이 오면 길이 막혀 말도 사람도 전혀 움직이지 못한다는 에치고越後 지방 이야기가 떠 올랐다. 그보다는 나은 편이지만 지금 겐타로가 있는 에치젠越前 지방은 에치고와 접한 곳이었다. 차가운 눈이 겐타로의 칼날 위에 살포시 내려 앉았다. "제길! 하필 이런 때 눈까지 오다니!" 약간씩 내리던 눈발이 금세 굵어졌다. 그러자 겐타로는 하늘을 노려보 았다. 눈이 내리면 시야가 방해받아 칼을 쓰기 불편하고 지나가는 사람 이 줄기 때문이다. 죽도록 농사를 지어봐야 아무런 희망이 없다는 걸 깨닫고 집을 뛰쳐나 온 지 일년이 지났다. 평범한 농사꾼 집안에서 태어난 겐타로는 그때까 지 허리가 휘도록 농사일을 해왔다. 남보다 뛰어난 외모를 가진 것도 아 니고 특별한 재주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굳이 말하자면 '겐타로' 라는 농사꾼답지 않은 이름뿐이었다. 무사에나 어울릴 이 이름으로 불릴 때마 다 겐타로는 살짝 웃었다. 정말로 무사가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도 이름 탓인지 모른다. 당시 농민이나 하층계급 사람이 무사가 되는 길을 크게 두 가지가 있 었다. 하나는 검술이나 창술을 익혀 이름을 얻고 '병법가兵法家'로 입신 하는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싸움에 병사로 나가 공을 세우는 방법이었 다. 겐타로는 검술 쪽을 택했다. 그렇지만 가진 것도 없고 신분도 낮은 겐타로를 제자로 받아 지도해 줄 사람이 없었다. 집을 나간 겐타로는 여러 도장을 전전하다가 전혀 이 름도 없는 낭인 밑에 들어갔다. 낭인은 '지화류地火流'란 거창한 이름을 단 검법을 요란하게 선전했고 그것에 속아 겐타로는 제자가 되었다. 속았다는 사실을 아는 데는 별로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스승이 란 위치를 이용해 힘든 일과 때론 도둑질까지 시키던 낭인은 정작 검술 은 가르쳐 주지 않았다. 화가 잔뜩 난 겐타로가 따지면 마지못해 몇 가 지 자세를 가르쳐 주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나마 제대로 효과가 있는 것 인지 미심쩍을 정도로 허술한 동작이었다. 더 이상 참지 못할 지경이 된 겐타로는 술에 취해 자고 있는 낭인을 묶고는 마구 두들겼다. 그러자 낭인은 사실을 털어놓았다. 화가 머리끝까 지 치민 겐타로는 낭인을 벌거벗겨 나무에 묶어 놓고는 그의 짐을 몽땅 가지고 떠났다. 그것이 바로 사흘 전 일이었다. "결국 살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거야!" 낭인은 비록 겐타로에게 제대로 된 검술을 가르쳐 주진 않았지만 다른 더 중요한 것을 가르쳐 주었다. 내가 뭔가를 얻으려면 남을 속이고 빼앗 아야 한다는 세상살이의 마음가짐이었다. 이제 21살인 겐타로에게 그것 은 속았다는 쓰라린 마음과 함께 세상에 대한 분노로 이어졌다. 그래서 그는 낭인이 쓰던 칼을 빼들고 지금 지나가는 행인을 노리고 있었다. "왔구나!" 풀숲 건너편에 그림자 하나가 움직였다. 오랫동안 기다리던 행인이 마 침내 나타난 것이다. "이야아아압!" 겐타로는 고함을 지르며 달려나갔다. 양손에 꽉 잡힌 칼이 언제라도 피를 묻힐 작정으로 뒤따랐다. "죽어라!" 누구든 상관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설사 재수 없게 무사나 검술가가 걸려 반대로 목이 잘려도 상관없었다. 겐타로는 이미 세상과 스스로에 대해 반쯤 포기하고 있었다. "응?" 그러나 그런 켄타로의 칼은 도중에 멈춰 서고 말았다. "여자야?" 열 네다섯 살쯤으로 보이는 작은 소녀였다. 화려한 비단옷을 입고 폭 이 좁은 띠를 한 것이 부잣집이나 상당한 가문의 딸 같았다. 그렇지만 정작 겐타로가 칼을 내리치지 못한 까닭은 따로 있었다. 소 녀의 풀려있는 눈동자와 힘없는 걸음, 그리고 손에 든 피묻은 단도가 눈 에 확 들어온 때문이었다. "뭐야, 너는?" 예삿일이 아니었다. 아직 한번도 사람을 베어 본 적이 없는 겐타로였 다. 오늘 처음 사람을 베고 악당이 되고자 했지만 아직은 하지 못했다. 그런데 소녀의 손에 들린 단도에서는 금방 묻은 듯한 선혈이 뚝뚝 떨어 지고 있었다. 치켜든 칼을 내린 겐타로는 몸이 얼어붙는 듯한 충격을 받 았다. "당신은?" 소녀의 풀린 눈이 잠시 정상으로 돌아와 겐타로를 향했다. 그리고 겐 타로의 눈동자와 마주쳤다. 잠시였지만 그 순간 겐타로는 소녀의 눈이 참 맑다는 것을 느꼈다. "어떻게 된 거야? 너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어?" "저는..." 겐타로는 어느새 지나가는 사람을 베고 돈을 빼앗으려는 도적에서 자 상한 젊은이로 변하고 말았다. 소녀는 뭔가 말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였 다. "저는... 사람을 죽였어요. 이 칼로..." 하지만 그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소녀는 다시 풀린 눈을 하고 그 자 리에 주저앉았다. 넋이 나가버린 모습이었다. "뭐야? 이, 이봐! 정신차려!" 겐타로는 칼을 내던지고 다가가 소녀를 부축했다. 그대로 두었다간 눈 이 쌓이기 시작하는 땅바닥에 쓰러져 버릴 것만 같았다. "이봐! 괜찮아? 대답해봐!" 작은 체격이기도 했지만 소녀의 몸은 유난히 가벼웠다. 겐타로는 소녀 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정신을 차리게 하려 애썼다. "고마워요." 소녀가 겐타로의 얼굴을 보며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갑자 기 축 늘어졌다. 기절해 버린 것이다. 피묻은 단도가 소녀의 손에서 빠져 나가 눈 위에 떨어졌다. 하얀 눈 위에 빨간 핏물이 번져나갔다. "잡아라! 놓치지 마라!" "거기 서라!" 멀리서 사람 그림자들이 보였다. 그리고 그들이 지르는 소리도 들렸다. 소녀를 쫓고 있는 추격자들이 분명했다. "제길! 이게 뭐야!" 겐타로는 투덜대면서도 땅에 떨어진 검을 챙겼다. 그리고 재빨리 소녀 를 등에 업었다. "아무래도 도적이 되기 틀렸군!" 눈 덮인 땅바닥에 대고 가래침과 함께 이 말을 내뱉은 그는 달리기 시 작했다. 오쯔키お月, 열 다섯 살, 그리고 살인자. 정신을 차린 소녀가 겐타로에게 말해준 전부였다. 그것도 입을 열지 않으려는 소녀를 간신히 어르고 달래 알아낸 사실이었다. 어쨌든 몸을 피해야 했다. 어떤 사연이 있어 누구를 죽였는지는 모르 지만 이미 오쯔키만 아니라 겐타로도 죄인이 되었다. 살인자를 도망시킨 벌을 받지 않으려면 도망쳐야 했다. 겐타로는 모든 것을 포기한 듯 체념 한 오쯔키를 이끌고 남쪽으로 향했다. 에치젠 남서쪽에는 커다란 호수 비와호로 유명한 오우미近江지방이 있다. 그곳에만 가면 어떻게든 될 거 라고 생각했다. 당시 일본은 히데요시에 의해 통일되었다고는 하나 아직은 각 영지를 다스리는 영주의 세력이 강했다. 각 영지접경에는 대개 관문이 설치되어 있어 영민과 무사의 이동을 제한했다. 이것은 한 영지에 미치는 사법권 이 다른 곳에는 미치지 않는다는 걸 의미했다. 죄인이라도 일단 영지를 넘어가면 그것으로 공적인 체포는 불가능했다. 추격대를 보내 죽이거나 잡아오는 개인적인 복수만이 가능했다. "힘을 내! 관문만 넘으면 어떻게든 될 거야." 겐타로는 거듭 오쯔키에게 힘을 내게 했다. 돈도 없고 먹을 것도 없었 다. 그러나 겐타로는 낭인에게 속은 이후로 잃어버린 삶의 목적 하나를 찾았다. 오쯔키를 볼 때마다 느끼는 사실이었다. 처음에는 죽은 생선처럼 반응이 없던 오쯔키도 겐타로의 이런 열의와 관문이 가까워짐에 따라 점 점 활기를 얻기 시작했다. "그럼 저도... 다시 살 수 있는 건가요?" "바보 같은 소리! 지금 세상에 사람 한 두 명 안 죽인 사람이 어디 있 어? 그들이 전부 죽어야 한다면 중이나 상인들만 살아 어정대며 돌아다 닐 거야." 일부러 퉁명스럽게 대꾸했지만 겐타로는 속으로 어떻게든 오쯔키에게 생기를 주고 싶었다. 그래서 오우미로 도망가는 도중에도 일부러 시장거 리를 구경시키기도 했고 도둑질한 음식을 더 많이 집어 주기도 했다. "이러시면 안 되요, 겐타로 님. 제 몫이 너무 많잖아요?" 그럴 때마다 음식을 밀어내곤 하는 오쯔키였지만 겐타로는 고개를 저 었다. "먹어. 먹고 기운차리라고. 나야 기운이 남아돌아 하늘만 봐도 배가 부 르지만 너야 그렇지 않겠지. 모자라면 까짓거 좀 더 가지고 오면 돼." 그렇지만 이럴 때마다 겐타로 배에서 꾸르륵거리는 민망한 소리가 나 와 주인을 곤란하게 만들었다. "가지고 온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훔치는 거잖아요?" "살려면 하는 수 없지." "나쁜 짓이에요." "그럼 구걸로 바꿀까?" 겐타로는 익살스런 표정을 지으며 두 손을 모으고 구걸하는 흉내를 냈 다. 그러자 오쯔키는 참지 못하고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어느새 둘 사이에는 서로를 위해주는 감정이 싹트고 있었다. 곧 두 사 람은 오우미가 바로 보이는 곳까지 도착했다. "자, 이제 도착했어!" "예." 그런데 막상 안전한 장소에 오게 되자 오쯔키는 기운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가끔 보여주던 미소조차 사라져 버렸다. 어깨를 살짝 덮은 부 드러운 머리카락과 까만 눈동자, 하얀 얼굴로 인해 마치 삼월 삼짇날 인 형처럼 생긴 그녀였다. 이번에는 수심에 잠긴 인형처럼 보였다. 일본에서 삼월 삼짇날은 여자들을 위한 날로 여러 가지 인형을 장식해 놓고 노는 날이다. "왜 그래?" "겐타로 님." 목숨을 구해줬다고 생각해 그런지 오쯔키는 겐타로에게 꼭 님자를 붙 여 불렀다. 입고 있는 옷으로 보아 겐타로보다 신분이 높을 지도 모르지 만 역시 정확한 것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겐타로는 어울리지 않는 존 칭을 감수하고 있었다. "그럼 이제 우린 헤어지는 건가요?" "그건, 음. 아무래도 그래야겠지. 더 이상 같이 있을 이유가 없으니까." 약간 더듬거리며 겐타로가 말했다. 그리고 이 말을 한 순간 겐타로는 긴 꿈에서 깨어났다. 어째서, 혹은 무엇 때문에 라는 물음을 억지로 머릿속에서 지워버리며 여기까지 왔다. 세상과 스스로에 절망해서 살인과 도적질을 하려던 겐타 로가 이유는 모르지만 이미 살인을 해 버린 오쯔키를 만났다. 그리고 함 께 도망쳤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어린 소녀를 보호해야겠다는 일종의 본능적인 감정 이 있었다. 그런데 이제 그녀는 안전해졌다. 그럼 지금부터는 무엇을 해 야 하는가? 이것이 생각나지 않았다. "이유요?" "오쯔키 너 쫓기고 있었잖아? 그렇지만 그들도 이 이상은 오지 못할 거야." "정말이에요?" 오쯔키가 확인하듯 다시 물었다. "응." "그래요. 네." 오쯔키는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 모습이 되었다. 그리고 곧 그녀는 걷 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방향이 전혀 틀렸다. 마치 이제까지 온 방향이 틀렸다는 듯 관문 반대방향으로 걷고 있었다. "뭐야? 오쯔키! 그쪽이 아냐! 이쪽이라고!" 당황한 겐타로가 오즈키 앞을 가로막으며 말했다. "알고 있어요 겐타로님." "알고 있다고? 그럼 왜?" "갑자기 마음이 변했어요." "변하다니?" "안전해지는 게 싫어졌어요." "뭐라고?" 겐타로는 오쯔키의 얼굴을 살폈다. 키가 크고 건장한 겐타로에 비해 마르고 작은 체격인 오쯔키였다. 고개를 숙여 땅을 보며 걷는 오Wm키 얼굴을 살피기 위해 겐타로는 허리를 크게 굽혀야 했다. "그럼 추격자들에게 잡혀 죽고 싶다는 거야?" 오쯔키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말해봐! 그들에게 죽고 싶냐고! 그럼 왜 도망쳤어? 그 길로 오지 말 고 그냥 잡혔으면 됐잖아! 아니면 그날 너도 죽든지!" 겐타로는 별안간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억제하지 못했다. 단 하나의 감정만으로 모든 걸 포기하고 도와주었지만 막상 당사자가 거부하고 나 니 허무한 느낌이 들었다. "아니에요. 그건 아니에요! 오쯔기는... 오쯔키는 다만." "다만 뭐야!" 겐타로는 거칠게 대답을 독촉했다. "겐타로 님과 헤어지기 싫어요!" "뭐?" 그제야 겐타로는 오쯔키의 목소리에 울음 비슷한 게 섞여 있다는 걸 겨우 깨달았다. 때늦게 깨달은 겐타로의 무심함을 비난하듯 오쯔키의 볼 에서 내린 눈물이 땅에 떨어졌다. 그런데 겐타로는 전혀 거리가 먼 질문 을 했다. "너 설마 갈 곳이 아무 데도 없는 건..." "그것과는 상관없어요!" 오쯔키가 고개를 들어 겐타로를 쳐다보았다. 하얀 얼굴 속에 빨갛게 변한 눈이 토끼를 연상케 했다. "그냥 겐타로 님과 같이 있고 싶어요." "어째서?" "좋은 사람 같아서요." "난 결코 좋은 사람이 아냐. 처음 봤을 때도 사실은 널 죽이려한 거 야." 겐타로는 단지 오쯔키가 오늘따라 좀 이상하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그 리고 술값을 마련하기 위해 강도질까지 하려던 스스로가 부끄러웠다. "하지만 살려줬잖아요?" "생각이 변해서 앞으로 널 죽일 지도 몰라. 아니, 내가 직접 죽이진 않 는다 해도 위험 속에 끌어넣게 될 지도 몰라. 그럼 죽이는 거나 마찬가 지야." "그 때는..." 오쯔키의 눈물이 멎었다. 그리고 결연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기쁘게 죽을 수 있을 것 같아요." "기쁘게?" 겐타로는 더 이상 말하지 못했다. 그리고 오쯔키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오쯔키의 눈은 기대와 호소를 가득 담고 있었다. 겐타로는 그 눈을 피하 지 못했다. "알았어. 네가 원한다면, 어디까지나 함께 간다. 약속할게." 그 순간 겐타로는 오쯔키에게 돌이킬 수 없는 약속 하나를 하고 말았 다. 하지만 이때 겐타로는 그것이 얼마나 둘의 운명에 커다란 영향을 미 칠 한 마디가 될 지 알지 못했다. 그리고 둘은 함께 관문을 넘었다. 함께 간다는 약속을 받고 또한 관문도 넘어 위험도 사라진 오쯔키는 시종 명랑했다. 겐타로가 알지 못하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는가 하면 토끼 처럼 여기저기를 뛰어다녔다. 그것은 오쯔키가 본래 얼마나 명랑한 아이 였는가 짐작하게 해 주었다. "어머! 이게 뭐죠?" 오쯔키가 밭에서 누렇게 말라붙은 줄기를 뿌리째 뽑아들었다. 농촌에 서 살지 않은 듯 오쯔키에게는 모든 것이 신기한 모양이었다. "으응. 그건 로리콩이라고, 늙은 말이 좋아해서 여물로 쓴다지?" (*농담인거 아시죠? -_-;;;) 겐타로가 억지로 시선을 돌렸다. 요즘 겐타로는 고민이 많았다. 처음에 느낀 불쌍한 사람을 보호해야 한다는 의무감 말고도 요즘은 다른 책임감 비슷한 것이 생겼다. 오쯔키를 쳐다볼 때마다 죄를 지은 듯 가슴이 두근 거렸다. 처음 느끼는 감정이었다. 둘은 나이 차이는 별로 나지 않지만 오쯔키는 아직 너무 어렸다. 당시 일본 여자들이 10대 중반이면 벌써 시집간다고 하지만 어리다는 사실 자 체에는 변함이 없었다. 이런 작은 소녀를 다른 눈으로 보는 것이 부끄러 워 겐타로는 자기 머리를 쥐어박았다. 오쯔키는 여전히 폴짝폴짝 뛰어다녔다. "어째서지?" 오쯔키의 명랑한 태도에 힘입어 겐타로는 드디어 마음속에 묻어놓던 질문 하나를 꺼냈다. "뭘요?" "어째서 사람을 죽인 거야?" "겐타로 님." 오쯔키의 콧노래가 끊겼다. 깡총거리던 발걸음도 멈췄다. 막 어두워지 려는 산길에서 오쯔키는 굳어진 얼굴로 초라한 낭인을 쳐다보았다. "오쯔키는 원수를 갚은 거예요." "원수라고?" "제가 죽인 무사는 제 부모님을 죽였어요. 무례하다는 이유로." "도대체 무슨 일을 했기에?" "마을에서 꽤 높은 자리에 있던 그 무사에게 찻잔을 팔지 않았기 때문 이에요." "뭐? 어째서 안 팔았는데? 그리고 그런 게 사람을 벨 이유가 되는 거 야?" 겐타로에겐 도무지 이해가 안가는 이야기였다. 물론 무사는 사농공상 의 제일 위에 선 신분이므로 아랫사람이 무례를 저지르면 벨 권리가 있 다. 그렇지만 무턱대고 함부로 사람을 베는 게 허용되지는 않는다. 정말 중요한 모욕이나 수치를 당했다고 인정되지 않으면 오히려 살인죄를 물 어 할복해야 한다. "제 아버지는 상인이었어요. 다도茶道를 배우던 다인茶人이기도 했지 요. 그런데 제대로 소양을 갖추지 못한 그 무사는 단지 다도를 배워 영 주님에게 아첨하기 위해 아버지가 아끼는 찻잔을 팔라고 했어요. 당연히 아버님은 그걸 거절했지요. 그러자 그것에 앙심을 풀고 모욕을 당했다 며..." "베었단 말이지?" "예. 그것도 아버지뿐만 아니라 어머니까지." "이것 참! 할 말이 없군." 아무리 힘이 지배하는 세상이라고 하지만 이쯤 되면 쓴웃음밖에 나오 지 않았다. 하긴 겐타로 역시 자기가 세상에 속았다고 다른 힘없는 사람 을 죽이고 빼앗으려는 생각을 했다. 때문에 겐타로는 그 무사를 대놓고 욕하진 못했다. 다도는 막 널리 보급되고 있는 무사의 교양이었다. 전란이 끊이지 않 았던 시대에는 단지 얼마나 싸움을 잘하느냐 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그러나 통일된 일본은 점점 무사의 교양과 행정능력을 중요시하기 시작 했다. 다도는 그런 당시 무사의 필요성에 잘 맞아 떨어졌다. 차를 끓이고 마시는 과정 가운데 인내심과 정성을 키울 수 있고, 다도를 가르치는 다 인에게서 영민을 대할 때의 세련된 교양과 마음가짐을 배울 수 있었다. 영주가 다도를 가까이 하게 되니 당연히 휘하 무사도 그것을 따라하기 마련이다. 영주 눈에 들어야만 출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와중에 무 리하게 다도를 배우려는 무사가 살인까지 저지른 건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오쯔키는..." "쉿!" 다시 오쯔키가 말을 이으려 할 때 겐타로는 날카롭게 그 말을 잘랐다. 그의 눈은 약간 떨어진 앞쪽에서 보이는 작은 불빛 하나를 주목했다. 그것은 좁쌀보다 작은 불꽃이었다. 깨알같은 붉은 빛이 바람에 흔들리 거나 하지도 않고 일정하게 빛나고 있었다. "오쯔키! 저거 보여?" "보여요. 그런데 저게 뭐죠?" "철포야. 화승이 타 들어가면서 나는 빛이지. 아마 우릴 기다리고 있는 걸 거야." 오쯔키가 잔뜩 움츠러들었다. 철포는 일반인이 도저히 상대할 수 없는 막강한 신무기였다. "여기 가만히 있어. 내가 좋다고 할 때까진 움직이지 마. 알겠어?" 겁먹은 오쯔키를 뒤로하고 겐타로는 슬며시 불빛을 향해 접근했다. 이 쪽으로 철포를 겨눈 상대는 산길 바로 위의 수풀 속에 있었다. 겐타로가 먼저 그 불빛을 찾지 못했다면 한 방에 끝났을 것이다. '오쯔키를 추적하던 녀석들이 현상금이라도 건 게 분명해.' 겐타로의 호흡이 가빠졌다. 상대도 제법 머리를 쓴 것이다. 자기들은 관문을 나가지 못하고 대규모로 추격할 수도 없다. 그러자 대충 본 인상 착의와 함께 상금을 걸어 이 일대에 내건 것이다. 그렇게되면 겐타로와 오쯔키는 한동안 어디를 가도 안심하지 못하게 된다. '제길! 안심하고 있던 게 문제야.' 시장에서 주먹밥 따위를 훔쳐먹던 겐타로는 몸이 그다지 좋은 상태라 말할 수 없었다. 그 몸으로 간신히 관문을 넘었는데 이젠 싸움까지 해야 하는 것이다. 검을 뺀 겐타로는 별로 힘이 들어가지 않는 오른손을 느꼈 다. 오쯔키를 구해준 것을 후회하진 않았다. 그때 고의든 실수든 만일 그 가엾은 소녀를 베었다면 더 큰 후회와 가책을 받았을 것이다. 순간적인 감정이었지만 그 감정은 순간동안만 지속되지 않았다. '그래. 기왕 이렇게 된 거, 한 번 목숨까지 걸어보자.' 겐타로는 화승 불빛이 보이는 곳으로 기척을 죽이며 접근했다. 상대가 철포를 든 그 혼자인지 아니면 다른 동료들이 어딘가에 대기하고 있는 지 그건 모른다. '단 한번에 베어버리는 거야. 소리를 지르거나 신호를 보낼 겨를도 주 지 않고!' 제대로 된 것도 아니지만 지금은 아쉬운 대로 낭인이 가르쳐 준 그 지 화류인가 하는 엉터리 검술에라도 의지해야 했다. 겐타로는 검을 쥔 오 른손에 억지로 힘을 넣었다. 마침내 상대의 윤곽이 확실히 보이는 거리까지 접근했다. 두 손으로 가만히 철포를 들고 있는 그는 연신 길을 쳐다보며 누군가를 기다리는 모습이었다. 겐타로는 검을 쳐들고 곧바로 달려들었다. "하아!" 낮게 기합을 넣으며 덮친 겐타로의 검날이 상대의 몸에 떨어졌다. 흰 날이 붉은 피를 묻히며 살 속에 파고들려는 그 찰나. "아앗!" 당황한 신음소리와 함께 검은 색 쇠막대가 어둠 속에서 잔상을 일으켰 다. 휘잉 하는 바람소리가 뒤따랐다. 겐타로는 내리친 검날이 막히면서 일어난 진동에 손목이 부서져 나간 듯한 통증을 느꼈다. "이놈이!" 겐타로가 고함을 질렀다. 상대가 급한 김에 철포를 들어 그 총신으로 검날을 막은 것이다. 고통과 분노에 사로잡힌 겐타로는 그대로 몸을 돌 진시켰다. 중심을 잃은 상대를 몸으로 찍어누르려는 의도였다. - 파앙! 총성이 울렸다. 겐타로의 몸에 밀린 상대가 넘어지면서 얼떨결에 방아 쇠를 당긴 것 같았다. 탄환은 아슬아슬하게 겐타로의 얼굴을 스치고 날 아갔다. 겐타로의 오른뺨에 가는 핏줄기가 그어졌다. "죽어버려!" 겐타로는 검을 놓았다. 그리고는 자유로워진 손으로 상대의 목을 조르 려 했다. 그때였다. "겐... 타로!" 귀에 익은, 어디선가 많이 듣던 목소리가 상대 입에서 터져나왔다. 동 시에 겐타로는 어둠 속에 잠겨있던 상대방 얼굴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넌! 슌스케?" 놀란 겐타로는 그만 큰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지금 겐타로 몸에 깔린 상대는 고향 마을에서 바로 옆집에 살았던 슌스케였다. 숨이 차 헐떡이 던 슌스케가 겐타로에게 급히 소리쳤다. "우선 이 자리를 피하자!" "어째서?" "총소리를 들었으니 사람들이 몰려올 거야." "어떤 사람? 설마?" "맞았어. 너와 저 여자애를 잡으려는 사람." 겐타로는 더 이상 아무 말도 묻지 않았다. 잽싸게 일어난 그는 땅에 떨군 검을 집었다. 그리고는 철포를 추스른 슌스케와 함께 숲속을 달렸 다. 두 사람은 가슴에 손을 모으고 기다리던 오쯔키를 이끌고 그 자리를 빠져 나왔다. (2) 이세伊勢 지방 깊은 산골에 조그만 마을이 있었다. 겐타로와 슌스케는 이 마을에서 꽤나 유명한 존재였다. 평범한 농민인 주제에 무사가 되겠 노라고 입버릇처럼 떠들고 다녔기 때문이다. 주제를 모른다고 마을사람 들이 비웃을 때마다 둘은 당당히 말했다. "다이코太閤 히데요시 님도 처음에는 그저 평범한 농민의 아들이었다. 우리라고 무사가 되지 말란 법이 어디 있나? 두고봐라! 반드시 무사가 되겠다!" 괘씸하긴 했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마을 사람들은 혀를 차면서도 둘을 말리지 못했다. 그런데 무사가 되려는 방법에 있어 두 사람 생각은 달랐다. 겐타로가 검술을 배워 입신하려고 한 반면 슌스케는 전쟁에 나가 공을 세우겠다는 마음이었다. 그래서 겐타로는 어떻게 하든 마을을 뛰쳐나가자 했고 슌스 케는 전쟁이 벌어질 때까지 기다려 보자고 했다. 겐타로 집안이 대대로 그 마을에 살았던 반면 슌스케와 그 아버지는 6 년 전에 갑자기 마을에 들어왔다. 그 전에는 여기저기 떠돌아다녔다고 할 뿐 출신이 어딘지 정확히 밝히지 않았다. 한동안 뭔가 수상하다는 소 문이 떠돌았지만 어떤 근거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나중에 슌스케 아버지가 착실히 일하는 모습을 보자 그런 의심도 흐지 부지 사라져버렸다. 다만 마을에 술자리가 벌어진 어느 날 흥얼거린 이 상한 노랫가락으로 미루어 젊었을 때 슌스케의 아버지는 뱃사람이 아니 었을까 여겨질 따름이었다. "네가 마을에서 나가자 어디 견딜 수가 있어야지. 그래서 나도 집을 나왔어." 슌스케가 먼저 그간의 일을 설명했다. 이제 3명으로 불어난 일행은 주 막에 마주앉아 있었다. 술과 안주가 차려있는 탁자가 놓였다. 겐타로와 슌스케는 연신 술잔을 비웠고 오쯔키는 젓가락으로 안주만 집어먹었다. "전쟁은 어떻게 하고? 나가서 공을 세운다며?" "생각해 보니 가만히 앉아 기다리는 건 재미없겠더라고. 또 기왕이면 뭔가 익혀서 나가는 것이 공을 세우기 쉬울 것 같아서 말이야." "그래서 익힌 거야? 그거?" 겐타로가 슌스케 옆에 놓인 낡디 낡은 철포를 가리켰다. 오래됐다기보 다는 서너 번쯤 부서진 걸 못질과 땜질로 고친 고물이라고 하는 편이 정 확했다. "고생 좀 했지." 슌스케가 빙긋 미소를 지었다. "그랬을 거 같애. 나쁜 머리로 얼마나 힘들었을까?" "뭐라고?" "농담이야. 농담." 눈을 흘기는 슌스케에게 겐타로가 잔을 높이 들어 보였다. 한동안 거 의 굶다시피 하던 뱃속에 술과 음식이 들어가자 살 것 같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슌스케를 만나게 된 것이 기쁘고 든든했다. "슌스케. 넌 정말 좋은 친구야." "갑자기 무슨 소리야?" "말 그대로야. 네 얼굴을 보게 돼서 반갑단 거지." "아닌 듯한데. 보아하니 나보다 술이 더 반가운 눈치야." "그건 사실이지." 한푼 없는 겐타로와 달리 슌스케는 어디서 났는지 제법 두둑한 돈이 있었다. 지금 주막에서 술과 안주를 마음놓고 먹을 수 있게 된 것도 그 덕분이었다. "한동안 거의 요기를 하지 못했어." "그럴 리가 있나? 도둑질을 해서라도 살아갈 네 성격을 잘 아는데?" 슌스케가 겐타로 말을 가볍게 부정했다. 겐타로는 슬쩍 옆을 쳐다보곤 머리를 한번 긁었다. "좀 사정이 있었지." "오쯔키라는 이 아가씨 때문에?" 슌스케의 시선이 오쯔키를 향했다. 얌전히 안주를 집어먹던 오쯔키의 젓가락이 멈췄다. "어떻게 제 이름을 아시죠?" "당연하지. 난 바로 아가씨를 잡으려고 거기서 기다리고 있던 거야. 문 제는 아가씨를 잡으려는 사람이 나 혼자뿐이 아니라는 거야." 오쯔키의 눈이 슬픈 빛을 머금었다. "여기저기에 인상착의가 그려진 방이 나붙어 있어. 아가씨 목에 상금 이 걸린 거지. 무사를 죽이고 도망친 여자라고." "그만!" 겐타로가 말을 막았다. 슌스케가 말을 할수록 오쯔키의 얼굴이 어두워 졌기 때문이었다. 그대로 뒀다간 눈물이라도 흘릴 것 같았다. "나름대로 사정이 있었던 거야. 방에는 써있지 않았겠지만." "사정? 무슨 사정?" "이제부터 어떻게 할까를 먼저 생각하자. 오쯔키 이야기는 나중에 내 가 말해줄 테니." "그렇게 하지." 슌스케는 선선히 겐타로의 말을 따랐다. 슌스케 눈에도 당장에라도 울 음을 터뜨릴 것만 같은 오쯔키의 얼굴이 들어왔다. "어쨌든 내가 보기에도 이 아가씨가 이유도 없이 무사를 찌를 사람으 론 보이지 않으니까." "오쯔키라고 불러주세요. 슌스케 님." 뜨거워지는 눈시울을 억누르는 듯 오쯔키가 고개를 숙이며 나직이 말 했다.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주막에서 묵게 된 하룻밤. 오랜만에 따뜻한 방에서 자게 된 겐타로에 게 슌스케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슌스케의 눈길이 한쪽 구석 에서 자고 있는 오쯔키를 가리켰다. 그 동안 쌓인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 온 데다 오랜만에 배가 불러서 그런지 오쯔키는 세상 모르고 잠들어 있 었다. "오쯔키가 왜?" "무사 한 명이 따라붙었어." "뭐? 무사?" 겐타로가 벌떡 일어났다가 다시 천천히 누웠다. 그리고 팔베개를 하고 있는 슌스케에게 심각한 눈짓으로 물었다. "죽은 무사의 절친한 친구였다더군. 친구의 죽음에 복수를 맹세하고 영주에게 허락까지 얻었어." "제길! 애당초 잘못은 오쯔키의 부모를 죽인 무사녀석에게 있잖아? 복 수는 뭐고 영주의 허락은 또 뭐야!" 슌스케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다음에 이어지는 말 은 무서웠다. "이런 경우에 누구의 잘못이었냐는 문제가 아니지. 무사의 체면이란 게 걸렸으니까. 일개 상인에게 위신을 깎이고 그 딸에게 죽임을 당했대 서야 웃음거리밖에 더 되겠어? 그러니 친구가 대신 복수를 하겠다고 나 선 거야. 그도 무사니까. 이름이 하치우에몬八右衛門이라 했을 거야, 아 마." "분에 못 이겨 상인이나 베는 녀석의 친구라면 뻔하지. 형편없는 무사 일 거야." "그런데 그게 아냐. 나도 소문만 들었지만." "소문이 어떤데?" "그게..." 이야기를 꺼내려는 슌스케 얼굴에 긴장감이 흘렀다. "엄청난 검의 고수야. 마음가짐도 매우 훌륭한 사람으로 평소에는 죽 은 친구를 오히려 못마땅히 여겼대. 하지만 일단 친구가 죽고 나니 무사 의 우정을 지켜야 한다고 나선 거지. 일우류一羽流란 검술을 익혔다는데 그 이상은 나도 몰라." "산 넘어 산이란 건가? 간신히 위험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고 이제부터라니." 겐타로가 한숨을 쉬었다. "뭐 나처럼 돈에 끌려 쫓아온 무리들이야 문제없어. 우리가 여기서 조 금만 멀리 가면 제풀에 지쳐 나자빠질 테니. 문제는 하치우에몬이야. 무 사가 그렇게 한번 복수하겠다 마음먹으면 목적을 이룰 때까지 절대로 포 기하지 않거든." "쳇! 죽지 않으려면 평생 도망 다녀야 한단 뜻으로 들려." "네가 어째서?" 슌스케가 갑자기 얼굴에 냉정한 표정을 띠며 물었다. "너한테 저 여자 애를 끝까지 보호해 줘야 할 책임이라도 있어? 어딘 가에 적당히 맡기든가 버려도 상관없잖아?" "슌스케! 어쩌면 그럴 수가 있어?" "아니면 책임져야 할 일이라도 저지른 거야?" "그만해!" 겐타로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슌스케는 눈길을 피하려는 겐타로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불쌍한 아이란 건 나도 알아, 겐타로. 하지만 그것 때문에 너하고 내 가 목숨을 걸 필요는 없잖아?" "그렇지 않아. 나한테는 이유가 있어." 겐타로가 슬며시 일어나 앉았다. 그러자 슌스케도 벌떡 일어났다. 오쯔 키의 숨이 고른 것이 계속 자고 있는 듯해서 겐타로는 조금 안심했다. "이유라니?" "난 오쯔키와 약속했어. 원한다면 어디까지나 함께 가주겠다고." "약속이라..." 슌스케는 잠시 말없이 겐타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목숨을 걸 정도로 가치 있는 거야, 그 약속?" "사실은 악당이 되고 싶었는데 그것조차 잘 안됐어. 그럼 약속이라도 지켜야지." "무사가 되겠단 꿈은 어쩌고?" 슌스케가 날카롭게 쏘아보자 겐타로는 그저 피식 웃고 말았다. "비열한 무사는 되고싶지 않아." "못 말리겠군." 졌다는 듯 슌스케가 희미하게 웃었다. 그리고 다시 방바닥에 몸을 뉘 였다. "그럼 함께 시고쿠로 가자." "시고쿠?" 겐타로가 눈을 크게 떴다. 일본에서 가장 큰 섬인 혼슈本州의 남서쪽 에 있는 섬이 시고쿠四國다. "해적이 많던 곳이야. 지금은 모두 영주나 성주로 신분을 바꾸고 있지 만." "거긴 왜?" "해적출신 영주는 평소 거느렸던 무사가 그다지 많지 않아. 그래서 수 시로 눈에 드는 사람 가운데 무사를 뽑는다고 해. 잘하면 우리한테도 기 회가 오겠지. 그리고 하치우에몬도 시고쿠라면 쫓아오기 힘들 거야. 아무 래도 배를 타야 하니까." "일리 있는 말이야. 좋아. 그렇게 하자." 슌스케 말에 동의하면서 겐타로는 흘낏 오쯔키를 훔쳐보았다. 둘 사이 에 어떤 말이 오고갔는지도 모른 채 곤히 자고 있는 모습이었다. 기다란 눈썹을 붙이고 자는 오쯔키의 얼굴은 너무 애처로웠다. "무사이야기는 오쯔키한테 말하지 않는 게 좋겠어." 사람을 죽였다는 충격조차 아직 벗어나지 못한 15살 소녀에게 무사가 목숨을 노리고 있다는 말을 하는 건 너무 잔인하다. 겐타로는 그렇게 생 각했다. 오쯔키를 보호해 주고 싶다. 이것은 오쯔키를 처음 등에 업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된 감정이었다. 다음날 일찍 일어난 오쯔키는 의외로 시고쿠 행을 선선히 받아들였다. 이야기를 꺼낸 슌스케의 눈을 가만히 쳐다보던 오쯔키의 대답은 단 한마 디였다. "슌스케 님도 참 좋은 분 같아요." 믿을 수 있을 것 같아서 좋다고 말했는지, 아니면 좋은 사람이니까 믿 는다는 건지 모호한 말이었다. 슌스케는 혹시나 오쯔키가 전날 두 사람 이 말한 내용을 들었는지 뜨끔했지만 다행히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무섭지 않아?" 겐타로가 확인하듯 물었을 때 오쯔키는 오히려 웃어 보였다. "약속하지 않았어요? 오쯔키가 원하면 어디까지든 함께 간다고. 그런 데 뭐가 무서워요?" 사람을 죽였을 때와는 너무도 다른 천진함이었다. 겐타로는 복잡한 심 경으로 오쯔키의 미소를 바라보았다. 겐타로는 아직도 이 귀엽고 당돌한 소녀와 자기 운명이 같은 선상에 놓였다는 걸 믿을 수 없었다. 그러나 겐타로가 이렇게 다른 생각에 빠질 수 있는 시간은 길지 못했 다. 주막을 떠난 지 얼마 안 되는 세 사람 귀에 찢어질 듯한 비명이 들 려왔다. "뭐야?" "저건 주막 노파 목소리 아냐?" "설마!" 겐타로는 다소 겁에 질린 표정으로 슌스케를 쳐다보았다. 복수를 하겠 다고 따라붙은 무사가 갑자기 떠올랐다. "보고 올게!" 겐타로가 말릴 틈도 없이 슌스케가 철포를 들고 주막을 향해 뛰어갔 다. 그러더니 잠시 후 파랗게 질린 얼굴이 되어 뛰어왔다. "어서 숨어야 돼!" "무슨 일인데?" "하치우에몬! 그 무사녀석이야!" "빌어먹을!" 영문도 모르고 서 있는 오쯔키 손을 이끌고 겐타로와 슌스케는 바삐 숨을 곳을 찾았다. 마침 길옆에 난 한쪽 언덕에 소나무가 우거진 곳이 있었다. 셋은 급히 그리로 숨었다. "훌륭한 무사라 들었는데 전혀 아니야. 아주 미친 녀석이야! 죄인을 숨 겨줬다며 주막노파를 한 칼에..." "뭐?" 긴장과 공포가 겐타로의 등줄기를 타고 흐르기 시작했다. 복수심 때문 인지 몰라도 인간백정으로 변해버린 무사. 게다가 검술가였다. 도저히 겐 타로나 슌스케 따위가 어떻게 해볼 상대가 아니었다. 잠시 후 셋이 숨어서 지켜보고 있는 길로 무사 한 명이 나타났다. "왔다! 조용히." "저게 하치우에몬?" 낮게 한마디 내뱉은 슌스케는 재빨리 오쯔키 입을 손바닥으로 막았다. 그것은 현명한 판단이었다. "저런!" 결혼하지 않은 시동들처럼 뒤로 묶은 긴 머리를 한 무사였다. 무사가 입은 연한 회색 하카마에 온통 붉은 핏자국이 나 있고 오른손에 든 검에 선 시뻘건 피가 뚝뚝 떨어졌다. 주막노파를 벤 뒤 검날에 묻은 피를 채 지우지도 않고 온 것이다. 차가고 매서워 보이는 얼굴은 아무런 감정도 드러내지 않아 오히려 더 무서웠다. 오쯔키의 눈이 크게 부릅떠졌다. 입을 막은 슌스케의 손만 아니었다면 비명이 터져 나왔을 것이다. 그만큼 피로 범벅이 된 하치우에몬의 모습 은 강렬했다. 땅 위를 소리도 내지 않고 움직이는 걸음걸이조차도 숨이 막힐 정도의 기세를 내뿜었다. 하치우에몬이 지나갈 때까지 그대로 죽은 듯 숨어있던 세 사람은 한참 동안 나무토막처럼 굳어진 몸을 추스르지 못했다. 오쯔키는 놀란 토끼처 럼 몸을 떨었고 겐타로 얼굴에선 핏기가 가셨다. "어쨌든." 그래도 슌스케 쪽이 가장 나았다. 슌스케는 한숨을 한번 쉰 후에 어렵 게 말을 꺼냈다. "빨리 시고쿠로 가자." "역시 저 때문이죠? 저 무사도..." 아직 떨고 있는 오쯔키가 물었다. "아니야. 오쯔키와는 관계없어." "거짓말!" 고개를 돌리며 부정한 겐타로에게 오쯔키는 소리쳤다. "제 탓이에요! 저 때문에, 사람을 죽인 저 때문에 겐타로 님과 슌스케 님이 위험하게 된 거예요! 저만 없으면 되는데. 오쯔키만 죽으면 되는 데." "그만해!" 겐타로가 오쯔키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죽어도 되는 사람 따윈 아무도 없어! 누구나 살고 싶고, 또 더 좋게 살길 바라는 거야! 그래. 그래서 나도 슌스케도 고향을 버리고 나와서 여기까지 온 거야. 알겠어? 이건 오쯔키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거야! 난 내가 원해서 오쯔키와 함께 있는 거야. 약속도 그 때문에 한 거고. 그 러니 죽으면 된다느니 오쯔키 탓이라느니 하는 소리 따윈 다시는 하지 마!" "예." 오쯔키가 가느다란 목소리로 대답했다. 오쯔키는 겐타로 눈에서 격한 분노와 함께 그 동안 숨겨진 진심을 볼 수 있었다. "더구나 난 저 무사 따위 전혀 두렵지 않아! 넌 모르겠지만 나도 이 칼로 사람 두셋은 베고 다녔던 몸이라고!" 겐타로가 진지하게 한 마디 덧붙였다. 그러나 그 말에 오쯔키는 고개 를 숙이며 작게 속삭였다. "거짓말." 시고쿠로 가는 길은 말로 간단히 결정한 만큼 쉬운 여정은 결코 아니 었다. 무사에게 쫓기고 있다는 불안감과 바닥을 드러낸 슌스케의 돈이 세 사람을 괴롭혔다. 최소한 시고쿠로 갈 배삯 정도는 남겨야겠기에 남 은 돈도 함부로 쓸 수 없었다. "조금만 참자. 시고쿠에 도착하면 어떻게든 될 거야!" 슌스케는 이렇게 말하며 두 사람에게 힘을 내게 했다. 아무런 근거도 없는 희망에 지나지 않았지만 겐타로와 슌스케는 믿었다. 시고쿠에 가면 반드시 무사가 될 수 있을 거라고. 허기와 추위에 시달리면서도 끝내 겐타로와 슌스케는 검이나 철포를 팔지 않았다. 허기나 추위는 참을 수 있지만 희망을 잃어버릴 수는 없었 기 때문이다. 다만 나이 어린 오쯔키가 함께 고생하는 것만은 두 사람 모두 견디기 힘든 점이었다. 그렇게 시고쿠를 향하던 두 사람에게 매우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다. 오사카와 시고쿠 사이에 있는 아와지炎路 섬의 스모또洲本성 영주 와키 자카 야스하루가 병력을 모으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육상병력이 아닌 수 군이어서 주로 숙련된 해적을 무사나 병사로 뽑고 있다고 했다. "드디어 우리에게 기회가 왔어!" "다행이에요. 두분 모두!" 환한 표정이 된 두 사람을 보자 오쯔키도 같이 기뻐해 주었다. 결코 편한 여행이 아니어서 하루종일 굶기도 하고 갖은 고생을 했건만 불평 한마디 안 하는 오쯔키였다. (*부록. 중복부분 삭제) 그 무렵 일본의 병력동원체제는 크게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전통 적인 정규 아시가루 동원이고 다른 하나는 오다 노부나가가 만든 잡병 중심의 모집체계였다. 정규 아시가루 모집은 보통 출진하기 보름정도 전에 동원령이 내려지 면서 시작된다. 작지만 자기 관할의 땅을 가진 하급무사에게 전령이 출 진명령서와 명단을 가지고 온다. 명단에는 그 무사가 거느릴 수 있는 인 근 마을 병사들 이름과 소재가 써 있다. 어느 기록에는 39명이 적혀있었 다. 그러면 그 무사는 출진날까지 집에서 무기를 점검, 보수하며 군량 등 을 준비한다. 출진일 오후가 되면 호각이나 종이 마을에 울려 이를 알린다. 그러면 각 병사들이 명단에 지정된 장소로 모인다. 이때 하급무사는 그 장소에 서 병사들과 함께 모여 병력동원을 맡은 부교陣場奉行에게 인원수와 장 비 점검을 받는다. 그리고 이때부터 대형을 이루어 성으로 들어가는 것 이다. 이런 아시가루는 한 부대가 대부분 같은 마을 내지 인근 마을 사람이 므로 결속력이 강하고 전투력도 높았다. 또한 동원하는 데 별다른 비용 이 드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이때가 농번기이거나 전투가 길어질 때 는 자국의 농업생산력에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다. 그래서 오다 노부나가 가 생각해 낸 것이 잡병을 주 병력으로 쓰는 방법이었다. 이 당시 일본에는 유동인구가 많았다. 오랜 전쟁으로 살 터전을 잃은 농민과 몰락한 무사들, 주인을 찾아 떠도는 낭인들, 무역과 상업의 발달 로 인해 장사하러 다니는 상인들이 무리를 이루어 이리저리 떠돌아다녔 다. 이들은 적당한 돈만 주면 기꺼이 병사가 되었다. 돈을 걸고 이들을 모은 영주는 무기와 군장을 주고 간단한 군사훈련을 시킨다. 그러면 즉각 전투에 투입할 수 있는 병력이 모여지는 것이다. 일 단 모은 병력에겐 의복부터 군장까지 모두 지급해 주고 병량도 주었다. 끼니마다 흰쌀밥이 충분히 주어지는데 바로 이 밥 때문에 지원하는 자도 있을 정도였다. 일단 끼니부터 확보해야 할 지경에 빠진 겐타로와 슌스케가 반색을 하 고 반긴 것도 이 때문이었다. 고향에서 가만히 있다가 동원되면 모든 걸 자기가 준비해야 한다. 그러나 지금 스모토 성으로 가서 병사가 되겠다 고 신청하기만 하면 돈은 물론이고 무기와 쌀을 거저 받을 수 있었다. "무사는 차차 될 수 있을 테니까." 겐타로는 갑자기 한동안 거들떠보지도 않던 검을 들고 자세를 취했다. 어설픈 그 자세가 우스워 오쯔키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아야 했다. "그런 모습은 안 어울려요 겐타로 님." "왜 그래? 나도 검을 익힌 몸이라고. 자, 비켜라! 여기 검술가 겐타로 님이 간다!" 겐타로가 익살스런 표정으로 한껏 허풍을 떨었다. 그러자 지켜보던 슌 스케가 한마디했다. "아무래도 넌 무사보다 이야기꾼 같은 게 더 어울리겠어." "뭐라고?" 겐타로가 검을 내려놓으며 맞받았다. "그러는 슌스케 넌 그 총이 어울린다고 생각해?" "네 검보다야 낫겠지. 난 쏠 줄은 아니까." "나도 휘두를 줄은 알아!" "어설프게 휘두른 검에 누가 맞겠어?" "낡아빠진 그 총에 누가 맞는데?" 가벼운 농담에서 시작한 것이 어느새 말다툼이 되어버렸다. 워낙 서로 잘 알고 있는 사이였기에 지지 않으려는 생각도 컸다. 잘 모르는 오쯔키 는 두 사람이 싸움이라도 벌이는 게 아닌가 안절부절했다. 하지만 오쯔 키도 곧 둘의 표정에 미소가 번지는 것을 보고 마음을 놓았다. 시고쿠로 향하는 나루터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겐타로 일행 은 배를 타기 위해 차례를 기다려야 했다. 병력을 모은다는 말에 너나없 이 모여든 유랑민과 낭인들이 몇 개 안 되는 나루터를 꽉 채웠다. "바보 같은! 도대체 언제까지 기다려야 돼?" 순서가 적힌 종이조각을 들고 며칠을 기다려도 차례가 오지 않자 초조 해진 겐타로는 나루터까지 직접 나가 기다렸다. 하루하루 먹고살기 힘든 탓도 있었지만 더 심각한 걱정이 있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 면 자칫 필요한 병력을 다 채워 겐타로가 여기까지 온 것이 헛걸음이 될 수도 있었다. 겐타로에게는 그것이 무엇보다 큰 걱정이었다. "슌스케 님이 방법을 찾아보겠다고 나갔으니 뭔가 수가 있을 거예요. 조금만 참으세요." 겐타로를 따라온 오쯔키가 차분한 말투로 겐타로를 달랬다. 힘든 생활 을 하며 온 탓인지 다소 피곤해 보였지만 여전히 밝은 태도였다. "별로 그 녀석한테 기대는 안 해." "그래도 나가신 지 벌써 한나절이 지났잖아요? 뭔가 노력은 하실 거예 요." "너도 이게 무슨 고생인지. 하여간 조금만 더 참아 줘." "겐타로 님도. 이제 그런 말은 하지 마세요. 오히려 제가 미안해져요." "그래. 알았다." 겐타로는 귀여운 오쯔키의 머리에 손을 올려 살짝 쓰다듬었다. 그녀를 구한 것. 몇 번을 생각해도 후회는 없었다. 악인이 되기로 작정하고 덮쳤 던 그 행인이 마침 오쯔키가 아니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검에는 피가 튀 고 겐타로는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걸었을 것이다. 오히려 겐타로는 종종 오쯔키에게 감사하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하치우에몬이란 그 무사만 없다면 좀 더 나았을 텐데.' 그러나 세상일이란 좋은 일만 오는 법이 아니었다. 미치광이 같은 무 사가 어디선가 셋의 목숨을 노리고 따라온다고 생각하면 소름이 끼쳤다. 피가 철철 흐르는 검을 든 채 살기에 찬 눈빛을 한 무사. 그것만으로도 밤에 잠이 제대로 오지 않았다. "꼼짝 마!" 그때였다. 낮은 음성과 함께 겐타로는 등에 금속성의 차가운 감촉이 느껴졌다. "앗!" 혹시 하치우에몬? 놀라움으로 인해 가슴에 찌릿한 통증까지 느낀 겐타 로는 반사적으로 목소리의 주인공을 쳐다보았다. "뭐야?" 슌스케였다. 그가 철포 앞부분으로 겐타로의 등을 건드리며 빙긋 웃었 다. "뭐예요! 슌스케 님 얼마나 놀랐는데요!" "미안, 미안!" 겐타로보다 먼저 오쯔키가 볼멘소리로 슌스케에게 항의했다. 슌스케는 그 항의에 가볍게 사과하며 품속에서 종이 3장을 꺼냈다. "실은 이걸 구했지!" "응? 그건!" "지금 곧바로 배를 탈 수 있는 순번표야. 어때? 이만하면 용서해 줄 거지?" "뭐? 그걸 도대체 어떻게 얻은 거야?" 그저 빨리 순번이 오기만 기다리던 겐타로가 황당한 표정으로 슌스케 가 내민 순번표를 살폈다. 분명히 그건 가장 빠른 순번이 기록된 표였다. "건너편 주막에서 매일 도박이 벌어지고 있다고 하길래 말야. 가서 딴 거야." "뭘 걸고?" "이 낡은 철포. 용케 받아주더라고." 슌스케가 자랑스럽게 철포를 들어 보였다. "대단하군 너도." "나야 언제나 대단했지. 적어도 겐타로 너보단." 겐타로가 알기로 슌스케는 도박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도 목숨 보다 아끼던 총을 서슴없이 걸고 도박을 한 것이다. 겐타로는 부질없이 나루터에 와서 투덜대기만 했지만 슌스케는 보다 확실히 문제를 해결한 것이다. 겐타로는 슌스케의 능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번만은 인정해주지. 오쯔키 너도... 아!" "왜 그래?" "하치우에몬! 저기 그 녀석이!" 웃으려던 겐타로 얼굴이 갑자기 일그러졌다. 슌스케와 오쯔키가 겐타 로의 시선이 향한 곳을 보았다. 나루터로 이어지는 길에는 정말로 전에 보았던 그 피에 젖은 무사 하치우에몬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주변을 두리 번거리고 있었다. "젠장! 어떻게 된 거야!" 슌스케가 욕설을 퍼부었지만 그것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상기된 얼굴의 겐타로가 검을 꽉 쥐었다. "싸우자! 싸워서 해치워버리자. 다행히 저 녀석, 아직 우릴 발견 못했 어. 이때 다가가 해치우는 거야. 어때?" "상대가 될 리 없잖아?" 슌스케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겐타로도 낡은 철포와 검을 든 두 명 이 검법가로 유명한 무사를 당할 수 있으리라곤 생각되지 않았다. 겐타 로는 그 사실에 더 화가 치밀었다. "그럼 어쩌라고? 섣불리 피하려고 했다가 저 놈이 우리가 있다는 걸 눈치채기라도 해봐. 습격할 기회조차 없어진다고!"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우선 여기서 해볼까?" 슌스케가 철포에 조심스럽게 화약과 탄환을 집어넣으며 대답했다. 이 제 화승을 자르고 불만 붙이면 된다. 일단 멀리서 쏘아보려는 것이다. "도망가요!" 그때 오쯔키의 하얀 손이 그 철포 앞을 막았다. "어떻게?" "지금 뒤에 배가 왔어요. 지금이면..." 어느새 나루터에는 다음배가 들어와 있었다. 하치우에몬에게 온 신경 을 집중하느라 둘이 보지 못한 것을 오쯔키는 보고 있었다. "슌스케 님이 가진 표라면 문제없잖아요." 오쯔키는 친절하게 덧붙여 말해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럼 그렇게 하자!" 겐타로가 다시 말했다. 망설일 시간이 없었다. 빨리 결단을 내려야 했 다. 세 사람은 주위에 서 있던 다른 사람들을 헤치고 배를 향해 뛰기 시 작했다. "눈치챘어요!" 이런 와중에서 놀랍도록 침착한 모습을 보인 건 오쯔키였다. 겐타로에 게 이끌려 뛰면서도 그녀는 뒤를 살폈다. 그리고 세 사람을 본 하치우에 몬이 뒤따라오고 있음을 알렸다. "빨리 타면 돼! 어쨌든 저 녀석에게 순번표 따위는 없을 테니까." 나루터에 댄 작은 배는 삽시간에 사람들로 가득 찼다. 겐타로 일행은 아슬아슬하게 배에 탈 수 있었다. 멀리 무사가 뛰어오는 것을 보며 겐타 로가 고함을 버럭 질렀다. "빨리 출발해! 빨리!" "아직 사람이 다 못 탔소. 기다리시오." 수부들은 침착하게 대꾸할 뿐이었다. "그 배! 서라!" 하치우에몬이 칼을 치켜들고 마치 나는 듯한 속도로 배에 접근했다. "제길!" 이젠 배 위에서 싸움을 벌여야 할 판이었다. 겐타로가 눈을 부라리며 검을 뽑았다. "이봐!" 그때였다. 하치우에몬이 배에 뛰어들려는 순간 누군가 그 무사의 어깨 를 움켜쥐었다. "뭐야?" 하치우에몬의 얼굴에 가는 노기가 스쳐지나갔다. 미소년이 대부분인 시동들처럼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길고 가는 눈과 곧게 내려온 코, 작고 갸름한 입술이 돋보였다. "그러면 곤란하지! 차례를 지켜야지." 순번을 지키던 사람인 듯한 남자가 험악한 표정을 지으며 하치우에몬 의 어깨를 잡아당겼다. 얼굴에 기다란 상처가 나 있고 검을 차고 있는 것으로 봐서 낭인인 듯했다. "비켜!" 하치우에몬은 고개를 숙인 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차례를 무시한 건 미안하다. 하지만 사정이 있다." "그건 안되지. 여기 있는 사람 모두가 다 사정은 있다고." "다시 말하지 않겠다. 비켜라!" 하치우에몬의 목소리가 점점 차가워졌다. 검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연 상시켰다. "흥! 그렇게 말하면 누가 겁먹을 줄 알아? 이봐! 모두 이리로 와! 이놈 이... 아악!" 일행을 부르던 낭인이 비명을 질렀다. 동시에 하치우에몬을 잡고 있던 낭인의 오른팔이 깨끗이 잘려 땅에 떨어졌다. 앉은 자세나 혹은 불시에 검을 뽑아 상대를 공격하는 이아이居合라는 기술이었다. 순식간에 펼쳐야 하므로 검술을 상당히 깊이 배운 자만이 익힐 수 있었다. "으아악!" 잘린 부분에서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하치우에몬의 비웃는 미소가 낭인에게 향했다. "난 지금 복수를 하러왔다. 막지 마라." "이 죽일 녀석! 내 팔을 베고도 무사할 듯 싶으냐? 목숨을 내놔라!" 오른 팔을 잘린 낭인이 소리치는 것과 동시에 낭인 일행이 일제히 칼 을 뽑았다. 5명은 되어 보였다. "쯧쯧! 또 싸움이군. 그럼 출발이요." 나루터에서의 싸움은 아랑곳없이 배가 사람으로 가득 타자 수부들이 출발을 알렸다. 수부들은 이런 싸움을 종종 본 듯했다. 하는 일도 없이 떠도는 남자들이 가득 모여드는 나루터였다. 순번을 다투는 싸움 따위는 매일이라도 일어났을 것이다. 배는 곧 나루터를 떠났다. 하치우에몬이 고개를 돌려 겐타로 일행을 쏘아보았다. 소름끼치는 그 눈빛에 겐타로와 슌스케는 감히 맞서 쳐다볼 용기를 내지 못했다. "어째서..." 그렇지만 오쯔키는 달랐다. 오쯔키는 하치우에몬을 향해 알 수 없다는, 그리고 불쌍하다는 눈빛을 보냈다. 잠시 두 사람 눈빛이 서로를 향해 멎 었다. "하앗!" "받아라!" 그런 둘의 시선을 가른 것은 낭인 일행이 뻗은 검이었다. 저녁놀이 물 드는 하늘에 몇 가닥 검의 광채가 빛을 뿜었다. "그럼 모두 죽여주마." 별로 흥분하지도 않은 듯 하치우에몬이 냉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오른 쪽으로 몸을 젖혔다. 가슴을 노리고 찔러 들어오는 검 하나를 피한 하치 우에몬의 검이 수평으로 상대의 몸을 갈랐다. "읍!"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는 낭인을 왼발로 짓밟으며 하치우에몬이 몸을 숙였다. 옆에서 달려든 낭인이 무사의 목을 향해 베어온 검이 위잉 하는 바람소리를 내며 지나갔다. 하치우에몬은 조금 전과 반대로 이번에는 오 른쪽으로 검을 휘둘렀다. 베는 듯했지만 뜻밖에 찌르기였다. 달려든 낭인 의 배를 검날이 깊이 찔렀다. "이 자식이!" 낭인이 칼을 머리높이 들며 달려들었다. 방금 찌르기를 끝낸 하치우에 몬을 뒤에서 습격하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하치우에몬의 동작은 기민했다. 기척과 소리로 이미 움직임을 눈치챈 무사는 몸을 돌리며 왼쪽 팔꿈치로 낭인의 복부를 가격했다. 그 리고 그 반동을 이용해 뽑은 칼로 다시 그 낭인의 목을 베었다. 복부를 맞은 상대가 미처 고통에 일그러진 얼굴을 펴기도 전이었다. 하치우에몬을 둘러싼 나머지 낭인 두 명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 다. 더불어 배에 타고 나루터에서 멀어져 가는 겐타로 일행의 얼굴도 백 짓장처럼 변했다. 정식 검법가는 아니더라도 실전으로 다져진 낭인들이 었다. 하치우에몬은 그런 낭인 세 명을 순식간에 베어버린 것이다. "잘 들어라 오쯔키!" 하치우에몬이 당당히 서서 배를 향해 소리쳤다. 조금 전 목숨을 받겠 다고 달려들던 낭인들은 겁먹은 채 칼만 겨누고 있었다. 그들은 감히 하 치우에몬에게 다가가지도 못했고, 칼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피에 젖은 하치우에몬의 얼굴이 똑바로 오쯔키를 향했다. "특별히 너한테 원한이 있는 건 아니다! 그러나 내 친구의 복수를 위 해서다! 반드시 넌 내 손으로 벤다!" 오쯔키는 대답하지 않았다. 또한 고개를 숙이지도 않았다. 그저 가만히 하치우에몬의 눈동자를 쳐다볼 뿐이었다. "이 미친 무사 놈아! 어디 할 테면 해보라고! 대신 네 놈도 목을 내놔 야 할걸!" 겐타로가 고함을 지르며 검을 치켜들었다. 그리고 뱃전에 벌떡 서서 하치우에몬을 노려보았다. "지화류 검술의 달인인 내가 널 상대해 주마!" 그 순간 겐타로는 공포고 뭐고 잊어버렸다. 싸늘한 하치우에몬의 눈길 에도 겐타로는 오히려 비웃음을 보냈다. 스스로 엉터리라고 생각하는 지 화류를 내세우는 것조차 전혀 부끄럽지 않았다. - 탕! 잔잔한 바닷가에 파문 하나가 일었다. 귀를 울리는 발사음과 동시에 하치우에몬이 급히 몸을 숙이는 모습이 보였다. "내 앞에 한번만 더 나타나 봐라! 가슴에 바람구멍을 내주마!" 이번에는 슌스케가 소리쳤다. 좀처럼 화를 내지 않던 슌스케는 몹시 성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오쯔키의 입술이 달싹거리며 작은 소리를 냈 다. "고마워요." 오쯔키를 보호해 주는 겐타로와 슌스케에게 하는 말일 것이다. 라고 겐타로는 생각했다. 그러나 이 말을 하는 오쯔키의 얼굴은 이상하게도 계속 하치우에몬을 쳐다보고 있었다. 나루터를 떠난 배가 서서히 너른 바다로 나갔다. 그러자 해안에 있던 사람들 모습이 점점 멀어졌다. 잘린 팔을 움켜잡고 욕설을 내뱉는 낭인 도, 겁에 질려 눈치만 보는 낭인 일행도 작게 변하며 사라졌다. 검을 잡 고 계속 이쪽을 노려보는 하치우에몬의 모습도 이윽고 멀리 사라져 버렸 다. 4. 차가운 추억 (3) 차가운 봄비가 내리는 날이었다. 돈도 양식도 다 떨어진 겐타로 일행 은 간신히 스모토 성에 도착했다. 그러나 거기서 그들을 맞이한 건 성 문지기의 싸늘한 눈초리였다. "늦었네. 다 뽑혔으니 돌아가게." "뭐야?" "영주님께선 필요한 병력을 데리고 이미 나고야名護屋 성으로 가셨 어." 2월이 거의 다 지나가고 있었다.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이때 조선정벌 에 소요되는 병력을 전부 모은 다음 스모토 성을 떠난 다음이었다. 바야 흐로 바다 건너에서 벌어질 전쟁이 머지 않았다. "그럼 우린 어떻게 하라는 거야! 여기서 병력을 모은단 말만 듣고 저 멀리 에치젠에서 왔다고!" 빗물이 온통 젖은 겐타로가 한껏 고함을 질렀다. 그렇지 않아도 거지 같은 행색에 비까지 맞으니 그 이상 초라해 보일 수 없었다. 슌스케나 오쯔키도 마찬가지였다. "그거야 내가 알 바 아니지." 문지기가 딱딱한 얼굴로 대답하더니 창으로 겐타로를 슬쩍 밀었다. "제길! 제길! 이제 어쩌라는 거야!" 겐타로가 이젠 입에 붙어버린 욕설을 마구 해댔지만 그것뿐이었다. 비 에 젖은 몸에다 어깨를 짓누르는 절망감으로 인해 겐타로는 기운을 잃었 다. "기가 막히는군." 허탈해하던 슌스케가 낡은 철포를 빗물이 흥건한 땅바닥에 떨어뜨렸 다. "기운 내세요. 모두..." 오쯔키가 조심스럽게 말했지만 그 말조차 기운이 없었다. "아직 모든 게 끝난 건 아니잖아요." "돈은 확실히 없지." 슌스케가 고개를 들었다. 빗물이 입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물이 들어가 면 못쓰게 되는 철포는 바닥에 그냥 내버려둔 채였다. "신불이 우릴 버렸나보네! 이건 죽으란 소리야!" 겐타로도 손에 든 검을 냅다 바닥에 팽개쳤다. 그 동안 참아왔던 뭔가 를 한꺼번에 폭발시켰다. "내가 도대체 뭘 잘못했기에! 뭘 잘못했냐고! 응? 왜 나를 이렇게 못 살게 구는 거야!" 분노로 이글거리는 겐타로의 눈이 하늘로 향했다. 빗물을 뒤집어쓴 얼 굴에서는 뜨거운 물방울이 흘렀다. 문득 겐타로가 세차게 바닥을 찼다. 진흙과 흙탕물이 하늘을 향해 튀었다. "대답해! 대답해 보란 말야!" 하늘에선 대답대신 천둥이 치기 시작했다. 번개가 번쩍하고 먼 하늘에 서 점멸했다. "나고야는 어디에 있죠?" 오쯔키가 물었다. "규슈." 슌스케가 받아 마시던 빗물을 바닥에 뱉으며 대답했다. "그럼 우리 그리로 가요." 오쯔키 눈에도 어느새 눈물이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그런 얼굴로 오 쯔키는 억지로 웃으려 했다.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이상한 얼굴로 오쯔키는 호소하고 있었다. "여기서 포기하진 마세요." 겐타로가 천천히 고개를 내렸다. 그리고 갑자기 오쯔키를 향해 고개를 홱 돌렸다. "나는!" 겐타로의 얼굴에 흐르던 눈물과 빗물이 오쯔키의 얼굴에 튀었다. "포기하겠다고 한 적 없어! 무사의 꿈도, 그리고 오쯔키 너도!" "겐타로 님." 결연한 겐타로의 눈에 오쯔키의 놀란 눈빛이 겹쳤다. 그때 천둥소리가 울렸다. 이윽고 뒤쪽 하늘에서 다시 번개가 반짝하고 빛을 냈다. 시간이 조금 더 흘렀다. 일본 서쪽 끝인 규슈로 향하는 짐배. 심한 파도에 흔들리는 배 밑바닥 에서 겐타로 일행은 짐짝처럼 실린 채 여행을 떠나고 있었다. 습기와 악취에다 빛조차 들지 않는 배 밑바닥에는 겐타로 일행 외에도 다른 사람들이 몇 명 더 탔다. 가진 돈이 충분치 못한 떠돌이들이었다. 겐타로가 모처럼 기운찬 목소리를 냈다. "규슈로 가면 분명 우린 무사가 될 수 있을 거야. 틀림없다고!" "그래. 될 수 있겠지." 슌스케가 겐타로 얼굴을 보더니 힘없이 웃었다. "하지만 그게 언제일지는 모르지." "무슨 소리야?" "병사가 되기조차 이렇게 힘든 판이야. 전쟁에 나가 공을 세우거나 영 주 눈에 들려면 도대체 얼마나 고생을 더하고 시간이 들어야 할까?" "슌스케 너..." "지쳤어. 잠이나 자게 해줘." 슌스케는 짚단이 쌓여있는 한쪽 구석으로 몸을 옮기더니 드러누웠다. 겐타로는 물끄러미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슌스케는 목숨처럼 아끼던 철포를 팔아야 했다. 일행 가운데 돈이 될 만한 것은 그것밖에 없었다. 끝까지 지키려던 물건이었건만 당장 굶어죽 지 않으려면 방법이 없었다. 겐타로도 검을 팔려했지만 몇 푼 쳐주지도 않을 것 같았고 그나마 사려는 사람도 없었다. 그때 슌스케는 철포뿐만 아니라 희망까지 팔아버린 걸까? 겐타로는 슌 스케가 차츰 절망적이 되어 가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그것은 오쯔키가 차츰 말이 없어지는 것과 함께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오쯔키가 남만교를 믿게 된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규슈행 배편을 알 아보는 자리에서 금발에 푸른 눈을 한 남만인 선교사가 오쯔키에게 다가 왔다. 그런 사람을 처음 보는 오쯔키는 신기해서 선교사와 많은 이야기 를 했다. 그때 둘이 이야기하는 것을 말리지 않은 것이 실수라면 실수였 다. 하긴 그때 겐타로는 스스로를 추스르는 것만도 힘에 겨운 상태였다. 남만인에게서는 오쯔키에게 해를 끼치려는 의도가 보이지 않았다. 더구 나 이야기를 할 때마다 선교사가 오쯔키에게 과자를 주는 걸 보자 그나 마 말릴 생각도 사라졌다. - 어째서 사람은... 서로를 죽이는 걸까요? 그런데 그후로 겐타로는 오쯔키에게 종종 이런 질문을 들어야했다. 장 난은 아니었다. 장난으로 받아들이거나 가볍게 넘기기엔 오쯔키가 저지 른 일과 그로 인해 겪는 운명이 너무 무거웠다. - 글쎄. 겐타로는 한참을 생각하며 대답이 될 만하다 싶은 말을 궁리해야했다. - 욕심이 너무 많기 때문이 아닐까? 이것이 겐타로가 가장 알맞겠다 싶은 대답이었다. - 욕심이라면? - 여러 가지가 있지. 슌스케나 나 같은 놈은 남보다 잘 살아보겠다는 욕심이 있지. 그리고 무사나 영주는 이름을 드높이고 집안을 번창시키겠 다는 욕심이 있어. 지금 일본 최고 위치에 있는 히데요시 님조차도 그래. 일본만으로 만족하지 못해 조선과 명나라를 쳐서 차지하겠다는 욕심에 사로잡혀 있잖아?" - 그게 욕심인가요? - 당연히 욕심이지. 슌스케와 내가 무사가 되려면 필요한 건 전공인데 말야. 그건 공짜로 얻어지는 게 아냐. 적을 무찔러야 해. 그건 남의 목숨 인 거야. 쉽게 말해 누군가를 베어야 내가 그 피로 인해 출세하는 거라 고. - 그건 너무 잔인하잖아요? - 잔인하지. 하지만 해야하니까 어쩔 수 없지. 그래서 사람은 누군가 를 죽이지 않으면 안 되는 거야. 영주나 무사들도 자기 가문을 위해 늘 누군가를 죽이거나 파멸시킬 기회를 노리고 있어. 규슈에서는 곧 조선과 명나라를 칠 군대가 출발할거야. 그들이 과연 아무도 죽이지 않고 그 나 라들을 차지할 수 있겠어? 그게 욕심이란 거야. 불교조차 믿지 않는 겐타로였지만 이럴 때는 사람에 대한 환멸을 느꼈 다. 심지어는 스스로에 대해서도 비웃는 심정이 되었다. - 그럼 복수로 사람을 죽이는 것도 욕심인가요? 오쯔키의 물음이 달라졌다. - 그건 좀 다를 거야. 욕심은 아니겠지. - 전에 본 그분이 말하기를 예수란 훌륭한 분께선 원수를 사랑하라고 했대요. 그게 가능할까요? 아마도 오쯔키는 자기와 하치우에몬의 입장을 비교하고 있을 것이다. 겐타로는 그런 오쯔키가 너무나도 불쌍하게 느껴졌다. - 사랑할 수 있다면 그것도 좋겠지. 하지만 억지로 그렇게 할 필요는 없어. 신불도 자비를 역설하지만 그건 경우에 따라서 지키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 그 외에도 오쯔키가 여러 가지를 물었지만 겐타로는 그다지 대답해 주 지 않았다. 부모의 원수를 갚는 당연한 일을 했으면서도 억울하게 죄인 이 되고 게다가 이렇게 고민까지 해야하는 오쯔키였다. 천주교를 믿게 된 것이 조금이라도 위안이 된다면 오히려 좋은 일인지도 모른다. 겐타로는 가끔 오쯔키가 동그란 눈으로 보는 세상이란 자기와 어떻게 다를까 생각해보았다. 신분이 다르고 자라난 환경도 전혀 틀렸다. 아마도 오쯔키는 겐타로보다 세상을 조금은 더 낙관적으로 생각하고 보고있는 게 아닐까? 규슈로 가는 먼 뱃길은 그렇게 지나갔다. 규슈 그리고 나고야. 나고야는 원래 아무 것도 없는 바닷가 모래톱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 만 조선과 명나라를 치고자 뜻을 굳힌 히데요시에 의해 거대한 도시로 변했다. 다 쓰러져 가던 동쪽 항구 하카다搏多는 무역항으로 재건됐고 나고야에는 거대한 성이 들어섰다. 조선으로 건너갈 군사와 각 영주의 숙소, 배와 각종 물자까지 집결한 이곳은 명실상부한 거대 군사도시였다. 일본 전토에서 모인 30만을 가까운 병력 외에 이들이 먹을 쌀과 양식, 물건을 파는 가게가 들어섰다. 심지어는 유곽까지 들어서 병사들을 유혹 했다. 총면적 14만 평방미터에 달하는 이곳에 전쟁이 가져다 올 참혹함 같은 걸 걱정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저 도시 전체에 흐르는 활기에 압도당한 사람들이 정신없이 뛰어다니고 있을 뿐이었다. 말단 병사에서 영주들에 이르기까지. 3월, 나고야에 도착하자마자 오쯔키가 병에 걸려 쓰러졌다. 불행이었지 만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지저분한 생활 을 감내하며 힘들게 지나온 여정이었다. 그것은 오쯔키가 미소만으로 이 겨내기엔 너무도 가혹했다. "조금만 참아. 곧 낫게 될 거야." 허겁지겁 의원을 찾아 진료했지만 그 다음이 더 큰 문제였다. 약값은 커녕 다음날 먹을 것도 없는 처지였다. 겐타로와 슌스케는 성 밑 공사장 에서 품팔이를 해 돈을 벌었다. 당장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것밖에 없 었다. 오쯔키를 진찰한 의원은 열병의 일종이라고 말했다. 그렇지만 병 이름 을 정확히 밝혀내진 못했다. 일본에서는 보기 힘든 병이라며 고개를 저 을 뿐이었다. 겐타로는 문득 오쯔키에게 다가왔던 그 남만인 선교사를 떠올렸다. 혹 시 그가 오쯔키에게 남만교 만이 아닌, 이상한 병까지 전한 것일까? 의 심이 들었지만 이제는 아무 소용도 없는 생각이었다. "전 괜찮아요." 병에 걸린 이후 오쯔키는 오히려 더 밝아진 모습이었다. 겐타로와 슌 스케 앞에서 늘 웃어 보였고 안 하던 농담까지 했다. 물론 겐타로는 알 고 있었다. 그것이 둘을 걱정시키지 않으려는 그녀의 눈물겨운 노력임을. 이런 와중에도 둘을 덮어오는, 짙은 먹구름과도 같은 불안이 있었다. 끝까지 쫓아와 오쯔키에게 복수하겠다고 말한 하치우에몬의 존재였다. 그가 과연 규슈까지 따라왔을까? 그리고 마침내 연약한 오쯔키를 덮칠 것인가? 겐타로의 머릿속은 복잡하기 그지없었다. 마침내 그 날이 오고야 말았다. 그날 일은 이후 겐타로에게 수없이 악 몽으로 나타났다. 그날 따라 오쯔키는 평소와 전혀 달랐다. 늘 누워 있던 병약한 몸이었 는데 이날 따라 기운을 차렸는지 아침부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품팔이에서 일찍 돌아온 겐타로를 기쁘게 맞았다. "어서 돌아오세요!" 마치 갓 결혼한 아내가 바깥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남편을 맞이하는 듯한 들뜬 목소리였다. 오쯔키의 미소를 본 겐타로가 잠시 말을 잃었다. 오늘따라 일찍 집으로 돌아가게 되자 겐타로는 조금 전까지 신이 났 다. 그런 겐타로를 보며 빙긋 웃던 슌스케의 얼굴이 잠시 스쳐 지나갔다. 슌스케는 뭔가 알아보겠다며, 오늘은 꽤 늦을 테니 절대 기다리지 말라 고 했다. "왜 그러세요?" "아, 아니. 아무 것도 아냐!" 오쯔키는 자리에 누워있으며 오히려 성큼 어른이 된 것 같았다. 15살 이란 나이가 워낙 성장이 빠른 시기이기도 했다. 원래부터 하얗던 피부 가 창백할 정도로 희고 부드럽게 보였다. 수척한 모습이 오히려 묘한 매 력을 더해주었다. 겐타로는 어째서 성주들이 저마다 어린 애첩을 두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웬일인지 몸이 가벼워졌어요. 이제 거의 나아가는 것 같아요." "그래? 그것 참 다행이구나." 겐타로도 가볍게 대답해 주었다. 손등을 들어 볼에 대보니 술에 취한 듯 화끈거렸다. "곧 나을 거야." 겐타로는 전에 의원이 한 말을 떠올렸다. 쉽게 나을 병이 아니라고 했 다. 치료법은 고사하고 원인조차 모르는 열병이라 나은 듯 보이면 다시 재발한다고 했다. 물론 겐타로는 오쯔키의 병이 낫기를 간절히 바랬다. 하지만 현실은 바램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특히 겐타로에게 현실은 늘 차가웠다. "와아! 오늘은 날씨도 참 좋죠?" 오쯔키가 하늘을 가리켰다. 일행이 묵고 있는 낡은 창고 위에도 푸른 봄 하늘은 눈부시도록 파랬다. 겐타로도 오랜만에 가슴을 펴고 활짝 웃 었다. "확실히 그렇군." 그런데 오쯔키 말에 대답한 것은 겐타로가 아니었다. 옆에서 불쑥 끼 여든 목소리. 그 속에는 얼음장같은 싸늘함이 있었다. "뭐, 뭐야!" "나는 하치우에몬." 가사笠, 일본식 삿갓을 쓴 무사. 긴 머리가 어깨까지 출렁이는 무사가 손을 들어 삿갓을 벗었다. "왜 왔는지는 알고 있겠지? 겐타로." "이 미친놈이!" 놀라움과 공포에 떨면서도 겐타로는 온몸을 던져 하치우에몬에게 달려 들었다. 그러나 한 걸음 채 떼기도 전에 섬광과 날카로운 바람소리가 한 번 지나갔다. 겐타로는 오른쪽 어깨에서 겨드랑이에 걸쳐 찌릿 하는 통 증을 느끼며 쓰러졌다. "죽여주마." 하치우에몬이 검을 천천히 머리 위로 치켜들었다. '제길! 이게 무사와 농민의 차이란 건가?' 겐타로는 죽음을 각오했다. 팔리지도 않을 싸구려 검을 여전히 허리에 차고 있었지만 이제는 쓸데도 없었다. 이미 당한 오른팔에서 진득한 피 가 흐르며 힘이 빠져나갔다. 꼼짝없이 죽을 수밖에 없었다. "그만둬요!" 다급한, 그러나 두려움이 묻어나지 않는 목소리가 허공을 갈랐다. 고개 를 돌려 쳐다보는 하치우에몬에게 오쯔키가 다가갔다. "제가! 제가 죽겠어요. 그럼 되잖아요? 다른 사람은 해치지 말아줘요!" "뭐?" 하치우에몬이 잠시 당황하는 빛을 보였다. 나루터에서 마주쳤을 때와 같이 오쯔키는 당당했다. 오쯔키의 잔잔한 눈동자에 하치우에몬의 피묻 은 검날이 비쳤다. "당신도 괴롭겠죠. 살아있는 동안은 늘 그렇듯 누군가를 베고 다녀야 할 몸이니까요. 지금 여기서 절 죽이고 조금이라도 편안해 지세요." 오쯔키 눈에 눈물이 맺혔다. "전 당신이 불쌍해서 견딜 수 없어요." "내가 불쌍하다고?" 하치우에몬의 검이 서서히 아래로 내려갔다. 그리고 조금 전까지 살기 에 차있던 그의 눈에 슬며시 광채가 감돌았다. "알겠다. 네가 원하는 대로 해 주지." "고마워요." 아래로 내려간 하치우에몬의 검날이 향한 곳으로 오쯔키가 사뿐히 걸 어갔다. 그런 오쯔키 얼굴에 가늘게 맺힌 미소를 보자 겐타로는 할 말을 잊었다. "오쯔키!" 겐타로는 피가 솟아오르는 어깨를 누른 채 오쯔키를 불렀다. "겐타로 님, 그 동안 고마웠어요." 오쯔키가 고개를 돌렸다. 창백한 얼굴과 눈물이 맺힌 눈, 검고 긴 머리 카락의 삼짇날 인형이 말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미안해요. 함께 있어달라 하고는... 오쯔키 먼저 갈게요. 슌스 케 님에게도 미안하다고 전해주세요." "오쯔키!" 겐타로가 벌떡 일어나 외쳤다. "이럴 수는 없어!" 그것은 겐타로가 납득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니었다. 오쯔키가 죽어서 자기가 목숨을 건지다니. 반대라면 오히려 납득할 수도 있었다. 피가 흐 르는 겐타로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원래부터 이렇게 되어야 했던 거예요. 그걸 다만 제 욕심으로, 살고 싶다는 욕심으로 여기까지 끌고 온 거예요." 오쯔키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유언은 그것으로 끝난 거냐?" 하치우에몬이 물었다. "예." 오쯔키가 하치우에몬을 향해 가슴을 폈다. "그럼 어서." 왼쪽 가슴을 찔러 한번에 끝내 달라는 말이었다. 두려움도 망설임도 없는 평안한 태도. 겐타로는 경건한 스님의 모습을 떠올렸다. 삶과 죽음 에 초연한 그런 태도는 겐타로가 흉내도 내지 못할 일이었다. 오쯔키는 여태까지 살아온 것을 욕심이라고 했다. 욕심이란 건 겐타로 가 가르쳐 준 것이다. 그렇지만 겐타로는 한번도 오쯔키가 살아있는 것, 살려고 노력하는 것을 욕심이라 하지 않았다. 어째서 오쯔키는 그것을 욕심이라 했을까? 겐타로는 여기서 죽고싶진 않았다. 살고 싶었다. 그러나 그런 만큼 오 쯔키도 살고 싶을 것이다. 그런데 오쯔키는 목숨을 내던지며 겐타로를 살려달라고 했다. 전에 겐타로가 목숨을 구해주었으니 그 답례일까? 아 니었다. 전에 겐타로는 다만 누구든 베려고 뛰쳐나갔다. 그러다 오쯔키와 만났던 것뿐이다. 그건 은혜도 뭐도 아니었다. 오쯔키의 지금 행동과 비 할 바가 아니다. 하치우에몬의 하얀 칼날과 오쯔키의 눈에 맺힌 눈물이 동시에 보였다. 겐타로는 '안돼!' 하고 마음속으로 수십 번을 외쳤다. 당장이라도 하치우 에몬을 쓰러뜨리고 오쯔키를 구해야 한다고 다시 수십 번을 외쳤다. 그 렇지만 다친 몸은 간사스러운 목숨에 대한 집착과 더불어 겐타로를 그 자리에서 꼼짝 못하게 했다. "하앗!" 하치우에몬이 기합을 넣으며 단칼에 오쯔키의 가슴을 찔렀을 때 오쯔 키 눈에서 눈물이 바닥에 떨어지며 반짝 빛났다. 부서진 그 눈물엔 조금 전까지 오쯔키가 말한 푸른 하늘이 맺혀있었다. 겐타로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안돼!" 겐타로가 절규하며 하치우에몬에게 돌진했다. 피에 젖은 손으로 검을 뽑아들며 오로지 하나만을 생각했다. 오쯔키를 이대로 죽게 해선 안 된 다. 그렇게 내버려둘 순 없다. 겐타로는 그 짧은 순간 오쯔키의 눈물에 대고 다짐했다. "방해하지 마!" 하치우에몬의 팔꿈치가 달려드는 겐타로를 향해 달아들었다. 아마 겐 타로 정도는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얕보지마!" 겐타로는 배에 그 팔꿈치가 파고드는 것을 보면서도 내버려두었다. 그 의 손에 아무렇게나 잡힌 검이 하치우에몬의 목을 노렸다. 배에 강한 통 증과 함께 구역질, 현기증이 닥쳐왔지만 겐타로는 전혀 굴하지 않았다. 설령 하치우에몬의 칼끝이 배를 찌르는 한이 있더라도 오쯔키만은 살리 고 싶었다. 그리고 그 순간 겐타로는 확실히 느꼈다. 오쯔키를... "좋아하고 있으니까!" 침과 땀, 그리고 피로 범벅이 된 겐타로는 비로소 목숨에 대한 욕심에 서 벗어날 수 있었다. 오쯔키를 좋아한다. 좋아하게 됐다. 단지 이 이유 면 충분했다. 죽음을 각오하고 달려드는 겐타로의 칼끝은 매서웠다. 겐타로를 무시 하고 오쯔키를 찌르면 하치우에몬도 죽는다. 겐타로는 다음 순간 하치우 에몬이 오쯔키를 향한 검끝을 돌려 자기를 찌를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 기만 하면 겐타로는 그 검날을 잡고 놓아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죽는 한 이 있더라도 오쯔키를 살리고 싶었다. 그렇게만 하면 분명 오쯔키는 도망갈 수 있다. 아니, 도망갈 것이다. 그리고 하치우에몬을 피해 어딘가에서 잘 살게 될 것이다. 분명히! 분명 히! 행복하게 웃고 있는 오쯔키의 미소가 눈에 선했다. 하지만 겐타로의 현실은 검날보다 차가웠다. 무슨 생각인지 하치우에몬은 검을 돌리지 않았다. 또한 겐타로의 검을 피하려고 몸을 젖히지도 않았다. 적어도 그렇게만 해준다면 오쯔키는 살 수 있었다. 하치우에몬은 자기 목에 날아드는 겐타로의 검을 받아들이며 그대로 오쯔키의 가슴에 검을 찔러 넣었다. 퍼억 하고 금속이 살을 베는 소리가 두 번 울렸다. 쫘악 하고 피가 솟 는 소리도 두 번 울렸다. "제길! 어째서?" 겐타로의 검은 하치우에몬의 목에, 하치우에몬의 검은 오쯔키의 가슴 에 각각 깊이 박혔다. 피에 젖은 검 두 개는 동시에 두 사람의 생명을 빨아 들였다. "어째서..." 가슴을 찔린 오쯔키의 까만 눈동자가 다시 하치우에몬의 눈과 마주쳤 다. 옆에서 목을 베였으면서도 하치우에몬은 여전히 차갑게 오쯔키를 쳐 다보고 있었다. "나도 이제..." 하치우에몬은 처음으로 희미한 미소를 보여주었다. 냉혹한 무사가 오 쯔키에게 부드럽게 말했다. "싫어졌어. 누군가를... 죽이는 게." 말을 마친 하치우에몬의 몸이 무너졌다. 오쯔키가 눈에 머금은 마지막 눈물을 바닥에 떨구며 미소지은 것은 그 다음이었다. 오쯔키의 호흡도 조용히 멎었다. "으아아!" 겐타로는 통곡했다. 검을 놓고 그 자리에 주저앉은 그는 하늘을 올려 다보며 울었다. "끝났어! 이젠 끝났어. 나는..." 그날 겐타로는 처음으로 사람을 베었다. 처음에 겐타로가 원했던 것처 럼. 그렇지만 겐타로는 그날 모든 걸 잃었다. 슌스케가 한달 후 벌어질 조선에서의 싸움에 추가로 병력모집이 있다 는 기쁜 소식을 가져왔다. 그러나 이제 그런 건 아무 의미도 없었다. 겐 타로와 오쯔키의 푸른 하늘은 그날 이후 더 이상 빛나지 못했다. 오쯔키 가 떨어뜨린 눈물 몇 방울만이 겐타로의 기억 속에 영원히 남았다. 결국 겐타로는 그 해에 조선에 가지 않았다. 슌스케만을 보낸 채로. * 조선의 봄꽃이-안위 커플이나 일본의 오쯔키-겐타로 커플이 똑같이 플라토닉에 치우친 감이 있습니다. 차이를 두려고 하는데 어떻게 해야 좋을까요? 귀여운 혁명가 봄꽃이를 물레방앗간에 보내는 게 좋을까요, 아니면 청 순가련하면서도 심지가 굳은 오쯔키(달님이)를 갈대밭에 보내는 게 나을 까요? -_-;; 아니면 그게 더 이상할까요? 의견을 내주시기 바랍니다. 남 자 둘을 보내라고 하지는 마시고..--;;; 역사전쟁소설 // 남해 // 2권 copyright (C) 2001 김경진 안병도 신재호(필명) 공저 업로드 김경진 (전쟁소설 데프콘 1, 2, 3부, 동해, 남북, 판타지 하늘길잡이 공동저자) * 고칠 점이 있다고 생각하시면 언제든 18번 오발탄 게시판에 올리시 거나, 저나 안병도 님께 메일로 의견을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조선 ; 김경진 amraam07@hitel.net 일본 ; 안병도 031038@hitel.net * 메일로 일본 다완에 대해 의견 주신 분께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최 근 이도다완 복원품에 대한 설명 몇 가지를 보면, '남해'에 나온 설명이 그다지 잘못됐다고 여겨지지는 않습니다. 임진왜란 당시와 그 직전 일본 에서 유행했던 다완이 소박했던 것은 분명하며, 그것이 과연 조선의 (막) 사발 수준이었는가 하는 문제는 아직은 명확히 밝혀지지 않은 편입니다. 일본 다도 초기에 잡기나 식기에서 전용된 다기가 있다는 리포트 내용을 다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지난 편에서 분청사기가 바로 막사발이라는 뜻이 아니라, 분청사기가 소멸된 다음의 후계 제품군 중에 막사발이 있다는 뜻입니다. 제작방식은 분청사기와 막사발 종류가 비슷합니다. 막사발은 질그릇 종류와는 관계 가 오히려 먼 편입니다. 5. 호랑이 사냥 (1) = 경상우수영 좌선, 우치적 "자네, 이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 아나?" 우치적은 김탁에게 말을 붙이면서도 활쏘기를 멈추지 않았다. 아직도 살아남은 왜군들은 방패판이 거의 다 부서져나간 배에서 저항을 멈추지 않았다. 방금 온몸에 피 칠을 한 채 창을 흔들면서 고함을 지르던 왜병 하나가 화살에 맞아 긴 비명을 지르며 물에 떨어졌다. 우치적이 보기에 사실 저 왜병들은 이제 조선수군에 저항할 방법은 없 었다. 다만 죽으려고 스스로 몸을 드러낼 뿐이었다. 이제 그만 도망쳐주 면 좋을 텐데, 거의 끝이 오고 있었지만 아직 살아남아 죽음을 기다리는 왜병들은 많았다. 노 젓는 수부들이 분명한데도 칼을 들고 설치는 자들도 많았다. 그런 배에는 어김없이 묵직한 대장군전이 날아간 다음 수많은 세전이 부서진 갑판을 휩쓸어버렸다. "통제사를 대신해 죽을 자리입니다." "그래. 잘 알고 있었군. 다행이야." 우치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김탁이 날린 화살이 정확히 왜병의 목을 꿰뚫었다. 담담하게 왜병이 쓰러지는 모습을 바라보던 김탁이 잠시 눈치를 보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원 통제사의 일은 안된 일입니다. 하지만 사또께서도 너무 마음에 두 지 마십시오. 그때는 어쩔 도리가 없지 않았습니까?" 우치적은 갑자기 힘이 빠져 활을 내렸다. 저 멀리 반쯤 가라앉은 왜선 에서 칼을 휘두르며 고함을 지르는 자가 다음 표적이었다. 그러나 다른 수군들이 쏜 화살이 그 왜병의 배에 꽂혔고, 기나 긴 비명 속에서 그 왜 병은 천천히 죽어갔다. "난 그때 죽었어야 했어. 비겁하게 살아 남았지." "그렇지 않습니다. 저라도 제대로 싸우다 죽을 자리를 택했을 겁니다. 바로 이 자리처럼 말입니다." 김탁이 단호하게 부정했다. 그러나 우치적은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오 랫동안 우치적을 짓누른 단 하나의 오점. 두 달 전, 바로 그날 새벽의 일 이었다. 대장을 버리고 도망친 자. 누가 봐도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그리고 우치적은 그 어떤 변명도 하 지 않았다. 김탁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사또, 고종후를 아십니까? 의병장 고경명의 큰아들이며, 복수의병장이 되어 다음해 진주성에서 전사한 의병장 말입니다." "그래. 유팽로가 난전 중에 고경명에게 했다는 말은 들었네. 다른 사람 들은 다 도망갔는데 왜 피하지 않는지 묻는 고경명 말에, '제가 어찌 대 장을 버리고 구차하게 살고자 하겠습니까?'라고 했다더군." 우치적의 대답에 김탁이 허허 웃었다. 우치적을 위로해주려 한 말이 오히려 상처만 준 꼴이었다. 우치적은 고종후가 쓴 글을 읽었을 뿐만 아 니라 아예 외우고 있었다. "군사가 무너지자 그 분들은 끝까지 남아 목숨을 바쳤는데 부끄러운 이 몸은 홀로 목숨을 부지했네. 못 가에 봄풀이 나면 연꽃의 꿈은 누가 꿀 것이요, 비바람 치는 한밤중에 옛 약속은 어디서 찾으리요. 날이 가고 달이 갈수록 간장은 더더욱 무너지고, 그 장한 모습은 지금도 눈앞에 선 하네. 저승으로 따라가고 싶어도 지금은 어쩔 수 없이 말하고 밥을 먹으 니, 나를 어찌 사람이라 하오리까, 어찌 사람이라 하오리까?" 우치적이 활을 든 손이 급기야 축 늘어졌다. 그리고 눈시울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고종후는 그가 쓴 글처럼 결국 다음해에 진주성에서 전사했 다. 의병장 고경명은 임진년 7월 10일 벌어진 1차 금산성 전투에서 싸우다 죽었다. 금산성 북문 앞에 진을 친 방어사 곽영의 관군이 먼저 싸우지도 않고 도망치자 동문을 맹렬하게 공격하던 의병도 한꺼번에 무너져버렸 다. 용인전투나 칠천량해전 등 조선군이 어이없이 패배한 다른 전투와 하나도 다를 바 없이 엄청난 공포가 의병들을 엄습했고, 의병들이 정신 을 차린 것은 십리 넘게 달려간 다음이었다. 그러나 금산 전투는 관군이 당한 패배와 전혀 달랐다. 의병장 고경명 은 쇄도하는 왜병들을 맞아 도망가지 않고 끝까지 남아 싸우다 죽었다. 작은아들 고인후는 군사를 수습하던 도중에 왜군들과 싸우다 죽었고, 고 경명 막하에서 종사관을 맡았던 유팽로와 안영은 대장을 호위하다 함께 죽었다. 겁에 질린 관군이 대장부터 도망가는 모습을 보인 것과는 전혀 달랐다. 이들은 관리도 아니고 다만 고향에 은거해 있던 서생이었다. 우치적처 럼 무관의 소임을 받은 자도 아니었다. 그것이 우치적의 마음을 더욱 슬 프게 만들었다. "유팽로는 도망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뒤에 쳐진 대장을 찾 아 되돌아갔지." 우치적은 새로이 적개심이 솟아올랐는지 활을 힘차게 잡아당겼다. 좌 선을 향해 뭐라고 소리를 지르던 왜군이 미간에 화살을 맞고 고꾸라졌 다. 금산전투의 난전 중에 유팽로는 대장이 어디 있는지 자기 집 종에게 물었다. 종은 주인이 대장을 찾아 사지로 뛰어들까봐 고경명이 이미 적 지에서 벗어났다고 거짓으로 고했다. 그러나 잠시 후 적진에서 고경명을 발견한 유팽로가 말을 몰아 적진으로 뛰어들려 했고, 종이 울면서 말고 삐를 잡고 말렸다. 그러자 유팽로가 종을 칼로 내리치려고 했고, 그제야 종은 고삐를 놓고 말았다. "고종후는 죽을 장소를 제대로 찾은 셈이었습니다. 허탈하게 패할 전 투보다는, 그래도 제대로 싸우다 죽을 곳이 무장으로서는 제격이지요. 우 리도 그렇지 않습니까?" 김탁은 여전히 활달하게 시위를 당겼다. 궁사로서 아주 뛰어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제몫은 충분히 한다고 볼 수 있었다. "나는 오늘 싸움이 시작되면 단번에 죽을 줄 알았어. 그런데 아직 살 아있군. 젠장." 우치적이 투덜거렸다. 예상했던 것처럼 싸움이 시작되자마자 좌선이 왜군들에게 점령당했으면 지금처럼 이렇게 피곤하게 활줄을 당길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집중력이 떨어졌는지 화살이 엉뚱한 곳으로 날아가 물에 처박혔다. 물 살은 여전히 거센 역류였다. "잘하면 살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걸 믿나?" 우치적이 퉁명스럽게 되물었다. 단순한 활쏘기에는 질린 참이었다. 이 제 살아있는 왜병은 거의 없고, 이쪽을 향해 소리를 지르는 왜병은 부상 자들에 불과했다. 불타는 왜선에서 왜병 하나가 이쪽을 노려보며 악착같 이 일어서고 있었다. 갑옷에 박힌 화살은 3발이 넘었고, 온몸이 피투성이 였다. 가슴에 꽂힌 네 번째 화살이 그를 영원히 잠들게 했다. "하하! 아닙니다. 하지만 저것들을 보십시오. 여기 왜선들이 이렇게 박 살나는데도 저 뒤의 왜선들은 그저 쳐다보기만 합니다." "저놈들. 의병들을 사지에 몰아넣고 구경만 하는 우리 관군 같군, 그 래." 우치적이 씁쓸하게 웃었다. 싸울 때마다 항상 이기는 관군은 유일하게 수군뿐이었다. 그래서 수군은 백성이나 의병들뿐만 아니라 다른 관군들 앞에서도 콧대가 높았다. 그러나 수군은 단 한번의 패배에서 여지없이 관군의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고 말았다.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전군이 붕괴되고 군사들이 전면 도주하는 모습, 특히 고급 지휘관들일수록 먼저 도주하는 버릇은 전쟁 6 년째인데도 아직 고치지 못했다. 2차 금산 전투는 의병장 조헌의 부대에 의해 치러졌다. 충청감사 윤선 각은 조헌이 근왕을 위해 북진한 다음 왕에게 감사의 잘못을 지적할까봐 두려워, 조헌에게 먼저 금산의 적을 함께 치자고 권유했다. 그러나 이것 은 속임수였다. 윤선각은 의병들을 휘하에 두기 위해 의병의 가족들을 잡아들이는 등 조헌군에게 압박을 가했고, 전라 순찰사 권율의 관군은 오지도 않았다. 결국 이번에도 역시 관군은 구경만 했고, 조헌과 승장 영 규 등 의병과 승병 천여 명은 전멸했다. "그런데 감목관 자네, 통제사 대신 죽게 된 것이 섭섭하지 않나? 적선 은 아직도 엄청나게 많다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어차피 수군은 같이 죽고 같이 삽니다." 김탁은 '물론 장대에 서 있는 사람은 조금 빨리 죽겠지만'이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우치적도 왜군 함대 하나를 물리쳤지만 여기서 싸우는 조 선수군들이 살아남을 거라는 희망은 애초에 갖지 않았다. 그래서 김탁도 가볍게 따라왔을 것이다. 같은 배에 탄 수군들은 배가 불타거나 적에게 나포 당할 경우 대부분 은 죽은목숨으로 봐도 된다. 그러나 이길 경우에는 전사자가 극히 적다 는 것이 화포전에 주로 의존하는 조선수군의 특징이었다. 다만 장대에 오른 사람은 최근 죽을 가능성이 엄청나게 높아졌다. 보 성군수 안국홍과 평산포만호 김축은 그렇게 죽었고, 조금 전에 이 장대 의 방패판이 그렇게 부서진 것도 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우치적이 웃자 김탁이 멋쩍게 따라 웃었다. 그러다가 시선이 장대 구 석으로 쏠렸다. "아! 송 군관이 흉갑을 남겨두고 갔습니다. 이걸 하나 더 껴입으시지 요." 김탁이 주워 우치적에게 건넨 흉갑은 일반 수졸들이 입는 것과 같았 다. 겉감은 검은색을 물들인 무명이고 안에는 얇은 금속판 여러 장, 또는 두꺼운 무쇠 통판을 끼워 넣은 조끼였다. "효과가 있었나보군." 우치적이 흉갑을 들어 살폈다. 총 구멍이 두 개나 나 있었다. 그러나 두꺼운 참나무 방패판을 뚫고 들어온 총탄이 흉갑마저 뚫지는 못한 것 같았다. 그리고 송희립이 흉갑을 벗어놓고 간 것은 뭔가 경고의 의미가 있는 것 같았다. 지금은 이 장대에 날아오는 조총탄이 거의 없지만 아까는 방 패판이 하나도 남김없이 부서졌다. 만약 장대가 다시 집중사격을 당한다 면, 그건 바로 우치적의 최후를 뜻했다. "저길 보십시오. 송 군관은 두 개나 껴입었나 봅니다." 김탁의 말에 우치적이 방패판 밖으로 슬쩍 고개를 내밀었다. 분명히 흉갑을 여기 벗어두고 갔는데도 송희립은 김탁의 말처럼 여전히 흉갑을 입고 있었다. 이 마당에 멋을 따질 필요는 없었다. 전투에 이기는 것, 그 리고 살아남는 것이 그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그렇다고 여기서 살 수 있 을 것 같지는 않았지만. "뭐, 저도 만만치 않습니다만." 김탁이 슬쩍 두정갑의 옷깃을 열어 우치적에게 보여주었다. 두정갑은 소매와 무릎까지 덮은 두루마기 모양의 갑옷 안에 금속이나 가죽 조각을 넣고 놋쇠못으로 고정시킨 형태의 갑옷이다. 그러니 포형袍形 갑옷 겉에 는 납작한 놋쇠못 머리만 수십 개가 보인다. 김탁의 갑옷 안에는 금속조각 외에도 가죽이 덧붙여져 있었다. 그리고 김탁은 두정갑 안에 가죽과 쇠사슬을 결합해 만든 경번갑을 입고 있었 다. 그리고 그 안에는 두툼한 내갑의였다. 우치적이 혀를 내둘렀다. "자네, 춥지는 않겠구먼." "대신 좀 무겁지요. 저는 흉갑이 필요 없습니다." 우치적이 빙긋 웃더니 장대 아래를 향해 외쳤다. "여보게, 무상! 흉갑 한 개만 가져오게." 잠시 후에 김돌손이 두툼한 흉갑 한 벌을 바치면서 씨익 웃고 갔다. 우치적도 그저 웃을 뿐이었다. 우치적은 그 흉갑을 말없이 김탁에게 건 네주고 자기도 하나를 껴입었다. 쉽게 죽을 수는 없었다. 적을 하나라도 더 많이 죽이고 죽어야 했다. 며칠 전, 아직 벽파진에 있을 때였다. 우치적은 통제사에게 전라우수사 김억추는 분명히 통제사를 견제하기 위해 왔다고 말했다. 우치적 스스로 도 통제사를 견제하기 위해 순천부사가 된 거라고 솔직히 말한 다음이었 다. 옆에서 거제현령 안위가 허탈하게 웃고 있었다. "그렇겠지. 나는 영상 대감의 신세를 진 적이 많으니까. 사람들이 날 동인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 그러나 우치적은 알고 있었다. 통제사를 동인이라고 하는 사람 중에 백성은 없다는 것을. 권력에 민감한 왕과 조정 중신들이나 따지는 것이 당파 분류였다. "하아! 치졸한 권모술수, 아부, 당쟁. 진짜 적이 누군지 모를 정도로 막 나가는 정권다툼. 나는 그런 게 싫네. 다른 무관들도 대부분 그런 정치적 인 것은 체질적으로 싫어하잖나?" "하지만 통상은 그걸 신경 써서라도 이 싸움에서 이기고 더 큰 싸움을 위해서라도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통상의 취향이나 자존심이 아닙니다. 통상만을 믿고 따르는 백성들이 있지 않습니까? 우 리는 이들 백성들을 위해 싸워야 합니다." 이어지는 안위의 말에 우치적은 '중요한 것은 임금에게 충성을 바치기 위해서도 아닙니다'라고 덧붙이고 싶었다. 그러나 우치적은 군대의 존재 가치를 최근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열 몇 척에 불과한 조선수군을 아직 도 믿고 따르는 백성들을 보고 우치적은 가슴이 미어터지는 것 같았다. "통상은 무관 중에서 품계가 가장 높은 분입니다. 그리고 백성들로부 터 가장 신망을 두텁게 받은 분입니다. 아십니까?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안위의 말이 좀 이상하다고 우치적이 느끼긴 했다. 그러나 안위의 말 은 얼핏 맞는 것 같았다. 병권을 쥔 도원수나 도체찰사, 병조판서와 비변 사 당상들 모두 다 문관들이었다. 감사 이상은 당연히 문관이고, 무관은 병마절도사 이상이 되는 것은 포기해야 했다. 최근에는 병마절도사도 문 관 출신이 임명된 경우가 많았다. "거제원! 그건 무장의 길이 아니네. 그리고 만약 그렇게 하면 장졸들이 따를지 알 수 없겠고. 왕명을 받아 군사들을 거느리는 무장이 할 도리가 아냐." 통제사의 말에 안위가 우치적을 흘낏 보며 눈을 빛냈다. 그러더니 낮 은 목소리로 말했다. 마치 우치적이 이 자리에 없는 듯한 태도였다. "수군 장졸들과 백성은 통상을 따릅니다. 분명합니다! 그들이 누구 덕 택에 지금까지 살아남았습니까?" 안위의 말에는 자신감이 넘쳐흘렀다. 우치적은 지금 이게 무슨 소린가 다시 찬찬히 곱씹어봤다. 그 다음에는 안색이 새파래졌다. 그러나 이제는 우치적이 그런 걱정을 할 필요는 없었다. 죽으면 그걸 로 모든 것이 끝이기 때문이다. 우치적은 살겠다는 생각을 버린 지 오래 였다. = 와키자카군 어립선, 히데미쓰 - 둥, 둥, 두둥, 딱! - 땡! 땡! 때앵! 북과 종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동시에 와키자카의 어립선에서 올라간 지휘용 깃발이 대장의 군령을 사방에 전했다. 전투진형을 변경하는 포진 군 령이었다. 해협 입구를 채운 와키자카군이 드디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부장 이마이 히데미쓰今井秀光가 주변의 움직임을 찬 찬히 지켜보았다. 와키자카군의 군기에는 붉은 색 바탕에 하얀 원 두 개가 교차된 문양이 위아래로 박혀 있었다. 배들이 움직이자 바람을 받은 깃발들이 더욱 힘차게 펄럭였다. 군선 63척에 탄 와키자카군 병력 3천 9백여 명이 일제히 움직이 고 있었다. "와아! 와아!" 병사들이 연신 위로 창날을 찔러 올렸다. 마치 하늘이라도 찌르겠다는 태 세였다. 아시가루 이하 병사들은 일률적으로 와키자카군의 군기를 작게 만 들어 등에 꽂고 있었다. 병사들은 화려한 군기 속에 숨어있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잔뜩 흥분해 떠들썩한 모습이 마치 마을 축제에 나가는 모습과 같 았다. 반면 무사들은 병사들과 달리 침착을 유지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역시 무사라는 관록이 느껴지는 자세였다. 그러나 무사들도 화려함 자체에는 전 혀 거리낌이 없었다. 병사들과 달리 무사들은 저마다 개성적인 상징을 단 깃발을 등에 꽂았다. 그밖에도 주군인 야스하루에게 금방 눈에 뜨일 수 있 도록 온갖 치장은 다하고 있었다. 앞서 나간 구루지마 해적들이 해적이란 특성상 거칠고 소박함을 강조한 반면, 정규군인 와키자카군은 온 깃발에 붉 은 색과 하얀 색을 잔뜩 써서 보는 사람 눈이 아플 지경이었다. "움직임이 좋군." 어립선인 아다케후네의 층루에 올라있던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한참만에 입을 열었다. 넉넉히 십 여명이 서 있을 수 있는 넓은 층루였다. 모든 배의 움직임이 한눈에 들어왔다. 단 한 척이라도 속도가 느려 처진다거나 대열을 흐트러뜨리면 주군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당장에 불호령을 내렸을 것이다. 이 작은 칭찬에 긴장한 얼굴로 서 있던 이마이 히데미쓰의 얼굴이 약간 밝 아졌다. "전군을 맡은 이이츠카와 중군을 맡은 히요시가 특히 눈에 뜨인다. 잘해 주고 있어." "예. 부대를 맡은 지 얼마 안돼서 걱정했는데 잘 이끌고 있는 것 같습니 다." 히데미쓰가 안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이번 출전에 앞서 대장 야스하루 가 가장 걱정했던 문제가 의외로 쉽게 풀렸던 것이다. 활기찬 움직임을 보이며 약간 왼쪽으로 나가고 있는 선봉의 사이토 이이 츠카齊藤飯塚 함대 12척과 앞으로 나가며 오른쪽으로 향하는 중군 니시하라 히요시西原日吉 함대 18척은 절도 있는 움직임을 보여주고 있었다. 히데미 쓰 눈에도 믿음직스러웠다. 그 두 사람은 이제 겨우 20살을 넘긴 청년무장들이었다. 패기는 넘치지만 전장에서의 경험이 부족했다. 함대지휘를 얼마나 능숙하게 해 줄지가 걱정 이었는데 아직까지는 의외로 잘 해내고 있었다. "포진이 끝나면 잠시 그 자리에서 대기하도록." "예." "내 명령이 있을 때까지는 앞으로 나가거나 적을 공격하는 것을 엄금한 다. 어기는 자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베겠다." "알겠습니다." 추상같은 명령에 히데미쓰는 몇 번이나 야스하루에게 고개를 숙여 보였 다. 곧 군령을 전하는 깃발과 함께 각 부대 대장에게 전령들이 파견됐다. 어 립선 주위에서 대기하던 작은 고바야를 타고 이리저리 흩어지는 전령들 움 직임이 꼭 벌집을 떠나는 꿀벌들 같았다. "그냥 놓아두어도 되겠습니까? 주군." "뭘 말이냐? 히데미쓰" "구루지마군 말입니다. 급한 일이 생기면 구루지마군을 구원하겠다고 총 대장 다카도라 님에게 약속하시지 않았습니까? 안타깝지만 지금은 약속을 어긴 셈입니다. 특히 미치후사 님의 전사와 그 수급의 건에 대해서는 다카 도라 님이 매우 노하셨다고 합니다." 히데미쓰는 구루지마 미치후사가 목이 잘려 조선 대장선의 돛대에 매달린 사건을 단지 '수급의 건' 이라 표현했다. 아군의 사기에 관련된 사항이라 극 히 삼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야스하루는 그 일에 대해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내 나름대로 생각이 있어 하는 일이다." "그냥 넘어갈 수는 없을 겁니다. 어쩌면 군감이 오사카에 보고해 나중에 문책을 받으실 지도..." "까짓 거. 무시해버려!" "주군!" 야스하루 입에서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히데미쓰는 다만 놀라 서 눈을 크게 뜰뿐이었다. "어쨌든 이 싸움에서 이기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내 덕택에 이기고 나 면 제 아무리 참새같이 입을 놀려봐야 별 수 없을 거다." 무공으로 출세한 사람답게 야스하루에게는 무공만이 모든 것에 앞서는 요 소였다. 자기 함대의 포진과 움직임만을 살피는 야스하루의 눈을 본 히데미 쓰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히데미쓰 눈에는 지금 처참한 최후를 마치고 있 는 구루지마군의 모습이 저 앞에 비쳤다. 이길 가망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악착같이 싸우고 있었다. 묵직하게 울 리는 조선군 화포에 맞서 간헐적으로 가늘게 울리는 철포 소리가 꼭 숨넘어 가기 직전의 비명처럼 들렸다. 짐승이 내는 듯한 그런 비명을 들으면서도 와키자카 함대는 조용히 그 뒤에 대기하고 있었다. 잠시동안 이뤄졌던 구루지마군 패잔병에 대한 구조활동도 중단했다. 지금 은 도저히 같은 편이라고 볼 수 없는 차가운 반응뿐이었다. 어서 죽어버리 라는 식의 차가운 눈초리만이 구루지마군의 등에 꽂혔다. "앞이 정리되고 나면 공격한다." 그리고 이런 병사들의 시선 뒤에는 대장인 야스하루의 태도가 있었다. 형 식은 연합함대지만 결국은 각자 싸우는 단일함대가 모인 것에 불과했다. 아 군이긴 해도 서로 전공을 노리는 경쟁자였다. 이미 패배한 구루지마군을 돕 기 위해 와키자카군이 스스로 진열을 흩뜨릴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히데미쓰, 조선 호랑이에 대해 알고 있나?" "예? 무슨 말씀입니까? 야스하루에게서 전혀 엉뚱한 이야기가 나오자 히데미쓰가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는 포진이 끝난 함대로부터 눈을 뗀 야스하루의 얼굴이 있었다. "조선 호랑이는 말이다. 날렵하고도 강하기가 말로 다할 수 없을 정도라 고 한다. 자기 몸보다 훨씬 큰 황소를 죽여서 담 넘어 물고 가는 것은 보통 이고, 가끔은 사람도 물고 간다더군." "언젠가 조선인 포로에게 이야기를 시키시더니, 그 때 들으신 겁니까?" "그래. 재미있는 이야기 아니냐?" 야스하루가 너털웃음을 터뜨리자 히데미쓰가 긴장했다. 중요한 이야기가 다른 일화를 통해 주군에게서 전달되려는 순간이었다. 일본무장들은 이야기꾼이라 불리는 사람들을 데리고 다니는 경우가 많았 다. 무장들은 그들을 통해 옛날 고사라든가 민담 등을 듣고 즐겼다. 글을 모 르고 학문이 옅은 무장들에게 이것이 오락도 되고 더불어 교양을 쌓는 공부 가 되었다. "조선 호랑이는 상처를 입힌 다음 여럿이 창칼을 들고 한군데 몰아넣어도 죽는 그 순간까지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야 호랑이니까요. 고양이나 개처럼 죽는소리를 내며 목숨을 구걸하지 야 않겠지요." 그렇게 말한 히데미쓰도 살아있는 호랑이를 본 적은 없었다. 일본에는 호 랑이가 살지 않는다. "지금 저기 좁은 물길에서 날뛰는 이순신을 봐라. 꼭 그런 조선 호랑이 같지 않나?" "상처 입었지만 용감히 계속 물어뜯는다는 점에서는 같군요." "그래. 조선수군 자체는 칠천량에서 이미 중상을 입었지만 역시 이순신이 다. 호락호락하지는 않지." "그럼 그 이빨에 구루지마군이 물려죽은 꼴이 되는군요." "그래. 가장 큰 피해자가 구루지마 해적이지. 당주 형제가 나란히 죽었으 니. 이제는 대를 잇는 것도 힘에 겨울 거야." "구루지마 성에 아들을 남겨두고 왔다고 들었습니다. 어떻게든 이어나가 겠지요." 히데미쓰가 그렇게 말했지만 구루지마군은 주요 무장들이 완전 전멸했다. 제대로 가문이 재건이나 될 수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히데미쓰는 전투를 앞둔 주군에게 그런 말을 할 수는 없었다.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따지고 보면 우리도 마찬가지야." 야스하루가 순간 침울한 표정을 짓자 히데미쓰가 아차 했다. 히데미쓰도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주군은 방금 한산도에서 이순신에게 당한 패배를 떠 올린 것이다. 물론 단순히 '패배'라고만 말해서는 도저히 제대로 표현할 수 없었다. 살 아 돌아간 배가 몇 척 없었다. 야스하루의 갑옷이 과녁판 취급을 당할 정도 로 화살이 연달아 날아와 꽂혔고 근습들이 주군 대신 화살에 맞고 죽어갔 다. 휘하에 거느리던 용사들도 대부분 비참한 최후를 마쳤다. 용인전투에서 5만의 조선군을 상대로 돌격해 좌충우돌하던 용사 와키자카 사베에脇板左兵衛와 와타나베 시치자에몬渡邊七左衛門은 전사했다. 제대로 싸우다가 죽었으면 그나마 무용이라도 자랑하겠는데, 그 패전은 도저히 말 하기가 부끄러울 정도였다. 싸울 때마다 절륜한 무용이 돋보이며 항상 적진 깊숙이 돌진했던 마나베 사바고토眞鍋左馬允는 더욱 비참했다. 간신히 전장을 탈출해 아다케후네를 한산도에 대고 상륙했으나 추격해온 조선함대가 배를 불태우자 사바고토는 할복자살하고 말았다. 간신히 한산도에 상륙한 생존병 400여 명은 며칠 동안 솔잎과 해초를 먹 으며 연명했다. 그러다가 뗏목을 만들어 몇 명씩 무리 지어 거제도로 탈출 해서 김해로 간신히 귀환했다. 매 순간마다 구사일생이었다. "치욕이었지요." 히데미쓰가 치를 떨었다. 그도 그때 탈출한 생존자 가운데 한 명이었다. 억지로 허기진 뱃속에 넣으려고 씹던 솔잎과 해초 맛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었다. 주위에서 침묵을 지키는 무장 몇 명도 인상을 찌푸렸다. 이들 역시 그때의 해초 맛을 평생 기억할 것이다. "구루지마군 후미 시라카와 함대 붕괴!" 마지막으로 안간힘을 쓰던 구루지마군의 조직적인 저항이 드디어 무너졌 다. 단단하던 대열이 성난 호랑이 발톱에 할퀸 짐승처럼 산산이 찢겨나갔다. 하얀 삼나무판이 살점처럼 부서져 공중에 흩날리고 붉은 깃발이 핏방울처럼 흐르며 물위를 빨갛게 물들였다. 울부짖음을 흘리며 죽어 가는 병사들은 저 마다 눈을 하늘로 치켜 떴다. 지옥이 따로 없었다. "조선 호랑이를 잘못 건드린 거야. 무식하게 창과 칼로 정면승부만 하려 고 하니까 그렇지." 야스하루가 혀를 쯧쯧 하고 찼다. "주군께선 어떤 방법을 쓰실 생각입니까?" 전체 포진을 힐끔 쳐다본 히데미쓰가 물었다. 야스하루가 지시한 포진은 앞에 있는 전군과 중군이 양 날개가 되어 전개한 뒤에 본대와 후군이 약간 의 거리를 두고 넓게 부채처럼 펼친 진형이었다. 그것만으로 히데미쓰는 주 군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다. "호랑이 사냥법이다." "호랑이 사냥이라니요?" 역시 아까 이야기가 계속되었다. 히데미쓰는 주군의 말에 주의를 기울였 다. 언제나 그렇듯 해답은 이야기 속에 있었다. "가토 기요마사 님이 부산포에서 조선 호랑이를 잡았다는 사실은 알겠지? 어떻게 잡았는지도 들었느냐?" "예. 그야 용맹한 기요마사 님이 자랑하는 창술로 단번에 호랑이의 목을 찌르니 호랑이가 그만..." "거짓말이야." "그건 또 무슨 말씀입니까?" 야스하루가 단언하자 히데미쓰가 말을 약간 더듬었다. 가토 기요마사를 맹장이 아니라고 부를 사람은 일본 땅에는 없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었 다. 그러나 야스하루는 단 한 마디로 일축해버린 것이다. "기요마사 님이 그때 호랑이를 잡은 건 사실이지만 방법이 틀리단 말이 다. 그때 기요마사 님은 창과 칼을 든 주위 부하들이 호랑이를 압박해 움직 이지 못하게 하자 철포로 쏴서 잡은 것이 진실이다." "허! 그랬습니까?" 부산에서 왜군 몇 명을 호랑이가 물어간 적이 있다고 했다. 그때 기요마 사가 호랑이 사냥에 나섰고, 함경도에 진공한 다음에도 틈만 나면 호랑이 사냥을 했다고 가토 기요마사군의 병사들은 시간 날 때마다 자랑스레 떠버 리기도 했다. "저 날뛰는 조선호랑이를 잡는 방법도 똑같지. 상처 입은 채 발악하는 놈 은 우선 네 발을 묶어 놔야 해. 그 다음에 정수리를 향해 한방 쏴주는 거야. 그럼 끝이다." "간단하군요." 히데미쓰가 머리를 굴렸다. 그러나 주군의 말이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 는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출전 전날 주요 무장들을 물리친 야스하루는 사이토 이이츠카만을 불러들여 작전을 한동안 설명했다. 어떤 작전을 쓸지 는 부장인 히데미쓰도 알지 못했다. "그런데 이게 말처럼 간단한 일이 아니다." 야스하루가 답답하다는 듯 지휘봉을 들어 멀리 내려다보이는 울돌목을 가 리켰다. 기세를 올린 조선수군 판옥선들이 반쯤 부서진 배에 남은 구루지마 군을 닥치는 대로 소탕하고 있었다. 지휘자와 사기를 모두 잃은 구루지마군 은 거의 일방적으로 도살당했다. "우선은 저 패배한 아군의 꼬락서니다. 사기만 떨어뜨리는 저들이 모두 사라져줘야 뭔가 해볼 수가 있어." "참으로 안된 일입니다." 차라리 뒤로 물러서거나 도망치기라도 한다면 좋으련만, 구루지마 해적들 은 그야말로 악착같이 싸움을 계속했다. 최후의 배 한 척, 최후의 한 사람이 남을 때까지 싸울 작정인 것 같았다. 히데미쓰의 목소리에 자꾸만 동정심이 섞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리고 우리편의 문제는 바로 저기! 몰이꾼들이야!" 야스하루의 지휘봉이 이번에는 전군과 중군의 선두를 향했다. "두 사람은 아직 혈기를 주체하지 못할 나이다. 기량은 있다만 경험이 없 다. 이들이 호랑이 발을 제대로 묶지 못하면 사냥은 실패로 끝나고 만다. 요 는 저 신참들의 능력이 어느 정도냐는 거야." 유능하고 관록 있는 무장들을 한산도에서 모두 잃은 야스하루의 문중에는 사람이 부족했다. 야스하루는 어쩔 수 없이 젊은 청년무장을 뽑아 써야 했 다. 어쩐지 마음이 놓이지 않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다. "잘 해낼 겁니다." 히데미쓰는 부장의 중요한 임무 가운데 하나를 떠올렸다. 그건 바로 대장 을 안심시키는 일이었다. 그런 내심을 알아챘는지 야스하루는 그 말을 듣고 옅게 웃었다. "뒤에 있는 나카가와 히데나리中川秀成 님에게 후미를! 후군 가와무라 노 부아키川村信明는 매복진형을!" "알겠습니다!" 야스하루가 다시 지시를 내렸다. 히데미쓰는 다시 휘하부대에 명을 전하 는 한편 와키자카군 바로 뒤에 붙어있는 나카가와군에 따로 전령을 보냈다. 자기 부하에겐 신호만으로 충분했지만 독립 영주인 나카가와 히데나리에겐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세력이 작아 도저히 혼자 싸울 형편이 못되어 야스하 루 함대에 포함되긴 했지만 히데나리는 독립된 명령권을 가지고 있었다. 협 조를 구한다는 의미로 늘 전령을 통해 작전을 전달해야 했다. "그럼 이제 준비는 다 됐군. 앞쪽도 이제 깨끗해졌다." 구루지마군의 마지막 비명마저 끊어졌을 때 야스하루는 조선수군의 대장 선에 걸려있는 머리에 대고 중얼거렸다. "잘 보고 있으시오. 미치후사 님." 지휘봉이 힘차게 앞으로 내려졌다. 히데미쓰가 기다렸다는 듯 소리쳤다. "공격!" 5. 호랑이 사냥 (2) = 와키자카군 전군, 이이츠카 "마에(앞으로)!" 짧은 침묵을 깨뜨리고 사이토 이이츠카가 짧지만 강하게 외쳤다. 그러자 마치 시간이 멈추기라도 한 듯 잠시 정지해 있던 배들이 일제히 움직였다. 해협에 진입하자 거센 물살을 탄 세키부네 12척이 쏜살처럼 달리기 시작했 다. 병사들이 심호흡을 하며 자세를 가다듬었다. 저 멀리 거대한 판옥선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병사들은 곧 전투가 시작된다는 엄청난 긴장과 흥분 속에 빠져들었다. 병사들 심장은 바람에 펄럭이는 깃발처럼 힘차게 고동쳤다. 갑판 밑에서는 수부들이 열심히 노를 저었다. 굵은 땀방울이 얼굴에서 뚝 뚝 흘러 내렸다. 다락 앞쪽에서는 철포병들이 길고 가느다란 심지에 불을 붙이기 시작했다. "빨리! 더 빨리!" 수부들 사이를 오가며 수부장이 재촉했다. 한참 당겨졌던 시위가 갑자기 놓인 것처럼 수부들이 손놀림을 빨리 했지만, 북소리 간격은 점점 더 짧아 졌다. "우리 모두의 목숨이 너희들 손에 달렸다. 어서 힘차게 노를 저어라!" 수부장이 악을 썼다. 이렇게 된 이상 모든 힘을 다해 날아가는 수밖에 없 었다. 조금이라도 빨라야 삶에 가까워진다. 그런 수부장을 하급무사가, 하급 무사는 상급무사가 눈을 번뜩이며 노려보고 있었다. 선두의 중형 세키부네에 달린 노 40개가 바람개비처럼 돌아갔다. 북서쪽 으로 거세게 흐르는 해류가 이 광적인 노젓기와 합쳐지자 배들은 경이로운 속도를 냈다. 지나치게 기다란 모양이 특징인 세키부네들이 옅은 회색 물살 을 하얗게 가르며 달려갔다. 조선군의 대포에 맞지 않기 위해 벌여놓았던 거리가 순식간에 좁혀들었다. "최고다! 마치 말을 타고 적진에 돌격하는 기분이야!" 이이츠카가 젊은 혈기를 누르지 못하고 뱉어냈다. 등에 꽂힌 전군前軍의 깃발이 한껏 펄럭였다. 이 돌격을 뚜렷이 야스하루 님에게 보여주고 있다 생각하니 이이츠카는 더욱 기분이 좋았다. 주변 풍경이 휙휙 스쳐 지나갔다. "이이츠카 님! 전투 중입니다. 자제를!" 백발이 성성한 늙은 무사 한 명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이이츠카에게 부탁 했다. 이이츠카가 보여주는 지나친 혈기가 염려스러운 것 같았다. 별로 특출 난 점이 없는 하급무사에 불과했지만 관록이 있어 전군에 기용된 인물이었 다. "히요시도 잘 따라오는데? 허허! 벌써 우리 뒤까지 바짝 따라왔어. 저것 좀 봐요!" 하지만 이이츠카는 그 늙은 무사의 말에 귀도 기울이지 않았다. 일부러 무시하며 고개를 돌려 중군을 살폈다. 그리고는 일부러 탄성까지 질러 보였 다. 이이츠카는 전군 전체를 지휘하는 사무라이 대장이었다. 구루지마군이 각 예하부대의 장을 해적식으로 두목이란 의미의 '가시라頭'라고 부르는데 반해 정규군은 '사무라이 다이초侍大將'라 불렀다. "이이츠카 님!" 다시 거센 목소리가 날아들자 이이츠카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알겠소. 알았으니 그만 하시오." 늙은 것은 결코 명예가 아냐. 그 나이가 되도록 겨우 그 자리에 머물러 있으면서! 이이츠카는 경멸이 담긴 눈빛을 숨기지 않으면서도 결국 입을 다 물었다. 늙은이의 충고란 공손함을 가장한 뻔뻔함이라는 것이 이이츠카의 생각이었다. 기민함이 요구되는 전장에서 늙은이들이란 대체로 이것저것 생 각만 하다 좋은 기회를 놓치면서도 고리타분한 진지함만 강요하는 것이다. 이이츠카는 감정을 억누르는 다른 무장들과 달랐다. 그는 생각한 것을 바 로 입밖에 내고 마는 격정적인 성격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전술적 차원에서 는 순간적인 기민함, 쉽게 말해 임기응변이 뛰어났다. 적의 대응이나 돌발적 인 상황 변화에 따라 바로 지시를 내는 능력만으로 이이츠카는 야스하루의 눈에 들 수가 있었다. "부장! 씨름 준비는 다 됐나?" 기분이 상했는지 이이츠카는 갑자기 엉뚱한 말을 꺼냈다. 그는 농담을 즐 기는 성격이었다. "씨름이라니요?" 난데없이 튀어나온 말에 놀란 부장도 이미 30대 중반이 된 인물이었다. - 퍼벙! 펑! 조선군이 쏜 대포가 바다를 진동시켰다. 단 한 척이 쏠 때도 크게 들리던 포성이었지만 이제 몇 척이 연달아 쏘니 그 소리는 대단했다. 바닷물이 출 렁이는 이유는 사실 저 대포의 굉음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상상이 지나친 것 은 아니었다. "이제부터 우리가 할 일 말이다. 저 놈과 씨름을 해야 되잖아! 저 놈을 밧 줄로 꽉 묶은 다음 모래판 밖으로 밀어내야지!" 야스하루가 '호랑이사냥'이라 표현한 것을 이이츠카는 '씨름'이라 불렀다. 계속되는 대포소리에 일부러 큰 소리로 말하면서도 이이츠카는 여유를 잃지 않았다. 심지어 포환 하나가 바로 머리 위로 지나가며 깃발을 찢었어도 마 찬가지였다. "혹시 요즘 유행하는 씨름이냐고 묻진 않겠지? 모래판 들어가기 전에 온 갖 기원이니 의식이니 다하고 나서는 겨우 손으로 상대를 밀어내는 그런 미 련한 씨름 말고! 난 화끈한 옛날 씨름이 더 좋다고!" 이이츠카가 아예 악을 썼다. 포성과 함성이 해협을 가득 메웠다. 전국시대 전기까지 일본씨름은 지금의 한국씨름과 그리 다를 바 없었다. 고구려 고분 각저총 벽화에 그려진 씨름처럼 윗통을 벗은 장정 두 명이 서 로 상대방 허리에 두른 샅바를 잡고 발을 걸거나 하여 쓰러뜨리는 식이었 다. 그러나 전국시대 후기와 에도시대를 거치면서 일본의 씨름은 모래판에 들어가기 전의 의식을 중시하고 손으로 밀쳐내는 것만 비정상적으로 발달한 지금의 스모로 변했다. 이이츠카가 지적한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무슨 말씀이신지요!" 그렇지만 부장은 여전히 이이츠카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평 시라면 충분히 이해는 할 수 있었다. 그러나 폭음과 연달아 날아오는 포환 에 놀라 여유 있게 생각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이이츠카는 겁을 집어먹고 두터운 나무방패 아래로 몸을 숙인 부장이 큰 소리로 말하는 것마저 잊지 않은 것이 고마웠다. "저 배에 바짝 붙어서 밀어붙이는 거니까 씨름이지. 밧줄도 써야 하지 않 나? "아! 그거라면 완료됐습니다! 염려 마십시오!" "다행이군." 한참 늦은 대답을 들은 이이츠카가 빙긋 웃었다. - 꽈직! 우지끈! 쿵! 이이츠카가 그 자세 그대로 얼어붙었다. 배에 충격이 온 것으로 봐서 조 선군이 쏜 화포탄이 바로 이 배에 명중한 것은 분명했다. 이이츠카가 웃는 표정 그대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엉망으로 부서지고 무너진 배 뒤쪽에서 는 병사들이 나무판자 사이에서 빠져 나오려고 아우성을 쳤다. "하하! 뒤쪽 다락이 무너졌구나. 하하!" - 따다다다닥! 이이츠카는 놀란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왼쪽으로 돌렸다. 옆을 달리던 세 키부네 한 척이 돌멩이 수백 개를 뒤집어쓰고 난 뒤의 참상이 드러났다. 앞 갑판과 다락 위에서 함성을 지르던 병사들 절반 정도가 피떡이 되어 널브러 져 있었다. 대나무방패판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만약 저 탄환을 이 배에서 맞았다면? 이이츠카는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 다. 슬쩍 고개를 돌리니 저 앞에 판옥선들의 커다란 화포 구멍 수십 개가 보였다. 조선수군의 모든 화포가 바로 이 배만, 이이츠카만 노리는 것 같았 다. - 콰콰콰콰콰! "헉!" 이이츠카는 심장이 멈춰버릴 것 같았다. 이 배가 또 뭔가에 맞은 게 분명 했다. 이이츠카가 눈을 둥그렇게 뜨고 배를 살폈다. 해안 가까이 있는 판옥 선의 화포에서 쏜 작은 탄환들은 세키부네의 뒤쪽 다락에 명중했다. 무너진 다락 사이에서 버둥거리던 병사들 예닐곱이 작은 자갈의 폭풍에 휩쓸려 시 체로 변했다. "이것은 행운이 아냐. 속도가 중요하다. 하하하!" 이이츠카가 큰 소리로 웃어 제쳤다. 병사들 몇이 죽어갔지만 이 배 중심 에 정확히 맞지 않아 예상보다 피해가 적었다는 것이 즐거운 이유였다. "끄어어어억!" 병사 하나가 끔찍한 소리를 지르며 천천히 무너졌다. 시뻘건 손으로 움켜 진 그 병사의 배에는 작은 화살이 박혀 있었다.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화살 이 연달아 날아와 방패판에 박혔다. "이이츠카 님! 발포명령을!" 이런 와중에도 우뚝 서 있던 늙은 무사가 본격적인 대응을 요청했다. 겁 에 질린 부장과 달리 그 늙은 무사는 잠자코 적선을 노려보고 있었다. 정신을 차린 이이츠카는 잠시 판옥선과의 거리를 확인했다. 판옥선의 크 기와 노의 움직임을 살펴본 다음 이이츠카는 늙은 무사에게 대답했다. "필요 없소!" 그리고는 재빨리 부장처럼 몸을 방패 아래로 숨겼다. 머리 바로 위로 화 살이 바람을 가르며 지나갔다. 손을 뻗어 방패 뒤의 고정대를 단단히 잡은 이이츠카가 큰소리로 외쳤다. "조심하시오! 간다아아!" 다음 순간 둔탁한 충격이 이이츠카의 세키부네를 덮쳤다. 배가 마구 흔들 리며 갑판 위에 널린 물건들을 이리저리 집어던지고 마구 흔들어 놓았다. "아악!" 병사들 상당수가 쓰러지고 당황한 늙은 무사는 군기를 잡고 매달렸다. 그 것을 보며 이이츠카가 위로의 말을 던졌다. "그러게 너무 자제해도 곤란하오. 때로는 본능에 충실해야 하는 법!" 이이츠카의 세키부네에 이어서 다른 배들도 속속 조선군의 판옥선에 부딪 쳐왔다. 충돌하기 직전에 교묘히 배를 돌렸기 때문에 판옥선에 충돌해서 배 가 부서지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먼저 부딪친 자기 배에 이어 두 척이 더 달라붙은 것을 확인한 이이츠카가 기운차게 다음 명령을 내렸다. "계획대로 시행하라! 이대로 밀어붙여서 해협 바깥으로 몰아라! 그럼 우 리가 이긴다!" 모래판에는 성공적으로 들어왔다. 이제부터는 시합이었다. 거대한 판옥선의 몸체를 올려본 이이츠카는 이런 거한이 왜 우리 편에는 한 척도 없는가 하고 투덜댔다. "수부장! 뭐하고 있나? 노가 멈추지 않았나? 어서 젓지 않으면 목을 베어 버리겠다!" 비틀거리며 일어선 부장이 아래쪽을 향해 엄포를 놓았다. 그러자 죽은 척 하던 바퀴벌레가 갑자기 움직이듯 축 늘어져 있던 노들이 바닷물을 튀기며 움직였다. 이이츠카는 갑자기 씨름판에서 선수를 격려하는 소리를 내기 시 작했다. "영차! 영차! 힘내라!" "이이츠카 님 위험합니다! 안전한 곳으로!" 아까 군기를 붙잡고 버틴 늙은 무사가 부러진 깃대를 버리면서 이이츠카 에게 외쳤다. 곧이어 조선군 쪽에서 쏟아 부을 화살을 상대하기 위해 몰려 나온 궁병과 창병들이 이이츠카 앞에 사람의 장막을 만들었다. "알겠다!" 일부러 염려해준 것 때문에 마지못해 대답하면서도 이이츠카는 약간 뒤로 물러났다. 그러면서도 이이츠카는 하고 싶은 말 하나를 끝내 자제하지 않았 다. "그런데 도대체 어디가 안전한데?" 피잉 소리를 내며 드디어 화살이 본격적으로 날아들었다. 이이츠카를 몸 으로 가린 채 사람 키보다 큰 활을 쏘려던 궁병이 맞고 쓰러졌다. = 경상우수영 좌선, 박재석 "우리편 배여유! 이제는 살았구먼유. 살았어유. 하하! 성복 형님, 재돌이 형님. 안 그래유?" (*질문입니다. 충청도 사투리로 형님을 혹시 뭐라고 다르게 말합니까? 그 냥 형님. 아니면 성님. 또는 언니? 방명록에 올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문 틈새로 바깥을 내다본 금이가 좋아서 펄쩍 펄쩍 뛰었다. 박재석은 성 복과 함께 이제야 알았냐는 듯이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판옥선 현측에 총탄이 맞는 소리가 안 나는 것을 알아차리고 이 배가 아닌 곳에서 쏘는 화 포 소리를 들은 두 사람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리고 다른 격군들이 잠시 쉴 때마다 바깥을 내다보며 좋아하던 꼴을 보면 말하지 않아도 뻔했다. "아직 아녀, 임마. 히구! 금이 니는 째깐한 것이 힘도 좋다, 에. 마른 장작 이 잘 탄다드만, 그거이 참말인갑다." 박재석은 투덜거리는 성복 건너편에 주저앉은 채 땀을 닦았다. 아까 팔다 리 근육이 아프고 당길 때가 차라리 나았다. 지금은 아예 감각이 없었다. 흉 갑에 저고리까지 벗어붙인 성복도 이제는 지치는지 숨을 헐떡거렸다. 우람 한 팔뚝을 타고 흘러내린 땀방울이 뚝뚝 떨어져 바닥에 고일 정도였다. "타릉. 하! 큼큼! 다른 판옥선들까지 온 마당에 이젠 저놈들이 우리를 물 리칠 방법은 없지 않겠습니까? 판옥선 여러 척이 여길 계속 꽉 막고 있으 면..." 목이 탁 막히고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시원하게 물이라도 한 잔 마시고 싶지만 물통이 놓인 곳까지 가기는 싫었다. - 뻐벙! 천자총통이 발사되었다. 그러나 박재석 등 격군들은 이제 만성이 되어 움 찔거리지도 않았다. 아까 한참 싸울 때의 화약 연기가 다 빠지지도 않았는 데 또다시 갑판은 자욱한 연기 속에 묻혔다. 성복은 박재석을 빤히 쳐다보더니 힘겹게 입을 열었다. "나가 젤로 겁내는 방법이 있는디, 자네도 알겄는가? 왜놈들이 그 방법을 쓰믄 아마 통상도 시껍할 것이여." "왜선들이 진도 바깥쪽으로 돌아가는 거 말입니까?" 뒤통수가 근질근질하면 전면의 적만 상대하는 것도 어렵게 된다. 그래서 포위 당한 군대는 대장부터 말단 병사들까지 겁에 질려 스스로 무너지기 쉽 다. 그런 다음에 남은 것은 일방적인 학살뿐이다. "그거야 우리 탐망선들이 여럿 떴응께 괜찮어. 물러서불믄 되거든. 그쯤 되문 통상 어른도 포기허시겄지. 근디 문제는 우리 배가 몇 척 안 된다는 거여. 왜선들이 우리 배들 사이로 지나쳐불기라도 하문 그때는." 성복이 갑자기 이물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천자총통에 달라붙은 포수들 의 손놀림이 갑자기 바빠졌다. 미리 이물에 갖다놓은 대장군전이 몇 개 남 지 않았다. 그리고 도노장이 포문 사이를 통해 바깥을 내다보고 있었다. 전 투가 다시 급박해지고 있었다. "빨리! 빨리!" 화포장이 나무 격막을 밀어 넣는 포수들을 재촉했다. 대장군전이 끝까지 들어갔는지 확인한 화포장이 조심스럽게 당차를 돌렸다. - 뻐벙! 뻥! 새로 피어나는 자욱한 하얀 연기 속에서 갑자기 도노장이 큰소리로 외쳤 다. "부딪친다! 왜선과 충돌한다!" - 쿠쿵! 충격은 그다지 크지 않았다. 그러나 격군들은 화들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대장선이 또 다시 왜선과 뱃전을 접하고 육박전이 시작될 순간이었다. 박재석은 성복이 시키지도 않았는데 벌떡 일어났다. 노를 잡기 위해서였 다. 그러나 다리가 풀려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박재석은 서둘러 노를 잡고 다시 간신히 일어섰다. 금이는 벌써 노를 움켜쥐고 7로 사람들의 움직임에 맞추려고 힘을 주었다. "또 부딪친다!" - 쿵! 쿠웅! 뱃전에 뭔가 연달아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고 사람들에게 작은 충격이 전 달되었다. 성복이 투덜거리면서 막대를 힘껏 잡아당겼다. 그나마 성복이라는 장사가 있어서 나았지만, 제대로 쉬지도 못한 채 역류 를 타고, 그것도 겨우 3명이 노 하나를 저으려니 박재석은 죽을 맛이었다. 박재석은 팔이 아니라 가슴으로, 이제는 온몸으로 밀고 당겼다. 그런데 이상하게 노가 헛도는 것 같았다. 노 끝에 물이 제대로 걸려야 힘 을 받는데, 아무리 저어도 다른 노와 박자가 맞지 않을 때처럼 노에 힘이 제대로 안 실렸다. "저어라! 힘껏 저어라!" 도노장이 악을 썼다. 다른 격군들도 신음소리를 내면서 저었지만 헛힘만 쓰는 것 같았다. 뭔가 낌새가 이상했다. 도노장이 바깥을 내다보며 소리를 질렀다. "으으! 이거, 배가 밀린다! 안돼!" = 와키자카군, 전군 사무라이 대장 사이토 이이츠카 "움직인다!" 세키부네 세 척의 노 120개가 더 이상이라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물 속을 왕복했다. 그러자 마침내 판옥선이 그 거대한 몸체를 뒤로 물리기 시작한 것이다. 필사적으로 젓고 있는 세키부네 세 척이 붙어 있는 외에 아 직은 역류하고 있는 해류의 힘까지 더해져 있었다. 지친 조선수군 격군들이 억지로 버티는 데도 한계가 있었다. "그래, 바로 이거다!" 겨우 밀어붙이는 것뿐인데도 이이츠카는 가슴속에 치미는 격렬한 흥분을 억제하지 못했다. 역시 그는 자제나 근엄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리고 스스 로도 지금 그것이 필요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더 빨리! 더 빨리 저으란 말야!" 밑에서 수부들의 노젓기를 지시하는 하급무사가 악을 쓰듯 고함을 질렀 다. 노가 느려서라기보다는 갑판 위에서 벌어지는 전투 분위기를 아래까지 끌고 가지 않으려는 의도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다락 안에서 노를 젓는 수 부들 입장에서 보자면 갑판 위에서 벌어지는 격렬한 전투소리는 가끔씩 무 너지고 부서지는 벽과 천장과 더불어 가장 큰 공포감을 느끼는 요소였다. 게다가 조선군이 쏜 화포에서 발사된 쇠구슬은 배를 뚫고 쏟아져 들어오기 일쑤였다. "아악!" 왼쪽 눈에 화살이 박힌 아시가루가 이이츠카의 눈앞에서 절규했다. 그 아 시가루는 계속 끔찍한 소리를 지르며 눈에 박힌 화살을 뽑으려 했다. 작고 가는 화살. 조선군이 주로 쓰는 이 무서운 화살 앞에는 대나무로 촘촘히 엮 은 화살막이 갑옷도 별로 효과가 없었다. 그런 화살을 정면으로 눈에 맞은 것이다. 아시가루는 피가 줄줄 흐르는 얼굴로 갑판 위를 뒹굴기 시작했다. 그가 내던진 창도 함께 바닥을 뒹굴었다. "방어를 단단히! 방패를 더 가져 오라!" 이이츠카가 자기 주위를 단단히 감싸고 있는 사람의 장막에 대고 지시했 다. 그들은 대나무를 촘촘히 묶어만든 방패(竹束牛)를 앞에 대고 있었다. 성 을 공격할 때처럼 그 방패 뒤에 단단히 방어진형을 구축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 중 일부가 한쪽으로 달려가더니 두터운 나무 방패판을 날라와 대나무 방패 앞에 겹쳐 세웠다. 하지만 누구나 이 진형 안에서 보호받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그것은 이 이츠카를 중심으로 그려진 빈약한 원형진에 지나지 않았다. 대장을 비롯한 핵심병력을 보호하기 위한 것일 뿐 나머지 병력에 대해서는 판옥선 위에 있 는 조선군에 대한 공격을 지시해 놓고 있었다. 방금 쓰러진 불쌍한 아시가 루도 그런 병사들 가운데 하나였다. "우린 구루지마 해적 녀석들과는 달라. 조선군이 그걸 알까?" 이이츠카가 부장에게 이렇게 물었다. 침착함을 되찾은 부장이 딴에는 위 엄을 찾으려 애쓰며 대답했다. "아마 지금쯤은 알았을 거라 생각합니다. 지금 우린 무턱대고 공격하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확실히 지금 이이츠카를 비롯한 와키자카군이 보여주고 있는 움직임은 앞 서의 구루지마군과는 틀렸다. 우선 이이츠카가 지휘하는 전군이 전속력으로 판옥선들에 육박했다. 패배 한 구루지마군을 소탕하느라고 기세가 오른 조선군 대열은 방어보다는 공격 에 치중하느라 그렇게 정연한 편이 아니었다. 조선군이 자랑하는 화포공격 이 제대로 집중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이이츠카 함대는 놀랄 만큼 적은 피해만 입고 조선군 전선에 배를 맞댈 수 있었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긴 창을 들고 있는 적에게 몸만을 가지고 돌격한 셈이었다. 사정거리가 긴 무기라는 건 바꾸어 말하면 가까운 거리에 서는 제 구실을 못하는 무기란 소리였다. 이이츠카의 배들이 화포의 한계거 리를 넘어서 판옥선의 뱃전에 하나 둘 다가서자 조선군은 대번에 공격에서 방어태세로 전환했다. "우리가 맡은 건 씨름이니까. 우린 이 녀석들을 모래판 밖으로 밀어 내버 리면 되는 거야. 우리 혼자 이기려고 할 필요는 없어." 확실히 이이츠카 함대는 구루지마군처럼 개개 함선이 조선군 전선을 제압 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들은 철저하게 조직에 속해 있었으며 그 조직이 취 하는 전술의 한 부분으로서의 역할을 다하고 있었다. 판옥선을 향해 공격하고 있는 병사들도 일부러 적선에 기어올라가려 하지 않았다. 그리고 방어를 맡은 병사들은 대장 이이츠카를 비롯한 주요 무장들 앞에 굳건한 방어태세를 구축하고 있었다. 지휘체계를 지키겠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물론 이것으로 안전해 지는 건 아니다. 무턱대고 덤비는 것보다는 좀더 긴 시간을 버틸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 시간, 즉 판옥선을 밀어낼 동안 의 시간이 이이츠카 함대에게는 필요했다. "1번대 좌측으로! 2번대는 약간 뒤로!" 앞에서 싸우는 병사들을 지휘하고 있는 건 이이츠카에게 자제를 당부한 늙은 무사였다. 깃대에 은빛 장식을 한 청색 깃발을 등에 꽂고 이리저리 움 직이는 모습이 눈에 확 들어왔다. 둥근 사발 모양의 단순한 투구에 약간 나 와 있는 백발이 은색 장식물과 잘 어울렸다. - 챙! 화살 하나가 날아와 노무사의 투구에 맞고 퉁겼다. 보통 사람 같으면 가 슴이 철렁해서 잠시 멈췄을 것을 늙은 무사는 마치 빗방울이라도 맞은 것처 럼 태연했다. "쳇! 확실히 관록이 있군." 지켜보던 이이츠카는 문득 손을 들어 투구를 만져보았다. 당시 유럽 갑옷 과 모양새가 비슷한 이 투구는 도세구소쿠當世具足란 갑옷과 한 조를 이루 고 있었다. 튼튼한 걸로 치자면 철포 탄환도 막아낼 정도였지만 어쩐지 안 심이 되지 않았다. 세키부네의 층루는 판옥선의 상갑판과 높이가 비슷해 집 중적인 공격의 대상이 되고 있었다. "저 자의 기량, 상당히 훌륭합니다." 부장이 할아버지 무사를 가리키며 칭찬하고 나섰다. 별로 인정하고 싶지 는 않았지만 이이츠카도 긍정할 수밖에 없었다. "싸움이 끝난 후에 포상하시오." 이이츠카가 퉁명스럽게 간단히 받아넘겼다. 감탄하긴 했지만 직접 그 무 사를 칭찬하고 싶지는 않았다. "불이야!" 화살만으로 별 효과를 보지 못한 조선군이 작전을 바꾸었는지 이번에는 화공으로 나왔다. 갑판 여기저기에 불화살과 둥그런 나무통이 몇 개 날아들 었다. 이이츠카를 가린 방패판에도 불화살이 꽂히며 불을 붙였다. "소란 떨지 마라! 침착하게 불을 꺼라!" 이렇게 명을 내리고 주위를 한번 둘러본 이이츠카는 기가 막혔다. 이제 보니 나무통은 일종의 폭탄이었다. 나무통이 터지면서 불길이 뿜어져 나와 병사 몇 명이 새까맣게 타버렸다. 그리고 불화살에서 옮겨 붙은 불길이 배 여기저기를 태우고 있었다. 이이츠카가 큰소리로 푸념했다. "빌어먹을! 불타는 판잣집에 서있는 기분이다! 누가 춥다고 했나? 난 아 직 안 춥다고!" 또 난데없이 나오는 엉뚱한 소리에 부장이 눈을 흘겼다. 하지만 이이츠카 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자, 이번에는 다리를 확실히 묶어야지! 밧줄부대 앞으로!" 장난기가 있었지만 엄연한 군령이었다. 부장이 그 명령을 옮겨 지시를 내 리자 곧 다락 안에 있던 병사들이 손에 밧줄 꾸러미를 들고 뛰어나왔다. 3 명씩 한 조가 된 그들은 역시 대나무 방패로 위를 가리며 판옥선 바로 아래 까지 접근했다. 밧줄은 배를 정박시킬 때나 쓰는 굵은 줄이었다. "풀어!" 지휘자의 구령에 따라 판옥선의 노 아래에서 병사들이 일제히 밧줄을 풀 었다. 역사전쟁소설 // 남해 // 2권 copyright (C) 2001 김경진 안병도 신재호(필명) 공저 업로드 김경진 (전쟁소설 데프콘 1, 2, 3부, 동해, 남북, 판타지 하늘길잡이 공동저자) * 고칠 점이 있다고 생각하시면 언제든 18번 오발탄 게시판에 올리시 거나, 저나 안병도 님께 메일로 의견을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조선 ; 김경진 amraam07@hitel.net 일본 ; 안병도 031038@hitel.net * 김억추와 함께 뒤에 남은 전선은 가리포첨사 이응표, 회령포만호 민 정붕, 발포만호 소계남의 것입니다. 송여종-->민정붕으로 수정합니다. * 충무공의 갑옷은 두정철갑이므로 구루지마 미치후사가 죽을 때 늙 은 장수의 금빛 갑옷-->화려한 붉은 갑옷으로 수정합니다. 5. 호랑이 사냥 (3) = 경상우수영 좌선, 우치적 "이놈들! 밀어붙이기로구나." 활을 쏘다 말고 우치적이 자꾸 뒤를 살폈다. 좌선은 다른 판옥선들과 함 께 거꾸로 줄달음쳐 이제는 어느새 해협 입구를 지나고 있었다. 왜선들에게 한참을 밀린 것이다. 통제사와 선장이 도훈도에게 호통을 치고 갑판 밑에서 도노장이 울리는 북소리가 숨넘어가듯 빨라졌지만 뾰족한 수는 없었다. 그리고 왜선들은 미리 짰는지 판옥선들 사이를 넓게 벌렸다. 우치적이 이 상하다고 생각한 순간이었다. "또 다른 왜선들이 접근합니다!" 활을 쏘려던 김탁이 놀라 오른쪽을 가리켰다. 조금 전까지 바로 옆에 있 던 중군장 김응함과 녹도만호 송여종의 배가 지금은 한참 멀리 떨어져 있었 다. 왼쪽 평산포대장 정응두의 배도 왜선들에 밀리기는 마찬가지였다. 사실 상 전투력을 상실한 거제1선은 통제사가 뒤로 빠져 있으라고 했지만 계속 그 자리에 있다가 그제야 허겁지겁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안돼! 저놈들이 사이로 빠져나간다. 선장! 화포를 쏴서 막아!" 우치적이 송한을 불렀다. 그러나 갑판 위에서는 한참 바빴다. 불붙은 짚더 미와 솜뭉치가 밑에서 연달아 날아와 수졸들뿐만 아니라 포수들도 불을 끄 느라 정신이 없었다. 장병겸이 춤을 추었지만 좌선에 뱃전을 댄 왜군들이 직접 공격해오는 것도 아니라서 허공을 가를 뿐이었다. 웃기는 건 또 하나 있었다. 늙은 화포장이 질려포통을 연속 던지다가 고 개를 갸웃거렸다. 터지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이다. 화포장은 고개를 갸웃 거렸지만 장대에 오른 우치적은 왜 그런지 알 수 있었다. 좌선에 잇댄 왜선 들이 판자를 연결한 지붕을 만들어 둥그런 질려포통이 굴러 바다로 빠진 때 문이었다. 우치적은 좌선 옆으로 지나가는 왜선들을 잠시 가만히 서서 바라볼 수밖 에 없었다. 갑판에서는 기라졸들이 전선들 간격을 좁히라는 명령을 보내려 고 휘麾를 눕혔다 세우고 대휘를 세우느라 바삐 움직였다. 그러나 왜선들에 이끌려 뒤로 밀리는 다른 판옥선들이 좌선의 명령을 수행하기는 불가능했 다. 그때 왜선들 갑판 밑에서 조총이 일제히 발사되었다. 시뻘건 화염이 연기 속에서 뿜어져 나왔다. - 따다당! 팡! 우치적이 머리를 숙인 순간 방패판에 탄환이 퍽퍽 박히는 소리가 연속 났 다. 상대적으로 높은 위치에 있는 장대는 이렇게 가까이 있을 때에는 적의 집중공격 대상이 되고 있었다. 왜선, 특히 다락 안에서는 장대만 보였다. 우치적이 고개를 슬쩍 들어보니 방패판 윗부분이 모조리 박살나 떨어져 나가 있었다. 김탁은 반쯤 얼이 빠진 표정으로 비치적거리며 일어섰다. "우욱!" 갑자기 옆구리가 욱신거렸다. 우치적이 살펴보니 흉갑에 커다란 구멍이 나 있었다. 탄환이 흉갑을 뚫고 들어간 것 같아 흉갑을 제쳐 안을 살폈다. 두석린갑에 붙인 황금빛 비늘이 잔뜩 찌그러져 있었다. "이걸 어쩌나!" 우치적이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순천부 장인들이 우치적을 위해 한 달 동 안 애써 만들어 바친 무척 좋은 갑옷이었다. 방호재가 갑옷 안쪽에 붙어있 는 것이 두정갑이라면, 두석린갑은 바깥쪽에 비늘이 붙은 것이다. 우치적이 안타까워한 것은 부서진 갑옷이 아까워서가 아니라 장인들에게 미안해서였다. 그리고 이런 좋은 갑옷을 만들어준 장인들과, 방금 흉갑을 입 도록 한 송희립이 너무 고마웠다. 우치적은 조총에 맞고도 살아남은 것이다. "사또! 흉갑을 잘 여미십시오. 사또가 입은 용린갑주는 금빛이라 눈에 너 무 잘 뜨입니다." 김탁이 활을 쏘다 말고 참견하자 우치적이 슬쩍 눈살을 찌푸렸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어찌 보면 우치적의 두석린갑이 통제사의 두정철갑보다 훌 륭하다 할 수 있었다. 붉은 천에 황금빛 비늘이 붙어 멀리서도 눈에 확 띄 었다. "진법에, 대장大將을 잃으면 그 위장을 참하고, 위장衛將을 잃으면 그 부 장을 참하며, 부장部將을 잃으면 그 통장을 참하고, 통장統將을 잃으면 그 여수를 참하며, 여수旅帥를 잃으면 그 대정을 참하고, 대정隊正을 잃으면 그 오장을 참하며, 오장伍長을 잃으면 그 오졸伍卒을 참한다고 했다. 헉헉! 자 넨 그렇게 될까 두렵나? 직속 상관인 내가 죽으면 자네가 책임질까봐?" 우치적이 숨을 몰아쉬었다. 문종이 지은 오위진법의 진중군법, 즉 군령 편 에 나오는 내용이었다. 싸움 중에 직속상관을 잃으면 그 부하들도 책임을 지니 도망가지 말고 열심히 싸우라는 의미였다. 그러나 최근 조선에서는 장수나 군사나 할 것 없이 도망가기 바빴다. 그 렇더라도 전쟁기간 내내 어느 장수가 그 군율에 의해 처형당했다는 말은 들 어보지 못했다. 다만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다음부터는 임금이 그 조항을 들먹이 며 칼을 갈고 있었다. 이번 싸움 결과가 어떻게 되든 수군 장수들 목숨은 임금이 쥐고 있는 셈이었다. 특히 칠천량패전 때 원균을 버리고 도망간 우 치적은 지금 망나니 칼을 목에 댄 채 왜군과 싸우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 다. 우치적은 이게 더 짜증났다. 제대로 싸우는 군사들을 밀어줘야 할텐데, 임 금은 오히려 도망가는 장수는 벌을 주지 않고 열심히 싸우는 장수는 목을 치기 일쑤였다. 우치적은 성질 같아서는 확 뒤집어엎고 싶었다. '이 전쟁만 아니라면'이라는 단서가 붙어서 문제였지만. 김탁이 잠시 할 말을 잃고 우치적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우치적도 알고 있었다. 김탁이 우치적을 걱정해서 한 말이지, 자기 목숨 두려워 상관에게 죽지 말라고 한 것은 아니었다. "난 대장도 위장도 아니니 괜찮네. 그리고 내가 죽더라도 자네가 적장을 잡으면 되지 않나? 지금까지 여럿 쏘아 죽여서 벌충했으니 자네는 벌을 받 지 않을 걸세." 우치적은 조금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속마음과 달리 입에서 나오는 것은 하나같이 김탁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말뿐이었다. 그러나 김탁은 다 이해하 겠다는 표정으로 빙긋 웃고 말았다. 어쨌든 지금은 통제사 대신 죽으려고 장대에 올라온 두 사람이었다. 우치적은 부끄러워 공연히 소리를 버럭 질렀다. "다른 배는 도대체 뭐하는 거야?" 해남현감 유형의 배가 물살이 느린 우수영 앞바다를 통해 가장 먼저 달려 오고 있었다. 그리고 배흥립과 조계종, 우수의 배 등 다른 배들은 가운데로 오면서 왜선을 향해 화포를 쏘기 시작했다. 지금 조선수군 판옥선들은 앞에 다섯 척, 뒤에 네 척이 전투에 참가한 셈이었다. 그러나 김억추의 배를 비롯 해 네 척은 아직도 한참 멀리 떨어진 채 요지부동이었다. "김억추 저놈이!" 우치적이 방패판을 치우고 아래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기라졸 듣거라! 청색 휘와 초요기를 나란히 입立하여 좌위장을 불러들여 라!" 기라졸들이 송희립의 눈치를 살폈다. 슬쩍 장대를 올려다 본 송희립이 고 개를 끄덕이자 기라졸 하나가 청색 휘를 휘둘렀다. 청색 휘는 좌위를 지칭 한다. 그러자 곧 저 멀리 전라우수영 좌선에서 기라졸이 청색 위장기衛將旗를 휘둘렀다. 이곳 기라졸이 휘를 서쪽으로 향했다가 다시 동쪽으로 향하자 저 쪽에서도 똑같이 따라했다. 아까는 좌선에서 아무리 불러도 본체만체하더니, 이번에는 확실히 반응이 있었다. 지금은 거의 쓰지 않는 휘麾라는 말은 깃술이 달린 깃발이며, 휘하麾下라 는 말에 화석으로 남아있다. 깃발에서 깃술 세 개를 옆으로 늘어뜨린 휘는 청, 백, 황, 적, 흑색의 다섯 가지가 있으며 오위의 각 위장에게 명령할 때 쓴다. 그리고 기다란 깃술이 하나 달린 것은 좌, 우, 중군의 장에게 명령할 때 쓰며 색깔은 세 가지인데 당연히 좌청룡 우백호 하듯이 청색, 백색, 황색 이다. 그런데 휘는 대장 뿐 아니라 5위의 각 위장도 갖고 있으면서 예하 부 장들을 호령할 때 쓰기 때문에, 한자자전에 휘는 곧 '대장의 깃발'이라는 풀 이는 옳지 않다. 김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응? 우수사가 오려나봅니다." "설마." 우치적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속으로는 '제발'을 되뇌었다. 지금은 분명히 조선수군의 최대 위기였다. 그런데 전라우수영 1선이 통제영 좌선의 신호를 받아들이는 걸로 봐서는 김억추가 전투에 참가하려는 것 같았다. 우치적은 기대에 찬 시선으로 전라우수영 1선의 반응을 지켜보았다. 전라우수영 1선이 깃발 신호에 호응하는 것을 확인한 기라졸들이 힘차게 청색 휘를 눕혔다 일으켜 세운 다음 휘와 초요기를 깃대에 나란히 세웠다. 이제 전라우수영 1선에서 위장기를 눕혔다 세우면 좌위에게 집결하라는 명 령이 확실히 전달된 셈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전라우수영 좌선에서는 반응이 전혀 없었다. 참 다못한 기라졸들이 삿대질하며 욕설을 퍼부었다. "벼락맞을 놈들!" 우치적은 싸늘한 눈으로 김억추의 배를 쏘아보았다. 왜선 몇 척이 방어선 을 돌파했지만 새로 참가한 판옥선 네 척으로 어떻게든 막을 수 있을 것 같 았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새로 싸움을 시작해 기운 이 넘치는 왜선 100여 척을 오랜 싸움에 지친 판옥선 아홉 척으로 상대해야 했다. 방금 봤듯이 새로운 왜선에 탄 왜군들은 전혀 만만치 않은 놈들이고, 조선수군을 철저히 연구한 놈이 대장임이 분명했다. 뒷걸음질치고 돌아오지 않는 김억추나 이응표의 배는 사실 별로 필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소계남의 배와 민정붕의 배는 김억추가 뒤에 있는 것을 핑 계로 싸움에 참가하지 않고 있었다. 그 두 척이 없으면 이 싸움은 실로 어 렵다는 것이 우치적의 판단이었다. 갑자기 우치적이 흉갑을 벗어 던졌다. "사또!" 김탁이 놀란 눈으로 우치적을 지켜보았다. 우치적은 담담하게 말하면서 활시위를 당겼다. "나는 두 달 전에 벌써 죽은 목숨이었어. 이제 아깝지 않네. 지금은 나를 드러낼 때야. 통상은 아직 죽으면 안돼!" = 와키자카군 어립선, 이마이 히데미쓰 부장 히데미쓰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슬쩍 곁눈질하니 주군 와키자 카 야스하루도 매우 흡족한 표정이었다. 이이츠카는 임무를 훌륭히 수행해 낸 것이다. 구루지마군을 쳐부수고 기세 좋게 앞으로 나오던 조선군 판옥선들이 형편 없이 밀려서 뒷걸음쳤다. 판옥선 한 척에 세키부네 2, 3척이 붙어 무식하게 밀어붙이는 모습은 비록 고상하지는 않았지만 효과 면에서는 만점이었다. 조선 전선들이 밀리는 것을 본 본진 병력도 사기가 치솟았다. 그 동안 세차게 흐르는 역류를 견디며 싸워온 조선수군의 노꾼들은 완전 히 지쳐버렸을 것이다. 판옥선 밑으로 늘어뜨린 노의 움직임이 슬슬 둔해지 는 것이 여기서도 다 보였다. 거기다 이이츠카의 밧줄부대가 조선 전선의 노에 밧줄을 걸어 묶어버렸다. 발이 묶인 채 뒤로 밀리는 판옥선과 이를 따 라 앞으로 밀고 나가는 와키자카군의 모습이 극적으로 대비되었다. "이이츠카 부대 전진 중! 해협을 거의 벗어났습니다!" 관측을 맡은 병사가 옆에서 큰 소리로 보고했다. 이이츠카가 지금쯤 온갖 허세를 다 떨고 있을 거라고 생각한 히데미쓰가 빙긋 웃었다. 나쁘게 말하 면 경박하고, 좋게 말하면 호탕하다 할 수 있는 그 성격은 와키자카군 내에 서도 간간이 말썽의 불씨가 되곤 했다. "이이츠카 부대 해협 돌파! 히요시 부대 뒤에서 접근!" 하지만 그런 성격이야 어쨌든 본격적으로 싸움이 벌어지면 드러나는 싸움 솜씨만은 누구보다 뛰어났다. 야스하루가 관록이 별로 없다고 불안해하면서 도 일부러 이이츠카에게 선봉을 맡긴 것도 그 기량을 인정한다는 증거였다. "히요시 부대 선두 5척, 해협을 통과!" 관측병의 목소리가 약간 떨리며 가벼운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드디어 돌파했구나."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해협을 가로막은 조선수군 방 어선을 돌파했다는 것은 일본수군이 최초로 조선의 서해안으로 진출했다는 뜻인 동시에 판옥선들이 완전히 기동불능에 빠졌다는, 즉 승리가 눈앞에 있 다는 것과 같은 의미였다. 어립선에 탄 병사들이 술렁거리며 연신 탄성을 질렀다. 그리고 무사, 병사, 수부를 가리지 않고 서로 눈길을 마주하며 뿌듯 한 느낌을 나눴다. "드디어 호랑이가 구석에 몰렸군." "승기를 잡았습니다!" 히데미쓰 역시 관측병이나 야스하루 못지 않게 흥분했다. 사실을 말하자 면 히데미쓰도 지금 이 자리에서 크게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그토록 완 강하고 성벽처럼 굳건했던 방어선, 구루지마군을 전멸시키며 한없이 높게 여겨졌던 그 벽이 지금 와르르 무너지고 있었다. 히데미쓰는 피가 머리끝까 지 끓어오르는 느낌이었다. "얄미운 조선 놈들을 전부 죽여버릴 수 있겠습니다." 히데미쓰 마음속에서 갑자기 적개심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칼을 들고 일대일로 맞서면 아무 것도 아닌 것들이 비겁하게 멀리서 화포나 활을 쏘는 놈들! 본격적인 싸움이 시작되자마자 무사답지 않게 도망 다니는 것들! 심 지어 무기를 버리고 목숨을 구걸하는 장수도 있었다. "이기면 목을 검사해야 하겠지?" 야스하루도 히데미쓰가 흥분하는 것을 굳이 말리지 않았다. 싸움에서 이 긴 다음 적 장수들 머리를 일렬로 늘어놓고 하나씩 검사하는 의식을 들먹이 는 야스하루도 지금 상황을 충분히 즐기고 있었다. - 퍼엉! 펑! - 쾅! 차자자자작! 그러나 조선군은 그냥 밀리기만 하는 건 아니었다. 엉겁결에 다섯 척을 통과시켰지만 조선수군은 곧 반격에 나섰다. 다시 판옥선 사이를 지나가던 히요시 부대의 배에 불벼락이 떨어졌다. 좁은 울돌목에서 갓 벗어난 해협 입구에서는 어떻게든 그곳을 통과하려는 일본 배들과 그들을 노리는 대포의 화염이 가득 찼다. "그럼 최후로 호랑이의 정수리에 총알을 박아주자." 그런 광경을 노려보던 야스하루가 눈동자 가득히 의지를 드러냈다. "배를 전진시켜라. 목표는 적장 이순신이 타고 있는 저 대장선이다!" 거대한 아다케후네가 앞으로 기민하게 움직였다. 혹시라도 조선군의 포화 에 노출될까 두려워 본진 깊숙이 자리 잡았던 어립선은 야스하루의 명에 따 라 앞으로 쭉쭉 밀고 나갔다. 본진 소속 세키부네들이 서둘러 아다케후네를 따라 움직였다. "내가 말한 호랑이 정수리가 어딘지 알겠나?" 야스하루가 히데미쓰를 쳐다보지도 않고 물었다. 히데미쓰는 주군의 눈길 을 따라가며 천천히 대답했다. "정수리라면 급소를 말씀하시는 것. 조선군의 급소라면 당연히 한 곳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만." "급소란 겨우 한 점에 불과하지만 전체를 죽일 수도 있는 곳이지." "그렇다면 역시, 이순신입니까?" 히데미쓰는 야스하루가 얼마나 이순신을 싫어하고 경계하는 지 알고 있었 다. 꺼려하는 것으로 따지면 결코 총대장 도도 다카도라에 뒤지지 않을 것 이다. 다만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그것을 결코 지나치게 드러내지 않을 뿐이 었다. "맞았어!" 야스하루가 기운차게 대답했다. 그런 야스하루를 히데미쓰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지켜보았다. 층루에 같이 올라와 있으면서도 일단 작전이 시작되자 야스하루의 눈은 전체를 관망하지 않았다. 만일 주군이 전체 진세를 살펴보고 있다면 옆에서 관측병이 계속 전세를 알리기 위해 힘들게 소리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히데미쓰는 야스하루가 계속 한 곳만을 주시하는 것을 알아채고는 관측병에 게 계속 전체 상황을 알리게 함으로써 주군의 주의를 환기시켜왔던 것이다. "바로 저 자다!" 지휘봉이 움직여 아까부터 야스하루가 시선을 고정시킨 곳을 가리켰다. 그곳은 조선군 대장선 위에 우뚝 솟아있는 장대였다. 멀어서 얼굴이나 세세 한 윤곽은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 그 위에는 장수 몇 명이 올라가 있었다. 게다가 금빛이 반짝이는 화려한 갑옷을 입은 장수가 방패판을 열고 아래 를 향해 지시를 내리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그 장수는 체구는 비록 크지 않지만 인상적으로 강한 몸짓을 해 보였다. 이런 위급한 상황에서도 자신감 넘치는 몸짓이라니, 과연 이순신이라 할 만했다. 장대에 올라가 있다거나 화 려한 갑옷을 입었다거나 하는 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히데미쓰는 무엇보다 도 느낌이 팍 와 닿았다. "과연 그렇군요." "저 층루가 호랑이의 머리고 저기 있는 장수가 바로 급소인 정수리다. 어 떠냐? 해 볼만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야스하루가 씨름이니 호랑이 사냥이니 하며 비유한 것은 다 이 순간을 위 한 것들이었다. 히데미쓰는 야스하루가 그 동안 이순신을 잡기 위해 얼마나 고심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준비도 철저히 되어 있고, 지금까지는 계획에 착착 잘 맞아 들어갔다. 히데미쓰가 감동을 잔뜩 실은 목소리로 대 답했다. "예!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하하하!" 야스하루가 유쾌하게 웃었다. 그리고 그 웃음기가 가시기 전에 명령을 내 렸다. "주베에를 불러라!" 주베에는 야스하루가 이번 전투를 앞두고 특별히 기용한 철포대장 이름이 었다. 귀신같은 철포솜씨에 특히 먼 거리에서 적을 쏘아 맞히는 저격기술이 탁월했다. 히데미쓰는 두 달 전에 있었던 조선수군과의 전투를 떠올렸다. 그때 전투 는 별로 없었지만, 주베에는 장대에 오른 조선수군 장수는 누구든 곧 죽는 다고 봐도 된다는 믿음을 모두에게 심어주었다. 히데미쓰는 다시 한번 호랑이사냥이란 말을 떠올렸다. 그리고 폭음과 함 께 날아간 탄환이 이순신의 투구를 꿰뚫는 장면을 상상했다. 감당할 수 없 을 만큼 커다란 쾌감이 온몸을 휘감았다. 그것은 바로 조선수군이 완전히 무너짐을 뜻했다. 또한 조선의 멸망이 얼 마 남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이제는 명나라를 어떻게 공략할 것인가 하는 고민이 남았을 뿐이었다. 역사전쟁소설 // 남해 // 2권 copyright (C) 2001 김경진 안병도 신재호(필명) 공저 업로드 김경진 (전쟁소설 데프콘 1, 2, 3부, 동해, 남북, 판타지 하늘길잡이 공동저자) * 고칠 점이 있다고 생각하시면 언제든 18번 오발탄 게시판에 올리시 거나, 저나 안병도 님께 메일로 의견을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조선 ; 김경진 amraam07@hitel.net 일본 ; 안병도 031038@hitel.net 6. 총과 활 (1) = 고깃배, 마이룡 "엉엉! 엉! 엉엉!" 격군이 서글피 계속 울었다. 거제1선에서 탈출한 격군 7명은 거센 물살에 휩쓸려 다 물에 빠져 죽고 간신히 둘 만 살아남았다. 한 명은 이 배에, 다른 한 명은 저 멀리 뒤쪽에 쳐진 진사 백진남의 배에 간신히 구조됐다. 아버지 마하수는 적을 앞에 두고 도망쳤다고 잔뜩 노해서 그 젊은 격군을 때려죽이려 했다. 그걸 맏아들 마성룡이 불쌍하다고 말려서 간신히 살아남 을 수 있었다. 그래서 격군은 부끄럽고 분해서 뱃전 한구석에 쪼그려 앉아 그저 울고 있을 뿐이었다. "엉엉! 부모님은 왜놈들한테 잡혀 돌아가신 기라예! 마누라하고 새끼들은 어디로 가서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르겠심더. 내는 이리 매앤날 죽을똥 살 똥허고. 내 왜 이리 사노. 아이고, 내 팔자야!" 스물이나 스물 하나쯤 되어 보이는 격군은 당시 조선사람으로서는 매우 평범한 삶을 산 셈이었다. 그걸 아는 4형제가 혀를 찼다. 더더욱 임진년 이 후 왜군에게 큰 피해를 입은 경상도 지역 사람임을 감안하면 이 격군이 특 별히 더 불쌍한 경우도 아니었다. 마이룡은 막내 마화룡과 함께 여전히 죽어라 노를 저었다. 여기는 가운데 보다 물살이 조금 약해서 조금씩이라도 앞으로 나갈 수 있었다. 아무리 그 래도 훨씬 뒤늦게 출발한 판옥선이 먼저 도착하다니. 어쩔 수 없었다. 해협에서는 여전히 대포 소리가 요란했다. 판옥선 몇 척이 온 것은 정말 다행이라고 마이룡은 생각했다. "이봐! 자네, 그만 울어. 사내자식이 말야!" 성질 화끈한 둘째 마위룡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격군이 고개를 번쩍 들더니 주먹에 힘을 잔뜩 주었다. "지는 예, 싸우고 싶습니더. 아니, 판옥선에서 노를 젓겠십니더. 원수를 갚 을 기라예. 이제 다시는 안 도망가겠심더. 지를 거제1선으로 델다 주이소." 그러나 거제1선에 배를 대려고 해도 물살 때문에 쉽지 않았다. 이 배는 우수영 바로 앞바다 양도 옆에 있었고, 마이룡과 마화룡이 안간힘을 써서 노를 저어도 저 멀리 거제1선까지 가려면 해가 질 것 같았다. "그럼 자네가 좀 저어. 안 저어본 노를 저으려니 힘들어 죽겠어." 마이룡이 그렇게 말하고는 깜짝 놀랐다. 목소리가 잔뜩 쉬어 노인 같았다. 시원한 물 한 모금만 마셨으면 소원이 없겠는데, 배에는 물이 없었다. 시퍼 런 바닷물이 무심하게 옆으로 흘러갔다. 마이룡은 입맛만 다셨다. "아, 그게 말입니더. 아! 참." 격군이 주춤거리며 일어서다 말고 머리를 긁적였다. 격군은 창피해서 거 제1선으로 되돌아갈 수도 없었다. 거제1선에서 노를 젓는 격군들은 다 같은 동네 사람들인데 이제 무슨 낯으로 돌아갈 것인가? 격군은 땀만 흘리고 말 을 잇지 못했다. "창피한 게 문젠가? 살아있는 게 최고지 뭘 그래?" "그, 그건 그래예." 마위룡이 다시 소리 지르자 격군이 말을 더듬었다. 마이룡은 어서 격군이 노를 저어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판옥선의 커다란 노를 몇 년째 저은 격 군이라면 이런 고깃배에 달린 작은 노쯤은 아무 것도 아닐 것이다. "왜선입니다!" 그때 마화룡이 외쳤다. 고깃배에 탄 사람들이 일제히 해협으로 고개를 돌 렸다. 왜선 몇 척이 판옥선에 달라붙어 밀어붙이고, 그 사이로 다른 왜선들 이 빠져 나오고 있었다. "도망가요. 어서요!" 격군이 뱃전에 주저앉으며 부들부들 떨었다. "선비님네들은 몰라예. 조총 소리는 천둥보다 요란하고예, 창칼이 맞부딪 치면 귀를 찢습니더. 기라고 가끔 우두둑카는 억수로 끔찍한 소리도 난다 아입니꺼. 하도 무섭길래 내사 헤엄도 못 치는 주제에 물에 뛰어들었다 안 캅니꺼?" (*경상도, 전라도 사투리가 마구 헷갈리는군요. 틀린 점 있으면 지적해주 십시오. 거제도 사투리는 부산, 남부 경남하고 비슷하다고 봐도 되겠죠?) 마하수가 격군을 쏘아보더니 차갑게 내뱉었다. "우린 싸우러 왔다. 위룡아! 저놈 물에 다시 처넣어라." "예, 아버님!" 마위룡이 벌떡 일어나더니 격군을 확 떠밀어버렸다. 물에 빠진 격군이 팔 을 허우적거렸지만 정말로 헤엄을 못 치는지 물살에 형편없이 떠밀려 내려 갔다. "우아악! 살려주시소! 허푸!" 마이룡과 마화룡이 그 꼴을 보고 한참 웃었다. 지금이 싸움 중이긴 하지 만 아버지가 너무한 것은 절대 아니었다. 그리고 겁에 질려 한번 도망간 사 람은 비슷한 상황이 되면 언제든지 다시 도망가게 된다는 것이 아버지 마하 수의 지론이었다. "어푸! 어푸! 내는 헤엄 칠 줄 모른다 아입니꺼! 살려주이소!" "허허! 이 사람. 자! 이걸 받게." 마성룡이 격군에게 나무 궤짝을 던져 주었다. 그리고 한마디 덧붙였다. "그걸 잡고 우수영 쪽으로 건너가게. 여기가 위험하면 더 멀리 도망가고." 격군이 죽어라 헤엄을 쳐서 궤짝을 붙잡았다. 그 순간 격군은 깜짝 놀랐 다. 그리고 천천히 일어섰다. 다리가 땅에 닿은 것이다. 궤짝은 격군이 물에 빠져 죽을까봐 던져준 것이 아니라 양도에서 우수영으로 건너갈 때 쓰라고 준 것이었다. 사실 사람 키 안 되는 물에서 빠져죽는 경우는 많다. 왜선은 판옥선들을 지나 번개처럼 빠르게 이곳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마하수가 천천히 활시위를 당겼다. "음!" - 취익! 마하수가 신음소리를 내지를 때마다 화살이 쏘아져나갔다. 여기에 마성룡 과 마위룡이 가담하자 왜선 쪽에서 연달아 딱딱거리는 소리가 났다. 가끔 비명도 터져 나왔다. "또 맞았습니다! 아버님은 명궁이십니다! 아니, 신궁이십니다!" 마이룡과 마화룡은 신이 났다. 왜군들이 화살에 맞고 픽픽 쓰러지는 것이 여기서도 보였다. "거리를 살펴라. 항상 130보다." "예, 아버님." 정신을 차린 마이룡이 얼른 노젓기를 멈췄다. 왜선은 어느새 고깃배 가까 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나 배는 천천히 뒤로 스르르 물러설 뿐이고, 왜선 이 다가오는 속도는 엄청나게 빨랐다. "뒤로 빨리 빼! 이 바보들아!" 마위룡이 다급하게 소리를 질렀다. 왜선들은 노를 저으며 오는데 고깃배 는 물살에 떠밀려가기만 하니까 거리가 순식간에 좁혀들었다. 물살이 빠른 울돌목이었다. 그러나 힘겹게 거슬러 올라가기만 하던 5부자는 속도감각을 상실한지 오래였다. 5부자 눈에는 왜선들이 마치 날 듯이 달려오는 것처럼 보였다. 마이룡은 정신없이 노를 거꾸로 젓기 시작했다. 그런데 왜선에서 왜군들 이 이쪽으로 조총을 겨누는 것이 보였다. 너무 가까워서 활을 쏘다 말고 마 성룡과 마위룡이 자세를 낮췄다. "아버님, 엎드리십시오." 맏아들 마성룡이 계속 활을 쏘려는 마하수를 몸으로 덮쳤다. 그러자 마하 수가 마성룡을 떠밀더니 노를 젓고 있는 마이룡과 마하룡을 쳐다보았다. 마 이룡은 울상이 되어 계속 서서 노를 젓고 있었다. 만약 노젓기를 멈춘다면 이 배에 탄 5부자 모두 죽은목숨이나 다름이 없었다. "아부지!" 겁에 질린 막내 마화룡이 애타게 마하수를 불렀다. 그러자 마하수가 갑자 기 벌떡 일어서며 양팔을 활짝 벌렸다. - 따다당! "으윽! 애들아. 어서, 뒤로..." 마하수가 휘청하더니 천천히 무너졌다. 가슴과 배 대여섯 군데에서 동시 에 피가 뿜어져 나왔다. 마성룡과 마위룡이 쓰러지기 직전에 껴안았지만 마 하수는 이미 절명한 다음이었다. "아버님!" "아부지이이!" 마이룡이 절규했다. 그러나 마성룡이 싸늘한 눈빛을 보냈다. "너희들은 노를 저어, 이놈들아!" 소리를 지른 마성룡이 벌떡 일어나 다시 활을 들고 쏘기 시작했다. 마위 룡도 눈물을 머금고 활을 쏘았다. 이제 두 사람은 목숨을 도외시한 듯했다. "서라. 너무 물러서지 마라. 130보다." 마성룡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화살은 끊임없이 왜선을 향해 날아 갔다. 마이룡은 눈물 너머로 그 광경을 보면서 왜선과의 거리를 재며 노를 저었다. - 뻐벙! 뻥! - 콰작작! 굉음이 울리더니 갑자기 그 왜선의 갑판이 형편없이 부서져 나갔다. 그리 고 왜군들이 무더기로 쓰러졌다. 왜선은 급히 우수영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물러서라! 위험하니 뒤로 물러서라!" 판옥선 장대에서 누군가 이쪽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해남1선이었다. "이런 쓰벌 잡것들아! 뒤질라게 도망갔다가 인자사 오냐? 이 썩을 것들 아!" 소리를 지른 사람은 마이룡이었다.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으로 해남현 감 유형을 쏘아보는 마이룡은 여전히 손에서 노를 놓지 않았다. 어느새 마 이룡과 마화룡은 왜선을 따라가고 있었다. 130보가 어떤 거리인지 그제야 두 사람은 몸서리치게 절감했다. 마성룡과 마위룡은 계속 묵묵히 활을 당겼 다. 고깃배 뱃전을 보고 상황을 파악한 유형은 잠시 말을 잃었다. 상반신이 피로 물들은 노인이 단정하게 팔다리를 편 채 누워있었다. - 끼이이익! 그때 육중하면서도 날카로운 소리가 하늘을 메웠다. 해남1선에 쫓겨 급한 김에 우수영 쪽으로 도망가던 왜선은 꼼짝달싹하지 못했다. 그 왜선을 향해 판옥선 좌현에서 화포를 모두 열어 정조준했다. "우리도 서라. 저놈들 쇠사슬에 걸렸다." 마성룡의 말은 높낮이가 전혀 없었다. 화살이 날아가 아우성치는 왜군의 등허리에 맞았다. = 와키자카군 어립선, 주베에 "목표는 적장 이순신이다." 층루에 올라온 철포대장 주베에十兵衛가 와키자카 야스하루에게 들은 말 은 단 한마디였다. 그러나 주베에는 그것이 얼마나 무거운 말인지를 깨닫고 있었다. "분부대로!" 대답을 마친 주베에는 즉시 심복 부하 2명을 층루에 불러 올렸다. 가쓰모 토勝本와 미야기宮木라는, 원래는 부하가 아니라 제자였다. "지금부터 나는 적장을 노려 쏜다. 보조하라. 히가와류 철포술의 명예가 여기에 걸려있다!" 히가와류日川流 철포술은 주베에가 지닌 저격술의 근원이었다. 이것을 선 대 계승자로부터 전수 받을 때까지 주베에는 검술 수련생보다 더욱 엄격하 고 혹독한 훈련을 감내해야 했다. 모든 것을 마치고 자격인정서라고 할만한 히가와류의 면허개전을 얻었을 때 주베에는 비로소 3대 계승자 지위를 차지 할 수 있었다. 특별히 와키자카군에 뽑힌 것도, 제자를 이끌고 전장에 나온 것도 이런 능력에 대한 인정이었다. "밑에 내 짐 속에 보면 특별히 천으로 잘 감싸진 꾸러미가 있다. 즉시 이 리로 가져와라." "핫!" 명령을 받은 제자들이 기민하게 움직였다. 그들의 몸가짐에는 스승에 대 한 존경심과 복종심이 한껏 배어있었다. 어쩌면 야스하루보다 주베에를 더 존경하는 것 같았다. 주베에는 쇠로 만든 진가사陣笠를 썼다. 삿갓모양인 이 투구는 붉게 칠해 졌으며 옆과 뒤에는 햇빛을 가리기 위한 천이 둘러져 있었다. 한 손에는 철 포를, 다른 한 손에는 철포대 단위 지휘자(鐵砲組小頭)들이나 쥐는 평범한 대나무 지휘봉을 들었다. 총을 든 팔목 위에는 화승이 둥글게 꼬아져 뱀처 럼 똬리를 틀고 있었다. 게다가 일부러 화려한 도세구소쿠 대신 평범한 철 포병들이나 입는 경갑옷을 입었다. 주베에는 상급무사 이상인 철포대장이라 는 지위로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기대하겠다, 주베에." 야스하루가 평범한 철포병처럼 생긴 주베에를 향해 담담하게 말했다. 근 습무사 가운데 한 명은 주베에라는 이름을 듣고 억지로 웃음을 참고 있었 다. 그러나 주베에가 맡은 일이 평범하지 않다는 것은 층루에 선 모든 고위 무사들이 잘 알고 있었다. 이 작전의 핵심이나 다름없었다. 주베에는 이름조차 별로 특징이 없었다. 베에兵衛나 에몬衛門으로 끝나는 이름은 하급무사 사이에 넘치도록 많았다. 유래 있는 가문 출신도 아니고 그렇다고 평민들처럼 스케助나 로郞 같은 이름을 붙일 수도 없는 중간 무사 계급은 이름을 지을 때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었다. 덕분에 평민들이 첫아들은 다로太郞, 둘째아들은 지로次郞, 셋째아들은 산 시로三次郞 하는 식으로, 하급 무사들도 이치베에一兵衛, 니베에二兵衛 하는 식으로 이름을 지었다. 기껏 조금 멋을 부린 이름이 하급무사 집안 열째아 들 주베에十兵衛와 발음이 비슷한 주베에獸兵衛나 마나베眞中兵衛 정도였 다. 아무튼 개성 없는 이름이라는 건 부정할 수 없었다.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주베에의 개성은 외형에 있지 않았다. 일본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뛰어난 철포사격 솜씨와 그에 어울리는 냉철한 성격. 그것이 주베에를 다른 모두와 확실히 구별해 주었다. 야스하루의 격려에 침착하게 대답한 주베에는 층루 앞부분에 바짝 붙었 다. 주베에의 가는 눈이 세심히 적 대장선의 층루를 살폈다. 금빛 갑옷을 입 은 장수와 붉은 갑옷을 입은 장수가 눈에 띄었다. 갑판에 서 있는 다른 조 선 장수들은 붉은 갑옷이 절반, 푸른 갑옷이 절반 정도였고, 나머지는 저격 할 가치가 없는 허름한 옷을 입은 수졸들이었다. "금빛 갑옷을 입은 자가 이순신이다." 부장 히데미쓰가 목표를 정확히 짚어주었다. 주베에는 적 대장선의 층루 밑 갑판 한가운데에 서 있는 키가 큰 장수 둘이 마음에 걸렸다. 둘 다 붉은 갑옷을 입었는데 앞에 선 장수가 뒤에 선 장수를 호위하는 식의 움직임을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목표가 결정된 이상 그들은 무시하기로 했다. "알겠습니다." 어립선은 더 이상 나아가지 않았다. 거리가 너무 가까울 경우 어립선이 위험에 처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더 이상 세키부네들이 방어선을 뚫고 지나가지 못하도록 판옥선들이 몸으로 막고 있어서 바다가 온통 와키 자카군의 배로 채워진 것도 이유였다. 해협은 총성과 포성, 그리고 함성과 연기로 가득 찼다. 주베에는 침착하게 어립선과 조선수군 대장선 사이의 거리를 눈으로 쟀 다. 그런 다음 철포를 바닥에 내려놓으며 능숙하게 탄환과 화약을 장전했다. '거리는 일 정 정도.' 일 정一町은 약 120미터다. 당시 철포의 사거리는 200미터 정도였다. 그러 나 이건 단지 명중시킬 경우 살상이 가능한 거리이지 정확히 조준해 맞출 수 있는 거리가 아니었다. 정밀도가 떨어지는 당시 철포를 가지고는 50미터 정도 되어야 비교적 정확한 조준사격이 가능했다. 그것도 모자라 어느 정도 명중률을 보장하려면 집단사격을 시행해야 한다. 장전에 긴 시간이 소요되 기 때문에 그 사이를 메우기 위해 교대로 쏘는 3단철포술이 나오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건 일반적인 철포병들의 실력일 뿐이었다. 히가와류 철포술이 란 특별한 이름이 알려진 것은 바로 이런 상식을 초월하기 때문이었다. 주 베에는 방금 화약을 장전한 철포로 충분히 그 거리에서 정확히 맞히는 조준 사격이 가능했다. 그것이 주베에의 실력이었다. '사카이쓰쓰로는 분명 가능성이 없는 거리다. 그렇지만 난반쓰쓰라면...' 철포는 전국시대 후기에 사카이에서 대량생산되었다. 철포병들이 가장 많 이 쓰는 구경 12밀리의 이 사카이쓰쓰堺筒로는 어떤 수단을 쓴다 해도 120 미터 앞의 목표를 정확히 맞힐 수 없다. 주베에가 애용하는 철포는 다행히 도 사카이쓰쓰가 아니었다. 검게 칠한 묵직한 16밀리 구경의 총구가 주베에 앞에서 입을 벌리고 있었 다. 다네가시마에서 처음 생산된 철포의 계통을 잇는 이 난반쓰쓰南蠻筒는 파괴력과 사정거리 면에서 압도적으로 뛰어났다. 세세한 조작 등에서 다루 기 힘든 점이 있지만 그건 철포술을 제대로 익힌 주베에가 보기에는 명품에 흔히 따르는 자그마한 까탈스러움에 지나지 않았다. '맞힐 수 있다.' 그것이 사람을 죽이는 것이라는 감각은 별로 없었다. 정지된 과녁이든 사 람이든 멀리서 보면 그저 점 하나에 불과했다. 명품 만들기에 도전하는 장 인처럼 주베에는 목표를 맞히는 것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그 목표가 주는 의미 같은 건 생각하지 않았다. 탄환을 넣은 주베에가 세심하게 양을 조절해가며 화약을 넣었다. 보통 철 포병들은 표준적인 탄환을 쓰고 화약도 미리 지정된 양만을 넣고 쏜다. 총 신이 충분히 안전한 한도 내에서 어느 정도의 폭발력만을 주는 무난한 방식 이었다. 그렇지만 주베에는 납탄을 넣은 뒤 손끝으로 세심하게 측정해가며 가능한 많은 화약을 집어넣었다. 폭발력을 한계까지 끌어내려는 의도였다. 지나치면 탄환이 발사되는 대신 총신이 파열되며 쏘는 사람이 다치게 된다. 그 미묘 한 화약량 조절법이 바로 철포술의 중요한 부분이었다. 진동. 주베에는 물살이 주는 가벼운 진동에 특별히 주의했다. 그가 지금 총을 겨누고 쏠 곳은 평평한 땅이 아니라 물결에 이리저리 흔들리고 기울어 지는 배 안이었다. 특히 위로 우뚝 솟은 층루는 배의 흔들림이 크게 전달됐 다. 주베에는 그 규칙적인 진동을 몸으로 잘 기억했다. 최종 발사단계에서 오차를 줄이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분부하신 걸 가져왔습니다." 제자들이 한아름이나 되는 물건을 들고 층루로 돌아왔다. 주베에를 보는 제자들 눈은 존경과 기대로 가득 차 있었다. "거기 풀어놓고 대기해라. 보조하는 법은 잊어버리지 않았겠지?" "예. 물론입니다." 주베에는 익숙한 솜씨로 불접시를 확인하고 화승을 잘랐다. 그리고 손때 묻은 철포의 총신(台木) 위를 잡고 층루 앞을 가린 방패판 위에 올려놓았다. 거기에 오른쪽 눈을 가져다 대며 조심스럽게 사격자세를 취했다. 그러자 주베에 눈앞에 또 하나의 세상이 펼쳐졌다. 철포의 가늠쇠(先目當) 와 가늠자(前目當)사이로 보이는 작은 세상. 그가 수없이 보았던 광경이었 다.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청각을 마비시키고 오로지 멀리 보이는 작 은 세상에 집중해야 한다. 그 작은 공간 속에서는 화염이 연달아 치솟고 사 람들이 죽고 죽이고 있었다. '금빛 갑옷을 입은 자.' 그 세상의 중심에 한 사람을 끼워 넣기란 쉬운 일이었다. 눈 위에서 화승 불꽃이 타 들어가는 작은 소리를 내는 가운데 금빛 갑옷을 입은 장수의 투 구가 조준선 안에 들어왔다. 투구는 윤기 나는 검은 바탕에 황금빛 장식이 되어 있었다. 목표는 방패와 두꺼운 갑옷으로 가려진 가슴 아랫부분에 비해 얼굴 위쪽 에 대한 방비는 허술한 편이었다. 주베에는 방아쇠에 걸친 손가락을 조심스 럽게 당겼다. - 땅! 불꽃이 아래로 내려오는 순간 묵직한 진동이 두 손과 몸을 때렸다. = 경상우수영 좌선, 우치적 "이 바보야! 단석을 던져서 지붕에 구멍을 낸 다음에 화공을 하란 말 이야!" 우치적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선장 뒤에서 수졸들이 불붙은 짚더 미를 왜선에 계속 던졌지만 왜선의 지붕 때문에 거의 효과가 없었다. 송 한은 안 들린다는 듯 귀에 손을 갔다 대었다. 옆에서 소리 질러도 안 들 릴 정도로 배 위는 온갖 소리로 가득 찼다. 우치적이 둥그런 단석을 집어던지는 시늉을 해 보인 다음에야 송한이 알아듣고 수졸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씨익 웃는 송한에게 우치적이 손짓 했다. "무슨 일이십니까?" 계단을 뛰어 올라온 송한에게 우치적이 왼쪽 무릎을 꿇고 말했다. "지금은 바로 옆에 적선을 화포로 쏠 수 없잖아? 그건 포기하고 송여 종이나 정응두 배에 붙은 왜선에 쏴버려. 그쪽도 우릴 향해 쏘게 하면 돼." "그건, 잘못하면 위험하잖습니까?" "포수들 실력이 이 정도면 해볼만 해. 당하기만 할 수는 없잖아? 시간 이 없어!" 우치적이 일어선 다음 일부러 시선을 뒤쪽으로 돌렸다. 아직도 판옥선은 왜선들에 밀리고 있었다. 아까 빠져나간 왜선 다섯 척은 해남현감 유형 등이 잘 막아내고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계속 밀리 다간 저 멀리 피난선들 모인 곳까지 밀릴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들었다. 뒤로 갈수록 바다 폭이 넓어지는 만큼 왜선들이 빠져나갈 기회도 많아진 다. 시간이 없었다. - 퍽! 우치적이 소리가 난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김탁이 멀뚱멀뚱 장대 기둥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 시선 끝을 따라가니 기둥 위쪽에 손가락 만 한 구멍이 나 있었다. 이게 무엇을 뜻하는지 아는 데에는 별로 오래 걸 리지 않았다. "엇! 조심하십시오, 사또. 총탄이 날아오기 시작했습니다." "자넨 어서 내려가게. 내 말 알아듣겠지?" 김탁의 외침과 우치적이 송한에게 말하고 등을 떠민 것은 거의 동시였 다. 송한이 화포장과 포수들에게 뭐라 지시하는 것을 보면서 우치적이 좌우를 살폈다. 좌선에 달라붙은 왜선들 말고는 바로 가까이 있는 왜선은 없었다. 좌 선 앞에 가까이 다가온 왜선이 있었지만 다락이 엉망으로 부서진 다음이 고 지금은 불에 타고 있었다. 조총을 쏴서 이쪽을 정확히 맞힐 수 있는 왜선은 근처에 없다는 뜻이었다. 다만 저 앞에 화려한 깃발이 수없이 나부끼는 커다란 왜선이 다른 배 들에 둘러싸인 모습이 눈길을 끌었다. 우치적은 한눈에 그 배가 왜군의 대장선임을 알아보았다. 우치적이 헛기침을 했다. "그깟 눈먼 유탄에 맞겠어?" "거리가 꽤 됩니다만, 이 정도 거리에서 죽은 장수가 있습니다." "보성군수 말인가? 그래도 설마 이 거리에서..." 우치적이 아래를 내려보았다. 안홍국은 안골포에서 조총탄에 맞아 죽 었다. 그 후임으로 새로 보성군수가 된 자는 부하들을 지휘하며 열심히 활을 쏘고 있었다. 그 사이에 김탁이 사방을 살폈다. "어딘가 뛰어난 조총수가 사또를 노리고 있는 게 분명합니다." "그래? 그럼 이걸 기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우치적도 열심히 눈알을 굴렸다. 보통 생각하는 조총 사거리 이상의 거리에서 총탄이 날아오고 있는 것은 분명한데 그게 어딘지 알 수 없었 다. "우리 계획이 성공했으니 기뻐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하!" 김탁이 말은 그렇게 했지만 초조한 기색이 역력했다. 적이 이쪽을 노 리고 있지만 이쪽은 적의 위치도 알 수 없으니 초조감이 더했다. 우치적 은 괜히 호기를 부렸다. "이런 생각을 하다니. 왜놈들이 바보는 아니군 그래?" "바보는 아니지만, 별로 뛰어나지도 않은 것 같습니다. 사또를 통제사 로 알고 있나 봅니다." "그렇게 말일세. 나 같은 청년 미남을 통상과 혼동하다니, 무척 섭섭하 군." 사방을 찬찬히 살핀 두 사람의 시선이 어느덧 앞으로 합해졌다. = 와키자카군 어립선, 주베에 "좌측으로 두 뼘 빗나갔습니다." 가쓰모토가 침착하게 주베에한테 탄환의 탄착점을 알려주었다. 주베에 옆에 선 가쓰모토 손에는 남만에서 수입된 망원경이 들려있었다. 포르투갈인이 항해에 쓰는 이 물건을 저격에 이용하는 것 역시 히가와류 만 의 특징이었다. 저격하는 자는 철포에만 집중하고 사격이 끝난 순간 결과는 다른 사람이 알려주는 것. 바로 이런 분업을 통해 집중력을 비약적으로 향 상시킬 수 있었다. 진동을 느낀 동시에 주베에 눈앞에 있던 작은 세상은 잠시 사라졌다. 청 각과 다른 감각을 정상으로 돌려놓은 주베에는 가쓰모토가 불러준 오차를 수정하기 위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철포를 교환하시겠습니까?" 주베에 뒤에 앉아있던 미야기가 풀어놓은 철포 꾸러미를 정리하며 물었 다. 미야기는 철포교환을 담당했다. 꾸러미에는 각기 위력과 사거리 등 특성 이 다른 철포 다섯 개가 놓여 있었다. "아직이다. 그보다 히데미쓰 님!" 발사를 끝내고 방패판 뒤로 몸을 숨긴 주베에가 부장 히데미쓰를 보며 차 갑게 눈짓을 했다. "이곳은 위험합니다. 잠시 야스하루 님을 모시고 아래쪽으로." 저격을 하기 위해 앞으로 나선 어립선은 적과 거리가 너무 좁혀져 있는 편이었다. 미리 예정된 계획이긴 했지만 어립선은 판옥선의 화포 사거리 안 쪽으로 이미 들어왔고, 호위선들이 어립선을 몸으로 막아 보호하기 위해서 둘러싸고 있지만 위험은 다른 곳에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조선의 자랑, 활이었다. "나보고 물러서라고?" "예. 조선군 활은 일본 활과 달리 상당히 강합니다. 공격받은 쪽에서도 이 쪽으로 반격해 올 것은 당연한 법. 야스하루 님이 이런 사소한 일 때문에 위험에 처할 필요는 없습니다." 야스하루의 반발은 미리 예상하고 있었다. 그래서 주베에는 침착하게 설 명했다. 그러나 속으로는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조선군이 쏜 화살에 죽든 말 든 그다지 중요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주베에는 다만 높은 사람이 옆 에서 자꾸 참견해서 집중력을 분산시키지 않길 바랄 뿐이었다. "알겠다. 나는 필요 없겠지. 그대에게 맡기겠다." 혀를 쯧쯧 차면서도 야스하루는 의외로 얌전하게 주베에의 말을 들었다. 아무래도 한산섬에서의 패배가 불같은 성격을 많이 누그러뜨린 모양이라고 주베에는 짐작했다. 야스하루가 층루에서 물러남에 따라 히데미쓰를 비롯한 중신들도 모두 층루를 내려갔다. "가쓰모토. 적선의 깃발을 살펴라. 어느 쪽으로 흔들리나?" 재장전 동작을 재빨리 취하면서 주베에의 머릿속은 쉴새없이 회전했다. 방금 쏜 난반쓰쓰는 그가 지난 10년간 가장 많이 쓴 총이었다. 특성은 너무 도 잘 파악하고 있었다. 적과의 거리뿐만 아니라 배의 진동이라는 요소도 염두에 넣어서 쏘았다. 그럼에도 두 뼘이나 차이가 생겼다. 주베에는 아무래 도 그것이 바람의 영향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다. 조선 대장선에 부는 바람 은 어립선을 스치고 부는 바람과는 방향이 조금 달랐다. "왼쪽으로 펄럭이고 있습니다. 그렇게 센바람은 아니지만 약하지도 않습 니다. 중간 정도의 바람인 것 같습니다." 가쓰모토도 이런 주베에의 생각을 읽었는지 바람의 세기를 자세히 언급했 다. 사격을 마친 주베에가 몸을 숨기는데 비해 가쓰모토는 끊임없이 몸을 내밀고 망원경으로 목표 주변을 살펴야 했다. 어떻게 보면 층루에 있는 사 람 가운데 가장 위험한 위치였다. "알겠다." 장전을 마친 주베에는 다시 상체를 올려 방패판 위로 내밀었다. 그리고 천천히 철포를 겨눴다. 치익 하고 연기를 뿜는 화승의 불길이 다시 그를 반 겼다. 조준선 위로 보이는 적의 모습에 변화가 생겼다. 금빛 갑옷을 입은 자는 의외로 태연하게 서 있었지만 옆에 있는 붉은 갑옷은 크게 당황한 듯했다. 총탄이 노리는 당사자는 멀쩡한데 오히려 옆에 있는 자가 소란을 떠는 게 우스웠다. 망원경을 통해 더 자세히 보고 싶은 충동을 참으면서 주베에는 재차 눈앞에 보이는 세상에 집중했다. 물론 그 전에 붉은 갑옷에게 속으로 한마디 던져주는 걸 잊지 않았다. '바보 녀석! 내가 노리는 건 네가 아니다. 안심해!' 주베에는 이번에 탄환을 쏜 후에 한번 계속 그쪽을 지켜보기로 마음먹었 다. 그가 익힌 철포술에서는 일단 쏜 후에는 재빠른 장전과 탄착점 관측만 을 중시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왠지 적의 반응을 살피는 게 더 중요할 것 같았다. 물론 이번의 일격이 제대로 맞아서 그럴 필요도 없으면 더 좋겠지 만. - 투앙! 방아쇠를 당긴 후 이번에는 다소 길게 들리는 발사음이 났다. 두 번째 쏘 는 총이라 총신이 뜨겁게 달궈져 총의 특성이 또 달라진다. 열로 인해 총신 이 팽창한 것이다. 주베에는 그 점을 상기하며 목표를 살폈다. 자세히는 보이지 않았다. 그렇지만 역시 이번에도 명중되지는 않았다. 금 빛 갑옷의 검은색 투구 위에서 뭔가 번쩍이는 점이 보인 듯했지만 확실치는 않았다. 그리고 다시 옆에 선 붉은 갑옷이 이리저리 흔들리는 것만 보였다. "투구 끝 부분에 명중! 아깝습니다!" "감정은 넣지 마라." 가쓰모토에게 차갑게 말하면서도 주베에 역시 내심 아쉬웠다. 바람의 영 향이 계산됐지만 이번에도 약간의 차이가 생겼다. 뜨거워진 총신의 특성이 다르다는 점은 분명 염두에 두었지만 탄착점이 조금 위로 솟을 줄이야. 이 번에는 그 차이가 결정적인 모양이었다. "구니토모쓰쓰國友筒를." 살며시 난반쓰쓰를 내려놓으며 주베에가 미야기에게 손을 내밀었다. "여기 있습니다." 미야기는 말이 끝나는 동시에 총을 넘겨주었다. 난반쓰쓰보다는 가볍고 총신이 긴 구니모토쓰쓰 특유의 느낌이 주베에의 손에 느껴졌다. 오우미 지 방에서 생산되는 이 총은 13밀리 구경으로 난반쓰쓰보다 파괴력이 떨어지는 대신 탄도의 정확성이 월등했다. 총신 자체는 사카이쓰쓰의 104.5 센티보다 짧은 100센티임에도 불구하고 오우미 특유의 정밀도 높은 기술이 적용된 효 과였다. '모자라는 파괴력은 이걸로 보충하면 돼.' 철포를 넘겨받자 주베에는 곧 허리에 차고 있던 탄환주머니(玉入) 두 개 가운데 이제까지 쓰지 않은 곳을 열어 탄환을 꺼냈다. 보통의 하얀색 납탄 환이 아닌 청록색 탄환이 나왔다. "연청동탄(鉛靑銅玉)입니까?" 그것을 알아본 제자 미야기가 나직하게 물었다. 미야기에게는 이것이 실 전인 동시에 존경하는 스승 주베에의 솜씨를 직접 견습할 수 있는 수련의 한 과정이었다. 열심히 배우려는 자세이고, 당시 철포술은 고급 기술이었다. 주베에는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연청동탄은 구리를 주로 하고 납과 철이 섞인 합금탄이다. 당시 철포는 안에 강선이 없었다. 그래서 총알은 총강 안에서 일정 궤도 를 그리는 게 아니라 타닥거리며 튀어나간다. 게다가 경도가 낮은 납탄환은 총강 안에서 탄이 찌그러지므로 탄도 특성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 납탄환은 쇠로 만든 철탄(鐵玉)으로 발전했고, 전국시대 후기에는 합금으로 만든 탄환 이 쓰이기 시작했다. 미야기는 어째서 그럼 처음에 난반쓰쓰로 그 연청동탄을 쏘지 않았냐는 어리석은 질문을 하지 않았다. 그가 지금 건네준 구니토모쓰쓰의 특성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높은 정밀도와 튼튼함을 자랑하는 구니토모쓰쓰는 합금탄을 힘있게 쏘기 위해 과도하게 채워진 화약량에도 버틸 수 있는 몇 안 되는 철포였다. '이번에는 명중시킨다.' 주베에가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이제까지 쏜 것은 일종의 시험사격이라 생각하면 된다. 모든 요소가 다 계산된 지금부터가 진짜 승부였다. 마침 배의 진동이 갑자기 눈에 띄게 약해지기 시작한 것도 느껴졌다. 주 베에는 그것이 급격하게 적선 쪽으로 흐르던 물살이 조금씩 잦아든 때문이 란 걸 깨달았다. 느낌이 아주 좋았다. '따져보니 별로 승부도 아니군.' 주베에 생각대로 일방적으로 이쪽에서 쏘고 있는 것뿐이었다. 보통 승부 라 하는 것은 이기지 않으면 지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이기느냐 마느냐 만 있을 뿐 지는 경우는 계산에 없었다. 적은 아직도 이쪽을 알아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미쯔(세번째).' 마음속으로 숫자를 한번 세며 숨을 고른 주베에는 경쾌하게 방패판 너머 로 다시 몸을 내밀고 철포를 겨냥했다. "아!" 그런데 조준선에 금빛 갑옷을 놓으려던 주베에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 속에 비친 상대의 모습이 아까와 전혀 달랐기 때문이었다. 유유히 활을 들 고 시위를 당긴 금빛 갑옷의 장수는 바로 이쪽, 주베에를 향해 활을 겨누고 있었다. 비록 확실하게 보이지는 않았지만 주베에는 느낄 수 있었다. 그 장수의 시선과 그 화살촉이 겨누고 있는 것이 바로 자기란 것을. 그 눈빛까지 느껴 지자 주베에는 갑자기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주베에 님! 적장이..." 망원경을 통해 보고 있으면서도 뒤늦게 적장의 움직임을 알아챈 가쓰모토 가 소리쳤다. 그러나 주베에는 온몸으로 느껴지는 공포감을 억누르려는 듯 신경질적으로 방아쇠를 강하게 당겼다. 동시에 주베에는 적장이 활시위를 놓는 것을 보았다. - 빡! 둔탁한 발사음이 울렸다. 한껏 넣은 화약과 합금탄이 결합되어 내는 그 소리는 원래 그렇지만 이상하게 듣던 것보다 더 탁했다. 마치 흔들린 주베 에의 심리를 나타내는 것만 같았다. - 쒸이잉! 그리고 미처 피할 사이도 없었다. 검은 색 점 하나가 다가온다고 느낀 순 간, 주베에가 쓴 진가사 중앙에 작은 화살이 맞고 튀었다. - 깡! 약간의 충격과 함께 귀를 울려대는 쇳소리가 주베에의 뇌수를 녹일 듯이 진동했다. 미야기가 놀라며 다가왔다. "스승님! 괜찮으십니까?" "괜찮다. 호들갑 떨지 마라." 침착하게 대답하긴 했지만 주베에 얼굴에는 긴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두 꺼운 쇠로 만든 진가사였기에 망정이지 가난한 아시가루나 잡병들이 쓰는 나무로 만든 것이었으면 단번에 머리를 뚫려 즉사했을 것이다. 방패판 뒤로 몸을 숨긴 채 놀라움을 삭인 주베에가 쓴웃음을 지었다. '드디어 진짜 승부가 됐군. 저쪽도 나를 정확히 노리고 있어.' 역사전쟁소설 // 남해 // 2권 copyright (C) 2001 김경진 안병도 신재호(필명) 공저 업로드 김경진 (전쟁소설 데프콘 1, 2, 3부, 동해, 남북, 판타지 하늘길잡이 공동저자) * 고칠 점이 있다고 생각하시면 언제든 18번 오발탄 게시판에 올리시 거나, 저나 안병도 님께 메일로 의견을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조선 ; 김경진 amraam07@hitel.net 일본 ; 안병도 031038@hitel.net * 독자분 중에 柳씨 성 가진 분 계십니까? 해남현감 柳珩을 유형으로 할 지, 아니면 류형으로 적어야 할 지 의견을 주시기 바랍니다. 두음법칙에 따 르자면 유, 柳씨 종친회에서 주장하기로는 류로 알고 있는데 확실치 않습니 다. 교과서나 신문을 검색하면 유관순/류관순으로 각자 따로 표기됐던데 남 해에서는 柳씨 성 가진 분 의견에 따르겠습니다. 6. 총과 활 (2) = 고깃배, 마이룡 "끄아아아아~" 등에 화살이 꽂히고 온몸에 불이 붙은 왜인이 물로 뛰어들었다. 그 왜 인은 위는 불에 타고 아래는 물에 잠긴 왜선의 무너진 다락에서 간신히 빠져 나온 노꾼이었다. 우수영 앞바다 물 속에 잠긴 쇠사슬은 왜선을 옆 으로 반쯤 기울게 한 다음 결코 놓아주지 않았다. 마이룡은 마화룡과 함께 기계적으로 노를 저었다. 왜인이 양도를 향해 헤엄쳐 달아나고 있었다. 뱃머리에 앉은 마위룡이 아버지 마하수가 쓰던 피묻은 철퇴를 높이 치켜들었다. 얼굴이 새카맣게 탄 왜인의 눈이 크게 떠졌다. - 퍼걱! 맏아들 마성룡은 활을 굳게 쥔 채 불타는 왜선을 노려보고 있었다. 해 남1선에 탄 군사들은 묵묵히 이들을 지켜볼 뿐이었다. 화포와 불화살을 쏘아 배를 부수고 불태운 것은 해남1선이었지만 마무리는 마하수의 네 아들이 거의 다 해치웠다. 왜병들에게 활을 쏘려던 군사들도 차마 4형제 의 분노를 거스를 수 없어 활을 내렸다. 뒤에서는 계속 포성과 함성이 요란했다. 하지만 우수영 앞바다에서는 잠시 무거운 침묵이 이어졌다. "4인 의사義士들은 들어라!" 판옥선에서 들려온 소리였다. 마이룡이 눈물 너머로 묵묵히 장대를 올 려보니 젊은 장수가 장대 위에서 호령하고 있었다. 며칠 전 진사 백진남, 정명설, 문영개 등 뜻이 맞은 피난민들과 함께 통제사를 뵐 때 옆에 서 있던 젊은 장수, 해남현감 유형이었다. "장하다! 그대들은 목숨을 돌보지 않고 훌륭히 잘 싸웠다. 마공께서는 하늘에서도 당신의 아들들을 자랑스러워하실 게다." 전혀 양반답지 않은 말이었지만 4형제를 위로해주기에는 충분했다. 마 이룡이 아버지 시신을 보며 뱃전에 털썩 주저앉았다. 못난 아들을 살리 려 대신 몸을 던지시다니, 참으려 해도 자꾸 어깨가 들썩거렸다. 그러나 터져 나오는 울음소리는 간신히 눌러 삼켰다. "그러나 이곳은 위험하고 작은 배로 적선과 싸우기는 더더욱 어렵다. 어서 뒤로 물러서거나, 아니면 이 판옥선에 같이 타고 함께 싸우자." 임진왜란 때 적선이라 불린 왜선은 敵船이 아니라 賊船으로 기록됐다. 조선을 침략한 일본군은 한 국가의 정식 군병이 아니라 도적에 불과하다 는 뜻이었다. "우리는 아버님의 뜻에 따라 계속 이 배로 싸우겠다!" 마성룡이 활을 높이 들어 외쳤다. 사실 아버지 시신을 놓아두고 싸우 기도 그렇고 물러서기도 그랬다. 다른 왜선은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고, 그곳에서는 조선수군에게 쉽지 않은 싸움이 계속됐다. "그럼 그대들은 아버님의 상구喪柩를 고향에 모신 다음 싸움터에 나오 라! 자식된 도리로서 아버님 영전에 술 한 잔은 바쳐야 할 것 아닌가? 그것이 충과 효에 합당하지 않겠는가?" 유형의 말에서는 다급한 마음에 병사 하나라도 더 끌어들이거나 전공 을 빼앗으려는 사심 따위는 전혀 없었다. 그리고 4형제의 자존심에 상처 를 주지 않으려는 배려가 듬뿍 담겨 있었다. 마이룡은 그런 마음 씀씀이 가 더 고마웠다. 그러나 고향 장흥 땅은 왜군이 휩쓴 지 이미 오래였다. "알겠소. 그러나 왜적과 싸우라는 아버님의 뜻을 받들어야 합니다. 일 단 아버님 시신을 다른 배에 옮긴 다음 현감의 배에 타고 같이 싸우겠 소." 마성룡이 말을 마친 다음 주저앉아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마위룡도 아버지 시신 옆에 앉아 통곡했다. "기다리겠다. 그럼 우리는 왜적들과 싸우러 먼저 가겠다." 마이룡과 마화룡은 뒤에서 들려오는 유형의 말을 흘리며 노를 저었다. 진사 백진남의 배가 가까이 다가와 뭐라고 소리쳐 불렀지만 그런 소리 따위는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저 멀리 피난선 100여 척이 몰려 있는 바다가 이 배가 갈 곳이었다. 그러나 이기지 못할 싸움을 위해 다시 돌아와야 했다. 이번에는 4형제가 싸울 이유가 확실히 있었다. 하얀 갈매기가 끼룩거리며 푸른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 경상우수영 좌선, 우치적 "목표는 내가 분명하네. 하지만 자네도 조심하게. 자넨 너무 자주 몸을 드러내고 있어!" 우치적이 화살을 재면서 김탁에게 소리를 질렀다. 우치적은 아까 투구 끝에 탄환이 맞은 다음부터 귀가 잘 들리지 않았다. 아직도 머리에서 윙 윙 울리는 소리가 나고 속이 메슥거렸다. 저 구석에는 탄환에 맞아 부러 진 뾰족한 투구 끝이 빨간 술과 함께 나뒹굴었다. 좌선 갑판에서는 바로 옆에 붙은 왜선이 아니라 다른 판옥선에 붙은 왜선을 향해 화포를 쏘느라 무척 시끄러웠다. 송여종과 정응두의 판옥선 에서 쏜 차대전이 좌선에 붙은 왜선에 맞아 부서지는 소리도 요란했다. 그러나 갑판에서의 싸움과 전혀 동떨어진 싸움이 이 장대 위에서 계속됐 다. "저런 놈은 어떻게든 반드시 해치워야 합니다." 김탁이 다시 방패판 사이로 몸을 내밀었다. 통아에 끼운 화살이 높은 마찰음을 내고 날아가 왜선 속으로 사라졌다. "우리가 당하면 그 다음에는 통상이 맞습니다. 갑판에서는 저 왜선에 서 쏜 조총 탄환이 여기까지 닿으리라 생각 못할 것입니다. 그럼 차례로 쓰러질 뿐입니다. 반드시 저놈을 잡아야 합니다!" 김탁이 화살통에서 애기살만 열 네 개나 뽑아들어 동개에 가득 꽂았 다. 쉽지 않은 싸움이라고 생각한 듯했다. 우치적이 방패판 사이에 앉아 물끄러미 갑판을 내려다보았다. 키가 큰 송희립이 우뚝 서서 통제사를 가리고 있었다. 그것은 송희립의 충정이겠 지만 멀리서 볼 때 이 모습은 확실히 눈에 띄었다. 김탁 말처럼 저 왜군 대장선에서 쏘는 총탄에 우치적과 김탁이 당한 뒤에는 당연히 다음 목표 는 송희립과 통제사가 될 게 뻔했다. 통제사를 죽이지 않으려면, 이제는 그 뜻이 '나라가 망하지 않으려면'과 같지만, 우치적이 끝까지 살아남아 서 먼저 왜군 조총병을 쓰러뜨려야 했다. 우치적이 슬쩍 일어나 방패판 사이로 몸을 내밀었다. 느낌이 이상하다 싶은 순간 즉시 몸을 낮췄다. 바로 그때 왜군 대장선 위에서 불빛이 번 쩍였다. - 빠각! 장대 뒤쪽 방패판 윗부분이 반쯤 깨져나갔다. 조금 전까지 우치적이 몸을 내밀었던 그 방패판 사이를 지나간 총탄이 분명했다. 우치적은 순 간 아찔했다. 이번에는 방패판이 깨질 정도로 강한 탄환이었는데, 거기에 맞았으면 굉장히 아플 뻔했다. "그놈은 조총을 쏜 다음에 바로 몸을 숨겨버립니다." 김탁이 활을 쏜 다음 다시 화살을 통아에 넣고 시위를 천천히 당겼다. 장전을 마친 왜군이 다시 머리를 내민 순간 쏘려는 것이다. 우치적도 함 께 시위를 당겼다. 화려한 왜선에 세워진 기와집 같은 곳에는 대나무를 묶은 방패판이 옆 으로 늘어져 있고, 다른 왜군 하나가 총이 아닌 이상한 짧은 것을 들고 이쪽을 보고 있었다. 그러나 별로 위험한 존재 같지는 않았다. 그때 시커먼 삿갓이 대나무방패 위로 솟아올랐다. 그리고 그 삿갓 밑 에서 조총과 함께 사람 얼굴이 드러났다. - 차착! 우치적과 김탁은 화살을 동시에 날린 다음 잽싸게 주저앉았다. 목표가 있는 곳에서 불꽃과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 같다는 것은 다만 느낌뿐이었 다. - 빡! 조금 전에 부서진 방패판의 모서리에 총탄이 박혔다. 이번에도 왜군 조총병이 우치적을 향해 정확히 쏘았다는 뜻이었다. 우치적 이마에 식은 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왜병이 총을 쏘는 것을 보고 나서 피하면 이미 늦는다. "젠장! 누가 조총 사거리가 40보라고 했어? 100보가 넘잖아? 그리고 저놈이 쏘는 조총은 활보다 훨씬 정확해. 우린 명궁이 아닌데 말야! 변 군관! 변존서 어디 갔어?" 우치적이 갑판을 향해 소리를 질렀지만 이곳 장대를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더욱이 하필 그때 질려포통이 연달아 터지는 소리가 요 란하게 판옥선을 울렸다. 우치적은 변존서의 활솜씨가 이때만큼 부러운 적이 없었다. "자네, 알아? 저놈이 쓴 삿갓은 쇠로 만들었나봐! 보이는 건 눈 뿐인데 어떻게 맞혀?" 우치적이 엎드린 채 방패판 틈새로 왜선과의 거리를 재고 또 쟀다. 아 무리 봐도 100보 정도였다. 보통 때라면 편전 사거리로는 충분하지만 조 총에는 거의 맞지 않을 거리였다. 그런데도 총탄은 정확히 우치적을 노 리며 날아오고 있었다. "죄송하지만, 사또. 사또가 미끼가 되어 주시겠습니까? 그 사이에 제가 적을 노려 쏘겠습니다." "음..." 우치적이 김탁을 위아래로 번갈아 쳐다보았다. 김탁이 활을 못 쏘는 편은 아니지만 우치적보다 결코 잘 쏜다고 할 수는 없었다. 오랜 수련기 간이 필요한 활솜씨는 어느 정도까지는 쏘는 사람의 나이에 크게 좌우되 기 마련이었다. 그러니 20대 초반인 김탁은 20대 후반인 우치적에 비해 조금 더 연습해야 했다. 우치적이 걱정하는 걸 알아챘는지 김탁이 빙긋 웃으며 흉갑을 벗는 시 늉을 했다. "그럼 갑옷을 바꿔 입으시든지요." "됐네. 내가 미끼가 되지. 잘 낚게." 우치적이 비칠거리며 일어났다. 통아에 화살을 메긴 우치적이 조금 시 간을 끌자 김탁이 재촉했다. "준비됐습니다!" "알았어, 그래. 자, 하나아아. 두우우울. 안되겠다. 감목관, 자네가 불 러!" 우치적은 다리가 조금 후들거렸다. 배도 싸하게 아팠다. 생각해보니 오 줌을 눈지도 꽤 오래된 것 같았다. 목도 무척 말랐다. 갑자기 통제사나 선장한테 뭔가 중요한 말을 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시작하겠습니다, 사또. 자! 하나, 둘." 우치적은 김탁이 너무 빨리 센다고 나무라고 싶었다. 그러나 셋은 바 로 앞에 있었다. "셋!" 방패판 사이로 잽싸게 몸을 내민 다음에 활을 쏘려는 순간이었다. 왜 선에서는 벌써 하얀 연기가 치솟아 올랐다. 깜짝 놀란 우치적이 뒤로 벌 렁 넘어졌다. - 빠박! "어이쿠!" 다른 곳이 아니라 엉덩이가 아픈 걸 보니 탄환에 맞지는 않은 것 같았 다. 얼른 몸을 일으켜 앉은 우치적이 뒤를 살폈다. 조금 전에 탄환이 명 중한 뒤쪽 방패판에 새로운 구멍이 생겼다. 아까 난 구멍과는 거리가 겨 우 손톱 하나 차이밖에 나지 않았다. "헉헉! 무서운 놈이다. 어떻게 됐나?" "아슬아슬하게 적이 피했습니다. 죄송하지만 한번 더!" 김탁은 방패판 사이로 활을 겨눈 채 결코 왜선에 고정된 시선을 돌리 지 않았다. 우치적이 힘겹게 일어서자 김탁이 바싹 마른 소리를 질렀다. "준비됐습니까? 하나, 둘, 셋!" 우치적이 몸을 내밀면서 활을 겨눴다. 그러나 이번에는 왜병이 조총을 쏘지도 않고 숨어버렸다. 하마터면 헛되이 화살을 쏠 뻔했다. 힘들게 계 속 활을 겨누고 있는데, 왜병이 갑자기 오른쪽 끝에서 나타나 조총을 겨 눴다. 우치적이 서둘러 겨냥해 화살을 날렸다. 그러나 제대로 맞지는 않을 것 같았다. 거의 동시에 조총에서 불꽃이 뿜어졌다. 우치적이 잽싸게 옆 으로 굴렀다. 총탄이 뺨을 스치며 지나간 것 같았다. "자! 준비됐습니까? 하나, 둘." 또 다시 김탁의 재촉이었다. 우치적이 서둘러 일어서며 혀를 내둘렀다. "으... 싫다!" = 와키자카군 어립선, 주베에 긴장과 불안. 그 속에서 다시 한 발씩의 공격을 몇 번인가 주고받았다. 주 베에는 화약과 불꽃에 뜨거워진 눈동자를 잠시 감았다 떴다. 눈앞에 조그만 하얀빛 몇 개가 떠돌았다. 시력과 집중력이 떨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지독히도 강한 놈이야. 과연 총대장답다." 주베에는 자기도 모르게 적을 칭찬했다. 제자들은 너무 긴장해서 대꾸도 하지 못했다. 아무리 길게 잡아도 세 방이면 끝날 것 같던 싸움이 예상보다 엄청나게 길어지고 있었다. 금빛 갑옷을 입은 자는 방패판 아래로 적당히 몸을 숨기면서 주베에를 향 해 위협적인 화살을 날렸다. 주베에도 몸을 걱정하면서 쏘아야했다. 옆에 선 붉은 갑옷을 입은 적장이 날리는 화살도 결코 만만치 않았다. '그런데 어떻게 이리 오래 집중력을 유지할 수가 있지?' 주베에의 마음속에서 적의 존재가 점점 커져갔다. 주베에는 금빛 갑옷을 입은 자가 분명 그 유명한 조선장수 이순신이라 생각했다. 입으로는 불을 내뿜고 하늘을 날아다니면서 통나무 만한 화살을 한꺼번에 열 개씩 쏘아댄 다는 소문은 분명 과장됐겠지만, 활솜씨는 정말 기가 막혔다. 실전경험이 없 었다면 먼저 쓰러진 쪽은 자기였을 거라며 주베에가 이마에 흐르는 땀을 훔 쳤다. 주베에는 심호흡을 하면서 적은 단지 목표일뿐이라고 가볍게 생각하려 노 력했다. 하지만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화살에 진가사를 맞은 이후로 주베 에는 어느새 필사적이 되었다. "주몬메쓰쓰!" 압박감을 이기기 위해 일부러 기합을 넣듯 큰 소리로 외치며 손을 내밀었 다. 어느새 목이 쉬어 탁한 소리가 새어나왔다. 미야기는 아무 말 없이 주몬 메쓰쓰拾 筒를 두 손으로 건넸다. 미야기도 주베에와 적장 사이의 소리 없 는 격전에 완전히 짓눌렸다. '정확도는 어차피 조선 활이 더 앞선다.' 몇 번의 공방에서 주베에는 적장의 투구 위쪽을 맞춰 날렸던 이상의 성과 를 얻지 못했다. 반면에 적이 날리는 화살은 주베에의 목이나 가슴을 정확 히 노리고 날아왔다. 뒤를 돌아보면 천수각 바닥에 꽂힌 화살들이 일정한 공간 안에 다 들어가 있는데, 그것으로 적의 활솜씨가 얼마나 뛰어난지 알 수 있었다. 주베에는 몇 번이나 방아쇠를 당기려다 포기하고 몸을 숙여야 했다. '하지만 파괴력이라면 이쪽이 위다.' 주베에는 우선 적장이 의지하고 있는 방패판부터 부수기로 했다. 주몬메 쓰쓰는 이름 그대로 10몬메(十もんめ:19밀리)짜리 탄환을 쓰는 총으로 아시 가루 이상인 사무라이 신분만이 가질 수 있는 총이다. 다른 이름으로 사무 라이쓰쓰侍筒라고 하는 이 총을 잡은 주베에는 정말로 진검을 겨눈 사무라 이 같은 마음이 되었다. 주베에의 마음속에 하나의 영상이 떠올랐다. 결투. 적은 날쌔고 정확한 쾌 검을 구사한다. 그리고 주베에는 무디지만 강한 장검을 쓴다. 결투장은 물위 에 떠 있는 배. 마침 물결은 잦아들고 있다. 검을 겨눈 두 사람은 이미 서로 의 머리에 상처를 낸 다음이다. 주베에가 마음속으로 기합을 넣었다. - 하앗! 검날이 아닌 총탄이 실제로는 '땅!' 하는 총소리를 발하며 주베에의 강한 공격이 상대의 방어자세를 노리고 날아갔다. 19밀리 철탄이 주는 강력한 반 동을 몸으로 받으면서 주베에는 조준선 안을 응시했다. 그리고는 그 중앙에 있던 방패판이 깨져나가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다시 몸을 숙여 장전에 들 어갔다. "정면 방패판 격파! 적장과 옆에 있는 붉은 갑옷이 당황하고 있습니다!" 가쓰모토의 흥분한 목소리가 주베에의 귀에 들어왔다. 적의 방어자세가 무너졌을 것이다. 주베에는 다음 장전을 서둘렀다. 이번엔 특별히 하야고우 라는 방법을 사용했다. 하야고우早合는 빠른 재장전을 위한 특별한 기술이다. 화약과 탄환을 즉 석에서 일일이 조합해 넣지 않고 미리 나무통에 섞여서 준비된 것을 넣는 다. 또한 꼬질대로 눌러주는 것을 대신해 개머리판을 바닥에 몇 번 쳐서 두 드려 다진다. 가장 시간이 많이 걸리는 부분을 과감히 단축하는 기술로 당 시 유럽에서도 널리 쓰였다. "적이 화살을... 커억!" 그런데 방어가 깨진 적을 향해 회심의 일격을 날리려던 주베에는 뜻하지 않은 일격을 당했다. 아까부터 위험을 무릅쓰고 방패판 위로 상체를 내민 채 적을 관찰하던 제자의 목에 화살이 꽂힌 것이다. "가쓰모토!" 고개를 든 주베에에게 거의 깃털이 달린 부분까지 파고든 화살을 움켜잡 은 가쓰모토가 보였다. 화살촉이 목을 완전히 꿰뚫고 뒤로 나왔다. 이를 악 물며 고통을 참으려던 가쓰모토는 곧 방패판 위로 몸을 축 늘어뜨렸다. 망 원경이 먼저 가쓰모토 손에서 떨어졌고, 이어서 몸이 천수각 아래로 떨어졌 다. 주베에의 손등에 따뜻한 감촉이 느껴졌다. 흘낏 보니 핏방울 하나가 튀어 있었다. 그것은 가쓰모토의 피였다. 주베에는 일부러 그것을 닦지 않은 채 주몬메쓰쓰를 들어올렸다. 그리고 다음 일격을 준비했다. "가, 가쓰모토 녀석..." 옆에서 미야기가 소리를 죽여가며 나직이 울고 있었다. 그러나 주베에는 잠자코 조준을 마치고 방아쇠를 당겼다. 차가운 조준선 안에 잡힌 목표에 탄환이 정확히 명중했다. 탄환을 맞은 장수는 뒤로 몸을 홱 젖히며 쓰러졌 다. "미야기." "예. 스승님." "복수는 했다." 냉정하려고 애쓰던 주베에는 끝까지 그렇게 하지는 못했다. 주베에가 맞 힌 조선 장수는 금빛 갑옷을 입은 자가 아니었다. 방패판이 부서진 뒤에 서 있던 금빛 갑옷을 입은 자는 침착하게 옆에 있는 방패판 뒤로 몸을 숨기고 있었다. 원래는 그가 나오기를 기다려야 했지만 주베에의 총구는 그 옆에서 활을 겨누고 있던 붉은 갑옷을 향했던 것이다. = 경상우수영 좌선, 우치적 "감목관! 자네. 나 때문에..." 우치적이 눈물과 함께 말을 삼켰다. 우치적에게 안겨 쓰러진 김탁의 가슴 에서 무섭도록 많은 피가 쏟아져 나왔다. 조금 전 방패판이 부서져 나간 다음 우치적은 급한 김에 김탁이 선 방패 판 밑으로 숨어들었다. 칠천량해전에서 왜군들에게 쫓기며 수풀에 뛰어들던 악몽이 되살아났다. 우치적은 잠시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러자 김탁은 우치적에게 자리를 비켜주면서 활을 쏘았다. 목표는 우치 적을 집요하게 노리는 조총병이 아니라 그 옆에서 이쪽을 보고 있던 왜병이 었다. 그 왜병은 화살에 맞고 떨어졌다. 그런데 김탁은 몸을 숨길 곳이 없었다. 다시 조총병을 향해 활을 쏜 직후 전면에 몸을 드러낸 김탁은 총탄에 맞았다. 김탁은 갑옷을 몇 개나 껴입었 지만 어찌된 셈인지 총탄에 단번에 가슴이 뚫리고 말았다. 검붉은 피가 끝 없이 가슴에서 솟구쳤다. "의원! 정종!" 우치적이 갑판 아래로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싸움이 한창이라 다들 정신 이 없었다. 화포 쏘는 소리가 천지를 울려 우치적이 몇 번 지른 소리를 삼 켜버렸다. 우치적은 김탁을 다시 한번 보고 나서 의원 부르기를 포기했다. 이 정도 면 누가 봐도 가망이 없었다. 너무 미안해서 눈물이 다 났다. 김탁이 자꾸 감기는 눈을 힘겹게 떴다. "사또. 어서, 일어서서..." 김탁은 말을 잇지 못했다. 말을 할 때마다 입에서 울컥울컥 피가 솟았다. 김탁의 흐린 눈과 마주치자 우치적은 차마 마주볼 수 없었다. 너무 부끄러 웠다. 또 다시 칠천량에서의 추태를 보이고 말았다는 자괴감이 온몸을 감쌌 다. "순천목장에서 키우던 말은, 다... 어떻게 됐는지..." 김탁이 고개를 옆으로 떨궜다. 뜻밖에 김탁은 웃으며 죽어갔다. 우치적이 김탁을 꽉 껴안았다. 우치적은 파란 하늘 아래 건강한 말들과 함께 초원을 달리던 기억만이 김 탁에게 남길 바랬다. 저승에서도 무장으로서가 아닌 여전히 감목관으로서의 김탁이길 바랬다. "이렇게 젊은이가!" 우치적이 하늘을 향해 울부짖었다. 그러나 총성만이 메아리칠 뿐이었다. 우치적은 김탁을 바르게 눕힌 다음 눈물 한 방울을 떨어뜨렸다. 찬란한 젊 음도 한낱 차가운 총탄에 이렇게 스러져갔다. 전쟁 때문이었다. 우치적은 벌떡 일어섰다. 슬픔에 잠겨있을 여유 따위는 없었다. 어서 활을 들고 싸워야 했다. "그래. 이 싸움을 피할 수는 없지. 저놈이 통상에게 총구를 돌리도록 놔둘 수는 없지." 우치적은 토시로 눈물을 닦으며 작은 화살을 동개에서 꺼냈다. 그리고 무 릎을 꿇어 김탁이 바닥에 흘린 피를 조심스럽게 화살촉에 발랐다. "이건 복수가 아니네. 우리, 함께 임무를 완수해야겠지?" 우치적이 벌떡 일어섰다. 이제 방패판 따위는 필요 없었다. = 와키자카군 어립선, 주베에 "기죠오를." 주베에는 마지막 승부수를 던졌다. 끝까지 아끼던 철포를 드디어 꺼낸 것 이다. 수성용守城用으로 특별히 제작된 21밀리 구경의 이 철포는 일반적인 철포가 아니었다. 기죠오喜藏라는 이름이 붙은 특수한 총으로 큰 구경에 걸 맞게 160센티미터나 되는 긴 총신을 가지고 있었다. 엄청난 반동이 생기기 때문에 힘이 없는 자는 쏘기조차 힘든 물건이었다. "한 발이다. 이 한 발로 끝낸다." 제자를 잃은 분노라기보다는 피를 본 후의 흥분에 가까웠다. 몸과 몸이 부딪치고 기와 함성이 격돌하는 칼싸움은 아니지만 저격 역시 싸움이었다. 적을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 방금 주베에 입 속에 맴돈 말은 물론 미야기를 향해서 한 말이 아니었다. 스스로에게, 그리고 금빛 갑옷을 입은 적장에게 던진 말이었다. 몇 번이나 적장의 가슴을 조준선 안에 넣었으면서도 동시에 주베에를 겨눈 활의 압박 감에 눌려 제대로 맞추지 못했다. 이번에야말로 끝을 내고 말겠다고 주베에 는 강하게 다짐했다. 화약을 넣는 주베에의 손에서도 그런 각오는 여실히 드러났다. 아끼고 아 끼던 기죠오의 총신이 상하는 것을 무릅쓰고 간신히 파열만 안될 정도로 많 은 화약을 집어넣었다. 한 발에 모든 것을 걸겠다는 의미였다. 주베에는 쇠로 만든 진가사를 벗었다. 그리고는 지휘봉 위에 걸고는 살며 시 그것을 방패판 위로 들어올렸다. 적장의 화살을 유도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화살은 날아오지 않았다. 위장이라는 것을 알아본 때문이지 아니 면 적장이 아직 활시위를 겨누지 못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주베에는 슬그 머니 지휘봉을 바닥에 내렸다. 진가사가 떨어져 저 멀리 굴러갔다. 주베에는 무거운 기죠오를 방패판 위에 단단히 걸쳐놓았다. 불을 붙인 화 승이 조그만 불꽃을 내며 타 들어갔다. 주베에는 다시 조준선에 모든 정신을 집중했다. 긴 총신이 달린 총은 명 중률이 좋지만 그만큼 조준하기 어려웠다. 그런데 판옥선의 층루에는 뜻밖 에 방패판을 옆으로 밀고 몸을 완전히 드러낸 채 우뚝 서 있는 금빛 갑옷이 보였다. 적장은 천천히 활시위를 당기고 있는 중이었다. 이쪽을 바라보고는 있지만 아직 겨냥은 되지 않은 것이다. 주베에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내가 한 수 빨랐다.' 기죠오라는 이 기다란 검신의 명도는 결코 빗나가지 않을 것이다. 잔잔해 진 물결과 약간 부는 바람도 계산에 넣은 다음이었다. 주베에는 다시 검객 으로 돌아가 한껏 치켜든 칼을 상대의 가슴을 향해 내리쳤다. 손가락에 걸 린 방아쇠가 순간적으로 강하게 당겨졌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아앗!" 주베에가 딛고 있는 바닥과 방패판이 기우뚱하며 순간적으로 흔들렸다. 그렇게 큰 진동은 아니지만 물결이 잔잔해진 것으로 알던 주베에의 겨냥은 크게 흔들렸다. - 뚜캉! "시마따(아뿔사)!" 흔들린 손가락은 미처 가다듬을 새도 없이 철포를 쏘고 말았다. 어이없이 빗나간 탄환이었다. 그런데 적장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마치 처음부터 빗나 갈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이 적장이 활시위를 힘차게 당겼다. 주베에는 숨 이 멈춰졌다. 적장의 활시위가 가볍게 놓여진 그 짧은 순간 주베에는 꼼짝도 할 수 없 었다. 호랑이의 눈동자에 잡힌 것처럼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반짝 빛을 발하며 화살이 날아왔다. 화살에는 어쩐지 붉은 기운이 감돌았 다. 주베에는 그것이 자기 가슴을 향해 날아온다는 것을 알았다. '당했다!' 그것이 주베에가 이승에서 마지막으로 본 물건이었다. 가슴에 따끔한 감 촉이 느껴진 순간 주베에는 숨이 탁 막히고 눈앞이 온통 하얗게 변했다. "스승니임!" 미야기가 울부짖는 소리가 멀리서 아련히 들렸다. 동료 가쓰모토에 이어 스승 주베에를 잃은 미야기였다. 이제부터 히가와류는 미야기가 이어나가야 할 것이다. 혹시라도 잘못될 경우 어설픈 실력으로 스승의 복수를 위해 설 치다가는 히가와류는 완전히 맥이 끊기고 말 것이라고 다짐해둔 뒤였다. 주 베에는 조금 안심할 수 있었고, 이것이 미야기에게도 좋은 경험이 됐을 것 이라고 생각했다. "해류가 변했습니다! 적 쪽에서 우리 쪽으로, 반대로 흐르고 있습니다!" 점점 희미해지는 의식 속에서 주베에는 누군가 밑에서 외치는 소리를 들 었다. 꿈결처럼 배가 부드럽게 흔들리는 듯했다. '그랬군...' 좀 전의 그 진동은 갑자기 역류로 변한 물살로 인한 것이었다. 주베에는 그제야 패배를 수긍할 수 있었다. 그리고는 편안히 눈을 감았다. 7. 역류 (1) = 경상우수영 좌선, 우치적 "여보게, 감목관. 나는 도망치지 않았네. 칠천량에서 도망치고, 순천에서는 숨었지만 이제 더 이상은 아냐." 우치적이 다시 눈시울을 붉혔다. 김탁은 여전히 똑바로 누워있었다. 큰소 리로 호통치면 금세 눈을 비비고 일어나서 우치적을 바라보며 히죽 웃을 것 만 같은, 그런 평안한 표정이었다. "미안해." 우치적이 눈물을 훔치고 다시 활을 굳게 쥐었다. - 퍼벙! 좌선에서는 아직도 전투가 한창이었다. 송여종과 정응두의 배에서 계속 차대전과 단석을 날려 좌선에 붙은 왜선들을 엉망으로 부쉈다. 좌선에서의 직접적인 공격을 막기 위해 왜선들이 친 지붕도 거의 다 부서지고 지금은 가까운 거리에서 서로 화살과 총탄을 퍼부었다. 판옥선들 사이로 빠져나가려다 막힌 왜선들은 최악의 상황에 처했다. 왜 선들은 가까운 거리에서 날린 포탄에 의해 철저히 깨져나갔다. 좁은 해협에 갇힌 왜선들은 피할 곳도 없었다. 불에 타며 표류하던 왜선 한 척이 커다란 폭발을 일으키며 산산조각 났 다. 다락 안에 보관 중인 화약통이 한꺼번에 터진 것이다. 시뻘건 불길이 하 늘에서 날름거리며 불붙은 나뭇조각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고개를 돌린 우치적이 다시 활시위를 잡아당겼다. 김탁을 죽인 탄환이 날 아온 배의 누각 아래에는 왜장들이 몰려 서서 웅성거리고 있었다. 그 대장 선을 다른 배들이 둘러싸 가렸지만 우치적의 눈에는 그들 움직임 하나 하나 가 똑똑히 보였다. - 취익! 우치적이 쏜 작은 화살은 까만 점이 되어 날아갔다. 곧이어 그 왜장들 가 운데 한 명이 거꾸러졌다. 그러자 왜장들이 다급히 어떤 왜장을 중심으로 뭉치고 일부는 나무방패판을 가져와 그 왜장들을 가로막았다. 우치적이 다 시 활시위를 당겼다. - 빡! 나무방패판이 깨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왔다. 작은 애기살이 방패판을 뚫고 왜장의 옆구리에 박힌 것이다. 우치적이 연달아 화살을 날리자 몇 명 이 더 나뒹굴었다. 버티다 못한 왜장들은 서둘러 누각 뒤로 몸을 옮기고 있었다. 그리고 이 물에 늘어선 왜병들이 이쪽을 향해 일제히 조총을 쏘아댔다. 우치적은 하얀 연기가 치솟는데도 피하지 않고 그저 노려볼 뿐이었다. 그 왜병들이 쏜 총 탄은 이곳까지 날아오지도 않았다. "우 부사! 감목관은 어디 있나?" 갑판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우치적이 고개를 돌렸다. 우치적은 물끄러미 통제사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천천히 장대 안으로 돌렸다. 김탁은 여전히 잠 자듯 누워있었다. 통제사는 입을 다물었지만 미안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부사 영감! 저 변존서입니다. 함께 싸우라는 통상의 명으로..." 장대에 올라온 변존서는 말을 마치지 못했다. 김탁이 쓰러진 모습을 한참 이나 말없이 쳐다보는 변존서를 향해 우치적이 담담하게 말을 건넸다. "그래요, 변 군관. 우리 셋이 함께 싸웁시다." 그때 녹도 전선의 배가 이상한 움직임을 보였다. 일제히 노를 안으로 집 어넣더니 내려올 때는 왜군들이 묶어놓은 밧줄이 풀려 있었다. 좌선 왼쪽에 있는 평산포 전선도 마찬가지였다. 통제사가 칼을 앞으로 치켜들었다. "배를 전진시켜라! 울돌목 입구를 막아라!" 북이 울리자 좌선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밧줄을 풀고 순류를 타서 그런지 왜선을 옆에 달고도 무척 가벼운 움직임이었다. 좌선은 어느덧 처음 싸움을 시작한 울돌목에 도착했다. 징이 울리고, 좌선은 곧 멈춰 섰다. 물살 이 점점 세어지자 좌선이 제자리에 서 있기 위해 격군들은 이번에는 거꾸로 노를 저었다. 우치적은 다시 화살을 연달아 날렸다. 가까워진 만큼 정확성도 그만큼 높 아졌다. 그리고 새로 장대에 올라온 변존서의 활솜씨는 과연 일품이었다. 왜 장 너덧 명이 다시 연달아 갑판에 널브러졌다. 한곳에 몰려 움직이던 왜장 들은 마침내 누각 뒤로 숨어버렸다. 우치적은 새로운 목표를 찾았다. 이쪽 장대를 향해 쓸데없이 조총을 쏴대 는 왜병들이었다. 왜병들이 곧 하나씩 쓰러지기 시작했다. 칼을 휘둘러대며 조총병들을 지휘하던 왜장도 변존서의 활에 쓰러졌다. 곧이어 참다못한 왜군의 대장선이 천천히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 와키자카군 어립선, 이마이 히데미쓰 저격이 실패하고 주베에와 제자 한 명이 죽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와키자 카 야스하루는 그저 혀를 찰 뿐이었다. 그러나 주베에를 향하던 화살이 이 번에는 야스하루를 향하자 화들짝 놀라 천수각 뒤로 숨어버렸다. 이때 야스 하루를 지키려고 몸으로 화살을 막던 근습 무사들이 줄줄이 쓰러졌다. 야스 하루는 이게 다 주베에 탓이라며 투덜거렸다. 덕택에 어립선은 한참 뒤로 물러서야 했다. 화살이 미치지 않는 곳까지 가서야 야스하루는 다시 천수각으로 올라갈 수 있었다. 계단에 발을 디디면 서 야스하루가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못난 놈." 어립선에 탄 왜군들은 주베에의 저격이 실패함으로써 호되게 당해야 했 다. 야스하루를 보호하던 근습들뿐만 아니라 어립선 앞에 일렬로 서있던 철 포병들이 줄줄이 쓰러져 있었다. 조선 궁수 단 한 명의 위력은 그만큼 무서 웠다. 사실은 다시 두 명이 됐지만 이곳에서는 조선 대장선의 장대가 가물 가물하게 보였다. 어립선은 방향이 뒤바뀐 물살을 타고 계속 뒤로 물러섰다. 고물 쪽에서는 무사들이 다급한 목소리로 길을 비키라면서 다른 배에 소리를 지르고 있었 다. "천하 제일의 철포잡이로도 안 되는가 봅니다." 히데미쓰가 실망감을 애써 감추며 이렇게 주군을 위로했다. 주베에를 대 신할 만한 철포술을 가진 자는 더 이상 일본에 없었다. 주베에가 실패했다 면 다른 자를 불러도 결과는 뻔했다. 그리고 나서 히데미쓰는 어깨와 정강이 갑옷에 흐르는 붉은 피를 보며 잠 시 한숨지었다. 조금 전까지 히데미쓰 바로 옆에 서 있던 무사들이 줄줄이 화살에 맞고 쓰러졌다. 짧은 사이에 단 한 명에게 받은 공격이었지만 지휘 부에 끼친 손상은 심각한 편이었다. 주군을 지키기 위해 몸을 던진 수하 무 사들의 죽음은 신경도 쓰지 않고 야스하루는 짜증만 냈다. "그것 하나도 제대로 못 맞히면서 뭐가 천하 제일이냐! 차라리 시노비들 을 불러다 암살을 시키는 편이 낫겠다!" 시노비忍란 닌자忍者를 뜻하는 다른 말이며, 일본에서 천하 제일이란 말 은 당연히 일본에서 최고를 뜻한다. "아무리 난다 긴다하는 닌자들이라 해도 별 수는 없을 겁니다. 무엇보다 여기는 조선 땅 아니겠습니까?" 야스하루 뒤를 따라 층루에 올라간 히데미쓰는 살아남은 제자가 수부들의 도움을 받아 주베에의 시체와 유품을 챙겨 조용히 내려가는 것을 지켜보았 다. 내심 불쌍한 생각이 들었지만 이 상황에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지금은 주군의 노여움을 잠재우는 것이 급했다. "그 자들이 자랑하는 둔갑술遁甲術이란 게 워낙 과장된 면이 많습니다. 게다가 말도 잘 통하지 않는 생소한 조선에서야 어디 제대로 힘을 쓸 수 있 겠습니까?" "이놈이나 저놈이나 못난 건 절대 빠지지 않는군!" 야스하루는 생각만 해도 짜증이 난다는 듯 주베에와 마쓰모토의 피가 튀 긴 방패판을 몇 번 발로 내질렀다. 아무래도 작전 실패가 가져온 충격이 컸 던 모양이었다. 히데미쓰는 이틀 전 야스하루가 조선 우수영 쪽에 몰래 내보냈던 닌자들 을 떠올렸다. 야스하루는 조선군 전선과 병력이 더 있는지 무척 궁금했다. 벽파진에서 활동하는 판옥선이 단 13척 뿐이라는데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전쟁 초기에는 볼 수 없었던 철포가 지금은 조선에서 많 이 쓰이고 있는지도 궁금해했다. 그래서 몰래 닌자까지 보내 우수영의 군비 와 동향을 염탐하게 했다. "어제 주군도 보시지 않았습니까?" 히데미쓰가 그때 일을 상기시키자 표정이 굳어진 야스하루가 입을 다물었 다. 그 닌자들은 거금을 주고 고용한 고가甲賀 닌자 패로 일본에서 이가伊賀 닌자 다음으로 실력을 인정받고 있었다. 닌자들은 전라우수영을 정탐할 뿐 만 아니라 아예 수영과 판옥선들을 모조리 불질러 버리겠노라고 큰소리쳤 다. 야스하루는 친히 술까지 내려가며 닌자들 가운데 뛰어난 자들만 골라 3 명을 육지로 내보냈다. 하지만 막상 돌아온 닌자들은 비참한 몰골을 하고 있었다. 검은색 인복은 온통 찢기고 흙투성이가 됐으며, 정작 중요한 첩보는 무엇하나 가지고 온 게 없었다. 게다가 실패한 경위에 대해서는 얼굴만 붉힐 뿐 철저히 입을 다 물었다. 그리고 닌자들은 이런 곳에서는 도저히 일을 못하겠다며 당장 일본 으로 돌아가겠다고 펄펄 뛰었다. 나중에 닌자들을 위로해주려 술자리를 베푼 히데미쓰는 가장 젊은 닌자 한 명을 따로 불러 그간의 경위를 간신히 들을 수 있었다. 그런데 그 경위 라는 게 정말 기가 막혔다. "어스름이 짙어갈 무렵이었습니다. 조선인 옷을 훔쳐 입고 벙어리 흉내를 내며 우리는 간신히 적국 우수영에 닿을 수 있었습니다. 거기서 밤을 기다 렸다가 다시 인복으로 갈아입고 구름에 달이 가린 틈을 이용해 우수영으로 잠입해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히데미쓰는 닌자 세 명이 소리를 죽이며 어둠 속을 바람처럼 달려가는 장 면을 상상하며 침을 꿀꺽 삼켰다. 비록 목적한 바를 성취하지는 못했지만 히데미쓰는 이 유명한 닌자들이 적진을 크게 휘젓는 활약쯤은 충분히 했을 것으로 기대했다. "그런데 담을 넘는 순간 갑자기 안에서 개가 마구 짖는 게 아닙니까? 고 가 닌자에 비전으로 내려오는 약품을 뿌려 몸에서 나는 냄새를 미리 숨겼는 데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독 묻은 고기를 던져줘도 그 개는 쳐다보지도 않 았습니다. 게다가 한 마리가 짖자 온 동네 개들이 한꺼번에 짖어댔습니다. 귀가 예민한 우리 닌자들은 혼쭐났지요. 그래서 뒷산으로 도망쳐 한참 숨어 있다가 이번에는 반대쪽으로 돌아갔습니다." "음. 이 근처 개들은 굉장히 예민하고 사납더군. 나도 아네." 그때 젊은 닌자가 주변을 살피더니 말소리를 낮췄다. 다른 닌자들은 이미 술에 취해 다른 선실에서 자고 있을 테지만, 젊은 닌자는 어디선가 그의 말 을 훔쳐들을 것만 같은 불안감에 휩싸인 것이다. 그래서 히데미쓰도 덩달아 조심스레 주변을 살폈다. "막 담을 넘은 순간이었습니다. 우수영 안은 무척 조용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저 멀리서 '누구냐?' 라고 소리치는 게 아닙니까? 그래서 우리는 재 빨리 둔갑술을 펼쳐 숨었습니다. 수년간 써온 둔갑술입니다만 지금까지 한 번도 간파 당하지 않았습니다." 히데미쓰가 고개를 끄덕였다. 주변 지형지물과 비슷한 도구를 이용해 숨 는 것을 둔갑술이라 하는데, 만약 평범한 사람 눈에 들킨다면 그만큼 창피 한 것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히데미쓰는 이 닌자들이 들키지 않았을 것이 라 확신했다. "그런데 소리를 친 그 조선 장수가 저희 쪽을 잠시 가만히 지켜보더군요. 저는 그 장수하고 계속 눈이 마주쳤어도 설마 싶었는데, 그 장수는 우리를 모조리 파악한 것입니다." "저런, 맙소사! 들켰군 그래." 히데미쓰는 그 조선 장수가 아주 뛰어난 무예가쯤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둔갑술을 펼친 닌자들을 한 눈에 파악했다면 무예가 중에서도 감각이 아주 뛰어난 자일 것이다. 어쩌면 그 무섭다는 이순신일 지도 몰랐다. "처음에는 그 장수가 기가 막힌다는 듯이 피식 웃었습니다. 그러더니 화 를 내면서 마구 소리치더군요. '감히 수영 담장 밑에서 장난치는 놈들은 누 구냐? 유치한 짓거리들 그만해라!'라고요. 깜짝 놀라 주위를 살펴보니 그제 야 우리들이 들킨 이유를 알 수 있었습니다. 그 담은 그저 커다란 돌과 흙 으로 층층이 쌓아놓은 것이었습니다. 저희는 회칠이 된 일본 담장으로 위장 하고 있었는데 말입니다." "음. 자네들 실수했구먼. 난 자네들이 조선말까지 배우고 왔다길래 준비를 철저히 했다 싶었는데." "사투리나 그 지역 특유의 억양까지 배우는 건 닌자로서 기본이지 않습니 까? 어쨌든 다급한 김에 아무 건물에나 뛰어들어가 다시 둔갑술을 펼치려 했습니다. 그런데, 세상에! 다다미가 깔린 방은 단 한 곳도 없었습니다." 젊은 닌자가 단숨에 술잔을 비우더니 흥분하기 시작했다. "아니, 히데미쓰 님! 방에는 당연히 다다미나 하다못해 나무로 만든 마루 라도 깔려있어야 하는 게 아닙니까? 그런데 그 방들은 바닥이 돌인지 흙인 지 단단한 것 위에 종이 같은 것을 잔뜩 처발랐다더란 말입니다! 누런 종이 에 까만 글씨가 가득해서 도저히 몸을 숨길 방법이 없었습니다. 정말 놀라 고 답답했습니다. 이럴 수가 있습니까? 우리가 가진 둔갑술 도구들은 모두 다다미방에 맞춘 것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조선인들이 우리의 침입 에 대비해 함정을 파둔 게 아닐까 의심할 정도였습니다." "끄응! 아냐. 원래 조선에는 방에 다다미가 없어." 히데미쓰는 이 순박하게 생긴 청년을 포함해 닌자들이 다 바보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바보가 열심히 열변을 토했다. "그래서 천장에 올라가려 했습니다. 그런데 천장이 막혀 있으니 도저히 불가능했습니다. 그래서 그 방에서 나와 다른 곳으로 들어갔습니다. 새로 넓 은 방에 들어가니까 천장에 올라갈 수가 있더군요. 사람 눈길이 쉽게 닿지 않을 만큼 높고 몸을 숨기기에 충분히 어두웠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진짜 문제가 터졌습니다." 이쯤 되자 히데미쓰가 속으로 혀를 차기 시작했다. 닌자라면 당연히 주변 지형지물에 스스로를 녹여들여야지, 둔갑술 도구와 익숙한 기술에 맞춰 숨 을 곳을 택하려 하니 조선 땅에서 그런 곳이 있을 리가 없다는 생각이었다. "조선인들은 도대체 왜 벽에다가도 종이를 발랐을까요? 한 분이 벽을 타 고 오르다 그것 때문에 미끄러져 뒤로 넘어졌습니다. 그래서 머리를 크게 다치셨지요. 에휴~" 한숨 짓는 청년 닌자의 말을 계속 듣자니 히데미쓰도 한숨이 절로 나왔 다. "참다못한 두목님께서 인술을 쓰시겠다고 밖으로 나가 조선 장수에게 주 문을 걸었습니다. 하지만 그게 또 급한 마음에 일본말로 했으니 아예 씨도 먹히지 않았습니다. 조선말로 바꿔 인술을 다시 걸었을 때는 이미 늦었습니 다. 두목님이 더듬거리며 인술을 거는 중간에 그 장수가 말을 가로챘거든 요." "그래. 고생했군. 한잔 더 들게." 대충 알만했다. 처음에 일본말로 중얼거렸으니 상대방이 최면에 걸릴 리 가 없었다. 그리고 더듬거리는 조선말로 주문이라니, 그게 제대로 먹힐 거라 고 생각했을까? 히데미쓰가 젊은 닌자를 진정시키려 했지만 그 닌자는 흥분 했는지 목소리가 계속 높아졌다. "우리는 안되겠다 싶어 도망치기 시작했습니다. 장수는 우리를 도둑으로 알았는지 '도적놈들아! 게 섰거라!' 하고 외치며 활을 쏘았습니다. 사무라이 들을 상대할 땐 그들이 검을 빼들고 덤벼들면 슈리켄(표창)이라도 몇 개 던 지고 거리를 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상대가 제자리에 서서 활을 쏘니 우 린 대적도 못하고 죽기살기로 도망쳐야 했습니다." 히데미쓰는 골치가 지끈지끈 아팠다. 조선인들이 활을 잘 쏜다는 이야기 도 못 들었단 말인가? 그리고 왜 반드시 칼을 들고 닌자들을 쫓아야 하는 걸로 아는지 그게 더 기가 막혔다. "그때 두목님이 어깨에 화살을 맞았지요. 그 다음에는 온 동네 개들이 도 망가는 우리들을 쫓아온 겁니다. 저도 엉덩이하고 다리하고 몇 군데 물리고, 각종 도구를 넣은 봇짐까지 몽땅 잃어버렸습니다. 정말 혼났습니다." 닌자가 부끄러운지 고개를 숙였다. 히데미쓰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측은함 과 함께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아야 했다. 일본 최고의 닌자들이 고작 좀도 둑 취급이나 받고 아무 소득도 못 얻고 나온 것이다. 그리고 이야기를 들으니 그 조선 장수라는 자도 별로 높은 인물인 것 같 지는 않았다. 게다가 그 조선인이 닌자들을 일본인 염탐꾼으로 안 본 것은 닌자들이 하도 한심해 보여서였을 것이다. 결국 히데미쓰는 야스하루 님께는 비밀로 해달라며 간곡히 부탁하는 요청 을 뿌리치지 못했다. 다음날 노잣돈을 주어 보내긴 했지만 히데미쓰는 그 닌자들의 참담한 표정만은 잊혀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 사정을 듣지 못한 야스하루는 못내 그 시노비들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야스하루가 다시 물었다. "철포술이든 둔갑술이든 이순신을 거꾸러뜨리지 못한단 말이냐?" "예. 유감스럽지만." 히데미쓰가 딱 잘라 말했다. 그러면서 은근히 그때 일을 이야기해 주고 싶은 유혹을 느꼈다. 주군도 진실을 알아야 하지 않을까? 그 닌자 청년이 알려준 대로 주군에게 고해 바치면 주군은 과연 배를 잡고 웃을지, 아니면 한심한 표정을 지을지 궁금했다. "알았다." 야스하루가 아쉬운 듯 대답하며 다시 함대 진형을 살피기 시작했다. 히데 미쓰는 그제야 주군이 농담이 아니라 실제로 그런 생각을 했음을 깨달았다. 만약 이순신을 암살하라고 닌자들을 다시 투입했다면 또 다른 우스개가 조 선에 회자될 뻔했다며 가슴을 쓸었다. 와키자카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렇다면 이젠 방법이 없어." 전국시대 닌자의 실제능력이란 건, 잠입과 암살을 밥먹듯이 하고 주술 같 은 인술忍術을 써서 사람을 홀리는 수준과는 사실 거리가 멀었다. 그들이 주로 맡은 임무는 정찰과 정보수집이었고, 암살은 하급무사 급을 상대로나 간신히 성공할 수 있었다. 둔갑술이나 인술이란 것도 따지고 보면 현대의 위장술이나 최면술 정도 수준이며 결코 미지의 신비한 능력이 아니었다. 그런 닌자들에게 말도 제대로 안 통하고 지형과 풍토가 전혀 다른 조선 땅에서 암약하라는 것은 잉어를 바다에 풀어놓는 것과 같았다. 특히 조선 장수를 암살하고 파괴활동을 벌이라는 건 전혀 가능성 없는 무모한 의뢰에 지나지 않는다. 현대인들이 갖는 닌자에 대한 이미지는 쥐도 새도 모르게 행하는 잠입, 신비한 은신술, 그리고 뛰어난 암살 능력 등이다. 그러나 이것은 동양의 것 에 무지한 서양인들이 품는 신비감과 자국의 우월함을 자랑하고픈 일본인들 의 희망이 합해져서 만들어진 과장과 상상일 뿐이다. = 발포돌격선, 나대용 어두운 배 안에서는 팽팽한 긴장감이 유지됐다. 격군들과 포수들은 그 저 조용히 서있고 전면 천자총통 두 개를 맡은 화포장만이 앞을 내다보 며 시시각각 변하는 전황을 보고하고 있었다. 언뜻 보면 이곳은 무척 평화로웠다. 울돌목 쪽에는 포성과 총성이 요 란했지만 이곳은 파도가 잔잔하고 갈매기가 끼룩거리는 그런 조용한 바 다였다. 배 안에서는 화포장 한 사람 빼고는 말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앞쪽에서는 발포만호 소계남과 군관 나대용이 계속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격군들과 포수들은 그런 소계남을 경멸에 찬 시선으로 쏘아보았 다. 그리고 화포장이 울돌목에서 싸우는 조선수군의 분전을 알릴 때마다 경멸의 강도가 높아갔다. "좋다! 난 모르겠다. 나 군관 자네가 지휘해라." 소계남이 더 이상 사람들의 눈길을 견딜 수 없었는지 나대용을 어깨로 밀치고 뒤로 걸어갔다. 그런 소계남의 등에 대고 나대용이 소리를 질렀 다. "만호께서는 그 동안 아프신 걸로 하겠습니다." 격군들 사이에서 작은 키득거림이 번졌지만 나대용이 쏘아보자 곧 잦 아들었다. 나대용이 도노장을 향해 외쳤다. "어서 앞으로 나아가라!" = 전우수1선, 김억추 "이응표 저놈이 나한테 말도 않고 혼자 가다니! 아니, 소계남 저놈도?" 장대에 선 김억추는 아주 심각해졌다. 가리포첨사의 판옥선뿐 아니라 발포돌격선도 앞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이제는 뭔가 결단을 내려야 할 순간이 온 것 같았다. 김응추가 슬쩍 나섰다. "어떻습니까? 잘하면 이길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우리도 슬슬 움직여 보는 게." 잠시 계단에 주저앉은 김억추는 한참 동안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런 결과가 나오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물살이 바뀌었다고는 하지만 울 돌목에서 싸우는 판옥선들이 지금은 앞으로 밀고 나가지 않는가? 한참 고민한 김억추가 드디어 결단을 내렸다. "슬슬? 그래. 좋다. 대신 아주 슬슬이다. 어이! 도훈도!" "예으이!" 도훈도가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지금까지 울돌목에서 벌어진 전투를 하나도 놓치지 않고 지켜본 도훈도의 목소리는 꽤나 들떠 있었다. "배를 앞으로! 최고 속도로!" 김억추가 드디어 전진명령을 내리자 도훈도가 신이 나서 아래를 향해 외쳤다. 곧 판옥선이 힘차게 앞으로 향했다. 저 멀리 울돌목 입구에 가득 한 연기가 금세 가까워졌다. 곧 가리포 전선과 발포 돌격선도 따라잡을 기세였다. 그때 금갑만호 이정표가 사다리 위로 올라와 갑판 위에 머리를 내밀고 좌우를 살폈다. 배가 앞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확인한 이정표는 신이 나 서 갑판 위로 뛰어올라왔다. 그 순간 김억추가 다시 명령을 내렸다. "뒤로!" 도훈도가 놀라 김억추의 얼굴을 가만히 살폈다. 뭘 잘못 먹었냐는 뜻 이 담겨있었다. 김억추가 계단에 한 발을 내딛고 조용히 말했다. "도훈도, 너 죽을래?" "아, 아닙니다. 나으리. 도노장! 배를 뒤로 물리랍신다! 뭐? 웬 미친소 리를 하냐고? 수사 영감이 직접 내리신 군령이다, 이놈아!" 명령이 격군들에게 전달돼서 배가 다시 움직일 때까지는 한참 걸렸다. 군관들과 수졸들은 기가 막혀 멍청히 장대 위를 쳐다보기만 했다. 얼굴 이 붉으락푸르락한 이정표는 활을 들어 김억추를 쏠까말까 망설이는지 자꾸 장대 위를 노려보았다. "호오! 제자리에서 뒤로 갈 수 있네? 뱃머리를 돌릴 줄 알았는데, 그게 아냐." 신기하다는 듯이 좌우를 둘러본 김억추가 다시 명령을 내렸다. "그럼 이번엔 제자리에서 왼쪽으로." 배는 김억추가 말한 그대로 움직였다. 마치 게가 옆 걸음 치듯이 판옥 선이 이물을 앞으로 향한 채 그 자리에서 왼쪽으로 기어갔다. "오오~ 이것도 된단 말이지? 그럼 이번에는 오른쪽으로." 배가 미끄러지지도 않고 제자리에 우뚝 서더니 이내 반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물을 앞으로 고정시키고 오른쪽 45도 방향으로!" 각도를 잴 때 쓰는 단위인 도度는 서양의 과학문명이 들어오기 훨씬 전부터 천문관측에서 사용했다. 그러나 하루를 1도로 잡아 동지부터 다 음해 동지까지의 1년이 365일이니 원은 서양과 같은 360도가 아니라 365 도였다. 그래서 서울은 북극성과의 각도차인 위도가 360도 기준으로 북 위 37.5도 정도가 아니라 38도를 약간 넘게 된다. "제자리에서 한바퀴 돌아! 옳지, 잘한다. 이번에는 반대로!" "신났군요. 장단 맞춰 춤이라도 추지 그래요?" 옆에서 김응추가 거들었다. "음. 잘해. 정말 잘하는군. 보면 볼수록 신기해. 혹시 이 배, 제자리에 서 뜀뛰기나 물구나무서기 같은 것도 되지 않을까?" "한번 시켜볼까요? 잘하면 줄넘기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김억추가 입술을 달싹이는 게 진짜로 도훈도에게 그런 명령을 내릴 낌 새였다. 격군들이 노를 힘차게 저어 배가 물위로 뛰어오른 사이에 갑판 양쪽에서 밧줄을 돌리면 가능할 것도 같았다. "영감! 정말 미치고 폴짝 뛰겠습니다. 도대체 갈 겁니까, 안 갈 겁니 까?" 참다못한 이정표가 소리를 버럭 질렀다. 그러나 김억추는 느긋하게 장 대 계단에 앉았다. "사람 성격이 왜 그리 급해? 자! 그럼 천천히 가볼까?" 그러나 아직 전진 명령은 내리지 않았다. 이정표는 속이 부글부글 끓 겠지만 혹시라도 김억추가 변덕을 부릴까봐 아무 말 못하고 노려보기만 했다. "음. 다른 배들도 내가 데리고 가는 것처럼 해야겠지? 그럼 어서 가 자!" "잠깐만요. 저 뒤에 회령포 전선은요?" 어느새 김억추의 배는 아까 다른 배들이 있던 곳을 지나고 있었다. 그 러나 회령포 전선은 계속 그 자리를 고수했다. 이제는 딱 한 척밖에 남 지 않았다. "민정붕이? 음. 오라 그래. 깐깐한 통제사 밑에는 더 이상 못 있겠다면 서 회령포를 다시 전라우수영 소속으로 빼달라고 손이 발이 되도록 나한 테 빌었으니까, 민정붕이 내 말은 잘 듣겠지." "어? 형님! 민정붕 저놈이 도망가려나 봅니다. 엉덩이는 다 나았나본데 요?" 붉은 갑옷을 입은 장수 하나가 회령포 전선 좌현에 난 사다리를 딛고 사후선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판옥선의 사다리는 현측에 줄지어 튀어나 온 나무이며, 이것은 좌우현의 벽을 지탱하는 가룡목 끝을 자르지 않고 둔 것이다. 위치는 배 중간쯤인데 보통은 격군이 노를 젓는 갑판에서 내 려가야 한다. "쯧쯧! 겁쟁이 같으니라구!" 김억추가 말을 마치자마자 김응추가 다가와 눈을 크게 뜬 채 말없이 얼굴을 가까이 댔다. "나는 겁쟁이가 아냐! 작전상 물러서 있었을 뿐이란 말야!" "그럼요. 어이~ 지각관! 민정붕이를 불러라!" 김응추가 김억추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지각관을 겸한 우수 영 군관 배영수가 회령포 전선을 향해 청색 위장기를 힘차게 흔들었다. 그러나 회령포 전선에서는 전혀 반응이 없었다. 회령포 전선은 사후선 을 타고 달아나는 민정붕이나 이상한 기동연습을 보여준 전우수1선을 못 본 척하고 앞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건 그렇고 아버님은 어쩐다지? 설마 그따위 해일에 돌아가시지는 않겠지?" 갑자기 김억추가 딴소리를 했다. 위장기를 힘없이 내린 배영수가 장대 위를 쏘아보았다. = 와키자카군 어립선, 히데미쓰 이마이 히데미쓰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실패한 것은 저격만이 아니었다. 전체적인 전세도 불리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기세 좋게 조선군을 밀어붙이 던 이이츠카 함대도 추진력을 잃었다. 기운차게 젓던 노도 이제는 거의 멈 췄다. 힘이 딸릴 때가 이미 지난 것이다. 조선 판옥선들을 직접 상대해 싸우던 히요시 함대는 더 참담했다. 해협을 돌파한 배 5척은 뒤에 있는 조선군에 의해 막혀 거의 전멸하고 나머지 함대 도 강력한 조선수군의 화포에 맞아 차례로 격파 당하고 있었다. "제길! 정수리를 못 쏘니까 사냥이 엉망이 되잖아! 호랑이가 더 날뛰지 않는가 말이야!" "아무래도 본진과 후미함대의 일부를 빼서 지원하시는 편이..." "그만!" 야스하루의 말투가 점점 거칠어져갔다. 온갖 감정이 다 포함된 그 표정을 보면서 히데미쓰는 다음 말을 기다렸다. "여기서 더 이상 배와 병력을 잃을 수는 없다. 저 녀석들은 여기서 죽으 면 그만이지만 나에게는 아직 싸울 곳이 많다. 전공을 세워야 해! 이런 재 수 없는 곳에 더 이상 처박혀 있어봐야 별 수 있겠나?" "무, 무슨 말씀이십니까?" 야스하루의 말투에서 더 할 수 없는 잔혹함과 비정함이 묻어 나왔다. 순 간 히데미쓰는 당황해서 말을 제대로 못할 지경이었다. 히데미쓰는 이 작전을 실행하기 전에 참패한 구루지마 함대에 야스하루가 보냈던 싸늘한 눈길을 기억해냈다. 지금 그 눈길이 휘하 함대에게도 보내지 고 있었다. 패배한 부하에 대한 것으로는 너무도 잔인한 눈길이었다. "철수한다! 호랑이 사냥은 끝났어. 놓친 사냥감에 더 이상 미련은 없다!" "그럼 이이츠카와 히요시 함대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히데미쓰가 다급하게 묻자 돌아오는 것은 싸늘한 응답뿐이었다. "버려 둔다. 알아서 살아 돌아오면 좋고 안되면 죽겠지." "야스하루 님!" 히데미쓰는 그 순간 주군을 그냥 이름으로 불렀다. 도저히 존경할 수 없 는 행동을 하는 이 남자가 과연 지금까지 목숨을 바쳐 모신 그 용감하기로 유명한 주군 와키자카 야스하루인지 헛갈릴 정도였다. "저들은 지금 야스하루 님을 위해 목숨을 걸고 있습니다. 그렇게 내 팽개 칠 수는 없습니다!" "그럼 저놈들 때문에 나더러 죽으란 말이냐? 나를 위해 목숨을 걸었다면 나 대신 죽으라고 해." 히데미쓰가 서둘러 무릎을 꿇었다. "다시 한번 재고를! 저들은 야스하루 님의 충직한 부하입니다!" "닥쳐라!" 히데미쓰의 간절한 부탁도 소용없었다. 야스하루의 눈에는 이미 기울어진 전세 외엔 아무 것도 들어오지 않는 듯했다. "여기서 더 잃으면 다른 곳에서도 기회가 없어진다. 차라리 반만 잃고 가 는 편이 낫겠다." 고개를 든 히데미쓰는 야스하루가 잡은 지휘봉 끝이 심하게 떨리는 것을 보았다. 분함을 억누르고 있는 것이다. 부하를 희생시켜서 도망치려는 간사 함을 납득할 수는 없었지만 이미 내려진 결정을 돌릴 방법도 히데미쓰에겐 없었다. "총대장 다카도라 님께는 어떻게 말하시겠습니까? 후퇴를 허락하지 않을 겁니다." 히데미쓰는 마지막 기대를 걸고 물었다. 총대장의 지시를 어긴 문책을 어 떻게 다 받겠느냐는 힐난이 섞인 물음이었다. "무시한다! 이유 따위는 나중에 작전의 차이 정도로 적당히 둘러대면 돼. 만일 길을 비키지 않으면 싸워서라도 비키게 한다!" 야스하루의 대답을 듣고 히데미쓰는 절망하고 말았다. 부하를 구하기 위 해 싸우지 않겠다는 야스하루가 오히려 후퇴하기 위해서는 아군과도 싸우겠 다는 것이다. 히데미쓰는 그 동안 마음속으로 실컷 욕한 겁쟁이 조선군과 주군 야스하루가 하나도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을 애써 억눌러야 했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야스하루 님." 히데미쓰는 앞으로 더 이상 주군이라 부르지 못할 것 같은 남자에게 고개 를 숙였다. 시선을 일부러 피한 히데미쓰가 병사들에게 명을 내렸다. "후퇴 신호를!" 어립선을 포함해 배들이 천천히 선회하기 시작했다. 물살이 거세지기 시 작해 옆구리를 드러낸 배들이 크게 요동쳤다. 자칫하면 배가 뒤집힐 수도 있어 다락 아래에서 수부장들이 노꾼들을 닦달하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왔 다. 부하를 버려 둔 일방적인 후퇴였다. 고전하고 있는 이이츠카와 히요시가 이것을 보고 과연 어떻게 느끼겠는가? 히데미쓰는 그것이 두려웠다. "지금은 일단 어떻게든 전력을 보존하는 게 중요하다." 혼잣말처럼 하는 야스하루의 말은 변명에 불과했다. 히데미쓰는 귀를 틀 어막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히데미쓰의 눈은 이런 주군의 마음도 모르고 열심히 작전을 수행하는 부하들을 보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히데미쓰 눈에 이상하게 생긴 배 한 척이 들어왔다. 거 적에 덮인 모습은 다른 조선 배들과 마찬가지였지만 윗부분이 상당히 돋보 였다. - 뻐벙! 하얀 연기가 그 배를 뒤덮었다. 그 배가 좌우현으로 거의 동시에 화포를 쏘고 나서야 히데미쓰는 그게 뭔지 깨달았다. "저건..." 히데미쓰가 막 말하려는 순간 공포와 놀라움에 가득 찬 관측병의 목소리 가 귓가를 때렸다. "메구라부네! 메구라부네가 나타났습니다!" 역사전쟁소설 // 남해 // 2권 copyright (C) 2001 김경진 안병도 신재호(필명) 공저 업로드 김경진 (전쟁소설 데프콘 1, 2, 3부, 동해, 남북, 판타지 하늘길잡이 공동저자) * 고칠 점이 있다고 생각하시면 언제든 18번 오발탄 게시판에 올리시 거나, 저나 안병도 님께 메일로 의견을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조선 ; 김경진 amraam07@hitel.net 일본 ; 안병도 031038@hitel.net * 조선 판옥선과 일본 배 여러 종류의 구조와 모양에 대해서는 박완님의 글, http://www.ilovehistory.net에서 참조하세요. 그림을 포함해 정리가 아 주 잘 돼 있습니다. 제가 참 무책임하죠? --;; * 주베에의 조수 가쓰모토가 망원경을 가지고 관측한 것으로 되어 있는 데, 1597년 당시 망원경 자체가 아직 발명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절대적이고, 포루투갈인이 항해에 사용했을 가능성은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썰렁하게도 주베에의 조수는 까만 종이를 둥글게 만 원통을 사용하는 걸로 하겠습니다. 메일로 알려주신 phya94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래서 인터넷 여기저기를 검색해서 여러 가지를 알게 됐습니다. 상식으 로 알아두시면 좋을 것 같아 간단히 적습니다. 일단, 영국의 레너드 디게스Leonard Digges라는 사람이 1550년경에 망원 경을 조립해서 사용했다는 기록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원리로 만 들었는지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 중에서 최초의 망원경은 1608년에 한스 리페르세이 Hans Rippershey가 만들었고, 1609년에는 토머스 해리엇Thomas Harriot이 망원경을 사용하여 달의 지형을 작성했다고 합니다. 최초의 본격적이며 체 계적인 관측은 1610년에 이탈리아의 갈릴레오 갈릴레이에 의해 이루어졌습 니다. 갈릴레오는 대물렌즈로는 볼록렌즈, 접안렌즈로는 오목렌즈를 조합하 여 직접 망원경을 만들었는데, 그가 가진 망원경 가운데 가장 성능이 좋은 것은 30배의 배율을 가진 것이고, 가장 큰 것은 렌즈 직경이 44mm였습니 다. 이것이 근대적인 망원경입니다. 그러나 시야가 무척 좁다는 단점이 있어 케플러에 의해 대물렌즈와 접안 렌즈 둘 다 볼록렌즈를 쓰는 망원경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나 케플러식 망 원경은 초점이 두 렌즈 사이에 맺히기 때문에 사물이 거꾸로 보이고, 색수 차 현상이 발생했습니다. 거꾸로 보이는 것은 프리즘이나 거울 등을 통해 보정하고, 이것들이 최근의 지상용 망원경, 쌍안경으로 발전했습니다. 갈릴 레이식이나 케플러식 두 가지는 굴절망원경입니다. 현대의 천체망원경은 뉴 튼이 개발한 반사망원경과 전파망원경 등입니다. 7. 역류 (1) = 경상우수영 좌선, 우치적 "여보게, 감목관. 나는 도망치지 않았네. 칠천량에서 도망치고, 순천에서는 숨었지만 이제 더 이상은 아냐." 우치적이 다시 눈시울을 붉혔다. 김탁은 여전히 똑바로 누워있었다. 큰소 리로 호통치면 금세 눈을 비비고 일어나서 우치적을 바라보며 히죽 웃을 것 만 같은, 그런 평안한 표정이었다. "미안해." 우치적이 눈물을 훔치고 다시 활을 굳게 쥐었다. - 퍼벙! 좌선에서는 아직도 전투가 한창이었다. 송여종과 정응두의 배에서 계속 차대전과 단석을 날려 좌선에 붙은 왜선들을 엉망으로 부쉈다. 좌선에서의 직접적인 공격을 막기 위해 왜선들이 친 지붕도 거의 다 부서지고 지금은 가까운 거리에서 서로 화살과 총탄을 퍼부었다. 판옥선들 사이로 빠져나가려다 막힌 왜선들은 최악의 상황에 처했다. 왜 선들은 가까운 거리에서 날린 포탄에 의해 철저히 깨져나갔다. 좁은 해협에 갇힌 왜선들은 피할 곳도 없었다. 불에 타며 표류하던 왜선 한 척이 커다란 폭발을 일으키며 산산조각 났 다. 다락 안에 보관 중인 화약통이 한꺼번에 터진 것이다. 시뻘건 불길이 하 늘에서 날름거리며 불붙은 나뭇조각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고개를 돌린 우치적이 다시 활시위를 잡아당겼다. 김탁을 죽인 탄환이 날 아온 배의 누각 아래에는 왜장들이 몰려 서서 웅성거리고 있었다. 그 대장 선을 다른 배들이 둘러싸 가렸지만 우치적의 눈에는 그들 움직임 하나 하나 가 똑똑히 보였다. - 취익! 우치적이 쏜 작은 화살은 까만 점이 되어 날아갔다. 곧이어 그 왜장들 가 운데 한 명이 거꾸러졌다. 그러자 왜장들이 다급히 어떤 왜장을 중심으로 뭉치고 일부는 나무방패판을 가져와 그 왜장들을 가로막았다. 우치적이 다 시 활시위를 당겼다. - 빡! 나무방패판이 깨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왔다. 작은 애기살이 방패판을 뚫고 왜장의 옆구리에 박힌 것이다. 우치적이 연달아 화살을 날리자 몇 명 이 더 나뒹굴었다. 버티다 못한 왜장들은 서둘러 누각 뒤로 몸을 옮기고 있었다. 그리고 이 물에 늘어선 왜병들이 이쪽을 향해 일제히 조총을 쏘아댔다. 우치적은 하얀 연기가 치솟는데도 피하지 않고 그저 노려볼 뿐이었다. 그 왜병들이 쏜 총 탄은 이곳까지 날아오지도 않았다. "우 부사! 감목관은 어디 있나?" 갑판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우치적이 고개를 돌렸다. 우치적은 물끄러미 통제사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천천히 장대 안으로 돌렸다. 김탁은 여전히 잠 자듯 누워있었다. 통제사는 입을 다물었지만 미안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부사 영감! 저 변존서입니다. 함께 싸우라는 통상의 명으로..." 장대에 올라온 변존서는 말을 마치지 못했다. 김탁이 쓰러진 모습을 한참 이나 말없이 쳐다보는 변존서를 향해 우치적이 담담하게 말을 건넸다. "그래요, 변 군관. 우리 셋이 함께 싸웁시다." 그때 녹도 전선의 배가 이상한 움직임을 보였다. 일제히 노를 안으로 집 어넣더니 내려올 때는 왜군들이 묶어놓은 밧줄이 풀려 있었다. 좌선 왼쪽에 있는 평산포 전선도 마찬가지였다. 통제사가 칼을 앞으로 치켜들었다. "배를 전진시켜라! 울돌목 입구를 막아라!" 북이 울리자 좌선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밧줄을 풀고 순류를 타서 그런지 왜선을 옆에 달고도 무척 가벼운 움직임이었다. 좌선은 어느덧 처음 싸움을 시작한 울돌목에 도착했다. 징이 울리고, 좌선은 곧 멈춰 섰다. 물살 이 점점 세어지자 좌선이 제자리에 서 있기 위해 격군들은 이번에는 거꾸로 노를 저었다. 우치적은 다시 화살을 연달아 날렸다. 가까워진 만큼 정확성도 그만큼 높 아졌다. 그리고 새로 장대에 올라온 변존서의 활솜씨는 과연 일품이었다. 왜 장 너덧 명이 다시 연달아 갑판에 널브러졌다. 한곳에 몰려 움직이던 왜장 들은 마침내 누각 뒤로 숨어버렸다. 우치적은 새로운 목표를 찾았다. 이쪽 장대를 향해 쓸데없이 조총을 쏴대 는 왜병들이었다. 왜병들이 곧 하나씩 쓰러지기 시작했다. 칼을 휘둘러대며 조총병들을 지휘하던 왜장도 변존서의 활에 쓰러졌다. 곧이어 참다못한 왜군의 대장선이 천천히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 와키자카군 어립선, 이마이 히데미쓰 저격이 실패하고 주베에와 제자 한 명이 죽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와키자 카 야스하루는 그저 혀를 찰 뿐이었다. 그러나 주베에를 향하던 화살이 이 번에는 야스하루를 향하자 화들짝 놀라 천수각 뒤로 숨어버렸다. 이때 야스 하루를 지키려고 몸으로 화살을 막던 근습 무사들이 줄줄이 쓰러졌다. 야스 하루는 이게 다 주베에 탓이라며 투덜거렸다. 덕택에 어립선은 한참 뒤로 물러서야 했다. 화살이 미치지 않는 곳까지 가서야 야스하루는 다시 천수각으로 올라갈 수 있었다. 계단에 발을 디디면 서 야스하루가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못난 놈." 어립선에 탄 왜군들은 주베에의 저격이 실패함으로써 호되게 당해야 했 다. 야스하루를 보호하던 근습들뿐만 아니라 어립선 앞에 일렬로 서있던 철 포병들이 줄줄이 쓰러져 있었다. 조선 궁수 단 한 명의 위력은 그만큼 무서 웠다. 사실은 다시 두 명이 됐지만 이곳에서는 조선 대장선의 장대가 가물 가물하게 보였다. 어립선은 방향이 뒤바뀐 물살을 타고 계속 뒤로 물러섰다. 고물 쪽에서는 무사들이 다급한 목소리로 길을 비키라면서 다른 배에 소리를 지르고 있었 다. "천하 제일의 철포잡이로도 안 되는가 봅니다." 히데미쓰가 실망감을 애써 감추며 이렇게 주군을 위로했다. 주베에를 대 신할 만한 철포술을 가진 자는 더 이상 일본에 없었다. 주베에가 실패했다 면 다른 자를 불러도 결과는 뻔했다. 그리고 나서 히데미쓰는 어깨와 정강이 갑옷에 흐르는 붉은 피를 보며 잠 시 한숨지었다. 조금 전까지 히데미쓰 바로 옆에 서 있던 무사들이 줄줄이 화살에 맞고 쓰러졌다. 짧은 사이에 단 한 명에게 받은 공격이었지만 지휘 부에 끼친 손상은 심각한 편이었다. 주군을 지키기 위해 몸을 던진 수하 무 사들의 죽음은 신경도 쓰지 않고 야스하루는 짜증만 냈다. "그것 하나도 제대로 못 맞히면서 뭐가 천하 제일이냐! 차라리 시노비들 을 불러다 암살을 시키는 편이 낫겠다!" 시노비忍란 닌자忍者를 뜻하는 다른 말이며, 일본에서 천하 제일이란 말 은 당연히 일본에서 최고를 뜻한다. "아무리 난다 긴다하는 닌자들이라 해도 별 수는 없을 겁니다. 무엇보다 여기는 조선 땅 아니겠습니까?" 야스하루 뒤를 따라 층루에 올라간 히데미쓰는 살아남은 제자가 수부들의 도움을 받아 주베에의 시체와 유품을 챙겨 조용히 내려가는 것을 지켜보았 다. 내심 불쌍한 생각이 들었지만 이 상황에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지금은 주군의 노여움을 잠재우는 것이 급했다. "그 자들이 자랑하는 둔갑술遁甲術이란 게 워낙 과장된 면이 많습니다. 게다가 말도 잘 통하지 않는 생소한 조선에서야 어디 제대로 힘을 쓸 수 있 겠습니까?" "이놈이나 저놈이나 못난 건 절대 빠지지 않는군!" 야스하루는 생각만 해도 짜증이 난다는 듯 주베에와 마쓰모토의 피가 튀 긴 방패판을 몇 번 발로 내질렀다. 아무래도 작전 실패가 가져온 충격이 컸 던 모양이었다. 히데미쓰는 이틀 전 야스하루가 조선 우수영 쪽에 몰래 내보냈던 닌자들 을 떠올렸다. 야스하루는 조선군 전선과 병력이 더 있는지 무척 궁금했다. 벽파진에서 활동하는 판옥선이 단 13척 뿐이라는데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전쟁 초기에는 볼 수 없었던 철포가 지금은 조선에서 많 이 쓰이고 있는지도 궁금해했다. 그래서 몰래 닌자까지 보내 우수영의 군비 와 동향을 염탐하게 했다. "어제 주군도 보시지 않았습니까?" 히데미쓰가 그때 일을 상기시키자 표정이 굳어진 야스하루가 입을 다물었 다. 그 닌자들은 거금을 주고 고용한 고가甲賀 닌자 패로 일본에서 이가伊賀 닌자 다음으로 실력을 인정받고 있었다. 닌자들은 전라우수영을 정탐할 뿐 만 아니라 아예 수영과 판옥선들을 모조리 불질러 버리겠노라고 큰소리쳤 다. 야스하루는 친히 술까지 내려가며 닌자들 가운데 뛰어난 자들만 골라 3 명을 육지로 내보냈다. 하지만 막상 돌아온 닌자들은 비참한 몰골을 하고 있었다. 검은색 인복은 온통 찢기고 흙투성이가 됐으며, 정작 중요한 첩보는 무엇하나 가지고 온 게 없었다. 게다가 실패한 경위에 대해서는 얼굴만 붉힐 뿐 철저히 입을 다 물었다. 그리고 닌자들은 이런 곳에서는 도저히 일을 못하겠다며 당장 일본 으로 돌아가겠다고 펄펄 뛰었다. 나중에 닌자들을 위로해주려 술자리를 베푼 히데미쓰는 가장 젊은 닌자 한 명을 따로 불러 그간의 경위를 간신히 들을 수 있었다. 그런데 그 경위 라는 게 정말 기가 막혔다. "어스름이 짙어갈 무렵이었습니다. 조선인 옷을 훔쳐 입고 벙어리 흉내를 내며 우리는 간신히 적국 우수영에 닿을 수 있었습니다. 거기서 밤을 기다 렸다가 다시 인복으로 갈아입고 구름에 달이 가린 틈을 이용해 우수영으로 잠입해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히데미쓰는 닌자 세 명이 소리를 죽이며 어둠 속을 바람처럼 달려가는 장 면을 상상하며 침을 꿀꺽 삼켰다. 비록 목적한 바를 성취하지는 못했지만 히데미쓰는 이 유명한 닌자들이 적진을 크게 휘젓는 활약쯤은 충분히 했을 것으로 기대했다. "그런데 담을 넘는 순간 갑자기 안에서 개가 마구 짖는 게 아닙니까? 고 가 닌자에 비전으로 내려오는 약품을 뿌려 몸에서 나는 냄새를 미리 숨겼는 데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독 묻은 고기를 던져줘도 그 개는 쳐다보지도 않 았습니다. 게다가 한 마리가 짖자 온 동네 개들이 한꺼번에 짖어댔습니다. 귀가 예민한 우리 닌자들은 혼쭐났지요. 그래서 뒷산으로 도망쳐 한참 숨어 있다가 이번에는 반대쪽으로 돌아갔습니다." "음. 이 근처 개들은 굉장히 예민하고 사납더군. 나도 아네." 그때 젊은 닌자가 주변을 살피더니 말소리를 낮췄다. 다른 닌자들은 이미 술에 취해 다른 선실에서 자고 있을 테지만, 젊은 닌자는 어디선가 그의 말 을 훔쳐들을 것만 같은 불안감에 휩싸인 것이다. 그래서 히데미쓰도 덩달아 조심스레 주변을 살폈다. "막 담을 넘은 순간이었습니다. 우수영 안은 무척 조용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저 멀리서 '누구냐?' 라고 소리치는 게 아닙니까? 그래서 우리는 재 빨리 둔갑술을 펼쳐 숨었습니다. 수년간 써온 둔갑술입니다만 지금까지 한 번도 간파 당하지 않았습니다." 히데미쓰가 고개를 끄덕였다. 주변 지형지물과 비슷한 도구를 이용해 숨 는 것을 둔갑술이라 하는데, 만약 평범한 사람 눈에 들킨다면 그만큼 창피 한 것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히데미쓰는 이 닌자들이 들키지 않았을 것이 라 확신했다. "그런데 소리를 친 그 조선 장수가 저희 쪽을 잠시 가만히 지켜보더군요. 저는 그 장수하고 계속 눈이 마주쳤어도 설마 싶었는데, 그 장수는 우리를 모조리 파악한 것입니다." "저런, 맙소사! 들켰군 그래." 히데미쓰는 그 조선 장수가 아주 뛰어난 무예가쯤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둔갑술을 펼친 닌자들을 한 눈에 파악했다면 무예가 중에서도 감각이 아주 뛰어난 자일 것이다. 어쩌면 그 무섭다는 이순신일 지도 몰랐다. "처음에는 그 장수가 기가 막힌다는 듯이 피식 웃었습니다. 그러더니 화 를 내면서 마구 소리치더군요. '감히 수영 담장 밑에서 장난치는 놈들은 누 구냐? 유치한 짓거리들 그만해라!'라고요. 깜짝 놀라 주위를 살펴보니 그제 야 우리들이 들킨 이유를 알 수 있었습니다. 그 담은 그저 커다란 돌과 흙 으로 층층이 쌓아놓은 것이었습니다. 저희는 회칠이 된 일본 담장으로 위장 하고 있었는데 말입니다." "음. 자네들 실수했구먼. 난 자네들이 조선말까지 배우고 왔다길래 준비를 철저히 했다 싶었는데." "사투리나 그 지역 특유의 억양까지 배우는 건 닌자로서 기본이지 않습니 까? 어쨌든 다급한 김에 아무 건물에나 뛰어들어가 다시 둔갑술을 펼치려 했습니다. 그런데, 세상에! 다다미가 깔린 방은 단 한 곳도 없었습니다." 젊은 닌자가 단숨에 술잔을 비우더니 흥분하기 시작했다. "아니, 히데미쓰 님! 방에는 당연히 다다미나 하다못해 나무로 만든 마루 라도 깔려있어야 하는 게 아닙니까? 그런데 그 방들은 바닥이 돌인지 흙인 지 단단한 것 위에 종이 같은 것을 잔뜩 처발랐다더란 말입니다! 누런 종이 에 까만 글씨가 가득해서 도저히 몸을 숨길 방법이 없었습니다. 정말 놀라 고 답답했습니다. 이럴 수가 있습니까? 우리가 가진 둔갑술 도구들은 모두 다다미방에 맞춘 것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조선인들이 우리의 침입 에 대비해 함정을 파둔 게 아닐까 의심할 정도였습니다." "끄응! 아냐. 원래 조선에는 방에 다다미가 없어." 히데미쓰는 이 순박하게 생긴 청년을 포함해 닌자들이 다 바보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바보가 열심히 열변을 토했다. "그래서 천장에 올라가려 했습니다. 그런데 천장이 막혀 있으니 도저히 불가능했습니다. 그래서 그 방에서 나와 다른 곳으로 들어갔습니다. 새로 넓 은 방에 들어가니까 천장에 올라갈 수가 있더군요. 사람 눈길이 쉽게 닿지 않을 만큼 높고 몸을 숨기기에 충분히 어두웠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진짜 문제가 터졌습니다." 이쯤 되자 히데미쓰가 속으로 혀를 차기 시작했다. 닌자라면 당연히 주변 지형지물에 스스로를 녹여들여야지, 둔갑술 도구와 익숙한 기술에 맞춰 숨 을 곳을 택하려 하니 조선 땅에서 그런 곳이 있을 리가 없다는 생각이었다. "조선인들은 도대체 왜 벽에다가도 종이를 발랐을까요? 한 분이 벽을 타 고 오르다 그것 때문에 미끄러져 뒤로 넘어졌습니다. 그래서 머리를 크게 다치셨지요. 에휴~" 한숨 짓는 청년 닌자의 말을 계속 듣자니 히데미쓰도 한숨이 절로 나왔 다. "참다못한 두목님께서 인술을 쓰시겠다고 밖으로 나가 조선 장수에게 주 문을 걸었습니다. 하지만 그게 또 급한 마음에 일본말로 했으니 아예 씨도 먹히지 않았습니다. 조선말로 바꿔 인술을 다시 걸었을 때는 이미 늦었습니 다. 두목님이 더듬거리며 인술을 거는 중간에 그 장수가 말을 가로챘거든 요." "그래. 고생했군. 한잔 더 들게." 대충 알만했다. 처음에 일본말로 중얼거렸으니 상대방이 최면에 걸릴 리 가 없었다. 그리고 더듬거리는 조선말로 주문이라니, 그게 제대로 먹힐 거라 고 생각했을까? 히데미쓰가 젊은 닌자를 진정시키려 했지만 그 닌자는 흥분 했는지 목소리가 계속 높아졌다. "우리는 안되겠다 싶어 도망치기 시작했습니다. 장수는 우리를 도둑으로 알았는지 '도적놈들아! 게 섰거라!' 하고 외치며 활을 쏘았습니다. 사무라이 들을 상대할 땐 그들이 검을 빼들고 덤벼들면 슈리켄(표창)이라도 몇 개 던 지고 거리를 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상대가 제자리에 서서 활을 쏘니 우 린 대적도 못하고 죽기살기로 도망쳐야 했습니다." 히데미쓰는 골치가 지끈지끈 아팠다. 조선인들이 활을 잘 쏜다는 이야기 도 못 들었단 말인가? 그리고 왜 반드시 칼을 들고 닌자들을 쫓아야 하는 걸로 아는지 그게 더 기가 막혔다. "그때 두목님이 어깨에 화살을 맞았지요. 그 다음에는 온 동네 개들이 도 망가는 우리들을 쫓아온 겁니다. 저도 엉덩이하고 다리하고 몇 군데 물리고, 각종 도구를 넣은 봇짐까지 몽땅 잃어버렸습니다. 정말 혼났습니다." 닌자가 부끄러운지 고개를 숙였다. 히데미쓰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측은함 과 함께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아야 했다. 일본 최고의 닌자들이 고작 좀도 둑 취급이나 받고 아무 소득도 못 얻고 나온 것이다. 그리고 이야기를 들으니 그 조선 장수라는 자도 별로 높은 인물인 것 같 지는 않았다. 게다가 그 조선인이 닌자들을 일본인 염탐꾼으로 안 본 것은 닌자들이 하도 한심해 보여서였을 것이다. 결국 히데미쓰는 야스하루 님께는 비밀로 해달라며 간곡히 부탁하는 요청 을 뿌리치지 못했다. 다음날 노잣돈을 주어 보내긴 했지만 히데미쓰는 그 닌자들의 참담한 표정만은 잊혀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 사정을 듣지 못한 야스하루는 못내 그 시노비들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야스하루가 다시 물었다. "철포술이든 둔갑술이든 이순신을 거꾸러뜨리지 못한단 말이냐?" "예. 유감스럽지만." 히데미쓰가 딱 잘라 말했다. 그러면서 은근히 그때 일을 이야기해 주고 싶은 유혹을 느꼈다. 주군도 진실을 알아야 하지 않을까? 그 닌자 청년이 알려준 대로 주군에게 고해 바치면 주군은 과연 배를 잡고 웃을지, 아니면 한심한 표정을 지을지 궁금했다. "알았다." 야스하루가 아쉬운 듯 대답하며 다시 함대 진형을 살피기 시작했다. 히데 미쓰는 그제야 주군이 농담이 아니라 실제로 그런 생각을 했음을 깨달았다. 만약 이순신을 암살하라고 닌자들을 다시 투입했다면 또 다른 우스개가 조 선에 회자될 뻔했다며 가슴을 쓸었다. 와키자카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렇다면 이젠 방법이 없어." 전국시대 닌자의 실제능력이란 건, 잠입과 암살을 밥먹듯이 하고 주술 같 은 인술忍術을 써서 사람을 홀리는 수준과는 사실 거리가 멀었다. 그들이 주로 맡은 임무는 정찰과 정보수집이었고, 암살은 하급무사 급을 상대로나 간신히 성공할 수 있었다. 둔갑술이나 인술이란 것도 따지고 보면 현대의 위장술이나 최면술 정도 수준이며 결코 미지의 신비한 능력이 아니었다. 그런 닌자들에게 말도 제대로 안 통하고 지형과 풍토가 전혀 다른 조선 땅에서 암약하라는 것은 잉어를 바다에 풀어놓는 것과 같았다. 특히 조선 장수를 암살하고 파괴활동을 벌이라는 건 전혀 가능성 없는 무모한 의뢰에 지나지 않는다. 현대인들이 갖는 닌자에 대한 이미지는 쥐도 새도 모르게 행하는 잠입, 신비한 은신술, 그리고 뛰어난 암살 능력 등이다. 그러나 이것은 동양의 것 에 무지한 서양인들이 품는 신비감과 자국의 우월함을 자랑하고픈 일본인들 의 희망이 합해져서 만들어진 과장과 상상일 뿐이다. = 발포돌격선, 나대용 어두운 배 안에서는 팽팽한 긴장감이 유지됐다. 격군들과 포수들은 그 저 조용히 서있고 전면 천자총통 두 개를 맡은 화포장만이 앞을 내다보 며 시시각각 변하는 전황을 보고하고 있었다. 언뜻 보면 이곳은 무척 평화로웠다. 울돌목 쪽에는 포성과 총성이 요 란했지만 이곳은 파도가 잔잔하고 갈매기가 끼룩거리는 그런 조용한 바 다였다. 배 안에서는 화포장 한 사람 빼고는 말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앞쪽에서는 발포만호 소계남과 군관 나대용이 계속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격군들과 포수들은 그런 소계남을 경멸에 찬 시선으로 쏘아보았 다. 그리고 화포장이 울돌목에서 싸우는 조선수군의 분전을 알릴 때마다 경멸의 강도가 높아갔다. "좋다! 난 모르겠다. 나 군관 자네가 지휘해라." 소계남이 더 이상 사람들의 눈길을 견딜 수 없었는지 나대용을 어깨로 밀치고 뒤로 걸어갔다. 그런 소계남의 등에 대고 나대용이 소리를 질렀 다. "만호께서는 그 동안 아프신 걸로 하겠습니다." 격군들 사이에서 작은 키득거림이 번졌지만 나대용이 쏘아보자 곧 잦 아들었다. 나대용이 도노장을 향해 외쳤다. "어서 앞으로 나아가라!" = 전우수1선, 김억추 "이응표 저놈이 나한테 말도 않고 혼자 가다니! 아니, 소계남 저놈도?" 장대에 선 김억추는 아주 심각해졌다. 가리포첨사의 판옥선뿐 아니라 발포돌격선도 앞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이제는 뭔가 결단을 내려야 할 순간이 온 것 같았다. 김응추가 슬쩍 나섰다. "어떻습니까? 잘하면 이길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우리도 슬슬 움직여 보는 게." 잠시 계단에 주저앉은 김억추는 한참 동안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런 결과가 나오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물살이 바뀌었다고는 하지만 울 돌목에서 싸우는 판옥선들이 지금은 앞으로 밀고 나가지 않는가? 한참 고민한 김억추가 드디어 결단을 내렸다. "슬슬? 그래. 좋다. 대신 아주 슬슬이다. 어이! 도훈도!" "예으이!" 도훈도가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지금까지 울돌목에서 벌어진 전투를 하나도 놓치지 않고 지켜본 도훈도의 목소리는 꽤나 들떠 있었다. "배를 앞으로! 최고 속도로!" 김억추가 드디어 전진명령을 내리자 도훈도가 신이 나서 아래를 향해 외쳤다. 곧 판옥선이 힘차게 앞으로 향했다. 저 멀리 울돌목 입구에 가득 한 연기가 금세 가까워졌다. 곧 가리포 전선과 발포 돌격선도 따라잡을 기세였다. 그때 금갑만호 이정표가 사다리 위로 올라와 갑판 위에 머리를 내밀고 좌우를 살폈다. 배가 앞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확인한 이정표는 신이 나 서 갑판 위로 뛰어올라왔다. 그 순간 김억추가 다시 명령을 내렸다. "뒤로!" 도훈도가 놀라 김억추의 얼굴을 가만히 살폈다. 뭘 잘못 먹었냐는 뜻 이 담겨있었다. 김억추가 계단에 한 발을 내딛고 조용히 말했다. "도훈도, 너 죽을래?" "아, 아닙니다. 나으리. 도노장! 배를 뒤로 물리랍신다! 뭐? 웬 미친소 리를 하냐고? 수사 영감이 직접 내리신 군령이다, 이놈아!" 명령이 격군들에게 전달돼서 배가 다시 움직일 때까지는 한참 걸렸다. 군관들과 수졸들은 기가 막혀 멍청히 장대 위를 쳐다보기만 했다. 얼굴 이 붉으락푸르락한 이정표는 활을 들어 김억추를 쏠까말까 망설이는지 자꾸 장대 위를 노려보았다. "호오! 제자리에서 뒤로 갈 수 있네? 뱃머리를 돌릴 줄 알았는데, 그게 아냐." 신기하다는 듯이 좌우를 둘러본 김억추가 다시 명령을 내렸다. "그럼 이번엔 제자리에서 왼쪽으로." 배는 김억추가 말한 그대로 움직였다. 마치 게가 옆 걸음 치듯이 판옥 선이 이물을 앞으로 향한 채 그 자리에서 왼쪽으로 기어갔다. "오오~ 이것도 된단 말이지? 그럼 이번에는 오른쪽으로." 배가 미끄러지지도 않고 제자리에 우뚝 서더니 이내 반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물을 앞으로 고정시키고 오른쪽 45도 방향으로!" 각도를 잴 때 쓰는 단위인 도度는 서양의 과학문명이 들어오기 훨씬 전부터 천문관측에서 사용했다. 그러나 하루를 1도로 잡아 동지부터 다 음해 동지까지의 1년이 365일이니 원은 서양과 같은 360도가 아니라 365 도였다. 그래서 서울은 북극성과의 각도차인 위도가 360도 기준으로 북 위 37.5도 정도가 아니라 38도를 약간 넘게 된다. "제자리에서 한바퀴 돌아! 옳지, 잘한다. 이번에는 반대로!" "신났군요. 장단 맞춰 춤이라도 추지 그래요?" 옆에서 김응추가 거들었다. "음. 잘해. 정말 잘하는군. 보면 볼수록 신기해. 혹시 이 배, 제자리에 서 뜀뛰기나 물구나무서기 같은 것도 되지 않을까?" "한번 시켜볼까요? 잘하면 줄넘기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김억추가 입술을 달싹이는 게 진짜로 도훈도에게 그런 명령을 내릴 낌 새였다. 격군들이 노를 힘차게 저어 배가 물위로 뛰어오른 사이에 갑판 양쪽에서 밧줄을 돌리면 가능할 것도 같았다. "영감! 정말 미치고 폴짝 뛰겠습니다. 도대체 갈 겁니까, 안 갈 겁니 까?" 참다못한 이정표가 소리를 버럭 질렀다. 그러나 김억추는 느긋하게 장 대 계단에 앉았다. "사람 성격이 왜 그리 급해? 자! 그럼 천천히 가볼까?" 그러나 아직 전진 명령은 내리지 않았다. 이정표는 속이 부글부글 끓 겠지만 혹시라도 김억추가 변덕을 부릴까봐 아무 말 못하고 노려보기만 했다. "음. 다른 배들도 내가 데리고 가는 것처럼 해야겠지? 그럼 어서 가 자!" "잠깐만요. 저 뒤에 회령포 전선은요?" 어느새 김억추의 배는 아까 다른 배들이 있던 곳을 지나고 있었다. 그 러나 회령포 전선은 계속 그 자리를 고수했다. 이제는 딱 한 척밖에 남 지 않았다. "민정붕이? 음. 오라 그래. 깐깐한 통제사 밑에는 더 이상 못 있겠다면 서 회령포를 다시 전라우수영 소속으로 빼달라고 손이 발이 되도록 나한 테 빌었으니까, 민정붕이 내 말은 잘 듣겠지." "어? 형님! 민정붕 저놈이 도망가려나 봅니다. 엉덩이는 다 나았나본데 요?" 붉은 갑옷을 입은 장수 하나가 회령포 전선 좌현에 난 사다리를 딛고 사후선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판옥선의 사다리는 현측에 줄지어 튀어나 온 나무이며, 이것은 좌우현의 벽을 지탱하는 가룡목 끝을 자르지 않고 둔 것이다. 위치는 배 중간쯤인데 보통은 격군이 노를 젓는 갑판에서 내 려가야 한다. "쯧쯧! 겁쟁이 같으니라구!" 김억추가 말을 마치자마자 김응추가 다가와 눈을 크게 뜬 채 말없이 얼굴을 가까이 댔다. "나는 겁쟁이가 아냐! 작전상 물러서 있었을 뿐이란 말야!" "그럼요. 어이~ 지각관! 민정붕이를 불러라!" 김응추가 김억추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지각관을 겸한 우수 영 군관 배영수가 회령포 전선을 향해 청색 위장기를 힘차게 흔들었다. 그러나 회령포 전선에서는 전혀 반응이 없었다. 회령포 전선은 사후선 을 타고 달아나는 민정붕이나 이상한 기동연습을 보여준 전우수1선을 못 본 척하고 앞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건 그렇고 아버님은 어쩐다지? 설마 그따위 해일에 돌아가시지는 않겠지?" 갑자기 김억추가 딴소리를 했다. 위장기를 힘없이 내린 배영수가 장대 위를 쏘아보았다. = 와키자카군 어립선, 히데미쓰 이마이 히데미쓰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실패한 것은 저격만이 아니었다. 전체적인 전세도 불리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기세 좋게 조선군을 밀어붙이 던 이이츠카 함대도 추진력을 잃었다. 기운차게 젓던 노도 이제는 거의 멈 췄다. 힘이 딸릴 때가 이미 지난 것이다. 조선 판옥선들을 직접 상대해 싸우던 히요시 함대는 더 참담했다. 해협을 돌파한 배 5척은 뒤에 있는 조선군에 의해 막혀 거의 전멸하고 나머지 함대 도 강력한 조선수군의 화포에 맞아 차례로 격파 당하고 있었다. "제길! 정수리를 못 쏘니까 사냥이 엉망이 되잖아! 호랑이가 더 날뛰지 않는가 말이야!" "아무래도 본진과 후미함대의 일부를 빼서 지원하시는 편이..." "그만!" 야스하루의 말투가 점점 거칠어져갔다. 온갖 감정이 다 포함된 그 표정을 보면서 히데미쓰는 다음 말을 기다렸다. "여기서 더 이상 배와 병력을 잃을 수는 없다. 저 녀석들은 여기서 죽으 면 그만이지만 나에게는 아직 싸울 곳이 많다. 전공을 세워야 해! 이런 재 수 없는 곳에 더 이상 처박혀 있어봐야 별 수 있겠나?" "무, 무슨 말씀이십니까?" 야스하루의 말투에서 더 할 수 없는 잔혹함과 비정함이 묻어 나왔다. 순 간 히데미쓰는 당황해서 말을 제대로 못할 지경이었다. 히데미쓰는 이 작전을 실행하기 전에 참패한 구루지마 함대에 야스하루가 보냈던 싸늘한 눈길을 기억해냈다. 지금 그 눈길이 휘하 함대에게도 보내지 고 있었다. 패배한 부하에 대한 것으로는 너무도 잔인한 눈길이었다. "철수한다! 호랑이 사냥은 끝났어. 놓친 사냥감에 더 이상 미련은 없다!" "그럼 이이츠카와 히요시 함대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히데미쓰가 다급하게 묻자 돌아오는 것은 싸늘한 응답뿐이었다. "버려 둔다. 알아서 살아 돌아오면 좋고 안되면 죽겠지." "야스하루 님!" 히데미쓰는 그 순간 주군을 그냥 이름으로 불렀다. 도저히 존경할 수 없 는 행동을 하는 이 남자가 과연 지금까지 목숨을 바쳐 모신 그 용감하기로 유명한 주군 와키자카 야스하루인지 헛갈릴 정도였다. "저들은 지금 야스하루 님을 위해 목숨을 걸고 있습니다. 그렇게 내 팽개 칠 수는 없습니다!" "그럼 저놈들 때문에 나더러 죽으란 말이냐? 나를 위해 목숨을 걸었다면 나 대신 죽으라고 해." 히데미쓰가 서둘러 무릎을 꿇었다. "다시 한번 재고를! 저들은 야스하루 님의 충직한 부하입니다!" "닥쳐라!" 히데미쓰의 간절한 부탁도 소용없었다. 야스하루의 눈에는 이미 기울어진 전세 외엔 아무 것도 들어오지 않는 듯했다. "여기서 더 잃으면 다른 곳에서도 기회가 없어진다. 차라리 반만 잃고 가 는 편이 낫겠다." 고개를 든 히데미쓰는 야스하루가 잡은 지휘봉 끝이 심하게 떨리는 것을 보았다. 분함을 억누르고 있는 것이다. 부하를 희생시켜서 도망치려는 간사 함을 납득할 수는 없었지만 이미 내려진 결정을 돌릴 방법도 히데미쓰에겐 없었다. "총대장 다카도라 님께는 어떻게 말하시겠습니까? 후퇴를 허락하지 않을 겁니다." 히데미쓰는 마지막 기대를 걸고 물었다. 총대장의 지시를 어긴 문책을 어 떻게 다 받겠느냐는 힐난이 섞인 물음이었다. "무시한다! 이유 따위는 나중에 작전의 차이 정도로 적당히 둘러대면 돼. 만일 길을 비키지 않으면 싸워서라도 비키게 한다!" 야스하루의 대답을 듣고 히데미쓰는 절망하고 말았다. 부하를 구하기 위 해 싸우지 않겠다는 야스하루가 오히려 후퇴하기 위해서는 아군과도 싸우겠 다는 것이다. 히데미쓰는 그 동안 마음속으로 실컷 욕한 겁쟁이 조선군과 주군 야스하루가 하나도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을 애써 억눌러야 했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야스하루 님." 히데미쓰는 앞으로 더 이상 주군이라 부르지 못할 것 같은 남자에게 고개 를 숙였다. 시선을 일부러 피한 히데미쓰가 병사들에게 명을 내렸다. "후퇴 신호를!" 어립선을 포함해 배들이 천천히 선회하기 시작했다. 물살이 거세지기 시 작해 옆구리를 드러낸 배들이 크게 요동쳤다. 자칫하면 배가 뒤집힐 수도 있어 다락 아래에서 수부장들이 노꾼들을 닦달하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왔 다. 부하를 버려 둔 일방적인 후퇴였다. 고전하고 있는 이이츠카와 히요시가 이것을 보고 과연 어떻게 느끼겠는가? 히데미쓰는 그것이 두려웠다. "지금은 일단 어떻게든 전력을 보존하는 게 중요하다." 혼잣말처럼 하는 야스하루의 말은 변명에 불과했다. 히데미쓰는 귀를 틀 어막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히데미쓰의 눈은 이런 주군의 마음도 모르고 열심히 작전을 수행하는 부하들을 보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히데미쓰 눈에 이상하게 생긴 배 한 척이 들어왔다. 거 적에 덮인 모습은 다른 조선 배들과 마찬가지였지만 윗부분이 상당히 돋보 였다. - 뻐벙! 하얀 연기가 그 배를 뒤덮었다. 그 배가 좌우현으로 거의 동시에 화포를 쏘고 나서야 히데미쓰는 그게 뭔지 깨달았다. "저건..." 히데미쓰가 막 말하려는 순간 공포와 놀라움에 가득 찬 관측병의 목소리 가 귓가를 때렸다. "메구라부네! 메구라부네가 나타났습니다!" 역사전쟁소설 // 남해 // 2권 copyright (C) 2001 김경진 안병도 신재호(필명) 공저 업로드 김경진 (전쟁소설 데프콘 1, 2, 3부, 동해, 남북, 판타지 하늘길잡이 공동저자) * 고칠 점이 있다고 생각하시면 언제든 18번 오발탄 게시판에 올리시 거나, 저나 안병도 님께 메일로 의견을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조선 ; 김경진 amraam07@hitel.net 일본 ; 안병도 031038@hitel.net * 허미택님께서 지적하신 두 가지는 고쳤습니다. 제가 못 볼 경우도 있으 니 앞으로는 너무 빨리 지우지 마십시오. * 선두무상과 도훈도, 도노장의 역할이 저도 자꾸 헷갈립니다. 도노장과 선두무상이 같은 층에 있는 경우에는 더 헷갈리는군요. 현대의 선박과 비교 하면 선두무상이 항해장, 도노장을 기관장 정도로 보면 되겠습니다. 도훈도 는 부선장 정도? 船將은 船長, 즉 艦長 정도입니다. 만호, 현령 등은 두세 척을 거느린 전대장이고, 부사, 첨사는 전단장 정도 되겠군요. * 휴대폰으로 '회원님께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어쩌고 해서 확인을 누 르라고 하는 메시지를 받을 때 확인 버튼을 함부로 누르지 마십시오. 700 유료전화 서비스입니다. 별 치사한 영업방법이 다 있군요. 7. 역류 (2) = 발포돌격선, 나대용 (* 발포돌격선은 firing & assaulting ship -_-? 발포는 鉢浦입니다.) - 끼이이익! 쿠쿵! 앞으로 나아가는 돌격선 뒤에서 왜선 한 척이 천천히 허물어지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다른 판옥선에게 집중적으로 얻어맞아 반쯤 부서진 왜선이었 다. 불타오르던 왜선은 돌격선의 일제사격 한 번에 밑에서부터 완전히 무너 져 내렸다. 돌격선 장대에 오른 나대용은 다음 목표를 찾았다. 바로 앞에서는 안골포 만호 우수와 영등포만호 조계종이 방어선을 뚫고 들어온 왜선 세 척을 상대 로 싸우고 있었다. 어이없게도 판옥선 두 척이 왜선 세 척을 포위한 형상이 었다. 그대로 놔둬도 충분히 싸울 수 있겠지만 전체 조선수군 입장에서 보 면 시간이 아까웠다. 지금은 좌선과 녹도 전선, 평산포 전선이 앞으로 나가는 바람에 방어선에 큰 구멍이 생겼다. 통제사 입장에서는 좁은 울돌목을 틀어막는 게 급했겠지 만, 군사들 입장에서는 싸울 때 적이 뒤에서 얼쩡거리는 것만큼 불안한 일 도 없었다. 해협을 빠져 나온 왜선들을 어떻게든 빨리 쳐부숴 구멍을 틀어 막아야 했다. "오른쪽 앞에 안골포 전선을 도와라!" 나대용이 몸을 숙여 장대 아래를 향해 외치자 중간에서 도훈도가 아래 갑 판 앞쪽에 있는 선두무상에게 명령을 전달했다. 거북 등껍질 바로 밑층에서 는 수졸들이 불화살이나 조총, 승자총통을 쏘고, 다시 그 아래 갑판에서는 격군들이 노를 젓고 그 사이사이에서 포수들이 포를 쏘는 방식으로 전투가 이뤄졌다. 격군들이 힘들여 노를 젓지 않아도 배는 물살을 타고 힘차게 전진했다. 용머리 사이로 싸움터를 살피던 선두무상이 도노장과 타공에게 지시해 배의 진로를 세심하게 조정했고, 포수들은 장전을 마친 다음 작은 횃불을 들고 서 있었다. - 퍼벙! 뻥! 앞에서 천자총통이 연속 발사됐다. 앞으로 나온 왜선 두 척은 뱃전에 큰 구멍이 하나씩 생겼다. 바닷물이 들어갈 정도로 낮게 명중시키진 않았지만 대장군전이 왜선 안쪽을 뚫고 들어가면서 양쪽에 두 줄로 선 노꾼들이 엄청 나게 놀랐을 게 분명했다. 어쩌면 커다란 대장군전이 노꾼 서넛의 몸을 한 꺼번에 헤집고 지나갔을 수도 있었다. 그 사실을 증명하듯 일렬로 선 노 수 십 개가 파도에 떠밀린 채 세워졌다. 나대용이 같이 장대에 선 기라졸들의 등을 두드렸다. 그리고 차례로 장대 아래로 몸을 숙였다. 왜선 세 척이 바로 눈앞에 있고, 이쪽을 향해 정신없이 조총을 쏴댔기 때문이었다. - 우지지지직! 돌격선은 거의 붙어있는 왜선 두 척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선체의 나 무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왜군들이 지르는 고함과 비명이 하늘을 찌르듯 날 카롭게 들려왔다. 그리고 배끼리 거의 붙은 채로 아래를 향해 화포를 쏘자 왜선에 치명상이 가해졌다. 단석과 차대전 몇 발이 왜선의 현측과 밑바닥을 한꺼번에 뚫어버린 것이다. 바닷물이 왜선 안으로 거침없이 쏟아져 들어갔 다. 돌격선이 왜선 두 척 사이를 빠져나가자 그 자리를 무너진 왜선의 다락이 메꿨다. 왜선 한 척이 중심을 잃고 그대로 엎어져버린 것이다. 날렵하게 생 긴 세키부네는 직진성이 좋은 대신 복원력은 떨어지는 편이다. 바로 앞에 또 다른 왜선이 산발적으로 조총을 쏘면서 뒤로 물러서고 있었 다. 나대용이 슬쩍 고개를 들어서 보니 갑판 위의 왜군들은 대부분 겁에 질 려 돌격선을 그저 바라만 보고 있었다. "우로 중약!" 선두무상이 고물에 있는 타공에게 신호를 보냈다. 왜선과 정면으로 맞부 딪치지 않도록 세심하게 운행해야 했다. - 꾸웅~ 끼이이! 돌격선이 왜선의 이물을 스친 다음 현끼리 빈틈없이 맞붙었다. 정면으로 충돌했을 때도 왜선이 거의 일방적으로 손해를 보지만 조선 전선에 전혀 피 해를 못 끼치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정면충돌은 조선 전선이 즐기는 전 법이 아니었다. 조선수군이 일본수군과 싸울 때는 그런 자그마한 위험이라 도 감수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 따다닥! 따닥! 노끼리 맞부닥치며 내는 소리가 돌격선이 왜선을 지나칠 때까지 계속됐 다. 보통 4~5명이 젓는 조선 노의 힘찬 움직임에 따라 혼자서 젓는 왜선의 노가 이리저리 퉁겨나갔다. 그리고 조금 전에 쏘지 않은 화포가 왜선의 흘 수선을 노리고 마무리를 지었다. 왜선은 돌격선과 잠시 스친 그 짧은 시간이 지나자마자 기동불능에 빠졌 다. 왜선 우현에 있던 노꾼들은 더 이상 노를 저을 수가 없었다. 노가 부서 지지 않았더라도 노꾼이 죽었거나, 다쳤거나, 아니면 완전히 겁에 질려 자리 를 떠났기 때문이다. = 와키자카군 어립선, 히데미쓰 "메구라부네라고? 메구라부네!"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낯빛이 확 달라졌다. 그러나 놀라 소리 지르는 것도 대단한 용기를 필요로 했다. 다른 병사들은 그 자리에서 꼿꼿이 굳어 아직 도 꼼짝하지 못했다. 히데미쓰도 어쩔 줄 모르며 당황했다. 수부들은 직접 보지 않고 단지 그것이 출현했다는 소리만 듣고도 겁에 질렸다. 메구라부네(目くら船). '눈먼 배'를 뜻하는 이 말은 조선의 거북선을 가리 킨다. 일본수군 입장에서 거북선은 도무지 상대할 수 없는 배였다. 배라면 당연히 있어야 할 갑판이 안 보이고 선체에서는 사방으로 불덩어리를 쏟아 냈다. 철포를 쏴도 등딱지 같은 지붕을 뚫지 못하고 뛰어들어 싸우자니 지 붕에는 칼과 창이 빽빽이 박혀 있었다. 거북선 겨우 한 두 척이 밀집한 왜 선들 사이로 서슴없이 뚫고 들어와서 닥치는 대로 쏘고 부딪히는데도 일본 수군은 대응할 방법이 없었다. "아직 후퇴해서는 안됩니다!" 히데미쓰는 함대 전체에 대한 후퇴명령을 유보하길 청했다. 어떻게 보면 야스하루의 명에 정면으로 거역하는 행위였다. "저 괴물 때문이냐?" 야스하루는 서슴없이 거북선을 괴물이라 불렀다. 한산도에서 뼈아픈 패배 를 당할 때 직접 거북선을 눈으로 본 야스하루였다. 거북선이 다시 나왔다 는 건 불쾌감 이상의 감정을 던져주었다. 아마 공포라고 해도 무방하다고 히데미쓰는 생각했다. "저 배가 나왔다는 건 적이 공세로 나오겠다는 신호입니다. 여기서 우리 가 시간을 벌어주지 않고 후퇴하면 뒤에 있는 다카도라 님의 본진이 순식간 에 유린당할 수도 있습니다." "어리석은 녀석! 저건 겨우 한 척이다. 조선군은 합쳐봐야 13척이고." 야스하루가 부들거리는 입술을 진정시키며 간신히 말을 마쳤다. 히데미쓰 는 야스하루의 눈썹이 아직도 경련을 일으키는 것을 알아채곤 거북선을 살 피는 척하며 주군의 얼굴을 슬쩍 외면하고 말았다. 그리고 완강하게 야스하 루의 말을 공박했다. "그 13척에게 5백 척이 넘는 우리 함대가 당하고 있습니다! 야스하루 님 까지 발을 빼신다면 거의 절반이 당한 셈입니다!" 주베에가 쓰러진 이후 역류와 함께 어립선은 빠르게 뒤로 물러서고 있었 다. 끝없이 날아오는 화살 때문이었다. 여기쯤이면 이젠 됐겠지 했는데도 화 살은 계속 날아왔다. 히데미쓰가 계속 후퇴를 지시해 어립선은 한참을 물러 서야 했다. 어립선을 보호하기 위해 둘러싸던 배들도 그 위치를 유지한 채 물러섰다. 다만 당연히 같이 나와야 할 전체 함대의 후퇴는 전혀 신속하지 못했다. 후 퇴명령을 받지 못한 나머지 본진 함대와 후미함대가 갑작스런 어립선의 후 퇴에 놀라 주춤하고 다음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히데미쓰, 다시 말하겠다. 전 함대에 후퇴를 명령해라. 나는 병력 약 2천 명과 그보다 훨씬 많은 수부들의 목숨을 이런 무의미한 전투에서 잃고 싶지 않다. 이건 군령이다." "야스하루 님, 지금 형세를 잘 보십시오. 이대로는 우리만 물러나고 끝나 는 게 아닙니다. 본진 함대가 위험하단 말입니다! 메구라부네가 출현했고 우리는 곧 후퇴하겠다고 전령을 보내 다카도라님께 먼저 알리십시오." "끝내 내 말을 안 들을 셈이냐? 히데미쓰!" 야스하루가 갑자기 지휘봉을 내던졌다. 그리고는 허리에서 찬 검 손잡이 를 움켜쥐었다. 히데미쓰는 한번 더 명을 거역할 경우 그 검이 자기 목을 두 동강 낼 거란 사실을 알았다. "정녕 이렇게 하실 수밖에 없습니까? 분로쿠 원년의 싸움보다 지금이 훨 씬 유리하지 않습니까?" 한산도해전에서는 조선 판옥선이 50척이 넘었고, 지금은 겨우 13척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적을 알고 있었다. 뒤를 받쳐주는 아군 함대의 존재도 든든 했다. 그러나 히데미쓰가 생각하기에 지금도 방법은 없었다. "어차피 내가 전공을 세우긴 틀렸다. 다카도라 님을 도울 필요는 없다. 난 여기 없었던 것쯤으로 하지." 야스하루가 몸을 뒤로 돌리면서 딸깍 하는 소리를 냈다. 왼손 엄지로 칼 고등이를 누르는 소리였다. 히데미쓰는 더 이상 설득할 수 없음을 알았다. 그리고 방금 그 말은 자기가 실패했으니 남도 성공해선 곤란하다는 뜻이 었다. 또한 아예 이 전투에 참가하지 않은 것으로 하겠다는 말까지 했다. 히 데미쓰는 야스하루의 이런 처세술 앞에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용인에서 싸울 때는 그토록 용감한 주군이었는데. "무엇 하느냐? 어서 후퇴신호를 내라!" 히데미쓰가 애꿎은 신호담당 병사에게 호통을 쳤다. 그 목소리에는 어디 로 향해야 할지 정하지 못한 분노가 잔뜩 배어있었다. = 발포돌격선, 나대용 이번에는 조방장 배흥립의 전선을 도울 차례였다. 임진년부터 수전에는 이골이 난 배흥립은 왜선 세 척을 상대로 싸우면서도 잔뜩 여유를 부렸다. 왜선들이 조총을 쏘기 위해 어떻게든 거리를 좁히려 했지만 집중된 화포 사 격과 현란한 기동으로 결코 틈을 주지 않았다. 선두에 선 왜선이 불타올랐 다. 나대용이 기라졸들과 함께 피식 웃었다. 노장의 여유만만한 전투를 구경 하자니 보는 사람까지 여유가 생기는 듯했다. "그래도 직속 상관이니까 빨리 도와드려야지? 우리가 늦게 왔다고 욕하시 겠다." "어? 봉사 나리. 신호입니다." 기라졸이 우위장을 겸한 조방장 배흥립의 배를 가리켰다. 장대 옆에서 깃 술이 하나 달린 작은 휘가 발포돌격선을 향해 누웠다 일어나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나대용 옆에서 기라졸이 똑같은 행동으로 호응하니, 조방장의 작은 휘가 좌선 쪽을 가리켰다. 즉시 좌선을 도우라는 명령이었다. 좌선은 울돌목을 가로막고 앞에 밀집한 왜선들을 향해 연달아 화포를 쏘 고 있었다. 그 좌선 좌우에 달라붙은 왜선 3척이 나대용의 눈에 들어왔다. "좌선과 녹도선 사이로 어서 배를 몰아라!" 나대용이 장대 아래를 향해 외친 다음 전면의 상황을 찬찬히 다시 살폈 다. 좌선 말고도 녹도전선, 평산포전선, 중군선에도 왜선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판옥선에 달라붙은 왜선들은 이미 거의 절반쯤 파괴되어 있었지만 살아남은 왜병들이 조총을 쏘거나 불붙은 짚더미를 던지는 등 끝없이 싸움 을 계속했다. 판옥선들은 이 왜선들 때문에 제대로 힘을 쓸 수 없었다. 여차하면 판옥 선에 왜병들이 뛰어들어올 수 있다는 두려움이 아직도 조선수군들을 사로잡 기 때문이었다. "배에 붙은 놈들을 먼저 해치운다. 화포는 여전히 수평 아래를 향하고 있 겠지?" 장대 출입문을 잠그고 내려오면서 나대용이 화포장들에게 확인했다. 조금 전까지 선실 내를 가득 채운 터질 듯한 긴장감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이 배는 왜 수군이 말만 들어도 부들부들 떠는 최고막강천하제일용맹무쌍한 거 북선이었다. 장전을 마친 화포를 실은 당차들이 다시 포문에 끼워졌다. 그러자 포수들 이 새끼줄을 들어 당차를 눕히고 차대전을 고정시켰다. 문틈으로 목표를 확 인한 나대용이 명령을 내렸다. "좌우변 1번 화포부터 쏴!" - 뻐벙! 벼락 치는 소리와 함께 매캐한 화약 연기가 뱃전에 가득 찼다. 포성은 끊 이지 않고 뒤로 계속 연결됐다. 격군들은 기침을 해대면서도 노질을 멈추지 않았다. 나대용이 포문을 통해 다시 바깥을 살폈다. 뱃전 아래를 연달아 얻어맞은 왜선들은 급격하게 기울어지고 화포 사격에 의해 뚫린 구멍으로 바닷물이 쏟아져 들어갔다. 다급해진 왜군들이 무작정 물로 뛰어들었다. 좌선 쪽을 살피던 나대용이 인상을 찌푸렸다. 좌선에 붙은 왜선 한 척이 아직도 거의 온전히 남아 있었다. "좌선 쪽으로 움직여라! 이번에는 화포 사각을 조금 높여 층루를 맞힌다. 병력을 직접 친다!" (*부록 ; 명량해전에서 거북선의 활약 여부 명량해전에서 거북선이 동원됐는지는 확실치 않다. 국내 연구자들의 학설 은 대부분 거북선이 참가하지 않았다는 쪽으로 기울고 있다. 전쟁 첫해인 1592년에 충무공이 난중일기에서 거북선에 쓸 돛베, 화포시험 등을 시시콜 콜히 기록한 반면 명량해전 직전에는 거북선에 대해 전혀 언급이 없기 때문 이다. 그런데 충무공의 조카 이분의 行錄에서 명량해전 직전에 충무공이 병선을 거북선 모양으로 꾸미도록 명했다는 내용이 있다. 전쟁기간 동안 이분이 한 때 한산도에 머문 적이 있었다는 기록이 난중일기에 나오고, 무술년간에는 충무공을 직접 가까이 모셨기 때문에 이분의 증언은 무게가 있는 편이다. 그러나 난중일기나 장계, 실록 등 다른 기록에서는 명량해전에 거북선이 참가했다는 국내기록은 전혀 없다. 다만 일본 측 사서에는 명량해전에 참가 한 조선수군의 배는 모두 거북선이었다는 과장된 기록이 있을 뿐이다. 난중일기에 거북선이 마지막으로 등장한 것은 1594년 2월 15일로, 거북선 두 척과 보성 전선 한 척이 나무를 실어오는 수송임무를 맡은 것이다. 당시 거북선은 최초에 돌격선으로서 화려하게 등장했을 때와 달리 운용과 전투의 불편함이 강조된 것으로 보인다. 신선함도 이미 사라진 다음이었다. 거북선 은 구조와 운용방법이 판옥선과 거의 동일했으므로 당시에는 거북선이 해전 에 참가했다고 해서 특기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거북선의 내부 구조, 철갑 여부는 생략 나대용은 전선을 만드는 감조군관으로서 전란기간 내내 충무공 밑에서 종 군했고 돌격장을 역임한 바도 있다. 그러나 돌격장으로서는 나대용보다는 오히려 이언량이 더 자주 난중일기에 등장한다.) = 와키자카군, 이이츠카 "겁먹지 마라! 저래봐야 그저 널빤지상자에 불과하다! 싸워라!" 무너져 가는 함대와 다가오는 죽음의 신을 지켜보면서 이이츠카가 목이 터져라 고함을 질렀다. 불타는 배와 허둥대는 병사들 속에서 사이토 이이츠 카는 전군 사무라이 대장답게 악착같이 싸우고 있었다. 그것은 차라리 몸부림에 가까웠다. 기세 좋게 판옥선을 밀어붙이던 처음 의 기세 같은 건 이미 온데간데없었다. 비명과 폭음이 흩어지는 허공에는 참혹하게 죽어 가는 사람들의 피와 살점만이 솟아올랐다. "뭐가 메구라부네냐? 나무로 만들어지기는 마찬가지니 불태우면 저것도 끝장이다! 쏴라!" 더구나 이번 상대는 바로 거북선이었다. 두터운 나무판에 요소요소마다 철판을 덧대 일본군이 보유한 활과 철포도 소용없게 만드는 몸체, 거대한 체구에 비해 놀랄 정도로 날렵하고 빠른 움직임, 사방으로 쏘는 대포라는 막강한 화력을 지닌 괴물이었다. 거북선에 대해 조금이라도 들어본 병사들은 거리가 좁혀짐에 따라 극도의 공포에 질려갔다. 처음 보는 이이츠카도 그 공포에 압도당할 정도였다. 눌리 지 않으려고 악을 쓰는 목소리가 무척 떨렸다. 거북선을 보며 주춤거리고 물러서다가 시체에 발이 걸려 넘어지는 병사도 나왔다. 조선 대장선과도 잘 싸웠던 병사들이 거북선 앞에서는 한꺼번에 무 너지고 있었다. 이이츠카가 탄 중형 세키부네에는 병사 30명과 수부 40명이 있었다. 처음 배에 탔던 그 병사들 가운데 이미 절반이 죽어 바닥을 뒤덮었다. 구루지마 해적은 수부라고 해도 해적질에 능숙한 자들이라 전투원이나 마찬가지였지 만 와키자카군의 수부는 노 젓는 사람 이상은 절대 아니었다. 평생 칼 한번 제대로 잡아보지 못한 농민이나 어민이 대부분이었니, 아직도 살아남은 병 사 몇 명이 이 배가 가진 전투력의 전부였다. "쏴라!" - 타당! 그런 대로 대오를 유지하고 있는 부대라곤 부장이 지휘하는 철포조鐵砲組 하나 뿐이었다. 하지만 그 숫자는 겨우 6명에 불과했다. 방금 쏜 탄환이 점 점 가까이 다가오는 거북선 뱃머리에 명중했다. 하지만 두꺼운 나무 두들기 는 소리만 날 뿐 아무 효과도 없었다. "도망가지 마라! 이 비겁한 녀석들아! 그렇게 목숨이 아까우냐?" 창을 버리고 물에 뛰어드는 잡병들이 하나 둘 생기기 시작했다. 늙은 무 사가 번개같이 손을 뻗어 물위에서 헤엄치는 잡병 한 명을 잡아 올리더니 목을 잘라버렸다. "으아악!" - 쿵! 목을 잘리기 직전에 지른 그 병사의 슬픈 비명이 울리기 무섭게 배가 기 우뚱하고 흔들렸다. 뒤쪽 다락에 철환이 쏟아진 것이다. 거북선과 함께 2열 을 형성하며 다가온 다른 판옥선에서 쏜 철환이었다. 이이츠카는 그만 몸의 균형을 잃고 넘어졌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벌떡 일어선 이이츠카가 다락 안에 대고 소리쳤다. "군령이다! 배를 메구라부네에 대고 몰아라! 돌격이다!" 뒤쪽에서는 주군 야스하루가 아무런 위로도 지원도 주지 않은 채 후퇴하 고 있는 걸 이이츠카는 알고 있었다. 원망스럽기는 했지만 일단 주군으로 섬긴 이상 주군을 증오할 수는 없었다. 증오스러운 것은 바로 눈앞의 적이 어야 했다. 이이츠카의 눈이 거북선을 향해 적의를 한껏 불태웠다. 다락 안에서 하급무사가 수부들에게 이이츠카의 명령을 전하자 배가 비틀 거리며 방향을 잡기 시작했다. 역류로 바뀐 물살에서 천천히 뒤로 밀리고 있는 상태였다. 마주 대고 있던 판옥선에서 떨어지는 것만으로도 상당히 복 잡한 움직임이 필요했다. "부장! 돌격 깃발을 올려라!" 칼을 높이 치켜든 이이츠카가 한껏 목소리를 높였다. 구석까지 몰려서 죽 든 반대로 적에게 달려들다 죽든 똑같았다. 기왕이면 좀 더 호쾌하게 죽고 싶은 것이 이이츠카의 속마음이었다. "이이츠카 님! 돌격입니까?" 부장이 어리둥절해서 반문했다. 지금 이 순간에 용머리에서 불을 뿜으며 돌진해오는 건 거북선이고 이이츠카 함대와 히요시 함대는 정신없이 부서지 며 수세에 몰리고 있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맞돌격이라니, 부장은 이해가 가 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기왕이면 사나이답게 죽어야 할 거 아니냐!" 이이츠카는 부장에게 일갈하고는 한쪽 구석에 죽어있는 신호병에게 다가 갔다. 질려포통에 당한 듯 그 시체는 온몸이 그을리고 상처 투성이였다. 북 을 비껴 맨 이이츠카가 기운차게 커다란 북채를 들어 북을 마구 두드렸다. - 둥! 둥! 둥! 둥! 이이츠카의 북소리에 맞춰 반쯤 부서진 세키부네가 거북선을 마주하고 돌 격을 개시했다. 그때 우지끈 하는 소리를 내며 돛대가 옆으로 꺾였다. 싸울 때는 쓸데없고 앞으로도 쓸 일이 없을 돛대라 이이츠카는 신경도 쓰지 않았 다. 대장을 따라 병사들도 전열을 가다듬고 창을 들어 용감하게 거북선을 노려보았다. - 콰과광! 뿌걱! 하지만 이이츠카의 용감한 행동에 대해 거북선에서 보내준 답례는 포탄 몇 발이었다. 역류를 무릅쓰고 발악하듯 돌격해 간 세키부네를 맞아 거북선 이 제자리에서 선체를 약간 옆으로 돌리더니 포탄을 퍼부은 것이다. 뱃전이 아래부터 와지끈 부서져나갔다. 대포 위치가 높은 판옥선에서 쏜 포탄이 주로 갑판 위로 떨어지는 데 비해 낮은 곳에 대포가 설치된 거북선 에서 쏜 포탄은 주로 다락이나 뱃전을 부수고 들어왔다. "으아악!" "살려줘!" "이 놈들! 빨리 노를 저어라! 죽고 싶으냐!" "이런 판에 어떻게 더 노를 젓습니까?" "이놈들이 정말!" 노가 일제히 멈추고 다락 안에서 하급무사와 수부들 사이에서 고함이 교 차됐다. "준비! 쏴라!" 부장이 지휘하는 철포조는 열심히 거북선에 탄환을 날렸다. 그러나 역시 아무런 효과도 없었다. 살아남은 궁수 몇몇이 날린 화살도 역시 아무런 효 과를 보지 못했다. 대항할 방법이 없다는 절망감에 사로잡혀 이제는 아시가루들도 한 명씩 바다에 뛰어들었다. 하급무사들의 제지를 뿌리치고 바깥으로 나와 물로 뛰 어드는 수부들도 있었다. 군데군데 불타는 배 안은 화로처럼 뜨거웠다. 이이 츠카 얼굴에서 땀이 줄줄 흘렀다. "더운가? 더워서 물에 뛰어드는 거냐? 죽으면 어차피 불에 태워질 텐데, 불이 그렇게 겁나느냐?" 이이츠카가 북을 내던졌다. 그리고 성큼성큼 갑판을 내려가 다락 안으로 들어갔다. 매스꺼운 피 냄새와 바닷물 냄새가 코를 찔렀다. 공포에 질려 노를 놓고 우왕좌왕하는 수부들과 어떻게든 노를 다시 젓게 하려는 하급무사가 대치하 고 있었다. 이이츠카는 내려가자마자 우선 눈앞에 걸리는 수부 한 명을 단 숨에 베어버렸다. 이어서 포탄에 맞아 숨이 넘어가기 직전에 온몸을 떨고 있는 병사의 가슴을 푹 찔렀다. 노를 놓은 채 이이츠카를 보며 떨고 있는 수부가 다음 목표였다. "이이츠카 님!" 수부를 베려는 이이츠카를 하급무사가 나서며 말렸다. 갑자기 미친 것이 아닌가 의심될 정도로 잔혹해진 이이츠카 앞에서 수부들은 조용해졌다. "돌격이다. 노를 저어라." 이번에는 소리를 치지도 않았다. 극히 침착하고 낮은 목소리였다. 그러나 이이츠카의 칼에서 떨어지는 선혈과 눈동자에서 뿜어지는 살기를 본 수부들 은 잽싸게 제 위치로 돌아갔다. 포탄보다, 거북선보다 더 무서운 것은 바로 눈앞에 선 이이츠카였다. 수부들이 다시 힘차게 노를 저었다. "부딪친다!" 다락에 나있는 구멍으로 밖을 보던 수부가 외쳤다. 그 순간 수부들은 벽 을, 하급무사들과 이이츠카는 배 중간에 서 있는 기둥을 잡고 버텼다. 요란 한 진동이 오며 다락이 통째로 흔들거렸다. 그 직후 다시 폭음과 함께 다락 앞쪽이 부서져 나갔다. = 발포돌격선, 나대용 "흐음! 이번에도 꽤 괜찮은 각도였어." 나대용이 선두무상을 칭찬했다. 머리가 벗겨지고 체구가 큰 선두무상이 배를 절묘하게 조종해서 거북선이 왜선 측면을 훑고 지나가고 있었다. 이 정도 짓뭉개면 선체가 약한 왜선은 당장 기동불능에 빠져버린다. - 끄드드드득! 뜨득! 익숙해진 진동과 함께 신경을 거슬리는 높은 소리가 계속됐다. 거북선에 는 경험이 많고 담이 큰 선두무상이 필요했다. 그리고 전체 항해를 지휘하 는 선두무상과 키를 잡는 타공의 절묘한 협동이 필수불가결이다. 포문을 통해 나대용이 왜선을 살폈다. 조총을 쏘아대던 왜병들은 조금 전 포격에 의해 대부분 쓰러져 있었다. 그리고 부상당한 왜병 서넛이 뱃전을 기어다니면서 이쪽을 향해 뭐라 소리를 질렀다. "이 정도면 끝장이긴 한데, 격군들은 대부분 살아있겠어." "한번 더 확실히 밀어버릴깝쇼?" 선두무상이 번들거리는 대머리에서 땀을 훔치며 빙긋 웃었다. 가만 놔둬 도 왜선은 곧 침몰하겠지만, 왜선의 격군들이 나뭇조각을 타고 물에 둥둥 떠있게 하는 꼴은 선두무상도 보기 싫었다. "그래. 통상이 보고 계실지도 모르니까 확실히 처리하지." 선두무상이 도노장에게 지시해 거북선을 조금 뒤로 물러나게 하는 동안 나대용이 좌선으로 시선을 돌렸다. 묵묵히 활을 쏘는 군관들과 달리 수졸들 은 활짝 웃는 얼굴로 거북선을 향해 함성을 지르고 있었다. 그 사이에서 키 가 꽤 크고 붉은 갑옷을 입은 사람 둘이 눈에 들어왔다. "통상 어른입니다! 싸움을 이 정도까지 이끌다니. 역시 대단한 분입니다!" "그래. 대단한 아저씨야." 감탄하는 선두무상과 달리 나대용은 그저 조용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 대용이 보기에 통제사는 훌륭한 수군대장이긴 하지만 별로 사나이답지는 못 한 편이었다. 사나이라면 당연히 말술도 마다 않고 마셔야 하는 법이다. 특 히 무인으로서 할 일을 하다 보면 술을 자주 마실 수도 있는 것이다, 통제 사는 뭐 그리 잔소리가 많은지 알 수 없었다. 덕택에 다른 군관들은 승진도 잘 하는데 나대용은 여전히 영군관, 훈련원 봉사였다. 나대용이 전란 기간 동안 최고 출세한 게 발포가장, 바로 이 배의 주인인 소계남이 맡은 발포만호의 대리였다. "쳇! 출발이 조금 달랐을 뿐인데. 하필 그때 전쟁이 터지는 바람에..." 나대용은 임진년에 단독으로 판옥선을 지휘할 수 있는 권관만 됐더라도 큰공을 세워 지금쯤 현령 정도는 따놓은 당상이었을 거라며 아쉬워했다. 통 제사는 처음에는 나대용을 믿고 여러 가지 중요한 일을 자주 맡겼는데 요즘 은 통 부르지도 않았다. 나대용은 그게 더 섭섭했다. "술 좋아하는 놈 치고 나쁜 놈 없다던데, 뭘." 나대용이 물사발을 입으로 가져갔다. 싸움이 한창인 마당이라 술을 마실 수 없어 아쉬웠지만 기분만은 최고였다. 시원한 소리가 나대용의 입에서 터 져 나왔다. "카아~ 좋다!" 전쟁이 끝난 후에 지방 현령을 전전한 나대용은 매일 술만 퍼마시고 업무 는 도외시한다는 이유로 사간원의 탄핵을 받아 관직에서 서너 번 쫓겨난다. 그런데 나대용은 임진왜란 당시 거북선과 판옥선의 사부와 격군 정원이 125 명이라는 사실을 상소에서 밝힌 사람으로 유명하기도 하다. = 와키자카군, 이이츠카 "이제 노는 됐다. 모두 무기를 잡아라. 싸우는 거다." 한쪽 손으로 기둥을 잡으면서도 끝까지 칼을 놓지 않은 사이토 이이츠카 였다. 갑판 아래에는 깨어진 현측을 통해 쏟아져 들어온 바닷물로 가득 찼 다. 배는 가라앉고 있었다. 이이츠카는 보통 때라면 싸움을 시키지 않을 수부들에게도 싸울 것을 지 시했다. 바닷가에서 고기나 잡고 살아오던 어부였거나 그저 지나가다가 재 수 없게 잡혀온 농민 출신 수부들에겐 분명 가혹한 요구였다. 하지만 이이 츠카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모든 힘을 다해 싸운다는 생각 외에는 들어있지 않았다. "싸우든지, 아니면 나한테 죽든지. 알아서 해라." 그래도 주저하는 수부들을 본 이이츠카는 눈앞에서 우물쭈물하는 수부 한 명을 또 베었다. 그러자 벌벌 떨던 수부들이 신속하게 무기를 들기 시작했 다. 창이든 칼이든 손에 잡히는 대로 든 수부들에게 이이츠카의 말이 이어 졌다. "그럼 나를 따라 적선과 싸운다. 나와라!" 이미 씨름은 졌다. 이이츠카가 기운차게 밀어붙였던 적이 이제는 이쪽을 모래판 밖으로 밀어내 쓰러뜨리고 있었다. 패배를 인정하라고 강요하는 그 소리는 요란한 폭음과 쇳덩어리 모습으로 이 배에 날아들었다. 더불어 와키 자카군 전체의 범 사냥도 실패로 끝났다. 사냥에 실패한 포수는 돌아가고 죽음을 기다리는 몰이꾼만이 숲에 남았다. 그렇지만... "난 절대 그냥은 죽지 않아!" 드디어 다락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피투성이가 되어 엎어진 부장이 간신 히 몸을 일으키며 이이츠카에게 할복할 것을 권했다. 단호히 거절한 이이츠 카는 부장이 거느린 철포조가 한 명도 남김없이 죽어있는 걸 보았다. 번쩍 이는 철포와 갑옷이 온통 피에 물든 채 뱃전에 누운 시체들은 좀 전까지만 해도 펄펄 살아 움직이던 병사였다. 비틀거리며 무릎으로 걷던 부장도 기력 이 다했는지 곧 쓰러져 시체 대열에 합류했다. "준비!" 이이츠카는 다락을 나온 수부들을 정렬시켰다. 대충 세어보니 20명이 좀 넘었다. 전투 중에 죽고 달아난 나머지였다. "이이츠카 님!" 아직도 살아있었는지 긴 창을 든 늙은 무사가 돌격대형을 갖춘 일행을 향 해 뛰어왔다. "오오! 왔느냐!" 늙은 무사 뒤에 다리를 절룩이는 병사와 팔을 다친 병사 한 명이 더 왔 다. 이것이 지금 이이츠카가 탄 배에서 살아남은 전부였다. 말은 이미 필요 없었다. 늙은 무사를 비롯한 병사들과 수부들은 이제부터 이이츠카가 뭘 명령할 지 알고 있었다. 한바탕 배를 짓이긴 거북 모양의 저 괴물이 다시 이 배에 충돌할 때 뛰어오르려는 것이었다. - 까드득! 끼이익! 거북선이 다시 세키부네 옆을 밀어붙였다. 큰 충격이 오고, 결국 다락이 통째로 무너져 내렸다. 이이츠카와 수부들이 숨을 크게 들이쉬고 돌격하기 직전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이쪽을 향해 포구가 천천히 돌아가고 있었다. "난 못해! 난 못한다고!" 포구가 돌아가는 것을 본 모두는 염라대왕이라도 만난 듯 오싹하는 공포 를 느꼈다. 무기를 버리고 바닷물에 뛰어들거나 제자리에서 오줌을 지리는 수부 몇 명이 나왔다. 각오를 했다 해도 병사가 아닌 수부에게 큰 것을 기 대하지는 못했다. "돌격!" 대열이 세워지자 이이츠카가 명령을 내렸다. "하압! 덤벼라!"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늙은 무사가 앞장서 거북선을 향해 돌격했다. 그 를 따라 8명 정도가 한 줄이 되어 뛰어갔다. 이이츠카와 나머지 병력이 뒤 를 따랐다. 늙은 무사가 창을 겨누고 달려가면서 소리 높여 외쳤다. "메구라부네 따위는 무섭지..." - 콰앙! 거북선 바로 앞까지 돌입한 전열에 거대한 불덩어리가 직접 날아든 것은 그 다음이었다. 참혹한 광경이 펼쳐졌다. 앞장서 달려가던 늙은 무사의 몸통 을 수박 만한 불덩어리가 뚫고 지나갔다. 살조각이 피와 함께 튀고 늙은 무 사의 상체는 수백 조각으로 갈라져 사라졌다. 그 불덩어리에 어깨를 스친 병사는 그 자리에서 빙글 돌며 쓰러졌다. 그 리고는 송두리째 날아간 어깨를 감싸고 비명을 질렀다. 팔은 저쪽에 떨어져 있었다. 이제까지도 충분히 참혹했지만 지금은 차마 눈뜨고 못 볼 지경이었 다. 늙은 무사가 미처 끝내지 못한 '무섭지 않다' 는 말을 비웃는 것 같았다. "야아아!" 공포를 이기기 위해 이이츠카는 귀청이 울리도록 함성을 질렀다. 죽는 게 무서웠다면 처음부터 무사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죽음은 또 하나의 깨달음이다'. 언젠가 스쳐간 중이 해준 말이 뇌리에 스 쳤다. 이이츠카가 펄쩍 뛰어 세키부네에서 거북선 위로 올라탔다. "아악!" "앗! 뜨거!" 찌르르 하는 고통이 옆구리와 발 밑에서 동시에 느껴졌다. 비명을 지르려 했는데 이이츠카가 질러야 할 비명을 이미 다른 수부들이 대신 실컷 질러주 고 있었다. 이이츠카는 얼굴을 찡그리며 몸을 일으켰다. 옆구리 갑옷 틈에서 시뻘건 피가 줄줄 흘러나왔다. 바닥을 살피니 거적 밑에 숨겨진 길쭉한 송 곳이 이이츠카의 발등을 뚫고 나와있었다. "이 비겁한 놈들아!" 이이츠카가 칼로 바닥을 마구 찔렀다. 함께 뛰어든 수부도 옆에서 욕설과 비명소리를 내뱉으며 도끼를 들고 마구 내리찍었다. 함께 거북선에 오른 다 른 수부 하나는 넘어지는 바람에 창에 머리를 꿰뚫려 즉사했다. "이런 토막을 낼 놈! 부서져! 부서지란 말야!" 그러나 금속을 울리는 소리만 날 뿐 거북선의 등판은 꿈쩍도 하지 않았 다. 발에 박힌 송곳에 움직이지도 못하는 그 수부는 그렇게 죽을 때까지 도 끼를 휘두를 수밖에 없었다. 이이츠카는 이를 악물고는 칼을 위로 치켜들었다. 그리고는 송곳에 찔린 발등을 내리쳤다. 서늘한 느낌과 함께 자유로워진 몸으로 이이츠카는 거북선의 등판을 천천 히 기어갔다. 송곳이나 칼이 있는 곳을 더듬어 확인하며 기어가던 이이츠카 는 꼭대기까지 올라가 돛대에 간신히 몸을 기댔다. 그리고는 천천히 몸을 낮춰 정좌를 하고 앉았다. 잘린 발에서 힘이 자꾸만 빠져나갔지만 억지로 버텼다. "조선 놈들아! 잘 들어라!" 대장선에서 화살 몇 발이 날아들었다. 몸에 따끔하게 꽂히는 화살을 받으 면서도 이이츠카는 굴하지 않고 외쳤다. "일본 무사 사이토 이이츠카는 이렇게 죽는다! 하지만 네놈들도 결코 오 래 살진 못할 거다! 너희들도 결국 비참하게 죽고 말 거다아!"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로 고통이 심해지자 이이츠카는 드디어 최후의 선택 을 했다. 이이츠카는 조선의 대장선을 향해 몸을 돌리고 갑옷끈을 잘라 갑 옷을 벗었다. 검을 거꾸로 잡은 이이츠카는 검 끝을 자기 배에 대고 밀어 넣었다. "읍!" 또 하나의 고통이 밀려왔다. 이이츠카는 마지막으로 자기 내장을 밖으로 확 끄집어냈다. "봐, 봐라! 이렇게 나는... 나는, 최후까지... 싸웠다아아!" 이이츠카가 고개를 푹 숙였다. 배를 가른 생선처럼 창자가 쏟아져 나온 시체는 거북선 등판을 굴러 바다에 떨어졌다. 왜선들을 향해 돌진하는 거북 선 옆에 작은 파문 하나가 만들어졌다. 7. 역류 (3) = 전우수1선, 김억추 "흠. 아깝게 왜 버리지? 이걸 버릴 거라면 도대체 뭐하러 그리 힘들여 싸 우는지 모르겠어." "그렇게 이쁘면 몇 개 가져가서 껴안고 주무시구려." 수졸들이 일하는 것을 지켜보며 장대 계단에 주저앉은 김억추는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김응추가 톡톡 쏘아붙이거나 수졸들이 차가운 눈길을 보내 도 전혀 아랑곳없이 김억추는 입이 마냥 벌어졌다. 갑판 한가운데에 왜군의 머리가 차곡차곡 쌓였다. 수부들이 갈고리를 던 져 물에 떠다니는 왜군 시체를 끌어올리면, 군사들이 목을 베는 식으로 '전 투'가 진행됐다. 바다에 널리고 깔린 게 왜군 시체였다. "치사하게 남이 죽인 거 주워서 뭐하는 겁니까, 형님?" "수급이란 적의 목을 벤 자의 것이지 죽인 자의 것이 아니니라." "베었다는 게 죽였다는 뜻입니다. 죽은 시체 목을 베는 것 말고요. 적을 죽여야 그게 전공 아닙니까?" "어허! 고서와 옛 성현의 말씀을 후세 사람이 멋대로 해석하면 안 되느니 라. 비록 시체나마 전쟁터에서 적군의 목을 베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아느 냐? 그리고 상께서도 장수들이 수급을 바친 경우에만 전공으로 인정하시지 않느냐?" 그 말은, 관군이나 의병이 왜군과의 싸움에서 승리해도 조정에 수급을 바 치지 않으면 임금이 전공으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임진왜란 기간 중 승리하지 못하거나 적의 머리를 바치지 않아도 선조가 무공으로 인정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임금을 호종한 경우였다. 김억추는 대동강 주사대장 이 되어서도 여전히 도망만 잘 다녔지만 임금 근처에서 계속 알짱거린 것만 큼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시체가 물에 대부분 빠지는 해전의 경우 승리하더라도 적의 머리를 얻기 가 매우 어렵다. 임진년간의 해전에서 조선수군이 얻은 수급은 대체로 왜군 전사자의 5퍼센트 미만이었다. 그리고 충무공이 추정해서 장계에 올린 전과 보고는 패전 사실을 숨기거나 축소하는 일본 무장들의 자체 피해 기록보다 오히려 적은 것이 일반적이다. "사또! 이러실 겁니까? 빨리 왜적을 공격해야 할 것 아닙니까? 사또! 에 이, 씨발! 이러고도 수사야? 제기랄!" 금갑만호 이정표가 밑에서 뭐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김억추는 군졸 들이 물에 빠져 죽은 왜군의 목을 베는 데에 온통 정신이 팔려 있었다. 김 억추가 잠시 앞을 노려보더니 갑자기 칼을 뽑아들었다. "저기에도 적선이 두 척이나 있다. 어서 공격하라!" "형님 참 용감하십니다." 김응추가 감탄했다. 김억추가 가리킨 곳에는 물에 반쯤 잠긴 왜선 두 척 이 천천히 떠내려가고 있었다. 물살이 바뀐 다음부터는 부서진 왜선들이 더 이상 이쪽으로 오지 않았다. 김억추가 조바심을 낼수록 판옥선은 해협에 가 까워졌다. "배 군관!" "예이!" 우수사 군관 배영수는 '에이'와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묘하게 발음했지만 김억추는 부하 군관들의 기분을 따질 여유가 없었다. 병선군관 당언량의 지 시에 따라 수부들이 갈고리를 던져 왜선을 끌어들인 다음이었다. "뭐하나? 당장 왜선으로 돌격하지 않고. 자넨 거문고만 잘 타면 돼? 엉? 활쏘기 내기할 때마다 전라좌수영 김응겸한테 판판이 깨진 주제에!" 김억추 입장에서는 꼬장꼬장한 금갑만호 이정표보다는 군관이 훨씬 만만 했다. 배영수는 투덜거리면서도 수졸 몇을 이끌고 왜선으로 향했다. 잠시 후, 김억추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왜병들 머리가 갑판에 산더미처 럼 차곡차곡 쌓였다. "흠! 이 정도면 내가 통제사보다 훨씬 더 많은 공을 세운 걸로 알겠지." "형님은 싸우지도 않았는데 무슨 소리요?" 김응추가 방패판 뒤에 숨어서 중얼거렸다. 가끔씩 조총탄이 여기까지 날 아와 방패판에 맞고 힘없이 굴러 떨어졌다. 전라우수영 1선은 어느새 전투 가 벌어지는 곳 바로 뒤까지 접근하고 있었다. "무슨 소리냐? 이곳은 누가 뭐래도 내가 수사로 있는 전라우수영 관할이 다. 그러니까 다 내 공이지." "내, 참! 그게 어찌 형님 공이요? 싸우지도 않고 공을 세우다니, 말이나 될 법하오?" "조정에서도 임진년에 전라좌수영에 군사를 청한 원균의 공이 이 통제사 보다 더 크다고 했다. 경상우수영 바다에서 왜적을 막았으니 그게 다 경상 우수사의 공이기도 하고 말이다. 그러니까 이번 싸움에서도 내 공이 더 크 지. 그렇지 않느냐? 내가 원균하고 뭐가 달라? 똑같지 않느냐. 기준이 왔다 갔다하거나 상벌이 불공평하면 안 되느니라." 김응추는 기가 막혀 할 말이 없었다. 거북선과 판옥선들이 왜선들을 밀어 붙이는 일방적인 싸움을 지켜보다가 갑자기 무엇 때문에 화가 치미는지 목 소리가 높아졌다. "멍청한 조정에서는 그랬지만, 형님은 휘하에 판옥선 달랑 세 척뿐인데, 그게 말이 돼요?" "헹! 원균도 처음에는 판옥선 달랑 한 척에 수졸도 없이 격군만 겨우 채 웠단 말이다. 그 이후에도 격군도 모자라는 판옥선 싹싹 긁어서 단 네 척이 었다. 내가 원균보다 판옥선 한 척이 적다고? 그럼 우수영 앞바다에 가라앉 힌 세 척을 다시 끌어올리면 되지." "형님, 정말 뻔뻔하군요. 승첩장계도 형님이 따로 올릴 테지요?" "당연하지. 그리고 뻔뻔해야 그런 임금 밑에서 살아남는단 말이다. 그리고 이번에 조정에 바치는 수급 숫자가 통제사보다 많을 테니까, 이걸 보면 누 가 감히 나한테 뭐라 하겠느냐?" "쳇! 조정에 있는 멍청이들은 형님 말을 믿겠지요. 흠! 소금에 절일 필요 도 없고 좋군요." 김응추도 내심 싫지만은 않은지 장대 아래를 살피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 다. 시체 목에 칼을 내리치는 수졸들의 손놀림이 제법 익숙해졌다. 수졸들은 왜군의 시체를 끌어올리는 틈틈이 해협에서 벌어지는 싸움을 그저 구경하기 만 했다. "공 세우기 참 쉽군요. 맞습니다. 나중에는 원균이 더 큰소리쳤죠. 지는 싸우지도 않고 도망친 주제에. 쳇! 나도 그런 재수 좋은 경우 좀 안 당하 나?" "내가 지금 딱 그런 경우잖아. 우헤헤! 나는 즐겁다. 당연히 질 줄 알았는 데 이기고 있다. 여기서 우리 수군이 지더라도 뭐라 할 사람 아무도 없는데 말이다. 참. 만약 우리가 지면 통제사 목은 당연히 잘리겠지만 말이다." "형님, 승진하시겠군요. 멍청한 조정 놈들한테 큰소리칠 수도 있겠고요." 임진왜란 초기, 즉 전라좌수영 함대가 경상도 해역으로 출전하기 전에 원 균의 경상우수영 함대가 과연 싸웠는지에 대해서는 임란 당시에도 이견이 존재한다. 이에 대한 가장 유명한 이야기는 당시 영의정과 체찰사로서 전쟁 을 이끈 유성룡이 기록한 징비록에 나온다. 징비록에서는 전쟁이 시작되자 마자 원균이 싸우지도 않고 경상우수영 함대 소속 전선 백여 척을 자침 시 키고 수군 일만 명을 흩뜨렸다고 한다. 그러나 원균이 보낸 통보문을 그대 로 인용해 조정에 보고한 이순신의 장계, 원균 행장기 등의 기록에는 경상 우수영 함대가 불리한 상황에서도 경상도 바다를 지키며 수십 척을 격파했 다고 한다. 일설에 따르면 경상우수영 수군 병력이 1만이나 되었을 리가 없다고 한 다. 만약 그렇다면 인구비례로 따져 전국의 병력이 수군만 10만 명이 넘을 테고, 수륙군을 합하면 50만이 넘는다고 한다. 그럼 이이의 10만 양병설은 도대체 뭐냐고 묻는다. 실제로 일부 일본 사학계에서는 당시 조선군 병력이 이 정도로 많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들 모두 당시 편제를 전혀 모르고 한 무식한 소리에 불과하다. 당시 수영이 설치된 곳은 전라, 경상도가 각 2개소, 충청, 경기도가 각 1 개소이며, 다른 도에는 독립된 수사가 없고 관찰사나 병사가 수사를 겸임했 다. 이는 경상도와 전라도 등 그 전 시대에 왜구가 창궐했던 남해안 연안에 수군이 집중됐다는 뜻이다. 특히 경상우수영과 전라우수영이 수군의 주력이 다. 관할 해역이 낙동강 서쪽부터 남해도까지인 경상우수영에 소속된 수군 진포는 전쟁 중에도 변동이 조금 있지만 대략 20개였으며, 전라좌수영의 5 포에 비해 4배나 되는 대규모이다. 경상우수영 소속 전선 100척과 수군 병 력 1만 명은 충분히 가능한 숫자다. 인구가 훨씬 더 적었던 세종대에도 경 상도 수군은 총 1만 5천 명에 달했다. 원균을 변호하는 또 다른 주장은 임란초기에 물밀 듯이 경상도 해역으로 침범하는 일본수군 함대를 맞아 경상우수영 함대가 단독으로 싸웠고 전공도 세웠으나, 결국 중과부적으로 패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원균의 일방적 주장에 불과하며, 원균이 임란 초기에 10척 또는 30척을 분멸했다는 주장도 싸움을 벌인 일시와 장소를 밝히지 않은 허구의 전과일 뿐이다. 임진왜란 초기인 1592년 4월에 경상도 해역에서 해전이 있었다는 증거는 그 어디에 도, 심지어 조선수군에게 줄줄이 패했다고 고백한 일본측 기록에도 없다. 패 배한 기록이 있는데 승리한 기록이 없을 리가 없지 않은가? 당시 경상감사 김수의 장계에서는 전쟁초기에 원균이 부하 장수들을 거느 리고 '남쪽 변방'에서 왜적과 싸우고 있다고 했지만, 같은 장계에서 원균은 이미 전쟁 초기부터 지상으로 피했다고 했다. 혹시나 원균이 싸웠더라도 지 상에서 싸웠다는 뜻이다. 경상우도 초유사 김성일의 장계에서는 왜군이 쳐 들어오기도 전에 원균이 진영을 불사르고 겨우 판옥선 한 척, 그것도 병졸 은 하나도 없이 격군만을 거느리고 있다고 보고했다. 김성일이 경상우수영 을 지키라고 독촉하자 고성으로 돌아간 원균은 왜군 100명이 육로로 침입하 자 도망쳐버린다. 임진왜란 초기 경상우수영 소속 수군이 단독으로 바다에서 일본수군과 싸 운 기록은 전혀 없다. 일본수군은 대마도와 부산포를 오가며 육상병력의 호 위에 바빠서 임진왜란 초기에 낙동강 서쪽 해역은 침범하지도 않았다. 결국 전라좌수영 함대가 구원오기 전에 해상전투가 전혀 없었다는 뜻이다. 왜 수 군이 포구를 노략질하다가 기습당하는 것이 초기 해전의 일반적인 모습인 데, 이것도 왜군이 조선수군의 존재 자체를 전혀 도외시했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선조수정실록의 문제를 들고 나온다. 이순신과 같은 문파인 덕 수 이씨인 이식의 주장으로 전무후무한 수정실록을 편찬하면서, 수정실록이 왜곡으로 점철됐다고 한다. 그러나 어떤 연구자도 수정실록을 참고하지 않 는다. 수정실록 자체가 실록을 보충하는 내용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어떤 이 는 실록 자체의 신빙성도 문제 삼는데, 선조실록의 편찬 책임자인 총재관은 이항복이며, 원균과 같은 파벌인 서인이다. 선조실록에서도 동인, 특히 남인 의 영수인 유성룡이 추천한 이순신에 대한 사관들의 평가가 결코 나쁘지 않 았다. 또한 원균이 경상우수사로 부임한지 몇 개월만에 전쟁이 터졌기 때문에 미처 준비가 되지 못했다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부임한지 3개월이면 수사 임기 2년에서 벌써 8분의 1이 지난 때다. 재임기간이 짧아 경상우수영이 아 직 전쟁준비가 안됐다는 것은 절대 핑계가 될 수 없다. 그리고 경상도 내 다른 진영에서는 왜군이 접근해오는 황망한 와중에도, 나중에 장수가 도망가더라도 일단 병력 소집은 대부분 제대로 됐는데 왜 하 필 경상우수영만 소집 자체가 불가능했는가? 경상우수영 소속 수군 장수들 이 임란 초기에 원균의 지휘를 받지 않고 육지에서 싸운 기록 등을 볼 때, 원균의 병력 소집 명령에 응하지 않고 도망갔다는 식으로 경상우수영 소속 수군이나 격군들에게 책임을 떠넘길 수도 없다. 막강한 경상우수영의 전력 이 초기에 녹아 없어진 것은 경상우수사인 원균의 책임이다. "응추야. 조정에는 주상 전하도 계시느니라. 알고 한 말이렷다?" 마음대로 지껄이던 김억추가 갑자기 김응추를 보면서 목소리를 낮췄다. 도끼눈을 부릅뜬 김억추는 김응추의 대답 여하에 따라 어떤 결단도 마다 않 을 태세였다. "당연히 알고 하는 소립니다. 조정의 총 책임자이면서, 또한 최고 멍청이 잖아요?" "그래? 난 또 네가 모르고 한 소린 줄 알았지. 우헤헤!" 형제는 여전히 즐거웠다. 해협에서 싸움이 계속됐지만 남의 일인 듯했다. 한참 동안 통제사 좌선을 바라보던 김억추가 입을 열었다. "너는 백의종군이 어떤 죄인지 아느냐?" "성과 부하들을 버리고 도망친 자들이나 받는, 무장으로서는 가장 치욕적 인 벌이지요. 맞다. 서예원 같은 경우지요." "그래. 김해성이 왜적에게 공격받은 날 밤에 초계군수 이유검이 먼저 그 랬다지. '야경을 돌겠노라.' 그러고는 성에서 빠져 나왔지." "그래서 김해부사 서예원이 그랬다죠. '이유검 이놈이 감히 적을 앞에 두 고 도망쳐? 고얀 놈! 내가 친히 그놈을 잡아오겠노라.' 하고 나가서, 결국 둘 다 튀었죠. 서예원은 적에게 죽지 않고 백의종군한 것을 다행스러워했답 니다. 그때 싸우다 죽은 졸병들만 불쌍합니다." 적 앞에서 지휘관이 먼저 도망간 경우는 임진왜란 통틀어 비일비재하지만 이후에라도 책임을 진 경우는 거의 없었다. 이유검은 패전을 이유로 참수된 몇 안 되는 지휘관이었고, 서예원은 백의종군에 처해졌다. 이로써 알 수 있 듯이 당시 백의종군은 참수에 버금가는 중형이었다. 그러나 서예원은 얼마 있다가 백의종군이 풀리면서 본주 목사로 승진했 다. 1593년에는 진주목사가 됐는데 하필 이때 대규모 왜군이 진주성으로 몰 려왔다. 서예원은 도망치고 싶었지만 도원수의 엄명에 의해 꼼짝없이 성 안 에 남아있을 수밖에 없었고, 적을 앞에 두고 목사가 성 안에서 울고 다닌다 는 이유로 의병들로부터 지탄을 많이 받았다. 결국 서예원이 싸우지 않고 먼저 도망치는 바람에 성이 무너졌는데, 서예원도 진주성 안에서 죽었다. "그렇다. 그런 벌을 이 통제사가 받았다. 저 사람은 적 앞에서 도망치지 않고 싸운 몇 안 되는 사람이다. 그 꼴을 당한 다음에 엄청 열 받지 않았을 까?" 김억추가 팔짱을 끼고 앉아 이죽거렸다. 통제사의 배는 좌우에 다른 판옥 선을 거느리고 당당히 해협을 가로막고 있었다. 한참 보던 김응추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나 같으면 도저히 못 참습니다. 엎어버리죠." "상께서는 바로 그걸 두려워하신다. 너도 명심하거라." 김억추 말에 김응추가 씁쓸하게 웃었다. 왕조시대였다. 비겁하고 무능한 장수는 임금에게 용서받을 수 있지만 유능하고 백성들에게 신망을 받는 장 수는 용서받을 수 없었다. - 퍼벙! 뻥! 해협 쪽에서는 대포 소리가 요란했다. 거북선이 왜선들 사이에서 좌충우 돌하며 포를 쏘아대고 있었다. 그런 광경을 지켜보던 김억추가 수염을 쓰다 듬었다. "거북선은 속도가 느려서 평시에는 제 역할을 못했다더니, 오늘은 펄펄 나는구나." "왜선을 따라잡기에는 문제가 좀 있겠지만, 지금 왜놈들은 제대로 도망가 지도 못하고 일방적으로 얻어맞는군요." "어쨌든 저것, 우수영 관내에서 개조했으니 내가 만든 거나 다름없어. 그 러니 거북선이 세운 공도 다 내 공이다. 음하하!" 김억추가 양 허리에 손을 얹고 호탕하게 웃었다. "형님도 참. 어찌 그리 조정 대신들하고 똑같은 말을 하시우?" "야! 그 따위 임금 밑에서 살아남으려면 별 수 있냐? 이게 다 살아남기 위한 처세술이야." = 도도 다카도라 함대 어립선, 겐타로 몇 번을 돌이켜봐도 후회스런 일들. 그때로 다시 한번만 돌아갈 수 있다 면, 다시 한번만 기회가 온다면. 봄바람에 휘날리는 벚꽃잎이 오쯔키가 흘린 눈물방울에 비쳤다. 겐타로가 눈을 번쩍 떴다. 그러나 냉혹한 사무라이도, 가냘픈 오쯔키도 보 이지 않았다. 이곳은 어두컴컴한 다락 안이었다. 겐타로는 졸면서 울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돌이킬 수 없는 과거는 마음속에 이미 굵직한 상처를 남겨놓았다. 억지로 강해지려고 해도 그것은 항상 겐타로를 따라 다니는 저주와도 같았다. 쓰라린 추억이 가슴을 아리도 록 저몄다. "제길! 쓸데없는 꿈을 또 꾸다니." 겐타로가 일부러 거친 말을 내뱉으며 눈물을 훔쳤다. 29살이란 나이도 이 럴 때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겐타로는 등에 진 봇짐에서 툭 튀어나온 것을 습관처럼 만지작거렸다. 슌 스케 아버지가 죽으면서 슌스케에게 전해달라고 한 그것은 낡고 작은 구리 거울이었다. 그 거울에 어떤 사연이 담겼는지 모르지만, 지금은 슌스케가 살아있는지 조차 알 수 없었다. 수군으로 조선에 간다는 것은 죽는다는 말과 같았다. 슌 스케의 아버지는 자식이 이미 죽었는지도 모르는 판에 이상하게도 장하다는 말을 연발한 다음 눈을 감았다. 겐타로는 하나밖에 없는 친구인 슌스케가 제발 살아있길 빌고 또 빌었다. "시마즈 가의 전령이 왔습니다!" 다락 위에서 외치는 병사의 보고가 아래까지 들렸다. "시마즈라고? 사쓰마 촌놈들이 여긴 웬일이지?" "낸들 알아? 할 일이 없으니 한가해서 구경이라도 오나보지 뭐." 늘어져 있던 아시가루들이 일제히 일어나 다락 한쪽으로 몰려들었다. 작 은 창문 틈으로 전령선을 구경하던 아시가루들은 시마즈 가를 화제로 떠들 기 시작했다. 그들을 흘낏 보며 겐타로가 갑판으로 올라갔다. 잡병들을 통솔하는 사무 라이 대장이 순간 눈살을 찌푸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역시 군사 엔 메이에게 주목받았다는 효과는 확실했다. "도도 사도노가미 다카도라 님께 항상 무운이 함께 하기를! 저희 주군께 서는 이번 전투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지켜보고 계십니다." 갑판에 올라간 겐타로는 본진 장막 안에서 들려오는 전령의 목소리에 놀 라 귀를 틀어막았다. 하도 우렁차서 조용히 정숙을 지키고 있던 본진함대 소속의 다른 배들에도 다 들릴 듯했다. 겐타로는 시마즈島津 가문의 세력권인 규슈의 사쓰마薩摩 지방 남자들이 유난히 남자다움을 선호한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래서 세련된 도회지풍 예절을 익힌 간사이關西 지방 무사들은 사쓰마 무사들을 촌놈이라고 놀리기 일쑤였다. 그러나 전쟁터에서는 용맹하기로 이름난 사쓰마 사나이들을 결코 무시하지 못했다. "지죠 시마즈 요시히로 님께서 친히 지켜보신다 하니, 이는 매우 영광스 러운 일." 다카도라가 간단히 답하는 소리가 이어졌다. 공식적이고 상당히 격식을 갖춘 인사였다. 시마즈 가의 전령이 일부러 다카도라의 관직명인 사도노가 미佐渡守를 성과 이름 사이에 끼워서 부른 것에 대해, 다카도라는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의 관직명인 지죠侍從를 붙여 부름으로써 답했다. 전국시대 영주들이 가진 직함에는 어느 지방을 다스린다는 의미로서 지방 명에 수守 자를 붙인 관직과 따로 중앙 관직이 있으며, 때로 서너 가지 직 함을 가진 영주들도 있었다. 지방명의 관직은 실질적으로 그 지방을 다스리 는 것과는 거리가 먼 명예직에 가까울 수도 있었다. 전통적인 귀족 출신이 아닌 영주들은 중앙관직 가운데 낮은 관직을 차지 했으며, 주로 일본 왕의 행차를 모실 때 궁중의 하위직이 담당하는 역할을 맡았다. 예를 들어 가토 요시아키의 관직인 좌마조左馬助는 왼쪽에서 말고 삐를 잡는 사람이란 뜻이고, 우마두右馬頭는 우측 열에서 걷는 말들의 선두 에 서는 사람을 뜻한다. 요시히로의 관직명인 지죠侍從도 행렬 뒤에 따라 다니는 하인이란 의미에 불과하다. 그러나 시마즈 가문의 이름에는 관직의 높낮이나 세력의 크고 작음과 상 관없는 묵직한 무게가 있었다. 전공과 유명세로 따지자면 시마즈 가문과 비 슷한 숫자의 병력을 조선에 출병시킨 하치스카 이에마사 따위는 비교할 수 조차 없었다. 겐타로가 본진 장막에 조심스럽게 들어갔다. 겐타로 얼굴을 알아본 무사 들은 아무런 제지를 하지 않았다. 엔메이가 빙긋 웃으며 겐타로에게 눈짓을 보내자 겐타로 역시 살짝 웃어 보이며 답했다. 천으로 사방을 두른 장막 안에서는 지극히 격식을 차린 의례가 교환되고 있었다. 도도 다카도라와 시마즈 요시히로 사이에 거의 교류가 없었던 지라 허물없이 대하기는 어려웠기 때문이다. 급변하는 전투 상황에 몸이 달은 도 도 다카도라가 기나긴 인사 절차를 중간에서 끊었다. "그럼 인사는 이쯤 해두기로 하지. 가지고 온 말은?" "주군께서는 친히 배에 올라 조선의 남쪽 해안을 살피고 계십니다. 다카 도라 님과 여러 영주님들이 벌이는 이번 싸움 결과에 따라 진격로를 결정하 실 계획입니다. 주군께서는 속히 승전 소식을 전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만일 필요하다면 여러 면에서 도움을 드릴 용의도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것 참 감사한 말씀이다. 하지만 별로 도움 받을 필요는 없을 듯하다." 다카도라는 여유 있게 웃으며 천막 사이로 앞쪽을 가리켰다. "약간 차질이 생겨 시간이 조금 걸리고는 있다. 하지만 곧 적을 격퇴하고 서쪽 바다로 진출한다." "그래도 상대가 상대인 만큼." 전령은 짧게, 그러나 상당히 진지하게 대답했다. 일본수군의 진공 속도가 계획보다 늦춰지고 아직도 전투가 끝나지 않자 추가적인 설명을 요구하는 태도였다. 다카도라는 할 수 없이 몇 마디를 더 해야 했다. "조선수군이 강하게 저항하는 건 사실이다. 이순신이 용맹하다는 건 일본 인이라면 누구나 아니까. 그래서 아쉽게도 구루지마군이 붕괴됐다. 하지만 지금 와키자카군이 맹렬히 적을 몰아붙이고 있다. 해협은 돌파됐고 승리는 눈앞에 있다. 이렇게 요시히로 님께 전하도록." 다카도라는 끝까지 여유 있는 자세로 말했다. 하지만 겐타로는 다카도라 의 그 여유가 총대장으로서 모든 참을성을 다 발휘한 결과라는 걸 알고 있 었다. 구루지마군은 전멸했고 미치후사는 죽어 목이 내걸렸다. 그리고 와키 자카 야스하루는 총대장 다카도라의 명령을 무시하고 멋대로 싸울 뜻을 밝 혔다. 가마에 탄 사람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가는 가마꾼들을 볼 때 심정이 아마 저렇지 않을까. 겐타로는 슬그머니 다카도라에게 동정이 일었다. 전령과 다카도라 사이에 다시 몇 마디 대화가 오갔지만 의례적인 인사의 반복이었다. 전령은 슬슬 자리를 뜨려고 마지막 절차를 진행했다. "그럼 주군께 그렇게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요시히로 님의 무운을 빈다는 말도 전하도록." "예." 전령이 앉은 채로 허리를 깊이 숙였다. 용무를 마친 전령이 돌아가려고 막 등을 돌렸을 때였다. 겐타로는 그 전령 어깨 너머에 나타난 한 무리의 배들을 보았다. 그것은 와키자카군의 후미함대였다. "와키자카군이 후퇴신호를 보내왔습니다!" 관측병의 고함이 아까 외친 전령의 함성보다 크게 귀를 때렸다. 겐타로가 머릿속으로 무슨 의미인지 생각하기도 전이었다. "뭐야? 후퇴라니! 무슨 이유로, 왜?" 크게 당황한 다카도라의 질문이 이어졌다. 대답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건 만 그렇게 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을 정도의 상황이었다. 겐타로는 그 심 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돌아가려던 시마즈의 전령이 힐난하듯 다카 도라를 쳐다보는 것과, 다카도라가 어색해진 얼굴을 돌리며 외친 것은 거의 동시였다. "총대장인 내 허락도 없이 물러서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다카도라는 얼굴이 빨갛게 변할 정도로 노기를 내비쳤다. 그렇지만 이미 다카도라의 체면 같은 건 상관없다는 듯 와키자카군 함대는 질서정연하게 퇴각하고 있었다. 다카도라를 대신해 엔메이가 시마즈의 전령을 서둘러 돌려보냈다. 그 동 안 다카도라는 몇 번이나 자리에서 일어섰다 앉았다 하며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다. 겐타로는 다카도라가 입 속으로 '야스하루, 이 간사한 녀석!' 하고 중얼거리는 것을 보았다. "패배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겁니다." 엔메이가 와키자카군의 후퇴이유를 설명했다. 짧은 말이었지만 다카도라 는 그것만으로도 능히 알겠다는 듯 눈을 부릅떴다. "그 책임을 나더러 지라는 말이군!" 엔메이의 말이 맞았다. 잠시 어리둥절했던 겐타로도 모든 것을 알고 나자 다카도라와 비슷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함께 싸우긴 하지만 같은 '아군' 이기를 거부한 야스하루의 행동이었다. 겐타로는 당장 어립선 아래에 있는 남만포를 열어 야스하루의 함대에 대포알을 먹여주자고 다카도라에게 말하 고 싶었다. "그 자의 기량은 그것밖에 안됐던 거겠지요." 엔메이가 조용히 다카도라를 달랬다. 비록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다카도라 를 배신했지만 그렇다고 다카도라도 같은 방식으로 대응할 수는 없었다. 총 대장답게 다카도라는 대범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엔메이의 말을 듣자 겐타로 의 분노도 급속히 사라졌다. "이제는 내가 직접 싸워야 할 차례로군." 다카도라가 입술을 굳게 다물며 정면 하늘을 응시했다. 본진이 직접 싸운 다는 건 호각이거나 밀리는 싸움에서만 있는 일이었다. 총대장인 다카도라 나 일개 잡병인 겐타로가 결코 생각하지 못했던 상황이 지금 벌어지고 있었 다. "와키자카군 배후에 메구라부네가 접근 중입니다!" 불에 기름을 붓듯 이런 상황을 더욱 실감시키는 말이 관측병에게서 터져 나왔다. 다들 머리칼이 쭈뼛 서면서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겐타로는 그 제야 자기가 오오쓰쓰를 아래쪽에 버려두고 왔다는 걸 깨달았다. = 발포돌격선, 나대용 "좌로." "좌변 노 그쳐. 타공, 좌로 꺾어!" 군관 나대용은 명령을 내리자마자 오른쪽 포문으로 달려갔다. 도훈도와 도노장, 타공이 합세해서 거북선의 진행방향을 돌리는 사이에 포수들이 당 차를 돌려 목표를 조준했다. 포문 사이로 보이는 바깥은 온통 불바다였다. 불타오르고 깨지고 암초에 좌초한 배에서 왜군들이 무작정 물에 뛰어들었다. 바다는 시체와 나무판자, 천조각으로 뒤덮여 물이 제대로 흐르지 못할 지경이었다. 멀리 해협 입구에서는 왜선들 대부분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해협 안에 남아 있는 왜선들은 도망갈 길이 막혀서인지 악착같이 저항하고 있었 다. 포문 사이로 내다보는 나대용 눈에 꼬리를 보인 왜선의 왼쪽 현이 크게 들어왔다. 선미에는 왜선의 키잡이 두 명이 온몸에서 피를 질질 흘리며 조 선 배만큼 커다란 키 위에 엎어져 있었다. "우변 화포 쏴!" - 뻥! 뻐벙! 뻥! 화포가 한 발씩 차례로 발사됐다. 뾰족한 선수와 달리 납작한 선미에 늘 어서서 방금 사격을 마친 조총병들이 한꺼번에 쓰러지고, 그 시체 더미 위 를 조약돌과 철환이 다시 한번 휩쓸었다. 차대전과 단석은 교묘하게 배가 수면에 닿는 선 바로 위를 아슬아슬하게 뚫고 들어갔다. "우로!" 나대용이 왼쪽으로 뛰어가면서 소리를 질렀다. 다시 똑같은 절차가 진행 되고, 격군들 사이에서 포수들이 기민하게 움직였다. 가끔 조총탄이 포문 사 이로 들어와 두꺼운 소나무 판재에 박혔다. "충돌이다! 좌로 10도!" 도훈도가 내지른 소리였다. 거북선은 왜 대선 두 척 사이를 비집고 들어 갔다. 이미 익숙해진 충격이 가해졌다. - 끼드드, 뜨득! 우지끈! 거북선을 양쪽에서 밀어붙이던 왜선 두 척이 현측과 다락이 한꺼번에 무 너져 내렸다. 그러자 왜선 안쪽이 다 들여다보였다. 나대용은 포문 사이로 일본인 수부들의 놀란 표정까지 하나하나 살폈다. 다락이 무너지자 거북선의 옆모습을 직접 보게 된 수부들이 노를 내던지 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투구를 쓴 적장들이 칼을 내리쳤지만 겁에 질린 수 부들을 막을 수는 없었다. 거북선 윗갑판에서는 수졸들이 왜선의 다락 안으로 불화살을 쏘아 넣었 다. 다락 안에 나뒹굴던 갖가지 잡동사니와 조총병들이 흘린 화약으로 인해 불길이 빠른 속도로 번지기 시작했다. "좋다! 다음이다." 두 척을 뚫고 반쯤 지나가자 다른 왜선들이 눈에 들어왔다. 이미 각종 화 포탄에 맞아 엉망이 된 배들이었지만 도망가려는 의지만은 강력하고 확고했 다. 조총에서 발사된 탄환이 우박처럼 거북선에 쏟아졌다. 거북선이 앞으로 나갈수록 왜선의 밀집도가 높아지는 것 같았다. "고물에 왜선이 접근했습니다! 왜적들이 우리 배에 뛰어들려고 합니다!" 왜선들 사이로 정면을 응시하던 나대용이 시선을 돌렸다. 다른 판옥선들 은 거북선을 따라 왜선들을 공격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왜 선들에 포위됐다는 공포가 격군들 얼굴에 서렸다. 그러나 고물에 선 타공이 지른 소리에는 묘한 뿌듯함이 담겨 있었다. 그 보고를 들은 나대용도 여유만만했다. 나대용은 따로 명령을 내리지도 않고, 그저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 꾸궁! 꿍! 와지끈! 묵직한 천자총통 발사음이 연속 울리고, 얄팍한 왜선의 구조물이 내려앉 는 소리가 잇달아 들려왔다. = 나카가와군 어립선, 히데나리 "후퇴라니! 와키자카 야스하루 님이 지금 제정신인가!" 와키자카군 바로 뒤에 위치한 나카가와군 어립선에서 분통을 터트리는 자 가 있었다. 후퇴신호를 확인한 나카가와군의 대장, 나카가와 히데나리中川秀 成였다. "앞서 전사한 미치후사 님과 선봉을 다투던 분이 아닌가? 그런데 지금 와 서 고전을 핑계로 꼬리를 내리다니! 그게 무사가 가질 자세인가! 더구나 전 투 시작 전에 기원의식까지 치르지 않았나? 한 몸이나 다름없이 조선군과 싸우기로 신불에게 맹세했는데, 이건 도대체 뭔가? 비겁하고 간사한 녀석! 그런 자를 주군으로 모시는 자들이 더 불쌍하다!" 거의 욕설에 가까운 비판을 퍼붓는 히데나리를 주위에 둘러선 중신들이 아무 말도 못하고 쳐다보았다. 사실 이것은 야스하루나 다카도라에게 직접 말하지 못하는 처지인 히데나리의 분풀이 같은 것이었다. 다른 무장들과 비 교할 수 없을 정도로 병력이 적은 히데나리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이렇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것뿐이었다. "총대장 다카도라 님이 와키자카군의 후퇴를 허락했습니다." 하필 이때 본진에 보냈던 전령이 돌아와 도도 다카도라의 결정을 알렸다. "이런 약골 같으니!" 이런 말도 안 되는 적전이탈을 용납하는 다카도라의 연약함도 히데나리의 분노에 기름을 부었다. 본진인 도도 다카도라의 함대는 명령도 없이 뒤로 후퇴하려는 와키자카 함대를 위해 천천히 비켜서고 있었다. "에에잇!" 공손히 길을 내주는 모습을 본 히데나리가 접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리고 칼을 뽑아들더니 창과 깃발을 가지런히 세우고 서있는 병사의 창대를 가로로 갈라버렸다. 갑작스런 행동에 놀란 병사들이 슬슬 히데나리에게서 떨어졌다. 자칫하면 주군에게 죄 없이 목숨을 잃을 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병사들 눈에 맺혔다. "목숨이 그렇게도 아까우냐, 야스하루!" 다가오는 야스하루의 어립선을 노려보는 히데나리의 얼굴이 점점 험악하 게 변했다. 나카가와 가문은 전쟁 첫해부터 조선에 와서 싸웠다. 작은 가문이라 비록 병세兵勢는 보잘것없었지만 조금도 눌리지 않고 용감히 싸워 전과도 제법 올렸다. 하지만 병력이 적기 때문에 다른 대영주의 부대에 부속되어 싸워야 했다. 작전을 논의할 때나 논공행상을 할 때는 항상 찬밥신세였으며 아무리 열심히 싸워도 전체 전황에는 영향을 주지 못했다. 게다가 운도 없어 1592년 10월 당주 나카가와 히데마사中川秀政가 수원 부근에서 조선 의병들의 습격을 받아 전사하고 말았다. 동생인 히데나리가 즉각 가문을 잇고 부대를 재편성했지만 첫해에 동원했던 병력만큼도 동원하 기 벅찼다. 이후 전투에 참가할 기회가 없었다가 이번 해전에 함대를 만들 어 따라온 것이었다. "모든 것은 힘이 약한 가세家勢 탓. 용전하여 전 당주의 복수를 하시려는 심정은 이해하나 이만 물러가야 할 듯합니다." 나이 지긋한 중신이 허리를 구부리며 차분히 히데나리를 달랬다. 이미 전 사한 구루지마 미치후사에게 강한 동질감을 느낀 히데나리를 염려해서였다. "임시이지만 우리 나카가와군은 야스하루 님에게 딸려있는 몸. 야스하루 님에게 협조할 의무가 있습니다." 나고야에서 편성되어 올 때부터 히데나리군에 대해서 말이 많았다. 영지 에서 급히 만든 작은 고바야 27척과 출발 직전에 사들인 소 세키부네 10척 으로 구성된 빈약한 함대는 다른 영주들의 냉소만 받았다. 상인들은 '차라리 그 배로 쌀이나 실어 나르는 게 이익'이라며 수근댔고 심지어는 하카다 인 근 어부들마저 '천하제일의 어선단이 납신다!' 라고 비웃었다. 체통도 안서 는 규모의 나카가와 함대는 회의 끝에 야스하루 함대에 딸려 움직이겠다는 맹세장을 부교奉行에게 제출하고 나서야 움직일 수 있었다. "바보 같은 소리! 어떻게 저런 녀석 뒤꽁무니나 따라다녀야 한단 거냐! 그럴 수는 없다." "그럼 어쩌실 셈입니까? 이미 우리가 나서 싸운다고 해 봐야..." 흥분한 히데나리의 반문에 중신이 말을 흐렸다. 그 생략된 말속에 나카가 와군이 처한 상황의 슬픔이 있었다. 단독으로는 도저히 싸울 능력은 안되지 만 싸움은 하고 싶었다. 때문에 야스하루가 승기를 잡으면 단숨에 나아가 추격전을 벌일 생각이었다. 그래서 적장 목이라도 몇 벤다면 전공도 되고 복수도 되는 셈이다. 그런데 아까부터 승기는커녕 패배의 연속이었다. 육전이라면 몰라도 수전 에서는 이 작은 함대 단독으로 공을 세우기가 불가능했다. 고집을 부려 나 카가와군이 단독으로 적진에 돌입한다해도 전황에는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 할 것이다. "우린 여기서 움직이지 않는다. 와키자카군에서 아무리 신호를 보내도 절 대 배를 물리지 마라." "히데나리 님! 그건 군령위반입니다." 중신과 근습 무사들이 경악했다. 그러나 부하들 말은 히데나리의 귀에 들 리지도 않았다. "지금 군령 따위가 무슨 소용이냐? 난 다카도라 님처럼 연약하지 않다. 우리가 움직이지 않으면 야스하루는 철수하지 못하고 계속 뒤통수를 맞게 된다. 그러기 싫으면 싸우겠지." 히데나리는 추궁을 각오하고 야스하루의 퇴로를 막겠다고 선언했다. 그것 은 히네나리의 작은 함대가 지금 세울 수 있는 최대한의 공적이었다. "지켜봐라!" 나카가와 함대가 움직이지 않자 야스하루의 어립선에서 몇 번이나 신호가 다시 올랐다. 혹시 신호를 못 보거나 군령을 전해듣지 못한 것이 아닐까하 는 짐작이었다. 그러나 끝내 나카가와 함대는 요지부동이었다. 그러자 이번 에는 고바야를 타고 전령이 달려왔다. "도대체 무슨 생각이십니까? 우리 군은 후퇴합니다. 얌전히 야스하루 님 의 신호와 다카도라 님의 명에 따르십시오." "우리? 우리라는 말 함부로 하지 마라. 뭐가 우리냐? 야스하루 님이 일방 적으로 정해놓고 그걸 강요하는 것 아니냐? 나에게 야스하루 님의 명을 받 들 의무는 없다!" 공손한 태도로 말하지만 고압적인 내용을 담은 전령에 대고 히데나리는 딱딱하기 그지없게 대꾸했다. "하지만 협조할 의무는 있습니다." "싫다면?" 히데나리가 불쾌한 표정으로 눈을 흘겼다. "끝내 협조하지 않겠다면 일전을 각오하셔야 할겁니다." "뭐야!" "무사는 그 결단에 생명을 거는 법. 히데나리 님이 생각이 있어 하시는 일이라면 마땅히 무사로서의 각오가 되어 있을 거라고 하셨습니다." "우릴 공격하겠단 뜻이냐?" "나카가와군이 반격해도 무방하다고 하셨습니다. 어디까지나 일전이니까 요." 당황한 히데나리와 반대로 전령의 말투가 딱딱해져 갔다. 전령을 죽일 듯이 노려보던 히데나리가 고개를 들어 와키자카 함대를 살 폈다. 비록 처참하게 패했다 해도 멀쩡한 중형 세키부네만 10척이 넘고 대 형 세키부네와 아다케후네도 건재했다. 싸운다면 나카가와군이 삽시간에 무 너질 게 분명했다. "이놈이 감히 어딜 와서 협박을 하는 거냐!" 히데나리의 근습 무사 한 명이 참을 수 없다는 듯 칼을 빼들었다. 그리고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진 전령에게 다가간 순간이었다. - 따다당! 그때 총소리가 요란하게 나카가와군 중앙을 갈랐다. 시선이 일제히 해협 쪽으로 향했다. 하얀 연기가 와키자카군의 배에서 치솟고 있었다. "와키자카군이 우리에게 발포했습니다!" 관측병의 비명 섞인 보고가 다시 어립선 가운데 울려 퍼졌다. 병사들 사 이에 아찔한 공포가 퍼졌다. "예. 이건 협박이 맞습니다." 칼날에 목을 대고 있는 전령 얼굴에 비릿한 미소가 어렸다. 분명히 나카 가와군을 깔보는 태도였다. "천하제일의 어선단에 가로막혀 우리 와키자카군이 움직이지 못했대서야 두고두고 웃음거리가 될 것 아닙니까?" "이 노오옴!" 내장에서 쥐어짜는 듯한 분노가 히데나리에게서 터져 나온 것은 그 다음 이었다. 히데나리가 다짜고짜 전령에게 다가가 멱살을 움켜쥐었다. "일개 전령 따위가 감히 우리 군을 모욕하느냐! 네가..." "히데나리 님! 다카도라 님의 전령입니다!" 격분한 히데나리를 말린 것은 중신들도 근습들도 아니었다. 일부러 히데 나리에게 전령을 파견한 다카도라의 세심함이었다. 다카도라의 전령이 공손 한 말투로 군령을 전했다. "히데나리 님께 싸울 기회를 주지 못한 것을 아쉽게 생각하나, 이는 어쩔 수 없는 싸움터의 사정. 그리 이해하고 함께 돌아가 주십시오." 히데나리의 심정을 세심하게 배려하는 내용이었다. 이 말을 들은 히데나 리는 팽개치듯 전령의 멱살을 잡은 손을 풀었다. 그리고는 뒤돌아서 동쪽 하늘을 바라보며 명했다. "후퇴한다!" 히데나리의 눈에 눈물이 가득 찼다. = 경상우수영 좌선, 우치적 "사또!" 우치적이 허둥지둥 장대에서 뛰어내려왔다. 이상하게 갑판 위에는 침 묵이 계속되고 있었다. 통제사와 송희립은 거북선이 왜선들 사이로 돌입 해 싸우는 것을 그저 말없이 지켜보고만 있었다. 그것은 다른 군관이나 수졸, 포수들도 마찬가지였다. "어서 공격해야 하지 않습니까? 적이 후퇴하고 있습니다!" 그런 분위기를 알면서도 다급해진 우치적이 통제사를 채근했다. 본진 은 후퇴하고 있지만 아직 해협에 빽빽이 들어찬 왜선들은 도망도 못 가 고, 그렇다고 저항도 못하고 있었다. 이런 좋은 기회에 판옥선들을 몰아 한꺼번에 몰아붙이지 않는 통제사가 이상하게 보였다. "우린 이 해협만 지키면 되네. 아직 적이 너무 많아." 통제사의 차분한 목소리였다. 실망한 우치적이 해협 바깥으로 눈길을 돌리자, 그곳에는 아직도 수백 척이나 되는 왜선들이 남아 있었다. 방금 싸운 왜선들이 물러난다고는 하지만 해협 바깥에 있는 다른 왜선들도 함 께 후퇴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런 혼란한 틈을 이용해 공격하면 간단히 전과를 확대할 수 있지 않습니까? 적이 진형을 미처 갖추기 전에..." "우리 할 일은 백성과 나라를 지키는 일일세. 왜적이 여기서 우리하고 싸우지 않겠다면, 그것으로 족하네. 이겼다고 착각하지 말게. 지금 우린 배와 군사가 너무 부족해." 통제사가 우치적 말을 끊고 단호하게 대꾸했다. 그런 통제사 얼굴을 본 우치적이 잠시 얼어붙었다. 통제사가 싸워 지키기 위한 대상에는 어 느새 임금과 왕실이 빠져 있었다. 우치적이 다른 판옥선들을 살폈다. 피해가 큰 거제1선은 뒤로 조금 빠 져 있고 나머지 배들이 두 줄로 울돌목을 단단히 틀어막고 있었다. 한참 떨어져 있던 전라우수영 1선도 어느새 슬그머니 뒤에 따라붙어 있었다. 이제는 다른 배에 통제사의 명령이 확실히 먹혀들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다른 판옥선에서도 더 이상 화포를 쏘지도, 화살을 날리지도 않 았다. 지금은 거북선 단 한 척이 해협을 가득 메운 왜선들을 일방적으로 몰아붙이고 있을 뿐이었다. "와! 이겼다!" 언덕 위에서 피난민들이 계속 함성을 질렀다. 아까만 해도 통곡하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렸는데, 이제는 정반대 상황이었다. 덩실덩실 춤을 추 는 백성들도 많았다. "저 백성들은 어서 피하지 않고." 통제사가 혀를 찼다. 자칫 왜군들이 땅에 올라 피난민들을 도륙할 지 도 모른다는 염려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우치적의 눈은 계속 왜선을 따 라갔다. 왜선은 아직 수백 척이나 남아 있었다. 싸움이 이렇게 끝날 리가 없었다. 1. 군인은 누구를 위해 싸우는가 (1) = 해남현 선두리, 태귀생 - 취리릭! 통아를 빠져나간 애기살이 날아가 왜병들 사이로 사라졌다. 곧이어 날카 로운 비명이 터져 나왔다. 이제는 남이 죽고 내가 죽을 지도 모른다는 느낌 따위는 더 이상 없었다. 여전히 지겨운 싸움이었다. 화살에 맞아 비명을 지 르는 왜군이야 전혀 새롭겠지만. 태귀생은 손가락 마디가 싸하게 아팠다. 골무는 깨져 없어진지 오래였다. 맨손으로 시위를 계속 당기자 마침내 손가락 마디 살이 갈라지고 뼈가 드러 났다. 당연히 피가 끊임없이 흘러 내렸다. 활도 화살을 꽂는 절피부터 아래 시위까지 온통 시뻘겋게 변했다. 이제 피곤도 극에 달해 눈꺼풀이 절로 내 려왔다. "배고파." 태귀생이 신음 비슷하게 내뱉었다. 사실은 목이 더 마르고 오줌이 더 마 려웠지만, 말이 헛 나온 것을 따지지 않기로 했다. 왜군들은 아직도 이글거 리는 눈길로 태귀생과 임준영을 노려보고 있었다. 지겨웠다. 둘이 막기에는 역시 적이 너무 많았다. 임준영은 점점 더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임준영이 쏜 화살이 연거푸 왜 군들에게 날아갔다. 이제는 끝이 얼마 남지 않았다. 적이 물러가는 것보다, 화살이 떨어지는 것보다 더 빨리 종점이 온 것이다. 여기는 전라우수영과 울돌목으로 나뉘는 갈림길이었다. 이제는 죽을지 살지 임준영이 선택해야 했다. 임준영은 잠시 말을 세우고 전라우수영 앞으로 해서 화원반도 북단으로 가는 길과, 울돌목으로 가는 짧은 길과, 마지막으로 우수영 앞 포구를 살펴 보았다. 포구에는 작은 배 한 척 없고 반쯤 가라앉은 판옥선 몇 척만 우두 커니 남아 있었다. 이제는 우수영 앞길로 도망가든지, 울돌목으로 물러서며 마지막까지 싸우든지 두 가지 방법밖에 없었다. 태귀생은 이 정도 싸웠으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이제 두 사람이 물러서 도 어느 누구도 비겁하다고 비난할 수는 없었다. 애초에 통제사로부터 받은 명령도 죽음을 각오하고 싸울 필요 없이 시간만 끌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싸웠다. '쳇! 왜군 수백 명을 상대로 이만큼 싸운 사람 있음 나와보라고 해.' 태귀생은 떳떳했지만 결정은 임준영의 몫이었다. 물론 태귀생이 반드시 임준영의 결정을 따라야하는 것도 아니었지만. "에구!" 태귀생이 비명처럼 짧은 신음을 질렀다. 임준영은 울돌목으로 물러서고 있었다.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면서도 태귀생은 임준영을 따라 노새를 몰았다. 울돌목으로 가는 길이 좁아 아무리 태귀생과 임준영이 기병이라도 왜병 수백 명을 뚫고 빠져나가기는 불가능했다. 태귀생은 왜병들에게 몰려 급해 지면 바다에 뛰어들겠다고 작정했다. 이제 싸우다 죽는 길밖에 남지 않았다. 그러나 태귀생은 임준영을 욕하기보다는 참 대단하다는 생각만 했다. 울 돌목 언덕 위에 피난민들이 몰려있는 것을 태귀생도 본 때문이었다. 저 사 람들은 왜 도망가지도 않고 언덕에 남아있을까? 피난민이 너무 많아 배에 탈 수가 없었을까? 어쨌든 바로 저 사람들 때문에 임준영과 태귀생은 계속 싸울 수밖에 없게 되었다. 두 사람이 싸우는 것은 임금을 위한 충정에서도 아니고 공을 세우 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바로 저 백성들을, 태귀생과 임준영이 그들을 위해 목숨을 바치고 싸우는 지도 모르는 바로 그 백성들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저 힘없는 백성들에게는 곧 압록강을 넘어온다고 몇 달째 소문만 무성한 명 나라의 백만대군보다는 지금 당장은 임준영과 태귀생이 필요했다. 태귀생은 노새를 거꾸로 타고 왜군들에게 화살을 날렸다. 임준영은 말 위 에서 몸을 돌려 뒤로 쏘고 누워서 쏘고 심지어 일어서서 쏘기도 했지만, 그 건 무과급제자나 할 수 있는 어려운 기술이었다. 태귀생은 활을 가장 정확 히 쏠 수 있는 기술인, 노새에서 내려서 쏘기 기술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와아아!" 갑자기 왜군 창병 몇 명이 함성을 지르며 우수영 쪽으로 뛰어갔다. 임준 영이 그들을 향해 달려갔지만 조총병 몇이 임준영을 가로막는 바람에 멈출 수밖에 없었다. 결국 조총병 둘이 더 거꾸러졌고, 우수영은 곧 왜병 겨우 몇 명에게 점령당한 꼴이 되고 말았다. 곧이어 전라우수영 관사 여기저기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태귀생이 혀를 찼지만 어쩔 수 없었다. 전쟁 기간 내내 조선수군에서 가장 많은 판옥선과 군사를 동원했던 전라우수영은 6년 동안이나 주인으로 있었던 이억기 장군 과 함께 마침내 사라지고 말았다. 왜군들이 우수영 아랫마을에도 불을 놓아 검은 연기가 하늘을 뒤덮었다. - 와아아! 아아아! 태귀생이 울돌목 언덕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해협에서 가끔씩 들려오던 포성이 어느덧 멈추고 언덕 위에 늘어선 피난민들이 목이 터져라 함성을 지 르는 소리가 대신했다. 기쁨에 겨워 지르는 환성이 틀림없었다. 뜻밖에 조선수군이 왜군을 막아낸 모양이었다. 태귀생은 믿어지지 않았지 만 일단 믿기로 했다. 태귀생이 다시 힘차게 시위를 당겼다. - 팅! "음!" 화살이 엉뚱한 곳으로 날아가 땅에 박히고, 왼손 엄지손톱에서 시작된 작 은 고통이 팔꿈치를 지나 느릿느릿 척추를 타고 뒷머리까지 올라오면서 점 점 커졌다. 그러나 태귀생은 아픔보다는 빗나간 화살이 아깝다는 생각이 먼 저 들었다. 이제 화살도 몇 발 안 남았다. 노새는 여전히 뒤뚱거리면서 잘도 달렸다. 사람보다 조금 빠른 정도에 불 과했지만 태귀생의 목숨을 아직까지 지탱시키고 있는 것은 노새의 튼튼한 어깨와 다리였다. = 도도 다카도라 본진 어립선, 겐타로 "이봐! 너 겐타로라고 했지? 이리 좀 와봐." 다락 아래로 내려가 오오쓰쓰를 집어든 겐타로는 등뒤에서 부르는 소 리를 듣고 움찔했다. 돌아보니 역시 거대한 체구를 자랑하는 요코야마였 다. "그렇게 딱딱한 얼굴 하지마. 결판을 내자는 게 아니니까. 아까는 내가 미안했다." 성질이 지독히 더러울 것 같던 요코야마가 어쩐 일인지 선선히 사과 해왔다. 주변에 둘러앉은 아시가루들도 이제는 겐타로에게 살벌한 눈초 리를 던지지 않았다. "대수롭지 않은 일이야. 신경 쓰지 마." 이렇게 되자 겐타로도 말을 누그러뜨렸다. 혹시 속임수라도 있는 게 아닌가 하고 살펴봤지만 요코야마의 눈빛에 뭔가 꾸민 듯한 느낌은 없었 다. 겐타로가 요코야마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어서 위로 올라가야 했지만 설마 지금 당장 전투가 벌어질 것 같지는 않았다. "자, 우선 이것 한번 마셔. 아까 일에 대한 사과의 뜻이다. 하하!" 감정을 풀자 의외로 소탈한 데가 있는 요코야마였다. 요코야마가 내민 대나무통에 담긴 액체가 무엇인지 눈치챈 겐타로가 빙긋 웃었다. 그것은 전투 중에 절대 금지하고 있는 술이었다. 요코야마가 목소리를 낮췄다. "조장이 눈치채면 곤란하니까 빨리." 창문을 통해 배 밖을 감시하던 하급무사를 흘겨보는 요코야마의 얼굴 이 점점 익살스럽게 변해갔다. 자세히 보니 요코야마 얼굴에도 약간 붉 은 기운이 돌고 있었다. 같이 죄를 짓자는 말에 겐타로가 빙긋 웃으며 술을 왈칵 들이켰다. "잘 마시는 군. 역시 제법 배포가 있어." "주는 술을 마다한 적은 한번도 없으니까." 요코야마가 친근하게 한쪽 손을 어깨에 올려왔지만 별로 기분 나쁘게 느껴지진 않았다. 다만 상당히 무거운 게, 역시 스모 선수라는 말이 사실 같았다. "물어볼 게 좀 있는데." 슬슬 취기가 올라올 무렵 요코야마가 용건을 말했다. "아까부터 엔메이 님을 따라 다니는 거 봤어. 나나 여기 있는 녀석들 은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겠으니까 네가 좀 가르쳐 줘. 도대체 아직도 싸우고 있는 거야? 아니면 벌써 이겨버린 거야?" "이기다니? 오히려 우리가 불리한 상황이야." "뭐? 불리할 리가 없잖아? 이쪽은 5백 척이 넘고 적은 열 척 남짓 아 냐? 그 새 적에게 증원군이라도 온 거야?" 다락 안에만 있던 요코야마나 다른 아시가루들은 전혀 이해하지 못했 다. 하긴 겐타로도 처음에는 그들과 마찬가지였다. 겐타로는 요코야마가 알아듣기 쉽도록 한참을 설명해야 했다. "그러니까, 이쪽이 이미 절반이나 당했단 거야? 영주님 하나는 머리가 매달리고?" 겨우 이해가 된 요코야마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 있던 아시가루들도 놀란 표정으로 시선을 요코야마에게 주었다. "겨우 열 척으로 싸우면서? 녀석들은 귀신이야, 뭐야? 이수사 장군이 바람과 파도를 부리는 재주가 있다는 소문이야 일본에서도 익히 들었지 만..." "나도 그게 궁금해. 어쨌든 확실한 건 말야. 이제부터는 본진이..." 겐타로가 여기까지 말했을 때 갑판 위에서 무사 한 명이 크게 소리를 질렀다. "진형을 변경한다! 전투준비! 적이 온다!" "적이 온다고? 본진 어립선에?" 아시가루들이 웅성거렸다. 전세가 역전되어 반대로 공격을 받게 되는 상황이었다. 그것도 본진의 어립선이 전투에 나서야 할 입장이었다. 겐타 로가 요코야마의 손을 잡아 어깨에서 내렸다. 팔 하나만도 엄청나게 무 거웠다. "나는 위로 올라가 봐야겠어. 그럼 이따 싸움이 벌어지면 보자고!" 날쌔게 갑판 위로 올라가는 겐타로에게 요코야마가 아직도 술에서 덜 깬 얼굴로 물었다. "이봐, 겐타로! 도대체 왜 이렇게 된 거야?" 그건 겐타로도 알고 싶었다.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을 받은 겐타로는 입 에서 아무렇게나 나오는 대로 내던졌다. "물살이 바뀌었잖아! 이 빌어먹을 격류 때문일 거야!" 어두운 다락 안에서 나와 다시 진막 안으로 들어가면서 겐타로는 거품 을 일으키며 세차게 흐르는 물살을 보았다. 조선 땅에서는 바다마저 일 본군을 거부하는 것 같았다. 더러운 것을 쓸어버리겠다는 듯 거세게 흐 르는 그 물살에 저항하며 지금 일본수군은 힘겹게 싸우고 있다. "학익진으로!" 진막에 막 들어간 겐타로는 냉정을 되찾은 다카도라가 지휘봉을 흔드 는 걸 보고 멈춰섰다. 뒤에서 의젓하게 서 있기만 하던 총대장의 모습에 서 직접 전투를 지휘하는 무장으로 변한 모습이었다. 겐타로는 살며시 다카도라 뒤쪽에 서 있는 엔메이에게 다가갔다. "왔는가." 엔메이는 왜 왔냐고 묻거나 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겐타로를 받아들였 다. 마치 여기 온 이유를 이미 알고 있다는 태도였다. 겐타로가 작은 소 리로 물었다. "이제 싸우는 겁니까?" "그래. 저쪽을 보게. 메구라부네가 보이지? 조선군이 저걸 앞세우고 곧 바로 밀고 왔더라면 좀 위험할 뻔했는데, 다행히 저기서 그냥 움직임을 멈췄어. 그 동안 다카도라 님이 이에마사 님과 협의해 진형을 바꿔 싸우 기로 한 것이지. 이미 부장 다카요시 님을 이에마사 님의 배에 보냈네." 겐타로는 메구라부네라는 말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며 앞쪽을 살폈 다. 조선의 눈먼 장님배가 나타나면 그날은 다 죽는 날이라는 소문은 겐 타로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다. 과연 이상한 모양을 한 배 하나가 유난히 앞쪽에 나와 있었다. "우리가 이길 수 있는 겁니까?" "허허! 이상한 소리를 하는군. 지려고 싸우는 거 봤나?" 당황한 겐타로가 말을 더듬거렸지만 엔메이는 여전히 차분하고 부드러 운 말투였다. 조금 안도한 겐타로가 내친 김에 확실히 물었다. "자꾸만 자신감이 없어져서 그럽니다. 그토록 투지에 넘치던 미치후사 님도 그렇게 됐고, 와키자카 님도 흉한 모습을 보이며 도망치지 않았습 니까?" "애당초 그렇게 쉽게 이길 싸움은 아니었네. 전투란 게 어디 하나라도 쉬운 게 있겠나? 도망치는 적이라면 몰라도 싸우려고 나온 적이라면 마 땅히 이쪽도 목숨을 내놓고 상대해야 하는 법이야." "그건 그렇지만..." 겐타로가 힘겹게 들고 있는 철포를 보며 엔메이가 씩 웃었다. "그 오오쓰쓰도 곧 쓸 수 있게 될 거야. 될 수 있으면 여기서 싸우게 나. 다카도라 님이 직접 보고 있으니 공을 세우면 금방 눈에 뜨일 걸세." "고맙습니다, 엔메이 님." 친절하게도 엔메이는 겐타로의 전공까지 배려해 주고 있었다. 겐타로 는 출신이 불분명한 이 중에게 어째서 아무도 싫은 소리를 하지 않고 존 경하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엔메이." "예, 다카도라 님." 겐타로가 다시 말을 꺼내려 했을 때 측근 무장들과 이야기를 마친 다 카도라가 엔메이를 불렀다. 엔메이가 몇 걸음 나아가 다카도라에게 다가 갔다.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조선군의 움직임에 대해서." "승세를 타고 있습니다. 더불어 유리한 물살까지 얻고 있습니다. 반격 해 오겠지요. 지금 학익진을 펼치시는 것, 그걸 예상하신 것 아닙니까?" "중신들은 잘 이해를 못하더군. 오히려 어째서 전군의 사에키 고레마 사에게 공격을 명하지 않느냐고 묻고 있어." "전황을 냉철하게 판단하면 이해하게 될 겁니다." 엔메이는 늘 하던 대로 부드럽게 다카도라에게 답했다. 스님이라는 신 분 때문인지 엔메이는 군사라는 역할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차분하고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격한 성격의 무장들과 함께 있으면 덩달아 사 나워지던 다카도라도 엔메이와 이야기 할 때만은 다실茶室에 들어와 있 을 때처럼 차분해졌다. "적을 앞두고 용감하기는 쉽지만 냉정하기는 어려운 법입니다, 다카도 라 님." 엔메이는 일부러 뒤쪽을 한번 돌아보며 말했다. 다카도라와 이에마사 군의 뒤쪽에서 겁쟁이 취급을 받으며 웅크리고 있는 가토 요시아키군을 향해 하는 말 같았다. "간사하게 빠져나가는 것도 쉬운 게 아니겠지." 다카도라는 그 요시아키군 너머 후퇴하고 있는 와키자카군에 대고 쏘 아붙였다. 물론 아까처럼 감정이 고조된 표정은 전혀 아니었다. "분하십니까?" 엔메이가 빙긋 웃으며 물었다. 진형변화를 위해 일본수군의 배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전체적 으로 뒤쪽으로 한참 물러서며 넓은 바깥 바다에서 해협을 중심으로 포위 한 형태였다. 도도 다카도라의 본진 함대가 좌익을, 하치스카 이에마사의 함대는 우익을 형성했다. 그리고 두 함대의 중심, 다카도라의 어립선과 이에마사의 어립선은 가까운 위치에서 서로 긴밀한 연락을 취하고 있었 다. "예전에 와키자카군이 바로 이 학익진에 당했다고 들었다. 한산도 앞 바다에서 유인작전에 걸려들었다고 했지?" 한참동안 말이 없던 다카도라가 약간 말을 돌렸다. "무턱대고 돌진해 오는 적을 맞아 싸우는 데는 당연히 학익진이 가장 좋습니다. 사방에서 공격을 퍼부어 적을 완전히 혼란에 빠뜨릴 수 있으 니까요. 이순신은 당연한 전술을 쓴 겁니다." 엔메이는 그런 다카도라의 물음에 충실히 대답해 주었다. 조금 전에 다카도라가 와키자카 야스하루에게 보낸 것은 뜻밖에도 분노가 아니라 동정이었다. "그때 당한 충격 때문에 조그만 패배에도 용기를 잃어버린 결과다. 모 든 준비를 갖추고 먼저 선공을 취했는데도 패했다면 그 어떤 전투에서 자신을 가질 수 있겠는가." "그럼 다카도라 님께서는 자신이 있으십니까?" 엔메이의 맑은 눈이 다카도라를 향했다. 도를 묻는 스님의 눈동자였다. 다카도라 역시 도를 답하는 수행자의 모습이 되었다. "성을 쌓을 때나 마을을 만들 때, 나는 겨우 돌 하나를 올리는 곳이나 나무 하나를 심는 곳에도 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정성을 담았다. 싸움 이든 축성이든 기본은 같다. 오로지 믿음과 성실함이 있을 뿐." 다카도라의 진가는 전투보다는 축성기술에 있었다. 오다 노부나가와 지금의 토요토미 히데요시 뿐만 아니라 나중에 권력을 잡은 도쿠가와 이 에야스도 변함없이 다카도라를 중용한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용맹보 다는 성실함만으로 난세를 헤쳐 나온 관록의 남자, 다카도라의 일념이 느껴지는 말이었다. "내가 처음으로 치룬 이치카와 전투에서도 그랬다. 중상을 입으며 화 려한 전공을 세웠지만 막상 전공은 날 가난한 사무라이라 욕하던 자에게 빼앗겼지. 난 간사한 자를 싫어한다." 다카도라의 출세담은 겐타로도 잘 알고 있었다. 이 배에 타고 오면서 아시가루들이 자주 화제로 삼았기 때문이다. 떡집 앞에서 무전걸식하던 신세에서 간신히 녹봉 300석의 사무라이로 시작해 지금과 같이 성 몇 개 와 넓은 영지를 가진 다이묘가 되기까지의 여정. 언젠가는 다카도라와 같이 되겠다는 것이 모든 아시가루와 잡병들의 열망이었다. "다카도라 님. 이대로 일전을 벌이는 거요?" 길쭉한 얼굴에 신경질적인 표정을 짓고 있는 무장이 진막 안으로 들어 서며 물었다. 군감 모리 다카마사였다. "그렇소만. 무슨 문제라도 있소?" "흠, 학익진이라 함은 곧 적이 돌격해 올 거란 의미고 우리는 방어를 한다는 건데, 별로 좋게 보이지 않아요. 마치 우리가 열세인 것 같지 않 소?" "꼭 열세여야만 학익진을 쓰는 건 아니오. 학익진이란 건 말이오. 적을 포위해서..." 군감 다카마사의 제법 아는 체하는 추궁에 다카도라가 피곤한 표정을 지었다. "아, 그쯤은 나도 잘 알고 있소! 하지만 전례를 보건대 내대신이 썼다 가 패한 미가타가하라 싸움 같은 예도 있고 해서 별로 내키지 않소." 다카마사는 잘 안다는 듯 다카도라의 말을 끊으며 반론했다. 당시 내 대신內大臣은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관직명이다. 미가타가하라 싸움은 1572년 상락上落을 위해 교토로 진군하던 다케다 신겐과 이를 막으려는 도쿠가와 이에야스 사이에 벌어진 싸움이다. 각각 2만5천과 1만1천을 동원해 병력 차가 확연했고, 더구나 무적의 기마대로 유명한 신겐군에 대항할 수단이 이에야스 쪽에는 별로 없었다. 그러나 이에야스는 무리할 정도로 억척스럽게 저항했다. 다케다 신겐 이 물고기 비늘 모양의 어린진으로, 이에야스는 학익진을 펼쳐 싸웠는데, 워낙 치열하게 싸워서 당시 이름이 별로 없던 이에야스를 세상에 널린 알린 싸움이기도 했다. 그러나 결과는 이에야스의 참담한 패배였다. 이때 이에야스가 말 위에서 똥을 쌀 정도로 혼비백산해서 성안으로 도망쳤다 는 일화가 전해진다. "그때와 지금은 다릅니다, 다카마사 님. 우리 쪽이 훨씬 더 많은 병력 으로 넓은 곳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적은 한 척 당 우리 세키부네 10 척 이상을 동시에 상대해야 합니다. 워낙 두텁게 진형을 짜서 아무리 조 선수군이 치열하게 공격해도 결코 뚫지 못할 것입니다." 아는 척하는 다카마사에게 엔메이가 조목조목 지금 펼쳐진 학익진의 전술적 의미와 상황을 설명했다. 겐타로는 다카도라가 한심하다는 듯 한 숨을 쉬는 걸 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군감이 주제넘게 잘 알지도 못하는 작전에 대고 이리저리 참견하는 것이 앞으로의 싸움이 별로 순탄치 못할 것임을 알려주는 것 같았다. 겐타로는 이젠 제법 멀어진 조선군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넓은 바다 로 유인해서 격파하겠다는 이쪽 의도와는 달리 조선수군은 아직 해협을 막은 그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가끔 쏘아대던 대포소리도 멈췄다. 하늘과 바다에 싸늘한 적막이 찾아왔다. = 정릉동 행궁, 정홍익 "전하! 도대체 그러실 수가 있습니까? 나라가 망해도 좋단 말입니까?" 예문관 검열 정홍익이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꾸벅꾸벅 졸고 있던 대신들도 놀라 어깨를 움츠렸다. 비록 초라한 행궁이긴 하지만 임금이 계신 어전 문을 박차고 들어오는 사람이 있으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 다. 임금 앞에서 씩씩거리는 노인은 행 지중추부사 정탁이었다. "무슨 말이오? 일단 앉으시오." 임금이 불쾌한 듯 정탁을 향해 눈살을 찌푸렸다. 얼굴이 벌건 게 낮술을 한 잔 걸친 것이 틀림없었다. 정홍익은 정탁이 일정한 직무를 갖지 못한 중 추부 지사라지만 이런 경황없는 때에 낮술을 마신 것은 아무리 50년 동안 관직에서 봉사한 원로 대신이라 해도 너무 심했다 싶었다. "충청수영 배들을 강화로 불러들여 한강에서 왜적을 막게 했다는 소문이 사실입니까? 그게 어명이었다는데, 정말입니까?" 정탁이 숨넘어가듯 몰아쳤다. 임금을 노려보며 씩씩거리는 것이 단단히 화가 난 모양이었다. 그것은 역적 소리 듣기 딱 좋은 태도라, 정홍익은 속으 로 부들부들 떨었다. "그렇소. 서울을 지켜야 할 게 아니오? 나라의 근본이 위태로우면..." 의아해진 임금이 더듬거렸다. 근본이란 다름 아닌 임금 스스로를 뜻했다. "없는 수군도 만들어 한꺼번에 몰아줘도 시원찮을 판에, 충청수영 배들을 빼돌리다뇨? 아니, 이보쇼! 조정 중신들은 도대체 정신이 있소, 없소? 상께 서 이런 결정을 내리시기 전에 목숨을 걸고라도 말려야 할 것 아니오?" 정탁이 괜히 고개를 돌려 대신들을 꾸짖었다. 잘못된 결정에 대해 임금은 책임을 지지 않는 법이다. "전하! 왜선 천 오백 척을 상대로 겨우 열 몇 척을 내보내고 싸우라고 하 면, 그게 죽으란 말과 다를 게 뭐가 있겠습니까?" "험! 험! 그래서 수군을 폐하고 육지에서 싸우라고 했는데, 통제사가 말을 안 듣지 않았소?" 조정에서는 칠천량패전 직후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한 다음, 8 월 중순에는 육지에서 싸우라는 명령을 내렸다. 수많은 왜선과 맞서기 위해 남해안 지방을 강행군하며 병사와 무기를 긁어모으던 이순신의 힘을 쫙 빼 놓은 결정적인 한 방이었다. 만약 그때 이순신이 조정의 명령을 받들어 왜군을 상대로 육지에서 싸웠 다면 어떻게 됐을까 궁금해하는 사람이 많다. 수전에서 그렇게 화려한 전술 을 선보인 이순신이라면 육전에서도 뭔가 뛰어난 공적을 세우지 않았을까 하는 가정도 충분히 가능하다. 그러나 군졸들은 다 도망치고 고지식한 이순 신은 끝까지 싸우다가 전사했을 거라고 보는 편이 훨씬 현실적이다. 그럴 경우 조선이라는 나라의 운명이 어떻게 됐을까는 너무나 뻔하다. "해남이 뚫리면 왜적이 한강으로 해서 바로 서울로 쳐들어올 걸 모르십니 까? 으아! 미치겠네, 이거! 죽기를 각오하고 적과 싸운 충신을 이렇게 버릴 수가 있단 말입니까? 임금이 할 짓입니까, 그게? 망했다, 망했어! 엉엉!" 정탁이 땅을 치며 통곡했다. 몇 달 전 이순신이 옥에 갇혀 고문을 받을 때 어느 누구도 이순신을 살려주자고 감히 말을 꺼내지 못했다. 임금이 이 순신을 얼마나 미워하는지, 그리고 임금이 이순신을 고문해 죽이려고 작정 한 걸 다들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일하게 정탁 한 사람만이 목숨 을 걸고 신구차를 올렸고, 이순신은 목숨을 구한 대신 병졸로 강등되어 싸 워야 하는 백의종군의 처벌을 받았다. "여보시오, 정 지사. 어전에서 감히 이 무슨 해괴한 망발이오? 썩 물러서 지 못하겠소?" 좌의정 김응남이 눈을 부릅뜨고 정탁에게 호통쳤다. 그러나 정탁이 쏘아 보자 김응남은 당장 움츠리고 말았다. 정홍익은 김응남이 마치 꼬리 내린 강아지 같다고 느끼며 열심히 초책을 써 내려갔다. 정홍익은 누군가 보고 있는 것 같아 슬쩍 고개를 들었다. 얼굴이 시뻘개 진 임금이 정홍익에게 눈짓을 하며 고개를 흔들고 있었다. 그러나 정홍익은 즉시 못 본 체하며 고개를 숙이고 정탁의 말을 계속 초책에 기록해나갔다. "나는 살만큼 살았다, 이거야. 할 말은 뭐든 할 수 있다, 이거지. 응? 좌 상! 자네 참 고생이 많구먼. 그 머리로 여기까지 올라왔으니 말일세. 뭐, 자 넨 아부도 잘 하는 데다 특히 전쟁통이라 가능했지만 말이야. 아, 참! 저번 에 이순신의 목을 베고 원균을 통제사로 앉혀야 한다고 바득바득 우긴 그 벼락맞을 놈이 누구였더라? 나라 말아먹은 놈이 아직도 자리를 지키고 있 어? 에라! 이 육시랄 놈아! 나 같으면 부끄러워서라도 벌써 목매달고 말았 겠다." 정탁이 계속 비꼬고 욕설을 퍼부었지만 김응남은 차마 머리를 들지 못했 다. 평소에는 무척 과묵하지만 일단 말을 꺼낸 다음에는 도저히 말릴 수 없 는 사람이 정탁이었다. 그런 정탁이 임금에게 고개를 돌리자 임금이 흠칫하 며 눈길을 피했다. "주상전하. 이제는 제발 똑바로 보십시오. 괜히 쓸데없이 고집 피우시다가 이 꼴이 됐습니다. 우리 수군이 패하자 삼도 백성들은 어육이 됐고 직산에 서 왜적에게 패해 쫓겨온 명나라 놈들은 머리만 처박은 꿩처럼 부들부들 떨 고 있습니다. 내전은 이미 해서로 피했고 사복시에서는 몽진을 위해 말 수 십 필이 주야로 대기하고 있다는 사실을 백성들도 다 알고 있습니다. 상께 서는 끝까지 서울에 남아 계시겠다고 공언하셨지만 백성들은 결코 주상전하 를 믿지 않습니다. 이게 상께서 원하신 겁니까? 제발 똑바로 보십시오. 뭐, 이미 늦었지만 말입니다." "험! 험!" 정홍익은 임금이 이 대목에서 괜히 헛기침을 했다고 기록했다. "소신은 주상전하를 끝까지 모실 것입니다. 내 비록 늙고 병들었지만 누 구처럼 도망가지는 않아요. 뭐, 결국은 다 죽겠지만 말입니다. 임금과 신하 가 함께 죽을 날만 남았습니다. 불충한 소신, 이만 물러가 술이나 더 퍼 마 시겠습니다. 흐이그!" 정탁이 나가면서 문을 쾅 소리 나게 닫았다. 순간 적막이 찾아왔다. 마치 일진광풍이 쓸고 간 빈자리처럼 어전은 폐허로 변했다. 잠시 후 임금이 양 손으로 머리를 잡고 흔들었다. "으으! 저런 노인을 쳐죽일 수도 없고. 아! 머리야." "전하! 옥체를 보존하소서!" 김응남이 마치 내시처럼 간드러진 목소리로 안타깝게 말했다. 임금이 비 틀거리며 일어섰다. "으! 편두통이 재발했나 보다. 별전으로 가서 침을 맞겠다. 어의를 부르 라." 1. 군인은 누구를 위해 싸우는가 (2) = 정릉동 행궁, 정홍익 정홍익은 별전이라고 불리는 좁은 방에 가득 찬 중신들과 의관들 이름을 하나씩 기록했다. 내의원을 맡은 정승 반열의 중신 두 명과 당상관 세 명, 어의 둘을 포함한 의관 네 명이었다. 우승지와 주서 및 가주서, 검열 등 사 관들도 다섯 명이나 들어와 붓을 놀리고 있었다. "흠, 흠! 침을 맞으려는 게 아니고 다만 증세를 물어보려는 것이니 승지와 사관들은 입시할 필요 없다." 임금이 한 말은, 사관들은 당장 이 방에서 나가라는 소리였다. 그러나 누 구 하나 임금의 말을 믿지 않고 버팅기고 앉아 있었다. 임금의 옥체에 가해 지는 치료 기록이 실록이나 승정원 일기에서 빠지면 큰일이기 때문이다. "전하아~앙. 침의들이 밖에서 대기하고 있사옵느이당." 내시감이 밖에서 간드러진 목소리로 아뢰었다. 조금 전에 김응남의 당황 한 목소리를 들은 정홍익은 내시감 목소리와 어찌 그리 비슷할까 싶어 좌의 정 턱밑에 수염이 나 있는지 확인했다. 그러나 김응남의 턱에는 올이 몇 안 되더라도 분명히 남자의 상징이 나 있었다. 지나치게 꼬불꼬불한 것이 다른 것을 연상시켰지만 그 염소수염이 가짜는 아니겠다 싶었다. "어서 들라 하라." 전문적으로 침을 놓는 침의鍼醫 다섯 명이 동시에 들어왔다. 그렇지 않아 도 좁은 별전이 사람들로 가득 찼다. "지금 전황이 시급한데 상께서 침을 맞아서는 아니 되옵니다. 서울에 경 략과 총병을 비롯한 명나라 장수들이 여럿 있어 상께서 언제 그들을 접견해 야 할 지 모르옵니다. 신들이 의관들과 더불어 상의하니 '침을 맞은 다음에 는 여러 날 조용히 조섭하지 않으면 보탬이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해로 움만 더할 것이다'고 합니다. 마땅히 급한 일이 지나간 연후에 침을 맞으소 서." 이조판서 겸 약방 제조 홍진이 먼저 임금에게 아뢰었다. 정홍익이 생각해 보니 홍진은 비변사 당상도 겸하고 있었다. 홍진 입장에서는 임금의 건강뿐 만 아니라 이번에 임금을 치료하는 일이 정국 전체에 미칠 영향을 감안해야 했다. 정홍익이 초책에 기록해나가다가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붓을 멈췄 다. 고개를 들어보니 임금이 골똘히 생각하는 표정을 지었다. 정홍익은 그제야 이것이 명나라 장수들을 접대하는 따위가 아닌 꽤 큰 문 제임을 알았다. 홍진이 그렇게 아뢴 것이나 임금이 고민하는 것은 공개석상 에서 말은 못하지만 다 몽진을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이었다. 도성에서 겨 우 하루 거리인 직산 부근에 왜적의 대군이 도사리고 있었다. 여차하면 대 가大駕를 모시고 의주로 도망가야 할 판에 임금이 침을 맞으면 여러 모로 곤란한 일이 있게 될 것이다. "내, 오늘은 필히 침을 맞겠소. 그리고 뜸을 뜰 준비를 하라 이르시오." 한참을 고민하던 임금이 드디어 결단을 내렸다. 명나라 군대가 직산에서 패전한지 열흘이 다 되어가지만 이상하게 왜군들은 움직임이 거의 없었다. 안성이나 용인에 왜군들이 나타났다는 보고는 있었지만 병력이 소규모인데 다 그 움직임도 산발적이었다. "의방醫方에, 침을 맞을 때는 뜸을 뜨지 아니하고, 뜸을 뜰 때는 침을 맞 지 아니한다 하였사옵니다. 성질이 다른 침과 뜸을 함께 하는 것은 온당하 지 못합니다." 이번에는 예조참판 겸 내의원 부제조 오억령이 아뢰었다. 정홍익은 그저 담담하게 기록해나갔다. 대신들이 담당 분야를 잘 하는지 아닌지는 모르겠 지만 다들 의학에는 한 가닥씩 하는 것 같았다. "겨드랑 밑에 기류증이 있어 한쪽이 너무 허하니, 내 생각에는 쑥김을 들 이는 처방이 좋을 것 같소." 의학에 대해서는 임금도 조예가 무척 깊은 것 같았다. 정홍익은 도무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하여튼 일단 기록하고 봤다. 정홍익 옆에 앉은 가 주서 하나가 목을 길게 빼어 쑥김을 한자로 어떻게 쓰는지 훔쳐보았다. "요즘 날씨가 추워 점혈할 즈음에 한기가 허한 곳으로 들어갈까 염려되옵 니다. 내일 모레가 길일이니 날씨가 따뜻한지 여부를 살핀 다음 침을 놓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홍진은 어떻게든 임금이 침을 맞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인 것 같았다. 말 이 끝나기가 무섭게 이번에는 좌의정 김응남이 나섰다. 약방 도제조는 정승 이 겸임하는데, 김응남은 의학에도 무척 조예가 깊은 편이었다. 어전에서 전 쟁을 지휘할 때보다 훨씬 활발하고 자신 있게 의견을 개진했다. "그렇사옵니다. 날이 추워지고 있으니 상께서는 침을 맞아서는 아니 되옵 니다. 침은 열기를 해소하는 작용을 하고 뜸은 쑥불의 화기가 경락에 열을 더하는 것이니 이는 보완작용을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허나 편두통에는 뜸보다 침이 주된 작용을 하기 때문에 이렇게 추울 때 침을 맞으셨다가 자 칫 감환에 걸리시거나 옥체가 허해질까 우려되옵니다. 마땅히 날이 따뜻해 지길 기다려 내년 봄에 침을 맞으소서." 정홍익은 초책을 잠시 뒤적였다. 확인해보니 전문가들인 의관들은 임금 앞에서 아직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 어쩌면 의학에 문외한이라 할 수 있는 정승, 판서들이 역시나 문외한이며 환자 입장인 임금과 함께 의관들 앞에서 의학 토론을 벌이고 있는 판국이었다. 이런 일에 익숙해졌는지 의관 양예수, 허준 등은 공손히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다. 그러나 의관 같은 잡류雜類가 감히 어전에서 입을 놀릴 수는 없는 법이었 다. 혹시나 의관이나 내시들이 어전에서 말을 하더라도 사관들이 그들 이름 까지 기록한 경우는 거의 없었다. 단지 '아래에서', 또는 기껏해야 '의관이'라 고 쓸 뿐이었다. 그리고 생각해보니 침을 맞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자칫 옥체라도 상하 게 되면 의관이 우선 책임을 지지만 내의원을 맡은 정승, 판서들도 책임에 서 벗어나지 못한다. 벼슬아치들은 기본적으로 책임지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것이 정홍익의 생각이었다. "들으시오! 대신들은 봄에는 가을을 기다리자 하고 가을에는 봄을 기다리 자고 하니, 세월이 갈수록 병은 깊어지기만 하오. 중신들 말을 들으면 도대 체 언제 이 병을 치료할 수 있을지 모르겠소. 내가 그 동안 얼마나 고통스 러웠는지 신들은 아오? 대신들은 왜 이 핑계 저 핑계로 내 병의 치료를 늦 추는 거요? 제발 병을 치료해 과군寡君을 몇 년만 더 살게 해주오. 내 이렇 게 눈물로 호소하오." 임금이 애절함이 절절이 담긴 '내용'으로 말했다. 그러나 말투는 전혀 그 렇지 않았다. 임금은 눈 하나 깜빡 안하고 단지 내용으로만 우는소리를 했 을 뿐이었다. 그리고 임금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바로 다음 소리를 기대하 기 때문이었다. - 쿵! 쿠쿵! "황공하여이다! 미처 옥체를 먼저 생각하지 못한 불충한 신들에게 벌을 내려 주시옵소서." 김응남을 위시한 내의원 당상관들이 바닥에 머리를 찧었다. 정홍익은 벼 슬아치들의 아첨과 책임회피가 지나치면 이런 꼴이 된다고 기록하고 싶었 다. 그러나 꾹 참은 것은 임금과 중신들 사이에 이견이 존재했을 때 임금의 의도로 결론지어지는 이런 뻔한 절차를 기록하기에는 차마 너무 낯뜨거워서 였다. 후세에 실록을 보는 사람들은 임금이 병으로 고통을 겪으면서도 대신 들에게 치료를 허락해줄 것을 하소연해야 하는 줄 오해할 것이다. "험, 험! 상의 증후를 자세히 알아야 침을 놓을 수 있습니다. 상께서는 지 금까지 편두통, 귀울림, 견비, 허한, 담천증, 심장병 등등 병을 달고 계시니 신들로서는 그 동안 주상전하의 옥체를 보살피지 못해 무척 민망합니다. 게 다가 이 혼란한 전쟁 와중에 상의 건강이 매우 걱정됩니다. 신들이 의관들 과 논의해 침을 바르게 놓는 방법을 정하겠으니 어의들을 비롯한 의관들 앞 에서 증상을 하교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마가 뻘겋게 된 김응남이 조금 전에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임금에게 아뢰었다. 드디어 이제야 본격적인 침 놓기가 시작될 모양이었다. 환관들이 병풍을 치고 금침을 깔았다. 임금과 조정은 마치 전쟁을 잊은 듯했다. 정홍익은 직산에 있다는 왜군은 과연 서울로 밀고 올라올지, 조선수군은 벌써 전멸하고 통제사도 죽었는지, 그 외에도 다른 곳은 전쟁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무척 궁금했다. = 도도 다카도라 본진 어립선, 겐타로 "모든 준비가 끝났습니다." 부장 도도 다카요시가 마지막으로 진형을 점검한 다음 다카도라에게 보고했다. 조금 전에 하치스카 이에마사의 어립선에 다녀온 이 젊은 부 장은 만고하치로라는 애칭으로 더 많이 불리며, 눈빛에서 총기가 넘쳐흘 렀다. 썩은 생선 같은 눈알을 굴리는 군감 모리 다카마사와 좋은 비교가 되었다. "그물은 다 펼쳤지만, 문제는 어떻게 고기를 이쪽으로 몰고 오는가 하 는 건데." 다카도라는 잠시 투구를 벗고 땀을 훔쳤다. 늦가을, 또는 초겨울의 쌀 쌀한 날씨였지만 긴장 때문인지 총대장의 이마에는 자꾸만 땀이 흘렀다. 겐타로가 문득 배를 찬찬히 둘러보았다. 선수가 두드러진 사각형이고 두 사람이 큰 노를 젓는 전형적인 이세伊勢 선형의 아다케후네였다. 갑 판은 끝에서 끝으로 달리기를 해도 좋을 만큼 넓고 철포병과 수부를 보 호하는 다락은 3층 구조로 되어 있었다. 그 갑판에 얹힌 천수각天守閣 또한 3단 지붕으로 올린 어마어마한 크기였다. 물위에 떠다니는 성이라 해도 좋을 정도로 거대한 이 배는 오오아다케大安宅라고도 한다. "적이 움직이는가?" "아직 아무런 움직임도 없습니다!" 다카요시가 그 천수각에 올라가 있는 관측병에게 물었지만 돌아온 대 답은 역시 시원치 않았다. 천수각에는 그 관측병과 함께 철포병들이 줄 지어 배치되어 있었다. 다가올 판옥선을 향해 집중사격을 가하려는 준비 였다. 일부러 금색으로 칠한 천수각 벽에는 철포병들이 내민 검은 총구 가 삐죽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아무래도 조선수군은 해협을 지키는 것만으로 만족할 모양입니다. 쉽 게 유인에 말려들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전방을 주시하던 엔메이가 조심스러운 전망을 내놓았다. 다카도라도 아깝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하긴, 돌격해 올 거라면 아까 메구라부네를 앞세워 왔겠지. 차라리 그 때 공격해 왔더라면 우리 피해도 크겠지만 대신 쉽게 이길 기회였다." "지당하신 말씀. 기세가 올랐다고 해도 원래 접전과 난전에 약한 것이 조선군입니다. 이순신도 그걸 잘 알고 있겠지요." "그러니까 보통 미끼로는 잘 걸리지 않겠지." 전투는 또 소강상태에 들어갔다. 조선수군의 포성도 잠시 멎었다. 겐타 로는 마치 전투가 끝난 것 같은 착각을 느꼈다.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바닷물과 조용히 떠 있는 배들은 뱃전에서 부서지는 물살을 받으며 한가 로이 떠 있었다. 그러나 그 배 안에 탄 사람들이 뿜어내는 긴장과 살기 만은 감출 수 없었다. 학익진이라 해도 함선들이 완전히 일렬로 늘어선 것은 아니었다. 53척 으로 이뤄진 도도 다카도라의 본진 함대와 총 94척인 하치스카 이에마사 의 함대는 좁은 해협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도 많았다. 비교적 넓은 해협 바깥쪽 바다인데도 세 줄씩이나 되는 두꺼운 학의 날개가 형성되었고 그 앞에는 선봉함대를 맡은 전군의 일부가 드문드문 흩어져 있었다. 겐타로 는 다카도라가 말한 보통 미끼라는 게 전군 소속 배들을 가리킨다는 걸 알았다. "언제까지나 이렇게 있을 참이오?" 군감 다카마사가 엔메이와 다카도라 사이에 끼어 들었다. 군감의 초조 한 얼굴은 총대장에게 어서 타개책을 내놓으라는 무언의 압박과 같았다. "아직은 좀 더 지켜봅시다. 조선군도 승세를 이어가고 싶은 유혹은 견 디기 힘들 거요." 다카도라가 조금만 참아달라고 타일렀다. 다카도라의 지시에 의해 학 익진 앞에서 사에키군이 해협을 들락거리며 총을 쏘기도 하고 함성을 지 르기도 했다. 하지만 조선군은 쉽사리 다가올 태세를 보이지 않았다. "내게 좋은 생각이 떠올랐소!" 군감 다카마사가 가는 눈을 더 가늘게 뜨며 외쳤다. 다카마사가 뻗은 손끝에는 해협 오른쪽 언덕 기슭을 하얗게 뒤덮은 피난민들이 있었다. "저쪽에 조선인들이 보이지 않소? 그 앞에 있는 하치스카군을 상륙시 켜 저들을 공격하는 거요. 그러면 이순신도 어쩔 수 없을 거 아니오? 저 들을 살리기 위해 이리로 와서 싸움을 시작하던가, 아니면 자기 백성도 구하지 못했다는 치욕을 견뎌야 할 거요. 어떻소? 좋은 생각 아니오?" 과연 좋은 생각이라고 여기던 겐타로는 의외로 다카도라와 엔메이 둘 다 별 신통찮은 반응을 드러내지 않는 것을 보고 놀랐다. 다카도라는 마 치 못들은 소리를 들은 것처럼 침묵을 지켰고 엔메이는 한숨을 크게 내 쉬었다. "내 말 못 들었소? 뭐라고 말 좀 해 보시오!" 반응이 없자 군감 다카마사가 화를 버럭 냈다. 그러나 다카도라는 군 감의 추궁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좋은 생각이긴 하오만. 좀..." "비겁하다 그거요? 아니! 지금 그런 것 가리게 됐소? 전장에서 쓸 수 있는 수단이란 다 써야 하는 법. 그건 지략이지 결코 비겁이 아니오. 그 렇게 비겁한 게 싫으면 진작 정정당당하게 싸워 이겼으면 될 거 아니 오!" "다카마사 님!" 다카도라가 눈을 치뜨며 다카마사의 눈을 응시했다. 그러자 다카마사 는 약간 겁먹은 표정으로 변했다. "이기기 위해서라지만 결국 죄를 짓는 겁니다. 아미타불." 엔메이가 다카도라의 심정을 대변하며 불호를 외웠다. 엔메이야 스님 으로서 당연히 하는 말이겠지만, 힘없는 피난민들을 죽이라는 것은 싸움 터에서 잔뼈가 굵은 무장인 다카도라에게 그 동안 쌓은 무명을 시궁창에 내던지라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다카도라가 다카마사를 노려보며 한참 동안 혀를 찼다. "왜 나만 가지고 그러시오! 난 어떻게든 이기게 해 주려고 나름대로 지략을 짜낸 거요. 신불은 두렵고 다이코 전하는 두렵지 않단 말이오?" 호가호위狐假虎威라는 말은 이럴 때 쓰는 말이었다. 독립된 영주가 아 닌 군감은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위명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알겠소. 그렇게 하리다. 좋은 지략, 감사하오." 다카도라가 군감을 향해 억지로 감사의 뜻을 표하더니 곧 하치스카군 에게 전령을 보냈다. 다카마사가 만면에 웃음을 지으며 전령이 떠나는 것을 지켜보는 동안, 다카도라는 천천히 투구를 쓰고 끈을 조였다. 눈치 를 챈 엔메이가 겐타로를 끌고 다카도라에게서 떨어지는 순간 다카도라 가 정면을 응시하는 척하며 고개를 홱 돌렸다. "아악! 아파! 뭐, 뭐요? 적의 공격이오?" 기다란 투구 장식이 다카마사의 뒷머리를 긁고 지나가자 고통을 참지 못한 다카마사가 주저앉았다. "저런! 미안하게 됐구려. 내 투구 장식이 좀 길어서 말이오." 길지 않은 정적이 지났다. 피난민들이 있는 기슭에서 요란한 비명과 곡성이 울려 퍼졌다.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 겐타로 눈에 신 이 나서 조선인을 도살하는 한 떼의 아귀들이 들어왔다. 엔메이와 다카 도라는 일부러 못 본 척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멀어서 자세하지는 않지만 햇빛에 빛나는 칼과 붉게 물드는 흰옷은 너 무도 눈에 잘 뜨였다. 겐타로는 오오쓰쓰를 고쳐 쥐면서 자기도 곧 저 병사들처럼 사람을 죽이게 될 거란 걸 상기했다. 어차피 이건 전쟁이었 다.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 전쟁. 약한 마음 따위를 가져봐야 남는 건 약한 자의 슬픔뿐이었다. 오쯔키의 눈물과 시들어버린 육신에 대고 강해지기로 결심하지 않았던 가? 겐타로는 붉은 빛에 점점 흥분되는 마음을 가누기 위해 어금니를 으 스러져라 악물었다. = 해남현 언덕, 표헌 "아아악!" "엄마! 엄마!" 비명이 터지는 동안에도 역관 표헌은 꼼짝하지 못했다. 언덕 아래에서 지금 지옥도가 펼쳐지고 있었다. 표헌은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배에서 내린 왜병들이 언덕으로 올라오며 피난민들을 도륙했다. 칼에 맞아 쓰러진 엄마 품에서 우는 아이에게도 칼날이 비켜가지 않았다. 표 헌은 쓰러진 노인의 등과 허리를 마구 난도질하는 왜병의 광기에 휩싸인 웃음을 영원히 잊을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무기도 없고 대부분 노인과 여자, 아이들인 피난민들이 무작정 언덕 위로 도망쳐 올라왔다. 피난민들의 신음과 비명, 거친 숨소리가 아무 것 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한 표헌의 귀를 파고 들어왔다. 그러나 여기까지였 다. 언덕 너머 우수영 쪽에도 왜병 수백 명이 몰려오는 것을 본 피난민 들이 망연자실해 주저앉아서 울부짖었다. "뜻밖이야. 왜병들이 싸움 중에 이럴 줄은 몰랐는데? 승리에 대한 집 착이 대단하군." 야불수와 명나라 병정들은 그저 우두커니 구경만 하고 있었다. 피난민 들을 도와 왜병들과 싸울 마음은 전혀 없는 듯했다. 표헌이 애처로운 표 정을 지었지만 야불수는 고개를 흔들 뿐이었다. "우리보고 왜놈들과 창칼을 맞대고 싸우라니, 그게 가능한 소린가? 흐 음! 도망가려 해도 이제는 갈 곳이 없다." 안절부절못하는 표헌과 달리 야불수는 의외로 차분했다. 야불수는 푸 줏간에서나 쓸만한 두툼하고 넓적한 삭도削刀를 꺼내더니 손목을 이용해 한 손으로 빙빙 돌리고 있었다. 우수영 쪽에서는 연신 조총 소리가 이어졌다. 말과 노새를 탄 조선군 둘이 활을 쏘며 싸우고 있지만 이제 그들도 도망갈 곳이 없었다. 해협을 막고 있는 수군에게 도와달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양 대인!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어서 배로 피하십시오." 그러나 명나라 병사들까지 차분한 것은 아니었다. 병사들은 벌써 다리 하나씩이 언덕 아래로 통하는 길에 들어서 있었다. 그러나 야불수는 여 유만만인지, 아니면 포기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괜찮아. 전에 왜군 진영에 수시로 들락거렸으면서 겁내긴? 그건 그렇 고, 왜놈들한테 보일 적당한 패찰 같은 거 없나? 글이 쓰여 있으면 아무 거나 괜찮아." "패찰 같은 건 없고, 제게 서찰이 있습니다만." 병사가 서둘러 품에서 종이를 꺼내 바쳤다. 편지 내용을 대충 읽은 야 불수가 피식 웃었다. "하긴, 자네 같은 병졸이 살기에는 천국이겠지. 명나라 군복만 입고 있 으면 무슨 짓을 해도 조선인들이 못 말리니까. 됐어. 이걸로 충분해. 글 을 아는 왜병들이 별로 없으니까." 피난민들의 비명소리가 계속됐다. 그 소리는 점점 언덕 위로 올라오고 있었다. 하도 처참해서 표헌은 가슴을 쥐어짜는 듯했다. "표 통사. 자넨 왜 명나라 군대의 군량을 조선에서 떠맡은 줄 아나? 어허! 울지 말고." 울먹이던 표헌이 간신히 고개를 들었다. 야불수는 왜 수군이 둥그렇게 펼친 진형의 훨씬 뒤쪽에 따로 포진한 왜선 200여 척을 응시하고 있었 다. 그 배에는 왜병이 거의 없는 것을 보니 한 눈에도 군량운반선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천병天兵을 보내준 것만 해도 고마운데 군량까지 부탁하기는 미안해 서..." "원, 참. 전쟁을 몇 년이나 치뤘는데 조선에 군량이 어디 있겠나?" "그럼, 잘 모르겠습니다. 엎드려 하유를 기다리겠습니다." 표헌은 야불수가 갑자기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지금 도 비명소리가 하늘을 찔렀다. "장사치들의 욕심 때문이야. 전에는 명나라 장사치들이 산동에서 산 군량을 싣고 의주까지 배로 옮겼지. 그런데 그 전에 군량에 바닷물을 뿌 려. 그럼 알곡이 커지고 기름기가 자르르 흐르겠지?" 표헌의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그러자 그 표정 변화를 놓치지 않은 야 불수가 피식 웃으며 보충했다. "그래, 맞아. 바로 그 장사치들이 그만큼을 빼돌리는 거야. 의주에서 강화까지는 조선 뱃사람들이 옮기게 되어 있었지. 그런데 그때쯤이면 쌀 이 썩기 시작해. 냄새가 지독하지. 조선인들이 인수를 거부해도 명나라 관량관들이 묵살하기 일쑤지. 관량관들이 또 빼돌리거든. 양을 맞추려고 걔네들이 물을 더 타. 그리고 수송하는 도중에 썩거나 없어진 쌀은 조선 뱃사람들에게 물어내라고 해. 뱃사람들이 쌀이 있겠어? 그럼 나중에는 뱃사람들이 도망가지." 도로가 발달하지 못한 조선에서 가장 효율적으로 군량을 운반하는 길 은 바다에 있었다. 그러나 군량수송이 매번 이런 식으로 되자 전선에 도 착한 군량은 이미 썩어 말도 먹으려 하지 않았다. 조선의 뱃사람들이 다 시는 명군의 군량 수송에 나서지 않는다는 것도 심각했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결국 평안도 백성과 의병들이 천병의 군량을 등 에 지고 육로로 옮겼지요. 일이 고되고 사람들이 죽어 나자빠지는 등 아 주 처참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그래서 군량을 조선이 부담하도록 한 거야. 부패란 무서운 거 야. 쌀이 부패하든, 벼슬아치가 부패하든 말야." 표헌은 할 말이 없었다. 군량을 빼돌리는 장사치가 있고, 그것을 막으 라고 명나라 조정에서 보낸 관량관들이 한술 더 떠 군량 빼돌리기에 바 빴다. 불쌍한 것은 명나라 군대에 군량을 대느라 굶어 죽는 조선 백성들이었 다. 전쟁 다음 해인 계사년에 한때 17만 이상의 병력을 동원한 조선이 정유년에는 1만 명도 동원하지 못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즉 명나라 군대에 군량을 대느라 병력을 동원할 수가 없었다. "자네, 명군이 조선 땅에서 제대로 싸우는 걸 봤나? 병사들이 힘을 내 어 싸울 리가 없지. 원래부터 중국인은 싸움을 잘 못하지만. 하하하! 매 양 이런 식이니 명나라도 곧 망할 거야." 야불수가 큰 소리를 내어 웃었다. 웃음소리에는 허망함만이 가득했다. "그래. 같이 죽자." 그때 선비 두 명이 벌떡 일어서더니 대나무 지팡이에서 짧은 창포검을 뽑아들었다. 그 선비들 얼굴에 눈물자국이 진하게 남아있었다. "여보게, 젊은 처자. 나라가 이 모양이 돼서 미안하네." 선비 하나가 댕기머리 아가씨에게 말을 건넸다. 조금 전까지 처연한 얼굴로 해협을 바라보며 가야금을 뜯던 아가씨였다. 그런데 지금은 해협 에 떠 있는 판옥선 한 척에 눈길이 못 박힌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선비들의 표정에는 안쓰러움이 가득했다. 전쟁통에 시집도 못 간 노처 녀는 수도 없이 많았다. 그러나 목숨이 붙어있는 것만도 다행이라 할 수 있었다. 그나마 지금은 목숨 부지하기도 어렵겠지만. "자, 가자!" 도포 자락을 휘날리며 언덕 아래로 뛰어가는 선비들 뒷모습을 보며 표 헌이 한숨을 내쉬었다. = 거제1선, 안위 "저, 저것!" 언덕에서 피난민들이 지르는 비명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왔다. 안위가 안절부절못하며 방패판을 잡고 흔들었다. 칼을 뽑았다 넣었다, 활시위를 당겼다 놓았다 했지만 이 거리에서는 소용이 없는 일이었다. 당장 언덕 으로 뛰어가고 싶었지만 좌선에서 내린 군령은 요지부동이었다. "거제원은 판옥선을 지휘해야 하니 여기 계시오. 내가 가겠소." 장대 아래에서 들려온 소리에 놀라 안위가 방패판을 치우고 머리를 내 밀었다. 조라포만호 정공청이 쌍자총통을 들고 서 있었다. "무엇하려는 거요? 도망치려는 거요?" "후후! 싸워야 하지 않겠소? 나도 조선의 장수요." 안위는 정공청 말이 진심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오 늘 정공청이 한 짓을 보면 절대 그럴 수가 없었다. "뜻밖이구려. 저 피난민들 사이에 만호가 아는 이라도 있소?" "아, 많지요. 저 허름한 옷을 입은 할머니, 아주머니들도 다 내가 아는 사람이지요. 저 늙은이와 아이들도 다 내가 지켜야 할 백성이지요. 다 조 선 백성이 아니겠소? 당연히 봄꽃이도 알고 있지요. 푸헤헤!" 마음속을 들킨 것 같아 안위 얼굴이 시뻘겋게 변했다. 그러나 안위는 피난민들 틈에 봄꽃이가 있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조바심이 더 났지 만, 어쨌든 지금은 해협도 지키고 저 피난민들도 구해야 했다. "땅에 내려 피난민들을 구할 용사 있느냐? 백성을 구하는 싸움이다!" 정공청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그러나 아까 싸울 때 전투병력 대 부분을 잃은 거제1선이었다. 격군들 반이 올라와 잘 알지도 못하는 화포 를 잡고 있는 판이라 남는 병력이 있을 수 없었다. 그리고 피난민들을 구하고 싶어도 정공청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 군사들이 대부분이 었다. "정 만호를 도와 피난민들을 구할 사람은 어서 나서라! 정 만호가 싸 움에서 얼마나 용감한지는 전에 보았지 않느냐?" 안위가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그러나 칠천량패전 이전에는 수군에 겁 장이 없었고, 패전 이후에는 용감한 장수가 없었다. 아까처럼 정공청이 추태를 보이지 말라는 보장이 없었다. "정 만호가 너희들에게서 쌀 한 톨, 베 한 필 받는 것을 보았느냐? 얼 마 안 되는 녹봉도 다 너희 군사와 격군들을 위해 쓰지 않았느냐?" 안위의 말은 사실이었다. 정공청이 베 몇 필을 받고 군사를 돌려보내 거나 할 필요는 전혀 없었다. "난 원래 집안이 대대로 부자야. 토색질 따위는 안 해도 돼. 만호 벼슬 도 심심해서 그냥 운동 삼아 하는 거야." 정공청이 그렇게 말하며 키득거렸다. 그러자 고개를 끄덕이던 체탐인 두셋이 나섰다. 군관 김국도 기다란 맥도를 들고나섰다. 군졸들은 정공청 이 몸을 사리지 않고 돌격하던 석 달 전의 일을 어느덧 잊고 있었다. 안 위가 생각해도 그건 아득한 옛일 같았다. "거제원. 부탁이 있소. 내 마지막 부탁이겠지만 말이오." 정공청이 계단으로 올라오며 목소리를 낮췄다. 안위도 슬쩍 계단 몇 칸을 내려갔다. "보셨겠지만 통제사는 혼자서라도 싸울 사람이오. 통제사 입장에서 지 금 임금이 얼마나 밉겠소? 하지만 통제사는 백성들을 위해 싸우고 있 소." 정여립의 오촌조카로서 온갖 시련을 겪은 안위였다. 정공청이 굳이 '왕 을 위해 싸우지 않는다'고 강조할 필요는 없었다. 임금이 무조건적인 충 성을 강요하면서도 충신들을 도륙하는 동안, 무장들은 충성을 바칠 다른 대상을 찾고 있었다. 그 새로운 대상은 왕이 아닌 백성, 무장 스스로와 그 가족들이 포함된 뭇 백성이었다. "거제원. 통제사를 보호하시오. 내, 통제사가 좋아서가 아니오. 하지만 백성들을 살리고 통제사가 죽으면 백성들이 얼마나 미안해하겠소? 백성 들을 위해서라도 통제사는 반드시 살아야 하오." 안위는 통제사가 남방을 순시하며 군졸과 군기를 모으는 동안 있었던 일을 듣고 감격한 적이 있었다. 백성들이 살 길이 열렸다면서 통제사의 행렬에 참가하거나 쌀을 바치는 거야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 여겼 다. 그러나 낙안에서 노인들이 길가에 늘어서서 통제사에게 술을 바치면 서 자기 것을 받지 않으면 눈물을 흘리면서 권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남도의 민심이 확실히 어디에 있는지 절실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안위의 꿈을 위해서라도 통제사는 반드시 이 싸움에서 살아남아야 했 다. 안위가 손을 내밀어 정공청과 손목을 서로 꽉 잡았다. "알겠소. 내가 통제사 대신 죽어드리겠소." 사나이들끼리 마주친 눈빛이 뜨거웠다. (*동인녀들이 좋아할 장면이었 다. -_-;;) 그러나 언덕에서는 비명이 계속되고, 시간이 얼마 없었다. "그럼 나는 죽으러 가겠소이다. 잘 싸우시오." 정공청이 군관 김국 등을 이끌고 사후선으로 내려갔다. 다시는 볼 수 없을 사람들이었지만, 뜻밖에 몸놀림은 가벼웠다. "좌선에서 전진 명령입니다!" 기패관이 목소리를 드높였다. 곧 판옥선들이 앞으로 움직이기 시작했 다. 안위는 물끄러미 언덕을 바라보았다. 비명소리가 난무하는 가운데 하 얀 옷을 입은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안위가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 렸다. 1. 군인은 누구를 위해 싸우는가 (3) = 전라우수영1선, 김억추 "언덕에도, 우수영에도 왜군입니다. 피난민들이 죽음을 면할 길이 없을 것 같습니다." "뭐, 꼭 그렇지는 않겠다만..." 김억추와 김응추 형제는 피난민들이 학살당하는 것을 다른 군사들과 함께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언덕 가까운 곳에 있던 해남 전선과 평산포 전선에서 이따금 왜군을 향해 활을 쏘았지만 거리가 너무 멀었 다. 군사들이 피난민들에게 바닷가로 내려오라고 불러도 왜군에게 쫓기 느라 정신이 없는 백성들은 점점 언덕 위로 올라가기만 했다. "저 백성들 가운데 상당수가 바로 이 배에 탄 군졸들의 부모자식들입 니다. 구해줄 방법이 없을까요?" 김응추가 장대 아래에 늘어선 병사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애처로운 눈 길로 언덕과 장대를 번갈아 살피는 군사들 시선을 피하기도 쉽지 않았 다. 장대 아래에서 흐느낌이 번지는 동안 김억추가 우물쭈물했다. "저기, 거제1선에서 사후선을 띄웠으면 됐지, 뭘." "겨우 몇 명으로 저 많은 왜적들을 어떻게 상대하겠습니까?" 김억추가 곤란한 듯 투구를 벗고 머리를 긁적였다. 거제1선을 떠난 사 후선이 언덕 아래 해안선으로 내달리고 있었다. 그러나 사후선에 탄 사 람은 다섯 명에 불과했다. 김억추가 해남 전선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배에 탄 군사들이 언 덕을 향해 고함을 질러댔지만 배는 꼼짝도 않고 제자리를 지켰다. 김억 추 생각에는 현감 유형이 이 지역을 다스리는 수령이라는 핑계로 군사들 을 좀 보내주면 좋겠는데, 유형은 군령이 없이는 절대 움직이지 않는 고 지식한 사람이었다. 아까 김억추의 명령을 거스른 것은 유형에게는 상당 히 예외적인 경우였다. "유형, 이 개 같은 놈. 주인이 먹으라고 해야 먹는 진돗개 같은 놈!" 칭찬인지 욕인지 알 수 없었다. 씩씩거리던 김억추가 방패판을 활짝 열어 젖혔다. "군사들은 들어라! 너희들 마음은 알겠다. 하지만 우리는 수군이고, 주 상전하의 군대다. 신하된 도리로서 가장 먼저 임금을 지켜야 한단 말이 다. 울돌목이 무너지면 어떻게 되는지 알고 있겠지? 나라가 망한다. 너희 들도 크게, 넓게 보아라! 무조건 군령에 의해 움직여야 한다. 태산처럼 무겁게. 알겠느냐?" "쳇! 그 말이 군졸들한테 씨알이나 먹히겠수? 것도 하필 형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다니, 웃기는군요." 김응추가 군졸들의 심정을 대변했다. 그러나 김억추는 어떻게든 싸움 에 나서고 싶지 않았다. 그때 배영수 군관이 앞을 가리키며 장대를 향해 외쳤다. "수사 나리! 통제사 전선에서 군령입니다. 전군, 전진 명령입니다!" "끙!" "후후! 군령에 의해 움직인다면서요? 우헤헤!" 김응추가 배꼽을 잡는 동안 김억추는 통제사 좌선에서 휘날리는 깃발 을 보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통제사는 앞에 늘어선 왜선 수백 척을 향해 돌격을 감행할 모양이었다. "그래, 좋다. 여봐라! 우리 백성을 구하자. 백성은 곧 하늘이란 말도 있 지 않느냐? 당 군관! 우수영 길에 한 방 먹이게. 우린 백성들을 구한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었다. 전라우수사로서 관내 백성을 지킨다는 명분도 좋았다. 김억추가 명령하자 좌현에 늘어선 군졸들이 일 제히 화포를 돌렸다. 우수영 앞길에는 왜군들이 둥글게 만 대나무 방패 판을 들고 화살을 막으며 조선 기병 2명에게 차근차근 다가오고 있었다. "그 핑계로 공격에 참가하지 않겠다고요? 핑계 좋아 소 잡아먹겠소." 김응추가 말로는 비난했지만 김억추의 순발력 있는 잔머리가 존경스럽 다는 표정이었다. 통제사 좌선에서 전라우수영1선에 계속 깃발 신호를 보냈지만 기패관은 몇 번 김억추에게 보고하다가 지쳐 다음부터는 못 본 척하고 말았다. 판옥선들이 서서히 앞으로 전진하기 시작했다. "난 살고 싶다. 임금에게 충성하고, 그 충성이 정당한 평가를 받기를 바란다." "정말이요? 뻥 아니죠?" 김응추가 빤히 보면서 반문했다. 김억추는 시선을 돌려 해협을 빠져나 가는 판옥선들의 행렬을 살폈다. "정말이다. 뻥 아니다." - 뻥! 뻐벙! 그때 좌현에서 화포가 차례로 발사되었다. 차대전 두 발이 왜군 진영 중심으로 날아가 온통 헤집어놓았고, 놀라 흩어진 왜군들을 조란탄이 쓸 어버렸다. 판옥선 화포의 사정거리 안에 들었음을 깨달은 왜군들이 정신없이 달 아나기 시작했다. 부상자고 지휘체계고 뭐고 없었다. 눈이 뒤집힌 왜군들 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다시 화포 쏘는 소리가 울리자 놀라 넘어지고 자빠진 왜군들은 급한 나머지 네 발로 기어 달아났다. 조금 전까지 왜군 수백 명이 있던 자리 에는 전사자와 부상자들 이십여 명을 남긴 채 텅 비었다. 김억추가 혀를 차며 포를 쏜 군졸들을 나무랐지만 오늘 처음 쏜 것이 그 정도면 훌륭하 다 할 수 있었다. 기병 둘은 왜군들을 추격하지 않고 서둘러 언덕으로 올라갔다. 피난민 들이 위기에 빠진 것을 알아챈 것이다. 김억추는 말과 노새가 설마 저렇 게 경사가 심한 언덕을 오르랴 싶었지만 뜻밖에 잘도 올라갔다. 감탄사 가 절로 튀어나왔다. "앗! 대단하다. 고구려 산성 기병이다!" "척후군관 임준영입니다. 망아지 때부터 따로 키운 말이랍니다." 고구려인들은 망아지 때부터 편자에 긴 못을 박아 말을 길렀다. 그래 서 고구려 말은 땅을 박차고 오르는 힘이 강해 경사가 심한 산지도 쉽게 오를 수 있었다. 임준영은 임무 때문에 반드시 그런 말이 필요했다. 고구려인들은 평화시에는 평지성에서, 전쟁이 나면 근처 높은 산에 미 리 쌓아둔 산성에서 생활했다. 고구려 산성은 산세를 그대로 이용하기 때문에 굉장히 크고, 성벽은 말 서너 마리가 한번에 지나갈 정도로 넓었 다. 산성 방어전에는 보병 외에 기병도 동원됐는데, 적군이 집중 공격하 는 곳으로 기병이 짧은 시간에 이동하는 식으로 병력을 집중했다. 그러나 산성 하나만으로는 전략적 의미가 없다. 산성 수비군이 적을 고착시키는 동안 주변 다른 성의 기병이 적의 배후를 끊임없이 공격해 소모시켜야 한다. 만약 적군 주력이 산성을 우회하면 산성에서 나온 기 병이 적 후방에서 병참선을 끊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좋든 싫든 침략군은 고구려 산성을 하나씩 격파해야 했다. 고 려와 조선에서도 산성이 전쟁에서 큰 역할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쾌속 진군할 수 있는 기마부대는 단기전일 경우 보급에 대한 부담이 적다. 그 래서 몽골군이나 청나라의 기마부대는 산성을 우회하여 쉽사리 수도를 공격할 수 있었다. 만약 당시 산성에 기병이 배치됐다면 침략군의 수도 공략이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형님. 다른 배들을 따라가는 게 어떻겠습니까? 훗날 벌을 받을까 걱 정되기도 하지만, 우리 배 혼자 울돌목에 남아 있다가 집중공격 받을까 겁납니다. 아까 말씀하시길 거북선과 회령포 전선이 참가하면 이 싸움을 쉽게 이길 수 있다면서요?" 물끄러미 회령포 전선을 바라본 김억추가 동생에게 대답했다. "싸움에 이기는 것하고 위험한 것하고 무슨 상관이냐? 싸움에 이기고 내가 죽거나 다치면 아무 소용이 없지. 일단 살아남아야 임금께 충성을 바칠 것 아니냐?" "충신 났소." = 해남현 언덕, 정공청 정공청은 사후선에서 심지 길이를 각각 다르게 자른 다음 약선 구멍에 쑤셔 넣었다. 그 사이에 군관 김국과 정탐인 이순과 박담동, 박수환이 힘 껏 노를 저었다. 커다란 암초가 있는 곳마다 바닷물이 폭포수 떨어지듯 요란하게 굽이쳤지만 날렵한 사후선은 키 조정을 하지 않고 노만으로 방 향을 틀었다. 네 사람은 수군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들이었다. 정공청은 땅에 닿기 직전에 심지 여섯 개에 불을 붙였다. 사후선이 자 갈밭을 타 올라가는 충격이 가해지자 다섯 사람은 배에서 내려 달리기 시작했다. 군관 김국이 맥도를 휘두르며 정공청 바로 뒤를 따르고, 그들 뒤에서 정탐인들이 활을 쏘는 식이었다. 왜군들은 그 사이에 언덕을 상당히 많이 올라가 있었다. 바닷가에 있 던 피난민들은 주검이 되어 남았고, 위로 갈수록 난도질당한 시체가 많 아졌다. 저 멀리 작은 왜선 두 척이 바닷가에 서 있는 것은 정공청도 봤 지만 급한 것은 피난민들을 도륙하는 왜군들이었다. 가장 짧은 심지가 구멍에서 사라지려는 순간 정공청이 쌍자총통을 겨눴다. - 팡! 이미 주검이나 다름없는 여인을 창으로 계속 찌르던 왜병이 등에 맞았 다. 왜병은 한번 움찔하더니 풀썩 쓰러졌다. 왜병 둘이 이쪽을 바라보며 뭐라 외치는 순간 정탐인들이 활을 쏘았다. 한 명은 허리가 완전히 뒤로 꺾이고, 겨드랑이 근처에 화살을 맞은 왜병은 주저앉아 비명을 질렀다. "가자!" 정공청을 선두로 다섯 명이 언덕을 오르기 시작했다. 정공청은 심지와 땅과 왜군을 번갈아 보면서 뛰었다. 화살에 맞고 비명을 지르던 왜병은 김국이 휘두른 맥도에 목이 잘렸다. 저 앞에 세 명이 칼을 휘두르며 달 려왔고, 두 번째 심지는 거의 다 타 들어갔다. - 팡! 정공청이 겨눈 가운데 왜병은 맞지 않고 엉뚱하게 옆에서 달리던 두 명이 한꺼번에 맞았다. 가운데 왜병은 정공청 말고 다른 조총수가 있는 지 찾느라 두리번거렸다. 탄환이 한번에 두 발이나 나가는 걸 모르는 것 같았다. 그런데 탄환에 맞은 왜병들은 둘 다 치명상이 아닌지 상처를 한 번 살핀 다음 칼을 바로잡고 다시 뛰어왔다. 정공청이 다시 쌍자총통을 겨누자 달려오던 왜병들이 급히 멈춰 섰다. 방아쇠를 당기면 탄환이 나가는 조총으로 착각한 것이다. 바로 그때 화 살 세 발이 날아갔다. 굉음이 다시 울린 것은 그 직후였고, 아직 살아있 는 왜병이 무릎을 꿇은 채 칼을 휘둘렀다. 그러나 김국의 맥도가 훨씬 길었다. "빨리!" 정공청이 계속 위로 올라갔다. 길이 가팔라서 숨이 차 올랐다. 뚱뚱한 김국이 헉헉거리는 소리가 뒤에서 크게 들렸다. 왜병 열댓 명 정도가 피난민들을 난도질하며 꼭대기로 몰아가고 있었 다. 네 번째 심지가 타 들어간 순간 정공청이 서둘러 조준했다. 그러나 조준하기도 전에 탄환이 발사되었고, 그 직후 피난민들 사이에서 비명 하나가 터져 나왔다. 정공청이 눈을 질끈 감았다. 총소리를 듣고 왜군들이 이쪽을 향해 서로 뭐라 외치고 있었다. 왜병 들은 피난민을 버려 두고 이쪽과 싸울 준비를 갖췄다. 다행히 조총병은 없었다. "이야아아아!" 왜군 다섯 명이 동시에 칼을 들고 달려들었다. 그러나 심지는 아직 다 타지 않았다. 화살에 맞고 둘이 거꾸러지고, 셋이 정공청을 향해 날 듯이 뛰어왔다. 칼날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정공청의 위기를 본 이순과 박담 동, 박수환이 거의 동시에 비명을 질렀다. - 쨍! 시커먼 그림자가 하늘을 가리더니 김국이 나타나 허공에 기다란 호선 을 그었다. 김국이 칼을 막고 돌려 다른 왜병을 베는 사이에 정공청이 쌍자총통으로 첫 번째 왜병의 턱밑을 찔러 확 밀쳤다. - 팡! 뇌수가 왜병의 삿갓 뒤로 터져 나갔다. 마지막 심지가 거의 다 타자 정공청이 다른 왜병을 겨눴다. 풍뎅이 같은 투구를 쓴 왜장이었다. 그러 나 그 순간 왜장이 칼로 내리쳐서 탄환이 땅에 박혔다. 정공청은 칼에 맞아 퉁기는 반동 그대로 쌍자총통을 높이 휘둘러 왜장 의 투구를 내리쳤다. 조총과 달리 총통 종류는 묵직한 쇠뭉치와 같았다. 머리를 감싸쥐고 털썩 주저앉은 왜장을 김국이 뒤에서 찔렀다. 예리한 칼날이 배를 뚫고 앞으로 튀어나왔다. "백성들은 어서 바닷가로 내려가라! 통상 어른이 그대들을 보호할 것 이다!" 정공청이 소리를 지르자 정신을 차린 피난민들이 언덕을 우르르 내려 가기 시작했다. 언덕이 대충 비자 꼭대기에 남아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명나라 관복을 입은 자와 하급 벼슬아치로 보이는 조선인 하나, 그리고 창을 든 명군 세 명이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 짧은 칼을 든 선비 둘이 우뚝 서 있었다. 온 몸이 피 투성이가 된 채 왜병들을 노려보는데, 그 앞에 뒹구는 왜병 시체 하나는 선비들의 작품인 것 같았다. 그런데 바로 그 뒤에는 젊은 처자가 앉아 가야금을 키고 있었다. 정공청이 한눈에 그 처녀를 알아보았다. 이쪽을 노려보는 왜병들은 아직 열 명 넘게 남았다. 정공청은 텅 빈 쌍자총통을 버리고 환도를 뽑아들었다. 왜병들이 함성을 지르며 뛰어내 려오기 시작했다. 만만치 않은 싸움이 시작될 것 같았다. "끄아악!" 왜병 둘이 등에 화살을 맞고 땅을 굴렀다. 정공청이 화살이 날아온 곳 으로 고개를 돌렸다. 언덕 위에 말과 노새에 탄 사람들이 나타났다. 임준 영과 태귀생을 알아본 정탐인들이 환성을 지르며 연달아 화살을 날렸다. 그때 갑자기 왜병들이 바다를 가리키며 자기들끼리 뭐라 떠들었다. 그 러더니 정공청이 있는 곳을 피해 언덕을 급히 뛰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들을 향해 정탐인들이 화살을 날렸다. 왜병들이 배에 탈 때까지 둘이 더 쓰러졌다. 정공청은 의아한 눈으로 왜병들이 배에 타는 모습을 지켜 보았다. "헉! 헉! 죽는 줄 알았습니다. 무서워서가 아니라 숨이 차서요." 김국의 두리뭉실한 몸 전체에서 땀이 줄줄 흘렀다. 정공청이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자네, 날아다니던데, 뭘. 헉헉! 고마워." 숨을 돌린 정공청이 눈길을 돌렸다. 바다에서는 판옥선들이 해협을 나 와 왜선들이 형성한 학익진을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정공청이 숨을 한 번 고른 다음 언덕을 뛰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빠, 빨리 돌아가자. 우리 배에는 싸울 사람이 얼마 없어!" 역사전쟁소설 // 남해 // 3권 copyright (C) 2001 김경진 안병도 신재호 공저 업로드 김경진 (전쟁소설 데프콘 1, 2, 3부, 동해, 남북, 판타지 하늘길잡이 공동저자) * 고칠 점이 있으면 언제든 18번 오발탄 게시판에 올리시거나, 저나 안병도 님께 메일로 의견을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조선 ; 김경진 amraam07@hitel.net 일본 ; 안병도 031038@hitel.net 2. 불바다 (1) = 경상우수영 좌선, 우치적 "정공청이 피난민들을 구한 것 같습니다만, 역시 뻔히 드러나는 함정 이었습니다." 우치적이 씁쓸하게 말했다. 판옥선들이 움직이자 언덕에서 피난민을 학살하던 왜병들을 실은 왜선 두 척은 잽싸게 도망쳐 학익진 앞에 자리 를 잡았다. 해협 입구를 둘러싼 왜선들도 전투진형을 확실히 갖췄다. 조 선수군 입장에서는 강요된 싸움이었다. "지금이라도 떠날 것이지. 쯧쯧!" 통제사가 이제는 뒤로 멀어지는 언덕을 바라보며 혀를 찼다. 피난민들 이 돌아와 다시 그 언덕에 자리를 잡은 것이다. 가족을 잃은 피난민들이 주검 앞에서 곡을 했지만 나머지 대부분은 아까 그 자리에 앉아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피난민들은 조선수군을 싸우게 내버려두고 제 몸만 빼어 도망갈 뜻이 전혀 없는 것 같았다. 통제사는 그런 피난민들을 한동 안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항상 이기는 싸움만을 하기 위해 노력해온 통제사도 이번 싸움에는 자 신이 없어 보였다. 넓은 바다에서 싸우기에는 판옥선 숫자가 너무 적었 다. 그런 걱정을 읽은 우치적이 조심스럽게 통제사에게 말을 꺼냈다. "통상! 이제 전진할 필요가 없지 않겠습니까? 피난민들을 보호하면서 울돌목만 막아도 됩니다. 통상도 아까 그렇게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이 쯤에서 전진을 멈추시지요." 우치적이 좌선 앞뒤에 늘어선 판옥선들을 찬찬히 살폈다. 짤막한 화살 처럼 앞 진형은 거북선을 선두로 판옥선 네 척이 좌우로 늘어선 쐐기진 을 형성했다. 가운데에는 중군선과 좌선을 두고 뒤에는 다시 여섯 척으 로 이뤄진 쐐기진이 또 있었다. 옆으로 길게 늘어선 적 전열을 돌파하기 위한 진형이었다. 그러나 겨우 13척으로 이뤄진 첨자찰진은 너무 빈약했다. 해협 바깥에 서 기다리는 왜선은 자그마치 150척 가까이 되었다. 13척으로 저 두터운 진형을 뚫고 지나가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학 익진 뒤에는 200여 척이 넘는 또 다른 왜 수군함대가 진을 치고 있었다. "아닐세. 우리가 싸우지 않으면 왜적들이 계속 언덕에 병력을 보낼 걸 세. 이번 싸움에서 왜적들이 싸울 의지 자체를 부숴 놓아야 하네." 우치적이 통제사 얼굴을 한번 쳐다보고 말았다. 그게 가능하지 않을 것 같다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었다. 불안해하는 우치적에게 통제사가 물 었다. "회령포 전선은?" "잘 따라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회령포만호 민정붕이 도망간 사실은 알고 계십니까?" 회령포 전선은 뒷줄 오른쪽 바깥에서 두 번째에 배치되었다. 다행히 도망가거나 꾸물거리지 않고 단단히 진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것은 전 라우수사 김억추의 전선도 마찬가지였다. 좌선 장대에 올라선 변존서가 전라우수영1선의 장대를 향해 시위를 당기고 있었다. 방패판 뒤에 숨어 얼굴만 내민 김억추가 변존서를 향해 뭐라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들 리지는 않지만 욕설일 게 너무도 뻔했다. "알고 있네. 군관 배세춘이 지휘한다더군. 민정붕 그 겁쟁이가 도망갔 다니, 차라리 잘 됐네." 그러나 말과 달리 통제사는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다. 우치적도 걱정이 많았다. 이번 싸움은 회령포 전선 단 한 척에 대한 의존도가 너 무 높았고, 그 공격이 과연 통할지 알 수 없는 무척 불리한 도박이었다. 게다가 이 모든 열쇠를 쥐고 있던 민정붕은 도망가고 말았다. "중간에 무슨 일이 있더라도 무조건 계속 돌진하라. 단 한순간이라도 멈추면, 우린 다 죽는다!" 군관 송한이 아래 갑판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송한의 말처럼 이번 전 투의 핵심은 과감한 돌파에 있었다. 왜선들이 형성한 두터운 진형을 단 번에 뚫지 못하면 조선수군의 마지막 함대는 수많은 왜선들 사이에서 녹 아날 것이 분명했다. 우치적이 궁대에서 활을 뽑아들고 장대로 올라갔다. - 퍼벙! 맨 앞에서 달리는 거북선이 드디어 일본수군 함대 본진을 향해 화포를 발사했다. 새로운 함대를 상대로 싸움이 다시 시작되었다. = 도도 다카도라군 전군, 야마구치 "온다! 대열을 유지하라!" 철포조장 야마구치山口가 소 세키부네 갑판에 우뚝 서서 검을 빼들었 다. 커다란 파도가 덮쳐온다는 말이 딱 어울릴 것 같았다. 격류를 타고 해협에서 뛰쳐나온 조선수군을 제일 먼저 맞은 것은 학익진 앞에서 미끼 역할을 맡은 사에키군이었다. 고바야 2척과 소 세키부네 5척, 중 세키부 네 3척으로 구성된 작은 함대의 병사들은 그 해일 같은 파도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판옥선에서 벼락처럼 울리는 대포소리는 중천을 벌써 지나 서쪽으로 줄달음질 치는 태양과 어울려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정확히 뭔지 일깨워 주었다. 소 세키부네 한 척이 포탄 몇 발을 동시에 얻어맞고 제자리에서 빙글 돌았다. 단번에 무너진 다락 위나 아래에서 싸울 수 있는 자는 별 로 없는 것 같았다. 추진력을 상실한 소 세키부네는 거센 물살에 떠밀려 본진 쪽으로 흘러가며 조금씩 가라앉았다. "가마에!" 야마구치 철포조가 요란한 소음 아래에서 반격을 개시했다. 검은 색 총구 8개가 일렬로 나란히 서고, 그 위에 철포병들의 침착한 시선이 얹 혔다. "하나세!" 노리쇠의 쇳소리가 철커덩거리며 화승 끝을 물고 있는 집게를 불접시 에 내려놓았다. - 타타탕! 흰 연기가 자욱하게 솟아오르며 탄환 여덟 발이 허공을 갈랐다. 거대 한 모습을 드러내며 이 배를 덮쳐오는 거북선에 탄환이 모조리 명중했지 만 작은 상처 하나 받지 않은 듯 거북선은 똑같은 움직임으로 다가왔다. "장전!" 철포조장 야마구치의 상기된 고함소리가 탄환이 발사된 직후의 공백을 채웠다. 뒤에서 대기하던 궁병들이 커다란 활에 긴 화살을 매겼고, 철포 병들은 배운 대로 장전을 계속했다. 아무도 왜 싸우는지 묻지 않았다. 그 런 것을 묻기에는 이미 너무 늦었다. - 콰앙! 우지끈! 세키부네 바로 옆에 떠 있던 고바야 한 척이 사람 머리 만한 철환과 통나무 화살에 직격당했다. 그 직후 고바야는 오른쪽으로 크게 방향을 틀다가 뒤집혀버렸다. 배가 옆으로 기울어지는 바로 그때 총소리가 울렸 다. 배가 뒤집혀 바닷물에 거꾸로 처박히는 그 순간까지 철포병들이 총 을 잡고 노리쇠를 당긴 것이다. 차가운 바닷물이 화승에 붙은 불꽃을 꺼뜨릴 때 철포병들의 목숨도 빨 아들였다. 하지만 아무도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마치 큰 기계의 부속품 처럼 아무도 불만이나 공포를 표현하지 않았다. 고막을 터뜨릴 듯 울리 는 폭음과 연기, 불꽃이 전투에 참가한 모든 이들의 감정을 흡수해버렸 다. - 쿠웅! 빠지직! 바로 이 배에 묵직한 철환이 연달아 날아들었다. 그 순간 역류에 맞서 필사적으로 움직이던 노 40여 개가 한꺼번에 침묵을 지켰다. 배가 점점 기울어지며 파도에 떠밀려 뒤로 흘러갔다. 배가 방향을 틂에 따라 장전 을 끝낸 철포 8개가 거북선을 향해 천천히 돌아갔다. "우욱!" 막 발사명령을 내리려던 철포조장이 옆구리에 화살을 맞고 몸을 움츠 렸다. 발사명령을 기다리던 철포병들은 조장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일 제히 방아쇠를 당겼다. "다시 장전!" 피가 흐르는 옆구리를 움켜쥔 야마구치는 결코 지휘를 포기하지 않았 다. 죽을 때 죽더라도 최대한 적에게 피해를 입히는 것이 선봉인 전군의 역할이다. "겨냥!" 세 번째 장전을 마친 야마구치 철포조가 가지런히 총구를 세웠다. 그 러나 배에 물이 들이차면서 마구 흔들리자 조준이 엉망이 되었다. 배가 제멋대로 방향을 바꾸자 야마구치 눈에 학익진을 형성한 같은 편 배 백 여 척이 들어왔다. 하지만 이곳에서 싸우는 사에키군은 작은 배 단 10척 으로 거대한 조선 판옥선 13척을 상대해야 했다. 조선함대의 선두는 무 섭기로 유명한 바로 그 장님배였다. "쏴라! 제기랄!" 명령 뒤에 욕설이 따라붙었다. 화살을 뽑으며 명령을 내린 조장 야마 구치의 고통에 찬 욕설이 섞인 것이다. 몸을 뒤로 돌린 여덟 명이 일제히 방아쇠를 당겼을 때 뜨거운 바람이 확 하고 불어왔다. 무수한 돌과 작은 화살로 이루어진 바람이 배를 덮친 것이다. 그것이 야마구치가 새로 내뱉은 욕설과 함께 철포병들을 휩쓸어버렸 다. 야마구치 철포조는 모두 종잇조각처럼 뒤로 날아갔다. 허공을 날던 전립 몇 개가 그들이 있던 자리에 떨어져 나뒹굴었다. = 회령포 전선, 배세춘 군관 배세춘은 직접 수레를 돌려 신중하게 방향을 잡았다. 통제사 좌 선에서 다급하게 공격 방향을 지시하고 있었다. 바로 앞에서 무너지는 작은 왜선들이 아니라 저 멀리 떨어진 왜군의 학익진에서 가장 두터운 곳, 눈이 어지러울 정도로 갖가지 깃발이 현란하게 나부끼는 곳이 목표 였다. 그러나 배세춘은 수레와 왜선들을 번갈아 보다가 땅이 꺼져라 한탄했 다. 자신이 없었다. 잘못하면 아군 판옥선에 맞을 것 같아 더 불안했다. 왜선들은 꼼짝하지 않고 판옥선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번도 쏴본 사람이 없다니." 갑판에는 새까맣게 칠한 신기전틀 화차 4대가 버티고 있었다. 바퀴 밑 에 나무를 대어 웬만한 파도에는 움직이지 않게 단단히 고정되었다. 각 신기전틀마다 대형 신기전 50개씩이 장전되었고, 짧은 시간에 타는 심지 가 길게 이어져 뒤에서 한꺼번에 묶였다. 배세춘이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횃불을 심지 묶음에 갖다대려 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수졸들 사이에서 비명이 튀어 나왔다. 왼쪽 방패판 사이로 시커먼 머리가 불쑥 올라왔다. 군사들이 기겁하며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용감한 수졸 둘이 창으로 찌르려고 다가갔을 때 귀에 익은 목소리가 다급하게 울렸다. "나야, 나! 음. 잘 있었나?" 전립을 뒤로 젖힌 사람이 가느다란 눈 두 개만 빼꼼 내밀고 주변을 살 폈다. 그를 알아본 수졸들이 창을 거두자 그 사람이 안심하고 상체를 내 밀었다. 아까 사후선을 타고 도망갔던 회령포만호 민정붕이었다. 배세춘은 황당했지만 현실을 인정하기로 했다. 칠천량 패전 때도 장수 들이 다 도망갔다가 얼마 있지 않아 이런 식으로 슬금슬금 나타났다. 조 선군에서는 흔한 일이라며 배세춘이 애써 끓어오르는 속을 다스리며 손 을 내밀었다. "놀랐습니다. 만호 어른은 왜 거기로 올라오셨습니까?" 민정붕이 그 손을 잡고 갑판 위로 뛰어 올라왔다. "어흠! 흠! 격군들이 날 알아보고도 문을 안 열어주더군. 자네들이 화 차를 제대로 못 다룰까봐 급히 돌아왔는데 말일세. 하하!" 민정붕이 호탕한 척 큰소리로 웃었지만 분위기는 썰렁했다. 아마 격군 들은 만호에게 욕을 퍼부었을 것이다. 문을 두들기는 만호에게 격군들이 창질을 안한 것이 그나마 다행인지, 아니면 불행인지 배세춘은 알 수 없 었다. "잘됐습니다. 빨리 오십시오." 배세춘이 급히 민정붕을 화차로 끌어당겼다. 돌아가는 꼴을 대충 파악 한 민정붕이 배세춘에게서 횃불을 빼앗아 들었다. "성질도 급하긴. 허! 그냥 대충 쏘려고 했어? 바보 같으니라구!" 배세춘은 할 말이 없었다. 문종 연간에 만들었다가 백년 넘게 무기창 고에 틀어박혀 썩어가던 고물이었다. 이것을 한 달 전에 꺼내 대충 고친 게 바로 이 신기전틀 화차였다. 쏴 본 사람이 있을 리가 없었다. 신기전이나 승자총통을 한꺼번에 쏠 수 있고 바퀴가 달려 이동하기 편 리한 신기전틀과 총통틀은 문종이 만들었다 해서 문종화차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고, 실전에서 사용됐다는 기록이 많다. 문종, 성종 연간에 화차 를 많이 만들어 남변과 북변의 여러 진에 배치했는데, 정작 임진왜란에 서는 화차가 사용됐다는 기록이 없다. 변이중이 제작해 행주대첩에서 대량으로 사용됐다는 것도 공식기록은 아니다. 당시 변이중이 제작한 것은 화차가 아니라 소가 끄는 수레에 병 사들이 탄 공성용 도구에 불과하다. 행주대첩 직전에 죽산성을 공격하던 변이중군은 왜군이 수레에 화공을 가해 태우자 큰 피해를 입고 패하고 말았다. 조선수군이 해전에서 신기전을 사용해 왜선을 불태운 기록은 여러 번 있지만 임진왜란 때는 다만 연락용으로 썼다는 기록이 남아있을 뿐이다. 그리고 화차를 판옥선에 실어 왜선을 향해 신기전을 한꺼번에 쐈다는 기 록은 전혀 없다. 그러나 각 진에는 그때까지 화차가 남아있었고, 조선수 군이 해전에서 사용했을 개연성은 충분하다. "배를 옆으로 빼! 우리편한테 뒤집어씌울 참이야?" 민정붕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혼이 나간 배세춘이 서둘러 도훈도에게 지시했다. 배가 첨자찰진에서 나와 다른 판옥선들에게서 적당히 떨어지 자 민정붕이 나무통에서 신기전 하나를 뽑아 들었다. "화차라고 해서 특별할 거라고 생각하지마. 하나 짜리 신기전하고 똑 같아. 일단 대신기전 한 발을 먼저 쏜다." 민정붕이 갑판에 따로 받침대를 세우고, 신기전 하나를 그 위에 얹었 다. 신기전틀이 갑판과 이루고 있는 각도와 같았다. 배세춘은 민정붕이 하는 꼴을 차분히 지켜보았다. 저래 보여도 민정붕은 수군만호로서 5년 동안 수많은 왜적을 섬멸한 역전의 용장이었다. 배세춘이 직접 본 적은 없지만 민정붕 말로는 그렇다는 것이다. 민정붕이 심지에 불을 놓자 곧 화살촉 밑에서 불꽃이 시뻘겋게 일어났 다. 순간적으로 배세춘은 신기전이 불발이라고 착각했다. 날아갈 기미가 안 보였기 때문이다. - 삐유우! 날카로운 소리에 배세춘이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신기전이 시뻘 건 불꽃을 내뿜으며 하늘로 날아올랐다. 뒤로 기다란 연기를 끌고 한참 동안 날아간 신기전은 왜선들이 빽빽하게 늘어선 바로 뒤로 사라졌다. "무상! 얼마나 떨어졌나?" "적진에서 120보 뒤, 적 대선에서 50보 앞에 떨어졌습니다!" 돛대 위에서 선두무상이 소리를 질렀다. 불쌍한 선두무상은 찬바람이 사정없이 몰아치는 돛대 위가 전투위치였다. "좋아! 화차를 세 칸쯤 더 낮춰!" "한 칸이 아니고 세 칸입니까?" 민정붕이 지시하자 당장 배세춘이 반문했다. 배세춘도 전에 신기전을 쏴봤는데, 그 각도라면 신기전이 왜선들 앞에 떨어질 우려가 있었다. 그 러나 민정붕은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 저었다. 화포장들이 갑판에 놓여진 수레 손잡이를 뒤로 조금 뺐다. 삐거덕거리 는 소리를 내며 틀에 빽빽하게 끼워진 신기전들이 화살촉을 조금 아래로 내렸다. 판옥선 이물에서는 여장과 방패판이 치워지고 수졸들이 일제히 뒤로 물러섰다. "좌선에서 어서 발사하라고 성화가 심합니다!" 기패관이 악을 썼다. 그러나 민정붕은 화차를 손으로 꼭 잡은 채 왜선 들을 쏘아보았다. 배세춘이 보기에 만호는 왜선들과의 거리를 가늠하고 있는 것 같았다. "조금 더 가서 쏜다. 아직이야! 조금 더. 준비!" 민정붕이 심지 뭉치에 천천히 횃불을 가져가며 외쳤다. "불을 놓아라!" 심지 뭉치에 불이 붙자 심지 50개가 퍽퍽거리는 소리를 내며 일제히 타 들어갔다. 그리고 불이 신기전 약통에 닿자 시뻘건 불길이 연달아 뒤 로 뿜어져 나갔다. - 삐유우우! 삐유우~ 추추추추! 판옥선 갑판이 한순간 하얀 연기에 온통 휩싸였다. 불꽃이 계속해서 짙은 연기 속으로 쏘아져 나갔다. 신기전 200발이 다 날아가기까지 엄청 난 시간이 걸린 것 같았지만, 그건 배세춘의 착각일 뿐이었다. "장전!" 민정붕의 외침에 배세춘이 간신히 정신을 추스렸다. 군졸들이 화차에 우르르 몰려들었다. 배세춘도 장전을 도우려고 달려가다가 크게 휘청거 렸다. 엄청난 소음에 놀란 몸이 잠시 균형을 잡지 못했다. "만호 어른! 제대로 맞았을까요?" 신기전틀에 신기전을 꽂으며 배세춘이 악을 썼다. 그러자 매캐한 연기 속에서 콜록거리던 민정붕이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나도 몰라! 여기서는 안 보이잖아. 빨리 장전이나 해!" = 하치스카군 쥬군, 오가사하라 마모루 - 꽈직! "으윽!" 쥬군 대장 오가사하라 마모루小笠原 守가 비틀거렸다. 판옥선들이 드 디어 학익진을 향해 포탄을 날리기 시작했다. 기다란 통나무 화살이 날 아와 다락에 박히자 다락 한쪽이 무너져 내렸다. 그때 전방을 보고 있던 병사들이 일제히 소리를 질렀다. "뭐, 뭐냐?" "불이다! 우와아아!" 어린애들처럼 신기해하는 음성이 아니었다. 하늘을 뒤덮은 불꽃 수백 개가 일제히 날아왔을 때 일본 병사들이 지른 절망적인 비명이었다. 노랗고 붉은 불꽃들이 연기와 함께 솟구치는 모습은 확실히 장관이었 다. 만일 지금 이 자리가 전쟁터가 아니고 저 불꽃들이 아름다움만을 남 기고 사라진다면 일본수군들은 평생 잊지 못할 기억을 가슴에 담게 되었 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 불꽃은 열기를 가득 머금은 채 사람들에 게 죽음의 공포를 안기며 왜선에 떨어졌다. 이 배에도 그 불꽃들이 뜨거운 미소를 지으며 날아들었다. 약간 오른 쪽으로 비껴선 배의 뒤쪽에 불꽃 하나가 명중하며 폭음을 냈다. 그 직후 부하들의 것이 틀림없을 날카로운 비명이 이어졌다. "엎드려!" 마모루는 짤막하게 소리치며 앞장서 엎드렸다. 조선군이 쏘는 화약무 기는 일본군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것이 많았기에 이번에 날 아온 것들이 도대체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는 지 몰랐다. 어쨌든 일단은 맞지 않아야 안전할 수 있었다. - 삐유우우우! 바람 가르는 소리를 내며 마모루의 등뒤로 불꽃 서너 개가 떨어졌다. 일어나서 살펴보니 그것은 기다란 화살이었다. 보통 화살은 그냥 꽂히는 것으로 끝났는데 이번 화살은 촉 밑에 화약통이 매달려 있었다. "앗! 뜨거워!" 고물 쪽에서 미처 화살을 피하지 못한 병사가 울부짖었다. 커다란 화 살촉이 팔을 관통하고 병사를 넘어뜨린 다음 갑판에 깊이 박혔다. 화약 통 뒤에서는 불꽃이 계속 뿜어져 병사는 화살을 뽑지도 못하고 잠시 버 둥거렸다. - 푸학! 갑자기 화약통에서 불길이 일어나더니 병사의 얼굴을 감싸버렸다. 그 병사는 불꽃 속에서 짐승 같은 비명을 한번 더 지르고는 아직도 지글거 리며 타는 얼굴을 갑판에 뉘였다. "신기전이다! 모두 화재에 주의하라!" 마모루가 그 화살의 정체를 파악하고 외쳤다. 그렇지만 맞고 나서는 이미 늦은 말이었다. "불이야!" 돛을 비롯해 신기전이 박힌 곳 주위에서 일제히 불이 일어났다. 화공 을 막기 위해 미리 배 곳곳에 뿌려둔 물기도 한낮의 햇빛에 바싹 말라버 린 다음이었다. 잘 마른 나무토막에 지나지 않는 배는 삽시간에 타올랐 다. "발도족경조! 궁병들은 불을 꺼라! 철포조는 반격하라!" 아무리 용감한 자라도 배에 불길이 옮으면 누구든 불안해하기 마련이 었다. 마모루는 신속히 진화를 지시하며 상황을 이끌어나가려 애썼다. 여 유 있게 행동하는 대장 앞에서는 병사들이 함부로 사기를 떨어뜨리는 짓 을 할 수 없다는 것이 마모루가 배운 병법의 하나였다. 그래서 바로 등 뒤에서 타오르는 불길이 몸에 느껴졌지만 마모루는 내색도 하지 않았다. "안됩니다! 불길이 잡히지 않습니다!" 물통을 들고 와서 바닷물을 퍼붓던 병사가 얼굴을 감싸며 비명을 질렀 다. 문제는 신기전이 이 배에 너무도 많이, 그것도 한꺼번에 날아왔다는 점에 있었다. 병사들이 바닷물을 떠서 불을 끄려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화끈하게 타오르는 불길이 점점 배 전체로 번져갔다. 더구나 무너진 다락 안에서 철포를 쏘던 병사들도 신기전이 일으킨 불과 나무가 타면서 뿜는 연기 때문에 극심한 혼란상태에 빠졌다. "뜨거워! 뜨거워!" 갑옷과 몸이 불에 타며 다락 안을 미친 듯이 뛰어 다니던 철포병이 동 료들에게 사정했다. "살려줘! 빨리 불을 좀 꺼 줘! 제발!" 하지만 그 병사가 몸에 매단 화약주머니를 보고는 아무도 접근하지 않 았다. 섣불리 구해주려 다가섰다가 화약이 터지면 같이 죽을 판이었다. 철포대장조차도 멀거니 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그 모습은 마침내 화약주 머니가 터져 그 병사가 산산조각이 난 고기토막으로 변하기까지 계속됐 다. "우욱!" 그런 모습은 또 다른 연쇄반응을 낳았다. 자기에게 튄 시뻘건 살점을 치우던 병사 몇이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토하기 시작했다. "불길을 잡으란 말이다! 불길을!" 마모루가 병사들에게 발길질을 하며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부장을 비 롯해 몇몇 병사들만이 바닷물을 퍼다 열심히 끼얹을 뿐이었다. 명령이 먹히는 인원은 살아남은 인원의 반도 안됐다. "바보 같은 놈들! 여기서 살아남으면 너희들을 모조리 죽여버리겠다!" 스스로 생각해도 전혀 현실성 없는 말을 내뱉으며 마모루는 손수 나무 통을 집어들었다. 이젠 적과 싸우는 게 문제가 아니었다. 배 안에 마구 번지는 불길을 잡든지 아니면 배를 버리고 바다에 뛰어들어야 하는 선택 을 강요당하고 있었다. 그러나 불길을 잡는 병사라고 조선군이 봐주지는 않았다. 불을 끄려고 애쓰던 병사들이 옆과 뒤에서 날아오는 화살과 돌에 맞아 하나씩 바닥에 엎어졌다. 자기 배의 불길을 잡는데 온 힘을 쏟아야 하는 마모루에겐 이 미 중군 전체를 지휘할 여유나 능력이 없었다. 마모루는 중군 앞쪽에 있는 사이무라齊村군도 분명 같은 처지일 거라 고 생각했다. 뭔가 불안한 생각이 뇌리를 스친 순간이었다. "메구라부네가 지나갑니다! 조선군에게 돌파 당했습니다!" "뭐야? 돌파?" 아직 살아있는 관측병이 상황을 보고한 순간 마모루는 나무통을 던져 버렸다. 3겹으로 된 학익진에서 하치스카군의 중앙부는 전군과 중군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후군은 오른쪽에 치우쳐 해안과 접해 있었다. 전군과 중군이 돌파 당한다면 그 뒤는 바로 이에마사가 탄 어립선이 있는 본진 이었다. 과연 마모루 눈에 들어온 것은 거북선이 앞장서는 가운데 화살 모양으로 아군의 중앙을 돌파하는 조선수군의 모습이었다. "이에마사 님이, 주군이 위험하다! 돌파하도록 놓아두지 마라! 막아!" 마모루는 불을 끄는 동안 포기하고 있던 함대지휘를 다시 시도했다. 그러나 주위를 둘러본 마모루는 힘없이 고개를 떨어뜨렸다. 신호를 전달 해 줄 병사도 무사도 없었다. 불길을 잡다가 화살에 맞아 힘없이 쓰러져 간 시체들 가운데서 마모루 혼자 소리치고 있었던 것이다. 등에 따끔한 통증이 느껴졌다. 화살이 꽂힌 것이다. 죽음이 다가온 것 을 직감한 마모루는 그 화살을 뽑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마모루는 다시 있는 힘껏 소리쳤다. "이에마사 님! 위험합니다! 어서 후퇴를!" 그 소리를 들었는지 멀리 보이는 이에마사의 어립선에서 구원을 요청 하는 신호기가 황급히 올라갔다. 그리고 그 신호를 보고 있는 마모루의 몸을 배 전체를 덮은 불길이 통째로 삼켜버렸다. 역사전쟁소설 // 남해 // 3권 copyright (C) 2001 김경진 안병도 신재호 공저 업로드 김경진 (전쟁소설 데프콘 1, 2, 3부, 동해, 남북, 판타지 하늘길잡이 공동저자) * 고칠 점이 있으면 언제든 18번 오발탄 게시판에 올리시거나, 저나 안병도 님께 메일로 의견을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조선 ; 김경진 amraam07@hitel.net 일본 ; 안병도 031038@hitel.net 2. 불바다 (2) = 발포돌격선, 나대용 - 끼드드드득! 꿍! 따다다닥! 딱! "타공! 타고오옹! 중군선과 좌선이 계속 따라오는가? 좌선 말이야!" 초조해진 나대용이 뒤로 절반쯤 걸어가며 외쳤다. 포성과 총성이 뒤섞 여 엄청나게 시끄러웠다. 그리고 거북선이 왜선을 밀어붙이며 옆구리를 찌그러뜨리는 소리는 사람 신경을 거슬릴 정도로 높았다. 고물을 맡은 타공이 뭐라고 대답했지만 나대용에게는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좌선 말씀입니까? 예! 따라오고 있습니다!" - 퍼벙! 화포 쏘는 소리 사이로 타공이 악을 썼다. 그 사이에도 총탄이 거북선 에 우박같이 쏟아지고 있었다. 가끔 포문 틈으로 총탄이 들어와 화포에 맞고 튀거나 나무에 박혔다. 나대용이 타공을 밀쳐내고 뒷문 틈새로 주위를 살폈다. 보이는 것은 온통 불바다였다. 불덩이가 물위를 타고 다른 왜선으로 너울너울 날아가 새로운 불길을 만들었다. 그 불타는 왜선들을 판옥선들이 밀어붙이면서 빠져 나오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뭐 좋은 게 있다고 여기로만 몰려드나?" 나대용이 투덜거렸다. 왜선들은 진형이 깨지는 것을 막으려는 듯 이쪽 으로 집중적으로 몰려왔다. 왜선들이 우글거리는 근처 바다에는 바늘 꽂 을 틈도 없을 정도로 붐볐다. "아악!" 맨 마지막 우변 7노를 젓던 격군 하나가 탄환에 맞아 비명을 질렀다. 옆구리에서 시뻘건 피가 펑펑 솟았다. 그러나 다른 격군들은 부상자를 돌볼 겨를이 없었다. 부상을 입더라도 노를 저을 수 있는 자는 계속 젓고, 도저히 저을 수 없는 자는 기어서라도 혼자 힘으로 선실에 들어가 누워야 했다. 그 격군 은 동료들 어깨를 짚고 기둥을 잡아 간신히 통로로 걸어나와서는 천천히 주저앉았다. 선실로 갈 힘도 없고, 눈살을 찌푸릴 힘도 없는 것 같았다. "계속 노를 저어! 저어!" 나대용이 숨을 거칠게 몰아쉬는 격군의 어깨를 한번 잡아주고는 다른 격군들에게 소리를 질렀다. 조총을 든 모든 왜병들이 이 거북선에 집중 한 듯했다. 두터운 참나무 방패판과 거북등딱지에 탄환 박히는 소리가 마치 여름날 장대비가 기와지붕을 때리는 듯했다. 그러나 나대용은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적의 화력이 거북선에 집중될 수록 뒤를 따라오는 아군 배에 희생자가 적어진다. 격군들이 죽을힘을 다해 노를 저었다. "쏜다! 우변 3, 4노 피해!" 화포장이 소리를 지르자 격군들이 노를 놓고 일제히 통로 쪽으로 물러 섰다. - 뻥! 밧줄에 묶인 당차가 요동을 치고 갑판 안에 하얀 연기가 확 들어찼다. 격군들이 뛰어가 다시 노를 잡았다. 노는 좌우에 7개씩인데 노 사이사이 에 화포가 몇 개 있어 화포를 쏠 때는 주변 노꾼들이 자리를 비켜줘야 했다. 포격을 따로 명령할 필요가 없었다.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이 적선이었 다. 포수들은 멀쩡한 왜선을 골라 포를 쏘았다. 절반쯤 부서지거나 불에 타고 있는 왜선들은 거북선 2층에서 해결할 것이다. 나대용이 사다리를 타고 2층에 머리를 내밀었다. 군졸들이 앉아서 열 심히 불화살과 승자총통을 쏘아대고 있었다. 조용히 드러누운 군졸 몇이 보였는데, 이렇게 시끄러운 곳에서 잠을 자는 것 같지는 않았다. 나대용 은 그 군졸들이 단지 부상만 당했길 빌며 아래 갑판으로 내려왔다. "으아악! 까아악!" 나대용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천장에서 들려온 비명소리였다. 왜병들 이 거북선 등으로 기어올라갔다가 꼬치처럼 꿰인 채 비명을 지르는 모양 이었다. - 쿠웅! 끼! 뜨! 뜩! 뜩! 도훈도가 충돌 경고를 하지 않았는데 거북선에 충격이 왔다. 정면에서 부터 부딪힌 것이 아니라 왜선이 거북선 측면에 스스로 부딪쳐온 것 같 았다. 중심을 잃고 잠시 비틀거린 나대용이 유달리 높은 소리에 눈을 찌 푸리며 왼쪽을 내다보았다. 거북선이 밀어붙이고 있는 왜선은 반대쪽에도 왜선 서너 척이 빽빽하 게 붙어있어 중간에서 꼼짝 못한 채 조금씩 찌그러지고 있었다. 부서진 나무궤짝 같은 갑판 안에서 노를 젓던 왜인들이 아수라장 속을 정신없이 뛰어다녔다. 그들 머리 위로 부러진 통나무와 판자, 각종 무기와 심지어 죽거나 다친 왜병들이 마구 쏟아져 내렸다. - 끼기긱! 우르릉! 꽈지직! 꾸당! 눈앞에 있던 모든 것이 무너져 내렸다. 조금 전까지 왜선이 있던 곳에 서 배는 사라지고 그 대신 물위에 떠있는 부서진 나무판자 무더기 사이 로 왜병 서너 명이 간신히 머리를 내밀었다. 왜선 한 척이 통째로 붕괴 된 것이다. "적진을 돌파했다!" 전방을 주시하던 도훈도가 우렁차게 소리를 질렀다. 나대용이 이물로 뛰어가서 보니, 과연 갑자기 앞이 확 트였다. 그런데 깃발이 가득 휘날리 는 커다란 누각선이 저 앞에 떠 있었다. 그리고 그 주변에 있던 왜선들 이 거북선으로 몰려왔다. 무엇을 뜻하는지 분명했다. "저 배, 적 대장선이다. 전면 쏘고 우변 빨리 장전해! 타공! 좌로 조금 꺾어! 그래. 왼쪽!" 나대용이 손짓을 섞어 여러 명령을 동시에 내렸다. 천자총통 두 발이 차례로 발사되고, 미르 머리에서 현자총통이 적 대장선을 노리고 발사되 었다. 첫 발은 적 대장선에 명중했지만 두 발은 다른 왜선들이 몸을 던 져 막았다. 거북선은 호위선들을 몸으로 밀치면서 적 대장선으로 쇄도했다. 주변 왜선들에서 조총탄과 함께 주먹만한 탄환이 마구 날아들었다. 격군과 포 수 서넛이 거의 동시에 픽픽 쓰러졌다. "우변 화포 쏘아! 계속 쏴 갈겨!" 목이 쉬어버린 나대용의 명령에 따라 화포가 차례로 발사됐다. 격군들 이 통로로 우르르 몰려나왔다가 차례로 돌아갔다. 마지막 7노 격군들이 제 위치에서 노를 잡은 순간 나대용은 엉망이 되어 오른쪽으로 기울어진 적 대장선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거북선 우측에서 진행하던 조방장 배 흥립의 배가 적 대장선 오른쪽을 지나가며 포문을 열기 시작했다. 판옥 선에서 쏜 불화살이 파란 하늘을 가득 채웠다. "멈추지 말고 전진! 계속 전진하라. 적 대장선은 다른 판옥선들에 맡기 고 계속 전진이다. 우리편 후미가 보일 때까지 계속 전진!" 나대용이 격군들에게 소리를 지르는데 고물에 있던 타공이 달려와 호 들갑스럽게 보고했다. 원래 까만 얼굴이 연기에 그을려 새까맣게 되었다. "나리! 좌선이 왜선들한테 걸렸습니다! 못 빠져 나왔습니다!" "뭐야? 그럼 중군선은? 중군선에서는 지금 어떤 깃발이 올랐나?" 나대용이 고물로 뛰어가다가 멈춰 서서 함께 통로를 뛰던 타공에게 물 었다. "중군선은 일단 빠져 나왔습니다. 방향을 돌릴깝쇼? 좌선을 구해야 하 지 않겠습니까?" 나대용은 순간 오만 가지 나쁜 예감이 들었지만 원칙대로 하기로 했 다. "안돼! 계속 전진해서 진형을 갖추고 그곳으로 다시 돌진한다!" = 도도 다카도라군 어립선, 겐타로 "이에마사 님을 구원하라! 어서!" 하치스카 이에마사의 어립선에서 보낸 구원요청은 즉각 반응을 가져왔 다. 모든 배들이 제 위치를 버리고 이에마사의 어립선으로 움직이고 있 었다. 비교적 가까이 있던 도도 다카도라의 어립선도 곧장 호위선들을 이끌고 오른쪽으로 뱃머리를 돌렸다. 침착한 지휘를 계속하던 다카도라 도 이에마사의 어립선이 위험해진 상황에서는 더 이상 냉정하지 못했다. 중앙을 돌파 당한 지금 위기를 타개할 수 있는 방법은 수세보다는 적 극적인 공세를 통해 조선군의 전진을 멈추는 길뿐이었다. 그리고 다카도 라 입장에서는 이에마사가 다이코 히데요시의 절친한 친구이자 부하인 하치스카 마사가쓰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싸움의 승패보다 먼저 생각해야 했다. 도도 다카도라는 차라리 자기 목숨을 내줄지언정 절대로 하치스카 이에마사를 잃을 수는 없었다. "저기 적선이다. 남만포를!" 다카도라의 명이 떨어지자 곧 육중한 진동이 배를 타고 올라왔다. 어 립선 뱃머리에 설치된 캘버린 포 3문이 일제히 불을 뿜은 것이다. 다른 함선들이 철포와 화살, 기껏해야 오오쓰쓰 같은 경화기밖에 없는 것에 비해 어립선에서는 비록 숫자는 적지만 당당히 중화기가 쏘아진 것이다. 조선군이 쓰는 철환과 비슷한 큰 탄환이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갔다. 원래라면 캘버린은 당연히 조선수군과 화포와 맞먹는 위력을 보여야 했다. 그러나 힘차게 쏘아진 그 포탄은 엉뚱하게도 조선수군이 아니라 어립선을 앞에서 호위하던 중형 세키부네에 명중했다. 등뒤에서 아군의 일격을 맞은 세키부네는 마치 앞뒤에서 적을 맞은 것처럼 어쩔 줄 모르 고 지리멸렬해졌다. "바보 같은 놈들! 뭐 하는 거냐!" 겐타로 머리위로 다카도라의 고함이 지나갔다. 캘버린 포를 조작하는 포수들을 질책하는 말이었다. "역시 대포만 있다고 해결되는 게 아냐. 제대로 된 포수들이 있어야지. 쯧쯧!" 엔메이가 혀를 찼다. 그러나 오오쓰쓰를 받침대에 걸어놓고 쏘려는 겐 타로에게는 들리지도 않았다. 겐타로는 서툰 솜씨로 오오쓰쓰에 화약을 재어놓고는 미리 붙여놓은 화승불을 입으로 분 다음 노리쇠에 끼웠다. 그리고는 구경 25밀리인 이 총을 온몸의 힘을 다해 지지하며 방아쇠를 당겼다. - 투앙! 강한 충격이 전해지며 화약연기와 탄환이 총구에서 뛰쳐나왔다. 배에 밧줄로 매달아 쏘는 48밀리 오오쓰쓰보다는 훨씬 약하겠지만 마치 주먹 으로 치는 듯한 충격이 어깨와 팔을 가격했다. 탄환은 멀리 판옥선을 향 해 날아갔고, 판옥선의 여장에 큼직한 구멍을 남겼다. "차라리 겐타로 자네가 훨씬 낫군. 남만인 밑에서 일하며 대포를 자주 쏴봤다고 자랑하는 자들인데 저 모양이네." 엔메이가 뭐라고 말했지만 겐타로는 정신없이 장전을 서둘렀다. - 타탕! 따당! 천수각에 있던 철포병의 사격이 이어졌다. 그들은 이에마사의 본진을 향해 나가는 판옥선의 옆구리를 노리고 맹공을 퍼부었다. 그 판옥선들을 어떻게든 저지하기 위해 어립선에서는 천수각을 비롯한 모든 곳에서 미 친 듯이 총과 포를 쏘고 있는 것이다. "조선군을 멈춰라! 멈추게 해라!" 안타깝게 외치는 부장 다카요시의 고함이 들렸다. 그러나 판옥선은 이 쪽은 신경도 쓰지 않고 이에마사의 어립선만 집중 공격했다. 겐타로는 탄환을 쑤셔 넣으며 조금 전에 하늘을 온통 뒤엎으며 이에마 사 함대를 강타한 불꽃들을 떠올렸다. 그 무기가 또다시 발사되어 이번 에는 하필 이리로 날아든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겐타로가 엔메이 의 소매깃을 잡았다. "엔메이 님! 저도 여기서 죽으면 극락에 갈 수 있겠습니까?" "사는 게 극락이야. 죽으면 나락이지. 하하!" 전혀 중 같지 않은 대답이 되돌아왔다. 겐타로는 머리를 휘휘 저으며 다시 오오쓰쓰를 겨눴다. = 경상우수영 좌선, 박재석 - 빡! 현측을 막은 두꺼운 참나무판이 뻥뻥 뚫려나갔다. 주먹만한 탄환이 노 젓는 갑판 안으로 날아들고, 화포에 맞아 튄 조총탄이 찡 하는 높은 소 리를 내며 사방으로 날아다녔다. 박재석은 있는 힘껏 노를 저었다. 그러나 아무리 저어도 앞으로 나아 가는 것 같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는 앞이 막혔다가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다시 앞으로 갈 수 있었다. 화포 쏘는 소리와 앞을 가로막은 왜 선에서 왜병들의 비명이 길게 이어져야 했지만. 그러나 이제는 그것도 여의치 않은 모양이었다. "좌우변 8노 승로!" 도노장이 내지른 고함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 다. 박재석은 다른 격군들과 함께 잽싸게 노를 들어올려 선실에 걸었다. "빨리! 빨리 올라오란 말야!" 쪼그려 앉은 도훈도의 사색이 된 얼굴이 사다리 위에 보였다. 활을 멘 봉학이 사다리를 타고 맨 먼저 날렵하게 올라갔다. 박재석은 김장독 만 한 성복의 엉덩이를 머리로 들이밀며 사다리를 탔다. "맙소사!" 갑판에 올라선 박재석은 입이 딱 벌어졌다. 하늘이 온통 하얀 연기를 끄는 것들로 가득했다. 여장과 방패판에는 온통 구멍이 숭숭 뚫려있고, 갑판에 가득 찬 병사들은 화포를 쏘고 활을 당기느라 정신이 없었다. 박 재석은 무기통에서 창을 집어들고 장병겸 옆으로 뛰어갔다. "쏜다!" - 뻐엉! "앗! 빌어먹을!" 박재석은 굉음이 들린 동시에 충격을 받고 갑판 위를 굴렀다. 하필 바 로 그때 지자총통이 발사됐고, 뒤로 물러서는 포수와 부딪친 것이다. 온 몸을 뒤덮은 하얀 연기가 덮쳐오고 박재석은 바닥에 쌓인 돌 위에 굴러 얼굴과 팔이 온통 따끔거렸다. 박재석이 돌을 집어들고 벌떡 일어났다. 방패판까지 달려가 홱 집어던 지려던 박재석이 순간 움찔했다. "뭐, 뭐야. 왜 이리 많아?" 좌선 주변에는 온통 왜선들뿐이었다. 바다를 가득 채운 불타는 왜선들 사이로 판옥선 몇 척이 앞으로 나가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거북선 과 함께 앞서 나간 판옥선들은 저 앞에 있고, 이제 방향을 돌려 다시 이 쪽으로 향하려는 순간이었다. - 빡! 왜병들이 좌선에 걸쳤을 것임이 분명한 대나무 사다리가 조총탄에 맞 아 부서지며 나뭇조각이 사방으로 튀었다. 고개를 숙인 박재석이 슬쩍 주변을 살피니 다른 군관, 수졸들은 꼿꼿이 선 채 화살을 쏘거나 창으로 아래를 향해 찔러대고 있었다. 이런 짓을 하루종일 한 사람들이었다. 지 긋지긋한 싸움에 지쳐 제 목숨 돌보기도 귀찮은 듯했다. 박재석이 주먹만한 돌멩이를 왜병들에게 집어던졌다. 바로 앞에 보이 는 왜선은 반쯤 부서지고 가라앉아서, 왜병들은 무릎까지 물에 빠진 채 악착같이 싸우고 있었다. 박재석이 던진 돌이 왜병이 쓴 삿갓에 맞고 튀 었다. 잠시 휘청거린 왜병이 박재석을 째려보며 창을 겨눴다. 박재석은 흠칫했으나 옆에서 군관이 쏜 화살에 그 왜병이 물위에 나자빠졌다. 뒤쪽에는 완전히 부서지거나 불에 탄 왜선들이 이리저리 떠밀리고, 그 것들이 빠진 틈을 새로운 왜선들이 채워나갔다. 좌선을 향해 달려드는 왜선들은 끝이 없었다. 저 멀리 앞쪽에서는 다른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왜군의 대장선인 듯한데, 거북선과 판옥선들이 옆으로 지나가면서 화포와 화살을 우박같 이 쏟아 부었다. 그 근처에는 온통 불타오르는 왜선들뿐이었다. "기패관! 전라우수영1선과 회령포만호 선을 당장 불러들여라!" 장대에 올라선 순천부사가 아래를 향해 고래고래 소리질렀다. 자칫하 면 적 대장선보다 조선수군의 좌선이 먼저 무너질 지경이었다. = 하치스카군 쥬군, 황돈구 "우라질!" 재수도 참 더럽게 없었다. 세키부네의 다락 안에 있는 황돈구에겐 지 금 처한 상황이 너무도 황당했다. 이름으로 알 수 있듯 황돈구는 머리부 터 발끝까지 조선인이었다. 그러나 몸을 덮은 것은 일본제 투구와 갑옷 이고 손에는 일본도가 들려 있었다. 등에 제법 큼지막한 하치스카군의 군기가 꽂혀 있는 걸 포함하면 그는 영락없는 '왜장'이었다. 조선인이 왜 장이 되어 버린 것이다. "도누쿠 나으리. 우리 조도 올라가 싸워야 할 것 같습니다." 황돈구 휘하 아시가루 한 명이 눈치를 보다가 다가와 서툰 발음으로 우물거렸다. 하치스카군의 하급 무사이며 쥬군中軍 발도족경조 대장 황 돈구. 바로 그것이 지금 황돈구의 신분이었다. 가뜩이나 속이 끓는 판에 어설픈 발음으로 자기 이름을 듣게되자 황돈구는 더욱 울화가 치밀었다. "알겠으니까 닥치고 준비나 해!" 황돈구는 조선을 침범한 일본에 적극 협력한 부역자라고 할 수는 없었 다. 열 세 살 어린 나이에 충청도 고향마을 근처에서 놀다가 잡혀간 포 로였다. 황돈구는 먼 일본 땅까지 끌려가 일본 무사들의 잔심부름을 하 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갖은 고생 끝에 무사가 되었고, 마침 정유년에 다시 전쟁이 터져 조선에 돌아올 수 있었다. 황돈구는 드디어 부모님과 같이 살 수 있겠다며 좋아했다. 한 달 전에 있었던 남원성 전투에서 별로 열심히 싸우지 않은 것도 조선인으로서의 자각 때문이었다. 며칠 후 황돈구는 전주성을 점령한 부대를 슬쩍 빠져 나와 기억을 더 듬어 한밭 남쪽에 있는 고향으로 찾아갔다. 어렸을 적에 보았던 느티나 무와 우물가, 같이 뛰놀던 친구들이 눈에 선했다. 황돈구黃豚狗를 똥꾸나 개돼지라고 놀리던 친구들이 이제는 너무나 보고 싶었다. 황돈구는 아명 을 미처 바꾸기도 전에 잡혀간 것이다. 그러나 반갑게 맞아주리라 기대했던 고향 사람들이 문제였다. 왜병 머 리 하나, 왜장 머리 하나에 각각 걸린 벼슬과 상금을 탐낸 동네사람들이 앞다투어 황돈구의 목을 베어 출세하겠노라고 덤벼들었다. 황돈구가 아 무리 조선사람이라 부르짖어도 소용이 없었다. 급하다 보니 일본말이 먼 저 튀어나왔고, 조선말을 거의 잊어버린 것도 오해를 증폭시킨 요인이었 다. 황돈구는 집에 가서 부모님을 만나 뵙지도 못하고 무조건 도망쳤다. 마을에서 일본도를 빼 들고 설쳤다가는 정말 왜장이 될 판이었다. 할 수 없이 황돈구는 참담한 마음을 추스리며 부대에 돌아왔다. 일본인들이 오 히려 그를 따스하게 맞아주고 하급 사무라이 직책도 다시 그대로 내주었 다. 이때부터 황돈구의 속은 까맣게 타 들어갔다. 오늘 싸움만 해도 그랬다. 군세로 보아 황돈구가 조선수군과 직접 싸 우는 일 같은 건 절대 없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조선수군이 뜻밖에 분 전했고, 그것이 오히려 불쌍한 황돈구의 신세를 더욱 처량하게 만들고 말았다. 이제 황돈구는 주군 하치스카 이에마사의 명을 받아 조선수군을 무찌르는 진짜 왜장이 되어야 했다. "나으리..." "알았다니까! 에라 모르겠다! 그래, 지금부터 나는 왜장이다! 나 왜장 이라니까!" 따지고 보면 황돈구에게 딸린 병사 9명이 더 불쌍했다. 이유 없이 거 친 소리를 들어야 하는 병사들은 황돈구의 눈초리에 질려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이케(가라)!" 황돈구는 능숙한 일본말로 병사들을 지휘하며 다락 위로 올라갔다. 그 러면서도 황돈구는 혹시 조선수군 누군가가 자기를 알아볼 지도 모른다 는 걱정에 투구를 눈 아래까지 깊이 눌러 쓰며 주변을 살폈다. 쥬군 함대는 어립선 근처에 잔뜩 밀집해 두터운 장막을 치고 있었다. 그리고 앞에는 판옥선 일곱 척이, 뒤에서는 거북선을 포함해 여섯 척이 포위한 채 치열하게 공격을 가하고 있었다. 공격의 중심에는 이에마사의 어립선이 있고, 호위선들이 하나씩 불타거나 부서지고 있었다. 불타는 호 위선 한 척이 떠내려가자 이에마사의 어립선 전체가 눈에 들어왔고, 황 돈구가 기겁했다. 웅장한 크기와 화려함을 자랑하던 어립선의 천수각이 불타고 있었다. 흰색 바탕에 만卍자가 새겨진 하치스카 본진 군기와 새 깃털로 만든 둥 근 마인馬印도 함께 불에 탔다. 구원을 요청하는 깃발도 불길에 노출되 어 조금씩 타고 있었다. 구원을 요청하는 북소리조차 마치 성이 함락될 때의 비참한 광경을 연상시키며 처량하게 울리는 것 같았다. 이제부터 목숨을 내걸고 충성을 바칠 주군을 향해 황돈구가 꾸벅 고개 를 숙였다. 황돈구가 든 일본도 날에 주변에서 타오르는 배의 불길이 맺 혔다. "이에마사 님! 기다리십시오! 지금 갑니다!" 황돈구의 상관인 사무라이가 어립선을 향해 소리쳤다. 그들은 지금 주 군을 구하기 위해 전력을 다해 배를 뒤로 몰고 있었다. 황돈구는 부하들 과 함께 서둘러 뱃전으로 달려갔다. 바로 앞에 불타는 세키부네가 빠르 게 다가왔다. - 쿵! 작지 않은 충격이 오고, 황돈구의 부하 병사 하나가 갑판에 엎어졌다. 세키부네가 불타는 동료 배들을 밀치며 악착같이 어립선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돌파된 학익진은 이제 의미가 없었다. 하치스카군은 본진과 어립선이 공격당하는 순간부터 조직적인 저항을 포기했다. 전체적인 국면의 승리 보다는 주군의 안전이 먼저였다. 하치스카군 모두가 너나 할 것 없이 진 형을 무너뜨리고 줄줄이 어립선이 있는 곳으로 몰려왔다. 황돈구의 세키부네는 다행히 딱 한번만 공격당했다. 학익진 후방에서 빠른 속도로 일본군 대열을 가르며 나가던 판옥선이 현측에서 일제히 쏜 포화에 살짝 걸려든 것이다. 바로 앞을 달리던 세키부네는 순식간에 주 저앉았지만, 황돈구가 탄 배에는 사람 머리 만한 철환 한 개가 날아들었 을 뿐이었다. 서너 명이 한꺼번에 쓰러졌지만 다른 배에 비하면 피해가 거의 없는 거나 다름없었다. 조선수군에게 목표물은 너무 많았다. "바로 앞에 어립선이다! 건너갈 준비!" 황돈구가 큰 소리로 외쳤다. 그러나 어립선 바로 뒤에 판옥선이 있고, 그 판옥선에서 불타는 어립선에 집중적인 공격을 가하고 있었다. 주변에 는 부서지고 불타는 세키부네들뿐이었다. 배는 불타는 호위선들을 헤치며 천천히 어립선에 다가갔다. 어립선은 반쯤 물에 잠기고 물위에 떠 있는 부분은 맹렬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드 디어 배끼리 맞닿자 방패판이 드러눕고 사다리가 어립선에 걸쳐졌다. "주군!" 발도족경조라는 돌격부대 지휘관인 덕분에 황돈구는 가장 빨리 어립선 에 오를 수 있었다. 이에마사를 발견한 황돈구가 입에 채 익지도 않은 '주군'이란 단어를 쓰며 뛰어갔다. 위기에 처한 주군을 구하고 대신 죽는 것은 무사의 미덕 중에 미덕이다. 그러나 황돈구는 주군 대신 죽을 마음 은 터럭만큼도 없었다. "오오! 왔느냐!" 확연히 기울어진 선체에서 이에마사는 살아남은 몇몇 중신과 부하들이 몸을 내던진 방어선 속에 있었다. 사람의 벽을 쌓은 그들은 집중적으로 쏟아지는 화살 공격을 갑옷과 몸으로 막고 있었다. 주위에는 온통 시체 와 부서진 방패판이 나뒹굴었다. 이에마사는 핏기가 가신 얼굴로 그 벽 뒤쪽에 앉아있었다. 달려온 황 돈구와 병사들을 보고 반가워하는 표정에는 죽음에 대한 공포감이 절절 히 넘쳐흘렀다. 노부시 출신인 아버지 마사가쓰가 대담한 용장으로 이름 이 나 있었지만 그 외모를 약간 닮았을 뿐 용맹까지 빼닮지는 못했다. "구해드리러 왔습니다! 어서 이리로 오십시오!" "무슨 소리냐! 나는 아직 싸울 수 있다!" 이에마사가 주위 눈을 의식하며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당장 어립 선을 버리고 비참하게 도주해야 할 처지인데도 체면 때문에 넙죽 황돈구 를 따라갈 수는 또 없었다. 비록 구원요청은 했지만 이렇게 한번은 싸울 의지를 보이는 것이 무장으로서의 기백을 알리는 격식이었다. 그렇지 않 으면 두고두고 가신들의 조롱을 사기 때문이다. "주군의 그 심정 능히 이해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형세가 불리하니 잠 시 물러섰다가 다음 기회를 노리십시오!" 제길! 도망치고 싶은 주제에 격식은 또 무슨 얼어죽을! 황돈구는 목구 멍에서 기어 나오려는 욕설을 간신히 억누르면서 이럴 때 부하로서 당연 히 해야할 말로 다시 후퇴를 권했다. 일본인이라면 이렇게 진심과 다르 게 별도로 정해진 격식을 따르는 것을 당연시하겠지만 황돈구는 조선인 이었다. 형식치레를 중시하는 유교문화권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황돈구 가 보기에도 이것은 너무 뻔뻔한 격식이었다. 그런 입에 발린 말을 한마디 해놓고는 나중에 가문기록에 '이에마사는 끝까지 싸우려고 했으나 후퇴를 권하는 부하의 간절한 요청에 못 이겨 부득이 후퇴했다'고 기록될 것이다. 이것은 사실에 대한, 그리고 역사에 대한 왜곡이었다. 그래서 짜증이 난 황돈구가 눈을 부릅떴고, 이미 겁을 집어먹은 이에마사는 황돈구의 눈초리에 더 놀라 슬쩍 눈길을 피했다. "그, 그래. 그럼 분하지만 후퇴하겠다." 이렇게 황돈구와 이에마사가 아무 의미도 없는 격식을 진행하는 동안 에도 화살과 탄환에 맞아 죽는 병사와 무사들이 속출했다. 그럼에도 이 에마사가 이런 격식을 차린 게 기뻤는지 계속 화살에 맞아 죽어가는 중 신들도 기꺼이 죽겠다는 격식으로 답했다. "그럼 아무쪼록, 주군! 여기는 저희에게 맡기십시오!" 격식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살고 싶다는 마음을 덮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러면서도 그들 눈은 조선군이 아니라 황돈구를 싣고 온 세키부네 쪽에 가 있었다. 이에마사도 오래 끌 생각은 없었는지 대뜸 황돈구를 따 라 나섰다. "헉!" 부하 병사 하나가 화살에 맞고 갑판에 엎어졌다. 그 병사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신경 쓸 여지도 없는 황돈구는 병사들과 함께 이에마사를 원형 으로 둘러싸며 세키부네와 연결된 사다리로 안내했다. 이에마사가 사다 리를 건너는 동안 황돈구는 사다리에 발을 올린 채 어립선 갑판에 침을 퉤 뱉었다. 뒤에 남겨진 무사와 병사들이 너무 한심해 보였다. 무사히 세키부네에 오른 이에마사가 병사들의 호위 속에서 한숨을 돌 리면서 황돈구에게 물었다. 그때 황돈구는 사다리 위를 뛰어가고 있었다. "나를 구해준 무공 잊지 않겠다. 자네 이름이 뭔가?" "저는... 읍!" 대답하려던 황돈구의 어깨에 화살이 파고들었다. 사다리에서 떨어질 뻔한 황돈구가 간신히 균형을 잡아 세키부네로 건너갔다. "아아악!" 뒤따라 사다리를 건너던 부하 병사 하나가 화살에 맞고 물로 곤두박질 쳤다. 화살은 끊임없이 날아왔다. 배는 서둘러 출발했고, 병사들이 몰려와 방패판을 들고 이에마사를 철 저하게 가렸다. 이에마사가 시뻘개진 얼굴에서 땀을 줄줄 흘리는 황돈구 의 어깨를 잡았다. "괜찮은가!" "괜찮... 습니다. 저는 황돈구라 합니다." 황돈구가 속으로 한 말은 '아프니까 어깨 잡지 말란 말이야'였고, 말을 할 때마다 고통이 엄습했다. 조금이라도 몸을 움직이면 갑옷을 뚫고 어 깨에 박힌 화살이 뒤틀려 살을 찢었다. "돈구? 이상한 이름이군" "저는 조선인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하치스카군 사무라이입니다." "훌륭하다. 그 이름. 무슨 뜻인가?" 이에마사를 실은 세키부네는 전속력으로 뒤쪽을 향해 나아갔다. 병력 수송선과 식량 수송선들이 몰려있는 곳이었다. 가토 요시아키 함대가 위 세를 보이며 불의의 사태에 대비하고 있었다. 황돈구는 이에마사에게 자기가 이젠 '왜장' 임을 다시 한번 강조하며 이름의 뜻을 밝혔다. "돼지와 개라는 글자입니다. 이건 조선에서 태어났을 때의 제 아명입 니다." 그 순간 황돈구의 눈에 다시 한번 고향 땅이 떠올랐다. 느티나무와 우 물가 정경이 보인다고 느꼈을 때 그는 울고 있음을 깨달았다. 이제 다시 는 돌아갈 수 없는 고향이었다. 황돈구는 지금 몸에 걸친 갑옷과 투구가 마치 족쇄처럼 영원히 벗겨지지 않을 것임을 깨달았다. "어이쿠! 도누쿠 나으리! 화살이 어깨에 깊이 박혔습니다! 그래서 눈물 을 다 흘리시는군요!" 아까부터 황돈구의 속을 긁던 부하가 이번에도 엉뚱한 소리를 하며 다 가왔다. 황돈구는 그 부하를 바다에 확 집어던지고 싶은 마음을 꾹꾹 눌 러 참았다. = 회령포 전선, 배세춘 배세춘은 엉망으로 뒤얽힌 배들 사이를 뚫고 지나가느라 도훈도와 함 께 진땀을 흘리며 배를 조정했다. 수졸들이 질려포통과 불붙은 솜을 옆 으로 마구 집어던졌다. 일일이 화살을 쏠 시간이 없었다. "끄아악!" 방패판 사이로 뛰어오르려던 왜병 하나가 창에 꿰뚫린 채 허공에서 발 버둥쳤다. 가끔 이렇게 판옥선으로 뛰어드는 왜병이 있어 배세춘은 신경 이 곤두섰다. "쳇! 좌선은 왜 자꾸 꾸물거리는 거야?" 하늘을 찌를 듯한 비명 속에서도 팔짱을 낀 민정붕은 태연하게 서서 중얼거렸다. 마치 불구경 나온 팔자 좋은 사람인 듯했다. - 삐유우우! 쉭쉭! 신기전틀에 장전을 마친 화포장들이 배 좌우에 대고 한번씩 더 쏘았 다. 하얀 연기를 이끌고 연달아 날아간 시뻘건 불덩이들이 왜선들 위로 불길을 뒤집어씌웠다. 이제는 화포장들에게 맡겨도 되겠다는 판단이 선 듯, 민정붕은 묵묵히 지켜보기만 했다. 이때 배세춘이 회령포만호에게 무척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빨리 좌선에 가서 도와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흠. 그렇긴 해야 하지만. 제기랄!" 민정붕이 내키지 않는 듯 투덜거렸다. 곤장 맞은 것이 바로 얼마 전 일이었다. 민정붕은 통제사에게 처벌을 받았지만 결코 수긍한 것은 아니 었고, 그래서 아직까지 통제사에 대한 감정이 별로 좋지 못했다. "싫지만, 일이니까 한다. 젠장!" 민정붕이 장대 아래로 들어갔다. 그가 끌고 나온 것은 작은 수레에 얹 힌 총통틀 두 채였다. 이것도 문종대왕이 만들었다 해서 문종화차로 불 렸지만, 신기전틀과 달리 승자총통 50개를 다발로 묶은 것이었다. "자네가 하나 맡아!" "저는 쏠 줄 모르는데요." 만지기만 해도 터질 것 같아 배세춘이 주춤 뒷걸음쳤다. 그러자 민정 붕이 비실비실 웃으며 간단히 설명했다. "가운데 심지에 불을 붙인 다음에 수레 손잡이를 잡고 목표를 향해 돌 리면 되는 거야. 쉬워." 그러나 총통틀을 직접 쏴본 사람은 이 배에 아무도 없었다. 민정붕도 다만 책에서 쏘는 방법을 봤을 뿐이었다. 배세춘은 승자총통 50개 가운 데 하나라도 터지면 어떡하나 걱정이 들었다. "화포장들한테 맡기면 안될까요?" "저치들은 신기전틀을 장전해야지. 내가 쏘는 걸 잘 보게." 함대 단위로 싸울 때는 신기전틀이 훨씬 더 유용했다. 총통틀은 개별 함정이 싸울 때는 좋지만 장전에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린다. 민정붕이 여장에서 방패판 두 개를 좌우로 치운 다음 화차 손잡이를 잡고 바깥으로 화차 앞부분을 내밀었다. 저 앞에는 왜선 층루에 올라선 왜병들이 이쪽을 향해 총을 겨누고 있었다. - 투! 투! 투투투투! 투투투! 시뻘건 불꽃이 펑펑 일어나며 탄환이 쏟아져 나갔다. 승자총통 50개에 장전된 탄환은 다 합해 수백 개나 되었다. 그것이 차례로 왜병들을 향해 쏟아지는 것이다. 줄줄이 선 왜병들이 오른쪽부터 하나씩 벌집이 되어 나뒹굴었다. 왜선의 층루는 깨끗하게 비워졌다. 민정붕이 자욱한 연기 사이로 총통틀을 돌려 다른 배를 향했다. 다시 화차에서 엄청난 숫자의 탄환을 토해냈고, 잠시 후 손으로 귀를 막은 배 세춘을 민정붕이 흔들었다. "봤나? 자. 쏴봐!" "겁이 나서... 이건, 이런 건 만호 어른께서 쏘시죠." 얼이 빠진 배세춘이 두세 걸음 물러섰다. 배세춘처럼 회령포 전선을 둘러쌌던 왜선들도 슬금슬금 뒤로 물러섰다. 3. 소용돌이 (1) = 전우수1선, 김억추 - 따다다닥! 빡! "흐미야! 엄청나구만." 김억추가 슬쩍 들었던 머리를 다시 바닥에 처박았다. 조총탄 뿐만 아 니라 이제는 기다란 일본 화살도 방패판에 박히기 시작했다. 생각 같아 서는 어서 이 위험한 장대에서 내려가고 싶었지만 이제는 그럴 수도 없 었다. 계단을 내려가는 순간 한 방 맞을 것 같았다. "야! 응추야! 응추야!" "무서운데 왜 자꾸 불러요? 씨이!" 동생 김응추는 바닥에 납작 엎드려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아 김억추가 슬쩍 방패판 사이로 바깥을 살폈다. 판옥선 주변 에 왜선이 대여섯 척인데, 웬일인지 대부분 부서지고 불에 타고 있었다. 그렇다면 지금 장대로 날아드는 조총탄은 다른 배에서 쏜 듯했다. 그리고 수졸들은 갑판에서 열심히 싸우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지 휘는 군관 당언량이 아니라 금갑만호 이정표가 하고 있었다. 신이 나서 독전하는 목소리가 여기까지 쩌렁쩌렁 울렸다. 도훈도가 선 옆에 아래 갑판으로 통하는 사다리가 보였다. 아까 좌선 에서 변존서가 활로 위협하지만 않았다면 그 사다리를 타고 벌써 선실로 내려갔을 것이다. 그 전에 이곳으로 배를 몰고 오게 하지도 않았겠지만. "사또! 좌선에서 집결 신호입니다. 다른 배들은 모두 좌선 쪽으로 움직 이고 있습니다." 계단을 올라온 군관 당언량이 방패판을 열어제쳤다. 김억추는 손사래 를 치며 빨리 방패판으로 앞을 막으라고 했다. 당언량은 어쩐지 웃는 듯 하더니 아무 소리 없이 장대를 내려갔다. - 빠칵! 그때 앞을 가린 방패판이 절반으로 쪼개지며 바닥에 떨어졌다. 그 사 이로 탄환이 마구 날아오자 김억추가 머리를 감싼 채 바닥에 납작 엎드 렸다. 당언량을 노린 건지 김억추를 노린 건지 알 수 없었지만 공포와 동시에 짜증이 샘솟듯 일어났다. "난 몰라, 젠장!" 배가 움직이자 탄환이 점점 더 많이 날아들었다. 가끔씩 배끼리 부딪 치는 충격도 김억추의 머리칼을 바짝 곤두세웠다. 당장이라도 왜병들이 칼을 들고 판옥선에 뛰어들 것만 같았다. - 콰과광! 우르르~ "뭐, 뭐냐?" 김억추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하늘에 시뻘건 것들이 춤을 췄다. 왜선 이 폭발하여 불붙은 나무토막이 사방으로 날아오른 것이다. 그것들이 곧 장대 주변에 떨어지기 시작했다. "제길! 누가 멋대로 왜선에 불질렀어? 저것 봐. 위험하잖아!" 김억추가 짜증을 내다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부서진 방패판 사이로 보이는 것은 장관이었다. 10척 겨우 넘는 판옥선들이 수백 척의 왜선들 사이를 좌충우돌하며 움직이고 있었다. 불화살이 하늘을 가득 메우고 시 뻘건 섬광과 하얀 연기가 사방에서 피어올랐다. 비명과 굉음이 끝없이 이어졌다. "역시 나만 죽거나 다치지 않으면 전쟁이란 참 재미있는 거야." 김억추가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저 멀리 좌선이 눈에 들어왔다. 휘황찬란한 깃발이 나부끼는 적 대장선이 좌선 근처에 있고 아직 살아있 는 피아 모든 배들이 일제히 그곳으로 움직이는 것이, 바야흐로 싸움의 마지막 길목에 들어선 것 같았다. 김응추가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형님! 그럼 난 죽어도 되고요?" = 도도 다카도라군 어립선, 겐타로 어립선을 호위하던 세키부네들이 앞으로 쭉쭉 나가더니 일제히 조선군 과 맞붙었다. 하치스카 이에마사군이 큰 피해를 입고 물러서자 만들어진 빈 공간을 이번에는 도도 다카도라군이 가득 메운 것이다. 배와 배가 선 체를 부딪치고 싸우는 것이 마치 소싸움을 보는 듯했다. '날 얕보지 마라!' 겐타로는 속으로 이렇게 외쳤다. 그렇지만 겁을 집어먹은 겐타로는 벌 써 온몸이 후들후들 떨렸다. 당장 눈앞에 얼마나 많은 돌과 화살이 날아 올지 알 수 없었다. 불에 타서 죽게 될 지 아니면 포탄에 맞아 산산조각 이 날 지, 온갖 나쁜 상상이 머리 속에서 뱅뱅 돌았다. 어립선을 보호하기 위해 몰려온 호위선들 가운데 한 척이 조선 대장선 에 달려들었다. 그러나 옆에 늘어선 판옥선 두 척에서 발사한 포탄 여러 발을 집중적으로 맞더니 단번에 부서져버렸다. 빈 나무 궤짝을 도끼로 두들겨 부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광경이었다. 다른 세키부네 한 척은 화포에 몇 발 맞고 다락이 내려앉더니 불화살 로 마무리되었다. 다락 안에서 철포병들이 쏘다 흘린 화약에 불이 붙어 화약고에 불길이 연결된 순간이었다. 엄청난 굉음이 바다를 뒤흔들었다. 나무파편이 사방에 날리고 폭발에 휩쓸린 병사들의 팔다리가 불탄 채로 날아갔다. 메스꺼운 냄새가 바람을 타고 날아왔다. 겐타로는 코를 막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조선 대장선에서 뭔가 번쩍하더니 자그마한 화살이 어립선에 무더기로 날아들었기 때문이다. 까맣게 날아오는 그 무더기 화 살을 본 순간 겐타로를 바닥에 몸을 납작 엎드렸다. 비겁하다는 말을 듣 더라도 할 수 없었다. 겐타로는 그대로 엉금엉금 기어다니며 방패판 뒤에 다시 덧댈 방패를 찾았다. 지금 겐타로를 가린 방패로는 도저히 저 화살의 비 속에서 살아 남을 자신이 없었다. 슬쩍 고개를 들어보니 엔메이는 다카도라 바로 옆 에 가 뭐라고 열심히 말하고 있었다. - 빠바바바박! 뭔가 시끄러운 소리가 나고 그 사이에 비명이 섞인 듯했다. 갑자기 바 닥에 피가 흥건히 고여 미끌미끌했다. 배가 흔들림에 따라 시뻘건 피가 갑판 위를 줄줄 흘러 다녔다. 핏물에 축축이 젖어 가는 몸이 끔찍한 느 낌을 전해주었다. 심장고동 소리가 총소리보다 요란했다. 겐타로는 간신히 대나무 방패 하나를 찾아들고 제자리로 돌아왔다. 역 시 예상대로 겐타로를 지켜주던 방패판은 뭔가에 맞아 위쪽 반이 부서져 나갔고 덤으로 손바닥만한 화살 여러 개가 방패판을 뚫고 안으로 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주변에 시체들이 나뒹굴고 있는 것은 깨달은 것은 그 다음이었다. 고막이 터질 듯 요란한 소리들이 겐타로마저 광기로 몰아넣 기 시작했다. '저기 있는 건 사람이 아니다! 내 목숨을 노리는 괴물이다! 죽여야 한 다! 죽여야 내가 산다!' 겐타로가 총구에 화약을 넘치도록 쑤셔 넣었다. 다른 철포에서 쓰는 것의 두 배나 되는 철환이 시원스럽게 날아가 적선의 방패를 부수고 그 뒤에 숨어있는 조선군의 머리통을 박살내길 바랬다. - 파앙! 맞았는지 안 맞았는지 알 수 없었다. 겐타로는 낑낑거리며 장전을 마 친 다음 다시 철환을 날렸다. 이 끔찍한 전투는 끝이 없이 계속되는 것 같았다. 주변 소음이 천천히 가라앉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때 누군가 어깨를 흔들었다. 그 사람의 입이 어떤 모양을 만들어냈 지만 그 소리가 무슨 뜻인가는 한참이 지난 후에 알아들을 수 있었다. 엔메이였다. "어때? 싸울만한가?" "시시하진 않군요! 엔메이 님!" 겐타로가 필요 이상으로 큰 소리로 대답했다. 그렇지만 이렇게 허세를 부린 겐타로도 죽음에 대한 공포를 확실히 느끼고 있었다. 어립선에다 총대장이 있는 본진이라 해서 조선군이 사양하고 공격을 자제하는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화려한 군기와 붉은 색 장막이 눈에 거슬리는 지 다른 배보다 화살을 한 움큼씩 더 안겨주는 느낌이었다. "전공은 문제없겠지? 겐타로." 엔메이가 묻자 겐타로가 미소를 지어 답하려 했다. 그러나 겐타로 얼 굴을 본 엔메이는 놀라는 표정을 지은 다음 피식 웃었다. 겐타로는 너무 긴장해 미소가 제대로 안 만들어진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낯을 조금 붉혔 다. 엔메이는 발도족경조 소속 아시가루들과 잡병들의 등을 두드리며 지 나갔다. 적이 너무 적어서 싸우는 일조차 없을 것이라 실망하던 어립선 병사들 의 고민은 이렇게 단숨에 해결됐다. 오히려 지금은 살기 위해 싸운다고 하는 게 맞는 말이었다. 겨우 열 척 남짓이라고 깔보던 조선군이 갑자기 다르게 보였다.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돌을 한꺼번에 뿜어대고 통 나무 만한 화살을 날리며 작은 화살이 정확히 날아와 동료들에게 죽음을 안겨주는 상대였다. 그제야 병사들은 앞서 나간 두 함대가 어째서 모두 패했는지 납득할 수 있었다. - 꽈직! 우두둑! 배에 충격이 오더니 뭔가 주저앉는 소리가 들렸다. 겐타로는 그런 폭 음과 소음 한가운데에 계속 서 있었다. 조금 전까지는 어립선 앞에서 호 위선들이 싸우고 있었는데, 그 배들은 이제는 물 속에 가라앉는 불덩이 에 불과했다. 바로 앞에 판옥선들이 보이고, 쉬지 않고 화살이 날아왔다. 흔들리는 시선 안에 고함을 지르는 사무라이들과 기계적으로 철포와 활을 쏘는 병사들이 스쳐갔다. 이제는 뭔가를 생각할 여유도 없었다. 머 리 속이 하얗게 비어버린 가운데 겐타로는 몇 번인가 오오쓰쓰를 겨누어 쏘고 또 쏘아 방패판 너머의 적을 향해 적개심이 담긴 총탄을 날렸다. "저기 빈곳을 파고들어라! 전진!" 뒤에서 다카도라의 고함소리를 들었지만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도 몰랐 다. 그저 겐타로를 싣고 있는 이 배가 불타는 호위선을 밀치며 앞으로 조금 움직인다 느낀 순간 거대한 배가 보였을 뿐이다. 오만하게 이쪽으 로 선수를 내민 판옥선이 겐타로의 몸을 짓뭉갤 것처럼 위압해왔다. "부딪친다!" 관측병이 큰 소리로 충돌을 알렸다. 어립선에서 겐타로는 해협을 향한 현측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충돌은 선수에서 일어났다. "으윽!" 한바퀴 나뒹굴다가 일어선 겐타로가 고개를 들어 판옥선 깃대에 달린 커다란 깃발을 바라보았다. 겐타로는 그 깃발을 이미 한번 본 적이 있었 다. "대장선!" 방패판을 움켜쥔 겐타로가 놀라움에 겨운 소리를 내질렀다. 저 배가 얼마나 엄청나게 싸웠는지 지켜본 겐타로였다. - 취익! 추죽! 축! 화살이 병사들 머리 위로 쏟아진 것은 그 직후였다. 옆에서 병사들이 죽어 나자빠지고 장전하는 겐타로의 손길은 더 바빠졌다. 그런데 어느새 화약이 다 떨어지고 말았다. 쏠 기회만 있어도 다행이 라 여겼고 20발 정도면 전투가 충분히 끝나리라 생각한 겐타로의 오산이 었다. 겐타로는 철포조장에게 달려가 화약을 달라고 했다. 하지만 철포조장 도 화약이 떨어졌는지 다락을 가리키며 뭐라 소리를 질렀다. 창고에 가 서 화약 한 포대를 가져오라는 명령이었다. 겐타로가 다락으로 들어가려 고 몸을 움직인 순간이었다. "계속 쏘아라! 적선 안이 훤히 들여다보인다." 어립선 바로 옆에서 싸우는 세키부네의 층루 위에서 사무라이가 소리 쳤다. 도도 다카도라군이 이번 싸움을 위해 특별히 준비한 것은 세키부 네의 다락 위에 높이 세워진 폭이 넓은 망루였다. 철포병들이 옆으로 길 게 늘어서서 판옥선을 내려다보며 철포를 쏘고 있었다. 겐타로는 저런 높은 곳에서 철포를 쏘면 공을 세우기도 쉽겠다고 아쉬워했다. 그리고 화려한 옷을 입은 사무라이가 높은 곳에서 친히 독전하는 모습 이 지극히 용감하고 숭고해 보였다. 사무라이는 그를 노리며 날아오는 화살 따위는 전혀 도외시하는 듯했다. 겐타로는 어서 공을 세워 바로 저 런 사무라이가 되고 싶다는 꿈을 품은 채 다락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다카도라 님은 총대장이면서 어째서 천수각에 오르지 않는 거요? 그 렇게 하면 병사들 사기가 크게 오를 텐데 말이오!" 싸움이 정신없이 진행되는 와중에도 모리 다카마사는 끝까지 군감의 사명을 잊지 않았다. 군감은 본진에 끊임없이 날아드는 화살과 포탄보다 다카도라의 행동에 더 신경을 썼다. 병사들이 방패판을 들고 둥그렇게 호위했지만 그 사이를 뚫고 들어오는 화살에 맞아 하나씩 쓰러지고 있었 다. "그래봤자 집중사격의 표적밖에 안되오. 대장이 죽고 나면 사기고 뭐 고 필요 없소." 합리적인 성격의 다카도라는 그 말을 한마디로 넘겨버렸다. 육전이라면 총대장은 높은 언덕 위나 성안의 천수각에 오르는 것이 보 통이다. 그리고 그곳은 대개 조총탄이 미치지 않아 상대적으로 안전한 위치였다. 그러나 조선군과의 싸움에서 그렇게 대포에 쉽게 노출되는 위 치에 있는 것은 대장의 죽음을 부르는 바보짓이었다. 임진왜란 기간을 걸쳐 이 사실을 일본군이 깨닫는 데는 꽤나 많은 희생이 필요했다. 행주 산성 싸움에서 총대장 우키다 히데이에를 비롯해 이시다 미쓰나리 등 수 뇌진들이 대거 부상당한 것도 이런 사실을 몰라서였다. "으아아아아악!" 이때 다카도라에 힘을 실어 주기라도 하듯 천수각에 올라 싸움을 지휘 하던 근습 무사가 화살 열 개가 넘게 꽂힌 고슴도치가 된 채 갑판에 떨 어졌다. 다카도라는 움찔하는 시선을 통해 군감 다카마사에게 그것 보라 는 눈짓을 보냈다. 하지만 군감 다카마사는 그래도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다카마사에게 재차 천수각에 오르길 독촉했다. "그래도 총대장이라면 합당한 용기를 보여야 하는 법이오. 저 사무라 이처럼 당연히 진두에 서서..." 그때 판옥선에서 다카마사의 목소리를 덮어버릴 커다란 포성이 울렸 다. 동시에 어립선 바로 옆의 세키부네에서 비명이 메아리쳤다. 화약 포 대를 들고 다락을 나온 겐타로도 그 광경을 볼 수 있었다. "망루가 무너진다!" "으아아! 피해라!" 묵직한 차대전과 철환에 얻어맞은 망루가 도끼질에 넘어가는 거목처럼 쓰러졌다. 한 줄로 늘어선 철포병들이 몸의 중심을 잃고 우수수 떨어지 기 시작했다. 망루에서 지휘하던 사무라이는 알아들을 수 없는 고함을 고래고래 지르다 바다에 빠졌다. 화려한 옷은 바다 위로 떠오르지 않았 다. "군감께서 먼저 올라가시오. 그럼 내 그 뒤를 따르리다." 다카도라가 못을 박듯 한마디 더하자 마침내 군감 다카마사도 입을 다 물고 말았다. 그도 죽기는 싫은 것이다. - 쉬익! 화살이 오오쓰쓰를 겨누던 겐타로의 목을 살짝 스치고 지나갔다. 갑옷 으로 방호되지 못하는 목은 맞으면 그대로 즉사하는 부위다. 그러나 겐 타로는 이제는 새삼스레 놀라지도 않았다. 아까 이미 화살 두 개가 갑옷 어깨와 복부에 명중한 적도 있었다. 다행히 빗맞거나 갑옷이 견뎌주어 무사할 수 있었지만 그 때는 정말 선 채로 오줌이라도 쌀 것 같았다. 화약냄새와 불꽃이 코끝을 간지럽혔다. 그 너머로 겐타로의 시선이 25 밀리 철환의 목표를 찾아 헤맸다. 마침내 겐타로는 판옥선에서 막 방패 판 사이로 얼굴을 내민 조선군 한 명을 포착했다. "죽어버려!" 언젠가 했던 말을 똑같이 외치며 겐타로가 방아쇠를 뒤로 당기려 했 다. 그런데 그 조선군 얼굴이 눈 안에 들어온 순간 손이 그대로 얼어버 렸다. "슈, 슌스케! 네가 어째서!" 치익 하는 쉰 소리를 내며 발사를 독촉하는 화승을 앞두고 겐타로는 몇 번이고 확인했다. 하지만 분명 슌스케였다. 조금 여윈 듯했고 조선옷 을 입은 데다 머리카락이 길게 자랐지만 그 외에는 아무 것도 변한 곳이 없는 겐타로의 옛 친구 그대로였다. 겐타로가 슬며시 오오쓰쓰를 내렸다. 머릿속으로 옛 생각들이 스쳐갔다. 오쯔키와 벚꽃, 시고쿠와 하치우에 몬의 모습에 겹치는 슌스케의 모습. 너무도 반가워 소리쳐 부르고 싶었 다. 불러서 밤을 새워가며 못 다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술에 취하면 그의 아버지처럼 알아듣지 못할 이상한 뱃노래를 부르는 슌스케의 술버 릇도 생각났다. 그래. 함께 술을 진탕 마시는 거야. "빌어먹을! 하필이면 지금!" 그러나 겐타로의 이런 상상은 아주 짧은 순간의 꿈일 뿐이었다. 연기 와 불꽃이 죽음과 함께 난무하는 전쟁터 속에서 겐타로가 현실을 받아들 이며 욕설을 내뱉었다. 이쪽은 일본군, 저쪽은 조선군. 서로 적이었다. 행 방불명된 슌스케가 살아있다고 해봐야 그건 항복하여 적이 된 것에 지나 지 않았다. 적이 된 친구 따위... 그러나 필요 없다고는 차마 말할 수 없 었다. 슌스케는 아직 이쪽을 보지 못했다. 다른 쪽을 향해 얼굴을 내민 슌스 케가 철포를 쑥 내밀었다. 일본 병사의 목숨을 노리고 있는 슌스케의 시 선이 겐타로의 눈에 비쳤다. 겐타로는 오오쓰쓰를 다시 치켜들었다. 바짝 타 들어간 화승을 앞으로 밀어주며 겐타로가 중얼거렸다. "용서해라 슌스케." 십자로 선 쇳조각 중앙에 슌스케의 머리를 고정시킨 겐타로는 마음을 차갑게 얼리려 했다. 슌스케는 방금 막 철포를 쏘고 나서 고개를 한번 끄덕였다. 그리고 다른 철포를 들고 새로운 목표물을 찾고 있었다. 만일 슌스케가 먼저 이쪽을 봤다면 어떻게 했을까? 주저 않고 쏘았을 까? 아니, 지금이라도 슌스케와 눈이 마주친다면? 그가 나를 쏘지 못할 것이라 장담할 수 있을까? 방아쇠에 걸린 손가락이 떨렸다. 방아쇠를 당기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슌스케도, 겐타로의 미련도 피투성이가 되어 날아간다. 그것으로 끝이다. 적을 죽이는 것뿐이다. - 살려줘! 겐타로! 겐타로가 마지막 고민을 마쳤을 때, 어젯밤 꿈속에 나타난 슌스케가 울부짖었다. 불길 속에서 피에 젖은 손을 내밀며 외치던 그 말이 이제야 소리가 되어 들린 것이다. 겐타로가 천천히 방아쇠를 당겼다. "악몽이야! 이건 지독한 악몽이야!" - 팡! 불꽃을 내뿜은 총구는 겐타로의 얼굴 바로 옆에 몸을 내민 군관을 향 하고 있었다. 방패판이 부서지며 파란 갑옷을 입은 장수가 뒤로 벌렁 나 자빠졌다. 그 순간 슌스케가 이쪽을 보면서 눈이 휘둥그래졌다. 겐타로는 오오쓰쓰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허리춤에 고이 간 직한 청동거울을 꺼냈다. "슌스케! 받아!" 있는 힘을 다해 소리지른 겐타로가 작은 청동거울을 힘차게 대장선에 날렸다.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 청동거울은 대장선 안으로 빨려들 듯 사라졌다. "바보녀석..." 겐타로는 돌아앉아 방패판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고개를 드니 푸른 하늘이 가득 들어왔다. 쏟아지는 햇볕이 눈에서 터져 나오려는 슬픔과 눈물을 말려주었다. 겐타로는 잠시 눈을 감았다. = 경상우수영 좌선, 우치적 좌선은 맹렬하게 싸움이 진행되는 전쟁터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순천 부사 우치적은 그 중에서도 왜군 조총병들의 집중 표적이 된 장대에 우 뚝 서 있었다. 순천부 소속 장인들이 만들어 바친 이 황금빛 갑옷은 빨 리 죽으라고 일부러 이렇게 눈에 띠게 만든 것 같다는 생각을 우치적은 도저히 지울 수 없었다. 그래도 통제사 대신 미끼가 되어야 하는 지금 눈에 띠는 이 갑옷 덕택 에 미끼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판옥선 갑판보다 높 은 왜군의 층루선에서는 갑판의 통제사나 다른 군관들보다는 화려한 황 금빛 갑옷을 입고 장대에 올라 확연히 눈에 띠는 우치적을 먼저 노렸기 때문이다. 방금 군관 박영남이 방패판을 뚫고 들어온 조총탄에 맞아 중상을 입고 선실로 업혀갔다. 우치적은 아까 감목관 김탁을 쏜 조총병 같은 놈이 또 있을까 바짝 긴장했다. 장대를 노렸다면 우치적이 맞았을 지도 몰랐다. 좌선에서는 계속 피해가 늘어났지만, 싸움의 치열함에 비하면 오히려 적 은 편이라 우치적은 조금 안도할 수 있었다. 옆에서는 군관 변존서가 열심히 화살을 날렸다. 방패판 사이로 몸을 내밀며 짧은 시간에 목표를 겨누고 활을 쏘는 변존서를 지켜보면서 우치 적은 내심 감탄했다. 한 발에 한 명씩 꼬박꼬박 맞아 거꾸러졌다. 특히 왜선들 가운데 층루를 높이 올린 위에서 조총을 쏘는 왜병들은 변존서의 흑각궁에 잇달아 제물이 되었다. "후후! 제가 좀 비열하죠?" "훌륭하네. 적으로 하여금 적을 치게 하다니." 우치적은 변존서의 활솜씨에 내심 경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변존서는 왜병의 이마나 눈을 노리고 쏘았다. 왜병들은 동료의 눈썹 사이에 정확 히 박힌 화살을 보고 변존서의 활솜씨에 놀라고, 눈에 화살이 꽂힌 동료 들의 끔찍한 비명소리에 질렸다. 그래서 조총병들은 대나무 방패판 너머 로 감히 머리를 못 내밀었다. 당연히 칼을 빼어든 왜장이 길길이 날뛰며 조총을 쏘지 않는 왜병들을 내리쳤다. "응? 적 대장선에서 준사한테 뭔가 던졌습니다. 준사가 얼이 빠져 있 군요." "의심은 안 해도 될 걸세. 열심히 싸운 놈이야." 우치적도 갑판에 주저앉은 준사가 하는 꼴을 지켜보았다. 뭔가를 만지 작거리며 깊은 생각에 잠긴 모습이었다. 통제사나 주변 군관들이 준사가 하는 짓을 눈여겨보았지만 뭐라 나무라지는 않았다. "그게 아니라, 뭔지 궁금해서요. 청동거울 같은데요?" "적 대장선에 준사 애인이라도 탔나?" 우치적이 시위를 놓았다. 사다리를 타고 칼을 휘두르며 좌선에 오르던 왜병이 기다란 장전에 맞고 나가떨어졌다. 또 다른 왜병은 변존서가 애 기살을 날리기 직전에 어느 격군이 휘두른 몽둥이에 맞고 바다에 빠졌 다. 좌선은 오늘 내내 이렇게 전투의 중심에 있었다. 좌선 옆에는 해남 전선과 평산포 전선뿐이었다. 전라우수사는 제 몸 건사하기도 바쁜 듯 가까이 접근하지도 못하고 회령포 전선은 불타오르 는 왜선들 사이에서 조심조심 빠져 나오고 있었다. 저 멀리 중군선과 거 북선이 달려오고 있었지만 밀집한 왜선들을 비집고 오느라 꽤나 힘들어 보였다. 그리고 뒤에서는 거제1선이 녹도 전선의 엄호를 받으며 좌선에 다가오고 있었다. "자네, 정말 잘 쏘는군. 한산도에 있을 때는 자네 덕택에 꿩고기도 많 이 먹었지." 우치적이 변존서를 진심으로 칭찬했다. 지금 전투에서도 활솜씨를 유 감없이 드러내고 있지만, 한나절 사냥 나가서 꿩 열 마리씩 잡아오는 사 람은 변존서밖에 없었다. 다른 수영과 내기할 때는 항상 변존서가 대표 를 맡아 승리를 독차지했다. 통제사의 신임을 듬뿍 받아 전임 순천부사 권준이 자리를 비웠을 때는 순천대장으로서 판옥선 10척을 지휘하기도 했다. "그럼 뭐합니까. 출세도 못하는데요." 변존서가 뜻밖에 툴툴거렸다. 우치적은 변존서가 매우 여유 있는 사람 이라 느꼈다. 탄환이 날아와 방패판이 퍽퍽 부서져 나가는 판인데 활을 장전하고 쏘는 변존서의 움직임은 무척 가벼웠다. "왜? 자넨 임진년 이래로 공도 많이 세웠잖은가?" "저는 통제장군의 외가쪽 사람이잖습니까? 위에 찍혔지요. 이 나이에 주부가 뭡니까? 주부主簿가. 동네 어른들이 저만 보면 '변 주부는 거북선 타는감?'하고 놀리더군요. 별주부 같다나요." 변존서가 거북이처럼 등을 둥글게 굽혔다. 우치적이 낄낄 웃는데 변존 서가 갑판 아래를 가리켰다. 거기에서는 통제사의 맏아들 이회가 통제사 를 몸으로 가린 채 활을 쏘고 있었다. "저기 이회를 보십시오. 오랫동안 전쟁터를 따라다녔지만 아직까지 관 직을 받지는 못했습니다. 나이가 서른이 넘었는데 무과에 응시조차 못했 습니다." "무슨 소린가? 한산도에서 무과를 여러 차례... 아참! 상피相避 제도가 있구나." 아버지가 시험관이니 아들인 이회가 한산도 통제영에서 몇 차례 실시 된 임시 무과시험에 응시할 수는 없었다. 통제사의 친족이라 해서 좋은 것만 있는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동생과 자식에게 공을 세운 것처럼 해 서 벼슬을 받게 한 원균과 이 통제사는 이런 점에서도 달랐다. 그때 우치적이 적 대장선을 살피다가 특이한 것을 발견했다. 그곳에는 왜병들이 몸으로 감싸며 필사적으로 지키고자 하는 인물이 있었다. "응? 저 자가 대장인 것 같다." "토끼 귀 같은 검은 투구를 쓴 왜장 말씀이군요." 우치적이 장전을, 변존서가 편전을 쏘려고 동시에 시위를 당겼다. = 도도 다카도라군 어립선, 겐타로 "뭐하고 있는 거야!" 머리에 둔탁한 충격을 느낀 겐타로가 눈을 떴다. 약간 흐린 눈앞에 엔 메이의 화난 얼굴이 다가왔다. "그렇게 있으면 죽어! 이리 오게!" 주위를 둘러본 겐타로는 조금 전까지 옆에서 싸우던 병사들이 전부 뱃 바닥에 쓰러져 있음을 깨달았다. 주변에서 살아남은 건 겐타로 혼자였다. 다카도라와 같이 있던 엔메이가 일부러 목숨을 걸고 다가와 고함을 지른 것이다. 겐타로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오오쓰쓰를 챙긴 겐타로의 발이 바쁘게 움직였다. 공기를 가르는 소리를 내며 겐타로 옆으로 화살이 지나가 천 수각 기둥에 박혔다. 겐타로는 허리를 더 낮추고 종종걸음으로 엔메이를 따라갔다. 본진에 들어서니 원형으로 몇 겹씩 겹쳐놓은 방패와 그 안쪽을 둘러싼 병사에 의해 지켜지고 있는 다카도라가 보였다. 찢어진 채 불타는 장막 과 혼란에 빠져 허우적대는 다른 병사들과 달리 다카도라는 총대장답게 굳건해 보였다. 요새 같은 그 중심에는 여전히 접의자에 앉은 다카도라 가 시선을 적 대장선에 두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이 곳도 집중적인 포화의 목표물이 되고 있었다. 나무 두 들기는 소리가 몇 번 울리고 나면 반드시 방패 몇 개와 부러진 창 자루, 검 등이 가랑잎처럼 날아갔다. 겐타로가 막 본진 안으로 들어간 직후에 도 그 대나무 쪼개지는 소리가 나며 죽속우 두 개가 썩은 수숫대처럼 부 러졌다. 갑자기 다카도라와 조선군 사이를 가로막은 방패 사이에 사람 크기 만한 구멍이 생겼다. "위험합니다, 다카도라 님!" 뭔가를 직감한 엔메이가 소리친 것과 동시에 구멍을 통해 날아든 화살 2개가 다카도라의 가슴에 명중했다. 그곳에 사람의 벽을 쌓기 위해 움직 이던 무사와 병사들이 채 닿기도 전이었다. 다카도라는 신음소리 한 번 지르지 못하고 접의자에서 앞으로 고꾸라 졌다. 투구에 붙어있던 길다란 깃이 바닥에 눌려 부러졌고, 강철 갑옷이 나무바닥에 부딪쳐 철커덕 소리를 냈다. "주군!" 겐타로와 엔메이를 비롯해 모든 중신과 무사들이 일제히 다카도라에게 달려갔다. 먼저 온 병사들이 몸으로 구멍을 메우고, 이어서 방패를 들고 온 병사들이 그 앞을 보강했다. 가슴에 길고 짧은 화살이 각각 하나씩 꽂힌 다카도라는 거친 숨을 몰 아쉬고 있었다. 부장 다카요시가 다카도라를 재빨리 뒤쪽으로 옮기고 갑 옷 위에 드러난 화살을 칼로 잘랐다. 그리고 서둘러 갑옷을 벗겼다. "괜찮으십니까! 주군?" 잘 살펴보니 화살은 갑옷을 제대로 뚫지 못했다. 긴 화살은 화살촉이 찌그러진 채 갑옷에 걸려있고, 갑옷을 뚫고 조금 깊이 박힌 짧은 화살도 급소가 아닌 곳을 파고들었을 뿐이었다. 처음에 화살이 맞긴 제대로 맞 았지만 매끄럽고 올록볼록한 갑주 덕택에 비껴 맞은 것 같았다. "흐억! 숨쉬기가... 힘들군. 어지러워." 그러나 다카도라는 눈을 똑바로 뜨지 못했다. 아마도 충격으로 인해 호흡곤란이 일어난 모양이었다. 다카도라는 몇 마디 더 하려다가 정신을 잃었다. "주군이 다쳤다! 신호를 보내라!" 부장 다카요시가 옆에 있는 무사에게 침착하게 말했다. 무사는 신호를 맡은 병사에게 달려가 악을 쓰며 명령을 전했다. 격렬한 소음 때문에 이 미 약간 떨어진 거리에서는 명령이 전해지지 않았다. "이젠 정말 나락에 떨어지게 생겼네." 엔메이가 겐타로의 어깨를 붙잡고 비통하게 말했다. 죽음을 슬퍼한다 기보다는 패한 것을 안타까워하는 것 같았다. 엔메이의 파랗게 깎인 머 리와 맑은 눈을 쳐다보던 겐타로도 체념한 듯 씁쓸한 농담으로 대답했 다. "스님은 반드시 성불하실 겁니다." 오오쓰쓰를 쏠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지금 한 두발 쏜다고 해서 뭔가 달라질 것 같지도 않았다. 부장 다카요시가 비장한 태도로 결사반격을 명하는 소리가 들렸다. "모두 죽을 각오로 싸워라! 주군을 구해야 한다!" 조선군의 포화가 방패와 병사를 차례로 날리며 다카도라를 향해 다가 왔다. 다카도라를 위해 죽는 병사들의 비명이 하늘을 찌르는데도 아직 구원에 응해 다가오는 배가 없었다. 주변에 부서지고 불타는 배들이 너 무 많아 가까이 오기 어려운 것이다. 부장 다카요시가 안타까워 발을 굴 렀지만 구원보다는 죽음이 먼저 다가올 것이 분명했다. 다카요시 등은 서둘러 다카도라를 천수각 뒤로 옮겼다. 화살이나 포탄 에 직격을 당하지 않는 대신, 병사들은 불타오르는 천수각에서 뚝뚝 떨 어지는 기왓장을 몸으로 받으며 버텨야 했다. 이때 아래쪽에서 우당탕 소리를 내며 본진으로 다가온 병사들 한 무리 가 있었다. 커다란 체구의 아시가루들 선두에는 웃통을 벗은 요코야마가 있었다. "너희는?" "부탁이 있습니다! 부디 배를 적 대장선에 바짝 붙여주십시오!" 도망가야 할 때에 오히려 적에게 다가가야 한다는 말에 다카요시가 기 겁했다. 지금은 공을 세울 때가 아니라 주군을 구할 때였다. 그것이 전국 시대를 살아온 일본 무사들의 주군에게 충성하는 방법이기도 하지만, 다 른 것도 감안해야 한다. 만약 주군이 죽고 후계자가 제대로 세워지지 않 는 날에는 소속 무사들은 모두 끈 떨어진 연처럼 앞날이 불투명해진다. 그것은 패전이나 죽음보다 더한 공포였다. "무슨 소리냐? 미친 소리 하지 마라!" "제가 적 대장선에 뛰어들어 어떻게든 시간을 벌어보겠습니다! 그 동 안 배를 뒤로 물리십시오. 시간이 없습니다!" 요코야마의 간절한 눈빛이 부장 다카요시와 마주쳤다. 요코야마 뒤에 선 아시가루들도 모두 목숨을 바칠 결심인 듯 비장한 모습들이었다. "좋다. 가라! 어이~ 수부장!" 다카요시의 허락이 떨어졌다. 조금 뒤 어립선이 선수를 틀며 대장선에 뱃전을 맞댔다. 어립선이 크다지만 판옥선과는 높이 차이가 좀 있었다. "감사합니다, 다카요시 님! 그럼 부디 무사하십시오!" 요코야마와 나머지 아시가루들이 일제히 조선 대장선을 향해 돌진했 다. 창과 칼, 대나무방패를 든 아시가루들이 요코야마를 감싸며 쏟아지는 화살을 몸으로 막아주었다. 양파껍질 벗겨지듯 달려가는 도중에 줄줄이 쓰러지는 아시가루들 사이에서 요코야마가 모습을 드러냈다. 훈도시만 걸친 요코야마의 땀에 젖은 가슴살이 출렁거렸다. "요오옷!" 요코야마가 괴성을 지르며 어립선을 박차고 대장선을 향해 뛰었다. 잠 시 허공에 머문 거구가 마침내 조선 대장선에 둔중한 진동을 주며 떨어 졌다. 엄청난 몸무게를 감안하면 대단한 도약력이었다. = 경상우수영 좌선, 요코야마 황소처럼 두터운 허벅지가 갑판을 내리찍었다. 요코야마는 안도감과 긴장을 동시에 느꼈다. 수십 명이 칼과 창, 활과 철포를 들고 요코야마를 노려보고 있었다. 이제부터 어떻게든 싸우며 시간을 벌어야 했다. 조금이라도 몸을 가볍게 하기 위해 갑옷도 벗고 창이나 칼도 들고 오 지 않았다. 스모相撲를 익힌 무거운 몸을 날리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 택이었고, 그래서 지금 요코야마는 그저 맨손이었다. 그렇지만 보통 사람 둘을 합친 것보다 무거운 거구는 그 자체로도 이미 위력적인 무기였다. 요코야마는 정신을 차린다는 뜻에서 양 뺨을 손으로 가볍게 두들겼다. 그리고는 바로 앞에 서서 얼이 빠진 조선군의 몸을 손바닥으로 힘차게 밀었다. 양손으로 연이어 밀 듯 두드리는 쯧파리突つ張り라는 동작이었 다. "으억! 나 죽어!" 체중을 실은 요코야마의 손바닥에 당한 병사는 뒤로 데굴데굴 굴러 쓰 러졌다. 그러자 이번에는 각각 창과 칼을 든 조선군 병사 두 명이 양쪽 에서 요코야마를 노리고 덤벼들었다. "요이샤!" 요코야마가 오른쪽으로 몸을 돌려 칼날을 피하면서 조선군의 허리를 왼손으로 움켜쥐었다. 그리고 오른손으로 반대쪽 옆구리를 강타했다. 스 모를 처음 수련하던 때, 나무기둥을 붙잡고 수백 번을 반복했던 뎃포鐵 砲 동작이었다. 맞은 병사는 입에서 침과 피를 토하며 뒤로 나자빠졌다. 그 순간 등뒤에서 날아온 창끝이 요코야마의 어깨를 스쳤다. 가늘게 베이면서 손을 뻗어 창 자루를 잡아 몸 쪽으로 강하게 끌어당겼다. 그리 고는 엉겁결에 끌려온 병사를 향해 어깨를 앞세워 돌진했다. "으아아악!" 집채만한 몸이 덮친 직후 병사는 허공을 붕 떠서 날아가 장대에 부딪 히며 기절했다. "또 없느냐! 나는 맨손이다. 네놈들도 사나이라면 한번 몸으로 덤벼봐 라!" 알아들을 리 없겠지만 요코야마는 필사적으로 외쳤다. 조선군들의 차 가운 시선이 집중돼도 요코야마는 의연하게 버텼다. 요코야마가 살기 가 득한 눈으로 찬찬히 조선군들을 살폈다. 장대 위에서 갑옷을 입은 장수 둘이 활을 들고 노려보고 있었다. 황금 빛 갑옷을 입은 자는 대장의 풍모가 있어 보이지만 어쩐지 너무 젊은 듯 했다. 그리고 갑판에는 철포나 창칼을 든 호위 병사들에 둘러싸인 늙은 장수가 있지만 소문으로 듣던 그 무시무시한 이순신이라고 생각하기에는 너무 허약해 보였다. 철포를 든 병사가 그 늙은 장수에게 뭐라고 말하는 데, 아무래도 그 조선군은 왜말을 알아듣는 것 같았다. 요코야마가 허리를 낮게 숙이며 두 주먹을 나란히 모아 바닥을 쿵 두 들겼다. 여기저기서 욕설처럼 느껴지는 조선말이 마구 날아들었지만 다 행히 아직까지 화살은 날아들지 않았다. 요코야마는 주춤주춤 물러서는 주위 조선수군들을 보며 마음속으로 다 카도라가 어립선에서 떠나 어서 달아나기를 바랐다. 그것이 지금 요코야 마가 이렇듯 무모하게 스모 솜씨를 펼치며 과장된 몸짓으로 조선군들을 때려 누인 이유였다. 조상 대대로 살아온 영지를 지켜주는 주군을 위해 대신 죽는 것은 병사로서 지극한 영광이었고, 요코야마는 바로 그런 기 회를 맞고 있었다. "아무도 없느냐! 이 겁쟁이 조선 놈들아! 이순신은 어디 있느냐! 다카 도라 님 휘하 아시가루 요코야마가 여기 있다! 소문대로 이순신 네가 그 렇게 용맹하다면 나하고 한번 붙어보자. 자! 덤벼라!" 요코야마가 다시 한번 고함을 질렀을 때, 웅성거리던 조선군들 사이에 서 부리부리한 눈길로 쏘아보는 거한이 나타나 천천히 다가왔다. 얼핏 보기에 요코야마보다 조금 작은 체구였지만, 훨씬 탄탄한 느낌이 들었다. "오너라!" 상대의 눈길에 맞선 요코야마는 드디어 진짜 상대가 나타났음을 알았 다. 쥐었던 주먹을 푼 요코야마가 자세를 고치며 발목과 허리에 온 힘을 모았다. = 경상우수영 좌선, 성복 진무 성복이 성큼성큼 나섰다. 왜인이 허리를 굽힌 채 손뼉을 짝짝 치 고 그 두꺼운 다리를 흉물스럽게 번쩍 들어올렸다가 바닥을 내리치는 동 작이 너무 눈에 거슬렸다. "아따! 이 잡것이 간뎅이가 배때지서 툭 튀 나와부렀어야. 팔하고 다리 몽댕이 기냥 확 쌔리 뿐질라갖고 땡글땡글한 니놈 몸땡이를 구봉산 꼭대 기서 굴리뿌까보다." 통제사 옆에 선 준사가 조총을 왜병에게 향한 채로 성복이 한 말을 왜 말로 통역했다. 조선어를 왜말로 통역하는 것보다는 준사가 사투리를 제 대로 알아들을까 의심스러웠다. 구봉산은 전라좌수영 서쪽에 있는 깎아 지른 듯 가파른 산이다. "나리님들! 이놈에 자식헌테 활은 쏘지 말아주씨요. 왜선들이 시방 쪼 까 뒤로 물러났응께 여유가 잠 있지라? 이 자슥이 왜놈 씨름을 한가본께 이참에 왜놈들헌티 조선 씨름이 더 쎄단 걸 갈쳐줘야 쓰겄당께요! 안 그 요?" 성복이 뒤로 돌아서 외치자 군관들과 수졸들이 칼과 활을 들어올리며 함성을 질렀다. 통제사는 슬쩍 주변에서 벌어지는 전투 상황을 살피더니 인상을 풀고 웃으며 손을 들었다. 성복이 한산도에서 씨름대회를 휩쓸었 다는 사실은 다들 잘 알고 있었다. 씨름은 고구려 벽화에도 나와있지만 한국의 씨름, 일본의 스모, 몽골의 부흐 등 동아시아에 국한된 경기라고 할 수는 없다. 씨름은 러시아, 터 키, 아이슬랜드에도 있고, 한국이나 몽골과 역사적, 문화적 관련이 거의 없는 스위스나 아프리카 흑인, 중남미 원주민 마을에도 있다. 맨몸으로 할 수 있기 때문에 세계 어디서든 자연스럽게 발생할 수 있는 경기가 씨 름이라는 뜻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근세 스위스 사람들의 국민의식을 각성시킨 계기가 된 씨름인 쉬빙겐Das Schwingen은 모래로 북돋은 원형 경기장에서 선 수들이 상대의 샅바를 잡고 싸우며 우승자는 황소를 상으로 받는다는 점 에서, 그리고 손기술, 다리기술, 허리기술 등 다양한 기술이 있다는 점에 서 한국의 민속씨름과 가장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선수들이 허리를 숙 인 자세에서 상대의 샅바를 잡은 채 경기를 시작한다는 것도 같다. "에헴! 그라문 이 행님이 쪼까 몸을 풀어보까?" 진무 성복이 구멍이 숭숭 난 흉갑을 벗은 다음 저고리도 훌쩍 벗어버 렸다. 성복의 우람한 몸은 온통 상처 투성이었다. 지금도 얼굴과 팔뚝에 난 상처에 피가 말라붙어 있었다. 어깨를 한번 휘돌린 성복이 가슴에 힘 을 주자 근육이 불끈불끈 솟았다. 목을 돌리니 우두둑 하는 소리까지 났 다. 그러나 왜병은 기가 죽는 기색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성복이 허리를 약간 숙이며 왜병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왜병이 손을 바닥에 댄 것은 그 큰 몸집으로 돌격해오겠다는 의도로 보였다. 조금 전 에도 봤지만 이 왜인은 체구에 비해 대단히 민첩했다. 자칫하면 낭패를 당할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등줄기를 타고 내려갔다. 그런데 샅바도 없고 기저귀 같은 것만 달랑 차고 있는 왜인의 몸을 잡 을 방법이 없었다. 늘어진 가슴살을 잡을 수 있겠다는 장난스런 생각도 들었지만 땀에 젖어 손이 미끄러질 것 같았다. 승부는 단판에 결판난다. 성복은 조금 더 신중해졌다. "이요오!" 왜인이 쏜살같이 튀어왔다. 성복은 어깨로 부딪치는 왜인을 슬쩍 피하 면서 옆구리를 잡아챘다. 그러나 성복이 기술을 확실히 쓸 사이도 없이 왜인이 바짝 다가와서 붙었다. 그리고 손으로 성복의 옆구리와 겨드랑이 를 잡고 몸 전체로 밀어붙였다. 성복은 왜인이 다른 기술을 쓸까봐 순간 적으로 당황했지만 왜인은 계속 밀어붙이며 위에서 몸으로 누르려 했다. "읏싸!" 성복은 번개같이 몸을 돌리며 왼손으로 왜병의 오른손목을 잡아당기고 오른손으로는 상대방 옆구리에 끼워 돌렸다. 그러나 이 잡치기 기술은 전혀 먹혀들지 않았다. 조금 움직일 듯한 왜인이 허리를 세워 꿋꿋이 버 틴 것이다. 잠시 맞붙은 두 사람은 꼼짝 않고 땀만 줄줄 흘렸다. 성복은 씩씩거리는 왜인의 숨소리 사이로 폭음과 굉음, 그리고 비명 소리를 듣고 있었다. 지금도 다른 배에서는 전투가 계속됐다. 바로 이 좌 선에서도 화포는 계속 발사됐고, 포수들은 씨름을 힐끗거리면서도 장전 과 발사를 멈추지 않았다. 성복은 왜인의 몸에서 잡을 것이 없으니 손기술보다는 다리기술이 낫 겠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왜인은 뒤룩뒤룩한 몸에 다리는 더욱 두꺼워 상대 다리 안쪽으로 파고들어야 하는 안다리걸기나 발등걸이는 도저히 힘들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밧다리걸기나 호미걸이는 이 힘센 놈의 역 습을 받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했다. "우아악! 어매, 이 잡것이!" 갑자기 왜인이 성복의 왼쪽 귀를 잡아 당겼다. 그러더니 연달아 따귀 를 때리기 시작했다. 씨름에서는 둘 다 반칙으로 통하지만 스모에서는 많이 쓰는 기술이었다. 그러나 주먹으로 때리면 반칙이다. 얼떨결에 서너 방 연속 맞은 성복이 왜인의 양팔을 붙잡아 내렸다. 그러나 왜인이 재빨 리 뺀 다음 양손을 성복의 옆구리에 넣고 무릎으로 들어올리려 했다. "들배지기다! 좀 어설픈데?" 구경하던 수졸들이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비슷하긴 했지만 들배지기는 아니고 상대를 들었다가 돌려 바닥에 매치려는 스모 동작이 었다. 이것은 근대 이후 체중 불리기로 일관한 일본의 스모에서 거의 잊 혀진 기술이었다. 성복은 상체를 구부려 틈을 만들면서 방어하다가 잽싸게 오른발로 왜 인의 오른발을 안쪽으로 걸면서 어깨로 밀어붙였다. 들배지기에 대한 반 격으로 호미걸이를 시도한 것이다. 그러나 왜인은 다리를 쭉 뻗어 버티 면서 오히려 상체로 내리누르려고 했다. 성복은 상대의 상체를 흔들면서 거대한 머리와 배에서 빠져 나오려고 했지만 단단히 붙잡혀버렸다. "만만찮다! 왜놈 배가 태산 만해서 다리 기술은 안 통한다! 아니다. 성 복이 네 다리가 짧은 거야!" "성복아! 너 아침 굶었어? 아니면 어젯밤 너무 무리한 거 아냐?" 구경꾼들은 승부를 떠나 씨름 자체를 즐기고 있었다. 같은 편인지 적 인지 모르겠다며 속으로 투덜거린 성복이 땀을 뚝뚝 흘리면서 왜인의 기 술을 재빨리 분석했다. 다리기술은 의외로 적고 손기술과 몸으로 누르는 기술 중심이었다. 지금도 왜인이 거대한 상체를 이용해 성복을 짓누르고 있었다. 엄청난 몸무게에 누르는 힘을 더하자 성복의 무릎이 꺾이기 직 전이었다. 성복은 왜인의 훈도시를 확 끌어당기면서 상대방 몸 안쪽으로 파고들 었다. 불알이 강하게 눌렸는지 왜병이 고통스런 비명을 지르며 몸으로 눌러왔다. 성복은 거의 앉아서 짧은 발걸음으로 다리 사이로 기어 들어 갔다. 그리고 왜인의 양쪽 정강이를 잡자마자 허리를 번쩍 세워 들어올 려 거꾸로 꽂았다. "어여차!" - 쿵! 왜인이 머리를 바닥에 세게 찧었다. 갑판이 부서질 지경이었다. 성복은 한 걸음 물러서서 여장에 세워진 방패판에 기대어 숨을 골랐다. 조선 씨 름은 아니지만 힘으로 따지면 꽤 오랜만에 만난 벅찬 상대였다. 구경하 던 사람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다. "뒤로 뒤집기 한판이다!" "와아! 이겼다! 성복이 잘한다!" 그러나 왜인은 비틀거리면서 일어나 다시 성복에게 달려들었다. 성복 은 잽싸게 허리를 숙이며 상대의 왼손을 잡아 자기 허리에 붙인 다음 머 리를 왜병의 허리 사이로 뺐다. 그리고 어깨로 번쩍 들어 돌리면서 왜병 을 다시 한번 거꾸로 메다꽂았다. 왜인의 머리가 떨어진 곳은 하필 여장 위였다. 여장 모서리가 부서지 더니 왜인이 비명을 지르며 바깥으로 떨어졌다. 그 직후 풍덩 하는 소리 가 크게 났다. "얼씨구! 완전히 이겼다!" "쾌지나 칭칭 나네!" 군관과 수졸들이 일제히 덩실덩실 춤을 추기 시작했다. 성복이 웃는 얼굴로 흐르는 땀을 닦았다. 통제사도 슬며시 웃고 있었다. 판옥선 바깥 에서는 불에 타며 검은 연기를 뿜어내는 왜선들이 가득했다. = 도도 다카도라군 어립선, 다카마사 군감 모리 다카마사는 애간장이 탔다. 어떻게든 살고 싶었다. 지금 여 기서 죽는 건 너무 억울했다. 다카마사는 필사적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렸 다. 아비규환, 그리고 지옥이란 말이 떠올랐다. 다카마사 눈에는 지금 어립 선과 주위에 있는 모든 세키부네가 바로 그런 지옥도를 연출하고 있었 다. 조선 대장선에서 조금 떨어졌지만 부서진 배들 때문에 어립선은 더 이상 꼼짝달싹하지 못한 채 조선수군이 날린 포화를 그대로 얻어맞고 있 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다카도라를 천수각에 올라가지 않는다고 나무라는 대신 어립선이 조선군 판옥선에 가까이 가지 못하도록 말렸어야 했다. 조금 전까지 어립선이 최선두에서 싸운 셈이었다. 주먹으로 주둥이를 툭 툭 치는 다카마사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저 멀리 세키부네 몇 척이 급히 이쪽으로 오고 있긴 했다. 하지만 뱃 전에는 부장 다카요시가 기절한 다카마사를 몸으로 보호하며 주변을 향 해 눈을 부라리고 있었다. 총대장이 후퇴하기 전에는 누구도 함부로 이 배에서 빠져나가지 못한다는 엄포를 놓고 있는 것이다. 부장의 손에 잡힌 일본도의 날이 새파랗게 빛나는 것이 군율을 거스르 는 일이 있으면 즉결처분하겠다는 의지를 확실히 보여주었다. 섣불리 그 쪽으로 가봐야 좋을 게 없었다. "쳇! 저 녀석만 아니면..." 구원선이 도착하고 다카도라가 옮겨 타기까지 얼마나 걸릴지 몰랐다. 아니, 지금 앞을 가로막은 배들의 잔해를 치우고 구원선이 올 때까지 어 립선이 바다에 떠 있을지도 의심스러웠다. 그 동안 얼마나 재수가 좋아 야 살 수 있을까? 다카마사는 입안이 바싹바싹 탔다. 갑판 위에 있던 병력이 거의 다 죽을 무렵 타오르는 불길에 더 이상 견딜 수 없게된 다락 안 병력이 우르르 갑판 위에 올라왔다. 노꾼과 수 부들까지 올라와 살려달라고 외치거나 연이어 바다에 뛰어들었다. "아이고! 나으리! 저 좀 살려주십시오!" 수부 몇 명이 다카마사에게 달려와 다리를 붙잡으며 울부짖었다. 손이 발이 되라 빌며 호소하는 것이 측은해 보이긴 했지만 지금의 다카마사에 겐 그들을 생각할 여유 따위는 없었다. "놔라! 이 놈들아! 이럴 시간이 있으면 싸워서 적을 한 놈이라도 죽여 라! 그게 바로 너희들이 사는 길이다!" 다카마사가 몸을 홱 돌려 수부들을 뿌리쳤다. 설령 백 번 양보해서 다 카마사가 이들을 생각해 준다해도 실제로는 살려줄 방법이 없었다. 다카 마사조차 지금 어떻게 하면 죽지 않을까 고심하던 참이었다. 포화는 조금 줄어들었지만 화살은 보다 많이 쏟아졌다. 화살이 다카마 사의 갑옷에 쇳소리를 내며 부딪치고는 퉁겨나갔다. 살려달라고 계속 빌 던 수부들도 화살비가 한번 지나가자 조용해졌다. 다카마사는 급한 김에 천수각 뒤로 돌아 구석진 곳에 몸을 숨겼다. "아멘! 천주님의 뜻대로!" 다카마사는 이상한 소리에 놀라 쳐다보았다. 무사 한 명이 빗발치는 화살 속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그 무사의 등에는 큼직 한 그림이 그려진 깃발이 펄럭이는데, 그 그림이 또한 가관이었다. 십자 모양의 장대에 매달린 남자가 가시관을 쓴 채 손목과 발에서 피를 흘리 며 괴로워하는 모습이었다. 온몸을 벌거벗은 그 남자는 하반신만 살짝 가린 훈도시를 차고 있고, 겨드랑이 털과 코털까지 자세히 묘사되었다. "천주교 무사로군! 재수 없는 것!" 남만에서 들어온 이상한 종교에 심취한 무사와 영주가 꽤 있다는 것을 다카마사도 알고 있었다. 천주님 앞에 모두가 평등하며 그를 위해 죽음 으로 모두를 구원한 아들이 있어 만민이 구원받았다는 교리도 설핏 들은 적이 있었다. 그렇다면 저 이상한 훈도시 찬 남자가 예수라는 그 남자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다카마사가 아무리 봐도 그건 일본인 죄인의 모습이 었다. 남만교의 신이라면 금발에 파란 눈을 해야 하는 데 전혀 아니었다. "천주님이여! 나를 보호하소서!" 다카마사의 조롱과 상관없이 그 무사는 신념에 찬 얼굴로 눈을 부릅뜨 고는 곧장 앞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불타는 배들을 차례로 건너 조 선 대장선에 뛰어들려는 모양이었다. 다카마사가 속으로 욕설을 퍼부었 다. '무모한 녀석! 화살과 돌을 비오듯 퍼붓는 적한테 일본도만으로 뭘 어 쩌려고? 설마 천주라는 남만신이 보호해 화살과 포탄이 피해갈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다카마사는 뒤에 펼쳐질 끔찍한 광경을 정확히 예측해 냈고, 그 예측 은 어김없이 들어맞았다. 그 무사는 화살비에 고슴도치가 된 채 갑판에 양팔을 벌리고 쓰러졌다. 그 모습이 등에 꽂힌 깃발 속의 사람 모습과 똑같았다. 다카마사는 어이가 없어 쓴웃음을 지으며 소리쳤다. "아멘!" 그 때 우르르 하는 소리를 내며 엄청난 소리가 바로 위에서 들렸다. 고개를 든 다카마사가 비명을 질렀다. 괜히 욕해서 남만 천주가 벌을 내 린 것 같아 다카마사는 필요 이상으로 겁에 질렸다. "으악!" 불타는 천수각의 지붕 한쪽이 무너지며 다카마사가 있는 자리에 떨어 지고 있었다. 다카마사는 네발로 기어 황급히 빠져나갔다. 그렇지만 갈 곳이 마땅치 않았다. 이곳을 벗어난 곳에는 화살과 돌이 계속 날아와 걸 리적거리는 모든 것을 으스러뜨리고 있었다. "에라! 모르겠다." 다카마사는 급한 김에 뱃전을 넘어 바다로 뛰어들었다. 앞 뒤 가릴 겨 를이 없었다. 지금 당장 죽느냐, 아니면 그걸 면하느냐의 문제였다. "푸!" 차가운 바닷물에 뼛속이 저렸다. 자꾸만 몸이 가라앉는 것을 느낀 다 카마사가 물 속에서 허리에 찬 작은칼을 뽑아 급히 갑옷 끈을 잘랐다. 그러자 몸이 서서히 떠올랐다. 그리고 물에 떠다니는 판자 하나가 다카 마사에게 흘러왔다. 운이 좋을 것도 없는 게, 바다는 온통 반쯤 그을린 판자로 뒤덮여 있었다. 다카마사는 있는 힘을 다해 고함을 질렀다. "여봐라! 나는 군감이다! 군감 다카마사다! 나를 구해라! 누구 없느냐!" 그러나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핏빛으로 물든 바다 속에서 둥둥 떠내 려가는 시체와 깃발, 나무토막들만이 다카마사 주변에 몰려들었다. 핏물 이 입에 들어가 비릿한 냄새가 나자 다카마사가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침을 퉤퉤 뱉었다. "비켜! 이 빌어먹을 시체들아!" 피비린내와 여러 가지 악취에 얼굴을 찡그린 다카마사가 그 시체들을 손으로 쳐냈다. 다시 욕설을 내뱉을 때 퍽 소리가 나며 그가 잡고 있는 판자 한 가운데 화살이 꽂혔다. 간담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끼며 다카마 사가 화살이 날아온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얼굴빛이 사색이 되었다. 아까 그 대장선에서 조선군 한 명이 다카마사를 똑바로 쳐다보며 화살 을 날리고 있었다. 주위에 계속 몰려오는 세키부네와 아다케후네를 상대 하기도 벅찰 텐데 일부러 물에 빠진 다카마사만을 노리고 있는 것이다. "이놈아! 도대체 내게 무슨 원한이라도 있는 거냐? 어째서 나만 집요 하게 노리는 거냐!" 이렇게 외치던 다카마사가 눈을 가늘게 뜨고는 입술을 깨물었다. 갑자 기 피가 차갑게 식는 느낌이 들었다. 멀어서 확실히 보이지는 않지만 틀 림없었다. 얼굴 한가운데에 나 있는 검은 점 두 개. "저 녀석! 코가 없어!" 정유재란 때 조선에 온 다카마사가 주로 맡은 일은 군감으로서 각 무 장의 전공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목 대신 왜병들이 베어온 조선 인의 코를 세어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보고하는 일이었다. 일명 '코 수 집'으로 불린 이 일은 그 잔혹함으로 인해 무장들로부터 적지 않은 반감 을 사고 있었다. 그러나 히데요시로부터 할당량이 주어진 무장들은 싫어도 그 일을 해 야 했다. 다이코를 거스를 사람은 없었다. 다카마사도 얼마 전 남원성 싸 움에서 코 40개를 직접 바쳐 히데요시에게서 감사장을 받은 일이 있었 다. 목숨을 간신히 구한 대신 코가 없어진 조선 사람들이 정유재란 때 많이 생겼다고 국내 사서에도 기록되어 있다. 집요하게 날아오는 화살을 피하려고 다카마사가 물 속에서 요동을 쳤 다. 귓가를 스치는 화살, 머리 위쪽으로 날아가는 화살 속에서 다카마사 가 시달리다 못해 잔뜩 쉰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그래! 내가 잘못했다. 용서해라! 그러니 제발 화살 좀 쏘지 마!" 그러나 화살은 다카마사를 비웃듯 줄기차게 날아들었다. 이번에는 어 깨에 화살이 맞았다. 10발이 넘게 날아온 화살에 맞아 즉사하지 않은 것 은 오로지 천운과 다카마사의 체통을 내던진 발버둥 때문이었다. 피를 말리는 이 발버둥이 끝난 것은 다카마사를 알아보고 세키부네를 몰고 온 부장 다카요시의 구원 때문이었다. 언제 어립선에서 세키부네로 옮겼는지 모르겠지만, 다카마사는 반가워서 눈물이 다 날 지경이었다. 세 키부네에서 내려진 밧줄을 타고 간신히 살아서 배에 오른 다카마사가 다 짜고짜 소리를 질렀다. "저놈! 저놈을 당장 쏴 죽이시오! 뭘 하고 있소? 만고하치로 님!" 손가락으로 방금 전까지 자기를 쏜 조선군을 가리키는 다카마사 입에 서 그 동안 시달린 원한이 한꺼번에 발산되었다. 그러나 님이란 존칭을 썼을 망정 아명인 만고하치로라고 함부로 자길 부른 그 무례함에 부장 다카요시가 짐짓 다카마사를 노려보았다. 부장 옆에는 기절해 누워있는 총대장 도도 다카도라를 간호하는 의원과 이를 지켜보는 엔메이, 겐타로 가 있었다. "구해줘서 고맙소! 사례는 나중에 섭섭찮게 하리다. 지금은 적을 죽이 는 게 먼저요, 부장. 다카요시 님!" 그제야 자기 실수를 깨달은 다카마사가 겸연쩍게 말을 돌렸다. 시덥잖 다는 표정을 지은 부장 다카요시가 고개를 돌려 명을 내렸다. "철포조 준비!" = 경상우수영 좌선, 봉학 "이놈에 활이 물을 묵어뿌렀나? 허부지게 안 맞네." 봉학이 빈 활시위를 홱홱 잡아당겼다. 마음먹은 대로 화살이 날아가지 않자 짜증이 샘솟았다. 고개를 드니 해가 서산에 넘어가고 있었다. 바다 에서 이토록 오래 싸웠으니 활줄이 늘어질 만도 했다. 조금 전에 물에 동동 떠다니던 왜장을 맞히려고 화살을 열 개 넘게 쏘 았지만 겨우 어깨에 하나 맞혔을 뿐이었다. 물 속과 바깥을 오가며 버둥 거린 그 왜장은 불타는 왜선들을 밀어붙이고 새로 나타난 왜 중선에 타 고 숨어버렸다. 평소 활쏘기 연습할 때 과녁 거리와 비슷해 물에 빠진 놈을 일부러 노린 건데 목표가 살아 도망가버리자 봉학은 내심 속이 상 했다. "봉학 언니. 방패파안 뒤로 숨느은 게 좋거었는디유?" "왜?" 봉학이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금이에게 되물었다. 종 금이는 말이 느 려 봉학의 성질에 비춰볼 때 엄청나게 답답했다. 봉학이 시위에 화살을 잰 다음 쏘려는 순간이었다. 금이가 다시 느릿느릿 말했다. "왜노옴드을이 언니한테 조초옹으을" - 타다당! "쏘올라 그래유." 금이가 말을 마쳤을 때 봉학은 벌써 어깨를 잡고 주저앉아 있었다. 시 뻘건 피가 옷과 손을 적시고 흘러 갑판에 뚝뚝 떨어졌다. "헉! 으으~ 이 씨벌 잡것! 빨리 좀 말하지." "벌써 쐈네유. 언니. 아파유?" 금이가 달려와 봉학의 왼쪽 어깨를 살폈다. "아프지, 그럼. 니 같음..." "어깨를 사알짝 스쳤어유. 괜찮아유~" "아악! 어깨 잡지 마, 이 씨발 놈아!" 봉학이 펄쩍 뛰었다. 금이가 봉학의 어깨 상처를 활짝 벌리면서 살핀 탓이었다. 금이는 제 딴에 총알이 봉학의 몸 안에 박혔나 걱정해서 한 행동이었다. "아픈 걸 알면 된 거여유. 목숨에는 지장 없어유." "으그! 정종 그 돌팔이헌티 배왔냐?" 봉학이 금이에게 꿀밤을 때렸다. 그때 의원 정종이 달려와 봉학의 상 처를 다시 살폈다. 상처를 벌려 자세히 살피는 것도 방금 금이가 한 것 과 똑같아 봉학이 금이와 마주보며 웃었다. 정종이 상처 부위를 소주로 대충 씻은 다음 약초 몇 가지를 붙이고 하 얀 천으로 단단히 싸맸다. 정종이 선실로 내려가라 했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봉학이 비칠거리며 일어섰다. 피를 좀 흘리긴 했지만 뼈나 다른 급소 를 다친 것도 아니라 계속 싸울만했다. 의원 정종이 피식 웃고 다시 장 대 밑으로 돌아갔다. "언니 코에 시커어머언 검댕이 묻었어유~" "이 웬수야! 이런 난리에 검댕이 무슨 대수겄냐?" 봉학이 힘껏 시위를 당겼다 놓았다. 화살이 날아가 왜병이 쓴 삿갓에 정통으로 맞았다. 그 왜병은 펄쩍 뛰어오른 다음 바닥에 쓰러졌다. "코가 잘린 사람처럼 보이니까 그렇지유." "뭐, 으떠냐. 근처에 이쁜 삭시도 없는디." 판옥선에 기어오르려는 왜병이 없어 금이는 계속 봉학 옆에서 쫑알댔 다. 봉학은 대충 대꾸하면서 다시 시위를 당겼다. 하필 힘이 많이 들어가 는 왼쪽 어깨를 다쳐 활을 쏠 때마다 아프고 이렇게 계속 활을 쏘면 상 처가 덧날 것 같았다. 그러나 의원 정종은 이런 종류의 치료는 잘하는 편이라 봉학은 조금 안심했다. 다만 정종은 지난번 한산도에서 돌림병에 떼로 쓰러진 수군들 을 하나도 구하지 못해 아직도 실의와 죄책감에 빠져 있는 사람이었다. 3. 소용돌이 (3) = 거제1선, 안위 거제1선은 불타는 왜선들을 헤치며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조총 소 리는 이제 거의 들리지 않고, 판옥선에서 화포 쏘는 소리만 가끔 바다를 뒤흔들었다. 지금은 왜선 잔해와 충돌할까봐 더 걱정할 정도로 근처에 위협이 될만한 적은 아예 없었다. "좌선이오. 멋있군." 정공청이 사뭇 감동한 말투로 나직이 말했다. 안위가 고개를 들고 보 니 과연 물살에 떠내려가는 왜선들 사이로 좌선이 우뚝 서 있었다. 왜선 들이 불타면서 내뿜는 시뻘건 불길과 검은 연기 사이로 군데군데 구멍이 뚫린 커다란 교룡기와 수자기가 위용을 뽐내며 바람에 펄럭였다. 그러나 좌선은 온통 피에 젖은 데다 곳곳에 구멍이 뚫리고 부서져 무 척 흉물스러운 모습이었다. 좌선에 가까이 갈수록 그 모습은 더욱 흉칙 했다. 왜군의 살점이나 내장 일부가 말라붙은 피와 함께 배에 달라붙어 있었다. 어두컴컴한 방안에서 평생 글이나 읽던 선비가 지금 이 좌선을 본다면 하루종일 게워낼 끔찍한 모습이었다. 안위는 바로 그런 모습 때문에 정공청이 감탄한다고 생각했다. 좌선은 뒤에서 지휘만 한 것이 아니라 가장 앞에서 싸웠다. 그것도 처음에는 좌 선 단 한 척으로 왜군 전체를 막아낸 것이다. 왜 수군들이 명량을 돌파 했다면 바로 죽임을 당했을 수많은 백성들을 생각하면 무장들 눈에 저 좌선은 무척 아름답다고 할 수 있었다. 안위가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쉬 며 중얼거렸다. "우리 나라는 망하지 않을 것 같소." "그야 당연하지요. 다 통제사또 덕택이지요. 그런데 거제원께서는 꽤나 섭섭하시겠군요." 정공청이 싱글벙글 웃으며 안위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나 안위는 짐짓 모르는 척했다.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시오? 나도 이 나라 백성이고 주상전하의 신하 이며 장수요." "후후! 아까 나하고 다 터놓고 말하지 않았소? 내가 죽을 줄 알았지 요?" "으윽! 정 만호!" "훗! 너무 그러지 마시오. 나도 같은 생각이니까. 이놈의 나라, 이 기회 에 한번 망해야 하는데. 쩝!" 그러나 수군 장수들이 다른 생각을 해봤자 뾰족한 수가 없었다. 그리 고 전쟁 와중에 내분이 일어나면 자칫 왜적에게만 이로울 뿐이다. 내란 을 핑계로 명나라 군대가 조선을 힘 하나 안 들이고 접수할 수도 있었 다. 게다가 결정적인 난관이 있었는데, 정공청의 고민도 같았다. "통제사또야 원래 당파색이 없지만, 문제는 남인들과 생각이 비슷하다 는 게요. 서인들에게 임금은 그저 사대부들 가운데 모범을 보여야 할 으 뜸 사대부 정도인데, 남인들에게는 목숨을 바쳐 모셔야 할 충성의 대상 이오. 그렇기 때문에 남인은 결코 안정적으로 권력을 쥘 수 없는 법이오. 언제든 임금이 남인들을 내칠 수가 있을 정도로 스스로 한계를 지으니 말이오. 통제사 영감이 서인 계열이라면 훨씬 쉬울 텐데, 아쉽소." "호오! 정 만호께서는 무관치고는 참 대단한 안목이시구려." "다 먹고살자고 이렇게 신경 쓰는 게 아니겠소? 지금 위에서는 서인을 중용하긴 하지만, 글쎄요. 동인 세력을 통해 서인들을 견제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계시오. 그러나 언젠가는 서인들에게 송두리째 잡아먹히고 말 거요. 임금이 항상 붕당간의 세력균형을 조정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 말 이오." 임진왜란 기간 동안에는 일부 시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유성룡 등 동 인이 정권을 잡았다. 그러나 선조가 결정적인 선택을 할 때는 서인의 의 견을 많이 참작한 편이었다. 명분론에 입각한 무조건적인 충성파보다는 임금의 힘을 이용해 어떤 정책을 펼치려는 현실적인 자들이 임금 입장에 서도 이용가치가 큰 편이다. 왕권 강화를 위해서도 선조는 당파싸움을 자주 이용했다. 그러나 이런 선조의 집권책략은 후대에 두고두고 악영향을 끼쳤다. 이 후 영조와 정조 시대를 제외하고 대대로 왕권이 신권에 비해 지나치게 약화됐을 뿐만 아니라 국가 자체가 특정 붕당의 전유물이 된 것은 선조 임금의 탓이 크다고 할 수 있다. "험! 험! 어떻소? 거제원께서 밀어만 주시면 제가 길삼봉처럼 모주가 될 수도 있지요." 안위는 머리 속에서 위험신호가 가득 감지되는 것을 느꼈다. 함정일 지도 몰랐다. 역모를 고변하면 공신이 되어 자손대대로 부귀를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은 양반에게도 엄청난 유혹이었다. 정여립의 난을 배후에서 조종했다고 알려진 길삼봉이 누구인지 설이 분분하나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기축옥사를 일으켜 동인을 몰락시키려 는 서인들이 가상의 인물을 내세웠다는 등 실체가 극히 불분명하다. "통상의 생각을 바꿀 수가 없겠소? 다짜고짜 역모를 꾸미라고 하면 오 히려 저 고지식한 통상께 우리가 먼저 참수 당해 조리돌림 당할 게 뻔하 오. 그리고 통상은 기축옥사 때 마음 고생을 많이 한 분이라 쉽게 나서 긴 어려울 게요. 끙! 우리가 이몽학이처럼 엉뚱하게 통제사 이름만 팔아 먹을 수도 없고 말이오." "오호라! 거제원께서는 이제 저를 확실히 믿으시는 건가요?" 정공청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안위는 이 속을 알 수 없는 자가 위험 하긴 하지만 잘하면 천군만마가 부럽지 않을 것 같았다. 조금 전에 언덕 에서 왜군과 싸울 때도 선두에 서지 않았던가? 아무래도 정공청은 계획 을 짜고 사람을 끌어들이는 모주보다는 실행 단계의 선봉장이 맞을 것 같았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백성들 삶이 좋아지겠소?" 안위가 약간 동떨어진 말로 정공청을 떠보았다. 그러자 정공청이 싸늘 하게 내뱉었다. "흥! 거제원은 순진하시구려. 그럴 리가 있겠소? 나 같은 벼슬아치가 얼마나 많은지 거제원도 잘 아시지 않소?" "뭐 그렇더라도, 정 만호 정도만 된다면 좋겠소만." 안위가 보기에 정공청은 어느 정도 환경만 갖춰진다면 수치도 알고 할 일도 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만약 서인들이 왕권을 확실히 견제하고 권력을 위해 턱도 없는 역모사건을 일으키지만 않는다면 차라리 서인이 정권을 잡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백성들이 임금에 대해 무조건 충성을 바치지 않고 다른 생각을 품은 것은 연산군을 쫓아낸 중종반정 이후 계속된 추세였다. 이번 임금 때 그 런 생각은 더 널리 퍼졌다. 전쟁 중에 천민들에 의해 서울이 불타고 함 경도에서는 왕자를 왜적에게 넘기는 사건이 일어났고 반란이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민심은 임금에게서 떠난 지 이미 오래였다. 갑자기 정공청이 한숨을 팍 내쉬더니 중얼거렸다. "쳇! 거제원은 참 좋겠소." "뭘 말이오?" 안위가 눈썹을 씰룩였다. 안위가 정공청에 비해 유리한 점은 딱 하나, 무과 출신자로서 지방 수령을 맡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만호는 잘해야 두 번 정도 임기를 마치면 그것으로 끝이다. 아무리 용감하고 모범적으 로 임기를 마쳐도 첨사 등으로 벼슬이 올라가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그래도 명색이 무과 출신자인 안위와는 신분 차이가 있는 것과 다름없었 다. 그러나 정공청은 엉뚱한 말을 꺼냈다. "거제원께서는 아까 봄꽃이가 보낸 큰절은 받았소?" "무, 무슨 말이오?" 당황하는 안위를 보고 장난기가 발동했는지 정공청이 피식 웃으며 턱 으로 우수영 쪽 언덕을 가리켰다. 피난민들이 있는 언덕은 멀고 중간에 연기가 자욱해 여기에서는 가물가물했다. 그러나 새하얀 옷을 입은 사람 이 부시도록 눈에 들어왔다. 봄꽃이는 아까 그 자리를 그대로 지키고 있 었다. "맞절까지 했소?" "허험! 농이 심하시오." 안위가 능글능글 웃는 정공청의 시선을 피했지만 정공청은 반대쪽으로 돌아가서 안위를 계속 긁어댔다. "거제원이 거의 숫총각이나 다름없는 홀아비인 걸 내가 아는데 봄꽃이 앞에서는 왜 유부남 행세를 하셨소? 설마 도움을 주고받는 그런 관계는 아니겠지요? 그럼 내가 가만 두지 않겠소!" "어허! 그런 더러운 관계는 절대 아니오!" "오호! 그래요? 그럼 나중에 함진아비는 내가 맡으리다. 약속이오!" 농인지 진담인지 알 수 없어 안위는 헛기침을 하면서 눈길을 멀리 보 냈다. 판옥선들이 좌선 주위에 몰려와 진형을 새로 짜고 있었다. 중군선 에 오른 깃발과 좌우로 분주하게 이동하는 판옥선들을 보니 새로운 진형 은 둥그런 원진圓陣이었다. 거제1선이 제 위치를 찾아가는 동안 안위는 뭔가 심상찮은 분위기를 감지했다. "통상께서 각오를 단단히 하셨나 보오." 안위가 조금 긴장했다. 통제사는 왜선들을 아예 박살낼 모양이었다. 적 대장선을 깨뜨렸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앞에서 버티는 왜선은 백 척 남짓 이었다. 그 왜선들 말고 뒤에도 많았다. 다 합해 300척이 훨씬 넘었다. "어? 통제사 영감이 우수사를 아예 선봉에 내세웠구려. 저기 좌선 화 포가 놓여진 방향을 보시오." 정공청이 가리킨 방향을 보던 안위가 배꼽을 잡았다. 좌선 갑판에 늘 어선 화포 두 개가 바로 그 앞에 떠 있는 전라우수영1선의 장대를 향하 고 있었다. 전우수1선의 장대에 있는 장수들은 바닥에 바짝 엎드린 채 팔로 머리를 감싸고 있었다. "하하! 정말 고소하구려. 우수사 얼굴이 사색이 된 게 눈에 선하오. 오 늘 있었던 일들 중에서 가장 통쾌한 장면이오." 지루한 싸움은 이제 막판으로 달리고 있었다. 잠시 후에 판옥선들이 일제히 불을 뿜었다. = 도도 다카도라군 세키부네, 겐타로 전황은 절망적이었다. 기절한 총대장 다카도라를 옮기고 임시로 함대 를 지휘하는 부장 다카요시의 얼굴이 점점 침울해졌다. 한참을 뒤로 물 러나 지휘체계를 회복하고 함대를 수습하려 했지만 연이어 들리는 보고 는 참담한 패전의 징조뿐이었다. "중군 사무라이 대장 스기다니 고레유키 님 전사! 명복을!" "후군 사무라이 대장 나가다 고레우지 님 용전 끝에 전사!" 고바야를 타고 달려온 전령들이 잇달아 각 단위함대 지휘관의 사망을 알렸다. 다카요시가 눈부신 수완을 보이며 엉망이 된 어립선 호위선들과 후군 일부를 합해 임시로 본진함대를 편성하긴 했지만 거기까지가 한계 였다. 이미 잃어버린 전의를 회복시킬 방법은 다카요시에게도 없었다. "고레유키와 고레우지가 죽었다고. 그들이 죽었단 말이지..." "다카도라 님! 이제 정신이 드십니까?" 조금 기력을 차린 다카도라가 눈을 뜨자마자 들린 보고에 침통한 표정 을 지었다. 아끼던 무장들을 한꺼번에 잃은 비통함이 목소리 가득 묻어 나왔다. 엔메이가 상태를 물었지만 그 말에는 대답도 하지 않았다. 스기다니 고레유키衫谷惟之와 나가다 고레우지長田惟氏는 칠천량해전 당시 다카도라 밑에서 함께 싸우며 대단한 수훈을 세운 것으로 알려진 무장들이었다. 전군을 맡은 사에키 고레마사는 여지껏 죽었는지 살았는 지조차 알 수 없었다. "아무래도 더 이상 싸우는 건 무리일 듯 싶습니다, 다카도라 님." 엔메이가 눈을 지그시 감고 있는 다카도라에게 조심스럽게 후퇴를 건 의했다. "일단 오늘은 물러나시고 기회를 보아 다시 적을 섬멸하심이..." "후퇴라니! 무슨 소리요? 수백 척을 헤아리는 우리 일본수군이 겨우 열 척 남짓한 조선수군에게 등을 보이고 달아나다니, 그게 말이 됩니 까?" 군감 다카마사가 극력 반대했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군감께서는 바닷물에 젖은 옷이나 털고 말하시지요! 흥! 화살은 뽑으 셨군요." 부장 다카요시가 눈을 흘기며 쏘아붙였다. 군감답게 의연하게 앉아 죽 지도 않고 바닷물에 뛰어들어 살겠다고 아우성을 친 주제에 조용히 있기 나 하라는 말이었다. 군감 다카마사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하지만 사 실이었으므로 반박하지는 못했다. 패배. 동료들의 죽음과 후퇴, 그리고 굴욕이 합쳐진 이 단어가 실체가 되어 다가오자 겐타로는 온몸의 힘이 빠져나가는 걸 느꼈다. 그건 절망 이었다. 도저히 넘을 수 없는 벽처럼 느껴지는 조선수군 앞에서 최고의 선전을 한 사람은 요코야마 정도일 뿐이라고 겐타로는 생각했다. 사무라이로 출세할 전공을 쌓으려고 기운차게 움직이던 때가 바로 오 늘 아침이었다. 아직 그 해가 서편으로 지지도 않았는데 모든 것이 바뀐 것이다. 하늘과 바다, 초목과 대지를 놔두고 사람만이 그 짧은 시간동안 바뀌고 사라졌다. 겐타로가 그렇게도 찾고 싶었던 친구 얼굴을 본 것도, 그와 짧게 스쳐지나간 것도 저 해가 떠있는 동안의 일이었다. "직산에서 전령이 왔습니다!" 한양 아래쪽 직산까지 진격한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군은 하루에 한 번씩 전령을 보내 수군의 진격속도를 점검했다. 구로다군은 모리 히데모 토毛利秀元를 총대장으로 한 우익군의 선봉이었다. 반면에 수군의 모든 무장들은 우키다 히데이에宇喜多秀家를 총대장으로 한 좌익군에 속해있 었다. 두 부대는 아산만에서 합류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수군이 중심이 된 좌군이 서해를 거쳐 군량과 탄약 등을 싣고 가면 이를 육군 중심의 우군 이 받아 서울로 진격하는 것이 계획이었다. 한성 부근에 다다른 구로다 군이 가장 걱정한 것은 며칠 전에 한번 싸웠고 숫자도 얼마 되지 않는 명나라 군대가 아니라 바로 보급이었다. 그래서 이렇듯 매일같이 전령을 통해 수군의 보급을 독려하는 것이다. 직산에서 명군과 한판 붙고 나서 구로다군은 며칠째 제자리에 못 박혀 있었다. 그러나 가만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부대를 작게 쪼개 사방으로 내보냈고, 악착같이 식량을 긁어모았다. 그러나 추수가 지난 철인데도 불 구하고 인근 마을에서 약탈한 식량은 군량으로 쓰기에는 턱없이 부족했 다. 구로다군을 포함한 일본 우군 전체는 전적으로 수군의 군량보급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다카도라 님!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이번에 온 전령은 지위가 꽤 높은 무사였다. 그는 접의자에 앉지 못하 고 갑판에 앉아 의원의 처치를 받고 있는 다카도라에게 따지듯 물었다. "아침 일찍 어란포를 떠났다는 말을 듣고 왔습니다. 겨우 여기까지밖 에 못 왔습니까?" 진군 속도가 너무 느리다는 말이 아니라 아직도 싸움을 끝내지 못했냐 는 핀잔이었다. 그 전령은 지금 일본수군 전체가 패배에 직면했다는 사 실을 전혀 모르는 듯했다. 불타는 배들을 보며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은 했겠지만 설마 이 많은 일본수군이 존재도 미약한 조선수군에게 패하리 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끈질기게 저항하는 조선수군과 교전 중이오." 부장 다카요시가 시원하게 대답하지 못하는 다카도라를 대신해 대답했 다. 그러자 전령이 즉각 반박했다. "칠천량에서 이미 전멸한 조선수군이 저항은 무슨 저항이오? 한가하게 뱃놀이하지 말고 빨리 오시오! 우린 지금 군량이 다 떨어져 가고 있단 말이오. 약속한 날짜까지 아산만에 군량을 가져오지 못하면 우린 들풀을 씹어야 할 판이오!" 다카요시는 차마 대답을 하지 못했다. 하긴 총대장 다카도라부터 잡병 인 겐타로까지 이번 싸움이 이렇게 힘든 싸움이 되며 끝내는 패해 달아 나야 하는 처지까지 되리라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신중한 엔메 이조차도 그런 예측은 내놓지 않았다. "고전하고 있소. 하지만 내 어떡하든 반드시 군량은 보내드리리다. 며 칠 늦어질 수도 있으니 그때까지만 참아주시오." 다카도라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감정을 절제하려 애썼지만 목소리에 는 사정을 드러내놓고 설명하기에는 너무도 창피하다는 치욕이 잔뜩 스 며있었다. 전령으로 온 무사가 해협 입구 쪽을 힐끗 보며 목소리를 높였 다. "고전이라니요? 겁쟁이 조선군 정도는 용감하게 육박전을 벌이면 간단 히 무너질 거 아니오! 지금 보니 조선수군은 이제 몇 척 안 남은 것 같 은데, 한번만 더 밀어붙이면 되지 않소? 그 정도 용기도 없소?" 다카도라를 위시해 주변에 있던 모든 무사들이 고개를 숙였다. 벌겋게 달아오른 무사들 얼굴을 보고 전령은 뭔가 잘못 됐음을 깨달았는지 눈치 를 살폈다.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일본수군 부대를 찾았다. "용맹하다는 구루지마 해적은 다 어디 갔소? 와키자카군도 안 보이는 데, 먼저 서해로 진입한 거요? 어? 하치스카 이에마사 님은 왜 싸우지 않고 뒤에 가만 계시는 거요? 아니! 이제 보니 하치스카군의 어립선은 어디 가고 저런 초라한 배에..." 전령이 당황하기 시작했다. 어쩔 수 없이 다카도라가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간신히 입을 열었다. 총대장이 말하는 동안 옆에서 듣는 겐타 로까지 처량한 기분이 들었다. "잘 알겠소. 그러니 오늘은 이만 돌아가 주시오. 믿어지지 않겠지만 지 금 보고 계신 조선수군이 오늘 우리 일본수군을 상대한 전부요. 처음부 터 13척이었고, 지금도 여전히 13척이란 말이요." 나머지는 엔메이가 나서서 처리했다. 엔메이는 부드러운 말과 조리 있 는 설명으로 일단 그 무사에게 지금의 전황을 이해시켜 돌려보냈다. 전 령선으로 가는 중간에 엔메이 입에서 구루지마 미치후사와 와키자카 야 스하루의 이름이 나왔을 때 전령은 눈을 동그랗게 뜨기까지 했다. 전령 은 배를 떠나면서도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조선수군과 불 타는 일본수군 함대를 번갈아 보며 혀를 찼다. 그 동안 다카도라는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앞쪽을 뚫어져라 지켜보았 다. 마치 오늘의 패전을 낱낱이 눈에 새겨두려는 듯했다. 겐타로도 그쪽을 지켜보았다. 연이어 불타며 무너지는 세키부네의 망 루, 몸에 불이 붙은 채 바다에 뛰어드는 병사, 허공에서 출렁이다가 바닥 에 떨어지는 군기들이 눈동자를 어지럽혔다. 일본군은 소낙비에 허둥거 리다 물에 빠져 죽는 개미들 같은 반면, 조선군은 평원을 달리는 말 탄 무사 같은 늠름한 모습이었다. "후퇴한다. 전군에 후퇴명령을 내려라." 다카도라의 시선이 전장에서 떨어졌을 때 그의 입에서 마침내 패배를 인정하는 말이 나왔다. "주군!" 예상된 일이었지만 그래도 인정하고 싶은 사람은 없었다. 부장 다카요 시가 피를 토하는 목소리를 냈다. 그렇지만 다카도라는 그에게 고개를 한번 저어 보이고는 이어서 다른 명령을 내렸다. "노부시치로!" "예!" 군용물자 수송을 맡은 부교 노부시치로信七郞가 다카도라의 부름에 얼 른 대답하며 앞으로 나왔다. "가토 요시아키 님에게 퇴각하는 본진의 후미를 맡아달라고 전해라. 그리고 만고하치로!" 다카도라가 친근감의 표시로 부장 다카요시의 아명을 불렀다. 다카도 라의 마지막 명령이 떨어졌다. "지금까지 애썼다. 이후 지휘를 부탁한다." 다카도라는 다시 눈을 감았다. 기력이 쇠한 탓에 이제까지 말한 것만 으로도 힘에 겨운 듯했다. 가슴에 꽂힌 화살 때문에 흘린 피와 오늘 전 투의 격렬함이 일본수군 총대장의 모든 기운을 빼앗아 버렸다. "후퇴!" 부장 다카요시가 거의 울음 섞인 목소리로 외쳤다. 전 함대가 신호에 따라 천천히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겐타로는 오늘 총신이 터지도록 쏴댄 오오쓰쓰를 잠시 노려보았다. 그 러더니 머리 위로 번쩍 치켜들어 바다에 던져버렸다. 시체와 판자조각으 로 가득 찬 바다는 오오쓰쓰를 삼키고도 시치미를 뗀 듯 고요히 흘렀다. "왜 그러나? 비싼 무기인데. 아직 전공도 세우지 못하지 않았나?" 엔메이가 놀라 물었다. 겐타로는 포성이 요란히 울리는 바다를 흐르는 물살을 보며 거침없이 대답했다. "모든 게 변했으니까요. 전 일본에 돌아가고 싶습니다." 엔메이가 설명을 요구하는 눈길을 보냈지만 겐타로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피곤했다. 그리고 모든 게 허무했다. 4. 운명의 적 (1) = 가토 요시아키군 어립선, 가토 요시아키 "그럼, 준비해라! 후미의 임무다." 총대장 다카도라의 명령을 전달받은 가토 요시아키가 차분하게 지시했 다. 예측이 맞았다 해서 결코 으스대거나 거드름을 피우지 않았다. 처음 에 그랬듯이 끝까지 신중한 자세와 말이었다. "과연! 주군이 옳았습니다." "죄송합니다. 우린 모두 바보였습니다!" 처음에는 요시아키에게 불만을 품던 중신과 무사들이 전황이 기울어 감에 따라 감탄을 거듭했다. 다카도라가 전군의 패배를 알리며 요시아키 군에게 후미를 맡아달라고 부탁하자 감탄은 극에 달했다. 무사들은 마치 군신이 환생한 것 같은 주군의 혜안에 저절로 숙여지는 머리를 주체하지 못할 정도였다. "그렇게 칭찬할 것 없다. 그래봐야 나 역시 패장일 뿐이다. 상황에 따 라선 너희들과 함께 여기서 죽을 수도 있다." 충분히 쉬어 기력을 보존한 가토 요시아키군이지만 지금 맡은 임무는 퇴각하는 함대의 후미라는 아주 위험한 역할이었다. 전군이 도망가는 와 중에 쫓아오는 적을 저지하며 싸우고 더불어 질서정연하게 후퇴해야 한 다. 말이 쉬워서 질서정연한 후퇴지 야전이라면 대개 전멸을 당하거나 치명적 타격을 입게 된다. 요시아키는 모두에게 강한 긴장을 요구했다. "뒤에 머무른 시마즈 요시히로 님께 전령을 보내 지원을 요청한다. 우 리가 조선수군에 비해 군선 수는 세 배, 병력은 두 배 가까이 되지만, 만 일을 대비하는 거다. 그리고 수부들 눈을 가려라." "수부들의 눈을!" 느긋하게 수염을 쥐고 있던 중신 한 명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수부들 의 눈을 가린다는 건 결사의 의미로 싸우겠다는 각오였다. 눈이 가려진 수부는 밖의 전투가 어떻게 되는지 파악할 수 없다. 따라서 도망가지도 못하고 맹목적으로 지휘자의 말에 따라서만 노를 젓게 된다. 좋은 방법 이지만 적에 대한 막연한 공포감을 확산시키는 부작용도 있어 비상시에 나 쓰이는 방법이었다. "준비가 끝나는 대로 간다. 한쪽으로 아군의 퇴로를 확보하라! 나머지 는 대열을 편성해서 싸우고 후퇴하는 식으로 교대해 싸운다. 끝까지 적 을 저지하는 거다!" 진형 준비는 금방 되었다. 오랫동안 기다려 온 싸움을 하게 된 무사와 병사들 눈에 활기와 살기가 가득 차는 순간 요시아키가 힘차게 소리쳤 다. "전군, 앞으로!" 7척을 한 줄로 해서 5겹으로 열을 형성한 가토 요시아키 함대가 일제 히 조선수군을 향해 나아갔다. = 경상우수영 좌선, 우치적 "끝이 없군." 우치적이 설레설레 고개를 젓더니 퉁퉁 부어 오른 오른손 엄지를 살폈 다. 뼈까지 어긋난 것 같고 골무가 조여와 바늘로 뼈를 콕콕 찌르는 느 낌이었다. 그래도 우치적은 다시 시위를 힘껏 당겼다. 석양의 붉게 물든 빛을 받 은 화살이 좌선 앞에서 화포를 쏘는 전라우수사 배의 장대 너머 멀리 왜 선 속으로 사라졌다. 어느덧 네 번째 싸움이었다. 왜군은 그렇게 많은 피해를 입고도 다시 새로운 함대를 내보냈다. 조선수군은 한 척이라도 잃으면 전력손실이 눈 에 뜨이겠지만, 왜 수군은 끊임없이 새로운 군선을 투입했다. 그러나 우치적은 두렵지 않고 오히려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지금 조 선수군과 맞선 37척 정도가 왜군이 내놓은 마지막 함대였다. 싸움 뒷전 에서 깃발을 휘날리며 도사리고 있던 왜선 200여 척은 가장 먼저 달아나 고 있었다. 조금 전에 패해 달아나던 왜선들이 오히려 그 배들을 호위하 는 태세를 갖추는 것으로 봐서, 그 200척은 전선이 아니라 수송선이라는 의심이 들었다. 싸움터에서 멀지 않았는데 노를 젓지 않고 돛을 이용해 달아나는 것을 보면 그것들이 수송선이란 사실은 틀림이 없었다. 우치적은 가슴이 벅차 오르기 시작했다. 눈앞의 왜선들만 부수면 패해 도주하는 수많은 왜선들을 쫓아가 일방적으로 두들길 수 있기 때문이었 다. 엄청난 승리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잘 알고 있을 통 제사는 뜻밖에 차분하게 바로 앞을 가로막은 왜선들에게만 집중했다. "후퇴하는 자기네 배들을 위해 몸으로 막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그래. 그런데 단병접전을 안 하는 게 전혀 왜놈답지 않군." 변존서 말에 우치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기편을 위해 몸을 던져 막는 것은 훌륭하다 해도, 왜군의 장기인 단병접전을 시도하지 않는 것 은 이상했다. 마침 물살도 유리하게 바뀌어 밑에 있던 격군들 거의 절반 이 올라와 있어 우치적은 단병접전에도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격군들은 하는 일도 없이 불타는 왜선들을 구경하면서 연신 감탄만 했다. 우치적은 잠시 후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맨 앞에 선 왜선 몇 척이 부서지면 그 배들이 도망가는 것이 아니라, 맨 뒤로 들어갔다가 다시 차 례로 앞으로 나오는 것이다. 저 왜선들을 지휘하고 있는 왜장은 단병접 전은 아예 포기하고 최대한 시간을 끄는데 싸움의 초점을 둔 모양이었 다. "저렇게 맞고도 조직적인 저항을 하다니. 대단한 놈들이야." "그래도 얼마 가지 못할 겁니다." 포화를 서너 번 뒤집어 쓴 왜선은 아무리 싸우려고 해도 이미 싸울 자 가 없었다. 그저 일방적으로 화포 몇 방 맞고 부서져 떠내려갈 뿐이었다. 조선수군의 원진에 대해 왜선들은 두툼한 네모꼴의 직진直陣이라 맨 앞 부분은 왜군들이 훨씬 유리할 텐데, 우수사가 장대에 숨어 벌벌 떠는 전 라우수영1선 하나 제대로 공략하지 못했다. 우치적이 주변을 살폈다. 해협 입구에서 이미 상당히 떨어진 곳이었다. 며칠 전까지 진을 쳤던 벽파진이 어느새 뒤로 지나가고 있었다. 우치적 은 설마 왜군이 매복을 하지는 않았겠지 하면서도 불안한 느낌을 감추지 못했다. 조선수군의 단 한번의 패배가 곧 나라의 멸망과 직결된다. 통제 사도 그게 불안한지 근처 섬들 뒤에 혹시라도 왜선이 없는지 보고 또 보 았다. = 가토 요시아키군 전군, 우마노스케 조선군의 화포 사거리에 접어들자 가토군의 첫 번째 열이 앞으로 나가 철포와 활을 쏘며 질서 있게 싸웠다. 같은 줄에 있던 배 세 척이 집중포 화에 무너지자 그들은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일정한 간격으로 늘어선 7 척 뒤에는 반대로 그 간격을 메우듯 같은 간격으로 늘어선 7척이 있었 다. 그 두 번째 열이 전면이 되어 다시 조선수군을 상대했다. 두 번째 열 역시 상당한 피해를 입으며 뒤로 물러섰다. 이런 식으로 한 줄씩 뒤로 물러서는 가토 함대는 악착같이 조선군을 저지했다. 승세를 탄 조선군의 추격에 따른 피해를 최소화시키고 아군의 안전한 퇴각을 지켜준다는 막중한 의무가 그들의 어깨에 있었다. "난 싫어! 난 싫다고!" 그러나 가토군에 속한 모두가 그런 사명감과 전의에 불타는 건 아니었 다. 어두운 세키부네의 다락 안에 갇힌 수부 우마노스케馬ノ介는 조그만 목소리로 연신 이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눈은 검은 천으로 가려져 있 고 손은 수부장이 지르는 함성에 맞춰 쉴새없이 노를 저어야 했다. 아무 것도 볼 수 없었다.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는 그저 물소리와 갑옷 쩔그렁거리는 소리만 들리던 것이 이제는 함성과 폭음과 둔탁한 소리 등 이 마구 귀로 흘러들었다. 우마노스케가 흘린 눈물이 눈을 가린 천을 가 득 적셨다. "살고 싶어. 난 살고 싶어! 죽긴 싫어!" 우마노스케는 전쟁이 벌어진 첫해에 뽑혀 동원된 수부였다. 첫 번째 싸움에서는 다락을 마구 뚫고 들어오는 포환과 철환, 그리고 죽어 가는 동료들의 절규 틈에서 간신히 살아남을 수 있었다. 두 번째 전투에서도 죽을 뻔하다가 살아남았다. 이런 지독한 싸움이 있다고 들어보지 못한 우마노스케는 덜컥 겁을 집 어먹었다. 조선수군과 계속 싸우다가는 틀림없이 죽을 것 같았다. 그리고 이런 일방적인 싸움이 계속되자 군량수송에 동원되는 배 숫자가 줄어 식 량사정이 형편없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우마노스케는 공포와 굶주림에 못 이겨 진영에서 탈출했다. 널찍한 판 자 하나만 가지고 바다에 뛰어들어 기를 쓰고 헤엄쳤다. 그렇게 대마도 를 거쳐서 일본 규슈 북부까지 오로지 수영만으로 목숨을 걸고 도망쳤 다. 무모한 짓이었지만 실로 삶에 대한 대단한 집착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우마노스케 혼자만 헤엄을 쳐서 일본으로 도망간 것은 아니었 다. 그렇게 목숨 걸고 헤엄을 쳐서 일본 땅까지 도망친 수부들이 너무 많다는 이유로 히데요시가 전 일본에 걸쳐 색출령을 내렸다. 우마노스케 는 그 도망자 색출령까지 피할 수는 없었다. 규슈의 해안가 마을에서 걸 식하다 관헌에 붙잡힌 우마노스케는 이렇게 끌려와 다시 노를 저어야 했 다. "다시 앞으로 전진!" 수부장의 명이 떨어졌다. 첫 번째 열을 형성해 잠시 싸우다 물러난 우 마노스케의 배는 순서가 돌아오자 다시 앞으로 나가야 했다. 눈을 가린 수부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죽음과 같은 정적이 흐르 는 속에 그들은 기계적으로 노를 젓고 멈추기를 반복했다. 그들의 머리 는 이미 쓸모 없는 부분에 불과했다. 수부장이 수부들의 눈과 머리를 대 신해 주고 있는 것이다. 제발 우리 배는 무사하길. 어쩌면 살수도 있을 것이다. 싸운다고 전부 죽는 건 아니잖아? 조선에서 일본까지 판자 하나만으로 건넜다. 신불이 이 우마노스케를 버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게 우마노스케는 간절히 바 랬다. 섣불리 눈가리개를 벗으려 했다가 지휘무사의 칼에 목이 달아나는 경솔함만 범하지 않는다면 살수도 있을 것이다. - 쿵! 빠각! "으아악! 크악!" 그러나 이런 기대를 날려버리듯 바로 앞에서 들린 파열음과 비명이 우 마노스케를 덮쳤다. 확 날려온 나뭇조각과 물방울, 그리고 진득진득한 무 언가를 느낀 우마노스케가 비명을 질렀다. "살려줘! 살려줘요!" 그러나 눈가리개를 벗을 수는 없었다. 아직 살아있을 지 모를 지휘무 사는 누구든 이걸 벗으면 즉석에서 목을 벤다고 했다. 자리를 이탈할 수 도 없었다. 우마노스케 입에서 마침내 욕설이 새어나왔다. "제기랄! 차라리 싸우게 해줘! 이 눈가리개를 풀란 말야!" = 발포돌격선, 나대용 - 뻥! 당차가 우당탕 튀면서 하얀 연기가 거북선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절반은 바닥에 앉아서 쉬고 절반은 천천히 반대로 노를 저어 거북선의 속도를 줄이던 격군들이 그 연기를 흠뻑 뒤집어썼다. 그러나 격군들은 아직까지 살아남았다는 안도감에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바깥을 내다보 며 싸움 구경에 여념이 없는 격군들도 많았다. "맞았다! 왜 중선이 와장창 무너져 내렸어!" 미르 머리를 통해 앞을 살피던 도훈도가 방금 쏜 대장군전의 전과를 격군들에게 알렸다. 격군들은 이제 환성도 지르지 않고 다만 주먹을 번 쩍 들어 불끈 쥘 뿐이었다. 계속 환성을 지르다 못해 다들 목이 걸걸하 게 쉬어버렸다. 도훈도만이 쉬지 않고 소리를 질렀다. "불화살이 하늘을 뒤덮으며 날아간다. 앗! 적 대선 옆구리에 불이 붙었 다. 불이 점점 번진다. 우아아! 터졌다! 왜선이 통째로 날아가 버렸어!" 전투는 대부분 포격전으로 해치웠다. 왜선들이 가까이 오지도 않았거 니와, 통제사도 위험스럽게 거북선을 왜선들 속으로 돌진하게 하지도 않 았다. 그래서 거북선에서는 화포장과 포수들만 바삐 움직였다. 원래는 노 를 젓지 않는 격군들이 철환이나 장군전을 창고에서 가져와야 했지만, 이제는 화포 뒤 바닥에 쌓인 것이 전부였다. 지나치게 많은 적을 상대한 탓에 조선수군도 거의 한계에 도달하고 있었다. "어허! 좋구나." 전대를 풀어헤친 나대용이 바닥에 주저앉아 느긋하게 뇌까렸다. 조금 전에 나대용은 잠시 틈을 내어 발포만호 소계남이 뭘 하고 있는지 선실 에 가서 보고 왔다. 그런데 소계남이 벌렁 나자빠져 있어 깜짝 놀란 나 대용이 소계남을 잡아 흔들었다. 선실 두세 군데에 구멍이 뚫려 있어 소 계남이 조총탄에 맞고 죽은 줄 안 것이다. 그러나 나대용이 마구 흔들자 소계남이 게슴츠레 눈을 뜨더니 트림을 하는 것이다. 나대용은 존경한다는 한 마디를 남기고 바닥에 굴러다니는 반쯤 찬 술병을 집어들고 왔고, 이렇게 여유 있게 한 잔 걸칠 수 있었다. 술맛이 꿀맛이었다. 다시 술잔을 비운 나대용이 우변1노 격군과 잠시 눈이 마주쳤다. 자리 에 앉아 있는 젊은 격군은 침을 꿀꺽 삼키다가 나대용과 눈이 마주치자 슬쩍 고개를 돌렸다. 씩 웃으며 술병을 들고 다가간 나대용이 격군에게 잔을 내밀었다. "어때. 자네도 한 잔 하려나?" "아이고! 나리. 싸움 중인데 제가 어떻게 술을 마실 수 있겠습니까?" "그런 말을 하면서도 왜 자꾸 침을 삼키나?" 나대용이 격군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전립은 벗어 뒤로 젖힌 지 이미 오래였다. "사기 올리는 데는 그저 술이 최고지. 자! 마셔, 마셔!" "그, 그래도 되겠습니까?" 격군이 두 손으로 잔을 맞잡고 슬쩍 주변 눈치를 살폈다. 다들 말은 못하지만 입맛을 다시거나 침을 삼켰다. 나대용이 술잔에 넘치도록 술을 따랐다. "쭉 마시고 나서 노래 한 곡조 걸쭉하게 뽑지 그러나? 이건 다 군사들 사기를 올리기 위함이야. 어이! 자네도 한 잔 받아." 바로 옆에 앉은 늙은 격군에게 술을 따르니 술병이 곧 텅 비었다. 벌 컥 짜증을 낸 나대용이 비틀거리며 도노장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졌 다. "이봐, 도노장! 선실에 가면 술병이 몇 개 있으니, 꺽! 가져와서 격군 들한테 돌리게!" "와아! 나 군관 나리 최고다!" '싸움이 한창인데 그래도 되겠습니까?'라는 도노장의 목소리는 격군들 이 지른 함성 속에 파묻혀 버렸다. 도노장도 입맛을 다시고 있던 사람이 었다. 곧 거북선 안에 술판이 벌어졌다. "어이, 화포장! 포수! 뭐하나? 한 잔 받게. 에이! 나중에 쏘고 먼저 한 잔 받으란 말야." 화포를 쏘려는 포수의 허리춤을 나대용이 잡아당겼다. 술이 돌고, 안주 로 어포가 돌았다. 거북선 갑판 안은 활기가 넘쳤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 오른 나대용이 벽에 등을 기댔다. 눈이 슬슬 감겼다. "어허! 참 좋다." 만약 통제사가 거북선 안에서 이런 꼴이 벌어지는 줄 알면 당장 칼을 뽑아들고 달려올 것이다. 그러나 밖에서는 안이 보이지 않았다. 적군에게 든, 아군에게든. 갑자기 눈을 번쩍 뜬 나대용이 도노장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배 좀 똑바로 몰아! 형편없이 비틀거리잖아? 속이 다 울렁거리네." = 가토군 어립선, 가토 요시아키 "기죽지 마라! 적은 우리보다 더 지쳐있다. 막는 것도 못해서야 너희들 이 사나이냐? 이 정도도 못한다면 불알을 까 주겠다!" 어립선 바로 앞에 위치한 세키부네에서 중군 사무라이 대장 반 나오유 키 直之가 걸쭉한 입담을 내뱉으며 독전했다. 얼마나 목소리가 컸는지 어립선까지 똑똑히 들렸다. 품위 없는 그 말에 몇몇 중신들이 이맛살을 찌푸리고, 가토 요시아키도 쓴웃음을 지으며 한마디했다. "역시 말릴 수 없는 놈이군. 저 녀석은." 반단우에몬 團右衛門이란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는 나오유키는 등에 커다란 히노마루日章旗 깃발을 메고있었다. 그는 조선 땅에서 벌어진 첫 출전에서 그 대형 히노마루를 나부끼며 명나라 군대의 대열을 단신으로 돌파한 무용담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호쾌하고 거칠 것 없는 태도가 지나쳐 상부의 명령을 잘 듣지 않는 일면을 가지고 있었다. 나중 이야기지만 1,600년에 벌어진 세키가하라 싸움에서는 아군을 배 반하라는 군령을 위반하고 계속 동군과 싸우다가 쫓겨나고 말았다. 이후 걸식생활을 하다 전공을 세우겠다는 일념으로 아다고메이 신전에 '나쁜 일과 재난이 일어나는 장소가 필요합니다. 그런 무대를 저에게 마련해 주십시오'라고 빌기도 했다. 그에게 평화로운 세상보다는 전란이 필요했 던 것이다. 그리고는 오사카 성에서 마지막 싸움이 벌어지자 거기서 싸 우다 기쁘게 죽었다. 별로 좋게 만은 볼 수 없는 반 나오유키지만 용감함은 넘쳐흘렀다. 오 늘도 그는 이 기회에 주군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인지 화살이 쏟아지는 앞에서 한참을 싸우고 있었다. 그렇지만 오늘같이 밀리는 싸움에서는 용맹이란 것도 한계가 있었다. 망루 위에 올라가 마구 칼을 휘두르며 소리 높여 고함을 지르던 나오유 키가 급히 머리를 숙였다. 그러자 새카맣게 날아든 돌이 요란한 소리와 함께 주변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았다. 반 나오유키가 가는 곳이라면 어 디든 함께 나부끼던 히노마루가 갈가리 찢겨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나 오유키도 비명을 지르며 갑판에 벌렁 드러누웠다. "음. 이제 슬슬 우리도 한계다." 가토 요시아키가 무너지고 있는 중군 함대를 지휘봉으로 가리켰다. 대 열을 유지한 채 막으며 후퇴하려 애쓰고는 있었다. 그러나 부서진 배들 의 잔해와 육중한 조선군의 포화 양쪽에 끼어 버리자 급속히 질서가 무 너졌다. 그런 것은 나오유키의 용맹이나 요시아키의 지휘력만으로 어떻게 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조선군은 급기야 가토 요시아키군마저 돌파하려 는 순간이었다. 돌파 당하지 않으려면 요시아키도 급히 후퇴해야 했다. "시마즈 님은 아직인가?" 요시아키가 고개를 돌려 채 후퇴하지 못한 아군을 살폈다. 물에 빠진 자와 부상자를 대충 수습하며 길게 꼬리를 물고 빠져나가는 그들을 전부 지켜주지는 못할 것 같았다. 해일에 밀려다니는 집채처럼 어립선 옆으로 떠내려오는 배들이 늘어갔다. 조금 전에 어립선 옆으로 흘러간 배는 호이다 모토기요穗井田元淸의 배였다. 배가 엉망으로 부서지고 아무도 움직이지 못하는 것으로 봐서 후군 사무라이 대장, 호이다 모토기요도 살아남지 못한 것 같았다. 전라 도 광주 땅에서 약탈과 살육으로 밤을 지새운 호이다 모토기요는 이렇게 죽었다. 어립선은 요시아키의 엄명에 의해 뒤로 물러나지 않았다. 악착같이 조 총을 쏘며 버티던 배들이 하나씩 물살에 떠밀리자 조선군이 쏜 포환이 마침내 어립선 근처까지 날아왔다. 어립선 바로 옆에서 높이 일어났다 사그러드는 물보라를 지켜보던 요시아키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드디어 죽을 때가 온 건가?" 급기야 화살까지 날아오기 시작하자 부하들이 일제히 요시아키를 보호 하며 싸울 태세를 견고히 취했다. 하지만 전의에 불타는 그들도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은 가지지 못했다. 패배하는 전투의 후미란 건 그래서 괴 로운 것이다. 그 어떤 용사나 지략가도 이 전투의 승부를 반전시킬 수는 없었다. - 콰광! 해가 지기 시작한 어둑어둑한 하늘을 하얀 섬광이 가득 메웠다. 화약 을 가득 실은 세키부네 한 척이 또 이렇게 산산 조각나며 사라지는 순간 이었다. "간 다쓰나가는 어떻게 됐나? 살아있나?" 그러나 전군 사무라이 대장 간 다쓰나가管達長가 살아있는지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의 배는 철저히 부서진 채 표류하고 있었 다. 어립선에 화살이 점점 더 많이 날아오고, 포환에 맞은 천수각이 비명 을 지르며 점점 기울어졌다. 부하 무사들이 픽픽 쓰러졌다. "요시아키 님! 뒤, 뒤를 보십시오!" 요시아키가 죽음을 각오했을 때 가토 요시아키군에게, 아니 일본함대 전체에 작은 기적이 일어났다. 시마즈 요시히로군이 마침내 그 웅장한 모습을 드러내며 다가온 것이다. 조선수군이 쏘는 화포에서 터져 나오는 굉음 속에서 가느다랗게 들리던 함성이 점점 커지더니 급기야 온 땅과 바다를 울렸다. "에이, 에이, 오! 에이, 에이, 오!" 힘과 자신감이 넘치는 사쓰마 병사들의 고함소리였다. "오오! 마침내 요시히로 님이!" 가토 요시아키가 벌떡 일어났다. 시마즈 함대 전체에서 터져 나오는 고함이 가토 요시아키군의 패배감을 단숨에 날려버리며 저녁하늘 가득히 메아리쳤다. 요시아키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 시마즈군 어립선, 시마즈 요시히로 "어디 한번 부딪쳐보자! 조선 땅에 이순신이 있다면 규슈에는 우리 시 마즈 요시히로 님이 계신다! 에이, 에이, 오! 에이, 에이, 오!" 부장 가바야마 히사다카樺山久高가 격렬히 외치며 병사들을 독려했다. 주위에서 들리는 고함소리가 그를 무척이나 들뜨게 한 듯했다. '에이, 에 이, 오'는 승리를 뜻하는 고함으로, 대장부터 병사에 이르기까지 모두의 몸을 뜨겁게 달아오르게 했다. 여기에 억센 사나이다움을 중시하는 사쓰 마 무사들의 기질까지 더해지자 엄청난 효과를 내고 있었다. "아직 이르다. 계속 앞으로!" 접의자에 앉은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주변을 쏘아보며 차분히 지시했다. 놀랍게도 시마즈군의 어립선은 지금 함대 맨 앞에서 달려가고 있었다. 일명 '단신출격'이라는 방법으로, 육전에서 총대장을 비롯한 호위무사 몇 명이 선두에서 달려가면 나머지 병사들이 그 뒤를 따라가는 방법이었 다. 부하가 총대장에게 뒤쳐진다는 일은 상상도 못하므로 모두 죽을힘을 다해 달려오게 마련이고, 그것은 부대 전체적으로 대단한 순발력을 발휘 할 수 있었다. 시마즈군은 바로 이 방법으로 가토 요시아키군의 구원요 청이 온지 얼마 안돼 명량해협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에이, 에이, 오! 에이, 에이, 오!" 조선군이 가까워짐에 따라 시마즈군 병사들이 내는 함성이 더욱 높아 졌다. 검은색 바탕에 흰색 원과 그 안에 있는 열 십자가 그려진 시마즈 군 군기도 하늘 높이 치켜들었다. 처참하게 패배하고 기진맥진한 도도 다카도라군, 가토 요시아키군 등이 존경과 감사의 눈길로 지켜보는 것을 의식한 병사들은 모두가 위풍당당한 모습이었다. 벽파진 앞바다를 가득 메운 시마즈 함대의 전선 300여 척은 끝없는 함 성 속에서 조선수군 함대를 정면으로 맞아 부챗살 모양으로 늘어섰다. 마치 올 테면 오라는 태도였다. "저기! 조선군 대장선입니다! 배가 멈춘 직후 관측병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시마즈 요시히로 는 가만히 조선군 대장선을 바라보았다. "흐음. 저것이 이순신의 배인가?" 일본에서도 무서운 맹장으로 평가받고 있는 요시히로의 도전적인 눈빛 이 화살처럼 쏘아졌다. 몸 깊은 곳에서 뜨거운 것이 끓어올랐다. 시마즈 요시히로는 어떤 상황이든 호랑이 같은 용맹함을 보여주는 무 장이었다. 1,600년에 벌어진 세키가하라 싸움에서 그는 패배한 서군에 속 해 있었다. 연이어 무너지는 아군 속에서 요시히로가 의연히 일어나 승 세를 타고 공격해 오는 동군의 중심을 향해 단 2천의 병력만으로 돌격해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본진을 뚫고 지나가는 대단한 용맹을 보였다. 시마즈 요시히로는 이 엄청난 활약을 그저 '후퇴'라고만 표현했다. 그 래서 이것은 '시마즈의 후퇴'라 불리며 대대로 칭송 받았다. 그러나 결과 적으로 서군의 패배로 인해 권력 핵심에서 밀려난 사쓰마 지방은 이후 꾸준히 권토중래를 노린다. 마침내 시마즈 가문의 사쓰마번은 메이지유 신에 결정적 역할을 했고, 이후 일본제국육군의 핵심으로 부상했다. 약 300년만의 재기였다. "그럼 뒤에 선 저 자가 이순신이로군." 요시히로는 멀리 보이는 장수 하나를 지목했다. 붉은 갑옷을 입은 비 쩍 마른 장수가 갑판에 우뚝 서 있었다. 그 주변에는 여러 명이 서 있는 데, 하나같이 체구가 좋아 훌륭한 무장이라 할 만했다. 부장이 갸웃거렸 다. "어떻게 그걸 아십니까, 주군? 제가 보기에는 병자 같은데요." "저 자의 눈빛. 저 눈빛은 보통 사람의 것이 아니다." 물음에 답하던 요시히로는 이순신이 자기를 쳐다보는 걸 느꼈다. '역시 그도 날 알아보는 군.'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요시히로는 그 눈빛을 볼수록 뜨겁게 달아오르 는 몸을 느꼈다. 패배한 아군을 도와주러 왔다는 본래 목적을 잊어버리 고 당장 싸우고 싶을 정도였다. 칠천량해전에서는 조선수군이 버리고 도 망간 텅 빈 판옥선이나 줍고 다녔지만, 저 조선수군은 진짜 강적이라고 판단했다. 요시히로가 비대한 몸을 움찔거렸다. 싸움은 하고 싶은데 싸울 때는 아니었다. 그런 움직임에서 주군의 뜻을 알아챈 부장이 슬쩍 주군의 전 의를 북돋웠다. "지금 당장 싸우시겠습니까? 적은 단 열 세 척입니다." 전진해서 조선수군에게 싸움을 걸겠느냐는 뜻이다. 그러나 시마즈 요 시히로는 즉시 고개를 가로 저었다. 조선수군이 먼저 공격해오면 모르겠 지만, 시마즈군 입장에서는 아직 준비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시마즈군은 수군이 아니었다. 평소에는 시마즈군이 조선수군과 바다에서 싸운다면 지지는 않더라도 큰 피해를 각오해야 한 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승부를 점칠 수도 없을 것 같아서였다. "언젠가... 우린 한번 제대로 싸우게 될 거요!" 요시히로가 그 눈빛의 주인에게 이렇게 말해주었다. 그리고 끝으로 한 마디 덧붙였다. "머지 않은 장래에, 반드시!" 과연 요시히로의 예측대로 이순신과 요시히로는 1598년 11월 노량에서 그 자웅을 겨루게 된다. 순천성에 갇힌 고니시 유키나가를 구원하기 위 해 사천에서 출동한 시마즈 요시히로와, 이를 격퇴하기 위해 출동한 이 순신은 새벽의 노량 앞바다에서 필사의 격전을 벌인다. 세찬 격류의 끝 에 또 다른 격류가 요동치고 있었다. 4. 운명의 적 (2) = 해남현 언덕, 표헌 "흐음! 강적이로다." 시마즈군의 등장을 지켜본 야불수가 한숨을 길게 쉬더니 마침내 찬사 를 보내고 말았다. 강력한 진을 펼친 왜군 함대는 조선수군이 조금만 움 직이면 즉각 강력한 응징을 가하겠다는 의지가 넘쳐흘렀다. 역관 표헌도 조선수군이 왜군을 쫓아가면서 철저히 무찌르지 못하게 되자 무척 안타 까웠다. 하지만 새로운 적의 무게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습니다. 병세도 그렇지만, 대단한 위용입니다. 병사들도 사기가 넘쳐흐릅니다." "이 총병이 싸울까 말까 망설이는데?" 조선수군은 한동안 이렇게 왜 수군과 날카롭게 대치하고 있었다. 그러 나 그 어느 쪽도 함부로 움직이지 못했다. 팽팽한 대치상태가 지속되자 보는 사람도 숨이 막힐 것 같았다. 누군가의 기침소리 한번에 모든 것이 파국으로 달릴 것 같은 순간이었다. "후유! 적이 너무 많습니다. 섣불리 공격하기에는 곤란한 점이 많습니 다." "아깝다. 계속 몰아붙였으면 엄청난 공을 세우는 건데. 그런데 저 왜군 장수는 누군가? 대단한 놈이야." 표헌이 기억하기로 야불수 양보가 적을 칭찬한 경우는 없었다. 물론 조선군은 극도로 무능하고 명나라 군대에 대해서는 심지어 쓰레기라고 비난한 그였다. 표헌도 이순신의 조선수군을 빼고 다른 칭찬할만한 군대 가 있다면 바로 저기 저 왜 수군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아직은 시마즈 요시히로가 조선과 명나라 사람들에게 유명해지기 전이 었다. 그가 임진왜란 중 크게 유명해진 것은 다음해 10월 1일, 노량해전 조금 전에 벌어진 사천전투에서였다. 시마즈 요시히로가 지키던 사천신 성을 공격하던 명나라 군사들은 불랑기포의 오발로 인한 화약폭발에 놀 라 아우성치며 서로 짓밟고 도망가는 추태를 보인다. 명군은 전투 때마 다, 그리고 전투를 하지 않을 때에도 민가를 약탈하는 등 항상 추태를 보였지만 이때 보인 추태가 가장 심했다. 그 기회를 틈타 왜군이 성문을 열고 맹렬히 공격한다. 그러자 명군은 전투 때마다 항상 그랬듯이 다급하게 도망치다가 강물에 떼로 빠져 죽는 등 3천이나 되는 큰 인명손실을 입고 결국 퇴각한다. 그런데 시마즈 요 시히로가 일본에 보고한 전과기록은 참수 38,700이었다. 중로군中路軍 3 만 중에서 사천 공격에 직접 참가한 병력이 1만여 명임을 감안하더라도 지나친 부풀리기였다. "모르겠습니다. 아까 그 왜인 첩자라도 있으면... 아! 저기 오는군요." 표헌이 가리킨 곳에는 막사발에 집착하던 왜인이 조선인 지게꾼과 함 께 언덕을 올라오고 있었다. 지게가 채워지지 않은 것이 진도에서는 별 로 소득이 없었던 모양이었다. 그런데 왜군 첩자는 표헌과 야불수를 보 자마자 울음을 터뜨렸다. "우에엥~ 개한테 물렸스므니다. 조선인은 안 물고 일본인만 무는, 아주 나쁜 개이므니다. 앵앵!" "어허! 그냥 돈주고 사지 그랬어?" 왜군 첩자가 뒤로 돌아서 엉덩이 부분에 찢어진 바지를 보여주자 야불 수가 거참 안됐다는 듯이 혀를 찼다. 왜군 첩자는 아예 주저앉아 다리를 구르며 한참을 울었다. "밭일 나갔는지 사람은 안 보이고 개만 남아 집을 지키고 있었스므니 다. 개가 순하게 생기고 짖지도 않아 안심했는데, 내가 사립문 안으로 한 발짝 들어서자마자 갑자기 덤벼들어 물었스무니다. 개밥그릇이 아주 멋 진 마쿠사바루였는데, 정말 아깝스무니다. 우엥~" 아무리 집안을 지키는 개라 해도 함부로 사람을 물지는 않는 법이다. 표헌이 갸웃거리다가 왜인에게 물었다. "혹시 사립문에 노루 가죽이 걸려 있던가?" "그걸 어찌 알았스무니까?" 왜인 첩자가 눈을 동그랗게 뜨는 게, 혹시 표헌의 집이 바로 거기 아 니냐는 말없는 물음이었다. "어휴! 그런 집에는 들어가지 말아야지. 그 개, 사냥개야! 자네, 불알은 안 물렸나?" 아마도 그 진돗개가 사냥한 노루의 가죽이었을 것이다. 진돗개를 이용 한 사냥을 진도에서는 넉사냥이라고 하는데, 매사냥처럼 사람의 도움을 별로 받지 않고 개가 혼자 다하는 사냥이다. 사냥감에 몰래 다가가 덮치 거나 하루종일 쫓아다녀서 지치게 한 다음 물어 죽이는 등 개의 특성에 따라 다양한 사냥법이 있다. 그리고 주인이 사립문에 가죽을 걸어놓으면 개는 그것을 지키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왜인이 눈물을 찔끔 흘리면서 사타구니를 주물럭거려 확인했다. 진돗 개들 중에는 사냥감을 잡을 때든 다른 개와 싸울 때든 그렇게 급소만 무 슨 성질 고약한 개도 있다. 왜인이 바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싸움은 아직 안 끝났스무니까? 아! 저건 사쓰마군이므니다!" 왜인 첩자가 크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그리고 저 함대를 지휘 하는 왜군 장수 이름을 표헌이 묻자 왜인이 존경이 가득한 눈빛으로 대 답했다. "시마즈 도노, 시마즈 요시히로 도노이므니다. 대단한 맹장이므니다." "음? 혹시 심안돈 말인가? 아니. 뭐, 다른 장수일 수도 있겠지만." 표헌이 자신 없는 목소리로 묻자 왜인이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 거렸다. 그러자 혹시나 하는 표정으로 야불수가 나섰다. "그건, 시만쯔, 그러니까 석만자 아닌가?" 야불수가 물은 내용을 표헌이 통역하자 왜인이 나뭇가지를 주워 땅바 닥에 한자로 썼다. 상인 출신답게 한자는 꽤나 알고 있었다. "저 영주님 이름은 이렇게 쓰므니이다." 글자를 본 표헌과 야불수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건 도진의홍 아냐? 같은 사람이야?" 당시 조선에서 가등청정이나 소서행장, 풍신수길 같은 유명한 자들은 성과 이름을 한자 그대로 쓰고 부르거나 성을 뺀 이름만 썼다. 또는 유 명한 일본인의 성은 옛날 일본의 귀족 성씨인 평平으로 바꿔 쓰기도 했 다. 이를테면 평수길, 평행장, 평의지 등이다. 그러나 조선인들이 다른 왜군 무장 이름을 제대로 알기는 힘들었다. 항복하거나 포로가 된 왜병들이 한자를 잘 몰라 오해는 더 심해졌다. 그 래서 왜병들이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를 다만 시마즈 도노라 부른 것 을, 조선인들은 그것이 우리말로 님이라는 존칭이 포함된 줄 모르고 그 대로 한자로 써서 심안돈오, 심안돈, 심안둔, 또는 심안도로 쓰고 불렀다. 명나라 장수들은 중국 발음에 따라 석만자石曼子라고 기록했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조선과 명의 전쟁 지도부는 시마즈 요시히로의 표 기방법상의 다른 이름들인 심안돈오, 도진의홍, 석만자를 각기 다른 사람 으로 알고 있었다. 임진왜란의 마지막 싸움인 노량해전 직후 명나라 장 수들이 다투어 자기 전공을 보고하길, 왜장 심안도는 불타 죽었다거나 목이 베였다고 하고, 사천성의 맹장 석만자는 죽거나 또는 사로잡혔다고 했다. 그러나 시마즈 요시히로는 일본으로 돌아가 늙어죽었다. 일설에 따르면 명나라 수군의 배가 너무 작아서 노량해전 당시 전투를 하지 않고 뒤에 물러서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최근 발견된 당시 병풍그 림을 보면, 싸움 한번 안하고 순천 왜교성에서 물러난 중국 육군과 달리 중국 수군은 열심히 싸운 것으로 확인됐다. 다만 10명쯤 타는 작은 배로 조선수군 판옥선을 따라다니면서 물에 빠진 왜군을 용감하게 창으로 찔 러 죽이는 정도였다. 노량해전 때 진린과 등자룡은 조선수군으로부터 판옥선 두 척을 얻어 탔는데, 등자룡은 실화失火를 틈타 갑판에 뛰어오른 왜군의 공격으로 죽 었다. 불랑기포의 오발 때문에 떼로 죽은 사천 전투와 완전히 같은 패턴 이다. 그리고 왜군에게 포위 당함으로써 이순신의 죽음을 불러일으켰을 지 모르는 진린은 해전 이후 이순신과 조선수군이 세운 모든 공을 가로 챘다. "어이! 그런데 자네 이렇게 다 가르쳐줘도 돼? 자네 간첩 맞아?" "헤헤! 다 아는 거, 뭐 어떻스므니까?" 일본군에 대해 너무 시원시원하게 가르쳐주니까 표헌과 야불수가 한참 동안 웃었다. 이 왜인은 워낙 서글서글해서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뭔가 보답을 해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자였다. 그때 야불수가 내시들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것을 지켜보았다. 내시 들이 우수영 쪽으로 움직이자 그들 뒤통수를 향해 한마디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흥! 저놈들, 배 타러 가는군. 자식들! 싸움이 완전히 끝나고 나서 일 어설 것이지. 고자라 그런지 관전태도마저 마음에 안 들어." 그러나 표헌은 내시들이 눈에 보이지 않을 때까지 연신 굽실거렸다. 궁궐로 돌아가면 어떻게 될지 눈앞이 캄캄했다. 걱정하는 표헌은 아랑곳 않고 야불수가 식식거렸다. "여보게, 표 통사. 저 치들, 자네들 임금이 보냈겠지? 이 싸움이 중요 한 줄은 조선국왕도 아나봐?" = 경상우수영 좌선, 우치적 우치적이 장대를 달려 내려갔다. 좌선 주변에 있는 판옥선의 장수들이 난감해하는 모습을 본 다음이었다. 우치적은 새로운 싸움을 다시 시작하 기는 여러 모로 문제가 많다고 판단했다. 그런데 통제사는 왜선들 가운 데 가장 큰 3층 누각선을 노려보고 있었다. "사또! 더 이상은 곤란합니다." "저 왜장의 눈은 싸움을 하고 싶어한다." 부정적인 의견을 개진한 우치적에게 통제사가 잔뜩 기대하며 말했다. 단단히 진형을 갖춘 왜군 함대가 통제사의 투지를 불러일으키는 것 같아 우치적은 내심 불안했다. 통제사가 고개를 돌려 회령포전선을 확인했다. 그러나 갑판 위에 늘어 선 신기전틀에는 아무 것도 없이 텅 비어 있었다. 통제사가 좌선의 화포 장에게 눈짓을 하니 화포장이 왜군들이 못 보도록 여장 아래로 손사래를 쳤다. 화약이 거의 떨어진 것이다. 그러나 통제사는 꼭 싸우고 싶었고, 왜군이 먼저 공격해오길 기다리는 것 같아 우치적은 조마조마했다. "적군이 물러섭니다!" 군관 송한이 보고하자 우치적도 고개를 번쩍 들었다. 과연 왜선들이 뒤로 천천히 물러서고 있었다. 그러나 왜선들에서는 조선수군이 공격해 오면 얼마든지 반격하겠다는 자신감이 넘쳤다. 왜군들이 지르는 이상한 함성도 그치지 않았다. "괘씸한 놈!" 왜군 함대 대장선을 노려보던 통제사가 갑판을 발로 서너 번 찧었다. 그리고 분한 듯 제자리를 빙빙 돌았다. "와! 와아! 이겼다아!" 왜선들이 물러나자 수졸들이 함성을 질렀다. 다른 배에서도 바다가 떠 나갈 듯 소리를 질렀다. 저 멀리 언덕에서도 피난민이 함성을 지르고 있 었다. "이겼습니다! 말도 안되지만, 우리가 이겼습니다, 사또!" 장수들이 일제히 통제사에게 몰려들어 기쁨을 나눴다. 통제사도 불만 스럽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그 동안 수고한 장수들 어깨를 치며 격려 했다. 지나고 보니 전혀 불가능한 싸움을 승리로 이끈 것이다. "그래. 수고들 했네." 통제사가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장수들 사이에서 슬쩍 빠져 나와 장대 밑으로 걸어갔다. 장수들은 통제사를 한번 쳐다본 다음 다시 서로를 감 싸안으며 계속 기쁨을 나눴다. 우치적은 뭔가 이상해 통제사를 따라갔다. 장대 밑에는 서너 사람 들어갈 만한 공간이 있었다. 그곳에 앉은 통제 사는 얼굴이 하얘진 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통제사를 뒤에서 감싼 송 희립이 서둘러 투구를 벗겼다. "사또!" "우 부사. 목소리를 낮추게." 간신히 말하는 통제사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통제사는 기력이 급격하 게 빠져나가고 있었다. 우치적이 급하게 무릎을 꿇고 통제사의 손을 꼬 옥 쥐었다. 우치적은 통제사 몸에서 경련이 일어나는 것을 느끼고 울부 짖었다. "사또! 정신을 차리소서!" "천행이야, 천행. 큰일날 뻔했네." 통제사가 힘겹게 말을 마친 다음 얼굴이 힘없이 옆으로 돌아갔다. 송 희립이 무릎에 통제사 머리를 누이고 정신없이 팔을 주물렀다. "여보게! 정종!" 우치적이 다급하게 의원을 불렀다. 그러나 정종은 다 알고 있다는 듯 이 느긋하게 다가왔다. 그리고 잠시 차분하게 맥을 짚더니 통제사의 갑 옷을 느슨하게 풀었다. 그런데 치료는 그걸로 끝이었다. "이제 쉬게 해드리세요. 헉! 컥!" 우치적이 의원 정종의 멱살을 틀어잡고 번쩍 들어올렸다. 사람 몸이 들려 다리를 버둥거리자 우치적이 더 놀랬다. 정종을 확 끌어당기고 목 소리를 낮게 깔며 으르렁거렸다. "이봐! 조용히 말하게. 통상께 무슨 약을 드렸나? 만약 조금이라도 잘 못되면 네놈을 가만두지 않겠다!" "알면서 그러십니까? 그저 모른 체하세요." 쌀쌀한 대답에 화가 치민 우치적이 눈을 부릅떴다. 우치적이 정종을 바다에 집어던질까 갑판에 패대기칠까 눈알을 굴렸다. "이! 이이익! 빌어먹을!" 그러나 우치적이 마지막으로 택한 것은 정종을 풀어주는 것이었다. 정 종은 통제사의 몸을 다시 편안히 눕혔고, 물끄러미 안색을 살펴보았다. 그것이 정종이 추가한 치료의 전부였다. 차마 볼 수 없어 우치적이 고개 를 돌려버렸다. "이미 철저히 망가진 몸입니다. 더 안 좋은 것은 통상이 더 이상 살고 자 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등뒤에서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통제사에게는 정종이 필요했고, 정종은 그 동안 최선을 다했다. 우치적도 그건 인정했다. 그러나 도저히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은, 다음과 같이 정종이 하는 말이었다. "그 동안 통상 혼자서 어깨에 너무 무거운 짐을 지셨습니다. 잠시라도 쉬게 해 드리세요." 우치적이 어깨를 들썩였다.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고개를 들었지만 얼굴을 타고 뜨거운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우치적이 정종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이미 초라해진 몸이지만 통제사또는 진정 장한 넋을 담고 계신 분이 시다. 온 백성이 오직 이 한 분에게 의존하고 있어. 아직이야. 하늘이 너 무 일찍 빼앗아가지 않도록, 내 이렇게 부탁하네. 간절히 부탁하네." 말을 마친 우치적이 털썩 무릎을 꿇더니 정종에게 머리를 숙였다. = 고깃배, 마이룡 "아부지! 아부지이이!" 마이룡이 목놓아 울었다. 불효도 이런 불효가 없었다. 아버지가 자식을 감싸고 대신 왜적의 손에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항상 근엄한 표정을 지어 무섭게만 여겼는데, 이런 일이 생 기리라고 마이룡은 꿈도 꾸지 못했다. 그러나 아버지 마하수도 자식 앞 에서는 역시 인자한 아버지였다. 그래서 마이룡은 더 분했다. 그 반대가 됐어야 했다. "기냥 나가 죽으믄 대는디. 왜 그러셨어요." 마화룡이 넋을 잃고 울다가 바다로 뛰어들려했다. 다른 형제들이 막내 를 붙잡아 말리면서도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 4형제가 서로 끌어안고 울 었다. "저어... 성룡이. 이런 말해서 쪼까 그렇긴 한디. 험! 지끔 해가 지겄는 디. 허험!" 옆에서 누가 자꾸 부르는 것 같았다. 하지만 마이룡은 아버지를 잃은 슬픔을 주체하지 못하는 이런 판에 도대체 누가 해가 지느니 마느니 쓸 데없는 소리를 하며 끼어드는지 짜증이 났다. 형제들의 울음소리가 더 커졌다. "아따! 해가 진당께에? 아! 거, 미안시러라." 마이룡이 고개를 드니 자욱한 눈물 너머로 고향 어른이며 이 배 주인 인 김 진사가 어렴풋이 보였다. 눈물을 훔치고 다시 보니 주름살이 깊이 패인 김 진사가 무척 곤혹스런 표정으로 뱃전에 앉아 있었다. "어쩌꺼시여? 한참이나 조용한 것이 싸움이 끝난 거 같기도 한디. 아 무래도 배를 뒤로 쪼가 물려야 쓰겄는디." 4형제가 동시에 정신이 확 들었다. 싸움이 끝났다면, 당연히 조선수군 이 전멸했다는 뜻이었다. "애들아. 울음을 그쳐라. 일어서라. 원수를 갚아야지." 마성룡이 나지막이, 그러나 분노가 가득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형제들 이 훌쩍거리면서 일어섰다. 아버지가 죽고, 조선수군이 전멸했다. 이제는 이들이 죽을 차례였다. 형제들은 그렇게 다짐했다. 김 진사와 다른 고향 노인들이 아버지의 시신을 맡아주기로 했다. 뒤 에 남은 사람들이 마씨 4형제를 안타까이 지켜보았다. 수백 척에 달하는 작은 배에 탄 피난민들은 조선수군이 다 죽었다며 통곡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배들이 천천히 흩어지기 시작했다. 대부분 북쪽으로 뱃길을 잡았다. 바다. 아버지를 삼킨 바다로 다시 싸우러 나간다. 무기를 잡은 형제들 의 팔뚝에 힘줄이 불끈 솟았다. "가자." 형제들이 다시 배에 올랐다. 아버지의 피로 물든 작은 배였다. 마이룡 과 마화룡이 힘껏 노를 저었다. 배는 순류를 타고 거침없이 달렸다. 아버 지가 흉탄에 맞은 우수영 앞바다를 지나 우렁차게 소리를 지르는 좁은 울돌목 입구를 막 나서는 순간이었다. "와아아아! 이겼다아! 이 통상 만세에!" 왼쪽 언덕에서 피난민들이 환성인지 울음인지 모를 고함을 질러댔다. 사람들이 덩실덩실 춤을 추고 목이 터져라 부르는 만세 소리가 끝없이 이어졌다. "싸움이 끝났다고? 그것도, 이겼다고?" 서로 마주본 4형제의 얼굴에 좌절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졌다. 그리 고 거의 동시에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질렀다. "안돼! 아부지이!" "원수를 갚아야 하는데에! 이 원수를 어디서 갚을꼬!" 5. 뜨거운 남국의 태양 = 경상우수영 좌선, 우치적 삼도수군은 날이 채 밝기도 전에 당사도를 출발했다. 어제 저녁 전투 가 끝난 후 벽파진에서 다시 우수영으로 물러갔다가 밤을 도와 당사도로 진을 옮긴 다음, 이번에는 새벽부터 무안현 앞바다를 지나가고 있었다. 당사도는 남쪽이 확 트여 왜군이 몰려오면 쉽게 알아볼 수 있어 좋은 섬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크고 작은 수많은 섬들이 몰려있는 다도해 안 이었다. 우치적은 섬 바로 뒤에서 왜선들이 쫓아오지 않나 조바심이 일 었다. 이 새벽에도 전투태세를 갖추고 뱃전에 늘어선 일부 군사들이 자 꾸 뒤를 돌아보았다. 이 근처 바다 물살은 울돌목 못지 않게 거셌다. 아주 오랜 옛날 바닷 물이 차 오르자 점점이 흩어진 섬이 된 남서해안 땅들이 거센 물살의 도 움을 받은 활발한 퇴적작용으로 인해 지금은 다시 천천히 육지로 연결되 는 웅장한 대자연의 드라마를 연출하고 있었다. 그런 섬들 사이로 사공 들이 온 정신을 집중해서 배를 몰았다. 차가운 새벽바람이 불어왔지만 돛대 높이 올라간 선두무상 김돌손은 달빛 속에서 눈을 부릅뜨며 뱃길에 암초가 있는지 살폈다. 우치적은 선실로 내려갔다가 금세 다시 갑판으로 올라왔다. 통제사는 정신을 잃은 듯이 잠들어 있었다. 의원 정종과 군관 송희립이 밤을 새워 통제사를 돌보고 있어 마음이 조금 놓였지만, 혹시라도 통제사가 잘못될 까 우치적은 무척 두려웠다. 어제부터 내내 통제사는 정신을 잃었다 찾기를 반복했다. 왜군의 기습 이 두려워 정신을 아예 놓아버릴 수도 없는 통제사를 보고 우치적은 가 슴으로 울었다. 정종이 항해는 다른 사람들에게 맡기고 통제사는 조금이 라도 눈을 붙이라고 나무랐지만, 통제사가 믿고 맡길 사람이 없었다. 아 니, 통제사가 직접 눈으로 일일이 확인해야 할만큼 판옥선 13척은 소중 했고, 이 나라 조선이 가진 군대의 사실상 전부나 다름없었다. "사또! 통상은 괜찮으시겠지요?" 우치적의 어두운 얼굴을 보고 군관 송한과 변존서가 다가와 나직이 물 었다. 우치적은 애써 얼굴을 폈다. 통제사의 건강은 조선수군 전체의 사 기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아무렴. 통상 어른은 편히 주무시고 계시네. 별일 없으니 자네들도 교 대로 눈 좀 붙이지 그러나? 수졸들도 좀 쉬게 하고." 우치적이 일부러 목소리를 높이며 여유를 부렸다. 송한과 변존서는 뭔 가 말을 하려다 말았다. 세 사람이 서 있는 곳은 고물이었고, 검은 기운 이 급속도로 움츠러드는 남쪽 새벽바다에는 조각배 한 척 보이지 않았 다. 우치적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울돌목에서 계속 막고 있었으면 어땠겠습니까? 그만한 물목도 없습니 다만." "화약, 화살 다 떨어졌는데 도대체 뭘로 싸울 건가? 그 많은 왜병들 상대로 송여종이나 승군들처럼 창칼로 싸워? 어려운 이야기네." 송한의 의견에 우치적이 고개를 저었다. 우치적은 대답하고 나서야 이 기고도 물러설 수밖에 없었던 통제사의 아픈 마음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울돌목에서 치열하게 싸워 말이 안 되는 큰 승리를 얻었지만, 결 국 어쩔 수 없이 왜군에게 서해를 내주고 만 것이다. 지금 수군이 어외 도로 향하는 것은 전라우수영 소속 최대 세력인 임치첨사진이 근처에 있 기 때문이고, 6년 동안 제조한 화약이 창고에 가득 쌓여있기 때문이었다. 왜군은 곧 조선수군을 좇아 서해로 들어올 것이 분명했다. 조선수군은 새로운 싸움을 준비해야 했다. 판옥선 숫자도 늘리고 격군도 충원하고, 이후로도 끊임없이 도전해 올 왜군들을 상대로 싸워야 했다. 우치적은 앞으로도 언제든 이길 수 있다고 자신했다. 이번 싸움에서 조선수군이 얻은 가장 큰 전리품은, 바로 하늘을 찌를 듯한 군사들의 사기였다. 그리고 조선수군은, 특히 이 통제사가 지휘하는 조선수군은 왜군과 어떤 조건에서 싸워도 절대 지지 않는다는 신화였다. 이제는 도망가는 군사가 있을래야 있을 수가 없었다. 조선 팔도 통틀어 이 판옥선에서 왜군과 싸우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는 사실을 모를 군사는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바로 그것 때문에 우치적도 동료들이 든든하게 느껴졌다. "부사 나으리는 왜 자꾸 피식 피식 웃으십니까?" 우치적에게 물으면서 송한도 괜히 피식 웃었다. 피를 적당히 닦아낸 송한은 한참 싸울 때와 달리 사람 좋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번 싸움은 그저 불가능한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말도 되지 않았다. 직접 싸운 군사들이 이 싸움을 모르는 다른 사람에게 자랑하면 당장 거 짓말쟁이로 몰릴 게 뻔했다. 조정에 승첩장계를 올려도 쉽게 믿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치적은 그런 걱정은 하지도 않았다. 죽을 뻔한 싸움에서 살 아남았고, 엄청난 승리를 거뒀다. 앞으로도 이렇게 싸우면 두려울 게 없 었다. 공을 세우고 상을 받거나 벌을 받는 것은 둘째 문제였다. 비록 명 량해협은 왜군에게 내줬지만, 우치적은 머지 않아 왜군을 조선 땅에서 몰아낼 수 있다는 강한 자신감이 들었다. 날이 점점 밝아왔다. 판옥선들이 임자도와 수도 사이를 막 지나자 북 쪽에 넓은 바다가 나타났다. "어외도가 보입니다!" 김돌손이 돛대 위에서 고함을 질렀다. 우치적이 이물로 걸어가니, 과연 널찍한 바다 한가운데 자그마한 섬이 보였다. 섬 뒤로 멀리 보이는 육지 는 함평과 영광 땅이었다. 타공이 키를 오른쪽으로 꺾었다. 배가 천천히 선회하며 새벽 햇살에 붉게 타오르는 섬에 다가갔다. "배! 배가 보입니다. 엄청나게 많습니다!" "뭐야?" 김돌손의 경고에 놀란 우치적이 눈을 가늘게 뜨고 어외도 주변을 살폈 다. 정말로 포구 주변에 수많은 배들이 늘어서 있었다. 멀어서 확실치는 않지만 최소한 3백 척은 넘어 보였다. 그 배들이 일제히 포구에서 나와 이쪽으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놀란 수졸들이 황급히 전투위치로 달려갔다. 늙은 화포장은 화약이 없 다고 연신 궁시렁거리면서도 화포에 화약을 쟁이는 손놀림이 빨라졌다. 우치적이 시복에서 화살을 뽑아 활에 재었다. 왜선들이 어떻게 저곳에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진도를 우회해서 미리 도착했나 의심이 들 었다. 어쨌든 새벽부터 싸움이 시작될 판이었다. 다른 배에서도 고함소리가 터져 나왔다. 좌선 옆에 붙어서 움직이던 전라우수영1선의 수졸들이 갑판 위를 황급히 뛰어다녔다. 그러나 겁에 질려 숨는 군사는 하나도 없었다. 김억추는 잠을 자는지 갑판이나 장대 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아? 작은 배입니다! 전부 다 작습니다. 피난민 배들인 것 같습니다!" 곧이어 이어진 김돌손의 보고에 우치적이 가슴을 쓸어 내렸다. 군사들 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피난선들이 왜 어외도에 몰려들었는지 알 수 없었다. 판옥선들 이 가까이 갈수록 작은 배들이 더 많이 몰려나왔다. 판옥선들이 포구로 들어갈 수 있도록 피난선들이 길을 내주며 양쪽으로 갈라졌다. "이 통상 대감 만세!" "수군 만세!" 배들이 판옥선들을 에워싸면서 피난민들이 목이 터져라 함성을 질렀 다. 며칠 전까지는 피난생활에 찌든 얼굴, 가족들의 죽음에 삶의 의욕을 잃은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환하게 웃는 얼굴로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많았다. 우치적이 피난민들에게 손을 흔들자 우레 같은 환성이 터져 나왔다. "우 부사 나으리! 어디로 가십니까? 북쪽으로 더 올라가실 건가요?" 대갓집 마나님으로 보이는 중년 여인이 체면치레 따지지 않고 소리를 높여 물었다. 고운 얼굴에는 고생한 티가 팍팍 났다. 우치적은 저 여인이 어떻게 자기를 알아봤을까 무척 궁금했다. "아니오! 통제사께서 말씀하시길, 오늘은 어외도에 머물면서 왜적을 막 는다 하셨소." 우치적이 대답하자 잔잔한 기쁨의 물결이 좌선 주변을 가득 메운 피난 선들 사이로 퍼져 나갔다. 피난민들은 군사들 얼굴이 밝은 것을 보고 조 선수군이 입은 피해가 적은 것 같아 안도하는 눈빛이었다. 그리고 통제 사도 살아있다고 들으니 피난민들이 더더욱 기뻐했다. "여기서 계속 왜적을 막으실 건가요?" "그건 알 수 없고 통제사께서 결정하실 거요. 왜선들이 아직 많이 남 았고 또한 언제 쳐들어올지 모르오. 그러니 피난선들은 안전한 북쪽으로 더 올라가시오." 우치적은 진심이었다. 피난선들이 수군을 따라다니면 전투에 제약을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전에 한산도에서도 피난민들이 몰려들었지만 좋 은 기억은 별로 없었다. 그러나 대부분이 노인과 여자들인 피난민들 생 각은 달랐다. "나는 우리 수군과 같이 움직이겠습니다!" "그래요! 그게 가장 안전하거든요. 영광에도 왜적이 들어와 사람들을 마구 죽이고 있어요." 우치적은 대답해줄 말이 없었다. 살겠다고 따라나선 사람들을 말리기 는 쉽지 않았다. 그때 피난선들 사이로 수군 사후선 한 척이 노를 저어 왔다. "임치첨사진 소속 군관 이동량이오! 그 배, 혹시 통제사 좌선이오?" 군관이 건방지게 턱을 들어 대장기를 가리켰다. 어제 싸움이 어떻게 끝났는지는 임치첨사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임치첨사는 이곳 어외 도에서 남동쪽으로 겨우 20리밖에 떨어지지 않은 임치진에 머물며 나오 지 않았다는 사실에 우치적은 더 기가 막혔다. 오늘도 사후선을 보낸 것을 보니 임치첨사 홍견이 뭔가 다른 꼼수를 부리는 것 같았다. 당연히 도망가겠다는 수작이겠지만. 우치적은 속이 부 글부글 끓었지만 잠시 꾹 참았다. "홍 첨사께서는 격군이 없어 합류할 수 없다고 하셨소. 들으셨소?" 간단히 전달을 마친 군관이 뒤로 돌아 타공에게 뭐라 지시했다. 격군 들이 노를 저어 뒤돌아가려는 순간이었다. "네 이노옴!" 우치적이 노한 목소리로 군관을 불러 세웠다. 군관은 깜짝 놀라 엎어 질 뻔하다가 겨우 몸을 바로 세웠다. "네가 감히 통상의 명령을 거역하려드느냐? 판옥선에 격군이 없다면 첨사가 사후선을 타고 올 수도 있지 않느냐? 배가 없는 고을수령들은 단 지 일개 활 쏘는 사부로서 참전했다. 그런데도 임치첨사 놈은 격군 핑계 만 대느냐? 당장 목을 베리로다!" 새벽바다가 쩌렁쩌렁 울릴 정도였다. 뒤로 나자빠져 얼이 빠진 군관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죽음을 뚫고 나온 우치적에게 그 동안 포구에 숨 어 덜덜 떨고 있던 군관 따위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임치첨사 그놈이 당장 달려오지 않으면 좌선을 몰고 임치로 쳐들어가 겠다고 전해라! 비겁한 자들의 목을 베겠노라. 알겠느냐?" "뭐, 뭐요? 해, 해볼 테면 해보시구려. 우린 뭐, 가만있을 줄 아시오?" 군관이 주먹을 쥐고 펄쩍펄쩍 뛰었다. 우치적이 참다못해 활을 들어올 린 순간이었다. "가만있지 않으면, 도망가려고?" "우 부사! 그만, 됐네." 누군가 어깨에 손을 올려 우치적을 말렸다. 순천 도호부사 우치적에게 이런 말과 행동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좌선에서 딱 한사람밖에 없었다. 그리고 일개 변방장수인 수군절도사가 '감히' 큰 고을의 목민관이며 국왕 의 대리인인 부사에게 하대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통상!" 우치적과 다른 군사들이 일제히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피난민들이 통 제사를 보고 바다가 떠나가라 함성을 지른 것과 거의 동시였다. 손을 내 저은 통제사가 방패판 사이로 고개를 내밀었다. "군관은 들어라! 임치첨사는 마음대로 하라고 일러라. 다만, 내일 아침 까지 임치진의 화약을 가득 싣고 이곳 어외도에 오지 않으면 탈주한 것 으로 간주하겠다. 사내가 어떤 행동을 했으면, 그 책임을 져야겠지?" 강력한 으름장이었다. 군관은 허겁지겁 격군들을 재촉해 배를 몰고 사 라졌다. 피난민들이 군관의 등을 향해 이름처럼 동냥이나 하라고 욕을 퍼부었다. 다른 피난민들은 통제사를 우러러보는데, 눈이 무척 초롱초롱 했다. 그런 피난민들에게 통제사가 부드러운 미소를 던진 다음 무상에게 지시했다. "배를 포구에 대어라!" 어외도 포구는 사방에서 몰려든 피난민들로 인해 마치 저자거리 같았 다. 얼굴 가득 웃음꽃을 피우며 피난민들이 내지르는 환호성은 끝이 없 었다. 그런데 좌선이 포구에 닿자 미리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이 있었다. 우 치적 눈에 약간 낯익은 사람들이 땅에 내린 통제사 일행을 반갑게 맞았 다. "저희는 나주 고을 진사인 임선, 임업, 임환이라고 합니다." 임선 등이 머리가 땅에 닿도록 절했다. 표정은 믿을 수 없을 만큼 부 드럽고 조심스러웠다. 우치적은 얼마 전에 이들을 본 적이 있었다. 그때 이 사람들은 내심 무척 못마땅한 눈치였는데, 오늘은 전혀 달랐다. "바닷바람이 차갑습니다. 따뜻한 아침을 준비했으니 드시지요." 임선이 공손하게 통제사에게 길을 안내했다. 공치사는 전혀 없었지만 말하지 않아도 다 통했다. 평소에는 대가없는 작은 선물도 받지 않던 통 제사가 오늘은 뜻밖에 기쁜 마음으로 대접을 받으려고 그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배에서 내린 장수들이 통제사를 따랐다. 포구 뒤쪽 양지바른 빈터에는 커다란 천막이 쳐있고, 노비들이 양식을 잔뜩 짊어지고 와서 가마솥을 걸고 식사준비를 하고 있었다. 판옥선에서 내린 군사들이 모두 충분히 먹을 만큼 많은 양이었다. 남는 양식은 판옥 선으로 실어 나르는데, 마치 개미떼가 이사하는 것처럼 행렬은 끝이 없 었다. 천막 안으로 비쳐든 아침햇살이 무척 따사로웠다. 우치적은 밥이 이렇 게 맛있는 음식인 줄 미처 몰랐다. 다른 배의 장수들도 정신없이 밥을 먹었고, 조라포만호 정공청은 허겁지겁 먹다가 체했는지 찬물을 잔뜩 들 이켰다. "저희들은 이번에 크게 깨달았습니다. 무척 감동했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좌정한 통제사에게 임선이 머리를 조아렸다. 통제사가 뭔가 생각난 듯 임선 형제를 유심히 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혹시 어제 우수영 언덕에들 계셨소? 어떤 선비들이 칼을 맞대고 왜적 들과 싸우는 걸 봤는데, 그대들 아니오?" "부끄럽습니다." 임선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런데 거제현령 안위는 임선 형제들 을 보고 좋아서 벌린 입을 다물 줄 몰랐다. 우치적은 안위가 왜 그러는 지 알 수 없었는데, 그저 용감한 선비들이라 기뻐하는가 보다 싶었다. 그 런데 정공청이 안위에게 자꾸 눈치를 주는 모습이 조금 심상치 않았다. 통제사가 크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오오! 장하오. 그대들이 수많은 백성들을 구했소." "통상 어른과 다른 장수들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것보다는... 저희들 결심은 이렇습니다. 다만 참고하시라고 드리는 말씀입니다." 임선이 비장하게 운을 뗀 다음 동생들 얼굴을 살폈다. 긴장했는지 삼 형제는 눈썹이 파르르 떨리고 간간이 얼굴 근육도 움찔거렸다. "통상께서 어젯밤 울돌목에서 물러선 것은 여러 가지 사정도 있거니와 다른 전략을 준비해두셨기 때문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울돌목이 뚫리 면 나주목과 해남현, 그리고 무안현 사람들이 크게 화를 입습니다. 육지 에서도 바다에서도 왜적이 몰려오고 있지만, 아직 피하지 못한 사람들이 태반입니다." 임선의 말이 맞았다. 우치적이 알기로 통제사도 그것 때문에 내내 고 민했었다. 그러나 이들에게 화약이 없어서 수군이 물러선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 중요한 울돌목과 전라우수영 본영까지 버리고 어외도로 물러 선 조선수군이었다. "아마도 우리 수군에게는 시간이 무척 중요할 것입니다. 통상께서도 다음 싸움터를 신중히 정하시겠지요. 그러나 왜적들은 조만간 명량해협 을 통해 서해로 밀고 들어올 것입니다. 저희들이 나서서 단 일각이라도 지체시키겠습니다." "괜한 희생이오. 그럴 필요 없소!" 통제사가 버럭 소리를 지르자 아직까지 밥을 먹고 있던 군사들이 화들 짝 놀라 이쪽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임선 형제는 결심을 굽힐 줄 몰랐다. "이 한 목숨, 나라와 백성을 위해 바치는 것이 선비된 도리입니다." 통제사가 혀를 쯧쯧 찼다. 우치적도 무척 안타까웠다. = 도도 다카도라군 본진, 겐타로 습기찬 바람이 불고 희미한 안개가 낮게 깔린 꼴이 꼭 비라도 한바탕 쏟아질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은 겐타로의 기분일 뿐, 아침안개 위에는 푸른 하늘을 달리는 태양이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명량해협에서 한참 떨어진 장흥 땅 회령포에는 부서진 배들이 꾸역꾸 역 부상자와 사상자를 토해내고 있었다. 형편없이 부서져 이미 배라고 불릴 수 없는 판자덩어리가 표류하듯 휘청대며 다가와서는 해안에 주저 앉았다. 이어서 검게 그을리고 부러진 돛대를 실은 다른 배가 나타나 해 안에 도착했다. 그 배들에서 육체와 정신 양쪽 모두 참혹하게 변한 유령 같은 몰골의 병사들이 비틀거리며 내려서서 죽은 자를 뭍으로 날랐다. 신음과 비명소리, 신불을 찾는 기도소리가 포구 여기저기서 들려와 마 치 혼잡한 시장바닥을 방불케 했다. 중상을 입은 채 누워 살려달라고 애 원하는 병사와 이젠 틀렸다며 마지막 명예를 위해 할복을 택하는 무사, 가벼운 상처에 안도하며 의원의 치료를 받는 수부 등이 저마다 다른 표 정과 소리를 발했다. 싸움은 끝났다. 하지만 죽은 자와 달리 살아있는 자는 싸움이 끝난 뒤 에도 쉴 수 없었다. 사상자 처리와 패배한 전투의 뒷수습을 해야했다. 조 선수군의 야습이 두려워 밤새 몇 번이나 진을 옮기고 이 포구에 닿은 지 도 벌써 반나절이 지났다. 그러나 수백 척을 헤아리는 부서진 배들이 끝 도 없이 계속 포구에 밀려들었다. 어젯밤에 무작정 도망치다가 본대를 잃거나 너무 멀리까지 갔다가 돌아온 배들이었다. 그나마 성한 배들은 다시 병력과 무기를 수습해 포구 앞바다에서 경계 에 나섰다. 승리한 조선군의 기습을 염려한 대비였다. "지독하군." 부상자들이 있는 곳 너머 밭에서는 시체들을 모아놓고 한꺼번에 태우 고 있었다. 그 매캐한 연기가 바람을 타고 몰려와 매스꺼운 냄새를 퍼뜨 렸다. 겐타로가 못 참겠다는 듯 코를 쥐었다. 해안을 돌아다니는 겐타로 눈이 부지런히 엔메이의 모습을 찾아 헤맸 다. 바로 지금 엔메이가 일본으로 가는 연락선을 타고 돌아간다는 소식 이 있었기 때문이다. 겐타로 역시 일본에 돌아가고 싶었지만 그건 마음 만이었다. 일개 잡 병인 겐타로에게 멋대로 전투를 그만두고 돌아갈 자유 따위는 없었다. 어쨌든 그 동안 여러모로 돌봐준 엔메이를 전송하려는 것이 지금 겐타로 의 목적이었다. 엔메이 모습은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엔메이는 일본으로 떠날 쾌속선 근처에서 부상자들을 돌보고 있었다. 출혈로 인해 죽어 가는 병사에게 극락왕생을 빌어주는 모습은 한창 전투할 때와는 전혀 달랐다. 정말로 불도를 익힌 스님다운 모습이었다. 겐타로가 천천히 다가갔다. "엔메이 님" "아! 겐타로, 자넨가?" 겐타로는 흠칫 놀랐다. 엔메이는 득도한 고승 같은 은은한 미소를 짓 고 있었다. 본 적은 없지만 어쩌면 해탈한 부처님 얼굴이 이와 같으리라 는 생각도 들었다. "오늘 일본으로 돌아가신다고 들었습니다만." "그래. 그렇지 않아도 자네를 찾아가려고 했네." 엔메이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스님께서 저를 찾아오시다뇨. 마땅히 제가 스님을 전송해 드려야죠." 겐타로는 엔메이의 귀환소식과 함께 들은 귀환이유를 떠올렸다. 확실 한 것은 아니지만 총대장 다카도라의 군사로서 일종의 패전책임을 지는 것이라 들었다. 사실 엔메이가 군사라고 해도 작전에 직접 간여한 적도 없었다. 정보를 제공해준 첩자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 일개 스님에게 책 임을 돌려야 할 정도로 주변 돌아가는 상황이 심각하다는 반증이었다. 아니면 반대로 엔메이를 아끼던 다카도라가 그를 살리려고 일부러 일본 으로 쫓아내는 것일지도 몰랐다. "나보다는 자네가 돌아가고 싶을 텐데? 일본에 돌아가고 싶다고 했었 지?" "뭐, 그건 그냥 제 소망일 뿐입니다. 멋대로 돌아간다면 그건 도망이니 까요." 겐타로는 이제 곧 엔메이가 타고 돌아갈 쾌속선을 흘끔 쳐다보았다. 될 수 있는 대로 비참한 패전을 숨기려는 듯 최대한 깔끔한 깃발과 무기 만을 골라 싣고, 또한 조선 땅에서 빼앗은 물건을 실은 것이 꼭 승전보 를 알리는 배 같았다. 우스운 광경이었지만 겐타로는 그 배에서 일말의 그리움을 느꼈다. 저 배만 탈 수 있다면 당장 일본에 돌아갈 수 있을 텐데. 물론 겐타로를 기 다려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동안 여러 가지로 돌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은혜 죽어서도 잊지 않겠습니다, 엔메이 님." 미련을 자르기 위해 일부러 허리를 숙이며 겐타로가 감사의 뜻을 표했 다. 그러나 엔메이는 여전히 부드럽게 웃으면서 사양했다. "뭘 그러나? 내가 뭘 해준 게 있다고." "배가 곧 출발합니다! 어서 타십시오, 엔메이 님." 쾌속선의 병사가 달려와서 재촉했다. 화물과 사람을 다 실은 쾌속선은 막 닻을 올리고 있었다. 겐타로가 마지막 인사를 했다. 이제 다시는 못 볼 사람이었다. 조선에 온 일본수군은 곧 죽음을 뜻하므로, 겐타로는 자기 삶이 얼마 남지 않았 다고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두려움이나 후회 같은 건 없었다. 다만 앞으로는 열심히 싸울 기력도 없을 것 같아 조금 아쉬울 뿐이었다. "그럼 안녕히 가십시오." "잠깐만!" 다시 허리를 숙이는 겐타로를 엔메이가 손으로 막았다. 그리고는 어리 둥절한 겐타로에게 엔메이가 뭔가를 전해 주었다. "저 배엔 나보다 자네가 타는 게 낫겠네. 대신 자네가 해줘야 할 일이 있네." "이건, 뭡니까?" "편지일세. 어떤 높은 분에게 보내는 건데, 궁금하면 읽어봐도 좋아. 다만 다른 사람에게는 보여주지 말고. 하카다에 도착하면 그걸 시마이 소시쯔 님에게 전하게. 나머지는 거기서 다 알아서 할거야." 엔메이는 이렇게 말한 다음 쾌속선 병사에게 작은 소리로 뭐라고 설명 했다. 병사가 고개를 끄덕이자 엔메이가 아직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겐타로의 팔을 잡아끌고 억지로 배에 태웠다. "엔메이 님!" 겐타로는 뭐라고 말해야 좋을 지 몰랐다. 피와 죽음으로 가득 찬 이 지옥 같은 땅을 벗어날 기회를 엔메이는 스스로 양보한 것이다. 그러면 서 그 기회를 일개 잡병에 불과한 겐타로에게 넘겨주었다. 이번 연락선 을 타지 못하면 엔메이는 또 얼마를 기다려야 할 지 모른다. 아니, 다음 에 벌어질 싸움에서 죽을 지도 모른다. 뱃전에 선 겐타로가 엔메이에게 소리쳤다. "스님께서는 앞으로 어떻게 하실 겁니까? 또 뵐 수 있을까요?" 그러나 엔메이는 웃으며 손을 흔들 뿐이었다. 그리고는 드디어 쾌속선 이 출발하게 될 즈음 가볍게 말했다. "아마 또 보기는 힘들 거야. 난 곧 주인을 바꿀 걸세." 주인을 바꾼다.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겐타로는 알지 못했다. 그 렇지만 직감적으로 이것이 마지막이 되리란 것은 느끼고 있었다. "엔메이 님! 앞으로도 부디 건강하십시오!" 배가 점점 포구에서 멀어져 엔메이가 작은 점으로 보일 때까지 겐타로 는 몇 번이고 허리를 굽혀 절을 했다. 도대체 엔메이는 어떤 사람일까? 불현듯 그것이 궁금해진 겐타로는 방 금 엔메이가 전해준 편지를 열었다. 겉봉에 '시마이 소시쯔 님께'라고 쓴 안에서 얇은 비단 천에 휴대용 붓으로 쓴 깔끔한 글귀가 나타났다. 어려 운 한자가 아니라 히라가나로 쓴 편지라 겐타로도 떠듬떠듬 읽을 수 있 었다. - 9월 17일,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수군과의 싸움에서 우리 군은 엄청 난 피해를 입었습니다. 총대장 다카도라 님을 비롯한 대부분의 무장들이 부상했으며 함대는 절반 이상이 전투를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우익군에게 약속한 날짜에 군량을 가져다주기도 어렵게 됐습니다. 진격 은 가능하지만 다시 이순신의 수군과 싸웠을 때 과연 이길 수 있을지, 아니 제대로 싸울 수나 있을지 극히 의심스럽습니다. 우리 일본군에 남은 함대 전력 가운데 온전한 것은 지금 부산포에 계 신 구키 요시다카 님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이 전력으로는 부산포와 일 본 사이의 수송로를 지키는 것만으로도 힘에 겨울 지경이니 참으로 한심 할 따름입니다. 생각건대 서해를 통한 군량보급과 병력수송은 충분한 호 위전력이 생길 때까지 당분간 연기하는 편이 좋겠습니다. 차야 님께 '차야?' 겐타로가 기억을 더듬었다. 흐릿한 기억이지만 차야 시로지로茶屋四郞 次郞란 상인 출신 무사가 내대신 도쿠가와 이에야스 휘하에 있다는 이야 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이에야스와 같은 마쓰다이라 가문의 종가從家 출신으로 사카이에 출입하며 상인들과 교류하고 정보를 수집한다는 자. 편지 내용과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결부시키니 겐타로도 엔메이의 정체를 어느 정도는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배가 출발하기 전 그가 남긴 말 과 본문 밑에 작게 쓴 다른 글귀도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다. - 이로써 저는 그간 돌봐주신 은혜에 얼마간 보답했다고 생각합니다. 뜻한바 있어 저는 이제 그만 제 길을 가려고 합니다. 제가 주인으로 모 시고 싶은 분을 뜻밖에 조선에서 찾았습니다. 원래 일본인이었다가 지금 은 조선인이 된 분입니다. 용서해 주시기를. "그랬구나..." 조선 정세에 유난히 밝고 부드러운 심성을 지닌 엔메이가 조선에 항복 한다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마치 옛친구 슌스케가 조선군이 된 것 처럼. 겐타로는 누군지 모르지만 엔메이가 좋은 주인을 섬기길 바랬다. '그들은 조선에 남고 나는 일본에 돌아간다.' 겐타로 눈동자에 환영처럼 붉은 벚꽃잎이 스쳐 지나갔다. 죽은 오쯔키, 그리고 슌스케와 함께 지냈던 추억, 그리고 겐타로의 꿈과 슬픔을 모두 묻었던 적막한 절에도 그 벚꽃잎이 나부꼈었다. 각자 신념과 선택에 따 라 적과 아군으로, 또는 산 자와 죽은 자로 갈라진 지금 겐타로는 그 절 에 다시 한번 가고 싶었다. 그곳에 변함없이 묻혀있을 오쯔키를 보고 싶 었다. 가서 '슌스케 녀석, 변함없이 건강하게 잘 있어. 너무 건강해서 한 대 쳐주고 싶었을 정도야. 오쯔키 너도 잘 있지?'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 러면서 과연 웃음이 나올 지 눈물이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오쯔키." 가장 이루고 싶었지만 이루지 못한 꿈의 대상. 그 이름을 다시 부르며 겐타로는 한껏 숨을 들이쉬었다. 짭짤한 바다냄새에 피냄새가 섞여 있었 다. 겐타로는 그리움 가득한 눈으로 바다를 보며 중얼거렸다. "이제까지 모두 꿈이었다고 말해 줘. 그리고 나도 네 꿈속으로 들어가 게 해줘." 아침을 맞아 황금빛으로 눈부시게 찬란한 바다가 겐타로 눈 속에 시리 도록 파고들었다. = 경상우수영 좌선, 준사 둥근 달이 바다를 비췄다. 밤이 깊었지만 어외도는 수많은 피난민 배 들로 인해 불야성을 이뤘다. 준사는 좌선 갑판에서 달이 잠긴 바다를 바 라보고 있었다. "그게 뭔가?" 순천부사 우치적이 다가왔다. 다른 군사들은 배에서 내려 흐드러지게 잔치를 즐기고 있었지만 뱃전에 선 우치적은 준사처럼 외로워 보였다. 우치적이 준사를 향해 따뜻한 미소를 보냈다. 며칠 전만 해도 경계를 늦추지 않던 다른 조선수군들과 마찬가지였는데 어제부터는 달랐다. 드 디어 동료로 인정해주는 듯해 준사는 조금 기뻤다. 그러나 우치적의 질 문에 대답하려던 준사가 청동거울을 보고는 갑자기 마음이 무거워졌다. "예. 왜 땅에 계신 아버님이 제게 남겨주신 유품입니다." "그거 거울 아닌가? 왜놈 물건 같지 않은데?" 우치적은 항왜 출신인 부하의 물건을 가로채거나 하지 않았다. 안심시 키려는 듯 멀찍이 떨어진 우치적이 그 거울을 요모조모 살폈다. "아버님이 중국에서 가져오신 겁니다." "중국? 모양이 꼭 우리 나라 것 같은데, 그래?" 왜인이 중국에서 물건을 가져왔다는 데도 우치적은 준사 아버지가 왜 구가 아니냐고 묻지 않았다. 준사가 빙긋 웃자 우치적이 갸웃거리면서 지나갔다. 준사는 어렸을 적에 아버지가 자주 불렀던 노래를 억지로 기억해내며 나직이 불렀다. 그건 일본말도, 중국말도 아니었다. "어기여차! 어기여차! 찌거덕, 찌거덕! 바람아 불어라. 우리 예쁜 마파람아. 북으로 불어라. 주산 쪽으로 불어라. 배에는 먼 나라 보물 많아 무거운데, 네가 안 불어서 이렇게 힘들여 노 젓고 있잖니." 뱃사람들이 우렁찬 목소리로 함께 노래를 불렀다. 고물에서는 뱃사공 4명이 땀 흘리며 노 하나를 함께 저었다. 바람이 멈춘 절강성 동쪽 바다 에서 사선沙船이 추진력으로 쓸 수 있는 것은 바로 그 커다란 노 하나밖 에 없었다. 사공들은 힘들고 너무 더워 옷섶을 헤치고, 두 명은 아예 윗 통을 벗어제치고 노를 저었다. 그러나 아무리 덥고 힘들어도 뱃사공들 얼굴에서는 웃음이 사라지지 않았다. 이번 장삿길, 삼불제 국의 영역인 단마령에서 비단을 팔아 대단 히 큰 이익을 얻었기 때문이다. 삼불제三佛齊는 16세기 수마트라를 주 영역으로 삼은 나라이고, 단마령丹馬令은 말레이시아 북동쪽 해안지역인 티오만이다. 본전과 비용을 제하고도 수부들한테 돌아갈 몫이 상당히 큰지라 항구 가 가까워질수록 수부들은 점점 들떴다. 부리(火者. 뱃머리=船頭, 선장) 부터 말단 사공까지 움직임에 활기가 넘쳤다. 그래서 목소리에도 힘이 잔뜩 들어갔다. "어기여차! 어기여차! 찌거덕, 찌거덕! 바람아 들어라. 갈매기가 말했단다. 우리 고운 우단 아매 기다린단다. 우리 걱정에 시름시름 여위셨단다. 어서 가서 우리 어여쁜 우단님 기쁘게 해드려야지." "하하하! 여긴 바람이 안 부는 곳이야. 도착할 때까지 당분간 다들 고 생 좀 해야 할 걸?" 세 척으로 이뤄진 무역선단을 이끄는 으뜸부리 가오젱우루메이타랑高 贈烏魯美他郞이 유쾌하게 웃었다. 조금 전까지 힘겹게 노를 젓던 수부 4 명은 축 늘어진 돛 그늘에 앉아 수건으로 땀을 닦고 있었다. 잠시 후면 다시 교대해서 노를 저어야 했다. 정월 한겨울인데도 이곳은 춥지 않았다. 남국의 따가운 뙤약볕이 뱃전 에 내리쬐어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멀리 해안 쪽에도 안개가 짙게 핀 듯했다. 가오젱우루메이타랑이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 이 배를 따르는 다른 사 선 2척은 아예 돛을 내리고 노만 저었다. "어이~ 김자동이! 왼쪽으로 두 칸만 돌려. 해안에서 너무 떨어졌어." "부리님! 거, 자꾸 애 부르듯 하지 맙시다!" 김자동이 앞을 보면서 키에 달린 가로막대를 온몸으로 밀었다. 불평을 터뜨리긴 했지만 김자동은 바닷바람에 검게 그을리고 주름살 가득한 얼 굴에 웃음을 띄고 있었다. 일반 수부끼리는 나이 차를 따지지 않고 서로 반말을 쓴다. 바다를 항 해하면서 풍랑을 이기고 선장의 명령에 따라 혼연일체가 되어 급히 움직 이려면 서로 배분이나 나이를 따질 겨를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뱃사 람들은 서로 강한 운명공동체적 결속력을 가진다. 태풍을 만나더라도 누 군 죽고 누군 사는 법이 없이 다 같이 살거나 다 같이 죽기 때문이다. 키잡이 김자동은 나이 50이 넘어, 서른 살 갓 넘긴 으뜸부리 가오젱우 루메이타랑보다 20살 이상이 많았다. 그렇다고 김자동이 연장자로서 존 댓말을 바란 것은 아니었다. 다만 키잡이, 즉 부리 다음 가는 지위의 항 해사로서 일반 사공들에게 내세울 권위가 필요했을 뿐이었다. "잔소리 말고, 아니꼬우면 네가 부리해!" "쳇! 부리는 아무나 하는 줄 아슈? 자꾸 성질 돋구시네." 김자동이 삐치자 으뜸부리가 낄낄거렸다. 알고 하는 소리였다. 키잡이는 뱃사람 경력이 충분히 쌓이면 웬만하면 누구나 할 수 있었 다. 하지만 바다와 지리를 제대로 알아야 하는 부리는 나이가 많다고 아 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더구나 상선대 대장을 맡는 으뜸부리에게 는 생전 처음 보고 말도 안 통하는 외국인들과 교섭할 두둑한 배짱도 필 요했다. 부리에게는 남다른 학습능력과 기억력, 그리고 통솔력이 필요했다. 특 히 멀리 남대양으로 가는 뱃길은 더했다. 해도가 없이 윗세대의 경험과 가르침에 항해를 전적으로 의존하는 시대였다. 부리가 해와 별, 흐린 날에는 지남침을 보고 방향을 지시해야 한다. 나 무토막을 물에 띄워 배의 속도를 알아 목표까지의 거리를 가늠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부리님! 우리도 이참에 대복선이나 오공선을 몇 척 삽시다. 더 멀리 나갈수록 이익도 크지 않습니까?" "바닥 뾰족한 배를 타서 뭐하게? 멀미하려고? 아니면 모래바닥에 배 올려놓고 다 죽게?" 가오젱우루메이타랑이 투덜거렸다. 으뜸부리는 전에 첨저형 배에 탄 적이 있었다. 물론 평가는 극도로 안 좋았지만, 키잡이는 첨저형 배에 대 한 막연한 환상을 갖고 있는 것 같았다. "얕은 바다는 평평바닥이 좋고, 먼바다에는 뾰족바닥이 좋다지 않습니 까?" "쳇! 노가 아닌 도를 써봐. 사람은 훨씬 많이 필요한데 그다지 빠르지 도 않아." 강소성과 절강성 연해안의 배인 사선은 바닥이 평평한 평저선이다. 물 속 깊이 수직으로 꽂아 휘젓는 노櫓를 쓰는 것도 한국 전통의 배와 똑같 다. 그러나 더 남쪽으로 내려가면 배 밑바닥이 현대 선박처럼 뾰족하고, 배 옆에 여러 개를 놓고 물 표면을 밀어서 힘을 얻는 도櫂를 쓴다. 노의 중국 발음은 '루lu'이고, 한국어 나룻배, 거룻배 등과 연관이 있다. 즉 노 櫓라는 한자 자체가 상당히 후대에 쓰여지기 시작한 말이고, 이는 어원 이 한국어에 있다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복건성 지역의 대표적인 선형인 대복선大福船은 바닥이 뾰족하고 커다 란 노 하나를 쓰는데 반해, 광동성의 오공선蜈蚣船은 고대 그리스나 바 이킹 배들처럼 옆으로 젓는 도 여럿을 갖고 움직인다. 광동선은 노와 도 를 함께 쓴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어기여차! 어기여차! 찌거덕, 찌거덕! 바람아 불어라. 우리 예쁜 마파람아. 우리 사공들 노 젓느라 팔 떨어지겠다. 지금 네가 안 불면 우단님이 운단다. 어서 어서 불어라. 예쁜 바람아. 어기여차! 어기여차! 찌거덕, 찌거덕!" 합창은 계속되었다. 바람이 조금씩 불어와 돛이 크게 부풀어오르기 시 작했다. "빨리 가자. 우리 우단님 정말로 울겠다. 자그마치 넉 달 만인가?" 가오젱우루메이타랑이 껄껄 웃었다. 김자동이 슬그머니 으뜸부리 얼굴 을 보곤 말없이 바다로 눈길을 돌렸다. 으뜸부리한테서 슬픈 웃음을 본 것 같았다. 우단은 단순히 말해 무당이라는 뜻이다. 시베리아 무당을 샤먼이라고 부른 것은 후대의 일이다. 몽골에 불교가 전해지자 티벳어로 스님을 뜻 하는 샤먼이 무당을 부르는 말로 바뀐 것이다. 그리고 북아시아 계통, 즉 몽골, 알타이, 터키, 키르기스, 타타르, 퉁구스족은 무당을 우다간, 우타 칸, 우다감, 우데게 등으로 부른다. 여자 무당을 한자로 무(巫 w ), 남자 무당은 격(覡 x )으로 표기한다. '무巫'의 중국어 발음은 분명히 '우'다. 한국어로 '무' 발음이 나는 한자 10개를 자전에 나온 순서대로 나열하면 武無貿舞務茂巫戊霧畝인데, 세 번째 貿와 마지막 畝가 m o로 발음되는 것을 빼면 모두 w 로 발음된 다. 무당은 초기에는 巫黨, 조선 후기에 들어서는 巫堂으로 표기하기 시작 했다. 당은 뜻이 없이 다만 중국어 발음 당, 또는 탕을 빌렸을 뿐이다. 단과 당, 또는 탕의 발음이 비슷하다고 볼 때, 무당은 '우단'의 한자 표기 일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우다간의 표기는 아니다. 프랑스 수목학자 자크 브로스는 '나무의 신화'라는 책에서 북아시아의 샤먼이 우단, 또는 우다간으로 불린다고 지적했다. 징기스칸이나 마립간, 거서간의 예에서처럼 우다간은 정치적 군장을 겸한 우단, 즉 무당일 수 있다. 또한 자크 브로스는 같은 책에서 우단은 북유럽 신화의 최고신 오딘과 같은 말이라고 한다. 푸타르크futhark, 즉 바이킹이 사용한 북유럽의 룬 문자에서는 u가 o로도 발음된다. 그리고 룬 문자에서 a자와 i자는 다만 작은 막대 하나 차이일 뿐이다. 실제로 우단과 오딘을 혼용한 예가 많다. 약하게나마 바람이 불어줘서 배 세 척은 항주만 앞바다에 자리잡은 주 산군도에 접근할 수 있었다. 항주에서 남북운하를 따라 거슬러 올라가면 장강, 즉 양자강이 나온다. 다시 운하로 황하까지 연결되는 것이다. "으뜸부리님! 산에서 연기가 납니다!" 김자동이 너무 놀라 키를 놓치며 말했다. 산이라는 말은 섬을 포함하 는데, 주산군도를 구성하는 섬들 이름은 주로 산으로 끝난다. 사공들이 노젓기를 멈추고 이물로 뛰어갔다. 멀리 주산도에서 검은 연 기가 치솟고 있었다. "아아! 한두 군데에서 나는 게 아닙니다!" "뭐해? 빨리 노 저어!" 가오젱우루메이타랑이 눈을 부릅뜨고 명령하자 정신을 차린 수부들이 힘껏 노를 저었다. 마침 불어오는 바람과 함께 배는 빠른 속도로 주산도 로 향했다. 주산도는 주산군도에서도 가장 큰 섬이다. 불교가 처음으로 중국에 전 해진 보타락가사가 있어 중국 불교의 4대 성지 중의 하나로 꼽히고 있 다. 그래서 옛날에는 보타도, 또는 보타산으로 불렸으며, 뱃사람들이 안 전항해를 기원하던 항해사찰이 지금도 남아있는 곳이다. "으~ 왕직! 왕직 그놈 때문에, 그놈 때문에!" 가오젱우루메이타랑이 배 난간을 붙잡고 부들부들 떨었다. 으뜸부리는 입술을 너무 세게 악물어 피가 나는 것도 모른 채 불타오르는 주산도를 노려보았다. 왕직王直은 원래 절강성 연해안의 소금장사 출신이다. 이광두李光頭라 는 왜구집단의 부하였다가 독립해, 나중에는 일본, 섬라(태국), 포르투갈 무역상들과 밀무역을 해서 크게 부를 쌓았다. 주산도 서쪽 금당도 열항 烈港을 본거지로 세력을 키워 나중에는 정사혜鄭思 가 지휘하는 해적을 소탕하기도 했다. 왕직은 그 공로로 호시공허互市公許를 요구했다. 그러나 명 조정은 무 역개방 건의를 묵살하고 단지 쌀 100석을 하사했다. 화가 치민 왕직은 쌀을 모조리 바다에 던져버렸다. 그리고 가정 32년, 서기 1553년 4월부터 절강성 연안을 휩쓸기 시작했다. 수군이 약한 명나라 조정은 이들을 진압할 수 없었다. 게다가 왕직은 본거지를 일본으로 옮기고, 일본 무사들을 고용해 해란을 배후조종하기 시작한다. 나중에 왕직은 어머니가 인질이 되자 명나라에 항복했다가 죽 음을 맞지만, 1552년에 시작된 가정 연간의 해란은 중국에 큰 환난이 되 고, 이는 조선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배는 어느새 나루에 닿았다. 반쯤 부서진 나루에서 내리던 사람들이 털썩 주저앉았다. 나루터를 지키던 섬사람들의 시체가 여기저기 널려 있 었다. 그리고 나루터 바로 위에 세워진 망루에는 섬사람들이 분명한 머 리 10여 개가 매달려 있었다. "망루! 망루를!" "아! 우단 아매시여!" 그러나 메이타랑은 그럴 겨를도 없이 계단을 뛰어오르며 뱃사람들을 몰아쳤다. 아매는 한국어에서 어머니의 고어 또는 사투리이고, 신이나 왕 을 뜻하는 일본말이기도 하다. 가야계 일본어와 연결된다고 할 수 있다. "살아남은 자를 찾아라!" 배에서 내린 사람들이 눈물을 머금고 뛰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섬 위쪽에 불에 타고 무너져 내린 보타락가사의 대웅전이었다. 뱃사람들은 마을로 달려갔다. 그러나 움직이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마을도 역시 불에 타고 무너져 내렸다. 타다 남은 재에서 하얀 연기가 을씨년스럽게 피어올랐다. 김자동은 칼을 빼들고 집집마다 뒤지기 시작 했다. 그러나 창칼에 찔린 마을 사람들, 그것도 처참하게 난도질당한 여 자와 어린아이들 시체밖에 없었다. "미타랑 님! 누가 있습니다!" 젊은이 하나가 마을 뒤쪽에서 외치자 뱃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김자동 이 거기서 본 것은 보타도를 떠나기 전에는 본 적이 없는 넓은 공동묘지 였다. 그곳에서 어느 노인이 땅을 파고 있었다. 노인은 곡괭이질을 하면서도 흐느끼는지 어깨를 연신 들썩였다. 미타랑이 노인의 어깨 너머로 시체를 보고는 그대로 주저앉았다. 다른 선원들도 달려왔다가 비명을 질렀다. "아아악! 이럴 수가!" "우단 아매 님이!" 선원들이 눈을 질끈 감고 부들부들 떨었다. 모든 것이 끝장이었다. 그 러나 미타랑은 뜻밖에 차분했다. "왕직 그놈은 어떻게 됐소? 죽었소?" 미타랑이 왕직이라는 이름에 분노를 가득 담고 물었다. "관헌들이 쳐들어왔을 때, 왕직도 여기 없었소. 왕직은 며칠 전 군사를 모아 본토로 쳐들어갔습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절강성을 휘젓고 있 다고 합니다." "그래요. 알겠소." 미타랑이 흐느껴 우는 김자동의 어깨를 치며 선원들을 마을길로 이끌 었다. 졸지에 집과 가족 모두를 잃은 선원 60여 명이 눈물을 뿌리며 미 타랑을 따랐다. 미타랑은 선원들을 세워놓고 조용히 말했다. "우리는 거세당했다. 아이들도 죽고, 여자들도 죽었다." 당시 사람들의 인식으로는 아이들은 다시 낳으면 되고, 여자는 새로 구하면 된다. 그러나 이들을 이어주던 존재가 지금은 없었다. 미타랑이 입술을 꽉 깨물며 말을 이었다. "우단 아매도 죽었다. 우린 더 이상 이곳에서 삶을 이어갈 수 없다." 그것이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더 이상 이 땅에서 살아갈 의미가 없었 다. "모두들 창과 칼을 들어라. 죽음이다. 저놈들에게도 죽음을 안겨주겠 다." 선원들이 각자 집으로 우르르 달려갔다. 그들 등에 대고 미타랑이 절 규했다. "다들 붉은 옷을 입고 노란 모자를 써라! 우단에 대한 장례식은 육지 에 가서 성대하게 거행하겠다. 흐윽! 중국인들은 우리의 원수다. 중국인 을 모조리 죽여버리자!" 배 한 척이 항주만에 조용히 닻을 내렸다. 항구를 지키는 관헌이 미타 랑을 알아보고 반갑게 다가왔다. 그리고 왕직이 일으킨 난리에 대해 호 들갑스럽게 주절거렸다. 그러다가 선원들 분위기가 조금 이상하다고 느 낀 순간이었다. "배에 불을 질러라!" 목이 잔뜩 쉰 미타랑이 소리를 질렀다. 명나라 관헌이 주춤 뒤로 물러 섰다. 그러나 겁을 집어먹은 관헌이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그것뿐이었다. 미타랑이 관헌의 배를 푹 찌르며 어깨를 안았다. "미안해, 친구. 자넨 중국인이지?" 부들부들 떨며 죽어가는 중국 관헌을 껴안은 미타랑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으뜸부리님. 왕직이 무리를 이끌고 덕청현에 있다고 합니다. 합류해야 합니까?" 김자동이 다가오자 미타랑이 칼을 뽑았다. 명나라 관헌이 미타랑의 몸 을 쓸면서 천천히 무너졌다. 피가 잔뜩 묻었지만 붉은 옷이라 거의 표가 나지 않았다. "그놈들이 잘못하는 바람에 우리 우단 아매님이 돌아가셨다. 이제부터 그놈들은 우리 일족으로 치지 않겠다. 자! 가자!" 뱃사람 60여 명이 항구마을을 벗어나 달리기 시작했다. 그들 앞으로 올 들어 몇 번이나 약탈당한 항주가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음... 작년 초부터 쓰기 시작한 글인데, 개인적으로 애착이 무척 많이 가는 부분입니다. 비류백제설로 유명한 김성호님의 '중국진출백제인의 해 상활동 천오백년 2권'을 일부 참조했습니다. 이 뒷부분은 대단히 격정적 인 사건이라 묘사하기에 시간이 꽤 드는군요. 너무 늦어서 연재하기는 조금 어렵겠습니다. 바닷사람 60여명이 중국인 4천여명을 학살한 1555년 의 이른바 '가정왜구' 사건입니다.) 역사전쟁소설 // 남해 // 3권 copyright (C) 2001 김경진 안병도 신재호 공저 업로드 김경진 (전쟁소설 데프콘 1, 2, 3부, 동해, 남북, 판타지 하늘길잡이 공동저자) * 고칠 점이 있으면 언제든 18번 오발탄 게시판에 올리시거나, 저나 안병도 님께 메일로 의견을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조선 ; 김경진 amraam07@hitel.net 일본 ; 안병도 031038@hitel.net * 공지 ; 마지막-1 연재분량입니다. 전체 내용에 대한 의견을 내주시 기 바랍니다. 6. 잔인한 바다 (1) = 나주 피난선, 임선 울돌목은 사흘 전처럼 여전히 비명소리를 내질렀다. 암초에 부딪쳐 요 동치는 물살이 그리 작지 않은 배를 크게 뒤흔들었다. 사흘 전의 상처를 고스란히 간직한 울돌목 해변가는 부서진 배와 시뻘겋게 피 칠이 된 나 무판자들, 그리고 부러진 각종 병장기로 가득했다. 물에 빠져 한껏 부풀 어오른 왜병 시체가 파도에 떠밀려 해안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임선은 막내 임업과 일가친척, 종들과 함께 왜선으로 가득 찬 해협 앞 바다를 노려보았다. 해협 바깥을 가득 메운 왜선들은 겁에 질렸는지 오 랫동안 머뭇거리면서 꼼짝하지 않았다. 가끔 배 한두 척이 해협으로 조 금 진입했다가 임선의 배가 앞으로 조금 움직이면 부리나케 달아나 버렸 다. 그럴 때마다 가속들이 일제히 기쁨의 함성을 질렀다. 관청에서 불하받은 이 배는 원래 조운선이었기 때문에 다른 피난선들 과 크게 구별될 정도로 컸다. 그러나 배는 단 한 척이고 왜선은 수백 척 이었다. 그리고 임선이 이끄는 자들은 대부분 무기 한번 잡아보지 못한 노비들이었다. 더욱이 배에는 화포나 승자총통 한 자루 없었다. 그러나 사기는 높디높은 가을 하늘을 찌를 듯 드높았다. "약속한 것처럼, 적을 상대로 단 일 각이라도 버틴다. 우리, 싸우다 죽 자!" 임선이 외치자 가속들이 창을 흔들며 함성을 질렀다. 임선이 가속들 얼굴을 찬찬히 하나씩 살폈다. 막내 임업과 사촌, 육촌, 팔촌 동생들, 아 직 어린 티가 가시지 않은 조카들, 사돈들, 그리고 종들은 죽음을 각오하 고 싸우겠다는 결의가 넘쳤다. 임선이 흐뭇한 마음에 천천히 고개를 끄 덕였다. 하긴, 도망가려고 해도 저 빠른 왜선들을 상대로는 방법이 없었다. 격 군이 없는 조운선은 커다란 나무닻을 바다 깊숙이 늘어뜨린 채 고정되어 있었다. 아까처럼 앞으로 조금 움직일 일이 있으면 닻을 감은 갑판의 물 레를 돌리는 것으로 해결되었다. "나리! 왜적들이 옵니다!" 갓동이가 창을 치켜들면서 호들갑을 떨었다. 임선은 활을 굳게 잡으며 뱃전으로 나와 앞을 노려보았다. 정말로 왜선 열 척 정도가 쏜살같이 앞 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사흘 전 싸움에서처럼 왜선들은 빠른 물살을 이 용해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왔다. "이 통제장군처럼 싸우면 된다! 절대 겁내지 마라. 알겠느냐?" "예이!" 임선이 단단히 다짐을 받자 가속들이 비장한 목소리로 일제히 대답했 다. 다들 죽더라도 제대로 싸우고 죽겠다는 강한 의지가 엿보였다. 흐뭇 한 미소를 지은 임선이 안심하고 활을 굳게 잡아당겼다. 며칠 전 싸움에 대한 이야기는 피난민들 입에 입을 거치면서 엄청나게 과장되면서 퍼져 나갔다. 이번 승리는 백성들로 하여금 잘하면 나라가 망하지 않겠다는 안도감과 함께, 도망가지 않고 왜군과 싸우면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에 넘치도록 하는 부수 효과를 낳았다. 임선 등은 그 싸움 을 직접 본 사람으로서 자부심이 넘쳤다. 자신이 있었다. 임선이 막 활을 놓으려는 순간이었다. 엄청난 소리가 귀청을 때리며 천지를 뒤흔들었다. - 따다다다당! "으악!" 임선은 당장 갑판에 코를 처박고 엎드렸다. 단지 언덕에서 구경할 때 와, 조총의 표적이 될 수 있는 지금과는 느낌이 너무 달랐다. 방금 그 비 명소리가 누군가 조총에 맞아 죽으며 낸 소리인지, 그저 겁이 나서 지른 비명인지 확인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눈앞이 노래지고 정신이 하나도 없 었다. 다시 한번 총소리가 나며 임선의 가슴을 진탕시켰다. 잠시 후 우당탕하는 소리와 함께 왜병들이 배에 뛰어올라왔는지 왜말 로 고함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누군가의 비명이 들렸다. 임선은 그 저 갑판에 머리를 처박고 오돌오돌 떨 뿐이었다. "허억!" 누군가 임선의 목을 잡아당기며 뒤흔들었다. 임선을 일으키려는 것 같 았다. 그러나 도깨비 같은 가면을 쓴 왜장에 놀란 임선이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화살 한 발 제대로 쏘지 못하고 죽을 모양이었다. 부끄럽고 억울했지만, 그건 둘째 문제였다. 이제 꼼짝없이 죽었다 싶었다. "당신들은 뭐요?" 느닷없는 조선말에 임선이 고개를 들었다. 화려한 갑옷을 입은 왜장 옆에서 웬 조선인 어부가 팔짱을 끼고 임선에게 턱짓을 하고 있었다. 임 선이 재빨리 주변을 살폈다. 거의 얼이 빠진 가속들이 한쪽 구석에 몰려 있고, 막내 임업은 아예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 이들을 향해 눈을 부릅 뜬 왜병들이 칼로 겁을 주면서 비웃고 있었다. "나, 나는 나주고을에 사는 진사 임선이다. 자네는 누군가?" "험험! 내가 누군지 아실 건 없고, 여기서 뭐한 거요?" 왜장들에게 뭐라고 왜말로 중얼거린 어부가 임선에게 다시 묻자, 임선 이 더듬더듬 대답했다. 내용은 떳떳한 말을 하면서도 부끄러워 죽고 싶 은 심정이었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왜놈들과 용감히 싸우려고..." "쳇! 싸우지도 못했으면서. 이보슈! 보아하니 양반님네 같은데, 여기 나리께 잘못했다고 싹싹 빌어요. 진사 어른이 수군인 줄 알고 왜인들이 굉장히 화가 나 있어요. 어서 빌라니까요! 그럼 혹시 아우? 불쌍해서 살 려줄지." "내 비록 부끄럽게도 왜놈들에게 포로로 잡힌 몸이나, 선비된 몸으로 서 절대 왜놈들에게 빌 수는 없다!" 살려달라고 빌어서 살려줄 왜인들이라면 그 많은 조선인 피난민들이 죽지도 않았을 것이다. 임선은 이왕 죽을 거, 오기가 솟았다. 갑판에 주 저앉아 좌정하고 옷섶을 헤치며 가슴을 내밀었다. 죽이려면 죽이라는 당 당한 자세였다. 그러자 어부가 쌀쌀맞게 말하면서 외면했다. "그럼 죽는 거지, 뭐. 왜장도 왜장 나름이오. 이 왜장은 군사도 아닌 피난민들을 죽일 생각은 없는 모양입디다. 그럼 잘 생각해보슈." "아이고! 제발 살려주게." 임선이 무릎을 꿇고 손이 발이 되게 싹싹 빌었다. 이렇게 해서라도 살 수 있다면 그보다 좋을 일이 없을 것 같았다. 왜인들이 저들끼리 쳐다보 더니 한바탕 크게 웃었다. 너무나 창피했지만 지금은 왜장들의 처분에 목숨을 맡길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어부가 왜장과 함께 한참을 이야기 하더니 갑자기 고개를 홱 돌렸다. "양반님네는 풀어주면 어디로 가겠소?" "고향으로 돌아가야 하지 않겠나? 집이 나주일세." "나주는 지금 장증아부토좌수성친이라는 잔인한 왜장이 점령하고 있어 요. 지금쯤 다른 전라도 땅도 모두 왜군이 점령했을 걸요? 죽기 싫으면 당분간 바깥 섬에 계시는 편이 좋을 게요. 어서 배를 타고 가시오." 뜻밖에 왜군들이 배에서 물러서기 시작했다. 왜선의 갑판이 조운선보 다 조금 높아서 왜병들은 다리를 올리고 힘겹게 옮겨 탔다. 왜병 하나는 배에서 내리다가 달려와 허공에 칼을 휘둘러 괜히 겁을 주기도 했다. 왜군 앞잡이도 왜선을 타고 올라가자 임선이 슬금슬금 일어났다. 꼼짝 없이 죽는 줄만 알았는데 정말로 죽이지는 않을 모양이었다. 조총병들도 총을 내려놓고 하품만 하고 있었다. 명량해전 당시 나주를 점령한 왜장은 초소카베 모리치카長曾我部土佐 守盛親였다. 그리고 해남은 시마즈島津군 육상병력이 점령하고 있었다. "고맙네. 이 은혜 잊지 않음세." 임선이 왜선에 탄 왜장들과 조선인 어부에게 굽실거렸다. 살아남다니, 꿈만 같았다. 얼굴을 돌린 어부가 손을 흔들었다. "이깟 왜놈 앞잡이 은혜일랑 잊어버리시오. 나도 살려고 이놈들 앞잡 이 노릇 하는 거니까요. 괜히 관가에 고해 바치시나 마시오. 왜놈들한테 부탁해서 기껏 살려주니까 나중에 관가에 고변한 경우도 많다고 합디 다." 난중일기에 따르면 임선과 임업 등은 이때 왜군에게 사로잡혔다가 싹 싹 빌어서 풀려난 다음 임치로 돌아간 것으로 되어 있다. 임선이 이 내 용을 이순신 장군에게 편지로 알린 것은 10월 4일이다. 난중일기 11월 15일 자에 임환이 등장하는 것으로 봐서 이들 일가는 계속 조선수군을 도운 것으로 추정된다. = 피난선, 강항 영광군 해안에 넓게 펼쳐진 염전지대의 끄트머리 포구인 당머리, 음력 9월 23일이었다. 피난민들을 가득 태운 배가 포구를 막 떠나는 순간이었 다. 형조좌랑 강항은 본처 소생 아들 용이와 첩의 딸 애생이를 품에 안고 안개가 가득한 바다를 살폈다. 다른 피난선들은 대부분 북쪽으로 올라가 서 바다는 텅 비어 있었다. "사공, 네 이놈! 우리 식구들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경칠 줄 알아!" 사촌형 강협이 뱃사공의 멱살을 잡고 뒤흔들었다. 며칠 전에 통제사를 만나 어지를 전하고 한성으로 돌아가던 선전관 강협은 충청도와 전라도 가 온통 왜군의 소굴이 되자 서울길을 포기하고 피난길에 나선 가족들과 합류했다. 배 두 척에 나눠 탄 집안 어른들은 흑산도로 빠지자느니, 다시 육지에 오르자느니 말이 많았다. 강항과 강협은 통제사를 따라가 왜군과 싸우자 고 주장했고, 의견이 거의 모아져 다음날 수군을 찾아가기로 했다. 그런 데 그 소리를 들은 사공이 어외도에 두고 온 처자식들을 찾으려고 밤에 몰래 배를 띄우는 바람에 이렇게 식구들끼리 서로를 찾아 이틀째 주변 포구와 섬들 사이를 헤매게 된 것이다. "자꾸 꾸물거리면 어떡하나? 왜놈들이 올라온다지 않나? 지금 어의도 에 가봤자 자네 처자들은 벌써 북쪽으로 피난 갔을 걸세. 피난민 배 수 백 척이 통제사를 따라 올라갔다는 소리 자네도 들었지 않나?" 강항이 좋은 말로 타일렀지만 사공은 우물쭈물하며 자꾸 남쪽으로 고 개를 돌렸다. 강항이 칭얼대는 아이들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시 한번 타 일렀다. "문기, 이 사람아. 왜놈들한테 잡히면 정말 어떡하려고 자꾸 그러나? 왜선 천여 척이 우수영을 돌아 북상중이라 하지 않는가? 어서 냉큼 논잠 포로 가세." 관복을 입고 허리에 환도를 찬 강항이 애원조로 바라보고 선전관 복장 을 한 강협은 사공을 쏘아보며 칼집에 손을 올렸다. 사공은 고까운 표정 을 짓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북쪽으로 배를 돌렸다. 처자도 중요하지 만 당장은 벼슬아치가 두렵긴 두려운 모양이었다. 배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사람들이 좁은 뱃전에 비비고 앉아 자리를 잡 았다. 작은 배에는 친인척 가족과 종들 가족까지 50여 명이 함께 타서 발 디딜 틈도 없었다. 포구가 조금 멀어질 때였다. 강항이 안개 속을 노려보다가 고개를 갸 웃거렸다. 배 같은 검은 그림자가 빠른 속도로 포구를 향해 달려오는 것 이 보였다. 배는 가까이 올수록 점점 커 보이는데, 강항이 처음 보는 형 태였다. "어? 저 배..." "악! 왜선이다!" 소리를 지른 사공들이 정신없이 노를 저었다. 그러나 왜선은 쏜살같이 달려왔다. 지나치게 많은 사람이 탄 이 작은 배는 왜선을 따돌릴 수 없 을 것 같았다. 왜병들이 이쪽을 향해 뭐라 소리치자 여자들과 아이들이 비명을 질렀다. "아아! 이제 어쩌면 좋을꼬!" 엉거주춤 일어선 강항이 왜병들이 하는 꼴을 잠시 지켜보았다. 이쪽을 향해 칼을 휘두르며 이빨을 드러내고 웃는 왜병들이 마치 지옥에서 뛰쳐 나온 야차들처럼 보였다. 관복을 입었으니 꼼짝없이 왜병들에게 머리를 잘릴 판이라고 생각한 강항은 아이들을 배에 앉히고 무작정 물로 뛰어들 었다. 몸이 물에 잠기며 한바퀴 빙글 돌았다. 바닷물은 시리도록 차가웠다. 짠 바닷물을 잔뜩 들이킨 강항은 잠시 정신이 없었지만 무조건 해변을 향해 팔을 휘저었다. 강항의 뒤를 따라 다른 식구들도 한꺼번에 물에 뛰 어들었다. "허푸! 푸! 이런!" 품에 넣어둔 문서가 물살에 떠내려갔다. 분호조참판 이광정을 따라다 니면서 군량을 모아 남원성을 지키던 명나라 군대에 보낸 증거로 남긴 문서 수백 통이 이렇게 사라져갔다. 죽음을 앞두고 있지만 책임을 완수 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강항은 너무 괴로웠다. 식구들의 비명과 아우성 속에서 강항은 발이 바닥에 닿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나 생각과 달리 움직임은 빠르지 못했다. 파도가 밀려왔다 내려가자 치렁치렁한 관복을 입은 둔한 몸이 바다 쪽으로 휩쓸렸다. "아악! 사람 살려!" 배에 남겨진 여자들 사이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흘낏 뒤돌아보니 왜병들이 배에 뛰어올라 칼을 휘둘러 사람들을 위협하고 있었다. 그리고 왜선에서는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사람들을 갈고리로 건져 올렸다. 강항은 있는 힘껏 해변으로 움직이려 했으나 얼마 못 가 붙잡히고 말았 다. 강항은 강제로 왜선 위로 끌어올려졌다. 바닥에 누워 바닷물을 토하며 잠시 헉헉대던 강항을 왜병들이 주먹질을 하며 다시 피난선으로 옮겨 태 웠다. 다른 가족들은 이미 단단히 묶인 채 통곡하고 있었다. 외사촌 김주 천 형제와 종들 10여 명은 간신히 헤엄쳐 해변 언덕으로 기어오르는 것 이 눈물 속에서 흐릿하게 보였다. "엄마! 엄마아!" "용이야!" 아내의 울부짖음에 놀란 강항이 정신을 차리고 아내의 눈길을 따라갔 다. 그곳에는 다섯 살 먹은 아들 용이가 파도에 가라앉았다 떠올랐다 하 며 엄마를 부르고 있었다. 용이는 파도에 밀려 해변에 가까워졌다가 다 시 파도가 밀려나길 계속해 점점 바다로 쓸려갔다. 물을 삼킨 용이가 애달프게 소리를 질렀지만 강항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안타깝게 보는 사이에 어느새 용이는 다시 떠오르지 않 았다. 이제 보니 첩의 딸 애생이도 물에 빠졌는지 보이지 않았다. "아이고! 내 새끼야!" 아내가 무너져 통곡했다. 늦게 낳은 외동아들이었다. 강항은 그저 우두 커니 바다를 쳐다볼 뿐이었다. 왜선은 피난선을 꼬리에 매달고 순풍에 돛을 달고 쏜살같이 남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배는 바람을 타고 하룻밤 사이에 무안현 낙머리에 도착했다. 바닷가 수십 리를 화려한 깃발을 가득 꽂은 왜선 수천 척이 가득 메웠다. 당장 제 몸 간수하기도 벅찬 강항이었지만 이 많은 왜선들이 한꺼번에 한강으 로 올라가 서울로 들이닥치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이 들었다. 강항은 경황이 없는 중에도 왜선들 숫자를 하나하나 헤아리기 시작했 다. 지금 임금이 다시 의주로 몽진을 떠났는지, 아니면 벌써 나라가 망했 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혹시나 탈출할 수 있으면 이 숫자를 상부에 보고 하기 위해서였다. 왜선은 다 합해 600에서 700척 정도 되는 것 같았다. "지옥이야." 문득 강협이 중얼거렸다. 해변에는 시체가 가득 산처럼 쌓여 있고, 왜 선마다 가득히 조선사람들이 묶인 채 목놓아 울고 있었다. 강항도 큰소리로 울고 싶었지만 집안 아낙네들과 종들, 어린것들 앞에 서 먼저 울 수도 없었다. 아내가 죽은 아들 생각이 나는지 다시 나지막 이 흐느끼기 시작하자 배에 탄 사람들 사이로 울음이 차츰차츰 번졌다. 강항의 배는 다른 왜선들보다 배나 크고 각종 깃발로 으리으리하게 치 장한 왜선으로 끌려갔다. 왜 대선에서 화려한 갑옷을 입은 왜장들 몇이 강항의 배로 내려왔다. 왜장들이 통역인지 조선인 어부에게 뭐라 말하자 어부가 강항에게 말을 걸었다. "이보시오." "왜 그래?" 강항이 어부를 쏘아보며 날카롭게 대꾸했다. 어부는 왜장들 얼굴을 보 며 잠시 당황하더니 다시 질문을 꺼냈다. "수로대장은 어디로 갔소? 이 왜놈들한테 맞아죽기 싫으면 화내지 말 고 제발 차분히 말하시오." "흥! 알려줄까? 태안 안행량은 험하기로 유명해! 이름이나 좋아야 한 다고 안행량安行粱이야. 배가 가는 족족 뒤집어지는 망나니 물목이거든. 그 옆길로 명나라 명 유격, 고 유격 두 장군이 중국배 수만 척을 이끌고 내려와 곧 군산포에 도착할 거야!" 강항의 말을 어부가 왜말로 통역했다. 왜장들은 물길이 험하다는 소리 에 인상을 찌푸렸지만, 중국 수군이 내려온다는 말에는 코웃음을 쳤다. 오히려 가슴을 펴고 칼을 뽑는 시늉을 하는 등 명나라 수군과 한번 붙어 보자는 기세였다. 조선인 어부가 다시 차분하게 물었다. "통제사가 어디 있냐고 물었소." "통제사는 지금 군산포 앞바다에서 명나라 수군을 기다리고 있어! 워 낙 수가 모자라 조금 물러섰지만 곧 명나라 수군과 합세해서 이곳으로 내려올 거야!" 어부가 다시 통역하자 왜장들이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낯빛이 변했다. 왜장들끼리 뭐라고 한참 떠들더니 어부가 다시 강항에게 물었다. "통제사는 한강을 막으러 강화도로 떠날 거라는 소문이 있던데, 그게 아니오?" "명군 수십 만 명이 내려오는데 우리 수군이 왜 강화로 가?" "허, 참! 명나라 수군이야 임진년에도 대마도를 치느니 어쩌니 했지만 거짓말이었지 않소? 명군은 상관없고, 통제사 말이오. 조선수군이 지금 고군산도에 있는 거 다 알아요." "알면 나한테 왜 물어? 나는 아는 대로 대답했어. 죽이려면 지금 당장 죽이든지 마음대로 해!" 강항은 여전히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어제 아침에 잡힌 이후 꽁꽁 묶인 채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했지만 전혀 기가 죽지 않았다. 왜장들끼 리 서로 한참을 말하는 도중에 강항이 어부에게 은근슬쩍 물었다. "우릴 잡은 놈은 누군가?" "이예주수 좌도라는 수로대장의 부하 노부시치로, 그러니까 우리말로 신칠랑信七郞이라는 왜장이오." "그런데 왜 우리는 죽이지 않나?" "당신들은 벼슬아치들 아니오? 행색이 그런걸. 모르긴 몰라도 아마 왜 땅으로 끌려가기가 쉬울 거요." 이후 강항은 영산창, 전라우수영, 순천을 거쳐 일본에 끌려간다. 강항 일가족은 3년 동안 수없이 많은 고생을 하면서도 절개를 굽히지 않고 여 러 번 탈출을 기도한다. 그러나 결국 실패하고 그 대신 일본의 실태를 보고하고 조선의 국방정책을 건의한 적중봉소賊中封疏를 다른 사람들을 통해 세 차례에 걸쳐 조정에 전달한다. 적중봉소에서 당시 일본의 사정과 임진, 정유재란 당시 조선에 온 일 본측 무장들의 행적에 대해 기록한 내용은 무척 소상하고 정확하다. 특 히 '배로 무안까지 온 자'들을 따로 기록함으로써 명량해전에 참가하고 서해로 진입한 일본수군 장수들이 누군지 정확히 밝혀준다. 그리고 강항이 영광에서 왜선에 잡혔다는 사실만으로도 일본수군이 명 량해협을 지나 서해안에 진입했고, 최소한 영광까지 올라갔음을 확실히 증명한다. 전략적으로 큰 차이는 없으나 조선수군이 명량해협에서 일본 수군의 서해 진입을 막지는 못했다는 뜻이다. 이순신의 조선수군은 왜선 들이 서해에서 물러날 때까지 고군산도, 즉 지금의 군산 앞바다 선유도 를 지켰는데, 당시 전라도와 충청도가 온통 왜군의 소굴이 된 사실을 감 안하면 무척 위험한 때였다고 볼 수 있다. 강항은 이후 포로송환 때 돌아왔지만 적중봉소 내용이 선조의 비위를 거스르는 부분이 많아 관리로 등용되지 못하고 야인으로 살다 죽었다. 적중봉소에는 조정의 조령모개식 인사행태와 원균의 작태를 적나라하게 비판하고 이순신을 칭찬하는 등 선조가 민감하게 받아들일만한 내용이 많다. 강항은 적중봉소와 포로생활의 기록, 그리고 일본의 이모저모를 자 세히 적은 적중견문록 등을 묶어 건차록巾車錄이라는 이름으로 책을 엮 었고, 제자들이 간양록看羊錄이라 이름을 고쳐 불렀다. = 정릉동 행궁, 김양보 "그래. 어떻더냐?" 김양보는 표정을 어떻게 지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잠시 머뭇거 렸다. 역시나 그 틈을 못 참고 당장 불호령이 떨어졌다. "어떻게 됐냐고 묻지 않느냐?" "이, 이겼사옵니다. 우리 수군이 이겼사옵니다, 전하." 머리를 몇 번이나 조아리며 대답한 김양보가 슬쩍 고개를 들어 눈치를 살폈다. 임금의 입가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뭐야? 그게 정말이냐?" "어느 안전이라고 감히 거짓을 고하겠습니까?" "음... 이겼단 말이지. 그래. 잘 됐구나." 말은 그렇게 해도 매우 섭섭하다는 듯이 들리는 말이었다. 김양보는 아무리 임금이 이순신을 미워하더라도 조선군의 승리가 이렇게 달갑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신을 차린 김양보가 입에 발린 축하를 했 다. "모두 전하의 복록이옵니다, 전하. 자고로 어진 임금 밑에 용감한 장수 가 있는..." "그래. 어떻게 이겼느냐?" 임금이 매우 짜증이 난다는 투로 김양보의 말을 자르며 다시 물었다. 김양보는 아주 건조하게 전투의 전후과정을 설명했다. 그러나 아무래도 설명이 부족한지 임금이 자세히 캐물었다. "적선은 몇 척이나 부셨느냐?" "겨우 50척쯤 되는 것 같사옵니다, 전하." 김양보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서울로 오는 동안 내내 어떻게 보고할 것인지 고민했는데, 역시 이런 대답을 준비하길 잘했다 싶었다. "50척이나?" 임금이 놀라고, 옆에 부복한 시위내시들이 전혀 반대의 의미로 김양보 를 쳐다보자 김양보가 슬쩍 눈치를 주었다. 이들의 표정 변화를 놓칠 임 금이 아니었다. "적선이 몇 척이나 되는데?" "적선 500여 척 가운데 300여 척 정도가 직접 싸움에 참가한 것 같습 니다." "뭐, 그렇다면 별로 큰 승리는 아니로구나. 험! 험!" '조선군이나 명나라 군대가 거둔 다른 승리에 비하면'이 아니라 '이순 신이 해전에서 거둔 다른 승리에 비하면' 이라는 전제조건이 빠진 말이 었다. 당연히 그 전제조건을 달아서 말할 임금이 아니었다. 김양보는 바 로 이때 적절한 맞장구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그러하옵니다. 이순신이 전과를 과장하고 남의 공을 빼앗는 버릇이 있사오니 이번에 승첩장계가 올라오더라도 마땅히 줄여 잡으시옵소서." 김양보가 슬쩍 고개를 들어보니 임금이 무척 흡족한 미소를 짓고 있었 다. 이번에 한 말로 점수를 많이 딴 것 같아 김양보도 기분이 좋았다. "당연하지. 그런데 왜적들이 서해안으로 타고 올 기세가 보이더냐? 수 군이 겨우 13척 뿐인데 왜군들이 다시 공격하지 않는 게 이상하지 않느 냐? 너는 끝까지 지켜볼 것이지 왜 수하들을 다 데리고 벌써 올라왔느 냐?" "안심하시옵소서, 전하. 우리 판옥선이 한 척도 부서지지 않았으니 왜 군이 쉽사리 서해를 통해 올라오지는 않을 것이옵니다." 김양보가 단정적으로 대답했다. 임금이 의아하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윽고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제야 왜군의 피해가 무척 크다는 사실을 감지한 모양이었다. "그으래? 음. 음! 무슨 말인지 알겠다. 새겨듣겠노라. 그런데 우수사 김 억추는 잘 싸우더냐?" 이 질문에 김양보는 대답하지 않고 송구스럽다는 듯이 그저 머리만 조 아렸다. 임금의 심중을 읽고 있는 김양보였다. 이것은 직접 말을 할 수는 없지만 대단히 부정적이라는 평가였다. "그래? 음. 다른 특이한 점은 없느냐?" "수많은 백성들이 배를 타고 수군을 따르고 있사옵니다." 김양보가 슬쩍 고개를 들었다가 얼른 다시 숙였다. 임금은 무척 불쾌 한 표정이었다. 수군이란 통제사를 달리 말한 것에 불과했다. "잘 알겠다. 먼길에 수고했다." 김양보가 등에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어전을 빠져 나왔다. 김양보가 밤하늘의 별을 보며 한숨을 쉬는데 시위내관들이 볼멘 소리로 물었다. "대감! 얼마나 큰 승리였는지 뻔히 보셨지 않습니까? 성상의 눈과 귀 를 그렇게 가려도 되는 것이옵니까?" "무슨 소리! 살고 싶걸랑 그런 소리는 꺼내지도 마라. 주상전하를 모시 는 내관이 어찌 그리 눈치가 없느냐?" 김양보가 걸음을 빨리 하자 시위내관들이 종종걸음으로 그를 따랐다. 지금 임금은 머리도 좋고 기억력도 너무 좋았다. 다만 신하들에 대한 시 기와 질투가 너무 강하다는 것이 김양보가 본 지금 임금의 가장 큰 문제 였다. 이런 임금을 상대로 말 한 마디 아차 실수하면 그날로 끝이었다. "우리는 개다. 절대로 잊지 마라. 주인의 비위를 거스르면, 바로 그날 로 죽는다. 알겠느냐?"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시위내관들이 머리를 숙였다. 김양보가 씩 웃으 며 한 마디 덧붙였다. "물론 우리는 중신들처럼 역할이 끝났다고 해서 솥에 삶기지는 않는 다. 귀양 가거나 사약을 받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런 점에서는 안심해 라." = 고군산도, 우치적 "통상께서는 아직 기침하지 않으셨는가?" 우치적이 의원 정종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누런 호박이 얹혀있는 초 가집 마루에는 아침부터 나주목사, 무장현감, 거제현령 등이 걱정스런 표 정으로 앉아있고, 의원 정종은 마당에서 느긋하게 탕약을 달이고 있었다. 음력 9월말이 되자 해가 한껏 남쪽으로 기울어지고 파도는 점점 높아졌 다. "부사 어른도 참. 걱정 마시라니까요. 통상께서는 그 동안 못 주무신 잠을 푹 주무시는 겁니다." "어허! 그래도." 우치적이 혀를 찼다. 왜군이 땅으로는 전주, 정읍과 영광, 충청도 보령, 아산, 서산 일대, 물로는 고군산도 남쪽 위도까지 들어왔다는 소문이 무 성했다. 그러나 통제사는 며칠째 드러누워 꼼짝하지 못했다. 부하 장수들 끼리 협의해서 근처 바다에 대한 경계를 펼치고 있지만 장수들뿐만 아니 라 일반 수졸들도 불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어젯밤에는 잠시 정신을 차리셨다면서?" "예. 아마도 승첩장계를 쓰시는 듯하더이다." "오호! 그럼 거제원이 당연히 일등이겠소, 그려." 우치적이 안위를 보며 빙긋 웃었다. 안위가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 이자 다른 장수들이 축하의 뜻으로 가볍게 안위의 등을 두들겨 주었다. 물론 장수들은 이번 싸움에서 통제사의 공이 가장 컸다는 사실은 익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장계에서 자기 공을 내세운 적이 한번도 없었다. "제가 통제사께 욕을 제일 많이 먹었지요. 하하!" "목소리를 낮추시지요." 의원 정종이 낮은 목소리로 경고하자 안위의 웃음소리가 쏙 들어갔다. "어흠. 그래. 미안하이. 다른 사또들은 밖에서 잠시 좀 봅시다." 우치적에 이끌려 수령, 장수들이 초가집 뒤쪽의 소나무 아래에 모였다. 고개를 돌리니 신시도, 무녀도, 장자도, 횡경도, 닭섬 등이 이 고군산도를 사방에서 둘러싸고 맑은 햇살과 푸른 바다와 함께 어우러져 그림처럼 아 름다운 모습을 연출했다. "방금 들어온 영등포만호 조계종의 보고에 의하면, 요 이틀 사이에 왜 군들의 척후활동이 꽤 줄어들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 탐망선들은 훨 씬 남쪽으로 내려가서 적세를 살피고 있답니다. 척후장 조 만호는 왜적 이 곧 물러서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전망하고 있습니다." 장수들 중에서 가장 젊지만 순천부사라는 높은 벼슬과 그 동안의 군 공, 또한 통제사가 보내는 신임을 감안하면 다른 장수들이 감히 우치적 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다른 장수들도 방금 우치적이 말한 그런 분위기는 어제부터 감지하고 있었다. "만약 왜적이 물러나면 통상께서는 쫓아가겠지요?" "그것이 걱정스럽습니다. 지금 우리 수군은 겨우 20척에 불과하지 않 습니까?" 그 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 명량해전을 승리로 이끈 수군은 당사도와 어외도를 거쳐 영광, 위도, 고군산도로 계속 진을 옮겼다. 위도에서는 통 제사가 군관 황득중과 통제사의 사노비 금이를 보내 종 윤금을 잡아 묶 어왔다. 가는 곳마다 많은 백성들이 찾아와서 축하하고 양식을 주었으며, 반대로 전라도를 책임진 전라순찰사 황신은 수군이 고군산도에 온다는 말에 놀라 배를 타고 옥구로 달아나 버렸다. 임치첨사 홍견은 결국 판옥선을 이끌고 함대에 합류했다. 다른 곳으로 도망친 장수들도 더 늦기 전에 속속 모여들었다. 한번 승리하자 소문이 사방으로 퍼져 장정들이 끝없이 몰려왔다. 이제는 격군 부족에 시달리지 않아도 됐다. 며칠 사이에 수군의 역량이 급속도로 커 가는 느낌이었다. "설마 통상께서는 전에 누구처럼 무작정 쫓아가시지는 않겠지요. 아무 래도 우리 군세가 너무 약하니까요." 안위가 신중하게 반대의견을 냈다. 원균이라는 이름은 수군 장수들 사 이에서는 이미 금기였다. 보성군수는 아직도 싸울 때의 흥분이 채 가라 앉지 않았는지 팔을 크게 휘두르며 며칠 전 일을 상기시켰다. "울돌목에서 싸울 때 보셨지요? 통상께서 꾀하고 조심성만 많은 줄 알 았는데 알고 보니 대단한 용장이더이다. 큰소리로 독전하면서 왜적을 칼 로 막 내리치고, 적장을 쏠 때는 한방에 정확히 꿰뚫더라구요." "이번에도 그럴까 걱정이지요. 지금은 싸우면 안됩니다." 장수들이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왜 수군이 곧장 한강으로 향하지는 않을 모양이었다. 알다시피 왜 수군이 입은 인적, 물적 피해는 너무 컸 다. 그리고 왜군이 입은 가장 결정적인 손해는, 왜군은 조선수군을 도저 히 어떻게 하지 못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뼈저리게 느꼈을 거라는 사실 이었다. 13척을 상대로, 아니 좌선 한 척을 상대로 어쩌지 못한 왜 수군 이 20척으로 늘어난 조선수군을 달리 해볼 방법은 없을 것이다. "통제사께 큰 일이 없어야 하는데." 안위가 중얼거리다가 입을 다물었다. 다른 장수들이 재수 없는 소리라 고 노려보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장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오?" 우치적이 분위기를 바꿨다. 그러자 장수들 사이에서 말이 많았다. 누구 는 몇 척을 깨뜨렸느니, 누구는 어떤 공을 세웠느니 말했지만 통제사가 장계를 어떻게 쓰리라는 것쯤은 이들도 알고 있었다. "혹시나 장계에서 사또들이 올린 전과를 팍 줄이더라도 너무 불만을 품지는 마시오. 또 다시 그것 때문에 통상이 화를 입을까가 더 걱정이 오." 우치적이 애써 고개를 돌리면서 말했지만 다른 장수들은 모두들 안위 만 쳐다보았다. 안위가 얼굴이 벌개졌다. "젠장! 그래요. 나 때문에 통상이 잡혀가서 고문을 당했소. 하지만 내 가 그때 부산포를 방화한 것이 거짓말이었다면 내 자리, 아니 내 목을 보전할 수 있었겠소? 역적의 오촌조카인 내가 말이오!" = 시마즈군 어립선, 도도 다카요시 해협에서의 싸움이 끝난 지 10여 일이 지났다. 요즘 며칠 동안 도도 다카요시가 한 일은 없었다. 목공들처럼 부서진 군선이나 고치고 가끔 근처를 얼쩡거리는 조선수군 척후선과 술래잡기하다가 지친 것뿐이었다. 아무래도 조선수군이나 일본수군이나 서로를 공격하기에는 너무 부담이 가는 상대라고 생각했다. "피해가 너무 커." 시마즈 요시히로가 새삼스럽게 일본수군 함선들을 살피며 중얼거렸다. 시마즈군은 각종 기치를 높이 들어 위용을 뽐내고 있었지만 패잔선이나 다름없는 다른 수군 함대들 사이에서는 빛이 바랬다. 요시히로의 말에 가토 요시아키와 하치스카 이에마사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특히 중상을 당한 도도 다카도라 대신 군의에 참석한 도도 다카 요시는 얼굴이 벌개질 정도였다. 시마즈군 어립선에서 열린 군의는 의외로 단촐하게 진행됐다. 구루지 마 미치후사는 전사하고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도망쳐버렸다. 겨우 너덧 명만이 남아 뻔히 난 결론을 두고 서로 눈치만 보며 회의랍시고 하고 있 었다. 물러서기로 이미 결정을 내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다만 퇴각할 날 짜와 명분이 문제였다. "요시히로 님. 죄송한 질문이지만, 조선인들을 저토록 무자비하게 잡아 죽여도 되는 겁니까?" 가토 요시아키가 해안에 가득 쌓인 시체를 보며 약간 항의조가 섞인 투로 말했다. 학살이 끝난 지 닷새쯤 되자 시체 썩는 냄새가 여기까지 코를 찔렀다. 그래서 진을 옮겨야겠는데, 조선수군이 도사리고 있는 북쪽 으로 간다는 것은 지금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무슨 소린가? 나는 태합 전하의 명령대로 했을 뿐이네. 자네들이야말 로 쓸데없이 포로나 잡지 말게." 시마즈 요시히로가 코방귀를 뀌었다. 다카요시는 시마즈 요시히로가 비대한 체구치고는 얼굴이 꽤나 귀여워 보인다고 생각했다. 물론 요시히 로가 들으면 당장 칼을 빼들겠지만. 정유년과 임진년의 전쟁양상은 꽤 다르다. 임진년에는 왜군이 점령지 의 조선 농민들을 위무해서 계속 농업에 종사하게 했다. 반면에 정유년 에는 조선사람들을 보는 족족 모두 죽인 다음 일본사람을 이주시켜 조선 땅을 완전히 일본 땅으로 만들겠다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망상이 실제 명령으로 발동됐다. 그러나 전쟁 기간동안 인적손실이 극심했던 일부 무장들은 공공연히 명령을 어기며 자기가 다스리는 지방으로 조선인 포로를 잡아갔다. 도쿠 가와 막부가 들어서서 조선과 화의가 성립된 다음 포로송환령이 몇 차례 있었지만 끝내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조선인이 더 많은 것은 일본측의 인명피해도 극심했기 때문이다. "우군에서 보낸 전령입니다!" 관측병이 해안 쪽을 가리키며 소리를 질렀다. 세 가지 깃발을 등에 꽂 은 기마병 40여 명이 해안길을 따라 내려오고 있었다. 도도 다카요시는 문득 시마즈군 병사들이 내지르는 고함소리에 어느새 익숙해진 스스로가 놀랍다고 느꼈다. 수군 무장들이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어두운 표정으로 전령을 맞았다. 그러나 처음부터 육군인 시마즈 요시히로와 하치스카 이에마사 는 상대적으로 느긋한 표정이었다. "아니! 도대체 여기서 뭐하시는 겁니까? 우리 우군은 굶어죽게 생겼는 데 좌군은 여기 계속 눌러 앉아 계시면 어떡하자는 겁니까? 우리가 굶어 죽을 때까지 기다릴 작정이었습니까?" 전령이 길길이 날뛰었다. 우군을 위한 군량을 실은 함대가 며칠째 움 직이지 않자 심한 배반감을 느낀 것이다. "전령은 우군 총대장님의 말씀만 전하게." "예!" 시마즈 요시히로의 한 마디에 전령은 당장 기가 꺾였다. 상당한 고위 무사로 보이지만 시마즈 요시히로에게 대들면서 따질만한 전령은 일본에 존재하지 않았다. 전령이 무릎을 꿇고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사람들의 말을 전했다. "우군 총대장 모리 히데모토毛利秀元 님과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님,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 님께서 공동으로 전하는 말씀입니다." 전령은 여기서부터 목소리를 높였다. "우군은 고려의 도성을 목전에 두고도 부득이 철수할 수밖에 없다. 수 많은 병력이 며칠동안 풀뿌리와 나무껍질로 연명했지만 군량이 부족해 더 이상 버틸 수 없기 때문이다. 약해빠진 명나라 군대나 조선군 몇 천 을 두려워할 일본군은 없다. 그러나 고려의 수도를 점령하고도 군량이 부족해 꼼짝할 수 없었던 5년 전의 참상을 되풀이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 모든 책임은 군량 수송을 책임진 수군에 없다고 할 자 누가 있겠는 가?" 잠시 침묵이 찾아왔다. 모든 책임은 수군이 지겠지만, 어쨌든 이 전쟁 의 전환점이 드디어 지금 이 순간에 찾아온 것이다. "맞는 말이네, 뭐." 침묵을 깨며 시마즈 요시히로가 쌀쌀맞게 맞장구 치자 도도 다카요시 가 입술을 살며시 깨물었다. 부끄러웠지만 변명할 말이 없었다. "나는 수군이 아니니, 이쯤 해서 먼저 돌아갈까 하네. 내가 갈 곳이 사 천성이라 했지?" 시마즈 요시히로가 벌떡 일어섰다. 축객령이었다. 요시히로는 돌아가는 수군 무장들에 대고 마지막 한 마디를 잊지 않았다. 도도 다카요시의 등 을 깊숙이 찌르는 날카로운 비수나 다름없었다. "어떻게 바다 건너 일본으로 돌아갈까 벌써부터 걱정이 드는군. 아무 래도 병사들한테 수전 연습 좀 시켜야겠어." 목록처음ㅣ목록ㅣ삭제ㅣ편지보내기ㅣ동호회홈 제목날짜ID이름 6. 잔인한 바다 (2) = 정릉동 행궁, 정홍익 나중에 덕수궁이 된 정릉동 행궁에 아침부터 정승, 판서들이 속속 모 여들었다. 아직 임금이 들어오기 전이라 여유가 있는 정홍익은 편전에 들어오는 사람들 이름을 천천히 기록해나갔다. 어렸을 적에 도성이 떠들 썩하도록 장난질을 쳤다는 이항복과 이덕형이 큰소리로 떠들며 들어왔 다. "왜군이 남김없이 남쪽으로 내려갔다니,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 명나라 군사가 겨우 수천에 불과한데 어째서 왜군들이 후퇴했는지 모르 겠어." "나도 그렇다네. 명나라 군대가 직산에서 왜적에게 패하고 허둥지둥하 던 꼴이 우습더군. 그러면서도 명나라 장수들이 누구는 왜병 수천을 참 하고, 누구는 왜적 두목을 베었다고 허풍을 떨어. 수급을 보자고 하니까 헛기침만 하더군." 정홍익이 알기로 두 사람은 다섯 살이나 차이 나는 죽마고우였다. 이 항복과 함께 있으면 평소에 침착하고 예의 바르기로 소문난 이덕형까지 주변에 사람이 없을 때처럼 절로 큰소리가 나오는 모양이었다. 다른 대 신들은 두 사람이 빠르게 주고받는 말 사이에 낄 틈이 없어 그저 입다물 고 듣기만 했다. 정홍익은 만약 두 사람의 잡담까지 초책에 기록해야 한 다면 당장 벼슬자리 때려치우고 낙향하리라고 마음먹었다. "도성은 한시름 놨지만, 서해 물길을 타고 올라온다던 왜놈들 수군은 지금 어디쯤 있을까? 이순신이 흥양 땅에선가 진도에선가 왜적을 막고 있다는 것 같았는데, 아마 힘들겠지?" "쯧쯧! 괜찮은 사람인 것 같던데. 안 됐군, 그래." "내가 전에 이 통제를 한번 본 일이 있네. 고기 잡고 소금 구워 팔아 쇠를 사서 화포를 만드는 등 전쟁준비하기를 마치 술이나 여색을 탐하듯 열심히 하더군." 정홍익이 책상 위에 엎어질 뻔했다. 이항복의 말투가 원래부터 워낙 튀는 편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비록 임금이 없다 해도 어전에서 이런 말까지 할 줄은 몰랐다. 그러나 이 정도는 약과였다. 1601년에 이항복이 영의정이 된 다음 충 무공을 제사지내는 최초의 사당, 충민사를 세운 다음에 지은 충민사기忠 愍祠記에도 비슷한 내용이 나온다. (전략) 또 둔전을 널리 설치하는 등 무릇 나라에 이롭고 군사에 도움 이 될만한 일이라면 용감히 진행하여 주저하지 아니함이 마치 음식이나 색을 즐기듯 하여 조금도 소홀함이 없었으니, 군량이 넉넉해 양식이 떨 어져 본 일이 없었다. (후략) 그 말을 듣고 이덕형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가 그 정도로 말하다니, 이 통제사가 정말 열심히 했나 보군. 난 그것도 모르고 전에는 이 통제 그 사람이 나쁜 사람인 줄 알았지. 원균 영감이 날 만나기만 하면 이 통제를 욕했으니까." "자네, 원균한테 곶감이라도 얻어먹었나? 이 통제를 한번도 만나보지 않았다는 사람이 어떻게 남의 말만 믿고 그리 함부로 판단해?" "원균 그 사람이 용감한 건 사실 아닌가?" "흥! 용감한 사람이 칠천량에서는 먼저 내빼? 아니면 우리편한테만 용 감했겠지. 상께서는 끝까지 원균을 잡아 오라 하지 않으실 모양이지? 분 명 어딘가 숨어있을 텐데." "주상전하 납시요~" 내시감의 목소리가 오늘따라 유달리 컸다. 이덕형과 이항복이 주고받 는 말이 편전 밖에까지 들린 모양이었다. 대신들이 자리를 고쳐 앉았고, 임금이 들어오자 군신간의 인사치레가 한참 동안 이어졌다. 정홍익은 임 금이 오늘따라 기분이 꽤 나쁜 듯한 표정이라 아무래도 몸조심해야겠다 고 생각했다. "주상전하! 겸 삼도수군통제사 신臣 이순신이 보낸 군관 송한, 김국, 배세춘, 전라우수사가 보낸 군관 김응추 입시이옵니다." 밖에서 내시감이 목소리를 높였고, 잠시 후 군관 네 사람이 상기된 얼 굴로 들어와 임금에게 큰절을 올렸다. 정홍익이 보기에 네 사람이 무인 떨거지라서 그런지 행동이 무척 촌스러웠다. 정홍익의 경험으로는 무인 주제에 감히 어전에 들어오는 것은 승첩을 보고할 때 같은 극히 드문 경 우였다. 조정 대신들이 조용히 술렁거렸다.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지만 통제사 가 승리를 거둔 모양이었다. 송한과 김응추가 승첩장계라면서 종이 두루 말이를 임금에게 바치자 이항복이 입을 쩍 벌렸다. 정홍익은 군관들 한자 이름을 몰라 대충 적었다. 승첩장계를 들고 어 전에 들어온 군관이라면 싸움에서 큰공을 세웠을 테고, 지금까지 관례로 보아 작은 고을 현감 정도는 따놓은 당상이었다. 그러나 말이 그렇다는 것이지, 현감은 당상관에 한참 못 미친다. "이겼다고?" 임금이 시큰둥하게 물었다. 조정 대신들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 정을 지었지만 임금은 별로 놀라지도 않았다. 아마도 임금은 다른 사람 을 통해 그 소식을 이미 접한 듯했다. 궁궐 밖을 돌아다니면서 임금의 눈과 귀 역할을 하는 사람, 정홍익 뇌리에 떠오른 사람은 딱 하나였다. 내시 김양보. "몇 척이나 깨뜨렸나? 장계에는 20척인지, 아니면 뒤에 또 11척을 깨 뜨렸다고 하니 다 합해 31척인지 모르겠다." 장계를 대충 훑은 임금이 매우 불쾌한 표정으로 물었다. 정홍익은 초 책에 열심히 기록해나가면서도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이번 싸움의 전과 는 내관이 싸움터에 가서 직접 눈으로 보고 나서 임금께 아뢰었을 것이 다. 만약 장수가 전과를 과장해서 장계를 올렸다면 당장 임금에게서 불 호령이 떨어졌겠지만, 아무래도 이번 경우는 그 반대인 것 같았다. 군관 세 사람이 서로 눈치를 보다가 송한이 머리를 조아리며 입을 열 었다. "정확히 세지는 않았사오나 적선을 수도 없이 깨뜨렸사옵고, 적어도 백 척은 넘사옵니다. 통제사가 장계에 적은 것은 확실하게 불태우거나 우리 수군이 빼앗은 적선의 숫자이옵니다. 싸움 초기에 부순 왜선 숫자 만 해도 그것보다는 많사옵니다. 그러니 화포를 맞아 큰 피해를 입고 도 망치거나 왜적들이 다 죽고 물살에 흘러간 적선은 다 빼고..." "그만! 알겠다. 그럼 수급은 몇 개나 취했는가? 얼마나 이겼는지 그것 으로 알 수 있겠지." 임금의 말에 정홍익이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이순신은 수급을 바쳐 공을 내세우지 않기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주변에 수많은 눈들이 있고 질시하는 자들도 많았기에 이순신이 승첩장계를 올릴 때는 항상 있 는 그대로 올렸고, 그만큼 당당했다. 그런 사정을 뻔히 알면서도 임금이 수급 숫자를 물은 것은 이번에 이순신이 세운 공을 폄하하려는 의도가 분명했다. 군관 송한이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싸움이 급하고 시체가 물에 가라앉거나 떠내려가 겨우 이백여 개쯤 베었사옵니다." "이놈!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거짓을 고하느냐? 장계에는 수급이 8급 이라고 하지 않느냐? 그것도 '8급이나' 베었다고 한다. 너희들 말과 달리 작은 싸움이 아니냐?" 임금이 장계를 집어던졌다. 원래 어전에 입시한 다른 대신에게 보여주 기 위한 것이지만, 임금은 지금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감정이 넘쳐흘렀 다. "그것은 통제사 좌선에서 벤 수급만을 적은 것이옵니다. 전라우수사, 경상수영 소속 전선들의 전과는 군공마련기에 따로 적혀 있사옵니다. 지 금도 울돌목 해변과 주변 섬은 왜적들 시체와 그들이 흘린 피로 온통 젖 어..." "흠. 그래? 됐다. 어디 이것도 보자." 임금이 송한의 말을 중간에서 자르고 김억추의 장계를 펼쳐 읽었다. 정홍익은 임금이 참 절묘한 순간에 군관들의 말을 자른다고 느꼈다. 원 래 승첩장계를 가져 온 사람은 어전에서 당시 싸움을 자세히 설명하고 여러 가지 질문에 대한 대답도 자세히 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임금 은 오히려 군관의 말을 중간에서 자꾸 자르고 있었다. "오호! 전라우수사가 선두에 서서 용감하게 싸워 왜적 수백 척을 깨뜨 렸다고 했소. 수급도 100여 개가 넘는구려. 암! 이 정도 돼야지. 우수사 가 얼마나 열심히 싸웠는지는 수급 숫자만으로도 알 수 있겠소." "황공하여이다, 전하." 김응추가 잔뜩 상기되어 머리를 조아렸다. 옆에 앉은 군관들은 뜻밖에 불만이 가득한 얼굴들이었는데, 정홍익은 군관들의 표정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오호! 네가 우수사의 승첩장계를 가져왔느냐? 우수사와 좀 닮았구나." "그러하옵니다, 전하. 신은 우수사의 군관 김응추라 하옵니다." "응추는 억추의 친동생이옵니다, 전하." 김응추의 대답에 이어 김응남이 머리를 조아렸다. 원래 친족은 그 장 수의 군관이 될 수 없었다. 그러나 경국대전의 법제가 무너지기 시작한 이래 그런 법규는 사문화된 지 오래였다. 고지식한 이순신 정도나 자식 들을 싸움터에 데리고 다니면서도 정식 군관으로 삼지 않았고, 다른 장 수들은 아들이나 동생 등을 대솔군관으로 삼은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원균의 아들 예에서 보듯이 자식을 휘하 지휘관으로 삼으면 군공 문제에 서 반드시 잡음이 생긴다. "전하! 김억추가 공을 세운 것은 모두 전하의 복록이옵니다! 신이 우 수사로 천거한 김억추는 중국 송나라의 구준이나 유기와 같이 유능하고 청렴하고 충성스러운 명장의 풍도가 있사옵니다. 자고로 성군 밑에 명장 이 난다고 하지 않사옵니까?" 김응남의 알랑방귀에 임금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글을 꽤 읽었다고 자처하는 정홍익도 구준과 유기가 누군지 가물가물했다. 옆에 서 다른 기사관이 고개를 길게 빼어 정홍익이 어떻게 썼는지 알려고 초 책을 훔쳐보았다. 송나라는 역대 중국 왕조 가운데 군사적으로 가장 약 체로 평가된다. "이순신은 임진년에 경상도로 가기 싫어했는데 녹도만호 정운이 칼을 빼어 참하려 하자 무서워 어쩔 수 없이 나갔다더군. 정운이 부산포에서 죽은 다음부터 이순신이 적을 치지 않아 걱정이 많았는데, 이젠 김억추 가 있어서 다행이야." 임금이 말을 마치자 낮은 한숨소리가 여기저기에서 흘러나왔다. 정홍 익도 초책에 기록하면서 임금이 과연 진심으로 그런 말을 하는지 의심스 러웠다. 만호가 감히 수군절도사를 참하려 했다니, 말이 되지 않았다. 계사년 이후 큰 해전이 없었던 이유는, 일본수군이 싸움을 극력 피했 을 뿐만 아니라 전쟁이 이미 소강상태에 접어들었기 때문이다. 선조가 전쟁지휘권을 내준 명나라 지휘부에서는 강화협상에 방해된다면서 아예 조선수군의 출전 자체를 막았다. 그래서 정유재란 전까지 지상이든 해상 이든 전투 자체가 없다시피 했다. 역사왜곡은 일본인들만 하는 게 아니 다. 그리고 전쟁 초기, 이순신은 전라좌도 해안을 수비하는 책임을 진 전 라좌수사였다. 전라감사나 조정의 명령 없이는 다른 해역으로 갈 수 없 었다. 그러나 선조는 이순신이 전쟁초기에 즉각 경상도 해역으로 출전하 지 않은 것을 이후 내내 집요하게 문제삼았다. "지당하십니다, 전하!" 김응남이 어전에서 가장 자주 한 말이었다. 정홍익은 왜 수군이 서해 안으로 밀고 올라올 지도 모르는 판에 지금 무슨 느긋한 이야기를 하는 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임금 말처럼 이번 싸움이 겨우 왜적 몇 명 잡은 것이라면 조선수군이 엄청난 숫자의 왜 수군을 막을 방법이 더 이상 없 을 텐데, 임금은 의외로 느긋한 표정이었다. "그런 명장을 천거했으니 좌의정이야말로 진정 충신이오. 하하!" "황공하여이다, 전하! 성상께서 장수를 찾으시는 마음은 한나라 황제 문제가 옛날 어진 장수 염파廉頗와 이목李牧 같은 장수가 없음을 탄식하 던 뜻과 다르지 않사옵니다. 신하된 도리로서 어찌 그런 장수를 보고도 천거하지 않겠습니까?" 자화자찬이 이어지자 정홍익은 닭살이 돋는 것 같았다. 이항복은 임금 이 안 보는 사이에 등허리를 벅벅 긁었다. "훌륭하오. 우수사의 장계를 가져온 김응추에게 적당한 고을 수령 자 리를 천거하도록 하시오. 되도록 큰 지방으로." "성은이 망극하여이다, 전하." 대신들이 일제히 머리를 조아렸다. 일단은 비변사 당상들이 장계와 군 공마련기를 살펴 논의해야 하겠지만, 김응추에게는 임금의 체면에 걸맞 은 자리를 줘야 할 것이다. "응? 그런데..." 김억추가 보낸 장계를 마저 읽던 임금이 눈살을 찌푸렸다. 정홍익은 어전회의가 파한 다음 그 장계를 볼 수 있었다. 수군은 체질상 맞지 않 으니 용감하게 돌격하여 공을 세울 수 있는 육전 장수가 되고 싶다는 김 억추의 희망이 장계에 피력되어 있었다. 임금이 고개를 번쩍 들더니 군관들을 쏘아보았다. 불쾌한 표정이 역력 히 드러났다. "너희들은 왜 아직 안 나가고 거기 있느냐? 어서 물러가거라!" 군관들이 우물쭈물하다가 큰절을 하고 몰려나갔다. 김응추는 어깨를 펴고 발걸음도 가벼웠지만 다른 군관 셋은 잔뜩 실망한 표정이었다. 그 들 등에 대고 임금이 노성을 질렀다. "통제사는 아무한테나 승첩장계를 들려 보낸다니까! 그깟 조그만 승리 는 장수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 아니더냐? 저것들은 잡으라는 왜적은 안 잡고 떼로 몰려다니면서 기껏 장계나 들고 다녀? 나한테 도대체 뭘 바라 는 거야? 에잉!"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씩씩거리는 임금의 숨소리가 정홍익이 있는 자 리까지 들렸다. "전하! 이번 싸움에 공이 큰 장수들을 골라 마땅히 상을 내려야 할 줄 로 아옵니다." 이항복이 눈치 없게 나섰다. 그토록 싸늘하게 분위기를 몰고갔건만 소 용이 없자 임금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 그러나 이항복은 여전히 모 르는 척했다. 정홍익이 알기로 이항복은 굉장히 똑똑하고 눈치도 빠른 사람이었다. 그러나 원리원칙을 목숨처럼 중시했다. "특히 싸움을 이끈 통제사 이순신에게 가자加資를 함이 마땅한 줄로 아뢰오." "으음. 이순신은 벼슬이 이미 높으니 벼슬 말고 다른 방법으로 상을 내리는 방법이 없을까?" 정홍익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임금의 말은 분명히 틀렸다. 당시에는 공을 세운 문관이나 무관에게 벼슬을 올리는 것이 가장 일반적이고, 그 보다 못할 경우에는 말이나 베 등 물건을 상으로 내린다. 그러나 이 싸 움이 물건으로 상을 내릴만한 작은 싸움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결국 임금의 말은 이순신에게 벼슬을 올려주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이 말을 다르게 알아들을 신하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뻔히 그걸 알면서 도 말하는 사람이 있었다. 이항복이었다. "전하! 이순신은 벼슬이 높지 않사옵니다. 백의종군을 하다가 통제사가 되었고, 조정에서는 이순신에게 이전의 직급을 되돌려 주지 않았을 뿐만 이 아니라 정3품 당상관 절충장군 수사로서 통제사를 겸했기 때문입니 다. 휘하 수사들을 거느리게 하려면 반드시 벼슬을 올려줌이 좋을 듯하 옵니다." 어전에 충만한 팽팽한 긴장감에 정홍익은 숨이 막힐 것 같았다. 한참 시간이 흐른 다음 임금이 간신히 입을 열었다. "허험! 그런가? 그럼 비변사에서 논의해보도록 하게. 가능하면, 벼슬 말고 다른 상을 한번 생각해보고." 충무공의 조카 이분이 지은 행록에는 '이때 벼슬을 올리고자 하였으나 이순신의 벼슬이 이미 높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어 벼슬을 올리지 않았 다'고 기록되어 있다. 주어가 생략되어 있다는 것이 무척 의미심장하다. 다른 수군장수들은 그해 11월에 벼슬이 올랐지만 이순신이 상을 받아 벼슬이 오른 것은 다음해 5월이다. 그것도 중국장수인 경리 양호의 압력 을 받아서였다. 선조는 명나라 군대의 '직산대첩' 때문에 나라를 다시 세운 은혜(再造 之恩)를 입었다면서 양호에게 큰절을 하려 했지만, 양호는 자기는 공을 세우지 않았으니 절을 받을 필요가 없고, 이순신은 좋은 사람이라고 임 금을 타이른다. 임금은 그 자리에서도 명량대첩의 의미를 평가절하했음 은 물론이다. = 영등포전선, 조계종 영등포만호 조계종은 뱃전에 서서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차가운 바닷 바람이 뺨을 스쳐 지나가고, 수하 군관들이 뭐라 외치는 것 같았지만 조 계종은 계속 기억을 더듬었다. 조계종은 판옥선을 지휘해 나주를 지나 동쪽 흥양 근처에서 척후활동 을 하는 중이었다. 해남 땅에서는 조선수군 병력 일부가 뭍에 올라 미처 후퇴하지 못하고 고립된 왜적들을 한창 소탕하고 있었다. 조계종은 한참 고민했다. 둔한 머리로 어젯밤 거제현령이 남몰래 조심 스럽게 한 말 뜻을 풀려니 골머리가 지끈지끈 아팠다. 어렴풋한 기억에 따르면 거제현령 안위가 통제사를 내세워 뭔가 새롭고 크고 좋은 일을 하자고 꼬드기는 것 같기도 했다. 조계종은 똑똑한 거제현령이 한 말이 라면 당연히 맞겠지 하면서 그냥 맞장구쳤던 기억이 났다. 그런데 아무 래도 뭔가 이상했다. "만호 어른! 왜선들이라니까요!" 누군가 마구 흔들어서 정신을 차리니 눈앞에 군관이 있었다. 다급해진 군관이 자꾸 왜선이라고 외치자 조계종이 즉각 조선수군 판옥선 지휘관 으로서 당연한 명령을 내렸다. "뭐? 그래? 그럼 돌격! 왜선들을 공격하라!" "허억! 왜선들이 바다를 새까맣게 덮었는데도요? 도망쳐야 된다고요!" 그제야 정신을 차린 조계종이 주변 바다를 살폈다. 50척이 넘는 왜선 들이 바다를 뒤덮고 있었다. 그런데 왜선들은 어쩐지 머뭇거리는 것 같 았다. 정신을 가다듬은 조계종이 잠시 머리를 굴렸다. 후퇴할 것인가, 싸울 것인가. 생각을 하자마자 금세 골치가 아파진 조계종은 무작정 칼을 빼 들었다. 이럴 땐 단순한 게 최고였다. "저 원수들! 내 저놈들을 살려보내지 않겠노라. 별망선을 본진으로 보 내라! 우리는 여기서 싸운다!" "어이쿠! 나으리! 단 한 척으로 저 많은 왜선들을 상대로 싸운다고요? 만호 나리는 통제사가 아닙니다!" 군관이 울상을 지으며 주저앉았다. 그러나 조계종은 일단 한번 내뱉은 말을 절대 주워담지 않는 성격이었다. "싸운다고 하지 않았느냐? 도훈도! 어서 배를 앞으로 몰아라! 돌격하 라!" 조계종이 늠름하게 칼을 휘둘러 독전했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포수들 이 냅다 화포를 연속 발사했다. 전면과 좌현에서 쏜 8발 중에 2발쯤 왜 선에 맞은 것 같았다. 판옥선은 내키지 않는 듯 어기적거리며 왜선들을 향했다. 아직도 격군 들은 설마 하며 천천히 노를 저은 탓이었다. "아! 왜선들이 도망칩니다!" "추격하라! 한 놈도 남기지 마라!" 조계종이 예상했다는 듯이 당당하게 명령했다. 그러나 군관은 뭔가 이 상하다는 듯이 조계종의 갑옷 소매를 붙잡아 말렸다. "만호 나리! 당연히 함정이 아니겠습니까?" "흥! 우리 한 척을 상대로 왜적들이 구태여 함정을 팔 필요가 있겠나? 돌격하라! 화포를 쏘아라!" 명령을 내린 다음에야 조계종은 자기가 한 말뜻을 이해하고 남몰래 미 소지었다. 급한 김에 내뱉은 명령인데 무척 그럴듯했다. 조계종은 자기 머리가 아주 잘 돌아가는 것 같아 내심 뿌듯했다. "왜적들이 부리나케 도망갑니다! 아! 또 맞았습니다!" 군관이 신이 나서 보고했다. 역시 조계종이 예상한 대로 왜선들이 함 정을 판 것 같지는 않았다. 다만 잔뜩 겁에 질려 총 한방 못 쏘고 뿔뿔 이 흩어져 도망갈 뿐이었다. 걸음아 날 살려라였다. "한 척이 또 침몰합니다! 왜적들이 바다로 뛰어듭니다!" 군관은 거의 춤을 추었다. 격군들도 신이 났는지 힘차게 노를 저어 판 옥선은 거의 바람처럼 달려가 왜선을 쳐부쉈다. 화포에 맞아 옴짝달싹 못하는 또 다른 왜선에서 왜군들이 연달아 바다로 뛰어들었다. "만호 나리! 수급을 거둬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봐! 공을 세웠으면 됐지 수급을 얻어 자랑해서 뭐하게? 통상 말씀 처럼 그 시간에 왜적 하나라도 더 죽여야 해!" 조계종이 군관을 윽박질렀다. 그러나 군관은 전혀 반발하지 않고 그저 씩 웃었다. 이제는 예전처럼 전공을 내세워 출세하려고 발악하는 경우는 없었다. 영등포전선은 승리의 북을 울리며 사후선들의 인도를 받아 발음도 선 창에 도착했다. 판옥선에서 내린 조계종과 군사들은 어깨를 펴고 보무도 당당히 걸었다. 사람들이 무슨 일인가 싶어 선창으로 몰려오자 조계종은 콧대가 하늘을 찔렀다. "우 부사! 통제사는 어디 계시오?" 조계종이 잔뜩 거드름을 피우며 물었다. 황당해하는 순천부사 우치적 의 표정을 살피고 조계종은 내심 무척 통쾌했다. 오늘은 우치적에게 큰 소리를 칠 수 있는 날이었다. 무슨 일인가 몰라 눈을 둥그렇게 뜬 순천부사는 통제사가 언덕에 있다 고 했다. 조계종은 한달음에 뛰어 올라갔다. 10월 11일의 해는 이미 지고 중천에는 달이 부풀어오르고 있었다. 통 제사는 언덕에 홀로 앉아 뭔가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조계종이 다 짜고짜 절부터 했다. "사또! 척후장 영등포만호 조계종이 보고 드립니다." 통제사가 놀라 고개를 돌렸다. 조계종은 나름대로 가장 간단명료하게 보고했다. "왜적들이 우리 수군을 굉장히 싫어합니다." 통제사가 눈을 멀뚱멀뚱 뜨고 그게 뭔 소린가 생각하는 눈치였다. 통 제사는 워낙 머리가 좋은 사람이니까 다 알아들었겠지 하며 조계종이 다 시 절을 한 다음 자리를 물러났다. 언덕을 뛰어내려가는 발걸음이 무척 가벼웠다. 뒤에서 무슨 말이 들려 오는 듯도 했지만 조계종은 즐거운 마음에 계속 뛰어갔다. "여보게!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에필로그 = 전라도 구례, 안위 1601년, 전쟁이 끝난 지 3년만에 조선 땅은 다시 예전의 봄처럼 활짝 피어났다. 물가에 산수유 지고 산그늘에는 진달래가 왜란 때 죽어간 사 람들이 땅에 적신 핏방울만큼 가득 피었다. 섬진강 나루를 거룻배 타고 건너오는 행렬이 길게 이어졌다. 대갓댁에 시집가는 행렬인지 꽃가마가 중간에 서고 뒤에는 짐을 잔뜩 짊어진 짐꾼 도 무척 많았다. 언덕에서 말을 타고 그 행렬을 지켜보는 사람들이 있었 다. "안 영감. 비록 첩실이라 하나 사대부의 부인을 가로채는 짓이오. 대명 률大明律에 의하면 강간범은 목 졸라 죽이는 교형에 처하며, 강간 미수 범은 장형 1백대에 유형 3천리를 병과하오. 화간으로 인정되더라도 당대 에 다시는 벼슬을 하지 못할 수고 있고, 자손들이 천민으로 떨어질 수 있소. 알고 계시겠지요?" "거, 참. 무서운 법이오." 안위가 정공청의 말을 가볍게 받아넘겼다. 그런 무시무시한 협박을 했 지만 정공청은 일부러 화려한 갑옷을 입고 멀리 거제도 조라포에서 여기 까지 달려왔다. 행렬의 출발을 안위에게 알려준 것도 정공청이었다. 정공 청은 근무지이탈죄나 강간죄의 방조범으로 처벌될 각오를 단단히 하고 온 셈이었다. "이 통제 공을 모실 사당도 만들어졌소. 그때 내가 전라병사 자격으로 기물을 많이 보냈소. 이제는 아쉬울 것도, 두려울 것도 없소." 정공청이 멀거니 안위를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무과급제자가 아 닌 만호로 시작한 인생, 만호로 끝나게 된다. 그러나 안위라고 해도 좋은 상황은 아니었다. 무관의 최고위직은 병마절도사로 사실상 끝이었다. 훈 련도감이나 5위 등 중앙군 대장은 사실상 문신의 차지였다. 전쟁이 끝났 지만 조선에서는 여전히 무신이 홀대받았다. "안 영감께서 토색질을 잘한다는 소문이 저 멀리 거제 땅까지 들리더 군요. 병사 영감이 탄 이 백마도 어느 아전을 족쳐 빼앗은 것이라면서 요?" 정공청이 은근히 면박을 주었다. 그러나 안위는 대답도 않고 피식 웃 을 뿐이었다. 정공청도 안위가 일부러 그런 짓을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 는 듯했다. 그러나 안위가 군사에 관련된 사항을 다룰 때는 어떤 흠도, 잡음도 없었다. "하긴, 사냥개는 언젠가 솥에 삶기기 마련이지요." "나는 장수일 뿐, 개가 아니오." 두 사람이 서글픈 말을 주고받았다. 잠시 침묵이 이어졌고, 그 사이에 꽃가마 행렬이 앞길에 나타났다. "자! 시작해보겠습니다. 허험!" 군관 김국이 목청을 가다듬었다. "어허~ 물렀거라아! 종2품 가선대부, 전라도 병마절도사 안위 영감 나 리 행차시다! 물렀거라아!" 북이 울리고 나발 소리가 천지에 메아리쳤다. 울긋불긋한 깃발을 든 병사들이 좁은 길을 가득 메우고 한껏 위용을 뽐내며 꽃가마 행렬 정면 으로 향했다. 가마 행렬이 길옆으로 비켜서고, 안위가 가마를 막 지나가 려는 순간이었다. "멈춰라!" 안위가 손을 들어 행차를 정지시켰다. 말이 길게 운 다음 투레질을 세 차게 했다. "흠! 이 좋은 봄날에 백년가약이라. 좋지. 어느 땅 어느 댁으로 가는 규수인가?" "옥과현의 원님 댁으로 가옵니다." 꽃가마 옆을 따르던 중년 여인이 머리를 조아렸다. 볼과 목에 욕심 대 신 살이 덕지덕지 붙은 듯했다. "호오! 옥과현감은 나이 60이 넘고 부인이 아직 정정하신 걸로 아는데, 그 댁 손주며느리로 가시는가?" "그건, 아니옵니다." "그럼 며느리?" "그것도 아니옵니다." 중년 여인의 목소리가 기어 들어갔다. 안위가 짐짓 신부 행렬의 앞뒤 를 살피다가 이제야 알겠다는 듯이 무릎을 쳤다. "옳거니! 이제 보니 조랑말에 탄 신랑이 없구먼?" 중년 여인은 입을 옹 다물고 묵묵부답이었다. "그래? 알겠다. 옥과원은 그 연세에 꽃다운 젊은 측실을 두다니, 참 대 단하시구먼. 현감이 토색질을 열심히 한 모양이야. 나는 병란 중에 처를 잃고 나서 아직 장가도 못 갔는데. 역시 토색질하는 데는 무관 떨거지 따위보다는 당연히 고을 수령이 최고야." 안위가 은근히 도발했다. 그러나 감사와 급이 같은 병마절도사에게 무 엄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여기에 아무도 없었다. 안위가 꽃가마에 다가가 갸웃거렸다. "신부 얼굴을 보여주지 않겠나?" "영감! 내외가 구별되는데 어찌 가마를 열 수 있겠습니까?" 중년 여인이 뜻밖에 단호하게 거부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정공청이 칼을 확 뽑아들었다. 시퍼렇게 날이 선 환도가 목을 겨누자 중년 여인이 놀라 털썩 주저앉았다. 정공청은 맡은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네 이년! 어느 안전이라고 감히 앙탈이냐? 너는 이 어른이 누군지 아 느냐?" "이, 이 통제장군과 함께 명장으로 방명을 드높인 전라병사 나리가 아 니신지요. 제발 칼을 거두어..." "그럼 나에 대한 소문도 익히 들어서 알고 있겠구나. 지방 수령들과 부호, 아전들이 내 밑에서 설설 긴다는 사실도 말이다." 분위기가 살자 주인공이 다시 나섰다. 중년 여인의 안색이 점점 하얗 게 변했다. "내가 벼슬살이를 오래 하다 보니 백성들 고혈을 쥐어짜는 토색질보다 더 재미있는 것이 강간질이더라. 옥과원은 나이가 많아 그 좋은 강간질 은 못하고 만만한 백성들 상대로 토색질만 하나? 그럼 첩은 뭐하러 두 지? 젊은 첩을 간수할 힘도 없을 텐데." 군사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안위를 깊이 신뢰하는 군사들의 사심 없는 웃음이었지만 중년 여인이 보기에는 이들이 모두 성에 굶주린 짐승처럼 보였다. "자! 너희들은 군사들의 창칼에 이슬이 되어 사라지겠느냐, 아니면 신 부를 내놓겠느냐? 병마절도사 나리는 정유년에 왜적 수천을 한칼에 무찌 른 분이시다. 이 통제 공과 전라병사 나리가 안 계셨다면 지금쯤 너희들 도 어느 계곡에서 썩어가고 있을 터! 어서 신부를 내놓지 못하겠느냐?" 정공청이 가마꾼들에게 칼을 겨눴다. 말을 타고 번쩍거리는 갑옷을 입 은 장수가 칼을 휘두르자 가마꾼들은 머리를 땅에 처박고 벌벌 떨었다. "사또 나으리. 지체 높으신 분이 이 어인 망발이시옵니까?" 꽃가마 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였다. 안위는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안위는 요동치는 가슴을 간신히 다스리며 일부러 으름짱을 놓았다. "허어! 꾀꼬리 같은 목소리로다. 목소리가 예쁘면 얼굴도 예쁠 터! 내 반드시 신부 얼굴을 보고야 말리라. 신부는 가마에서 나오라! 이 사람들 을 살리고 싶지 않으냐?" "하오나 병마절도사는 그 도의 백성들을 외적으로부터 지키는 일이 맡 은 바 직분일 터, 어찌... 어머!" 족두리를 쓰고 연지곤지를 찍은 신부가 활옷으로 얼굴을 가리고 가마 에서 나오다가 놀라 입을 다물었다. 신부 얼굴은 눈물자국으로 얼룩져 있었다. 둘이 한참 동안 쳐다보다가 안위가 먼저 정신을 차렸다. "오호~ 과연 신부가 꽃처럼 어여쁘도다. 젊음을 왜적과의 싸움에 바친 이 사나이의 차가운 가슴에 뜨거운 불을 지피는도다. 내가 삭탈관직을 당하고 양반안에서 이름이 지워지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이 꽃다운 신 부를 얻고야 말리라!" 신부가 치렁치렁한 활옷으로 입을 가리며 슬며시 웃었다. 헛기침을 한 안위가 다시 무서운 목소리로 신부를 얼렀다. "신부는 듣거라! 네 한 몸 희생해 다른 이들을 살리겠느냐, 아니면 정 조를 지켜 짐꾼들과 함께 해골이 되어 길섶에서 나뒹굴겠느냐?" "사또! 다른 이들은 죄가 없으니 살려 주시옵소서." 신부가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자 중년 여인이 달려와 호들갑을 떨었다. "아씨! 아니 되옵니다. 현감 어른이 주인 나리께 보낸 돈이 얼만데..." 그 중년 여인은 당장 군사들에게 길옆 숲으로 끌려갔다. 중년 여인은 군사들에게 몇 대 얻어맞는지 죽는소리를 내질렀다. 군사들이 곧 손을 털며 숲을 나왔다. 가마꾼들이 멍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 안위가 헛기침 을 했다. "흠! 그럼 신부는 내 뒤에 타거라. 어험!" 그러나 치렁치렁한 혼례복을 입은 신부가 키 작은 조랑말도 아닌 전마 를 타기란 쉽지 않았다. 속치마로 무릎까지 내려오는 두루치기 치마 위 에 무지기, 그 위로 밑단에 금박을 넣은 붉은 스란치마를 입고 위에는 자주색 회장을 넣은 삼회장 노랑저고리를 입고 있었다. 거기에 겉옷으로 활옷을 덮었다. 신부가 잠시 망설이자 정공청이 주저 않고 허리를 숙였다. 등을 밟고 안위의 말에 오르라는 뜻이었다. 한 걸음 한 걸음, 가마 행렬에서 멀어질수록 안위는 출세길이 멀어진 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모든 백성이 배불리 먹고살게 하겠 다는 오랜 꿈이 멀어진다는 사실, 벼슬아치들이 주상전하라 부르는 시기 심 많은 정신병자를 쫓아낼 가능성이 사라진다는 것도 잘 알았다. 안위가 역적이 될 각오를 하고 그 꿈을 밝힌 정유년 말에 이 통제사는 한 마디로 이렇게 말했다. 망령되다고. 역시나 고지식한 통제사였다. 그 러나 안위는 서두르지 않고 전쟁이 끝나길 기다리기로 했다. 그런데 그 기나긴 전쟁 마지막 날에 이 통제사는 죽고, 안위는 살아남았다. 안위는 한동안 끝없는 절망에 빠졌다. 그리고 그 꿈은 지금 안위의 허리를 꼭 잡은 손길에 의해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안위가 말을 달리면서 슬쩍 뒤돌아보았다. 다시는 놓치지 않겠다는 듯 안위의 허리를 꽉 껴안은 봄꽃이는 그 예쁜 미소로 활짝 웃고 있었다. 안위는 잠시 아찔했다. 개나리, 진달래가 가득 핀 봄날 개울가도 이렇게 아름답지는 못하리라. 봄꽃이의 미소를 다시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안 위는 모든 것을 잃을 각오가 되어 있었다. 안위가 어느 현감에게 첩으로 시집가는 여자를 빼앗아 데리고 살았다 는 것이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전라병사 안위의 신부탈취 사건'에 대한 간단한 내용이다. 화병으로 그 현감이 죽은 얼마 후 안위는 파직 당했고, 안위는 다음에 벼슬길에 오를 때마다 대간들의 탄핵을 받아 쫓겨난다. "방금 일은 울돌목 싸움에서 통제사를 구하기 위해 달려갈 때보다 더 한 용기가 필요했다. 아느냐?" 봄꽃이가 입을 가리며 웃었다. 하늘은 더 없이 푸르고, 산에는 진달래 가 가득 피어났다.